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율곡학 인물들

신응구(申應榘, 1553-1623)


신응구(申應榘, 1553-1623)                                PDF Download

 

혼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특히 성혼을 위한 신원에 적극적이었다. 김상헌이 신응구 묘갈명에서

“성 문간공(成文簡公)이 가문에 전래된 정대한 학문으로 우계(牛溪) 위에서 학도들을 가르쳐 성취한 제자들을 쉽게 다 셀 수 없었는데, 공자(孔子)가 이른 것처럼 문인이 더 친근해졌다는 것에 접근한 자에 있어서는 고령(高靈) 신공(申公)이 가장 선배라고 하겠다.”

라는 평가는 여실하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자방(子方)이고 호는 만퇴헌(晩退軒)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벌(橃)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의형(義衡)의 딸이다.

1580년(선조 13) 천거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582년에 사마시에 합격,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천거로 장원(掌苑)이 되었다. 1597년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관계에 들어가 형조정랑, 한성부서윤, 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1602년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충주목사, 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고,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에 형조참의·동부승지·좌부승지 등을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국조인물고>에 실린 신응구의 묘갈명은 김상헌이 만년에 쓴 내용인데, 글 중에

“나는 공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장년에 이를 때까지 같은 마을에 살면서 일찍부터 기풍을 사모하였는데, 3대 동안 서로 주선하며 백여 년을 지내왔으므로 공이 나를 알아준 것이 기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스스로 공을 안다고 여기었다.”

라는 대목을 보건대, 신응구를 잘 알려주는 글로 사료된다. <인조실록>에 실린 신응구의 <졸기>가 폄하의 뜻이 비취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김상헌은 명문에서 신응구의 삶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공의 모습을 바라보니, 한 겨울의 눈 속에 늠름한 송백(松栢)처럼 우뚝 서 있었고 공의 중심을 살펴보면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에 합치되어 얼음이 녹듯이 화평했도다. 약관(弱冠)에 향양(向陽)의 마을에 찾아가 배워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니,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를 따른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세상에 어려움을 만나 조금만 시험해 보고 항상 곤궁하게 살았도다. 하늘에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결국 창생의 한을 남기었도다. 아! 매우 슬프도다!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에 합치되었다는 것은, 앞서 최유원(崔有源) 등이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이 반역을 꾀하였다고 고변하였지만 실상이 매우 모호하였기 때문에 공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끌어넣어 후일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신응구를 빙자하여 말하고 공신록(功臣錄)에 기록하였다. 이는 신응구가 전에 두 번이나 광해군의 사부를 역임한 적이 있었음도 고려한 조치였다. 신응구가 이를 부끄럽게 여겨 누차 상소를 올려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가 아들에게 유서(遺書)를 써서 주었는데, 그 유서에 ‘내가 죽은 뒤에 공신록에 나의 이름이 그대로 있을 경우에는, 장사를 치를 적에 곧바로 담당자에게 반드시 사양의 의사를 관철시켜 나의 뜻을 밝히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로 하여금 지하에서 거듭 죄를 짓게 할 것이다.’는 대목에서 여실히 보인다.

한 겨울 눈 속에 늠름한 송백(松栢)처럼 우뚝 서 있었다는 그 기상은, 김상헌이

“공이 젊어서부터 중대한 명망을 지니어 자신감이 적지 않았다. 대체로 공의 재주와 견식이 과감하고 민첩하여 고상한 의논이 종횡으로 넘쳐흘렀으므로 필시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고 공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매우 뚜렷한 견해가 있다고 여기었으므로 세상에 행세할 적에 꺼리는 자와 인정하는 자가 얽히어 평소 쌓은 바를 펼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한 사람들이 너나없이 매우 애석해 하였다.”

라는 대목에서 밝히고 있으며, 글의 말미에 “아 슬프도다.”라고 왜 했는지도 대략을 가늠할 수 있겠다.

저서로는 『만퇴집』이 있다.

송병순(宋秉珣, 1839-1912)


송병순(宋秉珣, 1839-1912)                                 PDF Download

 

병순은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형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며 스스로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9세조인 우암 송시열은 효종과 동심동력하여 설욕을 갚고자 북벌을 준비한 당대의 거유로 소중화(小中華), 존화양이(存華攘夷) 등 춘추의리(春秋義理)의 화신이었다. 조선유학사에서 도학에는 정암 조광조요, 학문에는 퇴계 이황이요, 성리에 율곡 이이라고 하는데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의리에 관해서는 우암 송시열을 으뜸으로 삼는다.

형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자결하였고 동생 송병순은 1910년 경술국치 후에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억누르다가 마침내 1912년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두 형제가 유학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국권을 빼앗김에 분연히 일어나 순국하였으니 가학이요 학통을 계승한 것이 이와 같았다.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동옥(東玉)이며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다. 형 송병선과 함께 큰아버지 송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으며, 송달수의 사후에는 작은아버지 송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이는 송시열 – 권상하 –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이다.

1865년(고종 2)에 서원 철훼령이 내려 만동묘가 헐리게 되자 춘추대의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훼손하지 말 것을 상소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는 만동묘는 송시열이 유명으로 수제자 권상하에게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낼 사당을 건립하라고 하여서 세워졌다. 1865년(고종 2년) 조정에서는 대보단에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만동묘를 철폐했다가 1873년(고종 10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이듬해 왕명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그러다 1907년에는 우리 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우고 이듬해에는 만동묘를 폐철하는 동시에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킨다. 이런 상황에서도 1910년 송병순(1839∼1912) 등이 존화계를 조직하여 제사를 이어가는 등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이어졌으나,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으로 영영 끊기게 되었다. 여기서도 송병순의 존화양이의 춘추의리 정신을 잘 알 수 있다.

1888년(고종 25)에는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4년(고종 31)에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찾아오는 손님도 만나지 않는 등 칩거하였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향약을 보급하여 향인을 교화했으며,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자정(自靖)의 생활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데만 전념하였다.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영동군 학산면 활산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하고 그 해 9월 5일 강당 위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살하려고 하였다. 그 때 마침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실패하자, 그 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이 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독서만집(讀書漫錄)』, 『학문삼요(學問三要)』, 『사례축식(四禮祝式)』, 『용학보의(庸學補疑)』, 『주서선류(朱書選類)』 등이 있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송병선(宋秉璿, 1836-1905)                                 PDF Download

 

