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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는 이유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는 이유

 

2015과 2016년에 걸쳐 초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주말 연속극 ‘장영실’을 보면 일식과 월식을 추보(推步: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일)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 왜 이렇게 일식과 월식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그것은 앞에서 말했지만 평상시와 다른 이변이기 때문이다. 재앙과 이변은 군주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 나라 때 동중서(董仲舒)가 주장하였지만, 훗날 그의 제자들은 재앙은 군주의 지난 일 때문에 일어나고, 이변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경계시키기 위해 일어난다고 여겼다. 이런 것이 전통이 되어 동아시아에서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면 장차 재앙이 생길까봐, 왕들은 긴장하고 조정에서는 구식례(救蝕禮)를 올려 자숙하며 해가 다시 나오기를 기원하였다. 물론 월식보다는 일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은 일식은 양(陽)을 가리고 월식은 음(陰)을 가리기 때문에, 음보다는 양을 중시하는 전통에서였다.

율곡의 「천도책(天道策)」에 등장하는 두 번째 질문은 바로 일식과 월식에 관계 되는 문제이다.

 

“간혹 해와 달이 함께 나와 때로는 겹쳐서 일식과 월식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질문을 보면 해와 달이 겹쳐서 일식과 월식이 되는 것을 알고 있은 듯하다. 사실 일식은 달이 해를 가리고 월식은 지구가 달을 가린 것인데, 율곡의 답은 이렇다.

 

“해는 임금의 상징이요. 달은 신하의 상징입니다. 그 운행하는 궤도를 같이 하고, 그 모이는 데도 도수(度數)가 같기 때문에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이 되고, 해가 달을 가리면 월식이 됩니다. 저 달이 희미한 것은 오히려 변괴가 되지 않으나, 이 해가 희미한 것은 음이 왕성하고 양이 미약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깔보고 망하게 하며 신하가 임금을 거역하는 형상입니다.”

 

동아시아 문화에서 태양은 보통 임금, 남성, 남편을 상징하고, 달은 신하, 여성, 아내를 상징했다. 그래서 태양은 임금 달은 신하를 상징한다고 말하여,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자연현상을 해석한 점이 돋보인다. 곧 자연현상을 인간 세상의 일에 적용시켰는데, 그것은 실제로 그래서라기보다 그 형상을 보고 신하나 아랫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먹을까봐 염려했던 마음이 드러나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자연과학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곳이 있다. 곧 ‘그 운행하는 궤도를 같이 하고, 그 모이는 데 절도를 같이 하기 때문에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이 되고, 해가 달을 가리면 월식이 되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과학적 사실로 보면 태양과 달과 지구의 운행이 일직선이 될 때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구에서 관측할 때 지구로부터 지구-달-태양의 순서로 일직선으로 배열되면 일식이 되고, 지구를 가운데 두고 태양과 달이 일직선으로 마주 볼 때는 월식이 된다.

이점은 훗날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제작한 지도나 책을 조선 사신들이 들여와 알리기 훨씬 이전부터 일식과 월식의 원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해가 달을 가리면 월식이 되는 것입니다.’는 것은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태양은 너무 멀리 있어 달을 절대로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때는 태양이 그렇게 멀리 있다는 것과 또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기 때문에 일식의 원리를 가지고 월식의 그것에 적용시킨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땅이 둥글다는 사실은 조선 후기에야 선교사들의 저술을 통해 알게 된다.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이나 최한기(崔漢綺)는 이 일식과 월식을 여러 각도로 자세히 설명해 내고 있으며, 그것이 단순히 자연현상일 뿐이며 인간 세상의 일과 무관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율곡은 두 해와 두 달이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하물며 두 해가 한꺼번에 나오거나 두 달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은 비상한 변고이니, 다 어그러진 기(氣)로 인해 그렇게 됩니다.”

 

하늘에 두 개의 해나 달이 보이는 경우는 서양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후기에 잘 알려진 책으로 서양 선교사 알폰소 바뇨니라는 사람이 쓴 『공제격치(空際格致)』에 보면 그런 설명이 나온다. 모두 구름과 관계 지어 설명했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관측된 적이 있는데 이것을 환일(幻日)현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공기 중에 떠 있는 얼음결정에 햇빛이 반사와 굴절을 했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율곡은 그 현상의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내지 못했지만 기와 관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그러진 기 때문이라는 점은 역시 천인상감(天人相感: 자연과 인간이 서로 관여한다는 생각)적 사유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율곡은 일식과 월식의 원리를 말했다면, 여기서는 그것이 생기는 원인을 답하고 있다.

 

“제가 일찍이 옛일을 탐구해 보니, 재앙과 이변은 덕(德)이 닦인 치세(治世)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모두 말세의 쇠퇴한 정치에서 나왔으니, 자연과 사람이 서로 통하는 관계를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일식과 월식의 이변이 이렇게 인간의 일에서 비롯함을 말하고 있는데, 앞에서 말한 동중서(董仲舒)의 학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전국시대 순자(荀子)는 자연의 일과 인간사회의 일이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후대의 유가(儒家)는 이 순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았고, 맹자의 천명사상(天命思想)과 어울린 동중서의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군주가 권력을 남용하는 횡포를 견제하는 수단으로서 효용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물리적 대상으로만 보는 순자나 근대 서양과학의 입장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서양 종교처럼 인격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보는 것도 아니나, 원시유가나 공자(孔子) 이후의 도덕의 근거로서 하늘 관념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와 달의 운행 속도가 다른 까닭


 

해와 달의 운행 속도가 다른 까닭

 

곡의 「천도책(天道策)」에 등장하는 과거시험의 첫 번째 문제의 답을 살펴보자. 먼저 문제는 아래와 같다.

 

“천도(天道)는 알기도 또 말하기도 어렵다.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서 한 번은 낮이 되고 한 번은 밤이 되는데, 제각기 느리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여기서 천도는 자연의 원리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있다는 말은 땅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여러 천체들이 하늘에 매달려 있다는 전통의 천원지방의 우주관의 표현이다. 그런데 해가 뜨면 낮이 되고 달이 뜨면 밤이 되는데, ‘제각기 느리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라고 묻는다. 여기서 태양과 달이 땅을 도는 속도가 다르다는 점과 ‘누가’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이다.

먼저 관측상에서 볼 때 태양과 달이 도는 속도가 다르다는 점은 이렇다. 태양은 언제나 변함없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그런데 달은 뜨는 곳이 일정하지 않아 매일 조끔 씩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뜨고 언제나 서쪽으로 진다. 이렇기 때문에 태양과 달이 땅을 도는 속도가 다르다. 사실 이것은 달이 지구를 공전하고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다음으로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의 문제는 그런 자연의 원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묻는 질문이다. 조물주가 그렇게 창조했는지 아니면 만물을 주재하는 인격체가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원리 자체가 그래서인지 묻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율곡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모든 변화의 근본은 오직 음양뿐입니다. 이 기(氣)가 움직이면 양이 되고 정지하면 음이 됩니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정한 정지한 것은 기요, 움직이게 하고 정지하게 하는 것은 이(理)입니다. 대개 천지 사이에 형상이 있는 것은 간혹 오행(五行)의 바른 기가 모인 것도 있고, 또는 천지의 어그러진 기를 받은 것도 있습니다. 혹은 음양이 서로 부딪치는 데서 발생하기도 하고, 혹은 두 가지 기가 발산하는 데서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해·달·별은 하늘에 걸렸고, 비·눈·서리·이슬은 땅으로 내립니다. 바람과 구름이 발생하고 우레와 번개가 치는 것은 기(氣)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자연의 모든 현상의 이와 기의 두 가지 요소로 설명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성리학의 자연관을 가지고 만물의 발생을 음양이나 오행의 기를 가지고 이렇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리학의 전제에 따라 발생하는 그 자체는 기의 변화이지만 그 변화의 원인은 이(理)라는 관점이 녹아 있다.

