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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 기생 유지(柳枝)를 사랑하다

 

(8) 황주 기생 유지(柳枝)를 사랑하다

강민우: 선생님은 밤낮으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였던 정치가요, 자신을 닦고 학문을 연마하였던 학자였지만, 또한 벗과 어울려 술과 유람을 즐기고 꽃과 자연을 사랑하였던 시인이기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저는 술을 마시고 방탕하게 취하는 일은 없으나, 반가운 벗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는 운치를 즐깁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꽃에 대해서도 세심한 애정을 보이셨지요.

율곡: 진(晉)나라 때 유명한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사랑했던 국화꽃에 애정을 가졌으며, 술잔에 국화꽃잎을 띄우고 지었던 시가 있습니다.

서리 속의 국화를 사랑하기에 爲愛霜中菊,
노란 꽃잎 따서 술잔에 가득 띄웠네. 金英摘滿觴.
맑은 향기 술맛을 돋우고, 淸香添酒味,
수려한 빛깔 시인의 정취를 적셔주네. 秀色潤詩腸. (「泛菊」)

강민우: 서리 속에 핀 국화를 보면서 국화의 꽃잎을 술잔에 담아 함께 마시다가, 국화꽃의 맑은 향기에 도취되어 시적인 정취가 솟아난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 저는 도연명이 국화 꽃잎을 따며 읊었던 시나, 굴원(屈原)이 국화꽃을 맛보았다는 시를 생각하면서, 국화와 정담을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강민우: 꽃은 아니지만 ‘말을 알아듣는 꽃(解語花)’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기생입니다. 율곡선생이 황해도 황주(黃州) 기생 유지(柳枝)와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사실입니까.

율곡: 제가 39세 10월부터 40세 3월 사이에 황해도 관찰사로 있는 동안, 황주로 순찰을 나갔을 때 기생 유지를 처음 만났습니다. 유지는 선비의 서녀(庶女: 첩의 딸)로서 어머니가 기생이어서 기생이 되었는데, 당시 16세가 채 못되는 어린 기생이었습니다. 유지는 잠자리도 제공하는 방기(房妓)로 와서 저를 모셨는데, 참으로 자색이 고왔습니다.

강민우: 그 뒤로 율곡선생님이 원접사(遠接使)로 사신을 맞이하러 지나가는 길이나, 둘째누님을 뵙는 일로 황주를 왕래할 때면, 유지가 언제나 선생님을 모시고 싶어했다지요.

율곡: 제가 촛불을 밝히고 더 이상 가까이 하지는 않았지만, 「유지사(柳枝詞)」를 지어주면서 은근하게 정(情)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후인들은 이러한 율곡선생의 태도에 대해 ‘사이좋게 어울리면서도 방탕하지 않았다’고 평하기도 합니다.(李有慶; 「遺事」) 유지에 대한 기록은 율곡문집에 실려 있지 않지만, 후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논의한 일이 있습니다. 박세채(朴世采)에 따르면, “율곡이 47세 때 원접사로 황주에 도착했을 때 황주 군수가 유지라는 재주와 자색이 뛰어난 기생을 침실로 보냈는데, 율곡은 유지에게 ‘너의 재주와 자색을 보니 매우 사랑스럽지만, 다만 한번 사사롭게 만나면 의리상 마땅히 데리고 살아야 하니,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내보냈다고 한다. 그 후에 율곡이 해주에 살 때 유지가 밤중에 멀리서 찾아왔는데, 율곡은 「유지사」 한편을 지어주고 물리쳤다”는 내용입니다.

율곡: 그런 소문이 있었군요. 사실 저는 40세의 중년으로 16세의 어린 유지를 처음 만났을 때 시를 지어주었고, 48세 때에도 24세의 성숙한 유지를 앞에 두고서 밤새 정담을 나누며 「유지사」와 3편의 시를 지어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첫째 수의 시를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타고난 자태 가냘퍼 선녀처럼 어여쁘고, 天姿綽約一仙娥,
십년을 알고지내니 정분도 깊어졌네. 十載相知意態多.
오(吳)땅 소년처럼 마음이 목석같아서가 아니라, 不是吳兒腸木石,
다만 병든 쇠약한 몸이라 향기로운 꽃 사양하네. 只緣衰病謝芬華. (「제목없음」)

강민우: 이 시를 보면 율곡선생이 유지를 깊이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시도 율곡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당시에 율곡선생의 친우들 사이에는 잘 알려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선생의 유지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이어서 율곡선생께서 당대의 인물들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내용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율곡의 화려한 관직생활

 

(7) 율곡의 화려한 관직생활

강민우: 율곡선생의 관직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율곡: 저는 29세 때 호조 좌랑(戶曹佐郎: 정6품)으로 처음 벼슬길에 나선 이후, 48세 때 마지막 관직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관직생활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대사간(大司諫: 정3품당상)과 대사헌(大司憲: 종2품)으로 언로(言路)를 담당하였으며, 정2품인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지냈습니다. 또한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判書)에 다섯 차례에 임명되었으며,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종1품)에까지 올랐으니, 저의 화려한 관직생활을 보면 결코 짧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강민우: 정1품, 종1품과 같은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곡: 이것은 조선시대 벼슬의 품계입니다. ‘정’과 ‘종’이 번갈아 나오는데, 정품과 종품 중에서 ‘정’이 높습니다. 품계는 9품까지 않으며,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이런 식으로 순서대로 번갈아 종9품까지 가니 모두 18품계입니다. 정1품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고, 종1품은 좌찬성․우찬성이며, 정2품은 6조(六曹: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판서나 홍문관 대제학이고, 종2품은 6조의 참판과 관찰사․사헌부 대사헌 등입니다. 또한 정3품부터는 당상관으로 고위 공직입니다.

강민우: 오늘날 공무원에 1급에서 9급까지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날의 직급과 비교하면, 정1품은 국무총리급, 종1품은 부총리급, 정2품은 장관급 등으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율곡: 조금 무리가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관직생활의 초기인 34세 때부터 벼슬에 물러날 뜻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저는 개혁정치를 위해 임금에게 많은 진언을 하였으나 임금이 저의 뜻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음을 알고는,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가지고 병을 핑계로 끊임없이 사직상조를 올려 물러나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40대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물러나 있는 기간이 더 길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강민우: 그럼에도 선조임금은 율곡선생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잇달아 중책을 제수하며 붙잡으려 애를 썼던 것이죠.

율곡: 저는 관직에 있는 동안, 잠시도 편안하게 세월을 보냈던 적이 없습니다. 저의 관직생활은 국가제도의 폐단을 개혁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대책을 강구하여 잇달아 상소(疏, 箚, 啓)를 올리는 치열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올렸던 무수한 상소문 가운데 소(疏)․차(箚) 52건, 계(啓) 20건이 문집인 율곡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집니다. 소․차․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율곡: 소(疏)․차(箚)․계(啓)는 모두 상소문의 일종입니다. 상소는 임금에게 올리는 각종의 글을 총칭하는 말인데, 그 내용과 형식에 따라 소(疏)․차(箚)․계(啓)․의(議) 등으로 분류됩니다. 상소(上疏)는 글을 써서 간언하는 것으로, 보통의 상소문이며 봉사(封事)라고도 합니다. 차자(箚子)는 상소보다 간단한 형식으로 구체적 사실을 올리는 글로, 주자(奏箚)․차문(箚文)․차(箚)라고도 합니다. 계(啓)는 지방 장관 또는 관원이 임금이나 중앙관청에 올리는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성격의 글입니다. 의(議)는 정책에 대한 입안을 돕기 위하여 올리는 건의에 가까운 형식의 글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처음에 올렸던 상소는 어떤 것입니까.

율곡: 제가 처음 올렸던 상소는 30세(1565) 때 명종(明宗)의 생모로서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던 문정(文定)왕후의 후원 아래, 불교중흥운동을 일으켰던 승려 보우(普雨)를 배척하는 상소였습니다. 저는 보우를 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건의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단연코 죄가 없다고 하시고 끝내 보우를 내쫓지 않으신다면, 이것은 선비의 기상을 꺾어 국운이 손상되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論妖僧普雨疏」)

강민우: 율곡선생은 ‘의리를 밝히고 정도(正道)를 회복해야 한다’는 선비들의 공론(公論)을 제시하는데 전면에 나섰던 것이군요.

율곡: 제가 사실상 관직에서 활동하던 마지막 해인 48세(1583) 때는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이때에도 저는 국가가 위기상황에 처해있음을 재차 강조했습니다. “만약 뛰어난 재능과 성현의 학문을 가진 사람이 출현하여 세상의 인심을 진정시키고 세상의 도리를 만회하지 않는다면, 비록 전하의 밝은 지혜로도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어지는 형세를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陳情乞退疏」)

강민우: 율곡선생이 제시한 개혁과제에 대해, 당시의 관료들은 관습에 안주하여 한결같이 반대하였던 것이겠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조세제도(貢案)를 변경하는 것은 불편하다 하고, 여러 고을에 정원 외의 군사를 두는 것은 부당하다 하고, 곡식을 바침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고, 서얼(庶孽: 첩이 나은 자식)에게 벼슬길을 터주는 것은 불가하다 하며, 성과 보루를 다시 쌓는 것은 필요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의 개혁정책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고, 오히려 비현실적인 정책으로 배척하셨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뒤에 조정에서 ‘적을 막고 백성을 안정시킬’ 대책을 강구할 때는 율곡선생이 제시한 이 다섯 가지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서야 율곡선생이 얼마나 선경지명이 있었던 것인지를 알았던 것이죠.(李命益, 陽川覆瓿稾)

율곡: 저는 병조판서로서, 당시 외적의 침략에 나라를 방어할 기반이 상실된 것을 지적하고, 선조 임금에게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군사와 식량이 모두 궁핍하여 작은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하더라도 온 나라가 동요하는데, 만일 큰 오랑캐가 침입해 온다면 비록 지혜있는 사람이라도 이를 막을 계책이 없을 것입니다.” 이때 저는 당면한 시무(時務: 시급한 일)로서 ①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할 것, ②군사와 백성을 양성할 것, ③재정을 풍족히 할 것, ④변방을 견고히 할 것, ⑤군사용 전마(戰馬)를 준비할 것, ⑥교화(敎化)를 밝힐 것을 제시했습니다.(「六條啓」)

강민우: 이때 율곡선생은 ‘군사 10만 명을 양성하자’는 이른바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셨군요.

