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보관물: 2018 율곡학인물

오원(吳瑗)


오원(吳瑗)                                                                        PDF Download

1700년(숙종 26)∼1740년(영조 16)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 할아버지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晉周, 1680∼1724)이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현종의 딸 명안공주를 맞이하여 임금의 사위가 된 오태주(吳泰周, 1668∼1716)에게 입양되었다. 자식이 없던 오태주가 아우 오진주의 아들 오원을 양자로 맞아들인 것이다.

당시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재(李縡)가 그의 고모부로,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한편 오원의 아들 가운데 오재순(吳載純, 1727∼1792)은 문형(文衡)을 지냈으며, 손자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은 성리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렇듯 대단한 가문을 배경으로 하는 오원은 1700년에 도성 내 대사동(大寺洞)에서 출생하였다.
아들 오재순에 따르면, 오원의 얼굴은 각이 졌고 수염이 성글며, 넓고 평평한 이마에 귓바퀴가 크고 둥글게 솟아 단정하고도 풍성한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또 웃음이 적고 조용하였으며 스스로 뽐내지 않고 행동거지에 무게가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나온 지 7일 만에 생모를 여의고 할머니 황씨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기억조차 날 리 없는 생모이지만, 오원은 생모의 부재라는 상실감을 평생 안고 살았다.

1723년(경종 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732년(영조 8)에는 동지사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후 대사성과 부제학 등을 거쳐 1740년(영조 16)에 대제학에 올랐다. 그러나 1728년(영조 4)에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인 이광좌(李光佐)가 영의정에 올라 영조에게 탕평책을 건의하자, 오원은 그에 대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직되기도 하였다.

오원은 황우석(黃遇石, ?∼1738)․남유상(南有常, 1696∼1728)․이사중(李思重, 1698∼1733)․이천보(李天輔, 1698∼1761)․남유용(南有容, 1698∼1773)․이수득(李秀得, 1697∼1775)․황경원(黃景源, 1709∼1787) 등 여러 벗들과 교유하였다. 이 가운데 평생을 두고 가장 의기가 잘 맞았던 이는 황우석과 남유용․이천보였다. 황우석은 오원보다 마흔살 가량이나 나아가 많았지만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는가 등 오원이 평생에 걸쳐서 허물없이 지낸 인물이었다.

그의 성품은 정직하고 온후하였으며 문장 또한 깨끗한 절개를 지녔다. 영조실록, 영조 16년 10월 10일에는

 

“사람됨이 조촐하고 깨끗하였으며 소탈하고 우아하여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라고 그의 사람됨을 평가하고 있다. 또한 오원이 과거에 급제한 후 영조가 그를 불러서 만난 일이 있는데, 이때 오원은 영조에게

“사사로이 뵙는 것은 상규(常規)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후에 혹 사사로이 보자는 명이 있으면 받들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오원의 성품에는 다소 고지식한 면모가 있었으나 검소하면서도 남을 돕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흉년이 든 해에는 가난한 족친들을 불러 밥을 해 먹이는가하면, 가난한 벗이 객사하여 장사조차 지낼 수 없게 되자 곡식을 내어 장사를 지내게 하기도 하였다.

오원은 41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았다. 겉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가문적 배경을 갖고 있었음에도 오원은 17세부터 잇따라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 오원은 가족을 잃은 아픔을 시로써 토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는 오원의 몇 편의 시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소개한다.
오원은 16세 되던 해에 안동권씨 권정성(權定性, 1677∼1751)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718년에 오원은 아내와 사별하게 된다. 부친을 여읜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아내가 죽고 나서 이듬해 겨울 전주최씨 최식(崔寔)의 딸과 다시 혼인하게 된다. 그 즈음까지 오원은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데,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고 있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과 같으니
人生如逝川

한 번 가면 어찌 다시 돌아오겠는가.
一去那復回

비단 창은 쓸쓸히 드리워 있는데
綺窻寂寂掩

밝은 달빛은 때때로 비친다네.
明月時時來

그대 떠올리길 차마 자세히 못하겠으니
思君不忍詳

내 마음은 오래도록 슬픔을 머금네.
我懷久含哀

산 사람은 나날이 쉽게 잊어가고
生者日易忘

죽은 사람은 장차 차가운 재가 되겠지.
死者且寒灰

이 시는 남조(南朝) 심약(沈約, 441∼513)의 도망시(悼亡詩)를 읽고 느낀 애틋함을 주체하지 못해 가을 밤에 지은 것이다. 혼인한지 3년 만에 사별하였지만, 그 사이에 쌓인 부부의 정은 두터웠다. 첫째 부인 안동권씨를 사별하고 나서 곧 둘째 부인을 맞아들이지만, 첫째 부인을 쉽게 잊지 못하였던 듯하다. 첫째 부인 사후 10년이 지난 해에, 또 다시 오원은 죽은 부인을 그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나는 그대 저버리지 않았는데 그대는 나를 저버리니
吾不負君君負余

