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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진(朴奎鎭,1858-1934)


박규진(朴奎鎭,1858-1934)                                    PDF Download

 

규진(1858-1934)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조선시대 말엽과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전통시대지 식인이다.  최익현(崔益鉉)과 정의림(鄭義林)에게서 한문과 성리학을 배웠으며,  나라를 잃어버린 암울한 시대에 살면서 은둔생활을 하는지식인들과 널리 사귀고, 화순지역의 유명정자와 서원에 많은 시를 남겼다.

1858년(1세, 철종 9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호는 외당(畏堂)이다. 젊어서 면암(勉庵 ) 최익현(崔益鉉, 1834~1907)과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1845~1910)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제자로 화서학파에 속하며,  정의림은 기정진의 제자로 노사학파에 속한다.   정의림은 정재규(鄭載圭),  김석구(金錫龜)와  함께 노사의 3대 제자로 알려졌는데, 특히 화순지역에 제자들이 많았다.  1868년 경에 기정진의 제자가 된 정의림은 1886년 경에 200명이 넘는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박규진은 이러한 정의림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3년(36세, 고종30년) 겨울에 스승 정의림이 화순군 춘양면 칠송리(지금의회송리會松里) 칠송부락에서 원을 지었다.  그러한 건물을 짓게 된 이유를 정의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해 봄에 칠송마을에 강당터를 정하고 가을에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겨울 12월에 완공을 하였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위인(爲人)의 도리를 하고자 한다면 학문이 아니고 는불가능하다.  학문의도는 스승과 벗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니 스승과 벗에게 친히도를 묻는까닭이다.   배우는자는 또한 그 장소가 없을 수 없다. 상서(庠序)와  학교는 원래 윤리를 밝게하고 가르침을 세우는 곳이지만 삼대 이후에는 도를 따름이 전과 같이 않게 되었다.   또한 시장이 성곽 안에 있어서 다투고 싸울 일이 많아지고, 적막하고 한가한 취미는 적게 되었다.  이것이 이 서원을 일으키게 된 연유이다.”

 ( ⌈일신재집 ⌋4권,영귀정기)

 

그는 ⌈논어 ⌋에서 ‘영귀(詠歸)’라는 이름은 따 영귀정(詠歸亭) 이라하였는데,⌈논어⌋ 를 보면 공자가 어느날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증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늦은 봄에 가벼운 옷을 입고 젊은이 대여섯 사람과 아이들 예닐곱 명 정도를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기우제를 지낸 언덕에 올라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既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詠而歸 。 )”

( ⌈논어 ⌋선진편)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러한 고사에서 두글자를 얻어 영귀정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  정의림은 영귀정에 성인 아홉명의 영정을 모시고 본격적으로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박규진은 영귀정이 완성되던 날 그곳에 들려 다음과 같은 시를 짓고 기쁨을 함께하였다.

정자를 지으니 이름난 이 땅은 더욱 신비스럽구나.
(亭築名區地秘靈)

그 이름을 기수(沂水)의 맑은 물 한줄기에서 취했네.
(取諸沂水一原淸)

젊은이와 아이들을 데리고 바람을 쐬고 목욕하니 봄날이 길구나.
(冠童風浴春長在)

증점이 비파로 천기를 연주하니 만고의 소리로구나.
(曾琵天機萬古聲)

(⌈외당유고 ⌋)

 

이러한 글을 보면 박규진은 이미여러해 전부터 정의림의 문하에서 학문을 계속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를 세운 그 뜻이 아주 오랜 공자시대의 그 뜻과 같음을 노래하고 그러한 전통이 자신이 사는 화순에서 이어짐을 대견스러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1894년(37세, 고종31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화순군 능주면 우봉리에 사는 홍우용(洪祐鏞, 1872~1941)이 23살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장릉 참봉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라가 혼탁하여 관직에 나가는 일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홍우용은 박규진과 동문으로 정의림의 제자였다.

1905년(48세, 광무9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최익현, 정재규, 기우만등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다 해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최익현은 다음 해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박규진은 최익현에게도 배웠으니 스승의 죽음은 서쪽 멀리 떨어진 화순에도 들려왔을 것이다.

1910년(53세, 융희4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하였다. 스승 정의림은 의병 운동의 실패와 국권상실의 절망감으로 일체의 외부활동을 중시하고 두문불출하다 10월 10일 별세하였다.  정의림은 사후에 그가 지은 영귀정 옆에 세워진 칠송사(七松祠) 배향되었다.  나중에 제자들 여러명도 이 칠송사에 배향되었는데 박규진의 이름은 배향 인물에 올려지지 않았다.  정의림의 제자들은 화순지역의 곳곳에 흩어져 강학활동을 열심히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특히 배석면(裵錫冕),  배치묵(裵致黙)과 같은 제자들은 100여명이 넘는 문도를 두었는데 박규진의 강학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29년(72세, 일제시대), 이즈음 능주에 사는 홍우용이 금오산 아래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우산정사(牛山精舍)라 하였다.  또 역락정(亦樂亭) 지었다.  박규진은 자연과 학문을 벗삼아 은거하는 홍우용을 찾아 그 정자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시( ⌈외당유고 ⌋次牛山精舍韻)를남겼다.

사방에 물이 흐르고 가운데 봉우리 높게 서있네
(四圍水曲一高岑)

아름다운 나무가 숲을 이루니 땅 가득 그늘뿐
(佳木成林滿地陰)

도끼가 조금도 범하지 못하니 온통 새로 자란 나뭇가지
(少無侵斧多萌蘖)

많은 책들도 함께 있어 마음을 잡아 끄는구나.
(亦有藏書是貫心)

은둔하며 살다가 연기와 구름 잠긴 것만 보니
(幽居但見烟雲鎖)

한가한 이곳에서 세월 깊어 가는걸 어찌알리.
(閒處安知歲月深)

세상사 들리지않아 마음만은 즐거우니
(外事不聞中樂意)

현인과 군자가 서로 찾기 좋은 곳이네.
(賢人君子好相尋)

박규진은 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에 있는 침수정(枕漱亭)에도다음과같은글을남겼다.( ⌈외당유고 ⌋謹次枕漱亭韻)

그윽한 정자가 작은 티끌도 허락하지 않고,
(幽亭不許上微塵)

물과 대나무가 맑고 한가로운 별세계의 봄이네.
(水竹淸閒別地春)

하늘의 밝은 달은 일생동안  읊조리던 자취요,
(霽月一生吟弄跡)

높은 풍격은 백세 동안 다스리던 몸이네.
(高風百世濟康身)

선현의 향기가 시로 남아 옛스럽고
(先賢芬馥題詩古)

후학들이 가슴에 품은 회포는 강연으로 새롭네
(後輩襟期講道新)

깨끗이 씻고 갈아 얻음이 있음을 알겠으니,
(澄汰磨礱知有取)

이 아름다운 이름은 단지 돌과 물 때문만은 아니라네.
(佳名非獨石流因)

1934년(77세, 일제시대)에사망하였다. 유집으로1994년에간행된 ⌈외당유고(畏堂遺稿) ⌋가있다.

<참고자료>
오인교, 南道정자기행(2553)-화순우산정사(牛山精舍),<한국매일>, 2015.10.6
이종범편, 화순역사인물을활용한컨텐츠개발용역결과보고서 , 2014.11.2
권수용, 근대기화순유학의부흥과정의림(鄭義林)의역할, 화순 역사인물을활
용한컨텐츠 개발용역결과보고서 , 2014

이하조(李賀朝:1664~1700)


이하조(李賀朝:1664~1700)                                 PDF Download

 

의 자는 낙보(樂甫), 호는 삼수헌(三秀軒)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증조는 이정귀(李廷龜)이며 조부는 이명한(李明漢)이고 아버지는 이단상(李端相)이다.  이단상은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가진 인물로 율곡의 계열로 분류된다.  이단상의 문하에 임영(林泳),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이있다. 이가운데김창협은 그의 사위였으니 이하조에게는 자형(姊兄)이 된다. 이하조 의 형 이희조(李喜朝) 역시 송시열의 문하생이다.

