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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李柬, 1677-1727)

이간(李柬)                                                                  PDF Download

이간은 본관은 예안(禮安)이고 자는 공거(公擧)요 호는 외암(巍巖)이다. 아버지는 부호군 이태형(李泰亨)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낙론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34세(1710, 숙종 36) 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37세(1713) 이유가 호서 사인(湖西士人) 이간 등 한두 사람을 등용할 만하다고 세자의 시강원으로 추천하니 숙종이 옳게 여겼다.

39세(1715) 이간을 자의(諮議)로 삼았다. 교리(校理) 홍석보(洪錫輔)가 상소 말미에 “자의 이간은 나이가 젊고 덕망을 쌓지 못했는데 갑자기 높이 의망하였으니 너무 갑작스럽다는 논의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했다.

40세(1716) 사간원에서 “자의 이간은 본디 범용한 사람으로 일찍이 학문이 있다는 일컬음이 없었는데 한갓 남의 장점을 추켜세우는 데에 힘쓴 덕분에 외람되게 시강의 줄에 흠을 내게 되었으므로 물정이 놀라하고 비웃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그치지 않으니, 청컨대 개정하소서.” 청했지만 숙종이 따르지 않았다.

49세(1725, 영조 1년) 영조가 이간에게 “산림에서 독서하였으니, 반드시 학문하는 요점을 알 것인데, 내가 듣고자 한다.” 했다. 이간이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학문하는 본말은 지와 행이라고 합니다. 지행 가운데 각기 큰 이치가 있고, 한 물건 한 일의 이치는 모두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나 심신에 일용하는 윤상과 기강 상에는 반드시 먼저 곧바로 결단하여 이해해야 하니 이것이 치지(致知)의 큰 이치입니다. 행(行)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선(善)과 하나의 행실을 진실로 마땅히 극진하게 해야 하나 수기(修己)에 나아가 말하면 천인(天人)과 이욕(理欲)의 나눔에서 곧바로 판단하여 구별해 내어야 하며, 치인(治人)에 나아가 말하자면 선을 선하게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겨 진실 되게 힘을 쓰면 이것이 역행(力行)의 큰 이치입니다. 학문을 하면서 그 큰 이치를 먼저 하지 않으면 학문하는 요점이 아닐까 싶으니 맹자가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워야 한다.’고 한 것이 이것을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영조가 “말을 어찌 많이 해야 되겠는가? 의리의 대체는 한 마디면 다 된다. 듣건대 노모가 있다 하니 지금은 우선 내보내나, 강학하는 사람을 얻기가 매우 쉽지 않다. 조만간 올라와 강론하여 내가 미치지 못한 점을 보완하도록 하라.” 했다.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여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를 초빙하시되, 직명(職名)의 유무를 막론하고 별유(別諭)로 부르시고, 직사(職事)를 강제로 맡기지 마시고, 경연에서 윤번으로 시강하게 하소서.” 하면서 “이간(李柬)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李頤根)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尹鳳九)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韓元震)의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50세(1726) 이간이 경연관으로 하명 받고 상소하길, “신은 생각건대, 옛사람은 순수하고 성실함이 남음이 있어서 질박을 이룸이 심후하고, 총명을 발휘하지 아니하여 수고롭고 겸손함이 여유 있으며, 지려(志慮)가 정밀하고 전일하여 힘을 내어 일하는 까닭에 성인의 말을 듣지 않아도 그 마음이 진실로 이미 정성스러웠습니다. 한 가지 말을 듣기에 미쳐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믿음이 참으로 어린애가 자애로운 어미를 만남과 같고, 충족을 구하는 성의가 참으로 기갈(飢渴)에 음식을 기다림과 같으며, 반드시 그렇게 될 기미가 참으로 나그네가 집으로 달려감과 같을 것이니, 대저 그렇게 하고 비록 군자가 되지 않고자 한들 될 수가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방도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주자(周子)가 말하기를, ‘그 마음을 성실히 할 뿐이다.’하였으니, 마음이 성실하면 어진 인재가 돕고 어진 인재가 도우면 천하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마음은 성실함이 요점이 된다.’고 하였으니, 아! 깊은 이치에 통달한 말이 어찌 그다지도 지극히 절실하고 지극히 요약하며, 반드시 이루는 방도가 어찌 그다지도 지극히 간략하고 지극히 쉬운지요?” 했다.

51세(1727) 졸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3년 윤3월 기사에 졸기가 있다. “경연관 이간이 졸하였다.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초상과 장사에 쓸 것을 넉넉하게 제급하도록 하였다. 이간은 선정신 권상하의 문인으로, 경학에 깊어 한원진과 명성이 비등하여 경연관으로 뽑혔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졸하므로, 임금이 듣고서 놀라 애도하여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경연관들이 증직하는 은전을 내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산림에 있는 사람에게 비록 경연관으로 초계하게 하기는 했지만, 작록으로 묶어 놓으려고 하지 않음은 대개 그의 소원이 아닌 것을 억지로 시키면 도리어 예대하는 도리에 어그러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지금 죽은 뒤에 증직한다면 생존과 사망에 따라 예로 대우하는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이 되니 증직할 것 없다.’ 하고 제술관에게 명하여 제문 내용에 오늘 내린 분부로 말을 만들어 제진(製進)하도록 하였다.”

이간 사후 1777년(정조 1년) 이조참판, 성균관좨주에 추증되고 순조 때 이조판서가 증직되었다. 1810년(순조 10년)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순조실록> 순조 10년 12월 기사에 시호를 내리는 내용과 더불어 평이 나온다. “이간의 호는 외암인데, 문순공 권상하를 사사하였고 학문을 많이 하고 행실이 돈독하여 큰 선비가 되었다. 영조조에 유일로써 자의를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남당 한원진과 함께 동문수학하였는데,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해 서신을 왕복하여 논변하다가 마침내 대립하기에 이르러 호학(湖學)과 낙학(洛學)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간을 받드는 자를 낙학이라 하고 한원진을 받드는 자를 호학이라고 하였다.”

이간은 한원진과 더불어 호락논쟁의 맹장이다. 조선조 성리학은 중기를 고비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대립 이후 치열한 논변이 벌어졌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사단칠정 논변이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논변으로 이행됨으로써 성리학의 불꽃이 재연되었다. 그것은 주기적인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畿湖學派) 안에서 다시 주리와 주기로 대립하여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권상하의 문하에서 야기된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이다.

논쟁은 처음에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상(五常)을 금수(禽獸)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오상편전론(五常偏全論)과 사람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발동하지 아니하였을 때[未發]의 상태, 심체(心體)에 기질(氣質)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미발심체순선론과 미발기질지성유선악론으로 대립이 생겼다. 본격적인 논쟁은 권상하 문하의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권상하가 한원진의 설에 찬동하자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전국의 석학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이재(李縡), 박필주(朴弼周), 어유봉(魚有鳳) 등의 낙하(洛下: 서울) 학자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다 같이 오상을 가진다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는 기질의 선악이 없으므로 본래선(本來善)이라 하여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하였다. 이것을 낙론(洛論) 또는 낙학(洛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비록 이간은 호서, 즉 충청도에 살았지만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낙하, 즉 경기도와 서울에 많이 있었으므로 낙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원진의 설을 찬동하는 권상하, 윤봉구(尹鳳九), 최징후(崔徵厚), 채지홍(蔡之洪) 등의 호서학자(湖西學者)들은 인성은 오상을 가지지만 물성은 그 오상을 모두 가지지는 못한다면서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다는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역설하였다. 이것을 호론(湖論) 또는 호학(湖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호락론자들은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에 속하므로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철칙으로 신봉하였다. 이통기국설은 주희(朱熹)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에서 유래한다. ‘이통(理通)’이란 이는 인(人)과 물(物)에 공통적·보편적인 것으로서 동일하게 상통한다는 것이고, ‘기국(氣局)’의 기는 인과 물에 국한적·특수적인 것으로서 상이하다는 것이다.

이간은 주리적 입장에 서서 이통과 이동(理同)을 내세움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구동(俱同)으로 보아 한 가지로 오상을 가진다는 동시오상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일관시켰다. 이에 대해 한원진은 주기적 관점에서 기국과 기이(氣異)를 강조함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상이한 것으로 보며, 그것은 기질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라 주장하여 인기(因氣)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

이간은 성(性)은 곧 이(理)이므로 인성과 물성은 모두 이로서의 태극(太極), 천명(天命)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사덕(四德)을 본성으로 품수함으로 말미암아 오상의 본연(本然)을 구유하므로 그들 본성은 이통으로 동시오상이라고 보았다. 다만 인성과 물성이 상이한 것 같이 보이는 것은 그들 기질의 국한성, 즉 차이에 따라서 상이하게 드러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과 물의 본성, 즉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동시오상으로서 구동이요, 또 사람의 미발심체는 본선이라는 것이다. 이는 홍대용(洪大容) 등 북학파에게 이어져 전통적 화이론(華夷論)의 극복에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한원진은 인성과 물성은 각기 그 기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으로 상이한 것이며 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각기 인과 물의 본연지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인물의 본성 즉 그 기질지성은 인기질(因氣質)로서 상이하다. 따라서 사람의 미발심체도 기질지성으로서 선과 악이 공재한다는 유선악론을 주장하였다.

이 호락논쟁은 이간 이후 오래도록 계속되었지만 끝내 귀결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성리학의 근본 문제들이었고, 또 그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적 방법론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것 등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한원진(韓元震, 1682-1751)

한원진(韓元震)                                                        PDF Download

 

한원진은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덕소(德昭)이고 호는 남당(南塘)이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한유기(韓有箕)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박숭부(朴崇阜)의 딸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8세에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문장파악이 매우 느렸으나 수년이 지나자 한번 본 문장은 곧바로 암기할 정도로 뛰어났다. 12세에 조부의 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상례를 지켰다.

36세(1717) 학행으로 천거 받아 영릉참봉으로 관직에 나갔다. 40세(1721)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44세(1725, 영조1년)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하여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앞서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여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를 초빙하시되, 직명(職名)의 유무를 막론하고 별유(別諭)로 부르시고, 직사(職事)를 강제로 맡기지 마시고, 경연에서 윤번으로 시강하게 하소서.” 하면서 “이간(李柬)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李頤根)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尹鳳九)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韓元震)의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45세(1726) 경연에서 영조가 호포(戶布), 결포(結布), 구전(口錢), 유포(遊布)의 이해와 편리 여부를 물었는데, 한원진이 네 가지 법 중에 호포(戶布)가 가장 시행할 만하다고 대답했다. 영조가 칭찬하여 좋게 여겼다. 한원진이 물러나가자, 시독관 김용경(金龍慶)이 말하기를, “산야에 있던 사람은 물러가기는 쉽게 여기고 나오기는 어렵게 여기는 법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심으로 머물러 있게 하여 자주 경연에 입시하게 하소서.” 하니 영조가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했다.

50세(1731) 영조가 경연에서 명 태조가 맹자를 문묘에서 출향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말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삼가 길에서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전하께서 경연에서 ‘명 태조가 맹자를 문묘에서 출향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합니다. 먼 외방에 떠도는 말이어서 비록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혹 털끝만큼이라도 그렇다면 거의 한 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맹자의 어짊은 한나라 이후로 매우 존상하였는데 명 태조가 갑자기 배척을 가하였고, 이로 인하여 여러 유현을 더욱 경멸하여 주자를 오활한 노유라고 지목했으며, 또 친히 논문을 저술하여 경설을 무너뜨렸습니다. 처음에 가르친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명나라의 세대가 마치기까지 도술이 밝혀지지 않았고 이단이 분분하게 일어났으며 의리가 날로 어두워지고 습속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유자라고 이름 한 자들이 걸핏하면 정주에 대해 이론을 세우고 성현을 능가하여 세도가 무너지고 화란(禍亂)이 그 틈을 탔으니 그 혹심한 화가 거의 서진(西晉)의 청담보다 심했습니다. 이는 비록 명 태조가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그 유폐의 원인이 되었으니 백세 뒤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장이 들어가자, 영조는 노하여 “한원진은 황명 태조와 맹자를 서로 거론하여 감히 별도의 의리를 만들었으니 참람하고 망령됨이 심하다. 한원진은 산림에 있는 사람으로 역시 시상(時象) 가운데 들었으니 내가 매우 그르게 여긴다.” 하였다.

60세(1741)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으로 복직하여 그 뒤 장령,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69세(1750) 판의금 원경하(元景夏)가 권상하가 먼 앞날을 기대하여 한원진은 산림의 경제인(經濟人)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자, 영조가 “내가 일찍이 이 사람을 보았는데, 비단 학식이 고명(高明)할 뿐만 아니라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 했다.

70세(1751) 졸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27년 2월 기사에 그의 졸기가 있다. “한원진의 자는 덕소로, 선정신 권상하의 문인이다. 임금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뽑혀서 경연관이 되었는데, 한원진은 임금이 새로 대위(大位)를 계승하여 협조를 구하는 마음이 있으시니 초야의 선비가 한갓 고상한 뜻만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하여 드디어 부름에 나아갔다. 그때 세변(世變)을 겪어 의리가 밝지 못하였는데, 한원진은 생각하기를, ‘성무(聖誣)를 분변하고 징토(懲討)를 엄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급선무이다.’라고 여겨 들어가서는 고하고 나가서는 상소를 올려 간곡히 청해 마지않았다. 임금이 본래 당론을 싫어하고 조제하려는 뜻이 있어 한원진이 진언할 때마다 비록 칭찬하고 권장하여 표시하였지만 실은 채용하지 않았으니, 한원진이 누차에 걸쳐 상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고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명나라 태조가 맹자를 출향한 일을 언급하면서 맹자의 말로써 잘못되었다고 하였는데, 한원진이 상소하여 간함에 있어 말이 매우 절직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심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임금의 뜻을 엿보고는 잇달아 공격하여 마침내 파직을 당하였다. 얼마 안 있어 견서(甄敍)되었으나 권우(眷遇)는 더욱 쇠(衰)하였고 한원진도 또한 세상에 뜻이 없어 호해(湖海)의 물가에 숨어 살았다. 협소한 집은 소연(蕭然)하고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대처(對處)하기를 유연(逌然) 하였고, 날마다 학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밝히면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저술로는 <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 <주서동이고(朱書同異攷)>, <의례보(儀禮補)> 등이 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70세였다.”

한원진 사후 정조 23년(1747)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순조 2년(1802) 문순(文純) 시호를 내렸다.

한원진은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명철하였으며, 『주역』, 『시경』, 『서경』 및 사서(四書), 『태극도설』, 『통서(通書)』, 『계몽(啓蒙)』 및 여러 경세서(經世書) 등을 정독하여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60세(1741) 완성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에 착수했지만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스승인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한 한국성리학의 대표적인 거작이다.