율곡: 저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습니다. “나라의 형세가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10년이 못 가서 흙이 무너지듯이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길러서 도성(都城)에 2만 명을 배치하고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며, 그들에게 조세를 덜어주고 무예를 훈련시켜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10만 명을 합쳐서 위급할 때의 방비를 삼으소서.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일반 백성을 몰아서 전투하게 됩니다.”(「연보」)

강민우: 이때 율곡선생의 친우인 유성룡(柳成龍)도 태평시대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곧 재앙의 단서를 기르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죠. 유성룡이 ‘태평시대에는 임금에게 성학(聖學)을 권면해야 할 것이지 군사의 일은 급선무가 아니다’고 나무라자, 율곡선생은 “속된 선비가 어찌 시무를 알겠는가”라고 하며 웃었다지요. 이때로부터 9년 뒤에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엄청난 시련을 겪고 난 다음에야, 율곡선생이 주장한 ‘십만양병설’이 얼마나 탁월한 선견지명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율곡: 당시 조선사회의 여건에서 ‘십만양병설’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십만양병설’은 이 시기에 군사적 방어대책에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사망하시기 전인 48세(1583) 한해는 촛불이 다 타고나서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가장 밝게 타오르듯이, 관직생활에서 그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던 때였었죠.

율곡: 그해 1월부터 6월까지는 병조판서를 지냈는데, 이미 1월에 저는 병이 심하여 병조판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사퇴 상소를 올리면서도, 동시에 폐단을 개혁하고 군대를 양성할 계책을 강구했습니다. 이때 마침 북쪽 변경에 여진족이 침략해왔다는 급보가 있어서, 더 이상 사퇴하지 못하고 병조판서로 나가서 변경의 업무를 보아야 했습니다. 당시 북쪽의 여진족이 또다시 쳐들어와 2만여 군사로 종성(鍾城: 함경북도 동북부)을 포위하는 등 상황이 매우 급박했습니다.

강민우: 이때 임금의 승인도 받지 않고 권력을 멋대로 행사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배경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율곡: 저는 당시 병조판서로서 밤낮으로 군사를 동원하고 보급물자를 조달하는 등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이때 북쪽 변경으로 나가는 군사들이 타고 갈 군마(軍馬)를 마련하는 어려움에 처하자, 군마의 조달을 위해 3등 이하의 사수(射手)들에게 말을 바치면 동원을 면제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그러자 말을 바치는 자가 많았으며, 이에 군사들이 신속하게 변경으로 출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임금의 승인을 받기 전에 내려진 조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승인도 받지 않고 권력을 멋대로 행사였다는 비난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로부터 탄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당시 분열하여 서로 배척하는데 급급했던 정치적 분위기를 보면서 물러날 뜻을 굳히고 시골로 돌아가셨던 것이군요.

율곡: 병조판서에서 물러나 배를 타고 해주로 내려가면서 읊었던 시가 한 수 생각납니다.

사방 멀리까지 먹구름 짙은데, 四遠雲俱黑,
중천에 태양만이 바르고 밝구나. 中天日正明.
외로운 신하의 한줌 눈물, 孤臣一掬淚,
한양성을 향해 뿌리누나. 灑向漢陽城. (「去國舟下海州」)

강민우: ‘사방의 하늘에 먹구름이 뒤덮여 있다’는 것은 당쟁에 빠져든 당시의 정국이 얼마나 암담한 상황이었는가를 말해줍니다. 시골로 내려가는 배를 타고서도 고개는 서울(임금)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는 율곡선생의 나라를 걱정하는 심정이 느껴집니다.

율곡: 제가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를 그만두고 해주로 내려간 뒤에, 친우 성혼(成渾)은 탄핵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양사(兩司: 사헌부․사간원)는 다시 저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다시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太學生)들이 저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선조 임금도 저를 배척하던 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박근원(朴謹元) 등을 유배 보내면서 저의 무죄를 옹호하기도 하였습니다만, 당쟁의 격류 속에서 정치적 대립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48세(1583) 9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을 때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군요.

율곡: 저는 그해 10월에 조정에서 나와 생애의 마지막 관직인 이조판서의 직무를 담당했습니다. 이조판서는 인재를 천거하여 등용시키는 책임이 있는데, 동인․서인의 대립이 격렬한 가운데 양쪽을 조정하고 포용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때 당파를 수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양편이 서로 배척하는데 나만 유독 입이 닳도록 변론하니, 진실로 선비의 무리가 화합하지 않으면 끝내 나라를 다스려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연보」) 저는 생애의 마지막까지 동인․서인의 대립을 조정하는데 강한 책임감을 가졌습니다.

강민우: 율곡이 동인․서인의 화합을 위해 상소를 올리고 여러 사람들과 서신을 주고받은 내용을 보면, 한결같이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동인․서인 양쪽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졌고, 뒤에는 ‘서인을 옹호한다’는 동인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당시 선비들 사이에 당파적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다.

율곡: 저는 사화(士禍)의 시기가 끝나고 선비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사림정치(士林政治)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림들이 당파로 분열하여 당쟁(黨爭)을 벌이는 당쟁시대에 빠져들었습니다.

강민우: 당쟁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율곡: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면서 시작됩니다. 먼저 김효원이 이조전랑(吏曹銓郎)에 추천되자, 심의겸은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그러나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김효원은 결국 이조전랑이 됩니다. 그 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김효원은 외척임을 들어 반대합니다. 이때부터 사림들이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西人)과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東人)으로 갈라져서 대립하였는데, 이로써 동서분당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김효원이 한성부의 동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동인’이라 불렀고, 심의겸이 서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로써 사림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민우: 복잡한 국정의 일은 이것으로 마치고 선생님의 사랑(연애)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평생의 벗-성혼(成渾)

 

(6) 평생의 벗-성혼(成渾)

강민우: 선생님의 친우관계는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누구랑 가장 친하게 지내셨습니까.

율곡: 저는 당시 여러 인물들과 폭넓게 사귀었습니다. 저의 친우 가운데는 뛰어난 인물들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가까웠던 인물을 꼽는다면 성혼(成渾)․정철(鄭澈)․송익필(宋翼弼)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 넷은 깊은 우정으로 맺어진 사이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교우관계가 매우 활발하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친구들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 한명을 꼽으라면 누가 되겠습니까.

율곡: 성혼(成渾, 1535~1598)입니다. 언제 어떤 계기로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와 성혼은 모두 파주에 살아 거리가 멀지 않고, 또한 성혼의 아버지는 당시에 명망 높은 학자여서 자주 만날 기회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강민우: 성혼은 율곡선생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데도, 처음 율곡선생을 만나보고 “그 학문의 탁월함에 감탄하여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율곡선생이 굳이 사양하여 친우가 되었고, 서로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였다”(「연보」)라고 들었습니다.

율곡: 제가 성혼과 저를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학문의 경지를 논한다면 내가 다소 나은 점이 있지만, 품행의 독실함과 지조의 확고함은 내가 미치지 못합니다.”(成渾, 「牛溪年譜」)

강민우: 서로의 장점을 깊이 인정하고 존중하는 교우였던 것 같습니다. 율곡선생의 학문(성리학) 토론은 주로 성혼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졌으니, 성혼은 율곡선생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동반자가 되겠군요.

율곡: 저는 과거에 급제하여 29세 때부터 벼슬길에 나갔으나, 성혼은 과거에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에 집중했습니다. 제가 33세(1568) 때에 경기감사가 성혼을 추천하려고 하자, 제가 만류한 적이 있습니다. “성혼은 학자이니, 마땅히 그가 학문을 성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연보」) 저는 성혼이 벼슬길에 나와 출세하기 보다는 학문을 크게 성취하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성혼에게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知己)의 벗’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율곡: 저와 성혼은 우정이 깊어 만나면 밤을 새며 이야기가 끝이 없습니다. 43세(1578) 세모(歲暮: 한해가 저물어가는 연말)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저는 문득 친우 성혼이 보고 싶어 소를 타고 눈길을 뚫고 찾아가 밤을 새워 정담을 나누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읊은 시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 해는 저물고 눈은 산에 가득한데, 歲云暮矣雪滿山,
들길은 가느다랗게 숲 속으로 갈라졌네. 野逕細分喬林間.
소를 타고 어깨 으스대며 어디로 가나, 騎牛聳肩向何之,
우계 냇가 아름다운 사람 그리워서라네. 我懷美人牛溪灣.