병선은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우암 송시열은 효종과 동심동력하여 설욕을 갚고자 북벌을 준비한 당대의 거유로 소중화(小中華), 존화양이(存華攘夷) 등 춘추의리(春秋義理)의 화신이었다.   도학에는 정암 조광조요, 학문에는 퇴계 이황이요, 성리에 율곡 이이라고 하는데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의리에 관해서는 우암 송시열을 으뜸으로 삼는다.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며 스스로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이는 조상의 의리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화옥(華玉)이며 호는 연재(淵齋)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대전시 회덕(懷德)에서 출생하였으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고, 송병순(宋秉珣)은 그의 동생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그는 송달수가 죽은 뒤 집안의 학문이 기울어질 것을 염려해 학문에 더욱 힘썼으며, 작은아버지 송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이는 송시열 – 권상하 –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이다. 송달수는 조선후기 성리학계를 이분하였던 호락논쟁에만 매몰되지 말고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본연의 연구에 매진할 것을 강조한 순수 학문적 입장을 강조했고, 송근수는 1882년 좌의정 재임 시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사직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였다.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송병선이 ‘전통질서 중의 하나인 복제를 함부로 바꿀 수 없음’을 역설하면서 위정척사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이 또한 그가 계승한 가학 및 학통의 전통이다.
송병선은 국운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선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세를 이루고, 사상적 무장을 확대하고자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이를 위하여 유림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조선을 사상적으로 지탱해 온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전파하고,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면서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넣었다. 1867년 옥천 이지당(二止堂)에서의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기국정, 고암서당 등지에서 강회를 개최하고, 성주의 노강 등지에서 향음례를 행하고, 무주 구천동의 서벽정을 중건하여 강학하기도 하였다.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경연관(經筵官), 서연관(書筵官),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이는 성리학의 정진, 언로의 개방, 국가정통성 확립, 국가기강 확립, 재정절약, 인사정책 일신, 조세경감, 왜세 척결 등 8가지 현안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1조와 8조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대의를 밝히고 있는데, 위정을 위해서는 성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여 국왕으로부터 철저히 성리학으로 무장하여 전 국민이 사상적으로 절대 동요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척사의 대상으로는 왜(倭)와 사교(邪敎)를 꼽고 있는데,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의 시각에서 일제를 비롯한 서구사상 일체에 대한 척결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여기서 송병선은 각국 공사관에 우리정부의 입장을 표명할 것과 외국에 대응할 수 있는 군대의 양성을 주장하였다. 봉사의 핵심은 무엇보다 일제에 맞설 수 있도록 내수를 급히 정비하고, 군사력을 양성하여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내자는 것이었다.
그 후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당시 일제는 송병선의 서울 상경, 국왕 면담, 선생을 추종하는 제자그룹 등을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고 판단하였다. 12월 28일 대전으로 압송되어 온 다음날 송병선은 70세의 노구로 조국을 위하여, 후세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다가 끝내 유소(遺疏)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상소이자 제자들에 대한 행동 지침이 되었다. 그리고 음독한 후, 후손과 제자들을 모아 ‘도의 수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마지막 유지와 함께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 대선비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라 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도 『연재집(淵齋集)』과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만집(武溪謾集)』, 『동감강목(東鑑綱目)』 등 53권이 있다.

송문흠(宋文欽, 1710-1752)


문흠(宋文欽, 1710-1752)                                 PDF Download

 

국 18현의 한 명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의 4세손으로, 형 송명흠(宋明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자는사행(士行), 호는한정당 (閒靜堂)이다.  형과 마찬가지로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이재는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치  세연간노론벽파의중심인물로활동한문신이다.

조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한 송병원(宋炳遠)이고, 부친은 송요좌(宋堯佐)이다.   생조는원래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낸 송병익(宋炳翼)인데,  금산 군수(錦山郡守)를 지낸 묵옹 송병원(宋炳遠)에게 출계하였다. 모친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이다.   2남2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1733년(영조9) 계축식년사마시(癸丑式年司馬試)에 진사2등으로합격하였으나,  관직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어, 형 송명흠과 함께 회덕(懷德)의 비래암(飛來庵)에 뜻 있은 선비들을 모아<대학(大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특별히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후에 장릉참봉(長陵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그뒤 익위사시직(翊 衛司侍直)에 임명되었을 때 조태구(趙泰耉)의 아들 조현빈(趙顯彬)이 마침 세마(洗馬)가 되었으므로 더불어 동료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

왜냐하면 조태구는 소론의 영수로서 경종치세 때 일어난 신임옥사에서 노론 4대신 주살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다시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이 되었으나조현빈이 그 자리에 계속 있자 역시 관직을 버리고 떠난다.

1743년(영조19)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이 전랑(銓郞)이 되어 맨 먼저 그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발탁하여 일 년여 동안 재직하게 하였으나, 가르칠 어린아이들이 없어 곧 벼슬을 사양하였다.  1747년(영조23) 종부시주부(宗簿侍注簿)에 올랐다가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으며,  다시 문의현령(文義縣令)이 되었다.

1552년(영조28) 12월 15일, 향년43세의나이로갑자기사망하였다.
송문흠은 예서를 잘 써는데, 특히 이인상(李麟祥)과 의예술적 교분이도타웠다.  이인상은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낳은 명문 출신으로 1735년(영조11) 진사에 급제하였지만 증조부 이민계(李敏啓)가 서자였기때문에 본과에 이르지는못하였다.  그는 서출이었지만 명문 출신답게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당시 문사들의 존경을 받았고 후대의 문인과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에 그의 전서체에 대하여기(奇)하다고 하고 혹은 허(虛)하다고도 하였는데, 김정희(金正
喜)는 그문자향을 높이 평가하면서

“전각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없다.”고 상찬하였다.

이런점에서 형인 송명흠이 유학하는 선비에 가깝다면 송문흠은 그예술적 역량이 출중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는그가 남긴 ‘한정당기’에서도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정당집>은 양이 많지 않은데,  조카인송시연의 발문에 의하자면 상당량의 글이 유실되었을 것이다.
그가 당호를 한정당이라고 지은 것은 도연명에게서 따온 것이다.  그는‘한정당기’에서도 연명의 일생을 “민면사세우애한정(?勉辭世 偶愛閒靜)” 8자로 요약하였는바,  그뜻은‘세상에 매이지 않고자 몸부림치고, 한정한 삶을 사랑하네’라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부귀공명을 얻기위해 서로 다투고 서로 자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이를 좇지 않고도 연명이 그랬듯이 세상에 나아가 나를 드러내고 명예와 부귀를 얻고 세상에 큰 이름을 드리우는데 온 정신을 두기보다는 유유자적하며 천성을 다하는 인생을 살겠다.  그리하여 한정당 이라고 자호한 것이다.

송문흠을 후대에 서예가이자 문장가라고도 평하는 데는 아마 이와 같은그의 성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문집으로는 8권 4책의 『한정당집(閒靜堂集)』이 전한다.

송명흠(宋明欽, 1705-1768


송명흠(宋明欽, 1705-1768)                                 PDF Download

 

국 18현의 한 명인 송준길(宋浚吉)의 현손으로, 동생 송문흠(宋文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자는 회가요, 호는 역천(?泉)이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이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 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동문수학한 미호 김원행과는 막역한 강학지우로 유명하다. 혈족 관계로 보면, 김원행의 생모가 송명흠의 조부인 송병원의 딸이기 때문에 송문흠은 김원행의 외가쪽 사촌 동생뻘이다. 대과에 응시하지는 않았고, 뒤에 학행으로 추천를 받아 청도도사·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영조 30) 특별히 서연관(書筵官)을 제수하여 별유(別諭)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55년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 집의·승지·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역시 글을 올려 거절하였다. 만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되면서,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이 되어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국역 영조실록>에 따르면, 송명흠은 1763년(영조39) 3월 5일의 상소에서 비유한‘적불(赤?)’이란 말로 영조의 노여움을 샀는데, 이에 대해 계속해서 초선(抄選)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1764년 5월 17일의 기사에서 영조는 “송명흠의 적불이란 말도 역시 산야(山野)의 당론”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후 박세채의 문묘 종향 문제로 당론이 이어 지자 11월 28일에는 신경(申暻)ㆍ송명흠ㆍ홍계능(洪啓能)ㆍ김양행(金亮行)을 모두 초선에서 빼라고 명하면서 당습(黨習)은 망국의 단서인데 그 원인은 산림의 선비에게서 말미암았다고 글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 11월 30일에 송명흠, 김양행, 홍계능을 서인으로 만들었다.