 

“그 하늘에 걸리게 하고 땅에 내리게 하며, 구름과 바람이 생기게 하고 우레와 번개가 치게 하는 것은 이 이(理)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음과 양이 조화하면 저 하늘에 걸린 것은 그 절도를 잃지 아니하고, 땅에 내리는 것은 다 때에 맞추어 바람·구름·우레·번개가 다 화창한 기운 속에 있을 것이니, 이는 떳떳한 이치입니다.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그 행하는 것이 절도를 잃고 그 발산하는 것이 때를 잃어서, 바람·구름·우레·번개는 다 어그러진 기에서 나옵니다. 이는 이(理)의 변고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천지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순합니다. 그러면 이(理)의 떳떳함이나 변고를 한결같이 천도에만 맡겨야 되겠습니까? 저는 이 때문에 말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자연현상을 주도하는 것은 음양의 두 기인데, 그것이 조화를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에 따라 날씨가 기후가 화창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날씨의 변화는 온도와 습도에 따른 기압 차이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온도와 습도의 정도를 음양으로 나누어 보았다는 점에서 다소 추상적이지만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순합니다. 그러면 이의 떳떳함이나 변고를 한결같이 천도에만 맡겨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인간의 마음과 자연의 변화를 일치시켰다는 데 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미신에 가깝다고 평가하겠지만, 조선후기까지도 군주의 마음이나 행동이 자연현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게다가 최근까지도 관습적으로 지도자의 덕과 자연재해를 연결시킨 것을 보면, 당시는 당연한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자연현상과 인간의 일이 관계된다는 사상은 저 멀리 전한(前漢)의 동중서(董仲舒)가 만든 이론에 닿는다. 그는 군주가 포악한 정치를 하면 원망하는 백성들의 기가 하늘에 올라가 음양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재앙과 이변이 일어나는데, 그래도 군주가 반성하지 않으면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의도는 군주의 횡포를 막을 길이 그런 식의 설명 말고는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후로 변고와 이변이 생기면 군주는 반성하고 삼가서 좋은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전통이 생겼다.

 

“천지의 원기(元氣)가 처음으로 갈라진 이후로 해와 달이 교대로 밝으니, 해는 큰 양(陽)의 정기(精氣)이고 달은 큰 음(陰)의 정기입니다. 양의 정기는 빠르게 운행하기 때문에 하루에 하늘을 한 바퀴 돌고, 음의 정기는 느리게 운행하기 때문에 하루에 다 돌지 못합니다. 양이 빠르고 음이 느린 것은 기요, 음이 느리게 되는 것과 양이 빠르게 되는 까닭은 이(理) 때문입니다. 저는 누가 그렇게 하는지를 알지 못하겠으나,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율곡은 태양이 빠르고 달이 느린 것은 이치상 음과 양의 성질 때문이라고 풀이했는데, 음양의 이치로서 보면 일리가 있지만, 오늘날 지구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음양의 성질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결과로 보인다. 또 태양과 달의 운동이 느리고 빠른 것을 누가 그렇게 한 것인지 알 수 없고, 또 스스로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조물주나 인격적인 주재자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물론 성리학에서는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치가 그렇게 스스로 운동하도록 정해져 있다고 행간을 읽을 수 있다. 이글을 읽어보면 서양에서도 그랬지만, 과학과 철학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의 『천도책(天道策)』과 자연과학


 

율곡의 『천도책(天道策)』과 자연과학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의 학문적 업적은 철학·교육·정치·사회개혁 등의 다방면에 걸쳐있지만, 자연과학적 견해를 살펴보는 일이 좀 생뚱맞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그런 자연과학과 관련된 내용이 분명히 있다. 바로 그가 쓴 과거시험의 답안인 「천도책(天道策)」이 그것이다. 이 글은 1558년(명종13) 율곡이 23살 때 별시의 과거시험에서 장원하였을 때의 답안(答案)이다. 현재 『율곡전서』 권14 「잡저」에 실려 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누리집에서 원문과 번역문을 다운받을 수 있다. 여기서 인용한 「천도책」도 그 번역문을 참고하였다.

이 글이 워낙 유명해서 후대 조선 학자들의 수많은 문집에서 그것을 거론하였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중국사신이 왔을 때 그것을 보고자 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당시 과학의 수준에서 볼 때 첨단 이론이라 할까? 그게 아니면 자연과학적 견해를 성리학의 논리에 맞게 잘 진술한 명문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답안을 말하기 전에 당시 과거시험 문제를 보면 어떤 내용 답할지 상상할 수 있다. 가령

“천도(天道)는 알기도 또 말하기도 어렵다.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서 한 번은 낮이 되고 한 번은 밤이 되는데, 제각기 느리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이 그것이다. 여기서 천도(天道)를 직역하면 하늘의 길인데, 요즘말로 자연의 원리나 자연법칙이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태양이 도는 속도와 달이 도는 속도가 다른 원인을 묻는 질문이다. 요즘에는 웬만한 초등학생들도 알 수 있는 내용을 물었으니, 과거시험이라는 게 수준 낮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근대적인 자연과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그 답을 안다는 것이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과학지식은 대개 서양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알 게 된 것들이다. 그 이전에는 동서양 모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근대 자연과학이 밝혀낸 지식과 일정한 거리가 있다.

우선 율곡의 답안을 살펴보기 전에 당시 성리학의 배경을 이룬 자연과학과 우주관을 알아 둘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율곡이 답한 내용이 성리학의 배경을 이루는 자연과학 지식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오랜 옛날부터 동아시아인들이 생각했던 우주는 둥근 하늘이 네모진 땅을 덮고 있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설이었다. 마치 네모난 네 벽을 둥근 지붕이 덮고 있는 초가집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모양의 우주를 개천설(蓋天說)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개천설은 너무 단순하고 문제가 있어, 훗날 마치 계란껍질이 노른자를 둘러싸고 있듯이 둥근 하늘이 네모난 땅을 둘러싸고 있다는 혼천설(渾天說)로 바뀌었다.

그러나 개천설이든 혼천설이든 모두 땅이 네모지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고, 땅은 언제나 한결같이 정지해 있고 하늘이 돈다는 천동설이다. 그래서 앞의 질문에서 해와 달과 별들은 하늘에 걸려 있고, 하늘이 하루에 한 번씩 땅을 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있다고 여겼을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리학을 이루고 있는 기본 개념 가운데 이(理)와 기(氣)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걸 다 말하려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인간의 문제는 일단 제외하고 내용을 단순화시켜서 자연과학과 관계되는 자연철학의 영역에서만 설명해 보겠다.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理)는 사물의 원리 또는 법칙으로 볼 수 있고, 기(氣)는 사물을 이루거나 또는 우주와 자연 속에 가득 차 있는 물질의 근원이라 말할 수 있다.

어쨌든 모든 사물은 기가 엉겨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음기(陰氣)와 양기(陽氣)가 그것이다. 양기는 따뜻하고 운동하며 적극적이고 뻗어가는 성질이 있는 반면 음기는 차갑고 정지하며 소극적이고 움츠려 드는 성격을 갖는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기이지만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두 기로 나누어 본다. 그리고 더 나누면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의 다섯 가지 기로 나눌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기를 오행(五行)이라 일컫는다.

따라서 우주는 기로 가득 차 있고 우주 속의 만물은 기가 엉겨서 질(質)을 이루면서 생성된다. 태양은 양(陽)의 정기(精氣)가 달은 음(陰)의 정기가 하늘에 올라가 된 것이며, 그리고 남은 정기가 올라가 별이 되었다고 믿었다. 정기란 만물을 생성하는 원기(元氣)이다. 그리고 지상의 온갖 사물들도 제각기 맑거나 탁하거나 밝거나 어두운 기가 섞여서 해당 사물의 특징을 이룬다. 여기서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朱子)나 주자에게 큰 영향을 끼친 정자(程子)는 이런 기가 계속해서 생겨나며 일정한 기한이 지나면 소멸한다고 설명한다.