이하조는 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 희조를 따라 공부 하였으므로 아버지의가 르침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19세 되던1 682년에 사마증광시(司馬增廣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 뒤 대과(大科)는 단념한 채 학문에만 매진하였으며, 영지동(靈芝洞)에 집을짓고 삼수헌(三秀軒)이라 이름지었다.  이해에 형  희조와 함께 여강(驪江)으로 송시열을 찾아가 출처(出處)의 의리에 대하여 자세히 들었다.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性理學)과 경서(經書)를 주로 공부하였지만 시인(詩人)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때로 친구들과 산림을 유람하며 한아(閑雅)한 취미를 길러 시(詩)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1686년 (숙종12) 3월에 형 희조와 우거하 고있던 민태중(閔泰重)과 학궁(學宮)의 제생 10여명이 파계(巴溪)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주자대전(朱子大全)》 의교정(校訂)하는 일을 도왔다.  이 시기에 간간히 시간을 내어 강산을 유람하며 시회(詩會)를 갖곤 하였는데 헤어질 때에 돌아오는 여름에 상당(上黨: 지금의 청주(淸州))과상산(常山)의 경계에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기일(期日)이되어 우암은 손자 인주석(疇錫)을 대동하고 상당 남쪽경계에 성묘를 하였다.  이때 이희조가 기년상(朞年喪)을 당하여 서울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암이 그와 만나지 못하는 섭섭한 마음을 안고 파계로 돌아왔는데 이하조가 상산에서 뒤 따라와 서형이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라고 전하자,  산중에 오래 머물면서 그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 들려오는 여론이《주자대전(朱子大全)》에 차의(箚疑)하는 것은 망녕되게 국법에 저촉된다 하여조정의 논의가 매우 부정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우암은 탄식하며 산을 내려와  소장(疏章)을 올려 죄를 청하였다.  이 때문에 산속에서 이희조를 기다리고자 했던 계획이 어긋나게 되었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우암이 82세의 나이로 이해 7월에 쓴 편지에 그 내용이 보인다.  이후로도 우암과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1688년(숙종14년) 이하조는 파계에서 모였던 일을 추억하였으며, 우암은 제자에게 답한 편지 글에서 그날의 모임에 대한 의미를 찾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1694년(숙종20)에 시국이 안정되는 모습을 보이자, 친구들이 과거에 응시할 것을 권하였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 뒤에 세자 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의 제명(除命)에 응하였던 것은, 선대(先代)의 공음(功蔭)을 이어받아 벼슬하는 것이 세신(世臣)의 본분이며, 고을을 얻어 봉양하기에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었다. 시직(侍直)과 부솔(副率)주부(司僕寺主簿)가 되고 공조좌랑(工曹佐郎)이 되었다. 1698년(숙종24)에는 부평현감(富平縣監)이 되어 어진정사를 폈다. 이때에 정사를 보던 곳의 이름을《대학(大學)》의<청송장(聽訟章)>을취하여 ‘사무헌(使無軒)’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공자(孔子)가 말한

“송사를 처결하는 것을 내가 남들처럼 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처결해야 할 송사 마저도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라고 한데서 인용한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자형인 김창협(金昌協)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르침을 구하였다.  김창협은 이에 대하여 처음에는 “송사를 없게한다.”는 말은 성인(聖人)의 일로서,  명덕(明德)을 밝히고 백성 을새롭게 한 뒤의 최고의 보람인 것인데,  어찌 그가 미칠 수 있는 경지 이겠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뒤에 생각해보니 처남인 이하조가 어진 마음에서 출발하여 송사를 판결하지 않은 것이지,  단순히 편리를 추구하여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처남이 어찌 송사가 없는 것이 오늘날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성인의 일인 줄 몰라서 그렇게 하였겠는가 하며 반문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말로 헌(軒)의 이름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으니 훌륭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700년(숙종26년) 병으로 경사(京師)에 돌아가 강도유수(江都留守)가 되었으나, 친분으로 인해 공정하지 못하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 는의혹으로 벼슬이 갈렸고,  병이 위독해져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7월 10일37세의 나이로 운명하였으며 처음에 영지(靈芝)와 7리 떨어진 비교적 가까운  독정리(獨井里)에 장사 지냈다가 1710년(숙종36년) 3월에 용인 문수산(文秀山) 선영(先塋)으로 옮겼다.

그는 안동(安東) 김창국(金昌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그리하여당 형(堂兄)인 감사(監司) 이해조(李海朝)의 아들 숭신(崇臣)을 후사로 삼도록 하였으며,  네 명의 딸을 두었다.  숭신은 부사(府使)심징(沈徵)의사 위가되었다.

그의 자형인 김창협이 지은 뇌문(誄文)을 보면

“언의(言議)가 구차하지 않고 식견이 분명하고 발랐으며,  문사가 통창(通暢)하고 풍조(風調)가 울연(蔚然)하였다.”

라는 글이 보인다.  또 외사촌형인 서종태(徐宗泰)가 쓴 묘지명에 는

“세덕(世德)을 계승하여 집안에서 닦고 성대한 재능을 온축하였으니,  나와서 명예를 구하였으면 세상에 그 보다 앞설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취를 거두어 스스로 진취(進取)하여 달려 나아가는 길에서 멀어진 것이 이미 고상하다.”

고하였다.

당시에 그가 지은 시문(詩文)이 1천여 편이 있다고 하며,  권상하(權尙夏)의 묘표에는 그의 유고 4책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전해 오는 저서는《삼수헌고(三秀軒稿)》이다.  이유고는 자형인 김창협과 동생 김창흡이 산정한 고본(稿本)으로 이하조의 형 희조가 부록 등을 증보한 것인데,  친구인 나주목사(羅州牧使) 조정만(趙正萬)의 협조를 받아 그의 사후 13년이 지난 뒤에 발행한 5권 1책이다.

이인상(李麟祥: 1710~1760)


이인상(李麟祥: 1710~1760)                                 PDF Download

 

의 자는 원령(元零), 호는 능호관(凌壺觀) 보산자(寶山子)· 보산인(寶山人)· 종강칩부(鍾岡蟄夫)· 뇌상관(雷象觀)· 운담인(雲潭人)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증조부 이민계(李敏啓)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의 서자(庶子)였다.  그가 9세 때에 아버지 이정지(李挺之)가 34세의 나이로 죽자,  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삼촌인 이최지(李最之)로부터 글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유년기(幼年期)를 보내고 22세 때 서울로 올라와서 26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이후 38세 때까지 관직생활을 하였다.  덕수장씨(德水張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4남 1녀를 두었는데, 그의 친구인 송문흠(宋文欽)과 신소(申韶)가 집을 마련해 주었고 송문흠은 이를 “능호관(凌壺觀)” 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호(壺)자는 방호(方壺),  곧 방장(方丈)이라는 뜻 이므로 결국 자신의 집은 방장산(方丈山)의 경관을 뛰어 넘는다는 뜻을 갖는다.

38세 때인 1747년에는 중앙관직에 있다가 경상남 도함양군(咸陽郡) 의 사근찰방(沙斤察訪)으로 나갔다.  41세 때인 1750년에는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장호원읍(長湖院邑)에 위치한 음죽현감(陰竹縣監)에 부임하였다.  음죽현감으로 있으면서 강직한 성품 때문에 관찰사와 다투고서는 관직에서 떠났다.
42세 때인 1751년에는 친구 이윤영(李胤永)이 은거하고 있는 단양(丹陽)을 찾아가 은거하고자 하였으나 오래 있지는 못하였다.  다시 음죽현 서쪽설성(雪城)의 종강(鍾崗)에 칩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곳에 지은 정자는 “종강모루(鍾崗茅樓)”라고 이름을 지었다.  48세 때인 1757년에 부인을 잃고 51세 때인 1760년에 자신의 생을 마감하였다.

