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 포럼

 

중급편 – 새로 읽는 성학집요


새로  읽는 성학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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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읽는 성학집요 – 표지

발간사/머리말

목차

제1부 : 자기 몸을 닦으라

1. 총론
2. 뜻을 세우라
3. 거두어 들이라
4. 궁리하라
5. 성실하라
6. 기질을 바로 잡으라
7. 기(氣)를 길러라
8. 마음을 바르게 하라
9. 몸을 단속하라
10. 덕량(德量)을 넓혀라
11. 덕(德)을 도우라
12. 마음을 돈독( 敦篤)히 하라
13. 자기 몸을 닦은 효과

제2부 : 가정을 가지런히 하라

1. 총론
2. 효도하고 공경하라
3. 아내를 바르게 인도하라
4. 자녀를 올바르게 가르치라
5. 형제끼리 화목하라
6. 매사를 삼가고 엄숙하게 하라
7.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라
8. 가정을 바르게 한 효과

제3부 : 바른 지도자가 되라

1. 총론
2.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라
3. 좋은 점을 취하라
4. 당면과제를 파악하라
5. 옛 정신을 본받으라
6.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라
7. 기강(紀綱)을 세우라
8.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라
9. 가르침을 펼쳐라
10. 좋은 정치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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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편 (하) – 새로 쓴 격몽요결


 새로 쓴 격명요결(下- 사회와 공부)

 

표지
표지새로 쓴 격명요결(下- 사회와 공부)

발간사 및 머리말

목차

첫째마당  : 살기 좋은 세상

1. 어른 공경 아이 사랑
2. 참다운 친구
3. 어른과 아이의 역할
4. 고장에서 사람 사귀기
5. 남이 나를 비방하면

둘째마당 : 공부는 왜 하는가?

1. 공부를 하는이유
2. 어떤 꿈을 가질까?
3. 자기를 이겨보자
4. 독서의 방법
5. 공부와 시험

셋째마당 : 공부는 도리어 쉽다.

1. 나쁜 습관을 고쳐 볼까?
2. 아홉 가지 용모
3. 아홉가지 생각
4. 옷차림과 음식
5. 놀이도 공부다
6. 배움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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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후(朴光後, 1637~1678)


 

박광후(朴光後, 1637~1678)                              PDF Download

 

광후(朴光後, 1637~1678)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도(道)를 행할 때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늘 나라에 도가 없음을 개탄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상소를 하거나,  궐문(闕門)에 가서 항의를 하였다. 혹독한 형벌을 받기도 하였으나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마음씀이 공명정대 하고불의에 굴하지 않아 생전에 호남의 대표적인 선비로 인정을 받았으나 42세가 되던해 갑자기 사망하였다.

우암송시열이지은박광후의묘갈명
우암송시열이지은박광후의묘갈명

1637년(1세, 인조15년) 6월 2일에 광주(光州)의 아산리(지금의비아도천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士述),호는 안촌(安村)이다.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박창우(朴昌禹)이며,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이다.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모친은 남씨(南氏)이다. 할아버지 박창우는 호가 칠졸재(七拙齋)인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의병을 일으켜 북으로 올라가 출정(出征)한 적이 있다.  송시열은 박광후의 묘갈명에이렇게 적었다.

“박사술의 본관은 평양(平陽, 즉순천順天)이며 10대조 박석명(朴錫命)은 본조(本朝)의 훈신(勳臣)인데, 아마도 인수(仁叟, 박팽년朴彭年의자字) 선생과 같은 집안일 것이다. 할아버지 박창우(朴昌禹)는 진사(進士)이고 아버지 박천용(朴天用)은 학문이 있었으나 일찍 별세하였으며, 어머니 남씨(南氏)는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다.
박사술은 홍씨(洪氏)를 아내로 맞아 한 아들과 여섯 딸을 낳았는데, 아들 박중회(朴重繪)는 사리에 밝고 재주가 뛰어나서 사우(士友)들이 칭찬하며, 네딸은 다사인(士人)의 아내가 되고 두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1650년(14세,효종1년) 남양홍씨(南陽洪氏)를 아내로 맞이 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어머니를 섬겼다.