그럼 이(理)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는 기의 운동이 그렇게 운동할 수밖에 없는 원리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듯 사시의 변화가 질서 있게 이루어지는 것은 이(理)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따라서 자연의 변화를 이렇게 이와 기라는 두 가지 요소로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물질과 그 법칙 또는 현상과 원리로 자연을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꼭 그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 이와 기는 자연을 설명하기보다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한 성리학의 주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연을 이와 기의 개념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이해한 것은 아니다.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도 바로 이렇게 인간적 가치나 원리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므로 순수한 자연과학이라 보기가 어렵다. 이 점은 뒤의 율곡의 답을 더 보면 알 수 있다.

이산보가 이이·정철을 옹호하다


이산보가 이이·정철을 옹호하다

 

래『선조실록』은 이이가 죽은 지 한 해 뒤 1585년(선조18) 1월의 기록으로, 경연에서김우옹·이산보등이이이·성혼·정철·심의겸의 관계를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경연에서 말이 이이의 일에 미치니, 김우옹이 선조에게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이가 소신(小臣: 김우옹 자신을말함)을 배척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신과 이이는 서로 안지가 매우 오래되었는데,  처음 그의 사람됨을 보니 학식이 있고 성품이 평탄하고 막힌 곳이 없어 믿고 사귀었습니다.  그 뒤에 생각이 같지 않고,  또 그가 하는 일에 잘못된 것이 많아 사람들은 그를 많이 의심했지만, 신만은 그의 마음에 딴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증하였습니다.  이이도 신과 교분이 깊었기에 의견은 서로 같지 않았어도 오히려 수습하고자 했는데, 신이 정철을 공격함에 이르러서 비로소 신을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다.’ 고 하였을뿐 별로 배척한 일이 없습니다.”

“배척했다는 말은 나도 듣지 못했다.  다만 이이와 유성룡(柳成龍)이 서로 배척하였다고 하더라.”

라고 선조가 말하니, 김우옹이 또 말하였다.

“이이는 심의겸과 교분이 두텁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 이산보(李山甫)를 돌아보면서 물러보니, 이산보가 말하기를,

“교분이 두터운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또 말하였다.

“정철이 심의겸과 서로 교분을 맺었습니다.”

“그렇게 두터운 사이는 아닙니다.”

이산보가 또 이렇게 말하니, 김우옹이 말하기를,

“이산보가 정철과 교분이 두터워  감히 전하 앞에서 그의 악(惡)을감추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말소리와  얼굴 빛이 자못 거칠었다.  선조가 말하기를

“이산보의 사람됨이 임금 앞에서 말을 꾸며대지는 않는다.  성혼(成渾)이 심의겸과 사귀었는가?”

하니, 김우옹이 그렇다고하자 선조가 말하기를,

“성혼이 초야에 있을 때 여러 신하들이 그의 덕행을 말하면서 나에게 등용하기를 권하였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또 심의겸의 문객(門客: 권세있는 대가의 식객)이라하니 어찌된 일인가?”

라고 하니, 김우옹이 말하였다.

“어찌 그의 문객이 되기야 했겠습니까.  다만 교분이 두터웠을 따름입니다.  또 정철·신응시(辛應時) 등이 사사로이 무리를 많이 끌어들여 조정의 물을 흐리고 혼란시켰는데,  전하의 밝은 살핌에 힘입어 이산해(李山海)를 이조판서로 삼아 위임하셨기 때문에 저들이 방자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가 말하기를,

“정철이 등용하려 했던 자가 누구인가?”

하니, 김우옹이 대답하기를,

“신이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사귀고 등용시키려고 한 자들은 모두 많은 소인배들로 산해가 배척하여 쓰지 않은 자들이 많습니다. 이산보는같은집안의일이니반드시 모르는것이없을것입니다. 그에게물어보시옵소서.”

라고 하였다. 선조가 이산보에게 물어보니,  그가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다.
선조가 다시김 우옹에게 묻기를,

“그대의 생각으로는 정철이 이산해를 모함하려고 한다고 여기는가?”

하니, 김우옹이 답하기를,

“신이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정철이 사귀는 많 은소인배들을 이산해가 배척했기 때문에 이 무리들이 갖가지 계책으로 동요시켜 그 형세가 매우 위태롭습니다.”

하였다. 이산보가 말하기를,

“이산해는 신의 사촌형으로 어떠한 잘못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비난하 는사람들이 많으니,  체직시켜 온전하게 해주소서.”

하니, 선조가 말하기를,

“나는 동요되지 않는다.”

하였다. 다음날 판돈녕(判敦寧: 판돈녕부사로 종일품) 정철이 경연에서 나온  말 때문에 죄를 자처하고 면직을 청하니,  답하기를,

“말세의 인심이 서로 등지고 괴이해서 궤변(詭辯)과 분분한 귀설(鬼說: 귀신의 말이라는 뜻이니 출처가 분명치 않고 세상을 혼란 시키는 말)은 나도 어쩔 수  없다.  경은 어찌 기필코 그들과 따지려하는가.”

하였다.  김우옹이 즉시 차자(箚子: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실만 간단히 기록한 상소문)를 올려 말하기를,

“전하의 분부가 이와  같으니 이는 신이 한 말이 궤변이나 귀설을 면치 못한 것임은 물론 험악한 마음을 품고 재상을 모함한 것이어서 범한죄가 매우 무겁습니다. 벌을내리소서.”

하니, 선조가 말하기를,

“나는 평범하게 말했을 뿐이다.  어찌 유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의말을 지목하여 귀설이라고까지 했겠는가?”

라고 하였다. 얼마 안되어 선조의 특별 지시로 이산보를 가선(嘉善: 종2품의 문무관의 품계로 가선대부)에 올리니,  김우옹은 그 때문에 병으로 사면하고 드디어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이 기록을 읽어보면 비록 율곡이 죽고 없어도 그와 그의 동료들과 심의겸의 관계를 통해 재평가 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 글을 보면 심의겸은 이미 회피 인물로 그려진다.  동인은 율곡과 정철과 성혼을 심의겸과 깊이 사귄 것으로 보려고하고,  이산보는 아니라고 옹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글 속의 분위기를 보면 상당한 긴장감이 맴돈다.
이렇게 당시 부제학(홍문관의정3품)이었던 김우옹(金宇顒)이 율곡과 정철(鄭澈)을 논박하자 이에 이산보가 반박해 선조로부터 충절이 있다는 칭찬을 받고 대사헌으로 특진한 일의 기록이다.  선조의 마음은 아직 율곡과 그의 동료들을 떠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 뒤 이산보 는율곡과 박순·정철의 공적을 논하다가 사간원의 탄핵으로 지방의 관찰사로 전직되었다.  선조의 마음은 서서히 동인쪽으로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율곡이 죽은 이듬해에 송응개·허봉·박근원 세 사람을 영의정 노수신의 사면 요청으로 풀어 주었다.  삼사를 장악한 동인들은 연일 서인들을 탄핵했다.
탄핵을 당하면 죄가 있든 없든 스스로 물러났으므로,  조정은 점차 동인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반면 서인들은 위기에 직면했다.
서인이었고 기축옥사(己丑獄死) 사건의 중심 인물이었던 정여립이 동인이 된 것도 이즈음이다.

이이의 죽음


이이의 죽음

 

곡은 선조 17년인 1584년 병사하였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吏曹判書李珥卒’의 단 7글자의 “이조판서 이이가 죽었다.” 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 심하지 않는가 싶어 조금 전 시대에 살았던 이황의 죽음에 대한 기록과 비교하기 위해 찾아보았다.  거기에도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율곡보다는 30글자가 많게 기록하였다.  그런데 당시 유명했던 또 다른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기록을 보니 앞의 두 사람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꽤 길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선조실록』편찬 당시 율곡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데,  율곡이나 퇴계의 제자들이 편찬 작업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것과도 관계된 듯 싶다.  그래서 이런 것도『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되는데 어떤 명분을 제공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그의 죽음을 매우 길게 기록하고 있다. 율곡만 그렇게 길게 기록했나 싶어 퇴계의 기록도 살펴보았는데,  율곡보다는 짧지만 그래도 『선조실록』보다는 훨씬 길게 기록하였다.
남명조식에 대해서도 분량면에서 본다면 이전의 기록과 크게 다르지않았다.