적불(赤?)은 붉은 무릎 가리개로, 대부(大夫)이상의 관원은 적불을 착용하고 초헌을 탔는데, <시경(詩經)> 조풍(曹風) 후인장(候人章)에 조(曹)나라 군주가 군자(君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였으므로, 대부가 5인인 제후(諸侯)의 제도를 무시한 채 그 복색(服色)을 한 자가 수백 명이었으며 어진 이는 도(道)를 지키느라고 도리어 빈천(貧賤)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송명흠이 올린 상소에

“근습(近習)에 정(情)을 두거나 인척(姻戚)을 사사로이 좋아한다면 장차 덕망 있는 이를 임명하는 관작이 모두 사인(私人)에게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니, 사신이 비평한 바에 ‘저 소인들은 적불(赤?)을 한 자가 수백 명인 어리고 예쁜 소녀들이야 굶주리는 수밖에’라고 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나간다면 온갖 일이 그러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적불 두 글자를 쓰고 있다. 이 소에 대해 영조가 “내 비록 덕이 없지마는 어찌 조후(曹侯)와 같은 데 이르렀겠느냐?”

라고 역정을 내며, 대신·승지·옥당을 불러 각각 소견을 진달하라 명하였는데, 영의정 신만(申晩)은 임금이 진정하기를 청하고,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이것은 문장을 끊어서 뜻을 취할 것이니, 반드시 무심코 인용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변론을 하였고, 승지와 여러 옥당이 대답한 것도 모두 대신의 말과 같았기 때문에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 이에 비답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 사지(辭旨)가 몹시 엄중하였다고 기록에 전한다.

애초에 영조가 송명흠을 불러들일 적 기사가 <영조실록>에 실려 있는데, 군신 간에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송명흠이

“격물(格物)·치지(致知)의 공부가 극진하지 못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공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을 광구(匡救)하는 자는 충(忠)이고 임금의 잘못에 아부하고 순종하는 자는 충이 아니니, 이것을 미루어 나가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저절로 공정해질 것입니다. 무릇 진언(進言)에 대해서는 말이 쓸 만하면 쓰고 쓸 수 없으면 쓰지 않을 뿐입니다. 어찌 갑작스레 벌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이에 임금이 회답하기를,

“천천히 강구(講究)해야 할 것이니 모름지기 말을 쓰지 않았다 하여 떠나지 말라. 내가 경연관(經筵官)을 얻은 것이 마치 밝은 촛불을 얻은 것과 같으니, 모름지기 상세히 문의(文義)를 진달하라.”

실상 앞의 상소문에서 직언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군신간의 후은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 직언의 내용은 주자가 효종에게 올린 <무신봉사>의 격물치지의 학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 군신간의 후은의 정 이 도타울 때에도 ‘격물치지’를 말하고 상소문에서도 마음을 비우고 ‘격물치지’의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한 내용으로 전후가 수미일관하다. 그러하기에 상소문에 대한 평에서 사관들이 이렇게 적고 있다.

“송명흠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士林)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정초(旌招)를 누차 내렸으니 뜻을 지키고 나오지 않더니, 은례(恩禮)가 갈수록 융성해지자 감격하여 조정에 나왔다. 전석(前席)에 출입하면서 애연히(?然)히 서로 믿음이 있었는데, 마침내 처음 의 예우(禮遇)를 계속하지 않기에 이르자 진소(陳疏)하고 지레 돌아감으로써 그 쓰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론(士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저서에 《역천집》이 있다.

박성원(朴聖源, 1697-1757)


박성원(朴聖源, 1697-1757)                                  PDF Download

 

성원(朴聖源, 1697-1757)은 조선중기에 활동했던 문신이자 유학자로 이재(李縡)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낙론(洛論)을 지지하는 학자로 예서(禮書)에도 밝았다.
영조20년,  1744년에 그는 모두 11조목에 이르는 내용의 간언을 하였다.  당시 영조는 탕평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정책과도 맞물려 그의 간언은 조정을 뒤흔들고, 영조를 분노케 하였다.  하지만 그의 지적은 매우 구체적이었고, 치밀하였기때문에 사관도 그의 간언을 인정하였고, 영조도 결국 그를 조정에 다시 불러 세손 정조의 교육을 맡게하 였다.

1697년( 1세, 숙종23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호는 겸재(謙齋)·광암(廣巖)이다. 부친은 박진석(朴震錫)으로관직이 없었다.  김창협의 제자인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박성원의 집안은 한미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박성원’( ⌈영조실록 ⌋15년10월) 혹은 ‘세력이 없는 사람’( ⌈영조실록 ⌋20년 9월) 등으로 알려졌다.

1721년(25세, 경종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26년경 부터 이재(李縡)에게서 배우고,  서인과 노론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1728년(32세,영조4년)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자(司諫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에 임명되어 언관으로 활동하였다. 영조가 펼친  탕평 정책에 대해서는 매 우비판적이었다.

1744년(48세,영조20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  당시 연로한 고위 문관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나이가 70이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고 하였다.  이곳에 이름을 올리는 것 은신하들도 영광으로 알았고 임금들 조차도 영광으로 알았다.  박성원은 반대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임금이 기로소(耆老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태조 때에 시작되었고,숙종께서 계승하였습니다.  오늘날 마땅히따 라야 할 것은 태조와 숙종께서 시행하였던 규범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금년에 망륙(望六, 51세)이 되시 는전하를 기로소에 들도록 종신(宗臣)들이 상소를 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앞선 임금님들께서 향년이 56~7세가 되어도 신하들이 청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 그 당시의 신하들이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금의 종신에 미치지 못해서 그러하였겠습니까?  진실로 조종의 고사는 정해진 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숙종께서 기해년(1719년, 59세)에 거행하였던 것은 근거할 만 한 사유가 있었지만 지금 이를 근거로 기로소에 들고자 하는 것은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박성원은 이어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아!  앞선 조상들께서 남몰래 도와주고 수많은 영혼들께서 함께 보호하여 성상(임금님)의 수령(壽齡)이 1백세까지 살 것을 기대하는데,  몇 년 동안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반드시 이처럼 급급하게 하십니까? (중략)
청컨대 우선 기로소에 이름을 올리자는 명령을 중지하도록 하소서.”

아직 50세를 갓 넘은 영조 임금이 몇 년을 못참아 기로소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아니 될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박성원의 주장은 기로소 건뿐만 아니라 모두 11조목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사관의 임용에 관한 일, 경연관을 잘못 선택한 일, 경연에 참석할 자격도 없는 자를 뽑았는데 임금이 학문이 훌륭한 자라고 오해한 일,  관리들이 부정을 저지른 일, 외직에 있는 대신들이 집을 짓지 못하게 하명을 하였는데 거의 모든 대신들이 집을 지은 일에 대해 처벌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박성원은 한건한건 구체적인 실명과 사례를 들어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문건을 접한 영조는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는지 노발 대발 하면서

“이것은 반드시 우리 조정의 훌륭한 관리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하는 계책이다.”