아름다운 말 굳은 약속 모두 부질없게 되었네.
良箴信誓一成虛

황천에 돌아간 그대는 즐겁겠지만
歸侍重泉君則樂

나를 위해 어째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는가.
爲吾何不少躊躇

사별한지 10년이 지나 지은 것이지만, 바로 얼마 전에 아내를 잃은 듯 아내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 짙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오원의 생부인 오진주는 첫째 부인 안동김씨와의 사이에서 오원을, 둘째 부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서 오완(吳琬)을, 셋째 부인 대구 서씨와의 사이에서 오관(吳瓘)과 오찬(吳瓚)을 얻었다. 그러니 오원에게는 모두 세 명의 아우가 있었던 셈이다. 이 아우들 가운데 오원이 가장 가깝게 지내며 아꼈던 것이 오완(1703∼1721)이다. 생후 7일 만에 생모를 여읜 오원처럼, 오완 역시 6세 때 생모를 여의어 서로 연민의 정을 느끼며 의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22세 되던 1721년에 아우 오완은 병이 들어 결국 죽게 된다. 아우 오완을 잃은 지 3년 만에 생부 오진주를 여의고, 그 이듬해에 오원은 첫 아들을 얻게 된다. 둘째 부인 전주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는데, 이 아이 역시 세 살 되던 해에 죽고 만다. 첫 아들을 잃고 난 후의 심정을 오원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불행히도 네가 내 아이로 태어나
不幸汝生爲我兒

하늘까지 닿은 내 죄로 네가 재앙을 당하는구나.
通天我罪汝橫罹

삼년만 시간 동안의 너를 생각하니 눈물만 흘러
三年萬點思兒涙

매번 부모라고 나를 돌아보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每憶爺娘顧我時

오원은 성품이 검소하여 화려한 옷을 멀리하였는데, 이 아이가 바로 그러한 부친의 뜻을 알고 화려한 옷이나 새 옷 가까이에 가려 하지 않았다는 아이다. 아우 오완을 잃었던 때에도 그랬지만, 첫 아들이었던 이 아이를 잃고 난 후 오원은 또 다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아들이 요절하였다는 죄책감이었다.

이렇게 그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첫 아들을 잃은 그 해에 오원은 둘째 부인과도 사별하게 된다. 이렇게 오원은 생후 7일 만에 생모를, 17세에 부친을, 20세에 첫째 부인을, 22세에 가장 아끼던 아우 이완을, 25세에 생부를, 28세에 첫 아들을 잃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7세부터 소중한 가족을 하나하나 잃어갔다.
이처럼 가족의 상실과 그에 따른 자책감, 그리고 그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부친, 아내, 아우, 아들의 죽음에 부친 시에서는 한결같이 쓸쓸한 정조가 두드러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원이 시를 짓는 태도는 검소하고 원칙주의적인 그의 성품과 관련된 것으로, 재주를 뽐내려 한다거나 꾸미는데 힘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특징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월곡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월곡 오원의 시계계」(안순태, 「한국한시작가연구」, 한국한시학회, 2012)

고용즙(高用楫)-2


고용즙(高用楫)-2                                                        PDF Download

1672년(현종 13)∼1735년(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미상(未詳)이며, 자는 제경(濟卿), 호는 죽봉(竹峯)이다. 임피(臨陂) 술산(戌山)의 죽봉(현재 전북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탑동마을)에서 출생하였으므로 호를 ‘죽봉’이라고 하였다.
앞의 내용에 이어 여기서는 고용즙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을 소개한다. 고용즙은 경종(景宗)에서 영조(英祖)로 왕위가 계승되는 과정에서 희생된 4대신의 원통함을 드러내고 역적의 무리를 토벌하라는 상소문을 몇 차례 올렸다.

고용즙은 영조가 즉위한 초(1725)에, 상소를 올려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의 죄와 탕평책의 부당함을 논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 1721년부터 1722년에 걸쳐 세자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신임사화(辛任士禍)와 관련된 내용이다. ‘신임사화’는 신축(辛丑, 1721)과 임인(壬寅, 1722) 두 해에 걸쳐 일어난 옥사이다.