강민우: 율곡선생과 성혼 사이에 얽힌 일화도 많이 전해진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언젠가 둘이서 화석정(花石亭) 아래 임진강에서 작은 배를 타고 뱃놀이를 했는데,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 위험한 상황을 만났습니다. 제가 뱃머리에서 태연스럽게 시를 읊조리자, 성혼이 놀란 목소리로 “어찌 변고에 대처하려 들지 않느냐”라고 따졌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우리 두 사람이 어찌 물에 빠져 죽을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尹宣擧, 「魯西記聞」)

강민우: 성혼이 언제나 조심하고 근신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율곡선생은 천명(天命)에 대한 확신 속에 대범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차이는 정철의 생일잔치 때도 보입니다. 성혼과 함께 정철의 생일잔치에 갔는데, 기생들이 그 자리에 와 있었습니다. 성혼은 기생이 있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머뭇거리자, 율곡선생이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하나의 도리라네.”(「牛溪言行錄」)라고 하고, 태연하게 나아가 자리에 앉았다는 일화입니다. 여기서도 성혼의 조심하고 삼가는 자세와 율곡선생의 거리낌 없는 대범한 자세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율곡: 성혼은 저의 천재성이 독서 역량으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무릇 책을 볼 때에 남과 담소하면서 대강대강 마치 폭풍우처럼 빨리 보아 넘기지만, 이미 그 대의(大義)를 터득하여 그 뒤에 다시 차분히 살펴보더라도 새롭게 더 진취되는 것이 없다.”(成渾, 牛溪文集)라고 하며, 저의 타고난 민첩함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언젠가 율곡선생이 성혼에게 독서할 때에 몇 줄을 한꺼번에 보아 내려가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지요. 이때 성혼은 7-8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간다고 대답하자, 율곡선생은 “자신은 10여 줄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을 뿐이다.”(成渾, 牛溪言行錄)라고 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은 한꺼번에 두 줄도 읽을 수 없는데, 7-8줄을 읽는 것도 대단하지만 10여 줄을 읽어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성혼이 율곡선생을 찾아갔는데 시경(詩經)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올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물었더니, 율곡선생은 사서(四書)를 각각 아홉 번씩 읽고, 시경을 읽고 있다고 말했다 합니다. 성혼이 이 말을 듣고 “나는 집수리 하느라, 집안 일하느라, 손님 접대 하느라, 1년 내내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데도 도리어 성취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물러나면서 전진하기를 도모하는 격이다.”(成渾, 牛溪日記)라고 자신을 반성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율곡선생의 학문 역량이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율곡: 그저 매일매일 성인이 되기 위해 성현의 글을 열심히 익혔을 뿐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성혼은 선생님과의 30년 우정을 돌아보며 “평소에는 율곡이 병 많은 나(성혼)의 건강을 걱정해 주었는데, 거꾸로 나는 살아남고 율곡이 먼저 죽었다”라며 애통해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혼은 율곡선생과의 교유과정을 돌아보면서 “늘그막에 와서 마음이 서로 부합하고 정이 더욱 깊어졌으며, 만약 율곡이 없었다면 내가 자립하지 못하였을 것이 분명하다.”(成渾, 「祭文」)라며, 율곡선생이 자신의 학문적 성장과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진솔하게 밝혔다고 합니다. 성혼은 율곡선생을 벗으로서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가슴속에 스승으로 모시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곡: 저 역시 성혼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혼과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가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강민우: 성혼은 율곡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율곡선생이 자신을 깨우쳐주었던 스승임을 새삼 깨닫고, 뒤늦게 율곡선생의 기일(忌日)이 되면 먼저 죽은 벗을 위해 소복을 입는 예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성혼은 율곡선생의 서자 중의 첫째 아들인 이경임(李景臨)에게 “율곡은 참으로 5백년 사이에는 흔치 않는 걸출한 인물이었다. 내가 젊어서는 친구라 생각했는데, 늙어서 생각해보니 참으로 나의 스승이었다. 기일(忌日: 제삿날)에 소복을 입는 일을 예전에는 하지 않았는데, 지금 시작했다.”(「연보초고)라고 말했다 합니다. 성혼이 율곡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율곡: 제가 성혼과 벗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을 뵙게 되었는데, 25세(1560) 때 파주에서 68세의 그 분을 찾아뵙고 시를 지어 올렸던 일이 있습니다. 성수침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은거하던 선비입니다. 저는 가장 가까운 친구의 아버님이기도 한 성수침을 몹시 존경했습니다. 제가 29세(1564) 때 성수침이 돌아가시자, 빈소에 찾아가 애도하는 마음으로 올린 시가 있습니다.

산악의 정기 길러낸 큰 인물 당당하여, 嶽精偏毓碩人頎,
이에 온 유림의 본보기 되셨네. 坐使儒林仰羽儀.
평생 장부의 눈물 다 쏟으니, 滴盡平生壯夫淚,
이 자리 아니면 누구를 위해 통곡하리. 非斯爲慟爲伊誰. (「哭聽松成先生」)

강민우: 그래서 선생님은 성수침을 위해 제문(祭文)을 짓고 또 뒤에 행장(行狀)을 지었던 것이군요.

율곡: 저는 행장에서 성수침의 학문에 대해 “자신을 반성하는데 힘썼고 일찍이 남에게 함부로 말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도(道)란 큰 길과 같고 성현의 가르침은 해나 별처럼 환하게 비추니,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 말만 하는 학문은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하였다.(「聽松成先生行狀」)”라고 하여, 그분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의 성격을 강조했습니다.

과거시험마다 장원하다

 

(5) 과거시험마다 장원하다

강민우: 율곡선생을 떠올리면 가정 먼저 생각나는 것이 구도장원(九度壯元)입니다. 율곡선생은 어떻게 시험을 볼 때마다 장원할 수 있는지 정말 부럽습니다.

율곡: 저는 13세 때 소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21세 때(1556) 다시 소과 초시인 한성시(漢城試)에서 책문(策文)으로 시험을 보았을 때 장원으로 뽑혔습니다. ‘진사시’는 조선시대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실시하는 과거입니다. 이것을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부릅니다. ‘한성시’는 한성부(漢城府)에서 실시하는 시험으로, 선비들이 처음으로 응시하는 과거의 첫 관문입니다. ‘한성시’ 역시 ‘진사시’와 마찬가지로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강민우: 이때부터 선생님의 천재적 재능이 과거시험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군요.

율곡: 23세(1558) 때 예안으로 퇴계선생을 찾아뵙고 강릉 외가에 갔다가 돌아와, 그해 겨울 별시(別試)에 또 장원으로 뽑혔습니다. ‘별시’는 정규 과거 외에 임시로 시행된 과거시험인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인재의 등용이 필요한 경우에 실시합니다. 이때 답안으로 제출했던 것이 「천도책(天道策)」입니다.

강민우: 이때 제출한 「천도책」에 관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정사룡(鄭士龍)․양응정(梁應鼎) 등은 율곡선생의 글을 읽고 나서 “우리는 며칠 동안 고민해서 이러한 시험문제를 낼 수 있었는데, 율곡은 짧은 시간에 쓴 대책(對策: 어떤 일에 대처할 방책)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천재이다.”(「연보」)라고 감탄하였다죠.

율곡: 그런 일이 있었군요.

강민우: 「천도책」에 관한 또 다른 일화도 전해집니다. 뒷날 율곡선생이 47세(1582) 때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종1품)에 올랐으며, 그해 10월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원접사(遠接使)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의주(義州) 압록강변에서 황홍헌(黃洪憲)․왕경민(王敬民) 등의 사신을 맞이하였을 때, 명나라 사신이 율곡선생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천도책」을 지은 분인가”(「연보」)라고 물었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소과시험의 답안으로 작성한 율곡선생의 「천도책」이 명나라에도 알려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천도책」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요.

율곡: 「천도책」에서는 자연현상으로서 해와 달의 운행, 일식과 월식의 현상, 바람․구름․안개․우레․벼락․서리․이슬․비․우박의 현상 등을 물었습니다. 또한 세상사의 온갖 현상에서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하늘의 기운이 어그러졌기 때문인지 사람의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인지를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고, 별이 제자리를 잃지 않으며, 우레와 벼락이 치지 않고,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않으며, 눈이 너무 많이 내리지 않고, 풍해와 수해가 없이 천지가 안정되어 만물이 생육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강민우: 홍수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한 대책을 물었던 것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이 책문에 대한 대책으로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온갖 조화의 근본은 오직 음양뿐입니다. 활동하는 것은 양이 되고, 고요한 것은 음이 됩니다. 한번 활동하고 한번 고요한 것은 기(氣)이고, 활동하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리(理)입니다.”

강민우: 모든 자연현상을 음양의 기와 기를 주재하는 리의 작용으로 해석하셨군요. 이것은 결국 세상사의 온갖 현상을 리(이치)와 기(형체)의 두 범주로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기론에 따른 것이군요.

율곡: 결국 음양이 조화로우면 자연현상은 모두 절도를 잃지 않아 만물이 생육하지만, 음양이 조화롭지 못하면 자연현상이 절도를 잃어서 풍해․수해․우레․벼락과 같은 괴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저는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니, 사람이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하다”라고 하여, 자연의 운행질서에 인간의 도덕성을 끌어들였습니다. 이때 자연의 질서를 천도(天道)라고 부르고, 인간의 도리(도덕성)를 인도(人道)라 부르기도 합니다.

강민우: 여기에서 인간 도덕성을 천도의 질서에 근거지어 설명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옛 역사의 기록에 근거하면, “재앙과 변괴는 태평성대와 같은 치세(治世)에는 나타나지 않고, 일식과 월식의 이변은 다 말세(末世)의 쇠퇴한 정치에서 나왔습니다. 이로써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서로 합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임금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사방을 바르게 하여야 하니, 사방이 바르면 천지의 기운도 바릅니다.”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는 것이 모두 어찌 임금 한 사람이 덕을 닦는데 달려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강민우: 임금이 덕을 닦아야 세상을 바르게 다스릴 뿐만 아니라, 자연질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강민우: 소과(小科)에서 시험관이었던 유홍(俞泓)이 율곡선생을 장원으로 뽑으려 하자, 시험관 가운데 어떤 사람이 젊어서 불교의 선(禪)을 배운 것을 문제 삼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율곡: 이때 유홍은 “학문에 처음 나아갔을 때의 과오는 정자(程子: 정호․정이)․주자(朱子: 주희)도 면치 못한 것이다. 이제 그는 이미 바른 길로 돌아왔는데, 또 무엇을 허물하랴.”라고 하면서 저를 적극 변호하여 결국 장원으로 결정될 수 있었습니다.(張維, 「谿谷集) 그해 8월에는 명경과(明經科) 곧 대과(大科)에도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郎: 정6품)의 벼슬을 제수받았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전후 과거시험에 모두 아홉 번 장원을 하셨죠. 합격자를 발표하던 날에 거리에 놀던 아이들은 율곡선생이 타고 가는 말을 둘러싸고 ‘아홉 번 장원한 분(九度壯元公)’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확실히 선생님의 천재성은 가장 먼저 과거시험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 제가 대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자, 명종(明宗) 임금께서 저를 대궐로 불러서 「석갈등룡문(釋褐登龍門)」이라는 제목으로 30운(韻)의 시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시를 지어 올렸고, 임금은 크게 칭찬하고서 후하게 상을 내려주셨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의 뛰어난 재주의 명성이 임금에게까지 소문이 났던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몇 구절 소개해주세요.