라고 하였다 .이윽고 박성원을 불러서, 크게 화를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국 시대 사람들은 초(楚)나라가 아니면 조(趙)나라로 갔었는데,  한쪽 구석에 있는 조선은 남쪽 오랑캐 사는 곳이나 북쪽 오랑캐 사는 곳 이외에는 갈 만한 데가 없다.  너는 무슨 심보로 그런 맹랑한 글을 올렸는가?  내가 기미(機微)를 알아 차리고서 일찍이 물러났던들,  어찌 너에게 이처럼 곤욕을 당하였겠는가?  조정의 신하라면 혹시 자격도 없는데 기로소에 이름을 올리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을 반박하더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어찌 네가 감히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영조는 결국 박성원에게 무슨 배짱으로 너는 임금을 모독하는가 라고 물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임금을 모독하고 도망 갈 곳은 아무데도 없다.  중국의 전국시대와는다르다는 것은 전국시대 사람들은 사방으로 도망갈 곳이 많았다는 것이다.  영조는 박성원을 죽여 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간언을 하는 박성원으로서는 물론 죽을 각오를 하고 올린 것이었다.  모든 건의에 대한 자료도 철저히 조사 하여 매우 구체적인 물증까지 제시하였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치밀했기 때문에 영조의 분노는 더욱 컸다.  20여년간 자신이 해온  정치,  자신이 세워 온 성군으로서의 권위가 무너지고,  그 동안 중요하게 추진해온  탕평책 역시 박성원의 한마디로 무위로 돌아갈 수  있었기때문이다.

영조는 박성원이 올린 상소문을 하나하나 들추어 몹시 꾸짖었다.  박성원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을 다시 상세히 말씀드리겠다고 청했으나 영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곧바로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임명하라 고명했다.  이에 승지 남태량(南泰良) 이이렇게 말했다.

“신의 팔뚝이 끊어지더라도 그와 같은 명령을 신은 감히 쓸 수가없습니다.”

영조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남태량의 관직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바로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 임금의 명령을 적은 기록)를 내렸다.  하지만 승지 정필녕(鄭必寧)과 이창의(李昌誼)가 그것을 반포하지 않고,  임금을 직접 만나 말씀을 듣겠다는 요청을 하였다.  영조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승지 두 사람도 바로 관직을 박탈하고 다른 사람들을 새로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병을 구실로 오래도록 취임하지 않았던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궁궐로 들어왔다.  그는 임금이 비상(非常)한 명령을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서 들어온 것이다.  그는 여러 재신(宰臣)들과 3사(三司)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함께 잇따라 임금에게 알현을 요청하였다.  영조는 그들의 계속되는 알현 요청에 밤 2시경에야 비로소 그것을 허락하였다.
송인명의 무리와 함께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우의정 조현명(趙顯命)도 또 뒤따라 들어왔다.  여러신 하들이 모두 임금이 내린 명령을 취소하기를 호소했다.  이에 영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성색(聲色)의 좋음을 빨리 취득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노인(老人)의 이름을 얻고자 하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박성원의 간언을 들으니) 경들은 아첨하여 내 마음을 즐겁게 하는 신하가 되었고 나는 아첨을 좋아하는 임금이 되었다.  이것은 내가 매우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지금 다시 그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다.”

좌의정 송인명이 이렇게 말했다.

“3백 년의 종사(宗社, 나라)와  대신(臺臣, 간언을하는신하) 한 사람을 비교할 때 그 경중이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천승지국(千乘之國,  제후의 나라.  만승지국은 천자의 나라임)의 위엄으로 박성원 한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무슨 곤란이 있기에 이와 같이 과격한 행동을하십니까?”

예조판서 이종성(李宗城)이 이렇게 말했다.

“이번일은 앞으로 나가기만 하고 뒤로 물러남이 없는데,  만약 전하께서 끝내 마음을 돌이켜서 저희들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다면 장차 궁문 앞에서 절규(絶叫)하는 일이 일어나서 동조(東朝,  태후가 집무하던 곳 .숙종의 둘째 부인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놀라시게 할까 두렵습니다.”

영조는 이 말을 듣고 다소 누그러져 이렇게 말했다.

“예조판서의 말을 들으니,  능히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번의 명령은 도로 거두겠으나 마음은 거둘 수가 없다.”

이에,  좌의정 송인명이 박성원을 유배하여 추방할 것을 청하였다. 영조는 박성원을 섬에 유배시키고,  앞서 명령한 관리들의 관직 박탈은 그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고위 관료들의 가슴  속에 가득찬 당심(黨心)과 종이에 널리 퍼져 있는 사사로운  뜻은 내가 명령하기를 기다리지 아니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그중 에서 조명겸·서명형·이명곤은 사람들이 욕하는 암담한 죄과를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모두 해당 관부로 하여금 이들을 처리하게 하라.”

조명겸, 서명형, 이명곤은 박성원이 문제있는 인물들로 지적한 관리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일거수 일투족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록하고 있던 사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역사적인 기록을 마무리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박성원은 임금과 소원한 신하로서 감히 말하는바가 거리낌이 없었다.  비록 그 마음이 과연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 기백은 숭상할 만하고,  그 말도 또한 취할 만한 것이 많았다.  특히 한 마디 말이 임금의 뜻을 거스렸기 때문에 그 몸은 귀양 가고 그 말은 쓰여지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아!  이 세상을 돌아 보건대,  당파가 없는 사람을 어찌 얻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그 말의 시비(是非)를 보아서 취하고 버리는 것이 옳을 터인데,  어찌 당인(黨人)이라고 지목하여 그 말을 다 버릴 수가 있겠는가? (박성원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조명겸의 무리는 하나같이 의금부에 나아갔으나,  곧 모두 죄가 없다고 밝혀졌다.  그러나 박성원이 논한 바가 또 어찌 다 허망한 말이겠는가?”

박성원은 남해에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유배형을 받았다. ‘위리안치’는 중죄인에 대한 처벌로 유배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려 막 는형벌이었다.  유배형 중에서도 특별히 엄한 형벌이었다.
박성원은 유배지로 떠날 때부터 남해에 도착하여 생활하면서 느낀 심정을 날짜별로 시를 지어 기록하였다. ⌈남천록(南遷錄) ⌋이 그 기록이다.   그가 유배간 남해는 대나무가 특히 많았다.  가운데는 대나무를 노래한 시가 많았다.
박성원이 대나무에게 물었다.

겨울 눈발에도 당당함은 오직 그대이기에 가능했는데
어쩌다가 눈의 위세에 몸을 굽히게 되었는가?
요즘 들어 (자네는) 사람들의 올곧은 정신에 이르지 못하니
지난날 늠름하고 강직하다는 칭송이 부끄럽구나.

대나무가박성원에게이렇게답했다.

내 머리를 누를 수 는있어도 뜻은 움직이기 어려우니
잠시 굽혔어도 결국 펼 것이니, 때가 있는 것 일세.
잠시 후  눈이 녹으면 푸르게 홀로서서
그대에게 다시  아름다운 자태를노래하리라.

1746년(50세,영조22년) 유배지에서 석방되었다.  석방되어 한양에 도착하여 다시 대나무 시를 썼다.
박성원이대나무를그리워하여말했다.