아래 글은 『선조수정실록』1584년(선조17) 1월  1일자의 율곡의 죽음에 관계된기록이다.
이조판서 이이가 죽었다.  이이는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임금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서익(徐益) 이 순무어사(巡撫御史)로 함경도에 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이이에게 찾아가 변방에 관한일을 묻게 하였다.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해서는 안되니 만나지 말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나의 이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뿐이다.  만약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

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 하여 여섯가지 방략(方略: 일을 해 나갈 방법)을 불러 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죽었다.  향년49세 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하였으며 3일 동안 소선(素膳: 채소만 나오는 간소한 반찬)을 들었고 위문하는 비용을 더 후하게 내렸다.  동료관리들과 성균관의 학생들,  병졸과 저잣거리 백성들,  모여 통곡했으며,  궁벽한 마을의 일반 백성들도 더러는 서로 위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 고하였다.

발인하는 날 밤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집결하여 전송하였는데,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십 리에 끊이지 않았다.  이이는  서울에 집이 없었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친우들이 수의(襚衣)와 부의(賻儀)를 거두어 염하여 장례를 치룬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 갈 방도가 없었다.(중략)

이이의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다. 나면서부터 신기하고 남달랐으며 확연히 큰 뜻이 있었다.  총명하여 지혜가 숙성해 7세에 이미 경서(經書)를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12세 때 아버지가 병들자 팔을 찔러 피를내어 드렸고,  조상의 사당에 나아가 울면서 기도하였는데 아버지의 병이 즉시 나았다.  학문을 하면서 문장 공부에 힘쓰지 않았어도 일찍부터 글을 잘 지어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잘못 불교에 물이 들어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닦았는데, 승려들 간에 생불(生佛: 살아있는 부처)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잘못된 행동임을 깨닫고 돌아와 유학에 전념하였는데,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도 도의 큰 근본을 환하게 알고서 정밀하게 분석하여 철저한 신념으로 힘써 실행하였다.(중략)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섬기기에 충성을 다하였으며 시골에 물러나 있을 때에도 애타는 심정으로 잊지 못하였다. 임금께 올린 글과면대하여 아뢴말 들을 보면 그 내용이 간절하고도 강직한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함에 있어 규모가 높고 원대하여 삼대(三代: 중국고대의 하·은·주)의 정치를 회복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다.
나라 형세가 쇠퇴해져 난리의 조짐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는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조정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폐정을 고치고 백성들을 구제하고 군대를 잘 키우는 것을 급한 일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반복해서 시종일관 한 뜻으로 논하여 알렸는데,  소인이나 속류의 배척을 당했어도 조금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임금도 처음에는 그를 견제하였으나 늦게나마 다시 뜻이 일치되어 은총과 신임이 바야흐로 두터워지고 있는 때에  갑자기 죽은 것이다.

이이는 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한데다가 수양을 잘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나아갔는데, 청명한 기운에 온화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활달하면서도 과감하였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든 한결같이 정성스럽고 진실하고 믿음직하게 대하였으며,  은총과 사랑을 받거나 오해나 미움을 받거나 털끝만큼도 개의치 않았으므로 어리석거나 지혜 있는 자를 막론하고 마음으로 그에게 돌아오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시대를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물러났다가 다시 조정에 진출해서도 선비들을 화합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 사심없이 할 말을 다 하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꺼리는 대상이되었는데,  마침내 당파에 속한 사람들에게 원수처럼 취급되어 거의 큰 화를 면치 못할 뻔 하였다.  이이는 인물을 논하고 추천할 때 반드시 학문과 명망과 품행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진실하지 못하면서 빌붙으려는 자들은 나중에 그를 많이 배반하였다.

그래서 세속의 여론은 그를 너무도 현실에 어둡다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이이가 죽은 뒤에 한 당파에 치우친 일이 크게 기세를 부려한쪽을 제거시키고는 조정을 바로잡았다고 들하였는데,  그 내부에서 다시 알력이 생겨 사분오열이 되어 마침내 나라의 무궁한 화근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에는 강토가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어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는데,  이이가 평소에 미리 염려하여 말했던 것이 훗날의 결과와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대책들이 다시 추후에 채택되었는데,  국론과 백성들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저서로 문집과『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소학집주(小學集注)』개정본이 세상에 전해온다.
이 기록은 율곡의 전 생애를 압축해서 잘 표현하고 있다.  아마 그의 사후로부터 시대적으로 상당한 시간적 거리가 있어서 그동안 정리된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본 붕당의 조정과 화합에 힘쓴 기록도 짧지만 잘 언급하고 있어 나름의 요약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  물론 이 기록은 『선조실록』과 대조적으로 율곡학파의 영향력이 강했던 시기에 편찬된 것이므로,  기록자의 의도를 잘 파악하면서 독해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이조판서로서 인물등용 견해


이조판서로서 인물등용 견해

 

곡은 계미삼찬 직후 이조판서가 되었다. 언관들에 의하여 탄핵을 받는 입장에서 되레 승진을 하였으니 비록 일이 마땅하다 하더라도,  당시 분위기로 보자면 적지 않은 마음의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조판서를 제수 받자 자신의 허물을 구실로 사양하고,  박근원과 허봉을 용서해 달라고 청했는데 선조가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래 글은 계미삼찬 후 두 달 뒤 이조판서로서 임금을 알현한 1583년(선조16) 10월 22일의 『선조실록』의 기록이다.  그가 병으로 사망하기 대략 석달 전의 일이다.  여기서는 계미삼찬 사건의 뒤 처리문제,  곧 관련된 인물에 대한 관대하고도 공정한 처분을 해달라는 율곡의 요청과 인물에 대한 평가가 거론되고 있다.

이조판서 이이가 서울에 들어와 경의를 표하니 선조가 보고 위로 한 후 말하기를,

“내가 마치 한원제(漢元帝: 전한의 10대 황제)가 임금 노릇 할 때와 같이 소인배를 물리쳐 멀리 하지 못하여 나라가 거의 망해가고 있다.”

라고 말하니, 이이가 대답하였다.

“박근원과 송응개는 본디 간사한 사람들이지만 허봉은 나이 젊어경망할 뿐 간사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재주가 아깝습니다.  그들 세 사람이 너무 중한 벌을 받았기 때문에 같은 죄를 범한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하고 있으니 관대하게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경(卿)은 말할 것이 없다.”

선조가 이렇게 말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비유해 보면 10명이 도둑질을 했는데 그 중 3명만이 중죄를 받고 나머지 7명은 버젓이 사모(紗帽: 관리들이 쓰던 모자)를 쓰고 공무에 종사한다면 이는 왕정(王政:왕의 정사 또는 왕도정치)으로 보아 편파적인 일입니다.  또 그 사람들을 향리에 내보낸다고 하여도 그들이 어떻게 다시 조정을 혼탁하게 어지럽히겠습니까?  그리고 죄목이 같은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지금 세 사람만이 죄를 받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그들과 함께 죄 받기를 원하는 자가 없으니 정의로운 기개가 없음을 알 만합니다.”

라고 하니, 선조가 말하였다.

“그때는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한 자가 없었는데 나는 이렇게 까지도 사리고 있을 줄 은몰랐다.  가령 북송(北宋)이 금나라에 의해 망할 때와 같은 화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한 사람도 의(義)를 위해 죽는 자가 없을 것이니 그게 한탄스러운 일이다.”

그러자 이이가 말하였다.

“지금은 권력을 지닌 간신이 조정에 있을 때와는 달라서 만약 ‘도사린다.’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불가합니다.  한때 선비의 무리로 자처한 자들의 논의가 모두 같았던 것은 바로 식견(識見)이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저들 자신이 선비의 무리로 자처했기 때문에 성혼(成渾)까지도 대단찮게 여겼던 것이니,  같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간사하다고 한다면그 것은 아닙니다.  간사한 사람이란 반드시 임금의 의중을 헤아려 교묘하게 맞추는 것인데 저들은 전하께서 뜻을 돌리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자기들 주장을 고집하고 있으니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대체로 지금 서(西)를 옳다고 하는 자라고 하여 그가 다 군자(君子)인 것도 아니요,  동(東)을 옳다고 하는 자라고 하여 반드시  모두 소인(小人)인 것도 아니어서,  지금 구별하여 쓰기란 어려운  일입니다.”(중략)

선조가 말하기를,

“이제 경이 있으니 내 마땅히 모든 것을 맡기겠다.”