율곡: 원래 60행의 장시(長詩)인데,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관록 구함이 어찌 잘 먹고 살자는 것이랴, 干祿豈懷求餔啜,
미약한 재주나마 임금님 보필하기 바람일세. 補天深願效埃涓.
깊은 계곡에 임한 듯 조심하고, 競競怳若臨深谷,
큰 냇물 건너듯 두려워해야지. 戰戰茫如涉大川.
(…) (…)
비와 이슬의 혜택 빈궁한 민가 널리 적시고, 雨露普霑圭蓽戶,
광명은 화려한 자리만 비추지는 말아야 하며, 光明莫照綺羅筵,
제왕의 사업 한없는 백성 사랑이 가장 중하고, 盈成最是無疆恤,
임금의 큰 덕 중단 없이 하늘을 따라야 하네. 廣運宜追不息乾.
(…) (…)
거리마다 임금님 덕 노래하길 원하노니, 願效康衢歌帝則,
태평성대 노래 소리 어찌 큰 문장 기다리랴. 頌聲奚待筆如椽. (「釋褐登龍門」)

강민우: 이 시에서 선생님은 자신이 벼슬에 나아간 뜻이 자기 한 몸의 부귀영화에 있지 않고 임금을 보필하여 치도(治道)를 실현하는데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벼슬에 임하는 자세로서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다짐하는 결의를 보여줍니다.

율곡: 그렇습니다. 임금의 은택이 가난한 백성에까지 두루 미치고 고귀한 신분에만 비추지 않아야 하며, 또한 임금의 일은 백성들을 끝없이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태평성대를 이루면 거리마다 임금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 소리가 울려 퍼져 고묘한 문장으로 글을 짓는 일이 필요 없는, 즉 아름답게 꾸며내는 말이 필요 없게 됩니다. 이 시에서 저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 신하의 도리와 임금의 도리, 특히 임금의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일찍부터 높은 벼슬에 올랐음에도 가정은 매우 곤궁했다고 들었습니다. 율곡선생이 부제학(副提學: 정3품)으로서 파평(坡平)에 물러나 쉬고 있을 때, 최황(崔滉)이 지나는 길에 그를 찾아뵙던 일이 있습니다. 밥상을 받았는데 반찬이 너무도 초라하여 최황은 젓가락을 대지 못하고서 “어떻게 이런 곤궁한 생활을 참아내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율곡선생은 “느지감치 먹으면 맛없는 줄을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崔濬, 「滄浪寓言」)

율곡: 저는 그저 제 분수에 맞는 생활했을 뿐입니다. 옛날 성인들은 한결같이 빈곤한 가운데서도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편안하게 도를 즐기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았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돌아가신 다음에 보니 집안에 남아있는 재물이 없어 염습(斂襲: 시신을 씻기도 수의를 입히는 일)을 위한 의복은 친구들의 부조를 받아서 마련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서울에 머물 때에도 언제나 남의 집을 세내어 살았으므로 처자가 의탁할 곳이 없어 제자들과 친구들이 비용을 내어 집을 사서 살게 하였다고 합니다.(「연보」) 율곡선생이 평생 얼마나 청렴하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율곡선생은 가정생활이 매우 곤궁함에도 그 곤궁함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니, 그야말로 ‘안빈낙도’의 생활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율곡: 과찬이십니다.

강민우: 임금이 부의(賻儀: 조의금)를 특별히 후하게 내려주셨고, 원근의 선비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으며, 발인하던 날에는 송별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그 곡소리가 하늘에 진동하였다고 합니다.(「연보」) 3월 20일에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 기슭 부모님 묘소 가까운 자리에 장사지냈습니다. 율곡선생 사후 40년이 되던 해(1623)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이듬해에는 문성(文成)의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사방에서 율곡선생을 문묘(文廟)에 배향하도록 청원해왔는데, 숙종 7년(1681)에 문묘배향이 허락되어 이듬해부터 성균관과 전국 향교의 문묘에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당쟁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숙종 15년(1689)에 율곡선생의 문묘 제향이 철회되었다가, 숙종 20년(1694)에 다시 문묘에 배향되는 변동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율곡: 저는 죽기 전인 48세 한 해 동안 병조판서로서 여진족의 변경침범을 막아내고 이조판서로서 당쟁을 조정하는 인사에 몰두했으나, 그 이듬해 49세(1584) 때 정월 초부터는 일어나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1월 14일 관북(關北) 순무어사(巡撫御史)의 명을 받고 나가는 친우 서익(徐益)을 위해 방책을 알려주고자 병이 위중하다고 자제들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는 국가의 시급한 일이니, 이 기회를 그냥 놓칠 수 없다”라고 하고, 부축을 받고 앉아서 말하는 방책을 이우(李瑀)에게 받아 적게 했습니다. ①임금의 어진 덕을 선양할 것, ②복속한 오랑캐 부족을 안무할 것, ③우리 임금의 위엄을 펼칠 것, ④배반한 오랑캐를 제압할 것, ⑤사신들의 비용을 줄이어 백성들의 힘을 덜어줄 것, ⑥장수들의 재주를 미리 살펴 위급한 일에 대비할 것 등 여섯 조목입니다.(「연보」)

강민우: 이것이 율곡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글이 됩니다. 그 이틀 뒤 1월 16일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종로구 仁寺洞, 寬勳洞 일대) 집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퇴계 이황을 만나다

 

(4) 퇴계 이황을 만나다

강민우: 선생님이 퇴계선생을 찾아갔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무슨 이유로 퇴계선생을 만나셨습니까.

율곡: 목적이 있어서 만난 건 아닙니다. 저는 22세 가을에 성주 목사인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이듬해 23세(1558) 봄에 장인을 찾아뵈러 성주(星州)로 갔다가, 다시 외할머니가 계시는 강릉 외가로 향했습니다. 성주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목에는 안동이 있습니다. 저는 안동을 지나다가 퇴계선생을 뵈러 예안(禮安)을 찾았습니다. 저는 하룻밤 머물고 지나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비가 와서 부득이 이틀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강민우: 이렇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두 거장이 한 자리에 처음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군요.

율곡: 이때 도산서당(陶山書堂)은 아직 낙성되지 않았을 때이니, 아마 계상서당(溪上書堂)으로 찾아갔을 것입니다. 퇴계선생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겪고서, 이듬해 46세(1546)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자신이 태어난 온계(溫溪) 인근에 단칸 서당을 짓고 학문도 하고 제자들도 가르쳤다. 이 온계의 다른 이름이 토계(兔溪)입니다. 이때부터 퇴계선생은 토계의 ‘토’를 물러갈 퇴(退)로 고친 후 자신의 호로 삼습니다. 물러날 ‘퇴’와 시냇물 ‘계’, 즉 ‘시냇가로 물러난다’는 뜻의 ‘퇴계(退溪)’라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제자들이 많아지자 1551년(명종 6)에는 토계 건너편 산기슭에 계상서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고, 계상서당도 좁아지자 1560년(명종 15)에는 지금의 위치에 도산서당을 세운 것입니다. 오늘날 도산서원은 퇴계가 죽고 4년 뒤인 1574년(선조 7)에 퇴계가 세웠던 도산서당을 모체로 그 주변에 건립된 서원입니다.

강민우: 23세의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을 처음 찾아뵙을 때, 퇴계선생은 58세로 당대에 가장 명망 높은 원로 석학이었으며, 율곡선생 역시 일찍부터 천재로 이름을 떨치던 청년이었습니다. 물론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을 일부러 찾아간 것이 아니고 지나가던 길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는지 모르지만, 퇴계선생은 율곡선생의 영민한 재주와 학식에 깊이 감탄하고 무척 반겼다고 들었습니다.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율곡: 이때 퇴계선생은 수양론의 중심내용인 ‘하나에 전념하여 온갖 변화에 대응한다(主一無適, 酬酌萬變)’라는 구절의 뜻을 묻기도 하고, ‘다리 살을 베어 어버이의 병을 치료하는 일’이 중용(中庸)의 도에 맞는지 여부를 묻기도 했습니다.(「연보초고」)

강민우: 수양은 자신을 닦는 것인데, 하나에 전념하는 주일무적(主一無適)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율곡: 조선의 국시는 유교입니다. 조선의 유교는 성리학의 이론체계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유교와 성리학은 동일한 의미로 쓰입니다. 유교라 하면 곧 성리학을 가리킵니다. 성리학은 자신을 닦아서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때 자신을 닦는 것을 ‘수양’이라 하고, 수양에 관한 이론을 ‘수양론’이라 말합니다. 성리학의 수양론이 대표하는 두 축이 바로 격물궁리(格物窮理)와 거경함양(居敬涵養)입니다. ‘격물궁리’는 오늘날 교육에서처럼 외적인 대상을 공부해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거경함양’은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성품(본성)을 보존하고 기르는 것입니다. 이때 ‘거경함양’을 이루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일무적’입니다. 생각을 하나로 모아 딴생각이 나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는데, 이것이 주경(主敬)공부입니다. ‘주경’하면 내 마음 속에 본성을 보존하게 되고, 이때 주경은 거경(居敬)이라고도 부릅니다.