한원진은 후인들이 주자의 논설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공자와 같은 성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도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공자를 알기 위해서는 주자를 알아야 하고 주자를 모르고서는 공자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므로 그 말의 처음과 끝이 한결같지만 주자는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者]이므로 초년설과 만년설이 다를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이 책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주자의 설에 대해 시간상의 선후와 의리(義理)라는 표준을 세우고 말은 비록 다르더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뜻이 서로 통하는 것과 본래는 다름이 없는 것인데 학자들이 다르게 본 것 등으로 나누어 일일이 변정하였다. 특히 조선성리학의 핵심 문제들을 주희의 만년정론(晩年定論)으로 확정해 풀어나가는 것이 특색이다.

첫째는 기는 유위(有爲)로써 발동하는 것이고 리는 무위로서 발동하지 않는다 하여 퇴계학파의 이발(理發)을 부인한다.

둘째는 사단과 칠정에 대해 둘이 모두 본성의 작용[性之用]으로 정(情)이라는 이이의 설을 확인한다.

셋째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서 주자가 인물성상이(人物性相異)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넷째는 이기선후(理氣先後)에서 유행의 측면에서는 이기가 선후가 없고, 본체의 측면에서는 이선기후이며, 발생의 측면에서 보면 기선이후이지만 이기는 원래 선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섯째는 이동기이(理同氣異)에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을 기준으로 이일분수(理一分殊)를 확인한다.

정리하면 이이의 학설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호론(湖論)을 확인하려는 목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물성동이논쟁과 관련해서는 이간(李柬)을 중심으로 하는 낙론(洛論)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주장을 반대하고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대표했다. 한원진은 성삼층설에 입각하여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성은 이(理)가 기질 속에 내재된 뒤에 운위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이이의 생각을 계승하여 인성과 물성은 기질을 관련시키는 인기질의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원진은 이와 같은 사고를 바탕으로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미발심체논쟁에서는 이간이 주장하는 미발(未發)의 심체(心體)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하는 미발심체순선론(未發心體純善論)을 반대하고, 미발의 심체에도 선악의 가능성이 공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미발기질지성유선악론(未發氣質之性有善惡論)을 주장한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두산백과>

권상하(權尙夏, 1641-1721)

권상하(權尙夏)                                                        PDF Download

 

권상하는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서울 출신이다. 자는 치도(致道)이고 호는 수암(遂菴) 또는 한수재(寒水齋)이다. 아버지는 집의 권격(權格)이며 동생은 우참찬 권상유(權尙游)이다.

부친 권격(1620-1671)은 호가 육유당(六有堂)이다. 1650년 진사시를 거쳐 이듬해 정시문과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등용된 후 사간을 거쳐 집의에 오르고, 세자시강원에 오래 있었다. 1665년 당쟁을 일삼은 죄로 정주(定州)에 유배되었다. 1668년 집의로 재기용되었으나, 다시 쫓겨나 충청도 및 황해도의 도사, 고산도찰방, 강릉부사 등 주로 외직에 있었다.

권격은 여가에는 서재를 깨끗이 청소하고 경서와 사서를 읽으면서 스스로 즐기었는데 특히 송나라 유자들의 저서를 가장 좋아하였다. 장재(張載)가 “말에는 교양이 있고 동작에 법도가 있으며 낮에는 한 일이 있고 밤에는 얻음이 있으며 잠깐 동안에도 마음에 둠이 있고 숨 쉬는 사이에도 본성의 수양함이 있어야 한다[言有敎動有法晝有爲宵有得瞬有存息有養]’이라는 말을 취하여 서당의 이름을 육유(六有)라 하였다. 후에 황강(黃江)의 위에다 은거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떠난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권상하가 제자들을 기르며 강학한 곳이 바로 황강이다. 송시열과 권격의 집안은 삼대(三代)의 교분이 있었다.

20세(1660)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일찍부터 송시열과 송준길 문하에서 유학했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31세(1671) 어버이 상을 당한 뒤로 시끄러운 세상을 영원히 단절하고 자신을 위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상복을 벗자 송시열을 따라 화양에서 사서, 역학계몽, 계사전, 홍범편 등을 강론했다.

35세(1675) 숙종 원년에 송시열이 북쪽으로 귀양 가자 여러 문인들과 같이 상소를 올려 변론하였으며, 가족을 이끌고 청풍(淸風)의 협곡으로 들어가 조용히 살면서 독서하고 사색하며 종신토록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40세(1680) 송시열이 해도(海島)에서 돌아오자 찾아가 문안을 드리고 그때부터 10년간 거의 절반은 화양의 문하에 있으면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송시열이 사문(斯文)에 인재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여 선생의 거실에다 수암(遂菴)이라고 써서 붙였는데, 이는 설선(薛瑄)의 말을 취한 것이었다. 또 한수재(寒水齋)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주자 감흥시(感興詩)의 말을 사용하여 심법(心法)을 전수한 뜻을 보인 것이었다.

49세(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거나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고, 이어서 사약을 받게 되었다.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 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했다.

조정에서 송시열에게 사약이 내려오자, 들어가 결별의 인사를 드렸다. 송시열이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道)를 깨닫고 저녁에 죽기를 기대하였는데, 지금 끝내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앞으로는 오직 치도(致道)만 믿는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위주로 삼고 사업은 마땅히 효종의 대의를 위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전일에 결별을 고하는 편지에 쓴 ‘곧을 직(直)’ 자의 의의를 거듭 밝혀주었다.

훗날 숙종(肅宗)이 왕위에 오른 지 43년(1717년)에 병환이 나 온양(溫陽)의 온천(溫泉)에 가서 목욕할 때 권상하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하는 교지(敎旨)를 받고 감히 사사로이 거처하는 곳에 물러가 있지 못하여 괴산(槐山)의 시골집으로 나아가 머물면서 상소를 올려놓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숙종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사관을 명하여 같이 오라고 명하였다. 숙종이 기어코 권상하를 부르고자 하여 관직의 사양을 허락하고 백의의 신분으로 들어와 보도록 하는 등 특별히 예우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임금이 행궁(行宮)에 갈 때 호위하고 수행하는 의의’에 따라 융복(戎服, 철릭과 주립으로 된 군복)을 입고 들어가 알현하였다.

숙종이 매우 기뻐하고 앞으로 가까이 오도록 하여 머물러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 뒤에 백성을 잘 다스리어 편안케 하는 방도에 관해 묻자, 대답하기를, “천하의 일은 임금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은 또한 ‘곧을 직(直)’ 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신의 스승 송시열이 임종할 때 또한 이것으로 문인들에게 훈계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송시열이 견지하였던 <춘추> 대의(大義)를 개진하면서 숙종에게 효종(孝宗)의 뜻을 계승할 것을 권면하였다.

75세(1715)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尹拯)이 윤휴(尹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다.”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유규(柳奎)를 비롯한 유생 8백여 명과 대사간 이관명(李觀命), 수찬 어유구(魚有龜) 등의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았다. 처음에 윤증과 같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윤증이 그의 아버지 묘비문 사건으로 송시열과 갈라서면서 절교(絶交)하였다.

원류라는 것은 유시남(兪市南)이 편찬한 예서(禮書)로서 윤증으로 하여금 수정하도록 하였는데, 그 뒤 유시남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그 책을 간행하려고 하자 윤증이 핑계를 대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 책을 편찬할 때 윤증의 아버지도 일조를 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조정에서 간행하라고 하여 유상기가 정서된 원고를 달라고 요청하자 윤증이 내놓지 않고 “이는 우리 집의 책이다.”고 하였다. 후에 유상기가 초본(初本)으로 판각하고 권상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권상하가 서문을 지으면서 윤증의 죄를 매우 엄히 성토하고 “아버지처럼 섬길 분에게 옛 소진(蘇秦)과 의(張儀)의 솜씨를 부렸다.” 하고, “형칠(邢七)이 낭패를 당한 것은 본래의 기량(技倆)이다.” 했다.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 윤증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파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숙종 재위 중에 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이 치열했지만,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당쟁기에 살면서도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의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규명하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경종수정실록> 경종 1년 9월 2일 기사에 권상하의 졸기가 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졸하였다. 권상하의 자는 치도(致道)로 견실하고 중후하였으며 학문 익히기를 매우 부지런하고 독실하게 했다. 권상하는 송시열을 사사하였는데, 송시열이 매우 존중하여 그가 거처하는 집을 한수재(寒水齋)라 했다. 송시열이 초산(楚山)에서 화를 입었을 때 세도를 권상하에게 부탁하고 옷과 책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옷은 바로 주자가 지은 야복(野服)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었으며, 책은 이이가 손수 쓴 <경연일기(經筵日記)> 초본으로, 김장생이 송시열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 송시열이 일찍이 장식(張栻)의 우제사(虞帝祠) 의리에 따라 명나라 신종의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다. 권상하가 비로소 청주의 화양동에 건립하고 만동묘라 이름하고 사변(四籩)과 사두(四豆)로 신종과 의종 두 황제를 제사하였다. 갑신년에 숙묘(肅廟)가 태세(太歲)가 군탄(涒灘)이라 하여 황조(皇朝)의 옛 은혜에 감격해 단선(壇墠)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려 하여 비밀히 권상하를 찾아 물으니, 권상하가 극력 찬동해서 드디어 대보단(大報壇)을 쌓았던 것이다. 정유년에 숙묘가 온천에 거둥하매 권상하가 비로소 소명을 받아 행궁에 입견하였다가 회란(回鑾) 함에 미쳐서 권상하도 또한 환산(還山) 하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81세였다. 뒤에 시호를 문순(文純)으로 내렸다. 문인으로는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이 가장 이름이 알려졌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국역 국조인물고>
<한수재집(寒水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송시열(宋時烈)                                                       PDF Download

송시열은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 뒤로 회덕의 송촌 비래동 소제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윤증 사이에 일어난 갈등과 논쟁을 회니논쟁(懷尼논쟁)이라고 하는데, 회는 회덕을 지칭한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송준길 집안에서 세운 회덕 송촌에 자리 잡고 있던 옥류각에서 송시열은 송준길과 함께 어울려 강학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 <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게 되었다.

19세(1625)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이 낙향 기간 교유를 맺은 중요한 인물 중에 후에 사문난적으로 내몰려 사사 당한 윤휴(尹鑴)가 있다.

43세(1649)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으로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중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중화를 명나라로, 이적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의 존주대의는 곧 존주론(尊周論)이요 복수설치는 곧 북벌론(北伐論)이다. 안정된 국제 질서를 무력으로 파괴한 청나라에게 심복할 수 없다는 국민 정서에 기초한 북벌론과, 주나라에서 일어난 중화문화(中華文化)를 계승 발전시킬 나라는 이제 조선뿐이라는 자의식에 기초한 존주론은 국민단합과 조선 문화 수호의 논리로 전개가 되고 마침내 조선중화주의로 발전을 한다.

효종대의 정책은 대외적으로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을 천명하고 대내적으로는 예치(禮治)를 표방하면서 전개되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새롭게 나라가 설립되는 은혜)을 입은 명나라에 끝까지 의리를 지키겠다는 대명의리론은 유교 이념을 공통분모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사회에서 조선의 명분을 강화했다. 또한 강제성을 가진 법과 자율성에 기초한 도덕의 중간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두 가지를 아우르는 예(禮)를 통치의 이념으로 내세운 예치는 무너진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대명의리를 지키고 복수설치를 위해 북벌을 하고 조선 중화(朝鮮中華)를 이룩하기 위해 예치를 한다는 것인데 효종대 정치 이념의 상징적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49세(1655)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52세(1658)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53세(1659)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기해예송(己亥禮訟)과 갑인예송(甲寅禮訟)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났다. 이 두 차례 예송은 모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와 관계가 되는 사건이다. 인조의 계비로 왕비가 되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자의대비 조씨는 생전에 전처 소생인 효종과 전처 소생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을 모두 맞게 된다. 1659년에 일어난 기해예송은 자의대비가 어머니로서 효종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갑인예송은 자의대비가 시어머니로서 효종비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각각 남인과 서인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툰 사건이다.

기해예송은 효종이 승하하자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입어야 했는데,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은 기년(朞年, 1년)을 주장했고 허목으로 대표되는 남인은 3년을 주장했다.

애초 인질에서 풀려 귀국한 소현세자가 돌아온 지 석 달 만에 죽는다. 왕위 계승법으로 보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이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다. 이때 소현세자의 아내인 세자빈 강씨는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아 죽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간다. 인조가 승하한 뒤 효종이 즉위했고, 제주도로 귀양간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장남과 차남은 현지에서 죽고 막내아들만 남게 된다.

허목을 중심으로 한 남인은 효종이 원래 차남이었다 하나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의 대우를 해야 하고, 따라서 조대비는 장남이 죽었으니 상복을 3년 동안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주장은 달랐다. ‘왕위를 계승했어도 장남이 아닌 경우에는 기년복(朞年服)이라’ 했으므로 조대비는 상복을 1년 동안만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3년과 기년, 이것은 어머니가 아들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의 단순한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아직도 제주도에 유배된 채 살아 있었던 것이다. 효종을 차남으로 인정하면 제주도에 살아 있는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왕실의 적통이라는 말이 되고 효종의 정통성에 타격을 준다. 효종의 총신인 송시열로서는 자신을 믿고 의지하다 죽은 효종에게 불리한 주장을 한 것이지만 예법에는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효종을 장남으로 봐야 한다는 남인의 입장은 왕권을 강화하자는 것이었고 아무리 왕이지만 효종은 차남이라고 보는 서인의 입장은 신권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사회 통합을 위하여 왕도 일반인과 똑같은 예의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송은 예치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론의 차이로 벌어진 성리학 이념 논쟁이었고 이상적 정치 형태인 붕당 정치에서 파생한 정치 사건이었다.

83세(1689)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다.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후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 정읍, 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송시열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며,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켰다.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 일생을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 저술을 남겼다.

송시열은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두었다.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기반으로 깔려있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정직[直]의 실천 문제였다. 형이상학적 학설 논쟁에만 몰두하지는 않아 송시열의 이기심성론은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지만 당대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바가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당의통략>
<송자대전>
<동유학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김창협(金昌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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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金昌協, 1651년∼1708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현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숙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이조정랑, 대사성, 대사간, 청풍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벼슬을 내놓고 산속에 들어가서 살았다. 부친의 누명이 풀려 이조참판, 대제학, 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주요 저서로 『농암집』·『논어상설(論語詳說)』·『사단칠정변』 등이 있다.

 

 

1651년(1세, 효종 2년)

1월 2일, 경기도 과천 명월리 외가에서 영의정 문곡 김수항(金壽恒)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혹은 삼주(三洲)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증조할아버지 청음 김상헌(金尙憲)은 좌의정을 지냈으며, 할아버지 운수거사 김광찬(金光燦)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영의정을 역임한 몽와 김창집(金昌集)의 동생이다. 조선 말엽에 형제간에 영의정을 지냈던 김병학(金炳學), 김병국(金炳國)의 6대 할아버지이다.

 

1659년(9세, 효종 10년)

외할아버지 나성두의 해주 부임지에 따라갔다.

 

1665년(15세, 현종 6년)

12월, 연안 이씨 정관재 이단상의 딸과 혼인하였다.

 

1668년(18세, 현종 9년)

2월, 할아버지 김광찬이 사망하였다.