1651년(15세,효종2년) 향교에 다녔다.

1656년(20세,효종7년)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학식(學識)이 높았으며,  마음이 정대(正大)하고 조금도 불의(不義)에 굴하지않아, 호남 선비들 의사표가 되었다.  그를따라 남도에서 정상용, 박치도, 박상현, 박상진, 박광일, 박광원, 박광오, 박광선, 박광윤, 박중회, 박상지, 민사하등많은학자들이 일어나 학통(學統)을 계승하였다.

1660년(24세,현종1년) 서울에 가서 윤휴(尹鑴)를 만났다 . 고향으로 돌아가 주위사람들에게 윤휴를 평하기를 “길인(吉人, 좋은사람)이아니다.” 라고 하였다.

1666년(30세,현종7년)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학문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연연하지 않고 자기 실천을 위한 학문에 힘썼다.

1675년(39세,숙종1년)스승 송시열이 유배를 당하자 박광후는 광주, 나주, 장성 등 고을 유생들과 연대하여 구명운동을 펼쳤다.  이 일로 옥고를 치르게 되었으나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스승을 따랐다.  이즈음세상의 상황이 크게 변하여 출세할 생각을 접었다. 혹시 권하는 자가있으면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도(道)를 행할 때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늘나라에 도가 없음을 개탄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상소를 하기도 하고, 궐문(闕門)에 가서 호소하여 잘못된 일에 대해 극진히 말하여 항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동료들과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기도 하였으나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1677년(41세,숙종3년) 장기해변(지금의포항부근)에 유배중인 스승송시열을 찾아가 위문하고, 순천박씨(順天朴氏)의족보(族譜) 서문을청했다.

1678년(42세,숙종4년)에 갑자기 안청동 외성당(畏省堂)에서 별세하였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와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으며,  광주(光州) 진곡리(晉谷里)에 장사를 지냈다. 스승 송시열은 1680년 8월에 부탁 받은 족보 서문과 묘갈명을 보내왔다.  묘갈명에서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아! 박사술(박광후의자)은 이제 죽었거니와, 지금 세상에 다시 이런사람이 있겠는가?  그는 어버이에게 효성하고 뭇사람에게 자상하고 벗에게 성실하였으며 늦게는 학문에만 종사하였으니,  그 진취는 장차 한이 없었을것이다. 아!운기(運氣)가 좋지 않으니, 그가 어찌 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매우 고루하여 그와  전혀 친분이 없었는데,  하루는 천리 길을 찾아 왔으므로 그 용모를 대하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히 마음을 각성하게 하였다.  내가 제주(濟州)에 있을 때에 그가 또 사우(士友) 몇 사람과 함께 보러 왔는데, 변을 겪고 험한고 난을 겪은 것이 이처럼 지극한데도 기개와 언론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내가 이 사람은 장차은 산철벽(銀山鐵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갑자기 이지경이 되었으니, 귀신이 어찌 어질지 못한가?”

송시열은 10여년이 지난 1689년 2월 18일, 기사사화(己巳士禍) 때에제주도로 유배가는 길에 광주의 안청동 부근을 지나게 되자 박광후가세상을 떠난 고택 외성당을 찾아 그 감회를 적고 애절한 시 한수를 남기고 길을 떠났다.  약200년 후인 1879년 면암 최익현도 유배지 흑산도에서 풀려 나와  상경할 때 외성당을 방문하여 외성당 방문기(訪問記)와 시 한수를 남겼다.
박광후는 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을 남겼는데, 4권 2책으로 목활자본이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존 되어있다. 기정진(奇正鎭)이 서문을 작성했으며,  송시열의 충절을 노래한 시가 많고,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배향해 달라는 상소문, 기축옥사에서 정철이 최영경(崔永慶), 이발(李潑) 등을 죽이지 않았다는 상소문, 옥중에서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실려있다.  또1677년 유배지에서 송시열의 말을 기록한 어록도 이 문집에 실려 있다.