1720년(숙종 46)에 숙종이 죽고 소론의 지지를 받은 경종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후사가 없었으며 병이 많았다. 김창집 등 노론의 4대신은 하루 빨리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노론 4대신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이다. 물론 소론측의 반대가 있었지만, 경종은 1721년 8월에 대비 김씨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실현시켰다. 유봉휘 등 소론이 이에 반대했으나, 결국 노론세력의 주장이 관철되어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노론측은 더 나아가 10월에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를 통해 경종을 대신하여 세제(후의 영조)의 대리 청정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발한 조태억(趙泰億)․이광좌(李光佐)․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耈) 등 소론 세력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던 중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 등이 소를 올려 노론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하여 세제 청정을 상소한 조성복과 이를 강행한 노론 4대신, 즉 이이명․이건명․김창집․조태채를 파직시켜 유배를 보냈다. 이 밖의 노론 인사들도 대거 숙청되어 소론이 완전히 정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조성복이 왕에게 상소하기를,

“오늘날 동궁은 장성한 나이가 전하께서 선왕의 곁에 나가셔서 정사에 참석하실 때보다 갑절이 될 뿐만 아니니, 여러 정사를 밝게 익히는 것이 더욱 마땅히 힘써야 할 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신하들을 맞으실 때나 명령을 재결하는 사이에 언제나 세제(연잉군)를 불러 곁에 모시고 참여해 듣게 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일을 가르쳐 익히게 한다면 동궁께서 일에 밝고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경종실록」1년 10월 10일)

경종 역시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면서 “만약 청정하게 하면 나라 일을 의탁할 수 있고, 내가 마음을 편히 하여 쉬면서 요양할 수 있을 것”

(「경종실록」1년 10월 10일)

이라고 하여 국사를 모두 세제에게 처리하게 하도록 하였다.

노론은 뜻밖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별다른 노력 없이 소론이 주도하던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노론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받아 내자 당연히 소론의 반대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삼사에서 먼저 왕을 찾아가 아뢰었다.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시고 신기가 왕성하십니다. 비록 병환 때문이라고 하교하시지만, 드러난 증세가 없으니 마땅히 더욱 분발하시고 힘쓰셔서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기를 기약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편안하고 한적한 방법만을 위하여 이런 정무를 놓을 생각을 가지시니, 신 등은 전대에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음을 실로 알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마음을 빨리 돌이켜 비망기를 도로 거두소서.”

(「경종실록」1년 10월 13일)

 

조태구는

“국가는 전하의 국가가 아니라 곧 조종의 국가입니다. 옥새를 가지는 자리는 사람이 사사롭게 결정하는 곳이 아닙니다”

라고 주장하면서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지 않는다면 돌아갈 수 없다고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사실상 말도 안되는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들도 소론이 들고 일어서자 꼬리를 내렸다. 김창집은

“이제 여러 신하가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반드시 도로 거두시게 하려는 뜻이 신 또한 어찌 여러 신하와 다르겠습니까”

고 말하면서 집권할 수 있었던 아쉬움을 드러냈다.노론이 쥘 듯 했던 정권은 소론이 더욱 확실하게 쥐게 되었다. 소론은 곧바로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 4대신, 즉 이이명․이건명․김창집․조태채를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저 무리들이 몰래 딴 뜻을 쌓아온 지 무릇 몇 해가 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모의하고 밤낮 경영한 것은 모두 전하를 단속하고 하늘이 내릴 자리를 동요시키려 한 것이었으니 식자들이 전일의 일이 일어날 줄 안 지 오래 되었습니다. 만약 이 무리가 임금 아래에 하루라도 더 있으면 반드시 종사에 근심을 끼칠 것입니다. 청컨대 이들을 절도에 위리안치하고……”

(「경종실록」1년 12월 12일)

경종은 소론의 의견에 따라 김창집․이건명․조태채를 유배시켰다. 중국에 왕세제 책봉을 위해 가있던 이건명은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의주에 유배되었다. 이 밖의 노론 인사들도 대거 숙청되어 소론이 완전히 정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소론 정권은 노론 대신의 처벌을 유배형에서 끝내지 않았다. 이듬해 3월 목호룡(睦虎龍)은 남인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고 고변함으로써 노론의 비극이 또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소론은 노론이 전년에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종 제거 계획 속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목호룡이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역적으로서 전하를 시해하려는 자가 있어 혹은 칼로써 혹은 독약으로 한다고 하며, 또 전하의 폐출을 모의한다고 하니,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청컨대 급히 역적을 토벌하여 종사를 안정시키소서.……저는 비록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는데 뜻을 두었으므로,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만들려고 모의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감히 이처럼 상변한 것입니다. 흉적은 정인중․김용택․이기지․이희지 등입니다.”

(「경종실록」2년 3월 27일)

 

이에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는 결국 사사되었으며, 또한 이들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대대적인 화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용즙은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이 내용은 죽봉집권2, 「상소문(疏)」에 자세히 실려 있다. 고용즙이 올린 상소문의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다.

“이광좌는 임금을 시해한 역적인데 천지간에 편안히 살고 있다.……차라리 동해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습니다.”

“속히 이광좌․유봉휘․조태억 등의 죄를 바루시어 신명과 사람의 울분을 풀어주시고, 그 남은 흉적들은 죽일 수 없는 자들도 또한 모두 공론을 한번 들어보시고 차례로 서둘러 판단하시어 처분을 내리소서.”