이인상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文人畵家)이자 서예가(書藝家)로 알려져 있다.  그가 교류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도암은 스스로

“정암(靜庵)과 율곡(栗谷)은 나의 스승이다”

라고 말하며 깊이 사숙(私淑)했던 인물이다.  또한 이인상이 사숙했던 인물로는 삼연(三淵) 김창협(金昌協)과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등의 노론계 학자들이었다.
율곡의 문하에 김장생이 있었고 김장생의 문하에 송시열이 있었으며 송시열의 문하에 김창협과 이희조가 있었다.  그 역시 노론의 학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와 교유했던 인물로 “능호관기”를 써 주었던 송문흠을 비롯하여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이윤영(李胤永) 이있다.  송문흠은 그의 형 송명흠(宋明欽)과 함께 도암의 제자이다.  이윤영은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이인상의 그림에 화제(畫題)를 많이썼다.  또한 신소(申韶), 오찬(吳瓚)과도 정치적 입장이나 문예적 인삶의 자세를 공유하였다.  이외에도 당대에 시서(詩書)에 명성이있었던 황경원(黃景源),  평안관찰사,  대제학,  좌의정을 지낸 문장가 였던 김종수(金鍾秀),  이조판서를 지낸 이최중(李最中)이 있었다.  또 광산 김씨 가문의 김순택(金純澤),  김무택(金茂澤) , 김양택(金陽澤),  김상악(金相岳),  김상숙(金相肅)과도 평생 동안 교유하였다.

이인상은 시서화(詩書畵)는 물론 전각(篆刻)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미 당대에 많은 문인들이 그의 글씨와 그림에 대하여 인정하는 평가를 남겼다. 후대의 인물 김정희(金正喜) 역시 높은 감식안 으로 그의 예법(隷法)과 화법(畫法)에 문자기(文字氣)가 있다고 말하였다. 특히 김정희와 이윤영은 집안 대대로 인척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 교류하는 양상인 남다른 면이 있었다.

이인상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이니, 부모의 원수는 의리에 있어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

라고 하여 ‘반청의식(反淸意識)’을 가졌다. ‘대명 의리론(大明義理論)’를 견지함으로써 복수하려는 의리를 지키는 것이 사대부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고조부 이경여가 대표적인 반청주의자로서 심양에 억류되었던 사실이 있었던 것도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대명의리론’과 관련하여 옛것을 좋아하는 상징적문화  행위는 북벌(北伐論)이 쇠퇴하 는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생각의 반영으로 고동(古董) 수집과 감상에의 취향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가 추구한 고(古)의 의미를 풀어보면, 역사적으로는 ‘선진(先秦)시대 이전’을 가리키고,  도덕적으로는 ‘세속적 가치와의 비타협’을,  정치적 차원으로는‘ 사대부적 처신과 의리의 강조’로,  문예적 차원으로는 ‘고문과 고동(古董)의 애호’로 드러났다.

그의 친구인 청천자(靑川子) 임경주(任敬周)에 따르면 이인상은 문(文)과 도(道)를 병행했던 까닭에,  문장가와 도학자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문장가는 그에게 도에 힘쓰면 문에 전력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도학자는 그에게 외식(外飾)하는 문이 아니라 본질이 되는 도에 힘쓰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경주의 이러한 말을 참고하면 이인상은 문(文)과 도(道)를 모 두중시했던 이유로 도학가와 문장가 모두에게 공격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즉 도학과 예술을 엄격히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도학에 전일하지 않는 인물로 간주되거나 문학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물로 이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와 사귀며 편지를 주고 받을 때는 비교하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하며,  잘난 체하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하고,  잘못을 숨기는 마음을 일체 경계 해야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우(交友)에서 경계 해야 할 마음가짐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이는 곧 비교하는 마음,  잘난 체하는 마음, 잘못을 숨기는 마음이다.  이 세 가지를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도의에 입각한 교우를 위해서는 사귐을 맺은 두사람 사이에‘ 진실한 마음을 수반한 상호 수평적 관계’가 전제 되어야함을 말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겠다.

이인상과 그 친구들의 문예 취향(文藝趣向)은 이른바 동시대 경화사족(京華士族)과는 뚜렷한 거리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 경화사족은 일반적으로 서울에 거주하면서 많 은재력을 바탕으로 서화고동(書畫古董)과 서적(書籍)을 모으며 자신들의 품격있는 삶을 지향하였다.  그러나이 인상과 그 친구들은 경세적(警世的)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인상은 서얼 출신(庶孼出身) 이었으나 사대부들과의 폭넓은 교유를 하였으며 아울러 사회적 약자들에게 까지 도관심을 나타냈었다.  일반적인 은일자(隱逸者)로 불리는 것을 꺼렸으며 현실과의 문제를 끊임 없이 고민했던 예술가 이자 문인이었다.

그의 문집으로는《능호집(凌壺集)》, 필사본《뇌상관집(雷象觀集)》, 또
다른 필사본으로《뇌상관고(雷象觀藁)》가 있다.

이이명(李頤命:1658~1722)


이이명(李頤命:1658~1722)                                PDF Download

 

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인(智仁)· 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이다.  세종(世宗)의 서자(庶子)인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의 후손으로,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며,  생부(生父)는 대사헌을 지낸 이민적(李敏迪)인데 지평 이민채(李敏采)의 양자가 되었다.  생부가 홍문관(弘文館)책을 읽게 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어머니는 창원 황씨(昌原黃氏)인데 의주 부윤 황일호(黃一皓)의 딸이다.

외조부는 박장원(朴長遠)이며,  장인은 김만중(金萬重)이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 이었다가 그후 노론(老論)이 되었다.
숙종(肅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기용된 후 1680년(숙종6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을과(乙科)에 급제하고 16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재차 급제하여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때 사형당한 이사명(李師命)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남인(南人)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았다.  기사환국때 송시열(宋時烈)등과 함께 죽은 형이 정치적으로 신원(伸冤)되지 못하자,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1698년 이를 문제삼았다가 공주(公州)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석방 되었지만 1701년이 되어서야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으며 그 뒤에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여러벼슬을두루거친후에1706년(숙종32년)에우의정(右議政)에제수되고, 1708년(숙종34년)에좌의정(左議政)과영의정(領議政)을역임하였다.

이이명은 숙종(肅宗)을 섬김에 다른 신하들 보다도 인정을 많이 받았다.
1710년(숙종36년)에 내의원(內醫院)것이 전후로 11년이나 된다.  그의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 숙종이
“내 병을 근심하는 자는 경(卿) 한 사람뿐이다.” 라고 까지하였다. 1717년 숙종의 임종 직전에 홀로 임금을 마주하였을 때 소론이 지지하는 세자(世子) 곧 훗날 경종(景宗)에게 불리한 말을 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延礽君) 곧 훗날 영조(英祖)를 지지하였다 하여 소론과 남인들로부터 불만을 샀다.  이 당시 노론의 영수인 이이명이 숙종과 독대한 내용은 숙종 이사관(史官)들을 교묘하게 따돌렸기 때 문에《실록(實錄)》에 전하지 않는다.  숙종이 승하(昇遐)하자,  그가 고부사(告訃使)의 자격으로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돌아왔다.

포르투갈 신부 사우레즈 등을 만나 교유(交遊)하면서 천주교(天主敎)· 천문(天文)· 역산(曆算)· 지리(地理) 등에 관한 책을 가지고 이듬해 돌아와 국내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연경에는 네 군데의 천주교 회당이 있었고 신부들이 상주하며서 양과학과 종교를 전파하고 있었다.  이때에 아들 이기지(李器之)가 함 께동행하였는데, 사우레즈 등에게 서양식 계란 떡,  지금의 카스텔라를 대접받았다.  숙종의 주치의 이시필(李時弼)도 동행했었는데, 훗날 귀국하여 서양식 계란 떡을 만들어 보려하였으나 그 맛을 내는 것은 실패하였다고 한다.

당시 글루텐 성분이 적은 우리의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었으나 제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은 까닭이었다. 노론(老論)의 영수(領袖)인 그가 실생활에 긴요하게 사용되는 벽돌을 이용한 온돌 개발과 풀무를 이용하여 열효율을 높이고자 했던것과 외발수레의 사용 등 청나라의 문물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특기 할 만하다.