절해에서 비바람 서리를 함께 겪었더니
삼 년 유배살이에 (그대에게) 가장 정을 붙였었지
뜰에 가득 대숲 모습은 다시 대하기 어려워도
성근 운율은 응당 꿈속에 맑게 들어오리라.

대나무가박성원에게말했다.

나는 (대나무) 본래 무심한데 그대는 정을 남겼구려.
마음속 회포가 끝내 서로 맞는다면
천리 밖인들 한 뜰에서 대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박성원은 유배지에서 석방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세자를 가르치는 세손강서원 유선(世孫講書院諭善)으로 임명되었다.

1750년(54세,영조26년) 어머니와 형, 형수가 사망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상을 마친 1754년에 사헌부장령으로 임명되었다.

1759년(63세,영조35년)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영조에게 언로를 열것을 간언하였다.  8월부터 세손 (훗날의정조)을 가르치면서 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1760년(64세,영조36년) 10월에 여러 신하가 글을 올려 농사의 어려움과 백성의 고통을 세손에게 알려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영조가 세손 교육을 담당하는 박성원에게 그러한 내용의 격언을 모아 만들게 하였다.  박성원은 경전 및 기타 서적에 서발췌하여⌈보민격언(保民格言) ⌋을 편찬하였다.  다음해 2월 1일 임금 앞에서 강의하였다.

1761년(65세,영조37년) 7월에 ⌈강서원일록(講書院日錄) ⌋의 기록을 마쳤다.  이 기록은 1759년(영조35년) 8월 9일부터,  이해 7월 5일 까지,  박성원이 정조가 세손 시절에 공부한 교육과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책이다.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종4품 관직인 좌익선(左翊善)으로 강의를 주관하였는데,  정조는 이때 10살이었다.  강의 과목은『소학』외편과 내편, 『대학』, 『논어』, 『사략』등이었다.

1767년(71세,영조43년)에 사망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돈효록(敦孝錄)』, 『보민록(保民錄)』, 『돈녕록(敦寧錄)』, 『겸재집(謙齋集)』, 『예의유집(禮疑類輯)』등이있다. ⌈예의유집 ⌋은 예서(禮書) 연구에 힘쓴 그가 의문시 되는 문제를 지적해 조목마다 사견을 첨부한 것이다.
그는 낙론(洛論)에 동조하여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였으며,  백성들을 교화하는 근본으로 효를 중시하고, 효가 바로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영조는 세손(정조)의 학문은 모두 박성원의 힘이라는 칭찬을 하였다. 정조는 나중에 자신을 가르친 박성원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때문에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시기에 자신과 함께했던 박성원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시호를 내리고,  박성원의 자손들을 음직(蔭職)으로 관리에 등용시키고,  박성원의 ⌈돈효록 ⌋, ⌈예의유집 ⌋등을 왕명으로 간행하였다.

<참고자료>
⌈영조실록 ⌋. ⌈국역일성록 ⌋,영조37년조
김윤정, 겸재 박성원의 예학과 ⌈예의류집 ⌋의성격, ⌈한국문화 ⌋61,2013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서원일록(講書院日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성철, ⌈기로소와박성원의남해유배일기⌋,<남해타임즈>, 2015.6.2
이경식, ⌈남해유배문학기행⌋,<국제신문>, 2015.9.9

민우수(閔遇洙, 1694~1756)


민우수(閔遇洙, 1694~1756)                               PDF Download

 

우수(閔遇洙, 1694~1756)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손자이며,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의 오빠 문충공(文忠公) 민진후(閔鎭厚)의 아들이다.  김창협과 권상하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문장과 글씨를 잘 썼다.
1721년 신임사화로 노론의 관료들이 차례로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 관직에 대한 꿈을 접고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나중에 성균관좨주, 세자찬선, 원손보양관 등을 지냈다.

1694년(1세,숙종20년) 12월 28일 서울 안국동에서 문충공(文忠公)  민진후(閔鎭厚, 1659-1720)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손자이며,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외증손이다.  어머니는 정경 부인(貞敬夫人)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현감덕로(德老)의 딸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암(貞庵), 혹은 섬촌(蟾村)이다.

1709년(16세,숙종35년) 윤경적(尹景績)의 딸과 결혼하였다.

1714년(21세,숙종40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김창집(圃陰 金昌緝)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즈음부터는 농암(農巖) 김창협과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김창협은 민우수의 아버지 민진후와는 동서 지간이다.  두 사람의 장인이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이다.  민우수에게 김창협은 이모부인 셈이다.

1716년(23세,숙종42년) ⌈가례원류(家禮源流)⌋에 대한 분란이 생기자 소론파 인윤증(尹拯)을 공격하는 선비들의 상소문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숙종은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에서 송시열이 옳다고 판단하게되었다.
이후 친구 김신겸(金信謙, 1693-1738)과 함께 호서 지방(충청도지역)의 산수를 유람하였다. 스승 권상하를 찾아가 유교경전(經傳)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질문하였다.

1721년(28세, 경종1년) 전 년에 부친상을 당했다.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이해에 즉위한 경종이 몸이 약해 그의 동생 연잉군(후일의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웠다.  이 일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싸움으로 번졌는데 결국 왕세제 대리 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이 사형을 당했다. 옥중에 있던 처남 윤지술(尹志述)이 사망하고,  작은 아버지 민진원(閔鎭遠)과 매부김광택(金光澤)이 유배형을 당했다.  민우수는 이러한 일을 계기로 벼슬을 단념 하고 여주로 돌아가 유교경전(經傳) 연구에 힘썼다.

1726년(33세,영조2년) 봉릉참봉(奉陵參奉), 세자세마(世子洗馬), 명릉참봉 등에 임명되었다.  탕평책이 국론으로 정해지자 그러한 정책에 반대하고 관직을 사양하였다.  전년에 진사 김신겸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산수를 즐기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자 강원도 영월의 산중으로 들어갔는데,  그와 함께 유숙기(兪肅基), 이봉상(李鳳祥) 등과 더불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명덕설(明德說) 등을 강의하고 토론하였다.

1731년(38세,영조7년) 은거하면서 집을 짓고 다음과 같은 시( ⌈정암집 ⌋ 1권樹屋)를 지었다.

樹屋幽棲好  집을 지었네,  조용히 살기 좋은 곳에.
蒲床宴坐宜  왕골로 만든 자리, 편안히 앉기 좋네.
鴻濛上皇意  아득한 기운은 태상황  복희의 마음이요
寂默老禪癡  적막함은 늙은 선승의 어리석음이네.
旭日盈黃卷  아침 햇빛은 누런 책위에 가득차고
閒花照墨池  꽃잎은 벼루 안의 연못에 비치네.
淸明本來氣  청명은 원래 오는 절기이지만
不待夜中知  기다리지 않아도 밤이 되면 알겠네.

1739년(46세,영조15년) 형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후1743년에는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1748년에는 경기도 유생 침빈(沈 䚔 ) 등이 상소문을 올려 민우수와 함께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등 조정에 불러들일 것을 호소하였으나 임금은 거부하였다.