라고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지금 인재가 적고 문사(文士) 중에는 쓸만한 인물을 얻기가 더욱어렵습니다.  정여립(鄭汝立)이 많이 배웠고 재주가 있는데 남을 업신여기는 병통이 비록있기는 하지만,  큰 현인 이하의 사람으로서는 전혀  병통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가 실로 쓸만한 인물인데 매번 후보자로 추천하여도 낙점(落點)을 않으시니 혹시  그를 참소하여 이간질하 는말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라고 하였다. 선조가 말하기를,

“정여립은 그를 칭찬하는 자도 없지만 헐뜯는 자도 없으니 어디 쓸만한 자라고 하겠는가?  대체로 인재등용에 있어서는 그 명성만 듣고 쓰는 것은 옳지 않고 시험 삼아 써 본 뒤에야 알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이이가 또 정구(鄭逑)가 쓸만하다고 아뢰니,  선조가 말하기를,

“불러도 오지않는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천천히 다시 불러 보겠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가 말하였다.

“대체로 특별히 부르면 전하의 뜻을 받들어 감당하기가 벅차서오 지않는데 바로성 혼이 오지 않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없어 마치 서얼(庶孼: 정식 부인의 소생이 서자와 그자손)로 관직에 임명된 자처럼 한사코 직에 나아가지 않더니,  지금은 그전같이 그렇게 굳게 뜻이 정해져 있지는 않아 벼슬하고 싶은 뜻이 조금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성혼은 지병이 있어 비록 오더라도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보직이 없는 한가한 관직이나 경연(經筵)을 맡은 관리가 되어 입시하여 흉금을 털어 놓고 말하게 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관작을 어찌 아끼겠습니까.”

“김우옹(金宇顒)은 어떠한 인물인가?”

선조가 이렇게 물으니 이이가 말하였다.

“못한 사람입니다.”

이 기록은 율곡이 선조에게 관대하고도 공정한 법집행을 요청함과 아울러 인물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다.  중요한 독해 포인트는 율곡이 성혼을 좋게 평가함은 친구로서 당연하다 하겠으나, 훗날 모반의 사건으로 기축옥사(己丑獄死)의 핵심 인물인 정여립을 조정에 써달라고 한 내용이다.  그러니까 율곡은 사건의 결과만 두고 본다면 앞일을 내다 보지 못한 단견적 인물로 그려진다.

전에 이준경의 당쟁 예견에 반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율곡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는 일이다.  물론 역으로 정여립은 율곡의 이 평가대로 쓸만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훗날 기축옥사는 또 무고에 따른 조작일 수도있다.  율곡이 과오에서 자유로우려면 훗날 역사에서 기축옥사가 무고에 따른 조작임을 인정해야 한다.  진퇴양난이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만약 율곡이 정여립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면 이 문제에서 벗어난다.

필자의 생각에는 바로 이것도 훗날 『선조실록』을 수정해야 한다는 당위론의 근거가 되지 않았을까 점쳐 본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단지 “정여립(鄭汝立)은 박학하고 재주가 있으나 다듬어지지 못한 병폐가 있습니다.” 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역사기록이란 기록자의 주관이나 당파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면 어느 쪽의 기록도 완전히 믿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 된다.  그래서 역사 연구자의 세밀한 안목과 능력이 요구되며,  또 연구할 대상과 가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간원의 이이 비판과 송응개·허봉·박근원 등을 귀양 보낸 것은


사간원의 이이 비판과 송응개·허봉·박근원 등을 귀양 보낸 것은지나치다고 아룀

 

른바 계미삼찬(癸未三竄)은 일의 적합성 문제와 또 여러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어,  단지 세 사람을 귀양 보내는 일로 간단히 처리 될 문제는 못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율곡을 탄핵한데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고,  또 그들 중 대부분은 관리들의 조그만 혐의에 대해서도 탄핵을 해야하는 언관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이 세 사람의 지나친 점이 많고 때로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발언을 했어도, 그렇게 먼 변방으로 귀양을 보낼 정도는 아니라는게 동인들의 생각이었고,  또 율곡 자신도 형벌이 무거우니 관대하게 해달라고 선조께 말한 적이 있다.

특히 김응남(金應南)의 경우는 송응개·허봉·박근원과 일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율곡을 존경했기 때문에 실제로 율곡을 탄핵하려는 삼사의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아래의 기록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선조에게 글을 올리고 선조가 답한 내용이다.
물론 귀양간 사람들을 변호하면서 율곡을 비판한 것도 잊지 않았다. 모두 『선조실록』1583년(선조16) 9월 1일의 기록이다.
사간원이 말하였다.

“지난번 송응개·허봉·박근원등을 멀리 귀양보냈는데,  처분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들이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급하고 경망하며 지나쳤던 것에 불과 할 뿐인데 형벌을 죄에 걸맞게 적용하지 않은 것은 국가를 위하여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당초 이이가 나라의 중대한 소임을 맡고서도 재주가 못미치고 뜻이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말이나 일처리에 있어서 하는일 마다 물정(物情)에 거슬렸습니다.  그러니 언론을 담당하고 있는 신하로서는 그때 그때 논박하여 바로 잡는 것이 당연한 직무이기는 하지만,  송응개와 허봉 등은 이이의 옳지 못한 곳만 보았기 때문에 그를 탄핵한 내용이 너무 사실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또 송응개는 이미 지탄을 당하고서도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고 박순과 이이·성혼을 논하면서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유생(儒生)들의 상소에 있어서는 논의가 편파적일 수 있지만,  목구멍과 혀의 관계처럼 조정의 안에 가까이 있는 신하로서는 사실을 있는 대로열거하여 자세히 아뢰는 것이 바로 그 직분인데,  박근원 등은 사리를 분석하지 못하고 쓸데없고 거친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들 모두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본뜻은 위로 밝으신 전하를 믿고서,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야한다는 마음에서 저들도 모르게 너무 지나쳤던 것인데, 그것에 대해 큰 벌을 줄거야 있겠습니까?  만약 붕당을 지어 전하의 귀와 눈을 가렸다는 죄목으로 그들을 다스린다면 온 나라가 다 억울함을 알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왜 여러 대부(大夫)와 나라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뜻은 살피지 않으시고,  뜻을 잃고 불평 불만에 빠져 상대를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는 자의 말 한마디에 의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려고 하십니까?

송응개 등을 멀리 귀양 보내라는 명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제주목사 김응남은 오랫동안 경연(經筵)에서 전하를 모시고 있으면서 많은 충성스런 말을 올렸고, 승지가 되어서는 부지런히 있는 힘을 다했던 자로서, 전하께서도 일찍이 믿고 총애하였던 자인데,  죄명이 드러나지도 않은 것을 조금씩 오래 두고 말하는 참소(讒訴)만을 치우치게 믿으시고,  이매(魑魅: 도깨비)의 고장에다 던져버리셨습니다.  근래 빈번히 선비들을 몰아냄으로써 이름있는 선비들은 거의 다 없어지고 참소하는 입들이 그 틈을 타니 사헌부와 사간원도 텅 비어갑니다.  백관들이 겁에 질려 떨고있고 충직한 신하들의 기가 꺾여있는데,  이는 사직을 위하여 결코 복된 일이 아닙니다.   김응남을 제주로 보내라는 명도 거두어 주십시오.”

이에 선조가 답하였다.