노론을 주도하며 주자도통주의(朱子道通主義)에 기반을 둔 정치이념을 적극 실현하고자 하였고,  서양의 학술 사상(學術思想)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던 그는 또 일찍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서양문물(西洋文物)과 지도(地圖) 입수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요동(遼東)과북 경(北京)에 이르는 지형의 군사 형세를 그리고,  관방(關防)에 관련된 내용을 기록한 국방 지도인<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를 만들어 숙종에게 올렸다.  이 지도는 청나라에서 구입한《주승필람(籌勝必覽)》안에 들어있는 <요계관방도>와,  모사한<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에 우리나라 관방의 중요 부분을 더하여 제작한 것이다.

그는 또 양반 사대부에게도 군포(軍布)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청한 바있는데,  그의 주장은,  이들 역시 조선의 백성이므로 양민(良民)들과 동등하게 병역(兵役)을 적용하고,  병역 을징발하거나 군포와 호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곧 남인(南人)과 서인(西人)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런가하면 1721년(경종1년)에는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와  종부제(從父弟)인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어전에서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다가 소론의 반대 로그 결정 이철회되자,  유봉휘(柳鳳輝) 등의 탄핵을 받고 남해(南海)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들 세명과 함께 이이명을 포함하여 노론 사대신(四大臣)이라고한다.  이러한 와중에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  즉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고변을 계기로,  8개월 동안 국문(鞫問)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다음해 인1722년(경종2년)에 체포되어 한강 나루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시신은 공주(公州) 죽곡(竹谷)에 장사 지냈다.  이를 역사에서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부른다.  이때에 노론의 많은 인물들이 화를 입었다.  아들 이기지도 1721년에 죽음을 맞이하여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 뒤 1725년(영조원년)에 적신(賊臣)을 주벌(誅罰)하고 군흉(群兇)을 귀양보내는 한편, 충성을 포상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은전(恩典)을 크게 베풀게 됨에 따라 그의 벼슬이 회복되었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과천(果川)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727년(영조3년)에 임천(林川) 옥곡(玉谷)에 묘를 다시 써서 장사지냈다.

저서 및 작품으로는 《소재집(疎齋集)》20권과 <강역관계도설(疆域關係圖說)>· <동국강역도설(東國疆域圖說)>· <양역변통사의(良役變通私議)>· <전산촬요(田算撮要)>· <강도삼충전(江都三忠傳)>·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가있다.

외국의 침략을 예견한 조정


<역사속의 유교이야기 25>

외국의 침략을 예견한 조정

 

1574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 정월은 조정 안팎으로 뒤숭숭했다. 그 전해 12월에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고 지나가는 이변이 있었는데, 새해 정월 5일에도 다시 그러한 불길한 흉조가 하늘에 나타났다. 그 다음날 6일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율곡이 지은 ⌈경연일기⌋에는

“경성(京城)에 지진이 있었다.”

고 하였다.

서울에 지진이 있었으니 임금이 사는 궁궐에도 그 흔들림이 전해졌을 것이다. 당시에는 지진도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흉조만큼이나 나쁜 조짐이었다. 연산군 시대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있었던 이세영(李世英) 등이 올린 상소를 보면 지진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다.(연산군 4년 7월 8일 기록)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거나, 임금이 포학하여 함부로 죽이면 지진이 있고, 대궐 안에서 정치를 어지럽히는 여자가 있으면 지진이 있고, 외척(外戚)이 멋대로 세도를 휘두르고, 내시가 권세를 부리면 지진이 있다. 그리고 형(刑)과 벌이 중용의 도를 잃으면 지진이 있고, 감옥에 원통한 죄수가 있으면 지진이 있고, 임금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거나, 안으로 여색(女色)에 빠지면 지진이 있고, 오랑캐가 침범하여 사방에 병란(兵亂)의 조짐이 있으면 지진이 있다.

또 성종 23년(1493) 당시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 땅이 흔들리자, 당시 영의정 등 고위 관리들은

“무능하고 부덕한 사람이 너무 오래 재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변고가 생겼다”

면서 사직서를 내기도 하였다. 임금은 하늘이요 신하는 땅인데, 땅이 진동한 것은 신하들이 잘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나라 유학자 동중서는 이변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후대에 이르러 군주가 음란하고 태만하여 국가가 쇠약해져서 백성들을 다스릴 능력을 상실하게 되자, 제후들은 등을 돌리고 양민을 학대하여 토지를 강탈하는 등 덕에 의한 교화를 폐하고 형벌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형벌이 온당치 못하면 사악한 기운이 생긴다. 사악한 기운이 밑에서 쌓이면 원한이 위로 축적하게 된다. 위아래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곧 음양의 기운에 혼란이 일어나 이변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재이(災異)가 발생하는 원인이다.”
(⌈한서⌋「동중서전」)

기상이변이 생기는 것은 인간 사회의 부조리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또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춘추번로⌋에서 임금 왕(王)자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하였다.

“ 옆으로 그은 3획은 천(天), 지(地), 인(人)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위에서아래로 이은 것은 그 의미를 통하게 한 것이다. 천지(天地)와 인간의 가운데를 취하여 그것을 이어 하나로 통하게 하는 것은 왕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인도(人道)만이 천(天)과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천지와 군주는 동일한 존재다”

유학자들의 생각에 기상이변이 일어날 때 군주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군주는 행동과 마음가짐은 단정하게 하고 백성들과 잘 소통함으로써 다가올 재난에 대비해야한다.

경복궁의 사정전
경복궁의 사정전

 

선조 임금은 거듭된 흉조를 당하여 음악 듣는 것을 중지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였다. 그리고 정전(正殿)의 사용을 피하였다. 정전은 궁궐에서 큰 행사가 열릴 때 사용하는 곳이다. 신하들과 조회할 때도 가끔 정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외국의 사신이 오거나 새로운 임금이 즉위할 때 사용한다.

선조는 경연의 자리를 옮겨 사정전(思政殿)의 처마 밑에서 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월에, 더구나 아침에 하는 조강(朝講)을 그곳에 하기는 날씨가 너무 추웠다. 그래서 신하들의 권유로 비현각(丕顯閤)에서 소규모로 강연을 하기로 했다. 비현각은 동궁에 있는 것으로 왕세자가 공부할 때 사용하는 조그만 전각이다.

이 비현각에 임금을 모시고 들어간 관료들은 대신, 대간, 강관뿐이었다.

율곡의 ⌈경연일기⌋에는 당일의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이때 입시관(경연에 참석하는 관리)들이 모두 사정전 문 밖에 나아갔으나, 지사(知事) · 특진관(特進官)은 비현각이 협소하여 들어갈 수 없었다. (중략) 임금이 비현각에서 이탁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위로는 천변이 심상치 않고, 아래로는 민생이 곤궁하다. 나의 덕을 돌아보니 진취하는 바는 적고 퇴보는 많아 국사를 그르치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다행히 모면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자손에게는 반드시 근심이 있을 것이다. 이제 영의정에게 묻노니 장차 어떻게 하면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민생을 소생시키며 나라를 편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 선조 임금의 말은 마치 예언자의 말과도 같았다. 이탁(李鐸, 1508-1576)은 당시 67세로 영의정에 오른지 2년쯤 되었다. 1531년(중종 2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정언, 지평, 이조정랑, 대간 등의 직책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덕이 많고 청렴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경복궁 동궁의 비현각
동궁의 비현각

 

선조가 자신의 덕을 돌아보니 퇴보가 많고, 국사를 그르치는 일이 많았다고 한 것은 100% 진심으로 말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흉조를 맞이하여 임금의 자리에 있는 자로서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또

“지금은 다행히 모면해 나간다고 하더라도 자손에게는 반드시 근심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재앙은 바로 18년 뒤, 자신의 임기 중에 일어났다.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심기일전을 하였다면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사람들에게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당시 바야흐로 혼란의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1338년에 출범하였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멸망하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최고 수장인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 수도인 교토에서 1573년에 축출되었다.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서 차츰차츰 하나의 통일된 제국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그의 부하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 밑에서 더 큰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선조의 질문에 영의정 이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주상(임금)께서 마땅히 유념하실 것은 경천(敬天) · 근민(勤民) 두 가지 일입니다. 주상께서 하시는 일이 어찌 하늘의 뜻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변이 생기는 것은 실로 신과 같이 못난 자들이 중요한 자리를 더럽히는 까닭이오니, 보잘 것 없는 저를 파면하시고 현명한 재상을 다시 임명하시면, 치도(治道)를 이룰 수 있을 것이요, 천심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정사는 그리 어지럽지 아니하고 지방에서 뇌물을 주고받는 일도 드뭅니다. 또 의견을 구하는 교서를 내리어 겸손히 자책하심은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성탕(成湯)의 여섯 가지 자책도 이보다 더 할 수 없습니다.