강민우: 그래서 ‘주일무적’이 수양공부의 중심 개념이 되는 것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저는 퇴계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불교에 빠져 금강산에 입산했던 사실까지 솔직히 털어놓고, 지금은 지난날의 잘못에서 벗어나 유학의 가르침으로 돌아왔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퇴계선생에게 학문의 방향을 묻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퇴계선생이 율곡선생을 보고 너무 좋아하자, 곁에 있던 제자들이 시샘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율곡선생이 떠난 뒤에, 어떤 제자가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에게 올렸던 시를 가리키며 “그 사람이 이 시보다 못합니다”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퇴계선생은 그 자리에서 “아니다, 그 시가 그 사람만 못하다”라고 하여, 율곡선생의 재주와 인물에 대해 깊은 사랑과 기대를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퇴계선생은 율곡선생이 떠난 뒤에, 제자 조목(趙穆)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율곡이 찾아왔는데, 그 사람됨이 시원스럽고 지식이 많으며, 또 우리 학문(성리학)에 뜻이 있으니 ‘후배가 두려워할 만하다(後生可畏)’는 옛 성인(공자)의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구려.”라고 하여, 율곡선생의 명석하고 해박한 학식과 민첩한 문장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율곡: 퇴계선생께서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하셨군요.

강민우: ‘후배가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율곡: 이 글은 논어「자한(子罕)」편에서 공자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젊은 후배들은 나이가 젊고 의지가 강하므로 학문을 계속 쌓고 덕을 닦으면, 선배들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먼저 태어나서 지식과 덕망이 나중에 태어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선생(先生)이고, 자기보다 뒤에 태어난 사람, 즉 후배에 해당하는 사람이 후생(後生)입니다. 그런데 이 ‘후생’은 장래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히 두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후생가외(後生可畏), 즉 뒤에 태어난 사람인 후배들에게 무한한 기대를 걸고 한 말입니다. 공자가 ‘후생가외’라고 한 것은 그의 제자 중 특히 재주와 덕을 갖추고 학문이 뛰어난 안회(顔回)의 훌륭함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강민우: 퇴계선생은 율곡선생의 훌륭함을 공자가 안회의 학문과 재주를 칭찬한 것에 비유하셨던 것이군요.

율곡: 과찬이십니다. 저는 강릉으로 돌아간 뒤 그 해에, 퇴계선생께 두 차례 편지를 보내면서 대학(大學)의 해석에 관해 질문했으며, 퇴계선생도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이때 제가 보낸 편지는 전해지지 않고, 다만 퇴계선생이 보낸 답장과 함께 두 편의 시가 전해집니다. 퇴계선생은 저의 재주를 무척이나 아끼고 큰 기대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강민우: 또한 율곡선생은 퇴계선생께 편지를 올려 자신의 출처(出處)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특히 퇴계선생의 대표적 저술인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여 토론을 벌이기도 하셨죠.

율곡: 성합십도는 1568년 68세의 퇴계선생이 17세의 어린 임금 선조에게 성왕(聖王: 훌륭한 임금)이 되는 학문과 수양의 핵심과 요령을 간명하게 정리하여 올렸던 작은 책자입니다. 이 책자는 10개의 그림과 해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①주돈이의 「태극도설」에 근거한 「태극도(太極圖)」, ②장재의 「서명」에 근거한 「서명도(西銘圖)」, ③주희의 소학에 근거한 「소학도(小學圖)」, ④대학에 근거한 「대학도(大學圖)」, ⑤주희의 백록동서원의 규약에 근거한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⑥정복심(程復心)의 「심통성정도」를 수정․보완한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⑦공자의 인에 근거한 「인설도(仁說圖)」, ⑧정복심의 심학도에 근거한 「심학도(心學圖)」, ⑨주희의 「경재잠」에 근거한 「경재잠도(敬齋箴圖)」, ⑩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에 근거한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입니다. 퇴계선생은 원래 「심학도」 뒤에 「인설도」를 두었는데, 제가 그 순서가 바뀌었다고 지적하자, 저의 견해를 받아들여 성학십도의 배열 순서를 수정하였습니다.

강민우: 결국 율곡선생의 지적에 따라 지금의 성학십도의 배열순서가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율곡: 퇴계선생께서 저를 칭찬만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옛 유학자의 견해에 일일이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비판하자, 퇴계선생은 “그대가 전후에 논변하는 것을 보면, 번번이 옛 유학자의 이론을 파악할 때에 반드시 옳지 않은 점을 찾아서 배척하는데 힘쓰고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게 한 다음에 그친다.”(「答李叔獻」)라고 하면서 저의 주장이 비판에 치우쳐 있음을 꾸짖어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바로 이 점에서 저는 율곡선생과 퇴계선생의 학문방법과 태도의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논리적 정당성을 찾아 끝까지 비판적 분석을 추구해가는 율곡선생의 합리적 학문자세와, 다각적으로 이해를 추구하여 진실한 의미를 찾아내고 인격적 실현을 추구해가는 퇴계선생의 실천적 학문자세로 구별됩니다.

율곡: 퇴계선생이 보여준 학문적 관심의 초점이 수양론에 있다면, 저는 주로 경세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성리설에서도 퇴계선생은 리(理: 이치)와 기(氣: 형체)가 서로 섞일 수 없음을 강조하는 이원론(二元論)의 경향을 보인 반면, 율곡선생은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는 일원론(一元論)의 경향을 보입니다. 이것은 이후 조선시대 성리학 논쟁의 두 축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퇴계선생이 선비들이 집권세력에 의해 탄압을 받는 사화(士禍)시대를 살았다면, 율곡선생은 선비들이 정권을 주도하는 사림정치(士林政治)시대를 살았던 시대배경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그 시대에 대응하는 논리가 달라질 수 있고, 바로 이 점에서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의 철학이 달라지는 차이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의 성리설이 보여주는 두 철학적 관점에서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당파적 관심에서 벗어나서, 사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야로서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의 철학을 함께 받아들이고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듯합니다.

율곡: 퇴계선생은 저보다 35세 연상으로 한 세대나 차이가 납니다. 퇴계선생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머무를 때마다, 저는 여러 번 퇴계선생을 찾아가 만났고, 또 자주 편지 왕래도 하면서 학문적이나 인간적으로 깊은 교류를 했습니다.

강민우: 그래서 퇴계선생의 제자들 명단을 수록한 도산계문록(陶山溪門錄)에는 율곡선생을 퇴계선생 제자의 한 사람으로 등록하고 있군요. 그러나 율곡선생을 퇴계선생의 제자로 볼 것인지 아닌지는 매우 애매합니다. 직접 책을 들고 가서 배운 일이 없으니, 집지(執贄)의 제자라 할 수는 없습니다. ‘집지’는 예전에 제자가 스승을 처음 찾아뵐 때에 선물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던 일을 말합니다. 이때의 선물을 예폐(禮幣)라고 부릅니다.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을 존경하여 만나거나 편지로 문답을 하였으니, 비록 제자라 보기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율곡: 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을 따르는 종유(從遊)라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퇴계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제문(祭文)을 짓기도 했습니다. “소자(율곡)가 학문의 길을 잃고 방황하기를 마치 사나운 말이 가시밭과 황무지로 마구 달리듯 했는데, 이때 수레를 돌리고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공(公: 퇴계)께서 인도해주신 덕분입니다.”(「祭退溪李先生文)」) 저는 퇴계선생에게 받은 학문적 은공을 잊을 수 없으며,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고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을 스승으로 따르고 존경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자와 종유(從遊)의 중간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율곡: 저는 35세(1570) 12월에 퇴계선생의 부고(訃告: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글)를 받고, 스승을 위한 심상(心喪)을 행하고, 또한 동생 이우(李瑀)를 시켜 제문을 가지고 가서 문상하게 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挽詩)에서 간절한 그리움과 슬픔을 표현하셨죠. ‘만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 지은 시를 말합니다. 어떤 내용이셨죠.

율곡: 기억나는 부분을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범이 떠나고 용도 사라져 사람 일 변했건만 虎逝龍亡人事變,
물결 돌리고 길 열으신 저서가 새롭구나. 瀾回路闢簡編新.
남쪽 하늘 아득히 저승과 이승이 갈리니 南天渺渺幽明隔,
서해 물가에서 눈물 아르고 창자 끊어지네. 涙盡腸摧西海濱. (「哭退溪先生」)

스물다섯 해 동안, 二十五年間,
미혹의 꿈속에 빠져 취했었네. 沈迷夢中醉.
어제의 잘못 되돌아보니 追思昨者非,
놀랍고 두렵기만 하구나. 令人發驚悸.
나 이제 단호히 맹세하노니, 我今痛自誓,
하느님께서 응당 듣고 보시리라. 昊天應聽視. (「至夜書懷」)

강민우: 율곡선생께서 퇴계선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토록 간절한 줄을 몰랐습니다. 퇴계선생과의 만남은 이정도로 하고, 선생님의 과거시험 장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율곡의 천재성

 

(3) 율곡의 천재성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49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정확하게 계산해보면 47년하고 21일간의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밝은 빛은 오래가기 어려운 것처럼, 천재적 자질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선생님의 천재적 자질은 3살 때 말을 배우면서 곧바로 글을 읽을 줄 알았다는 등 여러 일화가 전해집니다.