1750년(57세,영조26년) 봄에 통정대부에 올라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아들 민백첨(閔百瞻)이 사망하였다.  겨울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1751년(58세,영조27년)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성균관좨주, 세자찬선(世子贊善) 등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10월에는 특명으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61세,영조30년) 시강원 서연관,시강원 참선, 공조참판겸성균관좨주에 임명되었다가 , 9월에 원손보양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가르치던 제자 김양행(金亮行, 1715-1779)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다.  그는 가깝게 지내던 친구 김신겸(金信謙)의 아들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예학과 역학에 밝았다.  김양행은 이듬해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나중에 이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정조 때는 형조참판을 지냈다.  그가 가르친  제자로 이우신(李友信)·민치복(閔致福)·박준원(朴準源)  등이 있다.

1755년(62세,영조31년) 부인 윤씨가 사망하였다.  이해 3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56년(63세,영조32년) 가을에 사망했다. 여주섬락리(蟾樂里)에 장사지냈다.
저서로 ⌈정암집 ⌋ 16권이 있다.  그는 대명의리를 중시하고, 특히 노론의 원칙과 의리를 중요시 하였다.  일생동안 주로 재야유학자로서의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관직도 대부분 그러한 성격의 것이 많았다.
2년뒤,  자헌대부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정암집』16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元)이다.  그의 묘는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 능말뒤쪽 구릉에 있다.

<참고자료>
⌈민우수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콘텐츠
김은정, ⌈정암 민우수의 삶과 한시⌋, ⌈한국한시작가연구⌋17,2013.
윤혁동, ⌈민우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신(崔愼, 1642-1708)


최신(崔愼, 1642-1708)                                           PDF Download

 

신(崔愼, 1642-1708)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송시열에게서 배웠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제릉(齊陵) 참봉(參奉),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 회인현감 등을 역임했으며,  북도지방 사람들로 부터 널리 추앙을 받고 그곳에 유풍을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윤증(尹拯)이 송시열과 갈라서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송시열을 변호하고 그가 스승을 배신한 것에 대해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소론의 배척과 탄압을 받았다.  스승 송시열의 일로 유배형을 당했다가 , 유배지에서 풀려나온 뒤에 는스승의 묘소 근처인  광주(廣州) 에 집을 짓고 은거하기도 하였다.

1642년(1세, 인조20년) 음력 5월 13일에 함경북도 회령(會寧)에서 최산후(崔山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회령(會寧), 자는 자경(子敬), 호는 학암(鶴菴)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5살(1646년) 때 모친상을 당했다.

1657년(16세,효종8년) ⌈맹자⌋를 읽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

1661년(20세,현종2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례를 성실히 실천한 것이 조정에 알려져 복호(復戶,요역 부담의 감면)를 받았다.

1665년(24세,현종6년) 10월,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한 민정중(閔鼎重)을 따라 칠보산(七寶山)을 유람하였다.  함경도 함산(咸山)에서 ⌈심경(心經)⌋을 배웠다.  전년에는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가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하자 방문하여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1666년(25세,현종7년) 3월, 민정중(閔鼎重)의 소개로 회덕(懷德, 지금의 대전광역시)의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인사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스승의 격려를 받으며 근사록(近思錄), 역학계몽(易學啓蒙), 가례(家禮), 상수(象數), 율려(律呂) 등 성리학(性理學) 관련지식을 배우며 연구하였다.
당시 그가 송시열의 문하에서 글 공부하던 상황은 그의 문집에 이렇게 실려있다.( ⌈학암집⌋ 제2권 華陽聞見錄)

“내가 화양동(華陽洞)에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던 때의 일이다.  매일 아침  맑은 첫새벽에, 선생님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맹자⌋ 몇 편과 ⌈상서⌋ 의 전모(典․謨), ⌈용학정문(庸學正文), 그리고 주자의 문장 중긴 것 한 두편을 읽었다.  이것은 선생님이 일생동안 해온 공부로 상례가 있거나 병에 들어 부득이 한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는일과 였다.  선생님은 항상 제자들에게 ‘자네들은 평상시에 읽는 책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독서라 는것은 반드시 평소에 일상적으로 해야한다, 그래야 쓸모가 있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길 삼사백번을 읽지 않으면 문장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하셨다.”

1674년(33세,현종15년) 이단하(李端夏)가 현종(顯宗)의 행장을 지으면서 스승 송시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최신은 이단하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을 저버린 죄를 꾸짖었다.

1675년(34세,숙종1년) 1월 13일 숙종이 왕세자 책봉에반 대하는 송시열을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보냈다.  당시 충청도 진천 길상사에 있던 송시열은 유배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우명(金佑明)의 계획이 지금에야 실현된 것이다.  지금까지 지체된 것은 임금의 참의심이 많으신 것이다.”

라고말했다.( ⌈최신록⌋)

이때 유필명(柳弼明)이 상소문을 올려 송시열의 유배를 반대하였는데 그 상소문을 최신이 지어 주었다고 의심을 받아 심문을 받고 사천(泗川)에 유배되었다.  이해 6월에 송시열은 남인파 관료들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다시 경상도 장기(長鬐)로 이배(移配, 유배지를 옮김) 되었다.  이후 덕원, 웅천(熊川), 장기(長鬐), 거제(巨濟, 1679년4월), 청풍(淸風, 1680년5월)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1680년(39세,숙종6세) 경신환국으로 스승 송시열이 풀려나왔다. 남인이 권력을 잃고, 다시 서인이 득세하였다.  최신도 유배지에서 풀려나 곧바로 제릉(齊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681년(40세,숙종7년) 봄에 준원전(濬源殿) 참봉으로 임명되었다. 가을에,  고향인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돌아갔다.

1682년(41세,숙종8년) 1월에 상소문을 올려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8월에, 사직서(社稷署) 참봉에 임명되었다.  다시 상소하여 송시열을 우대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이단하(李端夏)가 박태보(朴泰輔)에 게 배척 당한 일을 임금에게 알렸다.  임금이 기꺼이 그 내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특별히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에 임명하였다.  얼마뒤에 직장(直長)으로 승진하였다.

1684년(43세,숙종10년) 윤증(尹拯)이 송시열과 갈라서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송시열을 변호하고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것을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큰 논란이 일어나 소론측의 배척을 받았다.

1685년(44세,숙종11년) 광흥창(廣興倉)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다음해 회인(懷仁)의 현감(縣監)이 되었다.  당시 재해를 입은 고을의 부역을 면제시키는 등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688년(47세,숙종14년) 사람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결국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음해 기사환국으로 광양(光陽)에 유배되었다. 당시 스승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고,  윤증이 스승을 죽인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1694년(53세,숙종20년)  갑술환국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스승  송시열의 묘소 근처인 광주(廣州)에 임시 숙소를 만들어 은거하였다.

1697년(56세,숙종23년) 이해에 기근을 당하여 부인 창령 성씨(昌寧成氏)가 사망하였다.  당시 가정형편이 몹시 궁핍하여 주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러주었다.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도망가버렸다.

1701년(60세,숙종27년) 진도(珍島) 목장의 감목관(監牧官)이 되었다.  다음해 회갑을 맞이하여 가족들의 시에 화답하여 오언(五言)으로된 고풍시(古風詩) 230여 구를 지었다.