‘근민(勤民)’이란 백성들 다스리는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을 말한다. 부지런히 정치에 힘쓰라는 것이다. 이탁은 자신을 파면할 것을 제안하고, 또 교서를 내려 직언을 널리 구하도록 하였다. 이탁이 말한 성탕(成湯)의 여섯 가지 자책이란 은(殷)나라의 첫 임금 성탕 때의 일을 말한 것으로 당시 7년간이나 가물어 스스로를 자책한 일을 말한다. 성탕 임금은 스스로 뽕나무 밭에 들어가 비가 내릴 것을 기원하면서

“정치가 알맞지 않은가? 백성이 일을 잃었는가? 궁실이 사치한가? 궁녀의 청탁이 성행하는가? 뇌물이 행해지는가? 참소하는 자가 설치는가?”

하고 자책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자책 이후에 곧바로 사방 수 천리에 큰비가 내렸다.(십팔사략(十八史略)) 이탁은 이러한 자책보다 임금이 겸손히 자책하고 널리 지성으로 직언을 구하는 일이 더 절실하다고 하였다. 그러면 하늘의 노여움이 풀리고 백성들도 편안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옛 사람의 말에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 했고, 또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실질로써 해야지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능히 실질로써 하늘에 응대하면 하늘의 꾸지람은 풀리게 될 것입니다. 흰 무지개의 변은 고금으로 병난(兵難)의 상징이라 하니, 변방이 수비를 미리 조처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탁의 말은 일본에서 준비되고 있는 조선 침략의 기미를 분명하게 파악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조선의 관리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염탐하고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늘의 불길한 이변을 통해서 외국의 침략을 사전에 예견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위기상황을 사전에 대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이 무엇을 해야 할지 멀리 물어볼 것도 없이 영의정인 이탁의 입에서 다 나왔다. 무지개의 변은 외국의 침략을 뜻하니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까지 해놓고 일본 침략을 대비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임금 한 사람에게만 그 책임이 있을까?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두 차례나 침략을 당했다. 침략해 올 것을 예견하면서도 침략을 당한 것은 20세기 초의 식민지 침략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세 번째 침략은 없을 것인가? 요즘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두 번이나 침략을 당한 경험을 잊지 말고, 철저한 대비를 서둘러야 한다.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다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24>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다

 

곡이 38세 되던 1573년, 선조 6년 12월 28일(음력)에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한 일이 발생하였다. 율곡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임명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율곡이 임명된 우부승지란 승정원(承政院)의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이다. 승정원은 왕명을 취급하는 기관으로서,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그리고 동부승지는 공조의 일을 분담하여 담당했다.
아울러 이들은 경연에 참석할 수 있는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과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하였으며, 해당 업무에 관해 국왕의 자문 역할도 하였다.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문서는 모두 이 승정원을 거치도록 되어있어서 그 역할이 매우 중대하였다.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선조실록에는 그날의 기록에 이렇게 적혀있다.

“하얀 무지개(白虹)가 해를 관통했다. 영의정이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뵈니 선조임금이 비망기(備忘記)로 이렇게 일렀다. ‘요즘 어진 선비가 조정에 있어서 훌륭한 말을 앞 다투어 아뢰는 것은 전에 없이 기쁜 일인데,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고 도리어 이변이 발생하였구나. 이것으로 보면, 위에서 옛 도를 회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곧은 말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의정은 당시 관료 중에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책임자로 임금을 보좌하고 모든 관리들을 거느렸으니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이러한 영의정이 급히 임금을 뵙고 임금의 교지(敎旨)가 담긴 비망기를 받아온 것이다.

비망기에는 하얀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 일을 이변으로 표현하였다.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것은 요즘 사람들의 지식으로는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흉조라 하여 전란이나 국가적인 재앙이 일어날 징조로 보았다. 하얀 무지개에 대해서 진서(晋書)(천문지)에는 온갖 재앙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정이 급히 임금을 찾아 교지를 받게 된 것이다.

임금의 교지에는 유감의 표명만 나와 있지만, 그 다음날 조정은 흉조에 대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임금에게 조정의 행사를 취소하도록 권한 것이다.

그러한 조치에 대해서 12월 29일자 선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이 태양의 이변을 이유로 정월 초하루의 망궐례(望闕禮)와 9일의 문소전(文昭殿) 대제(大祭)를 정지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임금이 그 의견에 따랐다.”

정월 초하루의 망궐례는 문무백관이 임금 앞에 모여 절을 하며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요즘의 신년 하례식과 같은 행사이다. 문소전 대제는 종묘와는 별도로 궁궐 내에 지은 원묘(原廟)인 문소전에서 지내는 큰 제사를 말한다. 이들 행사는 어느 것이나 일 년의 시작을 준비하는 중요한 행사였는데 그런 행사를 취소한 것이다. 그만큼 태양을 관통한 하얀 무지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고 지나간 일은 그 전 해인 1573년에도 있었다.

당시 1월 19일, 선조실록의 기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하얀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다. 임금이 다음과 같이 교시를 전했다. ‘근래 재난의 징조를 나타내는 이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제 또 이러하므로 아주 유감스럽다. 궁궐을 피하고 반찬을 줄이겠다.’”

임금이 자신의 과실을 반성하고 덕을 닦는다는 뜻으로, 정전(正殿)에 나아가 조의(朝儀)를 행하는 것을 삼가고, 반찬의 숫자를 줄이겠다고 한 것이다.

율곡은 ⌈경연일기⌋ 1574년 1월 기록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조야에 직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렸다. 또 성운(成運) 과 이항(李恒)을 불러 역마(驛馬)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다. 이는 장차 재앙을 방비할 계획을 묻기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성운과 이항은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오지 아니하였다.”

1573년에도 무지개가 뜬 다음날인 30일에 임금은 정전(正殿)에서 피신하고, 반찬을 줄이고 음악 듣기를 중지하였다. 율곡의 경연일기(1574년 정월조)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임금이) 재변(災變, 재난이 일어날 이변)으로 인하여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을 줄였으며, 음악을 듣지 않았다.”

⌈경연일기⌋에는 또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병으로 사퇴하자, 지체 없이 체직(遞職)을 명하니 뭇 사람들이 의혹하였다.”

고 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사퇴를 받아들이고 지체 없이 교체를 명한 것은 역시 무지개의 이변 때문이었다.

우의정 노수신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동인에 속한 인물인데 나중에 영의정(재임기간 1585-1588)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선조실록에는 그의 사퇴가 왜 문제가 되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나중에 다시 만들어진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병으로 사퇴를 청하자 임금이 즉시 허락하였다. 이는 임금이 무지개의 이변이 일어나는 것을 대신이 적격자가 아니라서 그럴 것이라고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이이(李珥)가 좌의정 박순(朴淳)에게 말하기를,

“재변이 이러하므로 임금의 마음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의혹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중략) 마침내 이탁(李鐸)과 박순이 노수신을 체직하지 말 것을 계청하니 성상이 따랐다.”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는 이변이 일어나니 임금은 자신이 신하들의 임명을 잘못한 것인지 의심한 것이다. 그래서 우의정의 교체를 선택하였다. 이러한 임금의 행동에 대해서 관료들은 몇 차례의 간언을 통해서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결국 우의정 노수신은 교체되지 않고 사표가 반려되었다.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사건은 1574년 1월 5일에 한번 더 일어났다. 선조실록의 기록에

“눈이 오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했다.”