다음해 5월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9월에는 장인어른 이단상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그 다음해에 「순자성악변(荀子性惡辨)」을 지었다.

 

1671년(21세, 현종 12년)

봄, 강화도에 가서 작은아버지 김수흥을 뵙고, 송경, 천마산 등을 유람하였다. 『유송경기(遊松京記)』를 지었으며, 8월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이때 「동유기(東遊記)」와 「동정부(東征賦)」를 지었다.

 

1673년(23세, 현종 14년)

11월, 부친 김수항이 연경에 사신 갈 때 송도까지 전송하였다.

다음해 3월, 동생 김창흡과 함께 안주로 부친을 마중갔다. 6월, 우암 송시열을 모시고 용문산에 모여 강학하였다. 8월, 수원에 가서 송시열을 만났다.

 

1675년(25세, 숙종 1년)

1월, 덕원으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진천에서 송별하였다. 윤5월, 풍덕 구암서원에 가서 율곡의 봉안의식을 구경하였다. 이어서 박연, 화담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7월, 부친을 따라 영암 유배지에 갔다. 8월, 영암 월출산을 유람하였다. 10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해 3월과 11월에 영암에 다녀왔다.

 

1677년(27세, 숙종 3년)

9월, 영암에 갔다. 10월에 부친을 모시고 도갑사를 유람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김창집, 김창즙과 함께 동복의 적벽, 창평의 물염정을 구경하였다.

 

1678년(28세, 숙종 4년)

2월, 김창흡, 김창즙과 함께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하였다. 그 뒤 김창흡과 함께 곡운에 가서 큰아버지를 만났다. 가을, 부친이 철원으로 옮기게 되자 용인에 마중 갔다가 그대로 따라갔다.

 

1679년(29세, 숙종 5년)

8월, 영평 응암에 집을 지었다. 10월, 부친과 삼부폭포를 구경하였다. 11월, 가족을 데리고 응암으로 들어갔다. 형과 백운산 보문암을 유람하였다.

 

1680년(30세, 숙종 6년)

2월, 은구암 기문을 지었다. 3월, 부친이 영의정에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여름, 응암에 들어가 독서를 하였다. 가을, 별시 초시의 대책(對策)에서 수석을 하였다. 겨울, 광주(廣州)에 가서 우암을 방문하였다.

 

1681년(31세, 숙종 7년)

5현(율곡 이이, 우계 성혼, 귀산(龜山) 양시(楊時),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 연평(延平) 이통(李侗). 율곡과 우계 외에는 중국학자)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상소를 올려 윤허를 받았다. 우암 송시열에게 편지를 썼다.

 

1682년(32세, 숙종 8년)

10월, 아들 김숭겸이 태어났다. 11월, 증광별시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683년(33세, 숙종 9년)

2월, 병조 좌랑이 되었다. 4월,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교체되었다. 6월, 도당록에 들었다. 부수찬을 거쳐 수찬이 되었다. 검토관으로 소대(召對, 임금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정치에 관한 의견을 올리는 일)에 불려갔다. 7월, 부교리가 되었으며 12월, 헌납이 되었다. 명성왕후가 사망하자 상소문을 올려, 백관들의 상복을 모두 옛 예절에 따라 행할 것을 청하였다.

 

1684년(34세, 숙종 10년)

1월, 교리가 되었다. 동료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송시열을 불러들이기를 청하였다. 2월, 헌납, 교리가 되었으며 5월에 『신본심경석의(新本心經釋疑)』 간행에 대한 일로 왕명을 받들고 회덕에 가서 우암을 만났다. 6월, 이조 좌랑이 되었다. 8월, 암행어사가 되어 영남을 시찰하였다. 10월, 교리, 헌납, 이조 좌랑이 되었다. 12월, 우암에게 「심경석의(心經釋疑)』에 대한 질문 목록을 올렸다.

1685년(35세, 숙종 11년)

1월, 지제교가 되었다. 2월, 부교리, 헌납이 되었다. 3월,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었다. 5월, 금강산, 학포를 유람하였다. 6월에 경성에 도착하였다. 7월, 열진을 순찰하였다. 9월, 교리, 헌납이 되었다. 10월, 조정에 돌아와, 이조 좌랑이 되었다.

 

1686년(36세, 숙종 12년)

1월, 교서관 교리, 이조 정랑이 되었다. 2월, 수찬이 되었다. 3월, 이조 정랑이 되었다. 윤4월, 부교리, 헌납, 대왕대비존숭도감 도청낭청, 부교리가 되었다. 왕명으로 『주자대선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였다. 헌납이 되었다. 5월, 이조 정랑이 되었으며, 6월에, 장악원정, 집의, 동부승지, 우부승지가 되었다. 7월, 대사성이 되었다. 11월, 병조, 예조 참의가 되었다.

 

1687년(37세, 숙종 13년)

1월, 대사간이 되었으며, 2월에 대사성이 되었다. 5월, 태학의 학생들과 반수당에서 잔치를 가졌다. 8월, 사직하였다. 10월, 승문원 부제조가 되었다. 11월, 청풍 부사가 되었다.

 

1688년(38세, 숙종 14년)

1월, 월악산을 유람하였다. 3월, 김창흡과 함께 단양을 유람하였다. 수암 권상하와 함께 화양동에 가서 우암을 만났다. 우암과 파곡, 병천, 선유동 등을 유람하였다. 『화양제승기(華陽諸勝記)』를 지었다. 5월, 아들 김청상이 태어났다.

 

1689년(39세, 숙종 15년)

2월, 부친이 진도로 귀양 가고 작은아버지 김수흥이 장기로 귀양을 갔다. 3월, 진도에 갔다. 4월, 진도에서 부친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이에 사직을 하고 영평에 은거하였다. 우암에게 편지하여 부친의 묘비문을 청하였다. 5월, 부친을 양주 율북리 설곡에 장사 지냈다. 아들 김청상이 죽었다. 우암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9월, 응암으로 들어갔다. 12월, 졸수재 조성기가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1692년(42세, 숙종 18년)

2월, 응암의 구거 동쪽에 농암서실을 지었다. 옛 지명 농암(籠巖)을 농암(農巖)으로 바꾸고 자호로 삼다. 다음해 11월, 백운산사에서 독서를 하였다.

 

1694년(44세, 숙종 20년)

이해에 1689년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이 물러나고, 소론과 노론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였다. 폐비 민씨 사건을 후회하게 된 숙종이 기사환국 당시 사건을 주관한 남인들을 귀양 보내고 소론의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 박세채(朴世采)를 좌의정, 윤지완을 우의정에 각각 기용하여, 소론 정권이 성립되었다.(갑술옥사甲戌獄事 혹은 갑술환국甲戌換局이라 불림) 노론측도 폐비 민씨가 복위됨으로써 송시열(宋時烈)·민정중(閔鼎重)·김익훈(金益勳)·김수흥(金壽興)·조사석(趙師錫)·김수항(金壽恒) 등이 복권되었다. 상황이 급변하여 조정에서는 김창협에게 이러저러한 관직에 임명하였다. 그는 이후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고자 하였다.

이해 1월, 양주 봉인사에서 독서하였다. 4월, 호조 참의가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5월, 영의정 남구만에게 편지를 보내 토죄(討罪, 죄상을 들추어 꾸짖음)를 엄하게 하지 않는 일을 힐책하였다. 가족을 데리고 양주 금촌에 거주하였다. 승문원 부제조,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6월, 대사간이 되었다. 농암으로 들어갔다. 8월,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이후 우부승지,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1695년(45세, 숙종 21년)

1월, 이조 참의가 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여, 교체되었다. 3월, 농암으로 들어갔다. 4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 체차되었다. 7월, 개성 유수가 되고, 8월, 형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9월, 농암에 들어갔다. 11월, 대사헌이 되었다. 양주 석실서원에 머물며 강학하였다. 12월, 사직을 청하여 교체되었다.

 

1696년(46세, 숙종 22년)

2월, 창계 임영(林泳)이 사망하여 곡하였다. 3월, 예조 참판이 되었다. 농암으로 들어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철원에 가서 형 김창집을 만났다. 4월, 미음으로 돌아왔다. 5월, 홍문관 제학,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 체차되었다. 7월, 인천부에 가서 장모 정관재 부인을 찾아뵈었다. 황주하(黃柱河)가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8월, 농암에 들어갔다. 원주에 가서 황주하의 장례에 참석한 뒤 청평, 한계를 유람하였다. 『동정기(東征記)』를 지었다. 9월,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11월, 수원 만의촌에 가서 우암 묘지의 개장(改葬)에 참여하였다.

 

1697년(47세, 숙종 23년)

2월, 동지경연사,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3월, 미음으로 돌아왔다. 윤3월, 여러 사람과 도봉서원에 다녀왔다. 6월, 병조 참판,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8월, 삼주로 거처를 옮겼다. 11월, 광주 수종사에서 지냈다.

다음해 7월, 대사헌이 되었으나 사직을 신청, 체차되었다. 10월, 도봉서원에 다녀왔다. 11월, 모친을 모시고 형 김창집의 강화부 부임지에 다녀왔다.

 

1699년(49세, 숙종 25년)

1월과 3월, 강화부에 다녀왔다. 아우 김창즙 등과 송도, 천마산을 유람하였다. 4월, 형을 따라 보문암을 유람하였다. 삼주로 돌아왔다. 5월, 형자 김호겸(金好謙)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7월, 호조 참판이 되었다. 윤7월, 이조 참판이 되었다. 농암으로 들어갔다. 9월, 강화부에 다녀왔다. 10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바로 체차되었다. 12월,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700년(50세, 숙종 26년)

1월, 삼주로 돌아왔다. 3월, 농암에 들어갔다. 6월, 대사헌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7월, 오씨의 부인이 된 딸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10월, 아들 김숭겸이 사망하여 곡하였다.

 

1701년(51세, 숙종 27년)

1월, 석관촌 김창업의 별장에 잠시 거주하였다. 2월, 대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3월, 백부(伯父, 큰아버지) 김수증이 사마하여 곡하였다. 11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퇴계와 율곡의 사단칠정론, 율곡의 인심도심설을 논하였다. 그의 학문적인 입장은 퇴계와 율곡의 설을 절충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음해 동지돈녕부사, 부제학, 예문관 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여름에 만취대를 유람하였다.

 

1703년(53세, 숙종 29년)

2월, 이씨에게 시집간 딸이 사망하였다. 6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다음해 2월, 권상유에게 편지하여 『사변록변(思辨錄辨)』을 논하였다.

 

1705년(55세, 숙종 31년)

8월, 삼년상을 마치고 삼주로 돌아왔다. 9월,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11월, 대사간,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다음해 대제학, 지성균관사, 형조 판서, 예조 판서, 대사헌, 지춘추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1707년(57세, 숙종 33년)

4월, 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7월, 이유(李濡)의 녹천 별업에 거처하였다. 가을에 제자들과 도봉서원을 방문하였으며, 이희조와 수락산 옥유동을 유람하고, 10월에 삼주로 돌아왔다. 그 뒤 묘적산을 유람하였다.

 

1708년(58세, 숙종 34년)

윤3월, 형제들과 함께 금촌에서 물고기 구경을 하고, 묘적사를 유람하였다. 4월 11일, 삼주에서 사망하였다. 6월, 석실의 선영에 장사를 지냈다.

『숙종실록』(46권, 숙종 34년 4월 11일)에 다음과 같이 졸기가 실려있다.

 

“지돈녕부사 김창협이 사망하였다. 그의 자는 중화(仲和)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순수하고 청결하여 한 점 더러운 세속의 기운이 없었다. 문장은 그 맛이 진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깊이 얻었다. 개국이래로 이런 사람은 한 두 사람에 불과했는데, 김창협은 자립하였다고 할만하다. 시(詩)는 한나라, 위나라를 참고하면서 두보로 보완하였다. 필력은 고상하고 기운이 있어서, 천박한 문장을 일삼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선비가 끝까지 할 사업은 되지 못한다고 여겨 마침내 육경(六經)공부에만 정진하여 성리학에 깊이 빠져 널리 행하고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다. 견해가 정확하고 공부가 독실하여 요즘의 변통 없는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주자서(朱子書)에 공력을 쏟아, 송시열이 『주문차의(朱文箚義)』를 저술할 때에 그의 말을 많이 인용하였다. 만년에 도리가 막히고 유생들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때를 당하니, 명분과 의리를 바르게 드러내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았다. 세상의 도가 그 덕분에 유지되고 번성하여 유림의 으뜸이 되었다. 그를 따라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가르치기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후배들 가운데 문장을 바로잡을 자가 있으면 이끌어서 학문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젊어서 문과 갑과에 올라, 명망이 한 시대를 굽어보았다. 임금 앞에서 강론을 할 때는, 범조우(范祖禹)처럼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더욱 군주의 덕이 부족하면 잊지 않고 돌보았다. 일을 만나면 경계하고 바로잡아 임금의 노여움을 회피하지 않았다. 1689년(숙종 15년)의 화(禍)를 만나자,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1694년 정국 변동 후에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궁벽한 산골에서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굳게 지조를 지키면서 한평생을 마쳤으니, 비록 뜻이 다른 자라도 높이 우러러 공경하여 스스로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대개 타고난 성품의 순수성과 문장의 고상함, 그리고 학문의 심오함을 논하면, 모든 것이 남보다 뛰어나 진실로 세상에 드문 대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날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8세다. 성균관 유생들이 학교를 비우고 나와 술과 과일을 올렸고, 학자들이 그를 ‘농암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문집 34권이 있어 세상에 행하여졌으며,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1709년(숙종 35년) 9월, 제자 김시좌(金時佐) 등이 문집을 간행하였다.

1711년(숙종 37년) 영암 연촌서원에 배향되었다. 1713년(숙종 39년) 가을에는 석실서원에 배향되었다.

1725년(영조 1년) 가을,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1854년(철종 5년) 5대손 김수근이 속집을 간행하였다.

1928년(년) 종9대손 김녕한이 원집을 세 번째로 출간하고, 속집을 두 번째로 간행하였으며, 별집을 증보하였다.

 

<참고자료>

『숙종실록』

「김창협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김창현, 「김창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조헌(趙憲)


조헌(趙憲)                                                                       PDF Download

 

조헌(趙憲, 1544년∼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이고 의병장이다.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인이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 한 사람이다. 교서관 박사, 호조 좌랑, 예조 좌랑, 보은 현감, 전라도 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의병 700명과 함께 사망하였다.

 

1544년(1세, 중종 39년)

6월 28일,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응지(趙應祉)와 어머니 용성 차씨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황해도 백천, 휘는 헌(憲),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陶原), 후율(後栗)이다.

부친은 성수침(成守琛)문인이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아 집안 형편이 항상 곤궁하였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외아들 조헌을 공부시키는데 노력하였다.

 

1555년(12세, 명종 10년)

어촌(漁村) 김황(金滉)에게 경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561년(18세, 명종 16년)

영월 신씨(辛氏)와 결혼하였다.

 

1565년(22세, 명종 20년)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여러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요승(妖僧) 보우를 논박하여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 대궐 밖에 엎드려 임금의 응답을 기다렸는데 조헌만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의 성격이 강직하며 의리가 있고 인내심이 강함을 알 수가 있다.