“그대들은 그들을 구원 할 생각을 말라. 그들 신상에도 도움은 없고 도리어 피해를 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을 징계해야 한다.  나라가 저들 세 간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망할 수도 있으니 단연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두번 말하지 않겠다.
김응남의 사람됨에 있어서는 그가 비록 같은 곳에 있었으나 입시(入侍)의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사실 몰랐었다.  그가 승지가 되어 병무(兵務: 군사적인 업무)를 맡겼을 때 과연 부지런하고 조심성있고 진실하여 나는 그를 믿고 의심치 않았으며,  경안(慶安: 앞에서 이조전랑 제도의 후임자 추천 제도를 폐기하게 만들었다고 소개한 선조의 종친인 경안군 이요를 말함)이 면대했을 때 그를 배척하였지만 그때도 나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 후 조회에서 우연한 기회에 내가 말하기를 ‘김응남이 업무를 잘 살피고 있다.’고 하자 송응개가 즉석에서 그를 극구 칭찬하였는데,  지금와서 보니 송응개는 바로 간사한 자들의 우두머리인데 송응개가 김응남을 극구 칭찬하였으니 이는 그들끼리 붕당을 맺었음이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 경안이 내게 면대를 청했던 것은 이이가 뒤에서 사주한 일이라고 떠들고 있는데,  이 말도 안되는 말은 아마 틀림없이 김응남의 무리가 자기들의 이름을 바로 들어 배척한데 대하여 분함을 느끼고 사악한 거짓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죄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나는 참으로 통분해 하고있다.  내 즉시 아울러 응분의 죄를 내리지 않고 제주목사를 제수한 것은 나라로서는 형벌을 제대로 내린 것이 아니지만,  그 자신에게는 다행인 것이다.  김응남은 제주도로 떠나고 사퇴하지 말라고 하라. 그가 만약 면모를 새롭게 고쳐 나간다면 후일 친히 총애할 때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어보면 선조의 의지는 단호하다.  마치 역모사건을 두고 한말처럼 거침없고 상기 된 어조이다.  더구나 송응개가 조회 석상에서 칭찬했던 일을 기억하여 바로 그와  붕당을 맺었다고 한말은 상당히 억지스럽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김응남은 평소 율곡을 존경하였고,  삼사의 논의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제주도에 갔어도 임지에 도착하자 성심껏 기민을 구휼하고 교육을 진흥시키며 민속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더구나 바로 2년뒤 1585년 우승지로 기용되고 이어 대사헌·대사간·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 할 정도로 성실한 신하였다.

그렇다면 선조는 왜 이렇게 화를 냈으며 훗날과 상반된 그의 태도는 무엇을 뜻할까?  필자가 보기에 그가 율곡을 매우 총애하는 군주도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이 당시 율곡을 두둔한 것은 단지 율곡이 억울해 보였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바로 율곡이 죽은 1584년 뒤에는 그의 태도가 또 변하기 때문이다.  1585년 송응개·허봉·박근원 세 사람을 노수신의 상 로 풀어 주었다.  이것은 그가 왕권강화를 위하여 당쟁을 이용하였다는 오늘날 연구자들의 평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훗날의 숙종처럼 한 쪽 당이 강해 보이면 억누르고 다른 쪽 당을 지원해 주어 세력의 균형을 맞춤으로서 자연히 왕권의 강화를 노렸다고 본다.  그러나 당대의 왕권은 강화되었는지 모르지만,  그에 비해 국력의 손실과 장차 백성들이 치러야  할 희생은 너무 컸다.

박근원·송응개·허봉을 귀양 보냄


박근원·송응개·허봉을 귀양 보냄

 

『선조실록』1583년(선조16) 8월 28일의 기록이다.

조가 정2품 이상의 신하들을 선정전(宣政殿)에 불러 모아 놓고 말하기를,

“근래 조정이 안정을 잃은 원인은 오로지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한 소치인데, 그 둘을 모두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좌우 신하들이 다 대답하기를,

“애당초 동서로 당이 나누어 진 것이 비록 그 사람들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이 다 외직에 보직되어 있어 조정 일에는 간여를 못하니 죄까지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선조가 말하기를,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 이 세사람의 간특함은 나도 아는 사실이다.  이들을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들이 비록 지나친 말을 하였으나 혹은 언관(言官: 대사간이었던 송응개와 직제학이었던 허봉을 말함)이 요혹은 시종(侍從: 도승지로 있었던 박근원을 말함)이었는데,  그들을 말때문에 죄를 내린다면 이는 밝으신 전하의 치세 아래서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라고하여, 애써 그들을 구원하려고 하였다.  이때 정철(鄭澈)이 탑전에 나아가 말하였다.

“그들의 죄를 분명히 밝혀 시비를 가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자 선조는 송응개를 회령(會寧)으로,  박근원을 강계(江界)로,  허봉을 종성(鍾城)으로 귀양 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랬다가 곧장 종성은 현재 적병(여진족을 말함)의 침략을 받고 있는데 허봉이 가면 방어하고 수비하는데 도움은 안되고 도리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라 하여 갑산(甲山)으로 유배지를 옮길 것을 명하였다.

이 사건을 훗날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부르는데, 곧 계미년(1583)에 세 신하를 귀양보냈다는 뜻이다.  그 해당되는 주인공은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이 귀양을 가게되었는가?  대부분의 사건이 그렇듯이 사건들은 서로 꼬리를 물 고일어난다. 특히 당쟁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앞의 사건이 현재의 사건의 원인이 되고 현재의 사건은 앞의 사건의 결과 이자 뒤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이 세 사람이 귀양을 가게 된 데에는 동인들의 율곡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반영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율곡의 동서붕당의 조정책이 실로 그의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일부 동인들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의 양시론 양비론도 사태를 제대로 모르고 나온  말이라고 여겼다.  사실 선조는 속마음으로 심의겸을 미워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선조가1 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심의겸이 그의 누이 인순황후에게 선조를 뒤에서 조종해 달라고 종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율곡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그랬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아무튼 동인의 눈으로 볼 때 그의 양시론 양비론에 입각한 조정책이 하나의 불만의 요소가 되었다.

더구나 그가 벌인 일의 결과가 동인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는 국면으로 귀결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바로 김효원과 심효원을 외직으로 보내거나, 또 윤승훈과의 시비에서 정철의 편을 들고 윤승훈을 외직으로 보낸 사건의 과정에서 동인의 피해가 더 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인들 가운데는 선조가 종친인 경안군(慶安君) 이요(李寥)의 말에 따라 이조전랑이 후임자를 추천하는 제도를 폐지한 것도 율곡이 뒤에서 조종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동인들이 율곡을 결정적으로 미워하게 된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지사(知事: 중앙의 주요관청에 설치된 정2품의 관직) 백인걸(白仁傑)이 율곡을 찾아와 동인과 서인을 화합시키려는 상소를 올리려고하는데 초안을 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율곡은 별 생각없이 자신의 평소 뜻에 맞아그렇게 해주었지만, 완성된 그의 상소문에는 동서의 화해를 요구하면서도 동인을 비난하는 글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동인들은 이백인걸의 상소를 이이가 뒤에서 사주한 것으로 믿고,  율곡의 조정책에 호의적이던 동인들 마저도 완전히 율곡에게 등을 돌렸다고 한다.  이것은 율곡의 뜻과 상관없이 백인걸의 신중치 못한 일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사태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었다.

이렇듯 계미삼찬은 율곡에 대한 이런 동인들의 평소 감정이 율곡이 나랏일을 맡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율곡을 비판한 결과로 생긴 일이었다.  바로 선조 16년(1583)에 북쪽 여진족 니탕개(泥湯介)가 국경을 침범했을 때 국방을 담당한 병조판서는 율곡이었다.  당시 율곡은 여진족을 물리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  상황이 급박한 지라 어떤일은 자신의 임의대로 먼저 시행하고 나중에 결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전쟁에 쓸 말을 바치면 군사에 뽑힌 자라도 출전을 면제해 준다는 방책을 먼저 시행하고 임금의 사후 승인을 받은 일도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경 지대까지 양곡을 운반해 헌납하면 서자(庶子)출신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법을 쓰기도 했다.

게다가 동인들의 탄핵의 빌미가 되는 피치 못할 일이 또 생겼다.  하루는 율곡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궐했다고 갑자기 현기증이 생겨 병조의 사무실에 누워 몸을 돌보느라 나아가지 못한 일이 있었다.  선조는 이 사실을 알고 어의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다.