고 하였다. 율곡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궁궐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았다.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는 이렇듯 자연의 이상 현상이 정치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해석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군주의 덕이 부족하고 사회 풍속이 타락해지면 하늘에서 경고를 내렸다. 자연의 이상 현상이나 자연 재해가 바로 그 경고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조짐이 있으면 임금은 자신의 부덕함을 반성하고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이러한 사상은 유교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유교의 역사관 혹은 정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의현(李宜顯: 1669~1745)


이의현(李宜顯: 1669~1745)                               PDF Download

 

의 호는 도곡(陶谷),  자는 덕재(德哉)이며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지낸 이정악(李挺岳)의 손자이며,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이세백(李世白)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의 손녀 사위이다.  명망있는 가문에서 성장한 그는 김상헌의 증손인 김창협(金昌協)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였다.
율곡의 문하생이었던 김장생(金長生)과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시열의 문하생이었던 김창협으로 학맥이 이어진다.

이의현의 어린시절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이 경쟁하고 또다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던 때였다.  그는 1694년 26세의 나이로 별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여러 스승으로 부터 수학하였다.  아버지로부터 《훈몽자회(訓蒙字會)》, 《사략(史略)》, 《당시(唐詩)》, 《소학(小學)》등을 배웠으며,  당시 대사간(大司諫)이었던 이혜(李嵇)윤이건(尹以健) ,윤이성(尹以性)형제에게도 수학하였다.  11세에는 이모부(姨母夫)인 이수실(李秀實)에게 《사략(史略)》7권을 배웠다.  12세에는《효경(孝經)》, 《논어(論語)》, 《시경(詩經)》, 《사기(史記)》를 배우고,  당시(唐詩)한유(韓愈)의 시(詩)를 읽었다.

13세에는 우홍성(禹弘成)의 집을 왕래하며 공부하였다.
15세가 되던 1683년에는 김창협을 빈객(賓客)으로 모시고 관례(冠禮)를 올렸으며 그해1 0월에 관찰사를 지낸 함종어씨(咸從魚氏)  진익(震翼)의 딸과 처음 결혼을 하였다.  이후 황해감사(黃海監司)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해주(海州)로 갔으며 그 뒤 평양(平壤)과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지내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21세가 되던 1689년에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하여 서인(西人)이 실권(失權)하고 남인(南人)이 득세하였다.  이때 아버지를 따라고양(高陽)의 원당(元堂)으로 이사했다가,  그 이듬해에 경기도 광주로 이사하여 시(詩), 산문(散文), 변려문(騈儷文) 등의 공부에 주력하였다.  그 뒤 기사환국 때 장희빈에게 쫓겨 났던 인현왕후(仁顯王后)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맞이하여 다시 중전(中殿)의 자리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베푼 별시(別試)가 있었다.

이때 아버지인 이세백과 김창협의 요청에 따라 과거에 응시한 결과 합격하였다. 그 뒤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비롯하여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 청요직(淸要職) 을두루거쳤다.

35세 되던 1703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세 되던 1717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두 3년 동안의 상복을 입으며 효를 다하였다. 1720년에는 동지정사(冬至正使)가 되어 연경(燕京)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이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이때 남긴《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誌)》에 그의 학문과 문학세계를 보여 주는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의현은 처음부터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名聲)을 얻는 길로 나가고싶어 하지 않았다. 스승인 김창협에게 이러한 뜻을 보일 때마다 초심을 잃지 말라는 스승의 말에 따라 매일 책을 보며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벼슬길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심경이 잘 나타나 있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1721년(신축)부터 이듬해인 1722년(임인)까지 계속된 옥사로 노론의 사대신(四大臣)으로 지목받던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이 죽임을 당하는 등 노론세력이 소론에게 축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의현도 김일경(金一鏡) 등에게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운산(雲山)으로 유배되어 3년간을 보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규정하는데, 장희빈의아들이소론의도움을받아경종(景宗)으로즉위한다음해부터 벌어진 사건이었다.  유배 기간 동안에 이의현은 학문에 대한 열정을 다시 되찾아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포함한 여러 책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경종이 죽고 노론(老論)의 지지를 받던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1725년에 그는 사면령(赦免令)을 받아 운산에서 돌아왔다.  그리하여 영조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영조는 그에게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  벼슬을 주어,  이재(李縡), 이병상(李秉常)을 이어 세번째로 문형(文衡)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172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실각하여 양주(楊州) 도산(陶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이듬해인 1728년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도산에 본거지를 두고 생활을하며 중국에 다녀 오기도하였다.  1735년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미 벼슬에서 마음이 멀어진 상태였으므로 다시 도산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인생의 말년이던 1740년에는 둘째 부인송씨(宋氏)에게서 난 외아들이 요절하는 슬픔을 겪었다.  이의현은 자신의 삶을 정리한 기록으로 1735년에서 1742년에 걸쳐 <자표(自表)>와 <자지(自誌)>를 남겼으며,  1744년에는 일생의 연대기인 《기년록(紀年錄)》을 완성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도곡집(陶谷集)》의 <유지(遺識)>에서 그의 저작물의 목록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술은 다음과 같다.

<만부(漫瓿)> ,<장소록(章疏錄)>, <계의장첩등록(啟議狀牒等錄)>,    <응제록(應製錄)>, <금석록(金石錄)>, <일혜록(壹惠錄)>, <술덕록(述德錄)>, <지과록(志過錄)>, <잡술록(雜述錄)>, <간독록(竿牘錄)>, <여췌록(餘贅錄)>, <당후일기(堂后日記)>, <병정일록(丙丁日錄)>, <잠필록(簪筆錄)>, <연행일록(燕行日錄)>, <서천일록(西遷日錄)>, <사고(私考)>.

또한 자신의 일생을 16단계의 분기(分期)로 구분하고 16종의 시집을 (詩集)을 엮었다.  그 시집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형탑록(螢榻錄)>, <표직록(豹直錄)>, <앵천록(鶯遷錄)>, <오번록(鰲藩錄)>, <조갱록(蜩羹錄)>, <작얼록(鵲臬錄)>, <용곡록(龍谷錄)>, <연사록(燕槎錄)>, <우세록(牛歲錄)>, <복사록(鵩舍錄)>, <학귀록(鶴歸錄)> ,<호구록(狐丘錄)>, <여적록(驢跡錄)>, <홍추록(鴻樞錄)>, <태배록(鮐背錄)>.

현실을 중시한 개혁가 율곡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23<

현실을 중시한 개혁가 율곡

 

약(鄕約)은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다. 송나라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이 그 시초다. 여씨 향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함께 약속을 한 자는 덕업(德業)을 서로 권하고, 과실은 서로 바로 잡으며, 예속으로 서로 사귀고, 환난을 당할 때는 서로 도우며, 착한 일은 장부에 기록하고, 잘못이나 혹은 약속을 위반하는 일은 역시 장부에 기록한다. 잘못을 세 번 저지르면 벌을 주고 그래도 고치지 않을 경우에는 관계를 끊는다.”

이러한 내용은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형제들이 같은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만든 자치 규약이었다. 북송시대에 활동하였던 여씨 형제들은 모두 여섯 형제 가운데 다섯 형제가 과거에 합격한 명문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그들은 관중지방에서 북송의 대유학자인 장재(張載)와 정호(程顥), 정이(程頤)의 형제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들은 모두 북송의 고급관료로 외교, 국방, 경제 분야에 관여하고 예학자로서 사회의 교화(敎化)에 앞장섰다. 여씨 향약은 그러한 사회 교화 활동의 결과였다. 덕업을 서로 권장하고 예로서 서로 사귀며, 착한 일을 장부에 기록한다는 항목에서 그들이 지향한 유교적인 교화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주자는 이러한 여씨향약을 보완하여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고려시대 말에 주자학과 함께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이다.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은 여씨 향약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일부 주자가 추가한 부분도 사실은 여씨 향약을 만들었던 여씨 형제들의 자료를 참고한 것이었다.