다음해 온성도호부 훈도가 되었다.

 

1567년(24세, 명종 22년)

가을, 감시(監試)에 응시하여 삼장(三場)에 합격하였다. 11월, 교서관(校書館) 권지 부정자가 되었다. 그가 맡은 일은 경서와 서적의 인쇄 등이었다.

 

1568년(25세, 선조 1년)

정주목(定州牧) 교수(敎授)가 되었다. 정주는 평안도 서남 해안지방으로 옛날부터 오랑캐의 침입이 잦았던 지방이었다. 그 때문에 선비의 기풍이 거의 없었는데 조헌이 재임하여 교육을 크게 일으켰다.

 

1570년(27세, 선조 3년)

파주목 교수가 되었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에게 학문을 청하였다. 특히 주역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성혼은 조선의 학문에 놀라 외우(畏友, 경외스러운 친구)라 칭하며 제자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1년(28세, 선조 4년)

홍주목 교수가 되었다. 이때 해변에 은거중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을 만나 배움을 청하였다. 가을, 파주에서 율곡 이이(李珥) 만나 뵈었다. 이어서 송도를 유람하였다.

 

1572년(29세, 선조 5년)

교서관 정자가 되다. 6월, 자수궁(慈壽宮) 성숙청(星宿廳)의 잘못, 즉 궁정에서 불공을 드리는 잘못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특명으로 직책이 박탈되었다. 이지함과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고, 서기(徐起)를 방문하여 수개월간 강학하였다.

 

1574년(31세, 선조 7년)

5월, 질정관(質正官)으로 성절사 박희립(朴希立)을 따라 중국 연경(燕京, 북경)에 갔다. 이때 『조천일기(朝天日記)』를 써서 약 4개월간에 일어난 조선과 명나라 관련 일을 기록하였다. 11월, 중국에서 돌아와 명나라 제도 중 본받을 만한 8가지를 소개하는 『팔조소(八條疏)』를 올렸다.

조헌은 중국의 성대한 문물을 살펴보고 그것을 조선에 시행해 볼 생각으로 귀국한 뒤, ‘시무(時務)에 절실한 것’ 8조와 ‘근본에 관계된 것 16조’ 등 상소문 두 장을 준비하였다. 먼저 8조 소를 올리자, 임금이 답하기를,

“천 백 리 풍속은 서로 다른 것인데, 만약 풍기(風氣)와 습속이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본받아 행하려고 하면 끝내 소요만 일으킬 뿐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여, 조헌은 16조 소를 올리지 않고 8조만 올렸다.(『선조수정실록』8권) 그 8조는 성묘(聖廟)의 배향에 관한 일, 내외(內外)의 관료에 관한 일, 귀천의 의관(衣冠)에 관한 일, 음식 연회에 관한 일, 사대부들의 읍양(揖讓)의 예에 관한 일, 스승과 학생의 예에 관한 일, 향약에 관한 일, 군대의 규율에 관한 일 등이다.

조헌이 올리려 했던 16조는 하늘에 닿는 정성(格天之誠), 근본을 생각하는 효도(追本之孝), 능침의 제도(陵寢之制), 제사의 예절(祭祀之禮), 경연의 규례(經筵之規), 조회의 의식(視朝之儀0, 간언을 듣는 법(聽言之道), 사람을 뽑는 법(取人之方), 음식의 절제(飮食之節), 국가의 곡식을 알맞게 쓸 것(餼廩之稱), 생산을 늘릴 것(生息之繁), 병졸의 선발(士卒之選), 조련을 부지런히 하는 것(操鍊之勤), 성지를 견고하게 하는 것(城池之固), 출척을 밝게 하는 것(黜陟之明), 명령을 엄하게 하는 것(命令之嚴), 총론으로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모범을 보이는 도 등이다.

 

12월,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교서관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교정하였다. 이즈음 그는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모두 암송하여 주위사람들로부터 ‘이 책을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조헌뿐’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명나라에 다녀온 뒤 조헌은 「질정록」과 『동환봉사(東還封事)』(1698년 8조소와 16조소를 합친 책)를 지었다. 후자는 공안(貢案, 공물 기록 장부)의 폐단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쓴 글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재산이란 누구나 다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사정을 헤아림 없이 전유하려 든다면 백성들이 일어나 쟁탈하려 들것이다.”고 지적하고 재산을 백성과 골고루 나누는 것에 대한 위정자의 솔선수범을 강조하였다.

이즈음 그는 이러한 시를 썼다.

 

오늘 아침 말을 타고 임명(臨溟)을 지나는데

오래된 역참에서 깊은 생각에 견딜 수 없구나.

가문 기운은 날마다 곡식과 흙을 태우는데

창문으로 드는구나. 들에서 부는 피비린내 바람

흉년의 농사 무엇을 의지하며

일 년 내 가꾸어도 계산은 막막하네.

허다하게 오고가는 서울의 관리들

원컨대 백성 구제하는 좋은 대책 생각하기를 (「次聖居翁韻」)

 

1575년(32세, 선조 8년)

교서관 박사, 호조 좌랑, 예조 좌랑, 전적, 감찰 등을 거쳐 12월에 통진 현감이 되었다.

 

1577년(34세, 선조 10년)

겨울, 통진 현감으로 재직 중 잘못을 일으킨 노비를 장살(杖殺, 매를 때려 죽임)하여 부평(富平)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이때의 유배는 간신배들의 탄핵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조경진 12)

 

1578년(35세, 선조 11년)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유배지에 있어서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1580년(37세, 선조 13년)

4월, 유배지에서 석방되었다. 윤4월, 보령으로 가서 이지함의 상에 곡하였다. 이어 명곡서당에 머물며 강학하였다. 가을, 해주 석담으로 율곡선생을 찾아가 수개월간 강학하였다. 그의 호가 ‘후율(後栗)’인 것은 율곡을 존경하여 ‘율곡(栗谷) 선생의 뒤를 잇는다’라는 뜻이다.

 

1581년(38세, 선조 14년)

봄, 공조 좌랑을 거쳐 전라도 도사(都事)가 되다. 당시 관찰사는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이었다. 조헌은 정철을 평소에 멀리하였는데 성혼과 이이의 권유로 만나게 되어 서로 친해졌다.

다음해 종묘서(宗廟署) 영(令)에 임명되었다가, 8월에 보은 현감이 되었다.

 

1584년(41세, 선조 17년)

1월, 스승 율곡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조선사회의 붕당이 격화되었다. 정여립이 이이와 성혼을 모함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헌의 친구 이발(李潑)이 정여립에 동조하자 조헌은 그와 절교하고 스승들의 무고함과 정여립의 흉악함을 논박하는 상소문을 거듭 올렸다. 당시 임금이던 선조는 이러한 상소를 받아주지 않았고 조정의 관료들은 조헌을 서인의 앞잡이로 몰아 배척하였다. 그래서 조헌은 관직을 버리고 옥천으로 내려가 살 것을 결심하였다.

겨울, 대계(臺啓,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간들이 관리의 잘못을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옥천 안읍 율치산에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정사를 짓고 ‘후율정사(後栗精舍)’라 칭한 뒤에 강학을 하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이즈음 조헌은 간신배들이 나라를 그르치게 한다고 호소하고 폐단을 극복하는 상소문을 대궐 문 앞으로 나아가서 올렸으나 오히려 왕의 진노를 사 길주 영동역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하지만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을 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1586년(43세, 선조 19년)

공주목 교수가 되었다. 10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이즈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封章後有旨回諭 有感而作 秋」)

 

백성들 병고와 임금님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되지만

어찌 한해에 두 번이나 상소문을 올린단 말인가

아름다운 말씀이 멀리 외로운 신하에게 내리시니

밝은 조정에 백번 절하고 감격의 눈물 쏟아내네

 

1587년(44세, 선조 20년)

여름에 사직하고 옥천으로 돌아왔다.

 

1589년(46세, 선조 22년)

4월, 도끼를 지고 대궐에 나아가 만언소를 올렸으나, 유언비어로 백성들을 혼란 시켰다고 하여 조정의 미움을 받아 함경도 길주 영동역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일본 통신사 파견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1월,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대궐에서 만언소를 올리던 시기의 일화가 이렇게 전해진다.(『중봉문집』4, 「遺事」)

 

“선생이 도끼를 메고 대궐에 들어가 엎드려 상소하던 때에 종각 옆 민가에 기거하고 있었다. 선생은 밤이나 낮이나 초연하여 근심이 있는 기색이라 주인이 그 까닭을 물었으나 선생은 대답하지 않고 오직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때 마침 그 집은 기울어 장차 무너지게 될 우려가 있어서 주인은 큰 나무로 지주를 세워 장차 무너질 것을 방지하려 하였다. 선생은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이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슬프다! 주인의 집은 이 나무라 있어 넘어지는 것을 부지하여 앞으로도 수년간은 지탱할 수 있겠으나 만약 나라가 장차 기울면 누가 그것을 부지하겠는가?’ 하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하니 옆에 있던 사람도 선생의 이 충의에 감동하였다.”

 

1590년(47세, 선조 23년)

고운사를 유람하였다. 여름, 금천사에서 강학하였다. 이해 겨울 12월, 영남을 유람하고, 경상도 관찰사 홍성민(洪聖民)을 만났다.

 

1591년(48세, 선조 24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사신을 보내와 명나라를 칠 길을 내놓으라고 하여 조정에 소동이 일어났다. 이때(3월경) 조헌은 옥천에서 상경하여 도끼를 지고 대궐로 나아가 일본 사신을 참수하고 명나라에 보고할 것을 상소하였다. 대궐문 바깥에서 3일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 대둔산을 유람하였다. 11월, 공암으로 가서 서기(徐起)의 상에 곡하다.

 

1592년(49세,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어머니를 청주 선유동으로 피신시키고 돌아왔다. 5월, 격문을 지어서 병졸을 모집하였다. 제자 김절(金節), 김약(金籥), 박춘검(朴忠儉) 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소집하여 보은 차령에서 북상하는 왜적을 퇴각시켰다. 6월, 제자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약 1,600여명을 모아 8월, 청주에서 영규(靈圭)의 승려군과 합류하여 왜적을 격파하고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 당했다. 불과 700여명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여 다시 영규의 승군과 합류하여 8월 18일, 금산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금산전투)

금산의 전투에서 그는 의병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오늘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생사와 진퇴에 있어 의로움(義)이라는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이 전투에서 그는 의병 700여 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1593년 『선조실록』(46권, 선조 26년 12월 27일) 기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세자(광해군)가 진주와 금산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명단을 책으로 만들어 시강원(侍講院)에 내렸다. 그리고 그들 가속(家屬, 가족과 딸린 식구)을 불러 그들 모두에게 면역첩(免役牒, 부역을 면제하는 증서)과 쌀·콩 등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시강원이 건의하였다. ‘기민(飢民)들을 공주(公州)의 사례에 따라 구제해야 합니다. 조헌(趙憲)의 두 아들이 이곳에서 떠돌면서 마을에서 걸식을 하고 있으니 특별히 은전을 내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그대로 하라. 즉시 음식물을 계속 지급하도록 감사에게 문서로 전달하라’고 하였다.”

1603년 유생들이 금산의 순절(殉節) 장소에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1604년(선조 37년), 선무원종공신 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錄勳)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1609년(광해군 1년)에 충청도 유생들이 사액을 청하여 표충사(表忠祠)라는 사액을 하사받았다.

1649년(인조 27년)에 ‘문열(文烈)’의 시호를 받았다.

1656년(효종 7년)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김상헌(金尙憲)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다.

1663년(현종 4년) 7월에 조정에서 예관을 보내 금산군에 있는 순의단(殉義壇)에 사액(賜額)하고 제사를 올렸다.

1665년(현종 6년) 묘표(墓表)를 개수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이 비면(碑面)을 쓰고 송시렬이 음기(陰記)를 지었다.

1666년(현종 7년) 호남 관찰사 민유중(閔維重)이 문집을 간행하였다.

1669년(현종 10년) 3월, 금포 유생 이만춘(李萬春) 등이 상소하여 서원의 액호(額號)를 청하니 임금이 ‘우저(牛渚)’라는 액호를 하사하였다.

1710년(숙종 36년) 청주 유생이 전장의 유적지에 비석을 세웠다.

1734년(영조 10년)6월, 조정에서 자손 중 적손(嫡孫, 큰집 자손), 지손(支孫, 작은 집 자손)을 가리지 않고 관리로 등용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천일기(朝天日記)』의 간행을 명하였다.

1740년(영조 16년)7월, 임금이 5대손 조혁(趙㷜)을 면담하고 선정(先正, 훌륭한 조상)의 행적에 대해 물어보았으며, 운각(芸閣, 서고)에 명하여 문집을 간행하여 자손과 서원에 보급하도록 명하였다.

1748년(영조 24년) 교서관(校書館)에서 문집을 간행하였다.

1754년(영조 30년), 영의정 이천보의 요청으로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조헌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조경진, 『조헌 시에 나타난 선비정신 연구』, 세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박병헌, 『중봉 조헌의 학문과 시세계』, 동국대학교 석사논문, 1992

김원행(金元行) 3


김원행(金元行) 3                                                         PDF Download

 

김원행(金元行, 1702년∼1772)은 조선시대 후기의 관료이자 학자였다.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작은할아버지 김창흡(金昌翕)에게 글을 배웠다. 기호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 그는 18세기 중반 이후 낙론의 핵심적 논의를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강학 활동을 통해 19세기로 이어지는 기호 낙론 학설의 중심을 이루었다.(박학래 409) 저서에 『미호집(渼湖集)』이 있다. 제자 중에 실학자 황윤석(黃胤錫, 1729∼1791)과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있다.

 

 

1702년(1세, 숙종 28년)

12월 29일, 죽취 김재겸(金濟謙)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다. 김재겸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필형(必亨), 호는 죽취(竹醉).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아버지는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다. 어머니는 박세남(朴世楠)의 딸로, 작은할아버지 김창흡(金昌翕)에게 글을 배웠다.

김원행의 가문은 안동김씨로 원래 영남 안동이 본거지였으나 16세기 중반 경기도 양주 석실로 이주한 뒤 재경 사족들과 혼인을 통해서 경제적 기반을 다져 조선후기 대표적 문벌로 알려지게 되었다.(김인규 176)

김원행은 아들이 없이 사망한 숙부 김숭겸(金崇謙)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현손(玄孫, 고손자)이며, 농암 김창협(金昌協)의 양손자이다. 김원행의 호는 미호(渼湖)이다.

 

1708년(7세, 숙종 34년)

윤3월, 할아버지 김창협(金昌協)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어려서 종조부(從祖父, 할아버지의 형이나 동생, 즉 큰할아버지 혹은 작은할아버지)인 김창흡에게 배웠다. 김창흡은 김원행의 작은 할아버지다. 이어 낙론계의 종지를 잇고 있는 도암 이재(李縡)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고제자가 되었다.(김인규 186)

김창흡은 김원행에게 글을 가르칠 때 나눈 대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홍대용의 「미상기문」)

 

“너는 독서를 몇 번하면 외울 수 있는가? ”

“우공 읽기를 다섯 번해서 겨우 외울 수 있었습니다.”