“괴수들을 파하여 전하의 의혹을 풀고, 군부의 무고함을 씻으며, 난적의 죄를 다스려서 삼강(三綱)이 땅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구법(九法)이 패하지 않게 하소서.”

소론의 입장에 있던 이광좌 무리를 처단하고 인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고용즙이 보기에, 역적의 두목은 이광좌이며, 이광좌의 죄는 한이 없으나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임금의 병환을 숨겼다는 것이다. 임금을 보호해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도 임금의 병을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신하로써 차마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광좌가 임금의 병환을 숨긴 이유로써, 만약 임금의 병환이 드러나게 되면 세자를 세우려는 노론들의 죄를 물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고용즙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은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 일파가 일으켰던 반란행위를 엄벌에 처할 것을 건의하고 있어, 당쟁이 심화되었던 당시 노론․소론의 갈등과 대립상을 엿보는데 참고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한글판 죽봉시문집」(죽봉시문집편찬위원회, 2016), 「죽봉 고용즙의 南征賦에 대한 고찰」(柳在泳, 「한국언어문학」제22집, 한국언어문학회, 1983)

고용즙(高用楫)-1


고용즙(高用楫)-1                                                        PDF Download

1672년(현종 13)∼1735년(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미상(未詳)이며, 자는 제경(濟卿), 호는 죽봉(竹峯)이다. 임피(臨陂) 술산(戌山)의 죽봉(현재 전북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탑동마을)에서 출생하였으므로 호를 ‘죽봉’이라고 하였다. 죽봉은 창강(滄江)이 앞에 흐르고, 율포(栗浦)가 둘러 있으며, 패향(전주)과 인접해 있는데, 고용즙은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늙었으며 이곳에서 노래하다 죽었다. 할아버지 고이원(高而遠)과 아버지 고필(高佖)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고용즙은 탐라국(耽羅國, 제주의 옛 이름) 고을나(高乙那)의 후예로 45대를 군주로, 16대를 신하로 내려온 명문가문이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혁혁하여 문충공(文忠公)과 문영공(文英公) 두 분이 가장 뛰어났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으니 생원인 고견(高堅), 선전관인 고몽진(高夢辰), 통정인 고이원(高而遠) 등은 모두 고용즙의 고조․증조․조부이다. 어머니는 영월 신씨로 신경녕(辛慶寧)의 딸로 어질고 규범이 있었다. 특히 부친은 용모와 언행과 문장이 뛰어났고, 가족이나 사회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고 한다.

광산(光山) 김낙현(金洛鉉)이 지은 행장에 따르면,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슬픔이 무너져서 예에 넘쳤으며, 장사와 제사지내는데 정성을 다하고 친척들과 화목하고 가난을 구휼하였으며, 은혜와 의리 두 가지를 강론하고 도리를 밤낮으로 토의함에 꺼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친한 사람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이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모두가 존경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한 평강(平康) 채정억(蔡廷億)의 만장에 따르면,

“문장과 덕행 둘 다 어기지 않으려 노력하였으니, 사람을 보면 반드시 사랑을 베풀고, 글을 대할 때는 밥 먹는 것도 잊었으며, 화락하고 조용한 얼굴은 항상 봄날이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고향의 유림들과 협의하여 스승인 김집(金集)과 김구(金絿) 등이 배양되어 있는 봉암서원에 사액할 것과, 정읍에 송시열이 배양되어 있는 고암서원을 창건할 것을 소청하였다. 봉암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임금께서는 두 신하의 도학과 덕행을 깊이 살피시어, 후인들이 보고 감동하여 떨쳐 일어나는 바탕이 되게 하여 주소서. 특별히 은액을 하사하시어 서원을 치장하고, 두 신하의 도와 덕을 천하 후세에 더욱 빛나게 하옵소서. 그렇다면 국가에도 퍽 다행하고 사문(유림)에도 퍽 다행한 일이겠나이다.”

이처럼 고용즙은 임피지역에 학문적 영향을 크게 끼친 조속(趙涑)․김구 등과 같은 명유들을 숭상하는데 노력하였고, 노론세력으로서 송시열․김집 문하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학문과 대의를 중시 여겼던 유학자였다. 유고로 「죽봉집」을 남겼다. 「죽봉집」은 고용즙의 시문집이다. 3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고용즙의 6세손인 고동화(高東華)에 의하여 200여년이 지난 1938년에 갈운동의 영모재(永慕齋)에서 간행되었다.