율곡: 저는 강릉 외가에서 태어난 이후, 여섯 살(1541)에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하다 강릉에 내려가면, 외할머니께서 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3살 때 말을 배우면서 곧장 글을 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살 때 인근의 스승에게 나아가 간략하게 기술한 역사책인 사략(史略)을 배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스승을 찾아가 글을 배우기도 하였으나, 주로 어머니한테서 글을 배웠습니다.

강민우: 일찍부터 천재성이 드러나 별달리 애쓰지 않고도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7세 때는 유학의 기본 경전인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대학(大學) 등을 비롯한 여러 경전과 역사서 등에 통달했다죠.

율곡: 저는 어려서부터 책읽기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책 속에 들어있는 성현의 말씀이 저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선대의 고향인 파주 율곡촌 인근 임진강 강변 언덕 위에는 저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이 세운 정자로 화석정(花石亭)이 있습니다. 저는 화석정의 풍경을 좋아하여 즐겨 찾았으며, 그때 제가 손수 심은 노송나무 아홉 그루가 있었는데, 뒷날 모두 베어졌다고 합니다.(金平默, 重菴集, ‘花石亭, 次栗谷先生韻)

강민우: 8세 때의 가을에 화석정에 올라 시를 한 수 짓기도 하셨습니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율곡: 그때를 회상하며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은 어느 덧 저무는데, 林亭秋已晚,
시인의 상념은 끝없이 일어나누나. 騷客意無窮.
멀리 흐르는 물 하늘에 닿아 푸르고, 遠水連天碧,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 향해 붉었네. 霜楓向日紅.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山吐孤輪月,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네. 江含萬里風.
변방의 기러기 어디로 가는지, 塞鴻何處去,
저무는 구름 속에서 울음소리 끊어지네. 聲斷暮雲中. (「花石亭」)

강민우: 제자인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율곡선생의 「행장」에는 “일찍이 화석정에 올라가 시를 지었는데, 그 격조가 높아 시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능히 따를 수 없었다”라는 시평을 남겼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유명세를 탔는지 짐작이 갑니다.

율곡: 과찬이십니다.

강민우: 17세기에 활동한 이식(李植)이라는 학자도 율곡선생님의 학문과 문장에서 보인 천재적 조숙함에 대해 “나면서부터 신비롭게 큰 뜻을 가졌으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7세에 이미 경서에 통하고 글을 지었으며, 문장이 성숙하여 일찍이 이름이 사방에 알려졌다.”(李植, 「澤堂雜槀」)라고 평가했습니다. 한 마디로, 선생님의 소년시절 행적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 천재적 자질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무 일찍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것이 오히려 일찍 돌아가게 된 사실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율곡: 저는 19세에 금강산에서 나와 강릉 외가에서 한 해를 보냈습니다. 이듬해 21세(1556) 봄에 서울로 돌아와 소과(小科) 과거시험인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여 책문(策文)을 시험보았는데 장원으로 뽑혔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하면서 벼슬에 나아갈 뜻을 가졌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이 보셨던 과거시험은 오늘날 공무원 시험에 해당되는 듯합니다. 공무원은 주로 국가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역할을 합니다. 과거시험에서 율곡선생님은 ‘책문’이라는 주제에서 최고의 답안을 작성하셨습니다. 책문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요. 오늘날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율곡: 조선시대의 과거는 임금이 국정운영을 위해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는 중요한 시험입니다. 과거시험은 여러 단계로 진행되는데, 시험의 최종 단계인 전시(殿試)에서는 임금이 직접 등용될 인재들에게 당시의 현안들을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묻는 시험을 치룹니다. 이때 제시된 현안은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이 시험에서 예비 선발자들은 현안 해결을 위한 다양한 대책들을 글로 쓰는데, 이 글을 책문(策文)이라 합니다.

강민우: 책문은 임금에게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학식을 바탕으로 당시의 시대적 현안에 대한 소신과 포부를 마음껏 펼치는 토론의 장이 되겠군요. 책문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까.

율곡: 책문은 임금이 제시한 제목에 대답하는 글이기 때문에 일정한 형식에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臣對)”라는 말로 시작하며, “보잘것없는 말들이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말씀드립니다”와 같은 식의 겸사를 쓰며, “신이 삼가 대답합니다(臣謹對)”라는 예를 갖춘 말로 마무리합니다. 또한 책문을 작성할 때는 반드시 사서(四書)․오경(五經)과 같은 유교 경전과 역사서에 근거하여 대답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헌들을 인용하여 이상적인 사회는 어떠해야 하며, 임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립니다.

강민우: 선생님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마치고, 당시 최고의 유학자인 퇴계선생과의 만남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랑

 

(2)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랑

율곡: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어머니는 제가 있어 특별합니다.

강민우: 제가 본 책에 의하면, 율곡선생님께서는 아버지의 영향을 찾아보기가 다소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와 달리, 어머니와 외할머니(외조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흔적이 무척 깊어 보입니다. 특히 어머니 사임당은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여성으로는 매우 드물게 학식이 깊고 시와 그림과 자수의 예능에도 두루 뛰어났던 인물인 듯합니다.

율곡: 어머니의 행적은 「선비행장(先妣行狀: 돌아가신 어머니 행장)」에 매우 자세히 기록해두었습니다.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1504~1551)은 외할아버지 신명화(申命和)와 외할머니 용인 이씨(龍仁李氏) 사이의 다섯 딸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로부터 경전을 배웠습니다. 시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으며, 바느질과 자수까지 섬세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림에 뛰어났습니다. 7세 때에 조선 초기 산수화에 뛰어난 안견(安堅)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山水圖)를 그린 것이 아주 훌륭합니다. 특히 포도를 그린 것은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강민우: 그래서 아버지 이원수께서도 찾아온 친구들에게 아내 사임당의 그림을 자랑하기도 하였다죠. 그리고 풀벌레, 화초, 대나무, 매화, 난초, 산수 등 정밀한 관찰과 섬세한 솜씨의 그림들이 지금까지 칭송을 받으며 40여 폭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율곡: 어머니는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스러우며, 말 수가 적고 거동이 조용하며, 일처리도 자상하였습니다.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다섯 딸 가운데도 둘째 딸 사임당을 특히 사랑하였나 봅니다. 그래서 외할아버지는 사임당이 19세에 시집을 가게 되자, 사위 이원수에게 “내가 딸이 많으나 다른 딸은 시집을 가도 서운하지 않지만, 그대의 아내만은 내 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네”라고 하며, 출가 후에도 친정에 붙들어 두고 싶어했습니다.

강민우: 외할아버지께서 둘째 딸 사임당에게 큰 애착을 가지셨나 봅니다. 사임당 역시 서울에 올라온 이후 항상 부모님을 그리워하여 눈물을 흘리고, 어떤 때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율곡: 얼마나 부모님을 그리워하였는지 알 수 있는 시 구절이 있습니다.

밤마다 달을 보고 비노니, 夜夜祈向月,
살아계실 제 뵈올 수 있게 하소서. 願得見生前.

강민우: 그래서 사임당은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 친정이 있는 강릉으로 가서 머물기도 했고, 경기도 파주로 내려가 살기도 했습니다. 강릉에 가 있는 동안 율곡선생을 낳으셨고, 율곡선생이 여섯 살 되던 해(1541)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율곡: 어머니 사임당이 강릉으로 친정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외할머니와 울면서 작별하고, 대관령 중턱에서 고향 길을 바라보고 외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었던 시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지금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늙으신 어머님 고향에 두고, 慈親鶴髮在臨瀛,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身向長安獨去情,
돌아보니 북촌(北坪村)은 아득한데, 回首北村時一望,
흰 구름이 날아 내리는 저녁 산만 푸르네. 白雲飛下暮山靑.

강민우: 율곡선생은 외가에서 태어나 6살 때까지 외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며, 장성한 이후에도 외가에 자주 출입하였던 것이죠.

율곡: 저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龍仁李氏, 1480~1569)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외할머니의 행적을 기록한 행장을 남겼습니다. 외할머니는 성품이 온화하고 유순하며 마음가짐이 순수하고 차분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자, 외할머니는 손가락을 잘라 함께 죽기를 하늘에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꿈에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나 ‘곧 나을 것이다’고 알려주었고, 곁에서 병간호를 하던 둘째딸인 사임당도 하늘에서 ‘신령스러운 약(靈藥)’을 내려주는 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강민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께서는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그 이듬 해 서울서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강릉에 계속 사시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딸만 다섯이고 아들이 없어서 둘째딸 사임당의 셋째아들인 율곡선생께서 외조부모의 제사를 맡았던 것이지요.

율곡: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아들이 없이 딸만 다섯이어서 외손인 제가 그들의 제사를 모시는 외손봉사(外孫奉祀)를 지냈습니다.(「外祖妣李氏墓誌銘」) 원래 한 집안의 제사는 적장자(嫡長子: 맏아들)를 중심으로 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 중기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사를 담당하는 봉사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해집니다. 딸의 자손이 지내는 ‘외손봉사’, 죽은 장자의 부인(맏며느리)이 지내는 총부봉사(冢婦奉祀), 아들과 딸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맡아 지내는 윤회봉사(輪回奉祀) 등이 있습니다. 이렇듯 다양하게 존재했던 봉사방식은 17세기 이후 적장자에 의한 가계 계승을 강조하는 종법적(宗法的) 가족질서가 정착되어감에 따라 점차 적장자봉사로 바뀌게 됩니다.