“천하의 서적에 어찌 한번 읽고 외울 수 없는 것이 있겠는가? 어찌 한번 외우고 종신토록 잊는 것이 있겠는가?”

 

김원행의 암기력은 할아버지 김창흡을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암기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김인규 187)

 

1716년(15세, 숙종 42년)

홍귀조(洪龜祚)의 딸 남양 홍씨와 혼인하였다.

 

1719년(18세, 숙종 4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721년(20세, 경종 1년)

12월, 비난의 상소를 받고 원래 할아버지 김창집(金昌集)은 거제로 귀양을 갔다. 본가의 부친 김제겸(金濟謙)은 울산으로 유배되었다.

 

1722년(21세, 경종 2년)

3월, 형 김성행(金省行)이 무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4월, 김창집이 사사(賜死)되었다. 8월, 김제겸이 사사(賜死)되고 가족들이 사방으로 유배되었으나 김원행은 양자로 입적되어 있어 위기를 모면하였다. 친형 김성행과 친아우 김탄행은 경종의 독살을 꾀한 죄목으로 처형되었다.(辛任士禍 신임사화)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이후 생모 송부인의 금산 유배지에 가 있으면서 『맹자』 공부에 전념하였다.

 

1725년(24세, 영조 1년)

3월, 김창집과 생부 김제겸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이후 억울하게 피해를 입든 자손들을 우대하는 조치가 있었으나 과거 응시를 단념하고 은거하였다.

생부 김제겸은 조성복(趙聖復)·김민택(金民澤)과 함께 신임사화 때 사망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해에 관작이 복구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생부의 저서로는 『죽취고(竹醉藁)』가 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이즈음 청풍, 제천, 단양 일대를 유람하였다.

 

1732년(31세, 영조 8년)

이해 12월, 양어머니 박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다음해 12월, 친어머니 송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1736년(35세, 영조 12년)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1737년(36세, 영조 13년)

6월, 「명덕설의문(明德說疑問)」을 지었다. 7월, 자신의 시문 초고에 서문을 지었다. 다음해 10월, 아들 김리안(金履安)의 혼사에 격려하는 글을 지어 주었다.

 

1740년(39세, 영조 16년)

김창집이 복관(復官)되었다. 김원행은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제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김원행의 용모는 다음과 같았다.(『미호언행록』「遺事」)

 

“몸이 다부지면서 살집이 있었고 얼굴은 크고 원만하였으며, 신체는 윤기가 흐르고 순수한 데가 있었다. 눈빛은 사람을 쏘아보는 듯 바르면서도 넉넉하였다. 큰 입술은 붉었고 구렛나루가 있었으며 목소리는 크고 엄하였다. 손바닥은 두텁고 손가락은 짧았는데,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아 서면 작았으나 앉으면 키가 커보였다.”

 

1744년(43세, 영조 20년)

영주의 부석사와 백운동서원을 거쳐 안동의 반학정, 중대사, 괴산의 화양동 등을 유람하였다. 이어 청주를 거쳐 홍주에 가서 종제 김양행(金亮行)을 만나보러 갔다. 가는 길에 이봉상(李鳳祥), 김의행(金毅行)도 함께 모여 간월도, 안면도 등을 유람하였다.

다음해(1745년 을축년) 미음으로 올라가 석실서원에 머물면서 후진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이즈음 어린 홍대용(洪大容, 1731년∼1783년)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김원행은 홍대용의 할아버지인 홍귀조의 사위였다. 즉 김원행은 홍대용의 5촌 고모부였다. 홍대용은 석실서원에서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을 연마했다. 김원행은 홍대용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이 실심(實心)이 없을까 근심할 뿐이다. 실심이 진실로 확립되었다면 무엇을 이루지 못할 것인가? 오직 이 실심의 확립과 확립하지 못함은 그 사람에게 달렸다. 다른 사람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해고 남을 위하는 사이에서 그 시비득실의 귀결처를 깊이 살피고, 거짓을 짓는 것에 편안하게 여겨 스스로 소인으로 빠지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위하는 진실에 대해 장차 힘쓰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능히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미호집』10권 「答洪大容」)

그리고 또 그는 홍대용에게 “학문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곧 민생일용(民生日用)의 일에 나아가 배울 것이요, 사정에 어두워서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없다면 참된 학문이 아니다”(『미호언행록』)라고 실용의 정신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1746년(45세, 영조 22년)

조광조와 송시열을 모신 도봉서원에 다녀왔다. 다음해 여주를 거쳐 오대산, 강릉 등을 유람하고, 설악산에 있는 할아버지 김창흡(金昌翕)의 영시암 유허(遺墟, 자취가 남아있는 터)를 돌아보았다.

 

1750년(49세, 영조 26년)

익위사 위솔, 종부시 주부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해 역시 익위사 익찬,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2년(51세, 영조 28년)

개성 화담서원을 거쳐 평양, 성천의 강선루, 안주의 백상루, 영변의 철옹성, 묘향산 등을 다녀왔다. 가을에 손아래 처남 송문흠(宋文欽)이 사망하였다.

 

1753년(52세, 영조 29년)

이해부터 임금이 병으로 앓아눕자 왕세자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다. 조헌은 사헌부 지평에 재차 임명되었으나 상서하고 사직하였다. 송도에 다녀왔다.

이때 올린 상서문 일부가 『영조실록』(79권, 4월 11일자)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신은 하늘과 땅 사이의 한 궁민(窮民,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일찍이 혹독한 화(禍)를 당하여 지극한 아픔이 가슴속에 가로질러 있습니다. 황야에 귀양 가 있을 때에 형체는 보존되었지만 정신은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영원히 농부가 되어 남은 생애를 마치려 했는데 십수년전에 외람되게도 임금님의 임명을 받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또 작년부터 갑자기 승진하게 되었는데 조정의 추천은 더욱 분수에 지나치기가 그지없습니다. 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영광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보통사람으로서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의 말인 것이요, 신과 같은 처지의 일개인에 있어서는 귀한 사람들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 신의 가문이 겪은 당일의 화(禍)를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낳아준 할아비인 충헌공 김창집은 조정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마음속으로 순국할 것을 맹세하여 태평할 때나 험난할 때나 한결같이 절개를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흉악한 무리들에게 미움이 누적된 탓으로 악독스런 칼날이 삼대까지 모두 미치게 되었으므로 가문이 완전히 망하고 뒤집어져 세상 사람들도 슬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도 지금까지 억장이 무너지고 피눈물을 삼키고 있었는데, 신은 불효한 탓으로 변고가 망극하던 때를 당하여 가슴과 배를 가르고 스스로 저승으로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그런데 이미 원통한 죄를 밝혀 누명을 씻는 은혜를 받은 뒤에 일부 거짓말하는 도적들의 말이 멋대로 현혹시키고 있는데도 신이 또 한 마디도 따지지 못한다면 이런 손자가 장차 어떻게 세상에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저하(邸下, 왕세자)께서는 속히 저를 버리시고 명단에서 삭제시킴으로써 밭 가운데 오두막에서 생애를 끝마치게 하소서.”

 

1754년(53세, 영조 30년)

2월, 서연관에 임명되었다. 3월 김원행은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7월, 석실서원의 제자들과 뱃놀이를 하고 시를 지었다. 12월, 장악원 정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해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곧 체차(遞差, 어떤 직위에 있던 관리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일)되었다.

 

1756년(55세, 영조 32년)

장령에 재차 임명되고, 서연관이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 가을에 홍락신(洪樂莘)에게 훈계의 글을 지어 주었다.

이해에 올린 상서문이 『영조실록』(32년 3월 12일자)에 이렇게 적혀있다.

 

“지금 산림(山林)에는 명망 있는 유학자며, 덕망 있는 선비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진실로 저하(邸下, 왕세자)께서 큰 뜻을 능히 힘쓰시어 더욱 실학(實學, 실용적인 학문)에 근면하시며 정령(政令, 정치적 명령과 법률)과 도술(道術, 방도와 술수)을 순수하게 요순(堯舜)과 삼대(三代, 하은주 시대)를 모범으로 삼아 당대의 어진 선비들을 심복시킬 마음이 있다면, 한때의 숱한 인재들이 누군들 양양하게 기를 펴고 아름다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신과 같은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존재입니다. 저하께서 또한 무슨 돌보고 아낄 것이 있어서 버림을 받아 자정(自靖, 스스로 편안)하려는 보잘것없는 바람을 이루어 주지 않으시고 감히 받들 수 없는 처지에 성대한 예를 이처럼 헛되이 하십니까?”

이러한 상서문에 대해서 당시 왕세자는 ‘즉시 빨리 올라와 나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돕도록 하라’고 답하였다.

 

1757년(56세, 영조 33년)

4월,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우암선생의 묘 이장에 제문을 지었다. 다음해 5월, 제자 이완(李浣)에게 격려의 글을 지어 주었다. 9월, 사위 홍락순의 『아송(雅誦)』에 글을 지어 주었다. 가을, 도봉서원에 다녀왔다.

 

1759년(58세, 영조 35년)

이해 왕세손(정조)이 책봉되었다.

2월, 좌권독(左勸讀)에 임명되고, 별유(別諭)가 내려졌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세자가 대리 중이어서 대신이 아니면 상소를 할 수 없는 법이라 상소가 되돌려졌다.

아들 김리안이 진사가 되어 궁에 들어가자 임금이 김원행을 올라오도록 재촉하였다. 재차 상소하였으나 임금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임금은 왕세손 교육을 위해서 김행원을 불렀으나 그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5월, 시강원 겸 진선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전에 올린 상소를 읽어본 뒤 답을 내렸다. 이에 석교까지 나아가 아이를 시켜 글을 올리고 사례한 뒤에 돌아왔다.

 

1761년(60세, 영조 37년)

8월, 장악원 정에 제수되고, 9월에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 10월, 김봉한(洪鳳漢)의 추천으로 통정계(通政階)에 올랐다. 11월, 공조 참의, 성균관 좨주에 임명되었으나 글을 올려 사직하였다.

 

1763년(62세, 영조 39년)

2월, 찬선 송명흠(宋明欽)이 명령을 받고 입조(入朝)하여 김원행을 초치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올라오도록 하였으나, 누차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다음해 박세채(朴世采)를 문묘에 모실 때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곧 취소되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 현감으로 있는 아들 김리안을 만나러 가는 길에 송명흠과 함께 속리산에 다녀왔다.

 

1765년(64세, 영조 41년)

3월, 괴산 화양동에 다녀오는 길에 다시 속리산을 유람하였다.

 

1767년(66세, 영조 43년)

1월, 부인상을 당하고, 『정해내상기(丁亥內喪記)』를 지었다.

 

1768년(67세, 영조 44년)

손아래 처남 송명흠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9월, 찬선에 임명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이에 상소의 어구를 문제 삼아 임금이 해임시켰다.12월, 홍봉한의 요청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었다.

 

1770년(69세, 영조 46년)

옥계폭포를 유람하였다. 다음해 동춘 송준길의 유허인 월성초당, 옥천의 이지당에 다녀왔다.

 

1772년(71세, 영조 48년)

7월 7일, 사망하였다. 9월, 양주 도산에 장사 지냈다.

『영조실록』(119권, 영조 48년 12월 30일)에 다음과 같은 졸기가 실렸다.

“성균관 좨주(祭酒, 종3품의 관직) 김원행이 사망하였다. 김원행의 자(字)는 백춘(伯春)으로 안동 사람이다. 충헌공 김창집의 손자인데, 문간공 김창협의 후손으로 입적하였다. 출생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기개와 도량이 빼어나 선배들이 모두 국가의 그릇으로 인정하였다. 1722년부터는 산골에 물러가 살면서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에 마음을 썼다. 대개 김창협이 남긴 사업을 이어받아 행한 것이다. 성(性)과 명(命)의 근본을 통찰하고 이기(理氣)의 묘(妙)를 깊이 탐구하였는데, 조용히 깊고 깊이 생각하더니 각각 그 극(極)을 이해하였다. 평소에 하는 사업이 공평하고, 정의롭고 확실하며, 의리(義理)를 구별함이 엄격하고 명쾌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한 세상 유학자들의 중심이 되었고 관직에 발탁되어 벼슬이 공조 참의·좨주·찬선에 이르렀다. 임금의 사랑과 대우가 융숭하여 관직 임명장을 자주 내렸는데, 매번 사양하며 종신토록 나오지 않으니,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지금에 이르러 졸하였는데, 나이는 71세이며 『미호집(渼浩集)』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1799년에 문집이 간행되었다. 1805년(순조 5년)에 ‘문경(文敬)’으로 시호를 받았다.

김원행의 성리학 사상, 즉 인물성론, 심설, 명덕설은 낙론계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박윤원(朴胤源, 1734∼1799), 오희상(吳熙常, 1763∼1833), 홍직필(洪直弼, 1776∼1852), 전우(田愚, 1841∼1922) 등이 그의 학설을 계승하였다.(박학래 435) 또 그의 ‘실심(實心)’과 실용의 학문 정신은 제자 홍대용에게 전해져 조선 실학으로 꽃을 피웠다.

 

<참고자료>

『영조실록』119권.

「김원행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김인규, 「김원행의 학문과 석실서원에서의 강학활동」, 『동방학』22, 2012

박학래, 「미호 김원행의 성리설 연구-18세기 중반 락론(洛論)의 심성론에 유의하여」, 『민족문화연구』71, 2016

기우만(奇宇萬) 3


기우만(奇宇萬) 3                                                       PDF Download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은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학자이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을미사변 직후 호남창의의 총수로 활약하였다.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손자로 그 학문과 위정척사(衛正斥邪,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함) 사상을 계승하여 그것을 항일의병 운동으로 구현하였다. 개화기 호남의 대표적인 유림으로 평가된다. 저서로 『송사선생문집』이 있다.

 

1846년(1세, 헌종 12년)

8월 17일, 장성부 탁곡(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소곡리)에서 부친 기만연(奇晩衍)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행주(幸州, 경기도 고양)이며,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혹은 학정거사(學靜居士)이다. 나중에 참봉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853년(8세, 철종 4년)

여름에, ‘고문(古文)’을 읽었다. 12월, 할아버지 노사(蘆沙) 기정진을 모시고 하사(下沙)로 이사하였다.

 

1854년(10세, 철종 5년)

사서(四書, 논어·맹자·대학·중용)를 읽었다. 13세 경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과 『강목(綱目)』을, 14세 경에는 『심경(心經)』을 읽었다.

 

1861년(16세, 철종 12년)

『주역』, 『예기(禮記)』, 『춘추』 등을 읽었다. 할아버지 기정진을 모시고 갈전으로 옮겨 지냈다.

 

1862년(17세, 철종 13년)

2월에 다시 하사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삭녕 최씨 최인석(崔錫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다음해 여름에 남원의 제암서숙에 가서 처조(妻祖, 부인의 할아버지)인 최정익(崔挺翼)에게 과문(科文, 과거시험에 통용되던 여러 가지 문체의 글)을 배웠다. 가을에 『좌전(左傳)』을 읽었다.