죽봉집」의 편찬 경위에 대해서는 고동화가 「죽봉집」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죽봉이 남긴 주옥같은 글이 책상에 쌓이고 상자에 넘치기에 이르렀으나, 중간에 유실되고 화재를 만나 남은 것이 겨우 금 부스러기나 깃털 조각 같은 약간 뿐이었다. 고동화의 조부인 고천종(高千鍾)께서 좀먹은 문서와 먼지에 쌓인 책을 순서대로 엮어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부께서 돌아가실 무렵에 손자인 동화에게 ‘너는 마땅히 생각하여 할애비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종형들과 뜻을 모아 자구를 손질하고 교정을 보아 이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

 

「죽봉집」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권1의 「민기부(悶己賦)」는 상중에 쓴 작품으로,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주가 된 고용즙의 심정을 그리고 있다. 부친은 특히 용모․언행․문장이 뛰어났고 가족이나 사회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과거에는 실패하였으나 전원에 뜻을 두어 정자를 짓고 못을 파며 국화와 버들을 심어 은자답게 살아가다가 고용즙이 28세 때인 1699년 9월에 병석에 눕게 되고, 온갖 약에도 효과가 없어 다음 달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슬픔이 극에 달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고 여러 풍수(風水)를 맞아 묘지를 정하여 다음 해 2월 14일에 안장하는 효자 고용즙의 심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때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글 한 구절을 소개한다.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까. 하늘에 부르짖으니 삼광(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고, 땅을 치니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하고, 가슴을 치니 뼈가 부러지는 듯하며, 눈물을 뿌리니 피가 흐르는 듯하는구나.”

또한 지은 년대를 알 수 없으나 부채의 여덟 가지 덕목을 읊은 「팔덕선부(八德扇賦)」가 있으며, 천지의 운행과 질서에 따라 사람들에게 길일과 흉일을 가려서 때를 살피고 경계할 것을 알리는 「역서부(曆書賦)」가 있다. 또한 호남지방을 다니면서 지명의 이름에 얽힌 의미를 낱낱이 풀이한 「남정부(南征賦)」도 있다.

권2의 ‘흥학당(興學堂序)’에는 선비를 양성하고 학문을 부흥시키는 흥학당의 설립 취지를 고을 군수를 대신하여 지은 것으로써, 여기에서 고용즙은 서당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족한 자금을 빈민 구휼을 위해 비축해 둔 창고의 곡식 일부에서 활용할 것을 제의한다. 「필묵계서(筆墨契書)」에서는 붓과 먹의 서로 도와주고 유익함을 주는 관계를 들어서 이웃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비유하고 있다. 「제영지지서(題瀛州誌序)」에서는 제주 고씨가 동방의 유명한 문중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족보가 만들어지지 않음을 지적하고, 후에 고도열(高道說)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고씨의 문중의 자료를 모아 족보를 만들게 되는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봉암서원서(鳳巖書院序)」에서는 봉암서원에 배향된 김집과 김구의 도학의 연원을 그리고 조정에 사액을 청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이들은 김장생의 근원이고 조광조의 문하에서 덕행을 이었으니 삶에서는 종장이요 국가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초당서(草堂序)」는 고용즙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쓴 말년의 작품인데, 여기서는 저자가 거처하는 초당의 주위환경을 그린 것이다.

또한 「취취당기(就就堂記)」는 죽봉의 동생 고윤경(高潤卿)이 서당을 열고 이름을 청하기에 ‘취취당’이라고 이름 지으니 ‘취취(就就)’는 나아가고 나아가라는 뜻이다. 즉

“배우되 그 넓은 데로 나아가고, 묻되 살피는 데로 나아가고, 변론하되 분명한 데로 나아가고, 행동하되 독실한 데로 나아가고, 아침에도 나아가고 저녁에도 나아가고 어제도 나아가고 또 오늘도 나아가고, 한치 한치 나아가고 자꾸자꾸 나아가서 만개 삼태기의 흙을 쌓아 그 높이를 이루듯 하고, 아홉 길이나 되게 땅을 파서 그 깊이를 이루듯 하라. 그런즉 때때로 익히는 힘을 쓰면 날로 늘어나는 효과를 장차 거둘 것이니 어찌 취취하는 공로가 아니겠는가?”

 

상소문은 주로 경종(景宗)을 지지하던 소론의 주요 인물들을 처단하라는 내용이다. 즉

“신등이 이 애통한 울음과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서 위험을 피하지 아니하고 다시 이렇게 부르짖으며 엎드려 비나이다. 조정에서는 김일경(金一鏡)․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 모든 역적들을 속히 나라의 형법으로 바루어 만고의 강상을 잡아주시면 매우 다행함을 이길 수 없겠나이다.”