이런 사실을 확인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율곡이 군사권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탄핵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에 율곡은 사직하려고 했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자, 이에 동인의 공격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 탄핵을 주도한 사람은 앞의 박근원·송응개·허봉이었는데, 특히 대사간이었던 송응개의 공격이 가장 맹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공격은 서인의 중진이었던 박순과 성혼에게 확산되고, 심지어 율곡이 어릴적 잠시 금강산의 절에 들어갔던 행적까지 들추어 비난하였다.

동인들이 이렇게 심하게 공격하자 조정에서는 동정론이 일게 되고, 성균관 유생을 비롯하여 전라도와 황해도 유생들도 율곡과 성혼을 위해 상소를 올려 이들을 변호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동인인 김우옹도 이들을 변호한 것을 보면, 이들의 공격이 매우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바로 앞의 실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선조는 이 세사람을 유배 시켰다.  이 과정에서 선조는 율곡을 공격한 사람들을 현직에서 해임하고 율곡을 변호한 사람에게는 칭찬하는 답을 내렸다.

그래서 율곡을 가장 격렬하게 공격한 허봉·송응개·박근원을 멀리 유배 시킨 반면에, 율곡을 이조판서, 정철을 대사헌, 성혼을 이조참판에 임명하였다.
후세 사람들 가운데는 율곡이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으로 기울어졌다고 말한다. 이건창의『당의통략』에서는 율곡이 이조판서를 제수 받자 자신허물을 구실로 사양하고,  박근원과 허봉을 용서해 달라고 청했는데,  송응개만은 끝까지 용서해 달라고 청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의 지나친 인신공격 때문이었을까?

요즘도 그렇지만 정치투쟁이 격화되면 특히 당사자들은 마음의 평정을 얻기 어려운가 보다.  상대의 약점과 실수 심지어 과거사까지 들추어 내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니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로부터 10년 뒤의 전란을 생각한다면 오늘에 교훈되는 바가 적지 않다.

이이가 윤승훈의 일을 아뢰다


이이가 윤승훈의 일을 아뢰다

 

1581년(선조14) 8월 1일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앞서 정철을 두고 벌인 논쟁 때문에 율곡과 남언경 등이 체직 된 기록 외에 윤승훈의 대한 율곡과 선조의 대화,  그리고 정철이 관직을 버리고 정인홍이 해직되어 각기 고향으로 돌아간 것과 율곡이 체직되어 대사간으로 직책이 바뀐 것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선조실록』1581년(선조14) 8월 0일에는 윤승훈에 대한 선조와율곡의대화이외는기록이없다. 더구나 이마저도 날짜가 빠져있다. 그 다음 기록이 8월 10일이므로 좌우가 1일과 9일 사이에 있었으니, 수정 실록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보아 1일자의 기록으로 봐도 무방하다.
우선 윤승훈에 대한 『선조실록』속 대화의 요지는 이렇다.  율곡은 선조에게 간관(諫官: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관리.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을 총칭함)의 사기를 너무 지나치게 꺾어서는 안되는 것인데도 임금이 외직에 전보를 명하였고,  이러면 직언(直言)하는 선비가 말을 하려다가 하지 않는 일이 있을까 염려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사리(事理)에 따라 처리했고, 간관이라 하더라도 말이 옳지 않으면 배척 할 수 있다고 응수했다.  그리고 그렇게 안하면 같은 자가 또 나올  것이어서 사태를 진정시키려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밝힌다.
그런데 같은 내용이지만 『선조수정실록』에는 기록이 추가되어 있는데, 율곡이 윤승훈과 화합하지 않고 배척한 것을 누군가 탓한데 대한 율곡의 말이 들어 있다.  그 발언의 요지는 윤승훈이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에 맞춰 말했는데 삼사(三司: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세기관 또는 그 기관의 관리들의 총칭)가 모두 한 통속이 되어 윤승훈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온 나라에 공론이 없어서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말을 듣고 이발과 김우옹이 모두 율곡에게 사과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왜 이런 말이 더 추가 되었을까?  이 글로만 본다면 율곡의 입장을 변호하 는성격이 짙다.  만약 이 기록을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왜 『선조실록』에서는 빠져 있고『선조수정실록』에는 들어있을까? 그것은 사건을 기록하거나 실록을 편찬하는데 관여한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은 물론 두 실록 모두에 적용되는 점으로,  역사란 기록 또는 서술자의 가치관이나 주관이 개입 될 수 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더구나 당쟁 시기의 그것은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대개 당시까지 선조 때의 조정은 젊은 관원들 다수가 동인이었고, 서인은 나이든 대신들과 율곡의 친구와 후학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앞에서 삼사의 관원들 마저도 윤승훈이 정철을 배척하는 문제에 비판하지 않고 입다물고 있었다는 율곡의 말이 그 점을 말해주고 있다.  율곡이 붕당을 조정하려는 것도 일면 동인의 세력이 컸음을 말해준다.

더구나 『선조실록』이 편찬되던 광해군 때에도 동인의 후예들이 득세했다는 점에서,  인조반정 후 서인의 집권기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과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어째든여기서는 어느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는 지는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두 실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다.  비록 수정했다 하더라도 이전 실록을 폐기하지 않고 보관했으니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은 후학들의 몫이다.

이참에 하나 더 지적한다면 김효원을 삼척부사에 제수한 것이 1575년(선조8) 10월 1일자 인『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보다 사건이 먼저 일어난 김효원과 심의겸이 부령부사와  개성유수로 삼은것이 같은 해 10월 24일자인 『선조실록』의 기록이다.  또 여기서『선조수정실록』10월 1일에서 김효원을 삼척에 재발령 내는 문제를 다룬것이 10월  25일자『선조실록』의 기록으로 24일의 간격이 생긴다.  어째든 둘 중하나는 분명 착오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율곡과 윤승훈의 문제로 귀결된 애당초 문제의 당사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심의겸은 탄핵될 번 하다가 다른 문제가 불거지는 관계로 또 율곡의 상소로 무사하여 전주부윤이 되었지만 여전히 외직이었다.  아마 율곡의 의도는 그를 중앙 정계에 둠으로써 생기는 조정의 분란을 예방하기 위해 그를 한직에 머물러 있게 함으로써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율곡은 심의겸에게 원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정인홍의 탄핵을 막은 은인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1584년 율곡이 죽자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 등이 공박함으로써 파직을 당했으나,  다시 벼슬이 대사헌과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세습으로 청양군(靑陽君)에 봉하여졌다.

한편 정인홍은 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사헌부에 있을 때 지나친 사치풍조를 억제하고 형벌을 준엄하게 하였으므로,  일반 백성이나 시정 잡배들이 두려워하여 숙연해 졌다고 전한다.  그가 심의겸 등을 탄핵하자마자 당시 세론(世論)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으나,  율곡의 제자인 안민학(安敏學)만이

“나는 인홍을 착한 선비라고 여겼는데 지금 그 행동을 보니 바로 괴이한 귀신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율곡도 그에 대해서

“그 사람은 강직하기만하고 식견이 밝지 못하다.  전투하는 군대에 비유하자면 돌격장수로 삼을 만한 자이다.”

라고 말한것으로 기록하였다.  훗날 그는 임진왜란 때의 병장으로 공으로세우고, 광해군 때 영의정에 오른 뒤 인조반정 때 실각하여 참수  당한다.
정철 또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는 그 즈음 어떤 옥사 사건을 계기로 마음속에 늘 불평을 품고 그것을 말로 자주 나타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는데 취하기만 하면 남들의 장 단점을 말하였는데,  어느 날 술김에 이발에게 욕을하고 꾸짖자 이발은 드디어 절교하였다고 전한다.  바로 이때에 심의겸과 관련하여 대간들의 탄핵을 심하게 당하였기 때문에 가족을 데리고 호남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며,  율곡과 이해수(李海壽)가 나루터가 있는 강가에까지 나아와  전송하면서 술을 끊고 지조를 지키라고 당부하자,  정철은 이발(李潑)의 마음씨를 믿을 수 없으니 그와 벗하면 반드시 농락 당할 것이라고 극언하였다.