1708년(67세,숙종34년) 7월 6일에 스승  송시열의 묘가 있는 광주(廣州, 경기도) 임시 숙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함경도 출신의 사림으로 북도지방에서 널리 추앙을 받았다.  헌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 되었다가 고종 때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그리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때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5대손 최경조(崔擎祖)가 문집의 간행을 위해서 유고를 정리하고,  묘표등 부록을 작성하였다.  이후 1882년경 조정이 최신을 기리는 추증을 내린 것을 계기로 문집 간행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1884년에 9대손 최병진(崔秉鎭)이 연활자로 6권 3책의 문집 ⌈학암집⌋을 간행하였다.  제1권 외의 글은 대개 송시열의 문중에서 저자와 관계된 기록을 얻어 수록한 것이다.  1684년에 올린 만언소(萬言)도 이 문집에 포함되어 있는데,  만언소는 최신이 쓴 문장 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으로 송시열과 윤증(尹拯)의 갈등을 표면화 시킨 것으로 노론과 소론의 분당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상소문이다.

<참고자료>
『학암집(鶴菴集)』
차용걸, ⌈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신행력⌋, 한국문집총간인물연표, 한국의지식콘텐츠(http://www.krpia.co.kr/)

정온(鄭溫, 1652-1707)


정온(鄭溫, 1652-1707)                                            PDF Download

 

온(鄭溫, 1652-1707)은 조선시대 후기에 활동했던 문신이자 유학자로,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다.  집안의 여러 형들과 함께 송시열(宋時烈)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48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운은 없었다.  그의 형들 가운데 정호(鄭澔)는 송시열이 사망한 뒤,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는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3정승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정온은 잠시 순릉봉사(順陵奉事)로 근무한 뒤 56세 때 병으로 사망하였다.

1652년(1세,효종3년) 음력 10월 7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중(和仲)이다.  어려서 초명(初名)은 순(洵) ,후에 유피(有避)라 하였다가 ‘따뜻할 온’(溫)으 로바꿨다.  아버지는 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 정경연(鄭慶演, 1604-1666)인데,영의정 정철(鄭澈)정직(鄭稷)의 아들이다.
정온의 부친은 둘째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 민광환(閔光煥)의 딸을 맞이하여 그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정온은 그 중 넷째인데,  큰 어머니가 낳은 아들들까지 포함하면 일곱째이다. 형으로 통덕랑(通德郞) 정주(鄭澍)정인(鄭潾), 정비(鄭泌), 정섭(鄭涉)과 영의정, 좌우정, 우의정을 두루 지낸 장암(丈巖) 정호(鄭澔, 1648-1736), 정진(鄭津)이 있으며 동생으로 정영(鄭泳)이 있다.
정온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단아하고 수려 하였는데,  장성하여 신이 중(愼爾中)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 하였다.

1666년(15세,현종7년) 부친이 사망하였다.  정온의 부친 정경연 은정온이 태어나기 전인 1643년(인조21년)에 지방관리의 추천을 받아 영릉참봉(英陵參奉)에 기용되었다. 그 뒤 여러 지방의 수령으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생활이 검소하고 매사에 부지런하여 현지 주민들에게 찬사를 들었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홀어머니를 50여년이나 모셨는데,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외지에 부임 할 때에도 항상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뒤에 평릉도 찰방(平陵道察訪)이 되었으나 지난해(1665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해 어머니 상을 당해 너무 애통하고 상심한 나머지 병을 얻어 한달 만에 별세하였다.

1671년(20세,현종12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화양동(華陽洞)에 있음을 듣고 찾아가그문하에들어갔다. 당시 학비를걱정하였으나그가배움에뜻을두었음을기뻐하면서어머니가이렇게말했다.“네가스승을따라도를배우고자한다면내머리카락이라도잘라주겠다.”고하며노잣돈을마련해전송해주었다. 그뒤어머니는병에걸려수년뒤에사망하였다.

1675년(24세,숙종즉위년)스승 송시열이 귀양을 갔다. 친형 정호는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힘썼다.  하지만 이후에 주위의 권유로 1682년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으로 승진하였다.

1689년(38세,숙종15년) 6월 8일, 송시열이 유배지 제주에서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조문을 가서 제문을 지어 영전에 올렸다.  친형 정호는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 성문 바깥으로 쫓겨남) 당하였다가 경성(鏡城, 함경도)으로 유배되었다.

1694년(43세,숙종20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권되어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다.  형 정호도 유배형에서 풀려나 지평, 수찬, 교리 등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하지만 1696년에 소론파 이사상(李師尙)을 비판 등 과격한 발언으로 파직되었다.  2년 뒤 다시 정호는수찬, 집의, 사간을 거쳐 동래부사로 임명되었는데,  근무 중에 신은(新銀) 약 12만냥을 왜인에게 판매한 일로 파직되었다.  하지만 형 정호는 일생을 늘 가난하게 지내면서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였다.

1699년(48세,숙종2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통훈대부행순릉봉사(通訓大夫行順陵奉事)에임명되었다.

1701년(50세,숙종27년) 3월 충청도(忠淸道)에서 다른 유생들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이희정(李喜鼎)이 어진이를 근거 없이 모함한 일과, 호남․영남의 유생들이 함께 일어나 그런 모함에 호응한 일,  그리고 박명의(朴明義), 임수간(任守幹) 등이 번갈아 소를 올린 상황을 설명하고 이희정에게 내린 죄율(罪律)로 그들을 모두 처벌하기를 호소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미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에게 타일렀고, 호남과 영남의 유소(儒疏)없다.”

고하였다.
이희정(李喜鼎)은 1656년 생으로 숙종17년, 1691년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 3등(三等) 21위로 합격한 충청도 출신의 진사로 다른 유생들과 함께 이 해 2월에 상소를 하여 김장생(金長生)을 헐뜯고 배척하였으며, 나아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등 두 학자에 대해서도 비난하였다.  이에 승정원에서는 그가 방자하고 꺼림이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숙종은

“김장생을 업신 여긴 것은 지극히 무엄(無嚴)하고,  또 이이, 성혼 등 두현인을 방자하게 추한 욕설을 하고 있으니, 더욱 놀랄 만한 일이다.  이희정(李喜鼎)은 배소(配所)를 정하여 유배보내고 지금 이후로는 이와같은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말라.”

고지시하였다.

1707년(56세,숙종33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대소원면 영평리에 있다.  습재(習齋) 이직신(李直愼)이 묘표를 쓰고,  또 친형 장암 정호(鄭澔)가 묘표와  행장을 지었다.
친형 정호는 1710년에 대사간으로 복귀 하였으며 이후  대사헌이 되었다가 당론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다시 1713년에 대사성으로 복귀하여 송시열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고,  1715년 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또 소론 윤증(尹拯)이 송시열을 배반하였다는 주장을하여 파직되었다가,  노론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대사헌으 로승진하였다.  하지만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에 효종에게 불손한 내용을 썼다는 이유로 윤선거 부자와 함께 관작을 박탈당했다. 1717년에 다시 예조판서로 복귀하여 다음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1721년에는 ⌈숙종실록⌋의 편찬에 관여하였다가 신임사화를 당하여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1년)에 노론이 재집권하자 우의정에 승진되어 좌의정을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2년 뒤,  정미환국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729년에 영중추부사로 재직하던 중 사망하였다.