이러한 향약은 향촌의 주민들 모두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는 향촌에 거주하는 사대부 혹은 사인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아울러 이들 향약은 국가 권력과는 상관없이 향촌 내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한 자치적인 규율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율성이 강하였기 때문에 향약에서 정한 약속을 어겼을 경우에 어떤 행위를 강제할 수 없는 문제점도 있었다.

“잘못을 세 번 저지르면 벌을 주고 그래도 고치지 않을 경우에는 관계를 끊는다.”

라는 규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최대한 강제할 수 있는 것이 관계를 끊은 수단 밖에는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향약이 실지로 널리 시행된 것은 조선시대 중엽 이후부터이다. 중종때 사림파인 조광조, 김식 등이 건의하여 전국 각지에 향약 실시가 반포되었다. 이후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 등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향약을 마련하여 실시하였다.

퇴계는 여씨 향약 중에서 특히 과실이 있을 경우에는 서로 시정한다는 ‘과실상규(過失相規)’의 항목을 중심으로 향약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예안향약(禮安鄕約)>이다. 예안 향약은 가정생활의 기본 윤리에서부터 향촌 마을 생활의 기본 윤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규율을 정하였다.

퇴계는 향약의 제정에 임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옛날 향대부의 소임은 덕행과 도예(道藝)로서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을 규탄하는 것이었으며, 선비된 사람도 또한 반드시 집에서 몸을 바로잡고, 향중에서 이름이 들어난 뒤에야 나라에 나아가 등용되었다. 효제충신이라는 것은 인도(人道)의 대본(大本)이요, 집과 향당이라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향약 제정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사람을 잘 얻으면 한 마을이 조용하고, 사람을 못 만나면 한 마을이 해체되거늘, 하물며 향속(鄕俗) 중에는 임금님의 덕화(德化)가 못 미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서로 공박하고,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갈등하며,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도리가 허물어져 행해지지 아니하니, 예의를 버리고 염치에 등을 돌림이 날로 심해져 오랑캐나 금수와 같이 되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임금님의 정사(政事) 중에 큰 걱정꺼리이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 잡을 책임이 바로 향소(鄕所)에 있으니 실로 그 책임이 또한 무겁도다.”

여기에서 퇴계가 말하는 ‘향소’란 유향소(留鄕所)를 말한다. 유향소는 조선시대 때 지방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이다. 지방의 유력자나 벼슬에서 은퇴한 자 중에서 뽑아 지방의 풍속을 지도하고 향리의 부정을 막도록 하였다. 퇴계의 향약은 이렇듯 지방 유향소의 역할이 크고 지방의 행정조직과 연계된 것이 특징이다.

퇴계는 이어서

“혹자는 먼저 가르칠 종목을 들지 않고 다만 벌칙만 든 것을 의심할 것이다. 이것도 진정 일리가 있다. 그러나 효제충신이란 마음속에 타고난 떳떳한 성품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 국가에서도 학교를 세워 가르치는 것이 어느 하나 바르게 인도하지 않는바가 없으니, 하필 우리들이 따로 조목조목 열거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면서 벌칙을 내릴 대상과 벌칙을 열거하여 향약을 마무리했다.

율곡은 36세 되던 1571년 6월에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임명되었다. 그 때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토대로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었다. 그 다음해에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이 파주로 귀향함에 따라 향약이 지속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중단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선조 6년, 1573년 9월 21일)에 조정에서 향약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는 향약의 실시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는 왜 반대하였을까?

“(지금 우리 사회에) 진실은 적고 허위가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혔다가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구제를 받았다 하더라도 꼭 죄가 없어서 구제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 고을의 수령으로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은 자라고 해서 꼭 공적이 있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율곡이 판단한 당시 선조시대의 사회에는 불합리한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진실은 적고 허위가 성행하고 있다.”

고 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당시 사회에는 술자리를 베풀어 선비들을 유혹하여 부정한 행위가 성행하고, 관리의 임용을 담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혼탁한 세류에 물든 자들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향약을 시행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더 열거하였다.

“아래 백성들의 경우는 굶주림과 헐벗음이 절박하여 본심을 모두 잃어 부자 형제 사이라도 서로 길가는 사람이나 다름없이 보고 있으니, 그 밖의 일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사람의 도리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형벌과 정치가 제대로 제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해온 방식대로 따르고 우리의 관습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 윗자리에 앉아있다고 하더라도 교화를 펼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율곡은 사회가 혼탁하여져서 선조 임금이 설사 공자와 같은 성인이라 할지도 향약은 시행될 수 없다 판단한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향약을 실시하는 것이 좋겠지만 현실의 조건이 그리 할 수 없으니 시행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은 현실을 중시한 개혁가 율곡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이 향약 시행을 반대한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22>

율곡이 향약 시행을 반대한 이유

 

1573년(선조 6년) 9월 21일, 율곡은 경연의 자리에서

“향약(鄕約)을 오늘날 시행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라고 말하며 향약 시행에 대해서 완곡하게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그 다음해(1574년, 선조 7년) 1월 1일자로 기록된 「우부승지 이이의 시폐와 재변에 관한 만언소」에서도 율곡은

 

“향약(鄕約)을 널리 실시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풍속을 가지고 향약을 실시한다면 좋은 성과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향약이란 지방 향촌에서 백성들끼리 정한 약속으로 향촌의 자치 규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향약을 중앙의 조정에서 실시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 취지를 훼손시킬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자치 규약이 아니라 강제 규정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율곡은 그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 조정의 대다수 관리들의 의견은 향약 시행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1573년 9월에 율곡과 같이 경연에 참가하였던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은, 만약 향약을 당장 실행하지 않는다면 일을 크게 그르치게 될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김우옹은 당시 34세로 38세였던 율곡보다 4살 젊은 관료였다. 김우용 역시 율곡처럼 선조의 두터운 심임을 받았는데, 서인 그룹에 가까웠던 율곡과는 다소 대립적인 동인 그룹에 속한 인물이었다.
김우옹은 1573년에 이황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건의하고, 또 조광조를 모신 도봉서원에 사액을 내리도록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1579년에는 율곡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반박하고 율곡을 두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도 적극적으로 향약을 지지했는데 율곡은 왜 향약 실시 반대 입장을 취했을까?

선조가 왕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 향약 시행에 대해서 관료들의 제안이 잇달았다. 예를 들면 황억(黃億)이 상소를 올려 여씨 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자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여씨 향약의 법을 시행하면 모든 사람들이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게 되어 교화를 베풀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데 반드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기근과 추위를 면하기에 급급하여 예의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모이게 하여 향약을 강론하느라 분주하게 되면 소요가 일어날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유능한 인물이 많은 곳을 택하여 먼저 그 가능성을 시험해 보도록 하되 급하게 몰아치지 말고 점차적으로 시행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선조 4년, 1571년 2월 28일 선조실록 기사)

흉년으로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칠 여유가 없으며 또 향약을 가르치기 위해서 백성을 모을 때 소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선조도 이러한 예조의 지적에 따라 향약의 실시에 대해서 선뜻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예조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홍문관(弘文館) 관리들은 1572년(선조 5년) 10월 25일에 또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면서, 향약 실시를 재차 요청하였다.

“임금이 재앙을 당하면 마땅히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수양해야 하며, 의견을 구하고 간언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요즈음 헌부(憲府)의 상소에 대하여 성상께서 짜증과 불평스러운 말로 답하셨으니,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기를 청합니다. 또 간원이 향약을 시행하자고 청하였을 때 성상께서 해괴한 풍속이라 하여 고인의 법도를 회복하는 것을 괴이한 일로 여겼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홍문관의 이러한 건의에 뒤이어, 향약을 시행하자는 관리들의 간언이 잇달아 올라오자 선조는 결국 마지못해서 향약의 실시를 허가하였다.