<참고자료>
송시열, 박광후묘갈명,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조인물고 ⌋, 1999
이미선, 박광후,<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초급편(상) – 새로 쓴 격몽요결


새로 쓴 격몽요결(상- 자연과 가족)

 

새로 쓴 격몽요결(상)
새로 쓴 격몽요결(상)

발간사 / 머리말

목차

첫째마당 : 자연과 인간

1. 하늘/땅/사람
2. 낮과 밤
3.
4. 네 계절
5. 산과 강
6. 날씨
7. 색깔/맛/소리
8. 날짜와 시각
9. 다섯 가지 물질
10. 다섯 가지 도리

둘째 마당 : 행복한 가정

1. 가족과 나
2. 부모님과 나
3. 형제와 나
4. 남편과 아내
5. 효도의 방법
6. 내가 집안의 어른이라면
7. 내 자식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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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朴尙玄, 1629-1693)


박상현(朴尙玄, 1629-1693)                                 PDF Download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은 조선시대 중기의 유학자다. 우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시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조정이 청나라 만주족을 두려워하여,  중국 남부에서 표류해 온 명나라 유민들을 청나라로 압송한 것을 보고 세상에 나갈 뜻을 버렸다.  조용한시골에 은둔하며 주희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아 경전 연구에 매진하였는데, 특히 ⌈대학 ⌋에 정통했다.  아들들과 조카를 송시열 문하에서 학문을 하도록하여 ,호남노론의 핵심이 되었다.

1629년(1세, 인조7년) 음력 5월 9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초(景初), 호는우헌(寓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언침(朴彦琛),  할아버지는 박진정(朴震挺), 아버지는 박수림(朴遂林), 어머니는봉산 이씨(鳳山李氏)로 이사숙(李思淑)의 딸이다.  부인은 장택 고씨(長澤高氏) 고부민(高傅敏)의 딸이자,  군수 고성후(高成厚)의 손녀이다.

1643년(15세, 인조21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3년 동안 나물국을 먹지않고 제사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글 공부를 시작한 뒤에는 자기 수양에 힘쓰고 경전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특히 ⌈대학 ⌋에 공을 들여 공부를 하고,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
주희(朱熹)를 본받고자 하였으며,  산림의 깊은 골짜기(전라도광주光州의 진곡眞谷)에서 평정을 지키고 살며,  부귀와 화려한 것에 대해서욕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를 침범한 청나라를 극도로 싫어하여 책력 속에 있는 청나라의 연호를 모두 지워버렸다. 우헌(寓軒)이라 호를 지었다.

1663년(35세,현종4년) 이즈음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갔다 . 서인이 노론파와 소론파로 대립하게 될 때 그는 노론을 선택하여 송시열과 더욱 가깝게 지내고 집안의 아들,  조카들을 송시열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정이, 주희(朱熹), 퇴계이황(李滉), 율곡이이(李珥)를 높이 받들고, ⌈태극도설(太極圖說) ⌋, ⌈통서(通書) , ⌈황극경세(皇極經世) ⌋, ⌈역학계몽(易學啓蒙) ⌋, ⌈정몽(正蒙) ⌋등 성리학 서적을 깊이 연구하였다.
특히 성명(性命), 이기(理氣), 도기(道器), 태극 등의 개념에 관심이 많았다. 스승 송시열과 이런 문제에 대해서 대화한 내용이 그의 문집에들어있다.

1667년(39세,현종8년) 제주도에 표류해 온 임인관(林寅觀) 등 중국인 95명을 청나라에 압송하였다.  그들은 청나라 만주족에 대항하던 복건성(福建省)의 명나라 유민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일본으로가던 상인인데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며 일본으로 보내 주든지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들은 그들이 가진 물건으로 보아 평범한 상인이 아니라 중국 남부지방에 명나라의 잔존세력들이 세운 남명(南明)의 관리들이라고 판단하였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후환이 두려워 그들을 강제로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명나라 유민들을 결국 청나라에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박상현은 명나라를 섬기는 충정으로 조정의 결정에 분개하였다. 이에 세상에 나갈 뜻을 끊고 두문불출하며 경전연구에 힘썼다.
명나라 유민들 송환 사건은 130여 년이 지난 정조때 다시 문제가 제기 되었다.