<참고자료>
⌈장암집(丈巖集)⌋ ⌈(권18, 墓表亡弟奉事遺事)⌋
⌈정온(鄭溫)⌋,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현정,  ⌈정온, 디지털충주문화대전⌋, http://chungju.grandculture.net/

이희조(李喜朝, 1655∼1724)


이희조(李喜朝, 1655∼1724)                                PDF Download

 

희조(李喜朝, 1655∼1724)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로,  대사헌,  이조참판, 인천부사, 천안군수 등을 역임했다.  인천 부사 재직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송시열의 문인이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기 전에는 박세채(朴世采)를 따랐으나 나중에는 송시열의 노론을 지지했다.  경종이 즉위하던 해 노론파가 실권하면서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가 다른 곳으로 이송하는과정에서 사망하였다.

1655년(1세,효종6년)에부제학(副提學) 이단상(李端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이며,  자는 동보(同甫),호는 지촌(芝村)·간암(艮菴),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0년(26세,숙종6년) 경신환국이 일어난 뒤 유일(遺逸)로 천거되었다.  이때는 남인들이 실각하고 다시 서인들이 복권한 때였다.  이후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가, 다시 전설별검(典設別檢), 의금부도사, 공조화랑, 진천현감(鎭川縣監) 등에 임명되었다.

1694년(40세,숙종20년) 갑술옥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인천현감(仁川縣監), 동궁서 연관(東宮書筵官), 지평(持平), 천안군수, 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지냈다.

1697년(43세,숙종23년) 인천 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인천에 부임했다.  그는 ‘이곳은 나의 아버지(이단상)가 부사(府使)를 역임한 고장으로, 부친의 치적이 아직 남아있는 이곳에서 정치를 잘 하지 못해 죄를 짓게 된다면 무슨 있겠는가?’ 라고 하며 선정을 베푸는데 힘썼다. 그곳에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많
았는데,  그들을 구제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 인민당(人民堂)’이라하였다.  있다. 이단상과 이희조 두 부자(父子)의 선정은 오랫동안 인 천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1702년(48세,숙종28년) 인천 문학산(文鶴山) 기슭에 학산서원(鶴山書院)이 세워졌다. 이곳에 부친 이단상(李端相)이 배향되었다가 나중에 이희조도 함께 배향되었다.

1707년(53세,숙종33년) 장령(掌令), 해주목사(海州牧使)에 임명되었다.  해주목사 재직 시에는 석담(石潭)에 있는 율곡 이이(李珥)의 유적에 요금정(瑤琴亭)을 세  . 또 이제묘(夷齊廟)에 송시열의 글씨로 편액을 달고 기(記)를 지어 걸었으며,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들을 위해 사당을 세웠다.
이희조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율곡이 정한 고산구곡(高山九曲)  중여덟 번째 절경인 금탄(琴灘, 거문고 소리를 내는 여울)을 노래했다.

八曲溪山何處開
여덟번째골짜기는어디로열렸을까?
琴灘終日好沿洄
금탄의골짜기는종일토록오르내리기좋구나.
牙絃欲奏無人和
거문고를타고싶으나화답해줄사람없네.
獨待靑天霽月來
홀로기다리네, 푸른하늘에밝은달떠오르길.

1578년 율곡은 고향으로 내려가 해주 석담에 은거하면서,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본격적으로 후학 양성을 추진하였다.  그때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본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를 지었는데,  총 10수로 구성된 시조 형식의 시가였다.  그 중 여덟 번째 ‘팔곡(八曲)’의 시는 다음과 같다. (요즘 문장으로 일부 수정함)
한문 은송시열이 번역한것이다.

八曲何處是  여덟째 골짜기는 어디일까?
琴灘月正明  금탄에 달이 참 밝구나.
玉軫與金徽  옥 거문고 금 거문고,
聊奏數三曲  두서너 곡 무심히 타보는데,
古調無知者  옛 가락 아는 이 없구나.
何妨獨自樂  누가 막으리, 혼자서 즐기는데.

이희조의 시는 밝은 달이 떠오르길 기다리는데 그것은 아마 도율곡 이이가 팔곡의 금탄을 노래한 시에서 달이 밝은 때 혼자서 거문고를 타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 같다.  때까지 기다리면 율곡이 그곳에서 거문고를 탄 것처럼 자신도 그때의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달 밝은 밤 거문고를 타면서 율곡과 한 마음이 되어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1717년(63세,숙종43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 이조참판·찬선·좨주 등을 역임했다.  다음해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또 그 다음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21년(67세, 경종1년)신임사화(辛壬士禍)가 발생하였다.  연잉군(후일의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는데,  결국 소론파가, 경종에 대한 불충을 빌미로 노론파를 탄핵했다.  이에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4대신이 유배당하고, 이희조도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
이희조의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있을 것같다.( ⌈지촌집 ⌋권1)

纖雲不起玉輪盈
고운 구름 일지 않아, 밝은 달 가득차고,
影入淸溪溪更淸
맑은 시냇물에 달그림자 비치니 더욱 맑구나.
安得此心同此月
어찌하면 이 마음 저 달처럼 될까?
普天幽谷一般明
온 하늘 깊은 계곡까지 모두 밝게 하네.

1724년(70세, 경종4년)에 유배지가 변경되어 철산(鐵山)으로 이동하는 중에 정주(定州)에서 사망했다.  그는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많은저서를 남겼는데,  대표적 저서로 ⌈대귀설(大歸說) ⌋,  ⌈지촌집(芝村集) ⌋ 32권 등이 있다. ⌈대귀설 ⌋은 송시열이 귀양간 뒤에 양주의 지동(芝洞)으로 내려가 지은 것이다. ⌈지촌집 ⌋은 32권 15책으로 1754년(영조30년)에 이희조의 아들 이양신(李亮臣)이 간행하였는데,  이 가운데
에는 송시열(宋時烈)이 남인에게 몰렸을 때 그를 변호하는 문장, 억울하게 죽은 송시열에 대해 논죄 사실을 비판한 문장,  그리고 윤휴(尹鑴)나 윤선거(尹宣擧)에 대해서 비판한 문장 등이 실려 있다.  또 이문집에는 ⌈대학⌋,  ⌈중용⌋ ,  ⌈심경⌋,  ⌈태극도설(太極圖說)⌋,  ⌈맹자⌋등에 대해서 묻고 답한 문장,  상제례(喪祭禮)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한 문장,  율곡의 행적에 관한 문장 등도 함께 실려 있어 후대 학자들이 중요시하였다.
이 외에도 그가 편찬한 서적으로 ⌈우서절요(尤書節要)⌋,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륙동이집람(朱陸同異輯覽)⌋, ⌈송원명서절요(宋元明書節要)⌋,  ⌈오선생서절요(五先生書節要)⌋,  ⌈해동유선록(海東儒先錄)⌋,  ⌈속경연고사(續經筵故事)⌋ 등 다수가 있다.

다음해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복권되어, 좌찬성에 추증 되었다. 인천(仁川) 학산서원(鶴山書院),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 평안북도 정주군의 간암서원(艮菴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이중 간암서원은 1731년(영조7년)에 정주 유림들이 뜻을 모아 이희조(李喜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그곳에 위패를 모신 것이다.

<참고자료>
『지촌집(芝村集)』
조준하, ⌈이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연두, ⌈간암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희조⌋, 『인천광역시사- 인천의인물』,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