강민우: 외할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상소를 올리고 강릉으로 달려갔다가 파직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율곡: 제가 33세(1568) 때 이조 정랑(吏曹正郎)에 제수되고 나서, 외할머니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 저는 외할머니의 사랑과 길러준 은혜를 생각하면서 곧장 사직 상소를 올리고 강릉으로 달려가 외할머니를 보살피며 간병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날 언론기관에 해당하는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외할머니를 위해 사직한다는 조항이 법전에 없는데, 마음대로 직무를 버렸다는 이유로 임금에게 파직을 요청했습니다. 선조임금은 “아무리 외할머니라 하더라도 인정의 도리가 간절하면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효행의 일로 파직시킨다는 것은 너무 과한듯하다”라고 하여, 파직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연보」)

강민우: 이듬해(1569)에도 외할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겠다는 상소를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임금은 “조정에 있더라도 오가면서 돌봐드릴 수 있다”라고 하자, 오늘날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이조(吏曹)에서는 “외할머니를 찾아뵙는 일은 비록 법전에 있는 규정은 아니지만, 특별히 다녀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허락하였다죠. 이것은 모두 율곡선생님의 외할머니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공경심이 임금도 감동시켰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율곡: 제가 외할머니께 받은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효성스러운 덕과 어진 품성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했을 때의 일화도 들려주세요.

율곡: 제가 5살 때 어머니의 병이 위독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온 집안이 경황이 없어 허둥지둥할 때, 저는 몰래 외할아버지의 사당에 들어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식구들이 저를 찾아다니느라 몹시 애를 먹었던 모양입니다. 뒤늦게 사당에서 발견하고서는 어린아이답지 않는 행동에 놀라워하면서 저를 끌어안고 돌아왔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年譜」) 그때 저는 조상의 신령에게 기도하는 옛 사람의 행적을 글에서 보았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였던 것입니다.

강민우: 11세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자, 팔을 찔러 피를 내어 마시게 하는 효행을 실천하기도 했다지요. 그때 사당에 들어가서 조상님께 “저는 나이가 젊고 재주도 많으니 능히 귀신을 섬길 수 있거니와, 아버지는 나이가 늙어서 저의 재주 많은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여, 아버지 대신에 죽기를 빌었다죠.(「연보초고」) 또한 율곡선생이 사당에서 아버지 대신 죽기를 빌었던 다음날, 아버지가 살아나서 “꿈에 백발노인이 이 아이(율곡)를 가리키며 ‘이는 우리나라의 큰 선비이니, 그 이름은 옥(玉) 가에 귀(耳)를 붙인 글자다’라고 말했다”라고 전해집니다.(「연보초고」) 원래 율곡선생의 어릴 적 이름은 현룡(見龍)이었는데, 이때부터 이름을 이(珥)로 지었다고 합니다. 지극한 효성에 신명의 응답이 있었다는 설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율곡: 16세(1551) 때 어머니 사임당이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상중에 있는 동안, 상례와 제사의 절차는 당시 사대부 집안의 예법과 의례를 규정해 놓은 책인 가례(家禮)(또는 주자가례)에 따랐습니다. 탈상할 때까지 여묘살이를 하고 이듬 해 여름에 탈상했지만, 심상(心喪)을 더하여 18세 때 가을에 삼년상을 마쳤습니다.

강민우: 이때 몸소 제수(祭需: 제사상 차림)를 장만했으며, 제기(祭器: 제사 때 쓰는 그릇)를 닦고 씻는 일도 하인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했다지요. 이것은 모두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라 여겨집니다. ‘여묘살이’와 ‘심상’은 오늘날에 잘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만.

율곡: 여묘(廬墓)는 상주가 무덤 근처에 여막(거처하는 초가)을 짓고 3년(만2년)을 거처하며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면서(上食) 모시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것은 ‘시묘살이’라고도 부릅니다. 제가 살던 조선시대에는 국시(國是)인 유교의 이념에 따라 효(孝)를 중시했으므로 돌아가신 부모라도 3년 동안 모셨습니다.

강민우: 3년간 여막에서 거처하면 상주의 건강이 많이 악화될 수 있겠습니다.

율곡: 물론입니다. 시묘살이 중에 심각하게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도 많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묘살이는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예법을 규정한 책인 가례 등에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시묘살이가 사대부 집안에서 유행하였는데, 이것은 예법의 실천이 아니라 유교적 전통관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심상(心喪)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율곡: ‘심상’은 상복(喪服)은 입지 않지만 상중 때와 같은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을 말합니다. 보통 스승의 상에는 상복을 입지는 않지만, 3년 동안 마음속에 애도의 뜻을 지니는 심상을 행합니다. 심지어 3년간 스승의 묘를 돌보기도 합니다.

강민우: 오늘날의 장례문화와는 너무 다릅니다. 지금은 3년이 아니라 3일이면 장례가 끝납니다. 또한 무덤 근처에서 3년간 부모를 모시는 시묘살이는 더더욱 볼 수 없습니다. 요즘은 무덤을 쓰는 것보다 화장해서 추모공원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율곡: 그렇군요. 저의 때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강민우: 1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이듬해 여름에 탈상을 하고 심상을 더하여 18세 때 가을에 삼년상을 마쳤다고 하셨는데, 어째서 3년 후에 탈상을 하지 않은 것입니까.

율곡: 원래는 아버지든 어머니든 부모의 상에는 3년상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지금처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에는 어머니를 위하여 기년상(期年喪: 만1년상)을 합니다. 이것은 어머니를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다만 아버지를 존엄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존엄한 것이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는 존엄함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살아계셨기 때문에 1년만에 탈상하였던 것입니다.

강민우: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하여 심상을 더하였던 것입니까?

율곡: 그렇습니다. 26세(1561) 5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했습니다. 이때도 당시의 예법인 가례(家禮)(또는 주자가례)의 절차에 따라 장사지냈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합장하였으며, 28세(1563) 가을에 탈상했습니다. 탈상(脫喪)은 ‘상복을 벗는다’는 뜻으로, 삼년상이 모두 끝나 상복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상을 마치고 나서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였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읊었던 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땅 형세는 무수한 산들 자잘하게 벌여 있고, 地勢千山小,
샘 원류는 수많은 골짜기로 갈라져 흐르네. 泉源萬壑分.
숨어 사는 은자의 아침저녁 일이란, 高人獨昏曉,
한가한 구름 맞았다 보냈다 하는 것 뿐이네. 迎送只閒雲. (「偶興」)

강민우: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빠져 마음 붙일 곳 없이 방황하다가 19세 때에 불도를 닦기 위해 금강산으로 입산하게 되셨군요.

율곡: 18세 때 어느 날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불교서적을 뒤적이다가, 불교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특히 죽은 이의 혼령을 위해 복을 빈다)에 관한 이론에 깊이 감명을 받았습니다.(「율곡행장」) 저는 그동안 유학의 정통이념에서 불교와 도교를 이단(異端)으로 배척하면서 정체성을 확립해왔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인생의 근원적 문제(생사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19세(1554) 3월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1년 동안 불도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1년 만에 다시 하산하여 세속으로 돌아왔습니다.

강민우: 유학자로서 불교에 빠져 입산수도를 하였다는 사실은 후에 율곡선생에게 치명적인 흠이 되기도 하셨죠.

율곡: 그때의 일 때문에 후에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저는 금강산에 있는 동안 산수의 절경을 찾아 유람도 다니고, 불경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만상(萬象)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로 잡고 깊은 사색을 하기도 했습니다. 만상(현상)과 하나(본체)를 넘어서는 진리의 궁극적 근원을 찾고자 하였던 공부였습니다.

강민우: 불교적 사유 안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습니까.

율곡: 불교는 현실의 일상을 벗어나서 초월적 근원(깨달음)을 추구합니다. 때문에 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현상 속에서 본체(진리)를 발견하는 유교의 진리에 주목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불교에서 유교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강민우: 불교에서 율곡선생이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의 실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금강산에서 하산하셨습니다. 결국 입산하여 찾던 불교를 통한 진리의 발견에는 실패하신 것이군요.

율곡: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세 가을에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강릉의 외가로 갔습니다. 이때 외가에서 유교의 경전을 다시 읽으면서 느꼈던 느낌을 한 수의 시로 읊었습니다.

인간세상 어디에 넓은 집 있는가, 何處人間有廣居,
백 년 평생이야 묵어가는 주막이라. 百年身世是蘧盧.
세상바깥 산천을 노닐던 꿈 깨어나자, 初回海外遊山夢,
외로운 등불 아래 옛 책을 펼쳐보네. 一盞靑燈照古書. (「燈下看書」)

강민우: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덧없음을 실감하고 잠시 세상을 벗어나 불교의 세계에 노닐었는데, 이제 세상 바깥을 찾아 헤매던 꿈에서 벗어나서 세상 속으로 돌아와 등불 아래서 옛 경전을 펼쳐놓고 읽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때 자신을 다짐하는 11조목의 지침서로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율곡: 자경문(自警文)은 ‘스스로를 경계하여 조심하는 글’이라는 뜻으로, 제가 세운 인생의 지침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①목표를 크게 가진다. ②말을 적게 한다. ③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④혼자 있을 때에도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한다. ⑤옳고 그름을 알기 위해 독서를 한다. ⑥재물과 명예에 관한 욕심을 경계한다. ⑦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다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단호히 끊는다. ⑧정의롭지 않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가진다. ⑨누군가 나를 해치려고 한다면,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그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⑩밤에 잘 때나 병이든 때가 아니면 절대로 눕지 않는다. ⑪공부를 게을리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공부는 죽은 후에나 끝나는 것이니 급하게 그 효과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20세 때 학문의 길에 나서며, 이와 같은 마음으로 공부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저도 지금 20세인데, 감히 이런 생각에 미치지 못합니다. 많은 결심을 하지만, 결국 작심3일로 끝납니다.

율곡: 무엇보다도 학문의 목표로는 반드시 성인이 되겠다는 포부와 이상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공부하는 방법으로는 게으르거나 조급함이 없어야 하며 죽을 때까지 지속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부모님께서 남겨준 몸을 조금이라도 욕되게 하지 않게 하는 길입니다.