상소의 내용에는 스승인 송시열과 김집을 사사한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의 유봉휘․이광좌 등이 주장한 세제책봉 및 대리청정의 반대에서부터 신임사화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담고 있다. 또 소론 일파가 일으켰던 반란행위를 엄벌에 처할 것을 건의하고 있어, 당쟁이 심화되었던 당시 노론․소론의 갈등과 대립상을 엿보는데 참고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한글판 죽봉시문집「(죽봉시문집편찬위원회, 2016), 「죽봉 고용즙의 南征賦에 대한 고찰」(柳在泳, 「한국언어문학「제22집, 한국언어문학회, 1983)

송명흠(宋明欽)


송명흠(宋明欽)                                                              PDF Download

1705(숙종 31)∼1768(영조 4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泉). 1705년 10월 21일 한성 제생동(濟生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요좌(宋堯佐)이며,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1746)의 문인이다. 송명흠 역시 23세 때 고양(高揚) 화전(花田)으로 이재를 찾아가 배웠다. 어릴 적에는 사화를 피하여 낙향하는 아버지를 따라 옥천․도곡(塗谷)․송촌(宋村)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뒤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충청도도사․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754년(영조 30)에 특별히 서연관(書筵官)에 제수하여 별유(別諭)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55년 옥과현감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 집의․승지․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모두 글을 올려 거절하였다. 만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되면서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이 되었으나,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도중에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송명흠은 영조로부터 ‘산야(山野)의 당을 모으는 자’이며 ‘당론의 폐단’을 자행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모진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44년 7월 13일에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질이 아름답고 실천이 독실하여 젊어서는 높은 명망을 받았다. 중간에 임금의 부름에 따라 도성에 나아가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서 논의하는 자리에서 대답하고 상소한 것이 모두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내용에서 볼 때, 그의 관료로서의 소신있는 행동을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순조실록」, 순조 3년 9월 7일에는

“송명흠은 지조가 맑고 태도와 행실이 돈독하여 진실로 군자의 성대한 덕이 있어 우뚝하게 사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송명흠의 학문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에 뿌리를 둔 가학(家學)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는 17세기 대표적인 예학자이며 사림세력을 주도해 간 학자였던 송준길의 4대손으로, 그의 학문적 기반은 선조 송준길의 학문을 계승․정리하고 집대성하는데 기반을 두었다. 이에 어려서부터 부친 묵옹(黙翁) 송요좌의 엄격한 지도하에 유가의 기본 경전과 역사서 및 성리서를 두루 배우고 익혔으며, 공자․맹자․주자 등을 배우고 성현의 뜻으로 나아가는 가르침을 받았다.

송명흠은 가학의 전통을 보존하고자 37세 때에 종숙부 권화혁(權火赫)에게 송준길 연보의 간행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임종 3개월 전에는 문경 병천에서 송준길의 문집을 교정하였으며, 같은 달 상주 흥암에서 송준길 문집의 간행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임성주(任聖周)가 그의 「묘지명」에서

“송명흠은 마음을 세우고 학문을 하는 것에서부터 집에 있거나 조정에 나아가서 논의를 펴고 일을 처리함에 이르기까지 거의 하나도 송준길이 남긴 법도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라고 쓴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조실록」, 영조 39년 3월 5일에서도

“송명흠은 문정공 송준길의 4대손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송명흠은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송준길을 계승하는 가학의 전통 위에 두었으며, 이러한 가학적 전통 위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해나갔다.

또한 이재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김창협(金昌協)-이재(李縡)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낙론학통을 계승하였다. 송명흠이 활동한 18세기는 인물성동이론논쟁 또는 호락논쟁이 당대의 철학적 화두로 등장한 시대였다. 말 그대로, 사람의 본성과 사물(또는 동물)의 본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벌었던 논쟁이었다.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을 같다고 보는 쪽을 동론(同論)이라 하였고, 다르다고 보는 쪽을 이론(異論)이라 하였다.

동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간(李柬)이 있었고, 이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원진(韓元震)이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의 ‘인성과 물성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한 견해가 심화되면서 주위 학자들까지 동조하였고, 이로써 학파적 양상으로 그 논쟁이 전개되었다.

호서(湖西, 충청도) 지방의 학자들이 한원진의 ‘이론’에 동조하고, 낙하(洛下, 서울 부근)지방의 학자들이 이간의 ‘동론’에 동조함으로써 ‘인물성동이논쟁’이라는 명칭 외에 호서와 낙하의 첫 글자를 따서 ‘호락논쟁’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한원진 외에 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위백규(魏伯珪)․송능상(宋能相) 등이 있었고, 후자에 속한 대표적 학자들로는 이간 외에 김창협․이재․박필주(朴弼周)․어유봉(魚有鳳)․김원행(金元行) 등이 있었다. 이로써 조선유학사의 3대 논쟁 중의 하나인 인물성동이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송명흠은 당시 호락논쟁에서 낙론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이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니, 이재의 사상은 그대로 송명흠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이재와 마찬가지로 송명흠은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물론 성에는 본래적 의미의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 속에 내재된 의미의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는 구분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본연지성이라 하여 본연지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인물성동이론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세계관에 대한 해석과 연결된다. 성리학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리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리는 원리․질서․법칙․규범 등으로 설명하고, 기는 음양을 비롯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모든 것을 가리킨다. 송명흠은 사람과 사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리와 기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리와 기가 함께 있어야 한다(不相離)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에 더 근원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은 또한 리와 기의 엄격한 구분을 강조하는 사고로 이어졌다(不相雜).

