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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찬(任憲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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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고종 13)∼1956년. 근현대의 유학자.

1876년 충청도 전의에서 부친 임좌모(任佐模)와 모친 경주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갑오개혁, 을미사변, 경술국치, 남북분단 등 격동기를 살다가 6.25 한국전쟁 뒤인 1956년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풍천이며, 자는 옥여(玉汝), 호는 경석(敬石)이다. 풍천 임씨는 명문가로 유명하다. 특히 조선 후기에 임성주(任聖周)는 성리학으로 저명하였고, 가깝게는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임헌회(任憲晦)가 산림의 종장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임헌찬의 부친은 초야에 묻혀 지냈지만 아들의 교육을 위해 무척 헌신적이었다. 눈이 많이 올 때면 항상 일찍 일어나 길에 쌓인 눈을 쓸어 아들이 서당에 가는데 조금도 지장이 없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1895년 명성왕후 민씨가 왜인들에게 시해를 당하자, 이후로 늘 소복을 입었으며 거실에는 ‘신와(薪窩)’ 두 글자를 써 붙이고 ‘와신상담’의 뜻을 새겼다고 한다.

‘와신상담’은 섶에 눕고 쓸개를 씹는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이르는 말이다. 일제로부터 당한 굴욕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임헌찬이 일생토록 시세에 영합하지 않고 올곧게 살면서 일제에 저항하였던 것은 바로 부친의 이러한 선비정신과 의리사상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다.

임헌찬은 처음에 과거시험을 위해 공부를 준비하였으나 갑오개혁과 을미사변 등 잇단 사변을 보고서 벼슬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였다. 그 뒤 학문을 계속하다가 1919년 6월에 계화도에 있는 전우에게 편지를 써서 문인이 되었다. 그는 편지에서

“동남으로 떠돌아다니느라 44년의 시간을 허비하였다.”

라고 하면서 제자의 반열에 끼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는 늘 자신을 늦게 학문을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만진자(晩進者)’ 또는 ‘만급제자(晩及弟子)’라고 칭하면서 전우와 사제간의 재회가 늦은 것을 아쉬워하곤 하였다. 전우는 임헌찬의 재주와 학문됨을 아껴서 거실 이름을 경석(敬石)이라고 지어주었다. ‘경석’은 석담(石潭, 율곡)을 공경하고 우러러보라는 의미이니, 제자인 임헌찬이 일생동안 나아가야 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 뒤 1922년 전우가 세상을 떠났으니, 전우의 가르침을 받은 기간은 3년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문들은 한결같이 임헌찬을 ‘경험이 많고 세상일에 밝으며 순박하고 인정이 두텁다’고 칭찬하였다. 그는 전우 문하에서 많은 인재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오진영(吳震泳)․송의섭(宋毅燮)․이유흥(李裕興) 등과 절친하게 지냈다.

임헌찬은 8권의 문집을 남겼다. 이 가운데 「농암잡지」와 「노주잡지」를 본받은 ‘잡지(雜誌)’와 상당한 분량의 서신이 있다. 그러나 행장․연보․묘지명 등이 수록되어 있지 않아 그의 생애와 학문을 자세히 살피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다행히 동문인 유영선(柳永善)이 지은 ‘묘지명’과 권순명(權純命)이 지은 ‘묘갈명’, 정헌태(鄭憲泰)가 지은 ‘행장’이 전해짐으로써 그의 생애를 참고할 수 있다.

그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일생동안 유교를 지키고 선양하며 실천하는 삶으로 일관하였다. 홍직필(洪直弼)의

“글 읽는 소리가 끊긴 곳에 집안의 명성도 끊어진다.”