그러한 임금의 결정에도 율곡은 향약 실시에 대해서 반대를 하였는데, 그는 아직 그것을 실시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574년에 임금께 올린 만원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상(임금)께서 처음 자리에 오르셨을 때는 백성들 사이에 희망에 차서 그런 대로 선을 지향하려는 생각들이 많았습니다. 만약 그때에 성덕(聖德)이 날로 풍성해지고 정치가 날로 향상되었더라면 오늘날의 인심이 어찌 이 지경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오직 초년(初年)에 대신들의 보필이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하를 천박한 법규로 그르치게 하고 민생을 비천한 지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대신들이 간혹 공명(公明)한 마음으로 공론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깨끗하고 올바른 의견은 미약하고 저속한 견해가 고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한 말을 듣거나 선한 사람을 보면 남의 체면 때문에 흠모하는 자도 있고, 겉으로는 좋아하는 체 하면서 속으로 꺼리는 자도 있고, 혹은 버젓이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하는 자도 있었는데, 진심으로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율곡의 생각으로는 선조 초년에 임금을 보필하던 신하들이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졌다는 점, 그리고 진심으로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가 드물다는 점을 든 것이다.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들이 드물다는 것은 백성들 사이에서 보다는 백성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관리들 사이에서의 사정을 말한 것이다.
그는 대신들 사이에 저속한 견해가 고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한 말을 듣거나 선한 사람을 보면 남의 이목 때문에 겉으로는 좋아하는 체 하지만, 사실은 속으로 꺼린다는 것이다. 혹은 버젓이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하는 자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말과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자는 아주 드물었다고 하였는데, 요컨대 관리들 자신들이 향약과 같은 도덕적인 규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73년 9월 21일에 향약을 반대하면서 율곡이 지적한 이유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분야의 정치가 원활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고달프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백성들이 궁핍해져 있고, 관리들이 그러한 제도를 실시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1574년에 올린 만언소에서 그는

“지금의 습성을 가지고 향약을 실시한다면 좋은 풍속을 이룩하는 성과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라고 한 것이다. 관리들 자신들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향약을 실시하게 된다면 향약의 취지가 변질되어, 소기의 성과를 이루기 힘들 것이라고 본 것이다.

율곡, 향약 시행의 어려움을 말하다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21>

율곡, 향약 시행의 어려움을 말하다

 

선조 6년, 즉 1573년 9월 21일의 이야기다.

날 율곡은 왕에게 ⌈서경⌋을 강의하였다. ⌈상서(尙書)⌋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商書)⌋, ⌈주서(周書)⌋로 구성되어 있는데, 요순시대, 하나라시대, 은나라(상나라)시대, 그리고 주나라 시대의 정치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 서적이다. 이날 율곡이 어떤 내용을 강의하였는지는 상세한 기록이 없다.

당시 조정에서는 향약(鄕約)의 실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향약이란 ‘향촌의 약속’이란 뜻으로 마을의 자치적인 규약을 말한다. 1519년, 중종 14년에 조광조가 향약을 널리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율곡이 지은 ⌈경연일기⌋의 1573년(선조 6년) 9월 기록을 보면 ‘옥당(玉堂)과 양사(兩司)에서 상소하여 팔도 군읍(八道郡邑)의 사민(士民)으로 하여금 향약을 행하도록 하자고 잇달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옥당은 홍문관이며, 양사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말한다. 이들 부서에서 향약 시행을 거듭 요청하여 선조는 허락을 하였다는 것이다.

1573년 9월 21일 경연장의 일이다.

선조 임금의 목소리가 다소 잠겨 있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병이 있어 오랫동안 고향에 물러가 있었는데, 오늘 전하의 목소리를 들으니 많이 잠겨있는 듯 하온데, 무슨 까닭으로 그러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여색을 경계하라는 말을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중략) 그런 일이 없으면 여색을 멀리하도록 더 힘쓰실 것이요, 듣기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율곡은 임금에게 강의를 하는 입장이었으나, 동시에 홍문관 직제학의 신분으로 왕을 대면하는 입장이었다. 홍문관의 관원들은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임무 외에도 조정의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는 책임이 있었다. 임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잠겨 있다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 문제를 임금 스스로 파악할 수 있도록 간언을 한 것이다. 동시에 율곡은 임금이 사람들의 듣기 싫은 간언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여 싫어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덧붙였다.

조선의 임금 자리는 그렇게 어려운 자리였다. 율곡의 지적이 지나친 점도 있었으나 당시 율곡이 속해있던 홍문관은 특히 간언의 중추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임금이 사헌부나 사간원의 간언을 듣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홍문관까지 합세하여 간언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한 홍문관의 관료로서 간언을 한 것이다.

선조도 임금이 된지 6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그냥 꾸중만 듣고 있지는 않았다. 당시 22살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던 선조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대가 전에 올린 상소(上疏)에도 그렇게 말하였으나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말소리는 원래 같지 않은 것인즉 내 말소리가 원래 그러한데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쓸데없이 목소리를 핑계로 여색 운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율곡도 그냥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전하가 막 임금이 되었을 때도 제가 가까이서 뵈었는데, 그 때에는 목소리가 낭랑하여 이렇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감히 의심한 것입니다.”

옆에서 선조와 율곡의 이야기를 계속 기록하고 있던 사관도 두 사람의 대화가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이렇게 기록했다.

‘이이(율곡)가 임금에게 일을 아뢸 때 어투가 너무 직설적이었는데, 이 때 전하가 자못 언짢아했다.’

이어서 선조는 화제를 돌려 율곡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조정에 머물지 않고 오래도록 물러가 있었는가?”

율곡이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화제를 슬쩍 돌린 것이다.

율곡은 그 전 해 1572년(37세)에 병으로 사직을 하고 고향인 파주로 내려가 친구인 성혼과 어울려 성리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음해 1573년 7월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바로 사퇴를 청하였다. 하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는데, 여러 차례 상소를 하여 결국 허락을 받고 다시 파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9월에 조정에서 다시 율곡을 직제학으로 임명하였다. 율곡은 또 사퇴를 청하였으나 이때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날 율곡이 임금에게 서경을 강의하게 된 것은 그런 일이 있고난 뒤였던 것이다.

율곡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몸이 쇠약하고 병들어서 힘써 전하를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의 병이 있는데다 능력도 짧아서 조정에 있어도 도움을 드릴 수가 없는데, 구차하게 녹(祿)을 먹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의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가 있었으나 군신(君臣)의 의리야 감히 잊었겠습니까?”

선조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이곳에 머물며 나를 보좌해야 하니 다시는 떠난다고 하지 말라.”

행여 젊은 임금이 여색에 너무 빠져 목소리가 상하게 되었는지 의심을 한 신하이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선조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은 이제 시급한 정무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향약(鄕約)을 오늘날 거행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 방면의 정치가 아직 원활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고달픈데, 교화(敎化)하는 일부터 시행한다면 추진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거행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으니, 이에 전하의 마음이 장차 큰일을 할 수 있음을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더욱 힘써 몸소 솔선하신다면 무엇을 행한들 어렵겠습니까?”

율곡은 백성들의 생활이 고달픈데 그들을 교화하는 일이 그렇게 시급한 것인가 하는 뜻이었다. 이미 임금이 향약 시행을 결정한 이상 적극적인 반대는 못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그것에 적극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같은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김우옹(金宇顒)은 율곡의 의견과는 달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향약을 어찌 행할 수 없겠습니까? 무릇 일에는 근본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임금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여 모범이 되고서야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중략) 만약 향약을 오늘날에 행할 수 없다고 여긴다면 크게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지난번 경연관(經筵官)이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향약은 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교화는 반드시 위에서 하는 것인데, 주자는 아랫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행하기 어렵게 여겼으나 이제 전하께서는 이룰 수 있는 자리에 계시니, 무엇 때문에 행하기 어렵겠습니까?”

김우옹은 임금의 의지만 있으면 향약의 시행이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율곡이 이미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임명되었을 때, 그곳에서 향약을 시행해본 경험이 있어 그 일이 임금의 의지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