 

1866년(21세, 고종 3년)

할아버지 기정진이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다. 이 시기부터 기정진의 위정척사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외국인들과 통상을 거부하고, 향촌에서 군사를 조련하여 무기를 제작하고 서양세력의 침약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방책을 제시하였다.(조일형 198-199쪽)

 

1869년(24세, 고종 6년)

여름에 추산정에서 강회 모임을 가졌다. 10월에 승보복시(陞補覆試)에 응시하여 삼장(三場, 초장, 중장, 종장의 세 단계 시험)에 수석을 하였다. 다음해 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여름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주역』을 강론하였다.

 

1874년(29세, 고종 11년)

봄에 고양의 선영에 성묘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성환에서 면암 최익현을 만났으며, 전의(全義,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 들러 임헌회(任憲晦)를 만나고 계룡산을 유람하였다. 가을에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1875년(30세, 고종 12년)

겨울, 고진원의 창촌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월송으로 이사하였다. 다음해 1월에, 부친상을 당하다. 이후 부친을 대신하여 할아버지 기정진을 극진히 모시고 그의 학문을 배웠다.

 

1877년(32세, 고종 14년)

전년에 크게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자 기민(飢民)의 구호에 나섰다.

 

1878년(33세, 고종 15년)

4월, 암행어사의 추천을 받았다. 5월, 할아버지 기정진의 명을 받들어 월송리에 담대헌을 지었다.

 

1879년(34세, 고종 16년)

1월, 김석귀(金錫龜), 정재규(鄭載圭), 정의림(鄭義林) 등과 함께 할아버지가 지은 『납량사의(納涼私議)』, 『외필(猥筆)』등을 강론하였다. 12월,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기우만은 이때부터 노사 기정진을 이은 노사학파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노사학파는 호남지역의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활동의 기반이 되었다.(조일형 198쪽)

 

1880년(35세, 고종 17년)

아들 기낙도(奇洛度)가 태어났다. 다음해 여름 할아버지가 남긴 글을 정리하였다.

 

1882년(37세, 고종 19년)

4월, 서자(庶子) 기숙도(奇淑度)가 태어났다. 6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즈음부터 서양과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이 시작되었다. 8월, 익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83년(38세, 고종 20년)

봄에 『노사집(蘆沙集)』을 간행하였다. 11월, 나주의 초지로 옮겨 거처하였다. 12월,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이 내방하였다.

다음해(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당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고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거사는 실패하고 개화당은 몰락하였다. 조정은 더욱 수구적으로 변하고 청나라 세력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1885년(40세, 고종 22년)

2월, 삼가의 물계로 정재규를 방문하였다. 진주의 월횡으로 가 조성가(趙性家)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리산, 가야산, 수승대 등을 유람하였다. 8월, 김석귀가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다음해 7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1888년(43세, 고종 25년)

겨울, 지인들과 월강(月講, 매월 열리는 강학회)을 설치하였다. 다음해 가을, 능주의 정의림(鄭義林)을 방문하였다.

 

1890년(45세, 고종 27년)

정재규, 김현옥 등과 함께 노사 기정진이 지인들과 문답한 글을 편찬하여 『답문류편(答問類編)』으로 간행하였다. 8월, 향음주례를 행하였다.

 

1892년(47세, 고종 29년)

가을, 동복의 물염정과 적벽, 순천의 송광사를 유람하였다. 다음해 11월, 고진원의 중흥동으로 돌아와 살았다.

 

1894년(49세, 고종 31년)

12월, 마을 모임을 열어 동학도를 물리칠 방도를 모색하였다.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다.

 

1895년(50세, 고종 32년)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동학도를 물리칠 방책을 묻자 편지로 답하였다. 이건창(李建昌)이 유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방문하였다. 윤5월, 동학당을 평정하였다고 하는 『나주평적비(羅州平賊碑)』 비문을 지었다. 이해 8월 명성황우가 시해되고 겨울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상소(『乙未疏』)를 올려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복수하고 단발령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을미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머리털을 훼손하라는 명령을 들은 후로부터 문을 닫고 곡기를 끊어서 갑자기 죽어 세상을 보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대개 황후(민비)의 원수는 곧 신하들이 함께 와신상담해야 할 자인데 국가의 형세가 날로 깎이어 설욕할 희망이 없습니다. 전장(典章)과 문물은 여러 성조(聖朝)에서 전수된 옛 법도인데 하루아침에 개변하여 다시 회복할 기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훼발령까지 이르니 혼란스러움이 지극합니다.

대개 나라는 망하지 않음이 없으니, 모발을 훼손하여 존재하기 보다는 차라리 모발을 보존하여 망하는 것이 낫습니다. 사람은 죽지 아니함이 없으니, 모발을 훼손시켜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모발을 보존하여 죽는 것이 낫습니다.”

 

1896년(51세, 고종 33년)

1월, 유인석(柳麟錫)의 경기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대응하여 기우만도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2월,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등 200여 명의 지사들과 나주로 가서 전열을 정비하고, 호남대의소장(湖南大義所將)이 되었다. 상소를 올려 의거를 보고하였으나 전달되지 않았다. 사방에 통문을 돌려 30일 광주에 집결하기로 약속하였으나, 27일 조정에서 선유사 신기선 등이 내려와 의병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에 통곡하고 해산하였다.

8월, 국치를 갚지 못하자 삼성산 꼭대기에 삼산재를 짓고 그곳에 줄곧 머물러 외부활동을 끊었다.

이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기우만, 『송사집』권1 「漫題」)

 

이제부터 우직하게 처세를 하고 싶지만

커다란 집을 누가 기둥하나로 버티겠는가.

서툰 목수가 제 손만 다치는 것을 이제 알고서

목을 움츠리고 산에 들어와 썩은 선비가 되었다.

 

다음해 10월에 명성황후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기우만은 산에 올라 통곡하고 삿갓이며 의복, 이불을 모두 흰색으로 하여 예를 갖추었다. 그 즈음 고종이 사람을 보내서 귀가할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 당시 지인 조성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엎어진 둥지에 온전한 알이 없듯이, 현인군자들이 유리되고 도망쳐 숨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저 집에 사는 제비가 어찌 화가 장치 미치려 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혀를 끌끌 차게 합니다. 군자는 곤궁 속에서 형통하니 바로 이때가 그렇습니다. 지리산 바위동굴에서 크게 『춘추』를 읽는다면 어찌 꼭 노중련(鲁仲连,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 처럼 동해를 밟고, 백이(伯夷, 은나라 말엽의 사람)처럼 수양산에 오를 것이 있겠습니까? 저의 처신은 그 마땅함을 얻지 못했으니 삼성산 산중으로 들어가 수풀 속에 집을 지어 인생을 마치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이 5칸짜리 집을 지어 지난달부터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집과의 거리는 5리로 가깝습니다. 멀리 보낼 편지라 감히 장황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1898년(53세, 고종 35년)

10월, 장성의 담대헌에서 『노사집』을 다시 발간하였다. 다음해 봄에 삼산재 북쪽에 단을 설치하고 앞선 성인들과 스승에게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1900년(55세, 고종 37년)

7월, 중추원 의관에 제수되고 주임관에 서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다음해 정재규 등과 함께 단성의 신안정사에 간역소(刊役所)를 설치하고 『노사집』의 세 번째 출간을 준비하였다. 그해 11월, 최익현을 찾아뵙고 조부 기정진의 신도비명을 받았다.

 

1902년(57세, 고종 39년)

4월, 영남의 최동민, 권봉희 등이 기정진이 지은 『외필』의 내용을 트집 잡아 통문을 발송하고 『노사집』을 폐기하려고 하였다. 다음해 11월 광주의 주흥동(朱興洞)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1905년(60세, 고종 42년)

1월, 관찰사 이도재가 향약을 설치하면서 도약정(道約正)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10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乙巳疏』)를 올려 ‘오적(五賊)’의 처단을 청원하였다.

 

1906년(61세, 고종 43년)

1월, 여론을 모아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고자 계획하였다. 동지들과 곡성에서 회합을 가지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여름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압송한다는 소식을 듣고 중도에서 포기하였다. 10월, 의병을 모의했다 하여 왜경에 의해 광주 경무서에 구금되었다.

이때 기우만이 일본 경찰에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조일형 215)

 

“1895년 을미년 망극의 변고는 너희가 한 짓이다. 조선의 신민이라면 누가 너희를 진멸시켜 너희의 고기를 먹고 너희의 가죽에 눕고자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바야흐로 동지를 불러 모아 곧장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려고 하였으나 선유사가 와서 회유하여 부득이 해산하고 돌아가 입산하여 토굴을 지어 생활하였다. (중략) 손 안에는 비록 작은 무기도 없지만 흉중에는 항상 만 명의 갑옷 입은 병사가 있다. 강물소리를 들으면 철갑옷을 털어 입고 동쪽(일본)으로 정벌 갈 것을 생각하고, 산수를 보면 거짓 병사로 위장시켜 오랑캐를 축출하고 싶어진다. 비록 온 나라 사람들이 의거를 일으켜 나를 추대하더라도 나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살아서는 이씨(조선)의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이씨의 귀신이 되는 것으로 종결지을 것이다.”

 

1907년(62세, 순종 1년)

봄에 ‘을사오적’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이유로 영광 경무서에 체포되었다. 4월 5일, 서울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20일에 석방되었다. 다음해 1월에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다시 거사를 꾀하다 고종이 퇴위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뒤 은둔하였다.

 

1910년(65세, 순종 4년)

지난해(1909년)에 『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하여 의병에 참가했던 호남지역 의사들의 충정을 기렸다.

이해 7월,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침식을 폐하고 천인(賤人)을 자처하며 사람들을 일체 만나지 않았다. 다음해 3월 남원의 사촌으로 옮겨 가 살았다.

 

1913년(68세)

12월, 부인상을 당하였다.

 

1916년(71세)

10월 28일, 사망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그는 제자들에게 “내 나이가 80을 바라보니 죽는 것은 한이 없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원수가 소멸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2월, 덕만에 장사를 지냈다. 뒤에 순창의 무이산으로 이장하였다. 1928년에 장성의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자료>

기우만, 『송사집』

「기우만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김기림, 「송사 기우만의 시세계 고찰」, 『동양학』60, 2015

박성수, 「기우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조일형, 「松沙 奇宇萬의 위정척사사상과 의병정신 : 상소문과 담판문을 중심으로」, 『용봉인문논총』52, 2018.

이단상(李端相) 2


이단상(李端相) 2                                                        PDF Download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은 조선시대의 문관으로 부수찬, 교리, 병조정랑, 인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상수학을 중심으로 독창적이며 개방적인 학풍을 구축하고 낙론의 대표격인 김창협(金昌協)이 심학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쳐 낙론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는다.(참고 우경섭 461쪽) 별칭으로 유능(幼能, 자), 정관재(靜觀齋, 호), 서호(西湖, 호) 등을 사용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28년(1세, 인조 6년)

5월 25일(음력, 이하 월일은 모두 음력임), 남양부(지금의 경기도 수원, 화성, 인천 일부지역)에서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명한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친을 배척한 척화신이며 대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역임한 이정귀(李廷龜, 1564∼1635)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관련된 외교의 일선에서 활동하였으며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본관은 연안(延安), 즉 지금의 황해도 연백이다. 연안 이씨 가문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문가중 하나였다.(우경섭 462쪽)

 

1635년(8세, 인조 13년)

민후건(閔後騫)에게 역사서를 배웠다. 4월, 할아버지 문충공 이정귀(李廷龜)의 상을 당하였다.

 

1636년(9세, 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이때 형 이가상(李嘉相)과 함께 청나라 군대에 붙잡혔으나 친척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형 이가상은 어머니 박씨를 구하러 적진에 뛰어들어 청군의 칼에 사망하였다.

 

1637년(10세, 인조 15년)

1월에 강화도가 함락되자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 2월에 석방되어 송도를 거쳐 부친이 거처하는 수원 쌍부로 돌아왔다. 모친상을 당하였다.

 

1639년(12세, 인조 17년)

10월, 강원 감사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원주 순영으로 갔다.

 

1640년(13세, 인조 18년)

8월, 부친을 따라 풍악산 및 영동의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였다. 10월, 부친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해 가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42년(15세, 인조 20년)

3월, 관례를 행하였다. 전의 이씨 이행원(李行遠, 1592∼1648)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행원은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으며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 치적을 많이 쌓고 일생을 가난하게 지내 청백리에 뽑힌 사람이었다. 12월, 부친 이명한이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청나라 심양에 잡혀갔다.

 

1643년(16세, 인조 21년)

4월, 부친이 심양에서 풀려나 돌아오자 안주로 마중을 나갔다. 병자호란으로 겪은 이러한 경험 때문에 그는 북벌을 주장했던 우암 송시열(1607∼1689)에 적극 동조하고 그를 따르던 송준길, 김수항, 홍명하 등 학자들과 교류하였다.(우경섭 463)

 

1645년(18세, 인조 23년)

4월, 부친상을 당하였다. 며칠 뒤 작은형의 상을 당하였다.

 

1648년(21세, 인조 26년)

8월,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9월, 큰형 청호공(靑湖公) 이일상(李一相)을 금성 임소로 찾아가 뵈었다. 영암 월출산을 유람하였다. 11월, 서울로 돌아왔다.

 

1649년(22세, 인조 27년)

4월,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10월, 승정원 가주서, 세자시강원 설서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4월, 가주서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다. 6월에 설서가 되었으며, 10월에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651년(24세, 효종 2년)

6월, 대교 및 겸설서가 되었다. 왕명을 받들어 강화도 사서 보관서에 다녀왔다. 12월, 봉교가 되었다.

 

1652년(25세, 효종 3년)

7월, 상소하여 모화관 열무(閱武, 무술 관람)를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효종실록』 7월 23일 기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봉교 이단상이 상소하기를, ‘관무재 행사가 마침 자전(慈殿, 임금의 어머니)께서 목욕하시는 날에 있게 되므로, 바깥 이야기가 혹시 자전께서 성에 올라 구경하실 것이라 합니다. 신은 이 일이 실효는 없고 한갓 소문만 번거롭게 할까 염려됩니다. 그만둘 수는 없더라도 날짜를 고쳐 잡아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응답하지 않았다. …… (임금은) 이때 시행하려던 관무재를 특별히 명하여 날짜를 앞당기게 하였다.”

 

8월,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며 실록청 낭청이 되었다. 10월, 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가 이어서 경기도 도사(都事)가 되었다. 12월, 부수찬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경연 검토관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다.

 

1653년(26세, 효종 4년)

이해부터 효종의 북벌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단상은 이즈음부터 1660년경(효종이 사망하고 현종이 등극한 직후) 중앙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북벌론자로서 효종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였다.(우경섭 465)

3월, 부교리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경연 시독관과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였다. 6월에 교리, 7월에 헌납이 되었다가 병조 좌랑을 거쳐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해 2월에 이단상은 부수찬 자격으로 부응교 심지한(沈之漢) 등과 함께 재난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효종실록』 2월 13일자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을 반성하는 것으로, 겉치레만 일삼지 말고 실질적인 덕을 닦도록 힘써야 합니다.