1797년(정조21년)에 정조는 임인관 등95인이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명나라를 섬긴 절개가 가상한데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청나라에모두 강제 압송한 일은 잘못된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정조의평가에 따라 그들은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었다.

1677년(49세,숙종3년) 9월 27일 큰 아들 박광일(朴光一)과 집안 조카 박광후(朴光後)를 송시열이 유배가 있는 장기(長鬐)로 보냈다.  두 사람은 박상현의 편지를 전하고 예물을 올리며,  송시열의 문인(門人)이 되는 의식을 행하였다.

1684년(56세,숙종10) 두아들 박광일과 박광원(朴光元)을 회덕(懷德)의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다. 아들 박광일은자는 사원(士元), 호는 손재(遜齋)로, 1701년 천거를 받아 내시 교관(內侍敎官), 시강원 자의(侍講院咨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권상하(權尙夏), 정호(鄭澔) 등과 교류하며 학문연구에 힘썼다. ⌈손재문집 ⌋은 그의 작품이다.  둘째 아들 박광원은 자는 사선(士善)이며, 호는 백야당(白野堂)이다.  1712년에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묘봉사(宗廟奉事)·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좌랑, 정랑, 청암도찰방(靑巖道察訪) 등을 역임하고, 1738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689년(61세,숙종15년) 1월, 제주도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전송하였다.  6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곡을하였다.

1690년(62세,숙종16년) 6월, 송시열의 제문(祭文)을 지었다. 이즈음박상현의 모습은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갈명에 잘 묘사되어 있다.

“공(박상현)은 기상과 용모가 장엄하고 중후하며 정신과 풍채가 조용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말이 간결하고 걸음걸이가 조용하며 간사하고 문란한 소리나 일들은 화살처럼 멀리피하였다.  집안에서는 삼가고 부드러워서 친척을 접대하면 각각 그들의 환심을 얻고, 멋대로 구는 것을 보면 더불어 겨루지 않았다. 옛 사람이 구별하여 밝히지 않은 말을 늘 외우면서 되새겼다.  그러므로 향리 사람들이 감복하여 우헌 선생(寓軒先生)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墓碣銘 ⌋)

1693년(65세,숙종19년) 암행어사가 된 교리(校理) 김만길(金萬吉)이임금에게 박상현을 추천하였다.  1월 12일에 사망하였다.  3월에 광주(光州) 북쪽 태산(台山)에 장사를 지냈다. 숙종40년(1714년)에 사헌부장령 (掌令) 에  추증(追贈) 되었다.  권상하(權尙夏)가 묘갈명을 짓고, 이희조(李喜朝)가 묘지명을 지었다.  문집으로 ⌈우헌선생문집(寓軒先生文集) ⌋ 이 있다.  그는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은 율곡이이의 설을 따랐으며, 예학은 김장생(金長生)을 따랐다.  천문역법에도 밝아<음양소장도(陰陽消長圖)>와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기도 했다.

⌈우헌선생문집 ⌋은 4권 2책으로 1898년에 간행 되었으며, 규장각에그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스승인 우암 송시열과의 편지문, 시문 그리고 제문(祭文) 등이 다수 실려있다. 시문 중에는 제주도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전송하는 시, 송시열을 곡하는 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이설(理說)⌋, ⌈성설(性說)⌋,
⌈성리문답(性理問答)⌋, ⌈잡설(雜說)⌋, ⌈권경변(權經辨)⌋ 등의 문장이실려 있다.
<참고자료>
⌈송자대전⌋ 제 16권 어록3,  박광일(朴光一)의 기록
권상하, ⌈박상현의 묘갈명⌋, ⌈국역국조인물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