이러한 관점에서 천리와 인욕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인욕을 억제하고 천리가 발현되는 본연의 세계를 중요시하였고, 이를 통해 의(義)와 불의(不義), 정(正)과 사(邪), 군자와 소인, 중화와 이적, 왕도와 패도 등을 분명히 구분하고자 하였다. <채오봉유적(蔡五峯遺蹟)>의 서문에서

“군신과 부자의 윤리는 하늘과 땅의 불변하는 강령이며, 중화와 오랑캐, 정(正)과 사(邪)를 엄격하게 판별하는 일은 춘추대의(春秋大義)이니 혹시라도 이것을 잃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사욕을 극복하고 천리를 회복하거나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이 혼란한 시대에 대처하여 천리를 실현시키는 일이며, 또한 그것이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으로부터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춘추대의를 확립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조에게

“천하만사의 근본은 군주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니, 마음이 진실로 바르지 못하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바르게 하는 도리를 한마디 말한다면, 사사로움을 제거하고 천리를 회복하는 것일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모든 정치의 근본 역시 군주의 한 마음에 있으니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하는 근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송명흠은 현상적 측면의 기보다 근원적 측면인 리를 더 강조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그가 영조에게 올린 상소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는 교화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고, 교화를 세우고 두터이 하는 데는 학교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며,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는 데는 현명하고 덕이 있는 사람을 높이고 본받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삼대(三代)의 성대한 시대로부터 우리나라의 여러 성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도리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영조실록」, 영조 32년 4월 14일)

즉 하나라․은나라․주나라와 같은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명하고 덕 있는 사람을 높이 받드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말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저서로는 「역천집」이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순조실록」, 「역천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천 송명흠의 主敬사상과 현실대응」(송인창, 「한국사상사학」14, 한국사상사학회, 2000)

박성원(朴聖源)


박성원(朴聖源)                                                              PDF Download

1697(숙종 23)∼1767(영조 43) 조선중기의 문인․학자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이고 호는 겸재(謙齋).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1507∼1581)의 6대손이며, 증조는 박승임(朴承任), 조부는 박현주(朴玄冑), 부친은 학생(學生) 박진석(朴震錫)으로 별다른 관직을 역임하지 못했다. 때문에 박성원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박성원”이라든가 “세력이 없는 인물”로 폄하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박성원이 죽은 해인 1767년에 자신의 6대조인 박충원의 행장(行狀)을 지어 선조의 업적을 선양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디서 왔는지 모를 정도의 빈약한 가문의 내력을 가진 박성원에게 매우 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박성원은 1726년 29세 즈음에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노론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는 스승인 이재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1721년(경종 1)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1728년(영조 4)에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한 후 언관으로서 사간원과 사헌부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박성원은 노론의 입장에서 영조의 탕평론(蕩平論)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1744년(영조 20)에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등 11조목의 상소문을 오렸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남해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원래 ‘기로소’는 조선시대 70세 이상 연로한 고위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나이가 70이 되면 기(耆)라 하고 80이 되면 노(老)라 하여 정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 중에서 70세 이상이 되어야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임금도 연로해야 여기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이러한 조건에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박성원은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남해에 위리안치되었는데, ‘위리안치’는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죄인을 유배 보내면서 여기에 더하여 행동반경을 제한하였으니, 유배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어서 죄인을 그 안에 가두어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즉 오늘날의 말로 하면 유배에다 가택연금형이 더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탱자나무는 전라남도에 많았기 때문에 대개 죄인들은 전라도 지역의 섬에 유배되었다. 이 후 영조는 박성원을 지지하는 정언유(鄭彦儒)․박치융(朴致隆) 등도 ‘당파의 습성’이라고 비난하면서 귀양을 보내는 등 엄하게 대처하였다.

그러나 1749년 12월에 검의(檢擬)를 허락하는 명령이 내려와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1750년 어머니와 형, 형수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에 사헌부 장령으로 발탁되었고 1759년에는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 1759년 8월에는 강서원(講書院)의 좌익선(左翼善)으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正祖)를 가르쳤고, 1761년에는 정3품 유선(諭善)으로 임명되었다. 박성원은 어린 정조에게 ⌈소학⌋을 가르치면서 ⌈소학⌋을 읽는 것은 몸소 실천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으며, 몸을 주재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주재하는 경(敬)을 중시하였다. 영조로부터 세손의 학문은 박성원의 힘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이후 참판을 마지막으로 1676년에 봉조하(奉朝賀, 조선시대 전직 관원을 예우하여 종2품 이상으로, 나이가 70세가 되어 퇴임한 관리에게 특별히 내린 벼슬)가 되었는데, 이때 영조에게 수서(手書) 어제사전(御製謝箋)을 하사받았다.