둘째, 산림(山林)의 선비들을 끝까지 잘 기용하고 정직한 신하를 내치지 말고 포용해야 합니다.

셋째, 언로를 널리 열어, 마땅히 여러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시어 망령된 말이라도 죄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 궁중에서 함부로 백성들의 전답을 점유하는 폐단을 명백히 조사하여 원망을 품은 사람이 없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 호서(湖西)지방에서 올리는 임금님 수라상 반찬은 제값을 주고 올리도록 해야 합니다.

여섯째, 능(陵)에 거둥하실 때에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은 마땅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1654년(27세, 효종 5년)

10월, 남학 교수를 겸하였으며,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가 교리에 임명되었다. 12월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차례 이조, 병조의 정랑을 지내고 의정부 사인으로 지제교를 겸하였다.

 

1655년(28세, 효종 6년)

5월, 교리가 되었으며, 8월에 겸사서에 임명되었다. 9월에 대제학 채유후의 천거에 의하여 김수항, 남용익, 이은상 등과 함께 사가독서를 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 임금이 휴가를 주어 글을 읽음)는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는 제도였다.

 

1656년(29세, 효종 7년)

1월, 부수찬에 임명되었다가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윤5월에 부교리가 되었다. 6월에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부교리, 이조 좌랑, 헌납,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2월에 이조 정랑이 되었다. 이조 정랑은 젊은 문관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였다. 관리 임용대상자의 명단을 작성하거나 중요 직책으로 꼽히는 삼사 관원의 임명제청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자리를 거친 사람들은 출세도 빨랐고 대개는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1657년(30세, 효종 8년)

2월, 겸문학이 되었다. 6월에 의정부 사인이 되었으며,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였다. 아울러 경연 시강관,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7월에 사간이 되었으며, 12월에 응교가 되었다. 이때 그는 송준길(宋浚吉)을 불러올 것을 청하였다.

 

1658년(31세, 효종 9년)

1월, 겸보덕에 임명되었으며 동학 교수가 되었다. 2월에 집의가 되고 3월, 응교에 임명되었다. 11월에는 호남 암행어사가 되어 여러 고을의 폐단을 살펴보고 구제책을 건의하였다.

 

1659년(32세, 효종 10년)

1월, 명을 받들어 각 지방의 폐막을 위에 보고하였다. 2월, 응교가 되었으며, 필선을 겸하였다. 6월, 사인이 되었다. 사인은 정4품의 문관이다. 12월에, 부응교에 임명 되었다. 부응교는 홍문관의 종4품 관직이다.

 

1660년(33세, 현종 1년)

1월, 사인이 되었다가 다시 2월에 부응교가 되었다. 3월, 종부시 정이 되었다. 5월, 집의에 임명되었다.

 

1661년(34세, 현종 2년)

1월, 사인이 되었다. 부묘도감 낭청이 되었다가 사직하였다. 이즈음부터 정국이 급변하여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미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우경섭 464) 6월, 청풍 부사가 되었다. 청풍은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군 일부와 청풍군이다. 이듬해 7월까지 약 1년간 재직하였다.

 

1662년(35세, 현종 3년)

7월, 응교가 되었다가 9월, 사인이 되었다. 11월, 남한산성의 천주사에 가서 독서하였다.

 

1663년(36세, 현종 4년)

이즈음 저술에 매진하였다. 『대학집람(大學集覽)』, 『사례비요(四禮備要)』, 『염락정음(濂洛正音)』 등을 편찬하였다. 송시열, 송준길 등과 편지로 왕래하고 영령전 개수에 관해 논하였다.

 

1664년(37세, 현종 5년)

1월, 사간,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2월, 성균관 사성이 되었다. 얼마 뒤 집의가 되었다가 전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즈음 입지권학(立志勸學, 뜻을 세우고 학문을 권장함)에 관한 다섯 조목을 상소하였다. 3월, 사간이 되었다. 4월, 응교가 되었다. 동호서당에 거쳐하며 『심경(心經)』을 읽었다. 5월, 인천 부사가 되었다. 이때는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서 스스로 자청한 것이었다. 약 5개월간 인천에 머물렀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곤궁한 현지 백성들을 위해서 적극적인 진휼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사실이 암행어사의 좋은 평가를 받아 말 한필을 상으로 받았다.(우경섭 464)

10월, 집의가 되었다. 11월, 월과(月課)를 짓지 않아 파직되었다. 사실은 송시열을 두둔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린 것이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조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우경섭 467)

 

1665년(38세, 현종 6년)

9월, 양주의 동강 영지동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1666년(39세, 현종 7년)

1월, 형 이일상(李一相)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4월, 『주역』을 읽었다. 영지동에 정관재(靜觀齋)를 지었다. 10월, 집의, 겸보덕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67년(40세, 현종 8년)

5월, 보덕에 임명되어 누차 사직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다가 교체되었다. 이즈음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 김수항의 아이들을 제자로 받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1668년(41세, 현종 9년)

3월, 응교가 되어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다가 질병을 이유로 교체되었다. 9월, 우암 송시열과 편지하여 『대학』 ‘물격(物格)’의 뜻에 대해 논하였다. 10월, 교리에 제수되어 누차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10월 21일, 송준길이 임금께 이단상을 추천하였는데, 『현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연을 열 때에는 문학(文學, 문장의 학문)을 한 선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단상은 학문이 해박하고 식견이 있는 사람인데 지금 먼 시골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민적(李敏迪) 형제는 모두 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인데 한 사람은 파직되었고 한 사람은 외방에서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모두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1669년(42세, 현종 10년)

1월, 동부승지 지제교가 되었다.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였다. 2월,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다. 3월, 부제학이 되었다. 7월, 병환이 심하여 임금이 약을 하사하였다. 9월 19일, 사망하였다.

『현종실록』에 실린 「전 부제학 이단상의 졸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 부제학 이단상이 사망하였다. 이단상은 판서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다. 젊어서 과거에 올라 좋은 벼슬들을 두루 역임했으며 깨끗하다는 명성이 있어 동료들로부터 추앙받았다.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양주(楊州)에 물러나 살면서 여러 차례 불러도 벼슬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사람들이 명리에 욕심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의 운명을 말하는 자가 이단상을 두고 말하기를 ‘만일 당상관에 오르게 되면 수명이 반드시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여서 그가 벼슬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송준길이 경연에서 임금께 아뢰어, 부제학에 승진, 임명되었는데, 이단상이 임금께 감사함을 표하러 왔다가 서울에서 병을 치료하던 중 며칠 만에 죽었다. 이단상은 본래 송시열과 송준길에 붙어 다녔다. 송준길이 일찍이 임금 앞에서 호남 선비 정개청(鄭介淸)이 서원을 철거할 것을 요청했는데 이단상도 상소하여 정개청을 헐뜯었다. 윤선도(尹善道)가 소장을 올려 정개청을 옹호하고 이단상을 배척하면서 그의 아비 이명한이 이이첨(李爾瞻) 부자에게 아첨하여 ‘문성(文星)이 지금 덕성(德星)과 함께 있다.’라는 시를 지었음을 거론해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단상이 또 일찍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송시열의 예에 대한 논의는 정정 당당하여 백세(百世) 이후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의혹될 게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금을 속인 그의 죄가 여기에서 극에 이르렀다. 이것이 어찌 이른바 소인의 거리낌 없는 짓이 아니겠는가?”

 

이단상을 죽음을 애석해하는 졸기임에도 이단상을 비판한 대목이 눈에 띈다. 이는 『현종실록』(1677년)의 편찬자들이 서인에 속한 이단상과는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던 남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서인들이 나중에 이들 남인을 몰아내고(1680년 경신환국 때) 현종실록을 다시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현종개수실록』이다. 새 기록(『현종개수실록』21권, 현종 10년 9월 19일)에는 졸기가 이렇게 바뀌었다.

 

“전 부제학 이단상이 사망하였다. 이단상은 이조 판서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고, 좌의정 이정귀(李廷龜)의 손자다. 집안이 대대로 문장과 복록(福祿)으로 온 세상에 성대하게 일컬어졌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재주가 있다는 칭찬이 점차 성해졌다. 하지만 방랑을 좋아하는 문사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효종대 말년에는 신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고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 지역에 물러나 있었다. 비록 간간이 고을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오랫동안 있지 않았다. 글을 읽어 뜻을 구하고 담백하게 스스로를 지켰다. 또 스승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날이 개발되었는데, 대체로 사람됨이 총명하고 올바랐다. 이 때문에 혼미한 벼슬길에서 스스로 벗어나 인고하면서 뜻을 돈독하게 지녀, 마침내 확립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강론한 견해는 대부분 명확하고 투철하였으므로 선비들에게 존중을 받았다. 불행하게 일찍 졸하였으니, 애석하다. 임종할 때 유언의 상소를 올려 훌륭하고 덕 있는 이를 초치하고 큰 사업에 더욱 힘쓰라고 임금께 권하였으며, 또 장식(張栻)의 말을 인용하여 남을 믿어 맡길 때는 일신의 편견을 막고, 남을 좋아하고 미워할 때에는 천하의 이치에 공변되게 하라 요청하였고, 아울러 약을 하사한 은전을 사양하였다.”

 

이 해 11월 19일, 가평 조종현에서 장사를 지냈다. 저서로 『대학집람(大學集覽)』, 『사례비요(四禮備要)』, 『성현통기(聖賢通紀)』, 『정관재집』이 있다. 문하로 아들 이희조(李喜朝)와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임영(林泳) 등이 있다. 이희조는 부친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 노력하였다. 그는 관료의 길을 외면하고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둘째아들 이하조(李賀朝, 1664∼1700) 역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3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단상은 두 아들 외에 다섯 딸을 낳았다. 이단상 가문은 안동 김씨 가문, 정제두 가문, 여흥 민씨 가문 등 당시의 유력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어 17세기 서울 지역 명문 집안의 중심이 되었다.(우경섭 462)

1672년에 현석 박세채(朴世采)가 행장을 완성하였다. 아들 이희조(李喜朝)가 연보를 지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에게 수정을 부탁하였다. 1676년 김수항이 지문을 지었다. 1680년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이조참판 겸 경연,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에 추증되고,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1682년에 시집과 문집이 간행되었다. 1702년에 인천지역 유생들이 이단상을 기리며 학산서원 설립을 추진하였다.(우경섭 474) 이곳에 아들 이희조와 함께 배향되었다. 1706년에 이희조가 청풍 부사로 재직하면서 별집과 연보를 간행하였다. 1743년에 영조 임금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단상은 율곡학파 안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율곡학파는 이이가 주장한 ‘기승리발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원형 그대로 받아들이는 직계 계열과 좀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계열이 있는데, 후자에 이재 계열과 이단상 계열이 있다. 이단상 계열은 김창협, 김창흡, 임영, 박필주 등의 학자들이 있다. 이들 낙론계열의 학자들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리’를 ‘도리’가 드러나는 것’으로 보고, 칠정(七情)은 ‘기’의 틀(氣機)‘이 발동한 것으로 본다.(김승영 2)

 

<참고자료>

『효종실록』

「이단상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전 부제학 이단상의 졸기」, 『현종실록』17권, 현종 10년 9월 19일

「전 부제학 이단상의 졸기」, 『현종개수실록』 21권, 현종 10년 9월 19일

권오혼, 「이행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김승영, 「율곡학파의 이단상 계열이 이해한 ‘리’의 의미」, 『동양철학』39, 2013

우경섭, 「인천 학산서원과 이단상 ·이희조 부자」, 『한국학연구』38, 2015

이장희, 「이단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조동영, 「이단상」, 율곡학프로젝트 <율곡학파 인물들>

김창흡(金昌翕)


김창흡(金昌翕)                                                             PDF Download

 

김창흡(金昌翕, 1653년∼1722년)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조선 시대 산수 기행문학과 관련되어 주목받는 시인이기도 하다.(참고 이경수 글, 57쪽) 고위 관직을 연임한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며, 파주목사,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김광찬의 손자다. 그는 집안 대대로 고위 관리를 역임한 안동 김씨 가문 출신이었으나 당쟁의 화를 피해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시를 쓰며 산수를 즐기고 은둔생활을 추구하였다. 이단상(李端相)의 제자로 저서에 『삼연집』이 있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호락논쟁에서 낙학파의 이론 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1653년(1세, 효종 4년)

윤7월 5일(음력, 이하 모두 음력임), 서울에서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증조 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은 좌의정을 지냈으며 할아버지 김광찬(金光燦)은 동지중추부사 증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다.

손위 형으로 영의정과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김창집(金昌集), 예조판서·지돈령부사 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이 있다. 동생으로 김창업(金昌業)과 김창즙(金昌楫)이 있다. 어머니는 해주 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로, 안정 나씨(安定羅氏)이다.

 

1665년(13세, 현종 6년)

동몽교관 김시량(金時亮)에게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부귀와 화려한 것을 싫어하였으며, 1667년경부터 형들과 함께 이단상(李端相, 1628∼1669)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68년(16세, 현종 9년)

1월, 이세장의 딸 경주 이씨와 결혼하였다. 2월, 할아버지 김광찬이 사망하였다.

 

1670년(18세, 현종 11년)

큰 아버지 김수증이 당쟁으로 불안해진 정국에 대비하여 춘천에 농수정사를 짓고 장차 은둔할 장소를 마련하였다. 김수증은 한성부 판윤,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바 있다.

 

1671년(19세, 현종 12년)

형 김창협과 천마산, 성거산, 금강산 등지를 유람하였다. 이 때 금강산 여행은 맨 처음이었다. 이후 그는 일생동안 총 6차례의 금강산 여행을 했다. 여행할 때 수시로 시를 남겨 후대에 그는 금강산 기행 한시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힌다.(이경수 57쪽)

 

1673년(21세, 현종14)

2월, 진사시에 응시하여 1등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산기슭에 낙송루(雒誦樓)를 세우고 독서하며 지냈다. 이즈음 그는 수련서, 참동계 등 도교 책을 가까이하고 시문에 힘을 쏟았다.(이경수 58쪽)

이해에 속리산, 백마강을 유람하고 시를 지었다. 다음해에는 평양을 유람하였다.

 

1675년(23세, 숙종 1년)

가을, 인제 한계령을 유람하였다. 9월, 영암에서 근무하는 부친을 찾아뵈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그곳을 방문하였다. 10월, 월출산, 죽림정 등을 유람하고 시를 썼다.

그는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하여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가 이러한 취미를 갖게 된 것은 가문의 정치적 위상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아버지 김수항은 남인과 서인이 서로 싸우는 가운데 서인의 지도자 위치에 서있었다. 큰아버지 김수증, 작은 아버지 김수흥 역시 고위관리였다. 그만큼 그 가문은 당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서 항상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김창흡은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산수를 유람하며 은둔 생활을 고민하고 있었다.(이경수 57쪽)

 

1676년(24세, 숙종 2년)

봄에 도갑사, 만덕산 백련사, 북한산 등을 유람하였다. 6월, 둘째 형인 김창협과 같이 삼각산 중흥사 들어가 독서를 하였다. 11월, 남산에 은거하는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1638∼1689)를 찾아가 뵙고 강학하였다.