– 이야기로 읽는 율곡철학과 율곡학


율곡 철학 스토리텔링
– 이야기로 읽는 율곡철학과 율곡학

 

강민우: 안녕하십니까. 먼저 저의 소개를 간단히 하겠습니다. 저는 현재 인덕대학교 자동차과 1학년에 재학 중인 강민우입니다. 이번 학기에 교양수업으로 인문학 강의를 수강 신청했습니다. 학교 교수님께서는 한국철학의 여러 인물을 소개해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관심을 가진 분이 바로 율곡선생이십니다.

‘율곡은 어째서 5천원권의 지폐에 실릴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율곡의 어머니인 심사임당은 어째서 5만원권의 지폐에 실릴 수 있었을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슨 큰 일을 하셨기에 5천원권과 5만원권의 지폐에 모자(母子)가 동시에 실릴 수 있을까’ 등. 이런 의문을 가지고 여러 책을 봐나가던 중에, 마침 율곡선생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동안 궁금했던 여러 가지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많은 배움을 얻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율곡: 저도 강민우 학생과 같은 젊은 대학생을 만나 사회․경제․문화․인생 전반에 대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무척 기쁩니다. 무엇이 궁금한지 부담 없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강민우: 먼저 율곡 선생님의 출생과 가족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1) 율곡의 출생과 가족

강민우: 무엇보다 저의 이름은 강민우 하나인데, 율곡선생님의 호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으로 눈에 띕니다.

율곡: 저의 이름은 이(珥)이고, 자는 숙헌(叔獻)이며, 호는 율곡(栗谷)입니다. 율곡 외에도 석담(石潭)․우재(愚齋)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 사임당(師任堂) 사이에 네 아들과 세 딸 가운데 셋째 아들입니다. 오늘날 강릉 북평촌(北坪村) 외가에서 1536년(중종 31) 12월 26일(음력)에 태어났습니다.

강민우: 호칭이 너무 다양합니다. 이름은 알겠는데, 자(字)와 호(號)는 무엇을 말합니까.

율곡: 예기(禮記)라는 책에는 “남자는 20세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자(字)를 짓고, 여자는 혼인을 약속하면 계례(筓禮)를 행하고 자(字)를 짓는다”라고 합니다. 오늘날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를 행하고 ‘자’를 짓는 것은 그 이름을 공경해서입니다. 당시에는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관념이 있어서 어른(성인)이 된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 갖는 이름 외에, 누구나 널리 부를 수 있는 별도의 호칭이 필요하게 되어 자(字)를 지었던 것입니다.

강민우: 자(字)는 성년의식을 통해 성인으로서의 막중한 의무와 책임을 부여한 호칭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름(名)은 임금․부모․스승이 아니면 함부로 부를 수 없는 호칭이며, 자(字)는 선배나 친구가 상대를 존중하여 부르는 호칭이며, 호(號)는 본인이나 친구, 마을 사람 등이 가볍게 이름 대신 또는 ‘자’ 대신 부를 수 있는 호칭입니다. 특히 ‘호’는 선후배간 뿐만 아니라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별명(닉네임) 정도의 가벼운 호칭이라 하겠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18세에 어머니 상을 마치고 성년의식인 관례(冠禮)를 행하여 자(字)를 숙헌(叔獻)이라 받았던 것이죠. 저도 올해 20세로 성년에 해당하는 나이입니다. 성년의식인 관례를 행하는 의미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율곡: 남자가 15세에서 20세 사이인 성년에 이르면 상투를 틀고 갓을 쓰게 하던 의식입니다. 관례를 행하고, 그 때부터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우합니다.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는 의식으로서 계례(筓禮)를 행합니다. 15세 이상이 되어야 예(禮)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건은 부모가 기년(朞年) 이상의 상중이 아니어야 됩니다. 저는 16세 때 어머니의 상이 있었기 때문에 상이 끝나고 관례를 행한 것입니다.

강민우: 숙헌(叔獻)이라는 ‘자’에 얽힌 일화가 전해집니다. 율곡선생의 친구인 이제신(李濟臣)의 「소설(小說)」에는 “군수 이경(李敬)이 젊어서 자를 숙헌이라 했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는 네가 존중할 사람의 자이니 너는 속히 고쳐라’라고 하여, 이경이 자를 숙온(叔溫)으로 고쳤다. 뒷날 같은 해 과거급제자의 명단이 나온 다음에야 숙헌이 율곡의 자임을 알았다고 합니다.”(「연보초고」)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여부를 떠나서 율곡선생이 뒷날 한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인물로 추앙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율곡: 과찬이십니다.

강민우: 어머니 사임당께서 율곡선생을 임신하셨을 때에 태몽을 꾸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내용이십니까.

율곡: 어머니가 꿈에 동해바다에 나갔는데, 한 선녀가 옥동자를 안고 있다가 어머니 품에 안겨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태어나기 전날 밤에도 큰 바다에서 흑룡(黑龍)이 날아와 침실의 처마 밑에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서, 깨어나 저를 낳았다고 합니다.

강민우: 그래서 어머니 사임당은 율곡선생을 낳은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어린아이 시절의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불렀나 봅니다. 흑룡이라는 동해바다의 정기를 타고나신 것이니, 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인물 탄생에 얽힌 태몽으로도 잘 어울리는 이야기입니다.

율곡: 저는 일곱 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차례대로 말하면, 위로 큰형 이선(李璿), 큰 누님 매창(梅窓: 趙大男의 처), 둘째 형 이번(李璠), 둘째 누님(尹涉의 처)이 있고, 아래로 여동생(洪天祐의 처)과 남동생 이우(李瑀)가 있습니다. 큰형 이선은 저보다 12세 많습니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다가 41세에 비로소 소과(小科)에 합격합니다. 47세(1570) 때 처음으로 남부 참봉(南部參奉)의 벼슬을 받았으나, 그 해에 병으로 죽고 맙니다.

강민우: 많이 슬퍼하셨겠습니다. 그래서 큰 형님이 돌아가시자, 제문을 짓고(「祭伯氏文」) 형님의 후덕한 성품을 칭송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평생 바깥으로 꾸밈이 없었고,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도록 미워하거나 시샘하는 사람이 없었다.”(「伯氏參奉公墓誌銘」). 특히 큰 형수에 대한 보살핌이 지극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율곡: 큰 형수 선산 곽씨(善山郭氏)는 회덕(懷德: 현 대전시 회덕동)에 계셨는데, 해주로 이사 오게 하여 함께 모시고 살았으며, 또 서울에 올라와서도 모셨습니다. 큰 형수께서는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오직 저의 말이라면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큰 형수께서 홀로된 이후에 자식들과 함께 저에게 많이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큰 형수 역시 46세의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는데, 그때 애통하는 제문(「祭伯嫂郭氏文」)을 짓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둘째 형님 이번(李璠)은 물정에 어두워 제대로 벼슬길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둘째 형님은 저의 문장을 너무 좋아하여 제가 바깥에 나갔다 돌아오면 언제나 그날 무슨 글을 지었는지를 묻고서, 그 글을 베껴둡니다. 아마 저의 시와 같은 글이 유실되지 않고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둘째 형님의 덕분입니다.(尹宣擧, 「魯西記聞」)

강민우: 특히 남동생을 무척 사랑하고 동생도 형님(율곡)을 잘 따라 ‘자기를 알아주는 벗(知己之友)’으로 삼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율곡: 남동생 이우(李瑀)는 호가 옥산(玉山)이며 저보다 6세 아래입니다. 26세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뒤에 여러 고을 현감(縣監)을 지냈습니다. 제가 해주 석담(石潭)에 살 때에 틈이 날 때면 술상을 차려놓고 남동생을 불러와 거문고를 타게 하고 시를 화답하며 즐겼습니다. 이우는 어머니 사임당의 예능을 이어받아 거문고․글씨․시․그림(琴書詩畫)에 뛰어났습니다. 또한 큰 누님 매창(梅窓)은 저보다 7세가 위였는데, 어머니 사임당을 이어받아 시․글씨․그림․자수에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자식들을 데리고 원주로 피난을 갔다가, 모자가 함께 왜적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강민우: 큰 누님 매창은 매우 현명하여 율곡선생께서도 많은 자문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그렇습니다. 제가 병조판서로 재임할 때, 함경도 변경에 여진족의 노략질이 많았습니다. 군사를 동원해서 막아야 하는데, 군사와 군량미도 부족하여 어려움이 컸습니다. 이때 큰 누님은 “서자(庶子: 첩의 자식)들이 곡식을 바치는 댓가로 벼슬길에 나올 수 있게 해주면, 차별받던 서자들의 처지도 개선되고 나라의 군량미도 해결될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습니다. 후에 저는 이 조언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형제에 대한 우애가 각별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아갈 때마다 형제들과 함께 지내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시를 남기기도 하셨습니다.

율곡: 지금 생각해도 그때가 많이 그립습니다. 제가 고향 율곡촌을 찾아갔다가 형님과 동생들을 그리워하며 읊었던 시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우리 형제 일찍이 여기서 놀 적에 弟兄曾駐馬,
친구들도 떼지어 따라 다녔지. 朋友亦隨羣.
(…) (…)
이제 오니 옛 자취 되고 말았구나. 至今成舊跡,
다래덩굴 오솔길 황혼에 홀로 섰네. 蘿逕獨黃昏. (「過上山洞, 忽憶舊事, 因感有作」)

외로운 마을 고목에 의지해 있고, 孤村依老樹,
작은 냇물 거친 물굽이로 흘러드네. 細澗下荒灣.
(…) (…)
이별의 시름 이제 더욱 짙어지니, 別愁今轉極,
내 얼굴 주름살 펼 길 없구나. 無境解吾顔. (「過越溪棧, 宿村舍, 有懷兄弟」)

강민우: 가족 소개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율곡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어머니 신사임당입니다. 어머니와의 사랑이 각별하신 것으로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