언젠가 선조가 옆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정철에 대해 내가 그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지만,  전에 그가 승지(承旨: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는 관리)로 있을 적에 나는 그의 사람됨을 대략 살펴보았는데, 지조가 깨끗한 사람이고 나랏일에 충성을 다 바치는 자였다.”

라고하고, 또이와 상반되게이렇게말하였다.

“나는 그의 마음이 편협하여 틀림없이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과연 그러하다.  그러나 정철을 소인이라고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정철은 우리 국문학사에서 많은 작품을 남긴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의 작품 내용에 걸맞지않게 정치가로서의 평가는 그보다 훨씬 못하다.  더구나 수정실록에서 조차도 그에 대한 평가는 초년과 만년이 대비된다.

“그는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옥사(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을 가리킴)를 다스릴때 다른 당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이렇게적고있다.

이이·남언경·유용정을 체직하다


이이·남언경·유용정을 체직하다

 

1581년(선조14) 8월 1일『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매우 긴 장문이므로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체직(遞職)이란 관리들의 관직을 바꾸는 일인데 이 사건은 요즘말로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수장) 곧 검찰총장과 그 라인에 있는 중요 간부에 대한 문책성 인사이다.
이날의 기록에는 대사헌 이이, 집의(執義: 사헌부의 종3품 관직) 남언경(南彦經), 지평(持平: 사헌부의 정5품 관직) 유몽정(柳夢井)이 관련되어 체직되었다.
이 일은 앞에서 정인홍이 심의겸의 탄핵을 논의하는 가운데 우연히 튀어나온 정철(鄭澈)의 행동에 대한 심의겸과의 관계를 두고,  율곡과윤승훈(尹承勳)의 논쟁으로 이어지고 거기에 삼사(三司: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관리들이 가세하면서 체직이 된 사건이다.

애초 정인홍이 율곡에게 심의겸을 탄핵하자고 건의할 때,  율곡이 이발의 설득에 의해 탄핵문 초안을 작성하면서 정인홍에서 다른 말 하지 않기로 다짐시켰는데,  정인홍이 그 다짐을 깨고 그 내용에 ‘심의겸이 선비들을 끌어들여 명성과 세력을 키운다’ 는 말을 쓴 것이 문제였다.  원래 율곡의 말은‘[심의겸이] 조정의 논의를 주도해 오며 권세를 탐하고 즐겼으므로 선비들의 마음을 잃었다’ 는 것인데,  정인홍이 한 말과 율곡의 이 말은 뉘앙스가 달랐던 것이다. ‘권세를 탐하고 즐겨서 선비들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과  ‘선비들을 끌어들여 명성 과세력을 키운다’는 논리의 현실적 적용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 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수정실록은 정인홍이 이것을 계기로 한 무리의 선비들을 격퇴하려고 거짓으로 율곡에게 다짐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논리의 적용은 선조가 질문하면서 분명해졌다.  갑자기 선조가 정인홍에게 심의겸이 끌어들인 선비들이 누구냐고 묻는 바람에 그만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정철(鄭澈) 등 이라고 대답한 말로 일이 커지게 되었다.  정인홍은 이전에 누군가로부터 이 말을 들은것 같다.  이것은 그가 선조 앞에서 물러나 동료들과 의논해 보겠다는 대답이 그 단서이다. 이에 율곡은 정인홍에게

“정철은 심의겸의 무리가 아니네.  정철은 지조있는 선비인데 지금 그가 심의겸을 따른다고 하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네.  내가 지난번 상소에서 정철의 사람됨에 대해 극구 칭찬했는데,  지금 정철이 심의겸을 편들었다고 한다면 내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네.  이 문제는 그대에게 잘못이 있든지 아니면 내게 잘못이 있는 문제이네.”

라고 말하니 정인홍이 마지못해 인정하고 선조에게 말하였다.

“정철은 심의겸의 무리가 아닙니다.  제가 앞서 올린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저의 직책을 바꾸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에서 이런 정인홍의 일을 다룰 때 그 논의에 사헌부의 관리들이 참여했는데,  율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철이 심의겸과 사이가 매우 가깝다고는 하지만 기질이나 마음 가짐은 현저히 다릅니다.  정인홍이 전하의 물음에 급하게 대답하다 보니 사실과 다르게 말을 했을뿐, 사적인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이것을 근거로 내보낼 것을 청해야 합니다.”

그러자 여기서 또 정철에 대한 의견이 엇갈린다.  이때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4품 관직) 권극지(權克智), 지평(持平: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5품 관직)홍여순(洪汝諄)·유몽정은 논의에 참여하였는데,  권극지와홍여순이 말하기를,

“정철이 심의겸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심의겸이 뜻을 상실한 이후  정철이 늘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현저히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임금께 말하였다.

“정철은 심의겸과 매우 가까운 사이입니다.  정인홍이 소문에 따라 곧바로 전하의 질문에 대답했을 뿐 실지로 실수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몽정은 율곡의 말에 동조하였고, 율곡은 그와 함께 임금께 말하였다.

“정철이 심의겸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지만 정철은 강직하고 절개가 있고 고결한 선비로 기질이나 마음가짐은 그와 아주 다릅니다.  정인홍은 정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소문만 믿고 전하의 갑작스런 질문에 답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정언(正言: 사간원의 정6품 관직) 윤승훈(尹承勳)이 율곡의이 말을 반박해 말하였다.

“대사헌 이이등은 정철이 비록 심의겸 과매우 가까운 사이이나 기질과 마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무릇 사람이 친구를 사귈 때는 마음과 기질이 맞아야 서로 친하게 되는데, 매우 가까운 사이이면서 마음이 다른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율곡이 말하기를

“윤승훈은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라면 생각도 반드시 같다고 주장 하는데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옛날 한유(韓愈: 당나라 때 문인)는 유종원(柳宗元: 당나라 때 문인)에게, 사마광(司馬光: 북송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은 왕안석(王安石: 북송의 정치가)에게, 소식(蘇軾: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은 장돈(章惇: 북송의 정치가)에게 있어서 그들의 생각을 논한다면 너무 다르지만 가까운 정도를 말하면 형제와 같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윤승훈은 계속 글을 올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않았다.  그러자 율곡은 또 선조에게 말하기를

“정철의 행위도 진실로 옳지 못했지만, 그가 심의겸과 한편이 되었다는 말도 공론이 될 수 없습니다.  저 윤승훈이 무슨 식견을 지녔겠습니까?  선비들의 취향을 관망하여 붙잡으려는 계책에 불과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선조는 윤승훈을 지방관리로 내보냈는데,  이번에는 삼사의 관리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상소를 올렸다.  그 요지는 율곡이 당시 사간원의 언관이었던 윤승훈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은 언관을 경시하는 일이고,  한 쪽은 현직을 유지하고 다른 쪽은 문책하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거였다.  이런 상소는 삼사를 중심으로 올라왔다.  이에 선조는 율곡 등의 체직을 허락하고 정지연(鄭芝衍)을 대신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때 신창현감(新昌縣監)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특별히 윤승훈을 신창현감에 제수하였다.

사실 이 문제는 애당초 심의겸을 탄핵하는 문제에서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된 것이다. 율 곡이 정인홍의 심의겸을 탄핵하는 의견에 동의한 의도 는심의겸에게 허물이 있어서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동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조정을 화합의 분위기로 이끌려는 의도 는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 일의 결과가 정철을 구하고 윤승훈을 배척하게 되었으니,   더욱 동인들의 반발과 미움을 당하는 쪽으로 사건이 전개되었다.
율곡 처럼 총명한분도 이렇게 휘말리니 정치란 속성이 그런 것인가? 아니면 사실이 분명치  못 할 때는 여론과 명분을 근거로 판단해야 하는 시스템의 문제인가? 오늘날도 사실이 호도되거나 은폐되고 여론과 추측만 난무할 때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튼 훗날 정철은  정여립 사건을 다루면서 천명이나 넘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사건에 간여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