1678년(26세, 숙종 4년)

2월, 형 김창협과 중흥사에서 책을 읽었다. 9월, 부친이 근무하는 철원을 방문하고, 겨울에 철원 보개산 대승암에 머물렀다.

 

1679년(27세, 숙종 5년)

3월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7월에 철원군 용화사에 거처하면서 삼부연의 절경을 즐기고 스스로 호를 ‘삼연(三淵)’으로 정하고 은둔 생활을 계획하였다. 김양행은 그를 일러 “거친 옷에 짚신을 어부와 아이들 사이에 섞여 사니 사람들이 문벌세가의 자제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 김창흡은 은둔자의 생애를 살려고 결정을 한 상태였다.(이경수 59)

이즈음에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읽고 「후천도설(後天圖說)」을 지었다.

 

1680년(28세, 숙종 6년)

3월, 용화촌의 석천사를 유람하였다. 4월,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여, 부친이 복권하여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우암 송시열을 찾아가 면담했다. 이즈음 형 김창협이 장원 급제하고 김창집도 관직에 나아갔다. 이때부터 1689년 기사환국으로 부친이 유배당할 때까지 김창흡 가문은 실세를 회복하고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1682년(30세, 숙종 8년)

백악산 남쪽에 낙송루를 짓고 문학인들과 함께 시모임을 열었다. 양주 송천, 속리산, 여주 등을 유람하였다. 우의정 김석주(金錫胄)가 문장의 탁월함과 품행의 훌륭함을 내세워 김창흡을 조정에 추천하였다.

 

1683년(31세, 숙종 9년)

가을, 조계사, 봉흥사를 유람하였다. 12월, 동생 김창립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송시열이 거쳐하는 수원 만의촌을 방문하였다.

 

1684년(32세, 숙종10년)

가을에 양주의 일사정, 춘천의 청평산 운곡 등지를 유람하고 삼부연으로 들어갔다.

 

1685년(33세, 숙종 11년)

졸수재 조성기 선생에게 편지하여 태극도(太極圖)를 논하였다. 4월, 장악원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이해에 금강산, 미호(渼湖) 등지를 유람하였다. 금강산 여행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다음해 한강 상류의 저자도를 유람하고 부친의 노후를 위해서 그 곳 현성(玄城)에 정자를 지었다.

 

1688년(36세, 숙종 14년)

3월, 청풍, 단양, 영월, 제천 등을 유람하였다. 가을에 현성에 머물렀다.

 

1689년(37세, 숙종 15년)

2월,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진도로 유배되었다. 김창흡도 부친을 따라갔으나, 4월에 부친이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부친의 시신을 운구하여 경기도 양주 율북리 운곡에서 장사지냈다. 다음해 작은 아버지 김수흥도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김창흡은 설악산으로 가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691년(39세, 숙종 17년)

6월, 부친의 복을 마쳤다. 부친이 사약을 받은 이후에 김창흡은 극심한 좌절과 혼돈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심리적인 의지처로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는 동생에게 보낸 글에서 “만사는 끝났고, 유일한 치유책은 참선의 희열에 탐닉하는 것뿐”이라고 하였으며, “유교든지 불교든지 진실로 힘을 써서 오묘한 데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유독 나의 신세가 불교의 말에 감동되어 무엇인가 느끼게 하여 얼핏 의지할 것이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유호선 89쪽)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동생 김창즙이 편지를 보내와 경계하였다. 다시 『중용』을 읽고 크게 깨달았다.

 

1692년(40세, 숙종 18년)

여름, 양구에서 지냈다. 8월에, 설악산 곡백담에 들어갔다. 11월에 삼부연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음해 봄에 봄, 양근 국연에 거처하였다가 9월에 양근의 벽계로 이사했다.

 

1694년(42세, 숙종 20년)

4월, 부친의 명예와 관작이 회복되었다. 형 김창집도 명예를 회복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김창흡은 여전히 산수를 유람하면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즈음에 그는 「논맹정의(論孟精義)』,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을 읽었다. 다음해 강릉을 거쳐 신흥사, 상원사 등을 유람하고, 양주 목식동으로 들어갔다.

 

1696년(44세, 숙종 22년)

5월,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서연관에 선발되었다. 겨울에, 양주 석실의 송백당에 머무르며 형 김창협과 강학하였다. 이 다음 봄에 벽계로 돌아왔으며, 「지자설(智字說)」을 짓고, 가을에 인제 합강정을 유람하였다.

 

1698년(46세, 숙종 24년)

백천군수로 있는 형 김창집을 방문하고,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을 찾아가 보았다. 큰형 김창집이 강화 유수로 임명되자, 김창흡은 형의 임지를 방문하고 강화 마니산을 돌아보았다. 3월에 송백당에 머물렀다. 겨울에 다시 강화도에서 근무하는 김창집을 방문하였다.

이해 설악산에 은거지로 백연정사를 세웠다. 다음해 겨울에는 적성사에서 독서를 하였다.

 

1700년(48세, 숙종 26년)

봄, 강화에서 선친의 문집 『문곡집(文谷集)』의 인쇄에 참가하였던 장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8월, 문경, 속리산, 화양서원, 선유동 등지를 유람하였다. 9월에 형 김창집이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다. 김창흡은 그 뒤 숭양서원, 화담서원을 방문하였다.

 

1702년(50세, 숙종 28년)

3월, 목식동에 있으면서 독서를 하였다. 4월, 벽계로 돌아왔다. 신유(申愈)에게 편지를 써서 학문하는 요체를 논하였다. 10월에 양주 묘적사, 속리산 용유동 등지를 유람하였다.

 

1703년(51세, 숙종 29년)

2월, 종부시 주부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3월, 이덕수에게 편지하여 우암 송시열과 주자를 비난한 박세당(朴世堂)을 비판하였다. 6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1704년(52세, 숙종 30년)

이덕수(李德壽)에게 편지를 한 일로 소론에서 비난이 일자 집안의 손자뻘 되는 김명행(金明行)에게 편지를 하여 변론하였다. 송일원(宋一源)에게 편지를 써서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의 두 가문 자손들이 서로 논쟁하는 것을 훈계하였다.

 

1705년(53세, 숙종 31년)

8월, 세자익위사 익위가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9월, 양양, 강릉, 간성 등지를 유람하고, 설악산으로 돌아왔다. 송일원에게 편지하여 윤증(尹拯)의 문도들을 비판하였다. 이해 설악산에 은거지로 사용할 벽운정사를 조성하였다.

 

1706년(54세, 숙종 32년)

4월, 관서 지방을 유람하였다. 7월, 삼주에 있는 형 김창협을 찾아갔다. 8월, 부인 이씨가 사망하였다. 다음해 가을에 10월, 청평산을 거쳐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이 때 설악산 벽운정사가 완성되었다.

1708년(56세, 숙종 34년)

2월, 두류산을 유람하고, 안동을 거쳐 영남의 여러 곳을 유람하였다. 4월, 형 김창협이 사망하였다. 9월, 설악산으로 돌아와 곡운으로 들어갔다. 10월, 벽운정사가 불타 심원사로 거처를 옮겼다. 다음해 가을에 설악산 영시암을 완성하고, 「석담육곡(石潭六曲)」이라는 시를 지었다.

 

1710년(58세, 숙종 36년)

봄, 강릉 오죽헌, 간성 운근정 등을 유람하였다. 부친의 행록(行錄)과 부인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8월에 네 번째로 금강산에 올랐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빈 암자 찾아와 고요함을 배우네.

홀로 누워 선방의 문을 닫았다.

조용한 정원, 물통에 샘물 떨어지고

처마에 부는 바람, 떡갈잎이 날린다.

멍하게 있을 뿐, 누구와 벗하겠는가.

담담한 마음 뿐 돌아가고 싶지 않네.

길에서 만났네. 시 짓는 스님들

솔잎차로 배고픔을 달래주는구나.

1711년(59세, 숙종 37년)

포천, 김화, 금강산 등지를 유람하였다. 설악산의 갈역정사(葛驛精舍)가 완성되었다. 이현익(李顯益)이 『중용』의 ‘미발(未發)’에 대해서 묻자 거기에 답하였다.

김창흡은 인간의 마음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 즉 미발(未發)의 상태는 오직 착하기만 할 뿐이라는 순선(順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한원진, 권상하와 같은 호학파(湖學派)가 미발 상태에도 본연의 성(착한 본성)과 기질의 성(악한 본성)이 함께 있다는 주장과 대립된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미발순선설’을 인물성동론과 함께 ‘낙학(洛學)’으로 정의하였다.(이종우 109쪽)

이해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에 다음과 같은 「장안산영루감흥(長安山映樓感興)」이라는 시가 있다.

 

한밤에 어찌해서 일어나 머뭇거리나.

흐르는 물은 가는 사람 붙잡지 않네.

유람하던 즐거움 시를 지어 담아두고

잠자리 남겨 둔 누각에 달빛만 비치네.

종소리는 서리 내린 가지에서 울리고

붉은 기운은 산 중턱을 가로질러 흐르네

닷새 동안 산에 빠져 술도 잊었는데

한잔 들어 신선이 사는 곳에 감사드린다.

 

1712년(60세, 숙종 38년)

서울에 가서 석교에 갔다가 돌아왔다. 11월, 사은사로 가는 형 김창집을 송별하고, 설악산으로 돌아왔다.

 

1713년(61세, 숙종 39년)

봄, 영랑호, 신흥사 등을 유람하였다. 5월, 동생 김창즙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10월, 금강산 백화암에 머물렀다. 가족들을 사별한 자신의 노년의 슬픈 심경을 달래면서 다음해 봄까지 금강산에 체류하였다. 이때 승려들과 주역을 논하였다.

 

1714년(62세, 숙종 40년)

2월, 설악산으로 돌아왔다. 5월에 벽계에 머물렀다. 11월, 김화 수태사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평강 부석사로 이주하였다.

 

1715년(63세, 숙종 41년)

2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3월에 이천의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평강 희령을 돌아보았다. 여름, 곡운 화음동에 거처하였다. 가을, 곡운의 마을 입구에 곡구정사가 완성되었다.

 

1716년(64세, 숙종 42년)

2월,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상소문으로 비난을 받은 형 김창집에게 편지하여 앞으로 일을 논하였다. 배움을 청한 유숙기(兪肅基)에게 답서를 보내 사양하였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영평의 원통사와 곡구정을 방문하였다.

 

1717년(65세, 숙종 43년)

1월, 보개산 영은암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하였다. 2월에, 광주 서석산, 무주, 용담 등지를 유람하였다. 7월, 이재형(李載亨)에게 편지하여 사람과 동물의 본성에 대해서 논하였다. 9월, 곡운으로 돌아왔으며 10월에는 영평 명학재에 머물렀다.

 

1718년(66세, 숙종 44년)

2월, 조정에서 상을 당하여 복제를 물어왔으나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윤8월, 오대산을 유람하고 벽계로 돌아왔다. 11월, 영평 백운사에 머물다가 명학재로 돌아왔다.

 

1719년(67세, 숙종 45년)

1월, 장암에 들러 이희조(李喜朝)를 방문하고 벽계로 돌아왔다. 2월,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곡운으로 들어와 『독서일록(讀書日錄)』을 남겼다. 9월, 은진을 거쳐 고산 안심사에 머물렀다. 10월에 지평, 장령이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다. 임금으로부터 주자 관련 서적을 하사 받았다.

 

1720년(68세, 숙종 46년)

3월, 아들 김양겸(金養謙)이 근무하는 곳을 방문하였다. 다음 달에 구월산을 유람하였다. 6월, 숙종이 사망한 뒤 조정에서 복제 문제로 의견을 물어왔으나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김창집에게 편지하여 유생의 복제를 논하였다. 7월, 곡운으로 갔다. 동춘당 송준길의 손자 송요좌(宋堯佐)에게 편지하여 연보 발문의 부탁을 사양하였다.

 

1721년(69세, 경종 1년)

7월에 집의, 10월에 집의 겸 시강원진선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월, 동생 김창업(金昌業)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거제로 유배 가는 김창집을 전송하였다.

 

1722년(70세, 경종 2년)

2월 18일, 김창집의 편지에 답장을 하였다. 2월 19일, 절필시(絶筆詩)를 짓고 이틀 뒤인 21일, 사망하였다. 이날 『경종실록』에 이러한 졸기(卒記, 사망에 즈음한 기록)가 실렸다.

 

“세제 시강원(世弟侍講院) 진선(進善) 김창흡이 사망하였다. 김창흡의 자는 자익이고, 호는 삼연으로,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젊은 날 협기를 드날렸으며 약관(弱冠)의 나이에 진사가 되었다. 일찍이 장자의 글을 읽다가 마음속에 홀연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부터 세상일을 버리고는 산수 사이에 방랑하며 고악부(古樂府)의 시도(詩道)를 창도하여 중흥시킨 시조가 되었다. 또 도교와 불교에 탐닉하여 오랫동안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집안의 재앙을 당하자 비로소 그 형 김창협과 함께 학문에 종사하니, 그 견해가 때로 크게 뛰어났다. 만년에는 설악산에 들어가 거처를 정하고 『주역(周易)』을 읽었다. 스스로 ‘정자(程子)·주자(朱子)가 이른 곳이라면 나 역시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괴팍한 데 가까워 무릇 시론(時論)에 대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긴 글을 써서 당국자를 배척하였다. 말이 걸핏하면 다른 사람들의 조상을 비판하여 자못 처사(處士)로서 의논을 함부로 한다는 이름을 얻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많이 애석하게 여겼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수여하고자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망하니, 나이 70세이다.”

 

4월, 포천 묘곡에 장사 지냈다. 현재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에 그의 묘지가 보존되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 석실서원, 경기도 양평군 미원서원, 덕원의 충곡사, 경상북도 울진군 신계사 등에 배향되어 있다.

김창흡은 시를 잘 쓰고 성리학에 밝아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는 형인 김창협과 같이 이황의 주리설과 이이의 주기설을 절충하였다. 다만 율곡 이이는 착한 정(情)이 맑은 기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김창흡은 김창협의 주장을 따라 그것은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저서에 『삼연집(三淵集)』, 『심양 일기(瀋陽日記)』 등이 있다.

 

<참고자료>

『경종실록』 6권, 경종 2년(1722년) 2월 21일 졸기

「김창흡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

이경수, 「삼연 김창흡 한시의 금강산 표현」, 『인문과학연구』44, 2015.03

이종우, 「삼연 김창흡의 미발설과 호락논쟁에서 그 위상」, 『열상고전연구』63, 2018

유호선, 「김창흡의 불교적 사유와 불교시」, 『한국인물사연구』2, 2004.09

조준호, 「김창흡」, <디지털포천문화대전(http://pocheon.grandculture.net/)>, 2019년 1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