정조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한 위태로운 시기를 함께 했던 박성원에게 돈독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박성원 사후에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을 음직(蔭職)으로 등용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박성원을

“한 시대의 인물 중에서 엄선한 사람”

 

으로 평가하였고, 그의 저작인 「돈효록(敦孝錄)」과 「예의유집(禮疑類輯)⌋ 등을 왕명으로 간행토록 하였다.
돈효록」은 「효경(孝經)」․「서명(西銘)」․「경사(經史)」와 여러 문헌 가운데 효에 관한 각종 교훈과 고사를 가려내어 분류․편집한 책이다. 박성원은 효란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근본이요 백성을 보호하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원동력으로 인식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효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효에 관한 좋은 말이나 격언은 「효경」 이외의 다른 경전에도 많이 나오는데, 그것이 여러 책에 흩어져 있어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그것을 모두 뽑아내어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학들의 효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책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효경」의 뜻을 부연했다는 뜻으로 ‘효경연의(孝經衍義)’라고 제목을 붙였으나, 스승인 이재가 효행의 돈독함을 권장한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돈효(敦孝)’라고 이름 지은 것을 존중하여 그것을 그대로 책이름으로 하였다. 또한 박성원은 예서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였는데, 우리나라 여러 학자들의 예설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의심스러운 사항을 일일이 뽑아내고 조목마다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예의유집(禮疑類輯)」을 편찬하였다.

후에 정조는 그의 어제(御製)서문에서

“본조의 열성(列聖)이 유교를 진흥시킨 뒤 300년 동안 예에 밝은 선비들이 40∼50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알기 어려운 고훈(古訓)이나 시변(時變)에 대해 질문하고 그 전거를 끌어들여 밝혀놓았는데, 다만 그 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갑자기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이에 박성원이 여러 곳에 있는 글들을 한데 모아 종류별로 분류하면서 관혼상제를 항목으로 정하고, 거기에 종법(宗法)과 잡례(雜禮)를 부록하여 「예의유집」이라는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을 만들었다.”

(「홍재전서」권8, 「예의유집서」)

 

이를 통해 이 예서가 국가적인 관심과 공인을 받아 간행 및 보급된 예서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박성원은 남해에 머문 2년 동안 스승인 이재와 지속적으로 서신을 교환하였다. 이재는 박성원의 유배지에서의 음식이나 잠자리를 걱정하면서도 독서에 힘쓸 것을 권면하였다. 박성원은 1746년 1월에 위리안치에서 풀려났는데, 그 해 10월에 스승 이재는 사망하였다.

이재는 평소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지어 강학에 힘쓰며 낙론(洛論)의 학설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이재의 학문을 계승하면서 스스로 ‘천문(泉門)’이라고 자처하였다. 박성원은 당시 이재의 문하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인식되었으며, 이재 사후에는 이재의 ‘천문’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먼저 박성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한원진의 「한천시(寒泉詩)」 비판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재는 김창협(金昌協)의 학통을 계승하여 낙론의 영수가 되었는데, 호론(湖論)인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 등과 심성론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재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성범심동론(聖凡心同論)을 주장하며 낙론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1746년 이재는 한원진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의 오류를 지적하는 「한천시」를 지었다. 이듬해인 1747년에 한원진은 「제한천시후(題寒泉詩後)」를 지어 이재의 논리가 사람과 짐승, 유교와 불교,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을 흐리게 한다면서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때는 이재가 이미 사망한 후였으므로 제자들이 이 논쟁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박성원이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박성원은 「한남당시발변설(韓南塘詩跋辨說)」을 지어 한원진이 이재의 「한천시」를 비판한 것을 재비판하였다. 또한 「심성설십이조(心性說十二條)」를 통해 낙론의 입장에서 호론의 심성론을 꼼꼼하게 비판하였다. 이처럼 박성원은 노론-낙론의 대표적인 학자인 이재의 고제(高弟)로서, 이재의 심성론과 예학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면서 낙론의 정통성을 확인하는데 전력을 다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성원이 사망한 후에 이재의 학통은 김창협의 손자인 김원행(金元行, 1702∼1772)에게로 이어졌다. 박성원은 도통에서 밀려나면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박성원이 낙론의 도통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 아니었고, 또한 그가 계속 관직생활을 했다는 것이 산림(山林)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다는 인식도 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謙齋集」, 「謙齋日記」, 「承政院日記」, 「日省錄」, 「겸재 박성원의 예학과 「禮疑類輯」의 성격」(김윤경, 「한국문화」61,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20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