는 말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장차 이 땅에서 유교의 종자가 없어지게 될 것을 염려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 ‘독실하게 학문을 좋아하고 죽음으로써 도를 지키며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산림에 은둔하여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의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당시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유교계의 동향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1930년대 초에 안향의 후손인 안순환(安淳煥)이 꺼져가는 유교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녹동서원을 세우고 전국 각지의 우수한 자제들을 선발하여 차세대 유학자로 양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처사를 크게 칭송하였다. 더욱이 안순환이 1930년 중국 곡부에 있는 공자묘가 전란의 화를 입었을 때 선대 성현들의 영혼을 위무하고자 유생들을 파견한 것에 대해 “천하가 의롭게 여겼다”고 평가하였다.

1920년 국어학자 권덕규(權悳奎)가 ≪동아일보≫에 「가명인 두상에 일봉(假明人 頭上에 一棒)」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가짜 명나라 사람 머리에 몽둥이 한 대’라는 의미로, 명나라를 숭배하는 조선 후기 유신들과 사림을 비판한 것이다. 권덕규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고, 그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의 연호를 고집하던 당시의 유학자들을 가리켜서

“심장도 창자도 없는 지나(중국) 사상의 노예”

라고 표현하며,

“충효의 가르침을 제 땅과 제 민족을 위해 쓰지 아니하고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다른 놈에게 바치니, 그 더러운 소갈머리야 참으로 개도 아니 먹겠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국 유교계의 사대모화(事大慕華), 즉 ‘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흠모하고 따르려는 사상’적 성향을 비판한 글로, 당시 유교에 대한 불만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전국 유림의 거센 저항이 일어나 ≪동아일보≫ 불매운동까지 벌어졌으며, 박영효 동아일보 사장이 물러나기에 이르렀다.

유교에 대한 이러한 감정은 뒤로 오면서 더욱 적대감으로 발전하였는데, 1931년 변호사 이인(李仁)이 한 잡지에서 공자를 ‘공부자(孔腐子)’ 또는 ‘공구(孔仇)’라고 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러한 일에 대해 당시 전우 문하에서는 격하게 반발하였다. 왜냐하면 권덕규가 송시열과 전우를 ‘사대모화’의 화신으로 지목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임헌찬은 분연히 일어나 가까운 동학들은 물론 각지의 유림에게 통지를 보내 이들을 성토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각종(李覺鍾)과 이인(李仁) 두 난적이 공자를 ‘공부자(孔腐子)’ 또는 ‘공구(孔仇)’라고 운운하였는데, 차마 무슨 말을 하리요. 그들의 소행을 살펴보니 실로 박영효와 권덕규 두 난적과 동일한 죄악이다. 머리를 베고 살을 저미더라도 죄를 씻기에 부족하다.”

임헌찬은 성현을 모독한 죄야 말로 난적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이런 무리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울분을 토로하였다.

임헌찬의 성리설은 율곡학파의 ‘심시기(心是氣)’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성즉리(性卽理)’의 대명제를 부각시켜 전우의 ‘성사심제(性師心弟)’와 ‘성존심비(性尊心卑)’설을 계승한다. 전우의 ‘성사심제’설은 오희상의 ‘성이 심의 주재가 된다(性爲心帝)’는 설에서 나왔고, ‘성이 심의 주재가 된다’는 것은 율곡의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설에 근거를 둔다.

성리학의 대전제인 ‘성즉리’와 기호학파의 전통인 ‘심시기’를 하나로 연결시킨 것이 바로 전우의 ‘성사심제’설이다. 임헌찬은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설을 배우는 사람들이 반드시 준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임헌찬은 『대학』에 나오는 명덕(明德)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당시 일부 학자들이 명덕을 성 또는 리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하고, 역대로 명덕을 성으로 본 전례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주자가 『대학장구』에서 명덕에 대해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불매하여 온갖 이치를 갖추고서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 而應萬事者也.)”

라고 하였는데, 만약 명덕을 성(리)으로 해석하면 ‘리가 리를 갖춘다’는 말이 되므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율곡어록」에 나오는 명덕의 주자 주석 가운데

“‘구중리(具衆理)’를 성이라 한 것은 온당하지 않고 심이라 해야 한다”

는 율곡의 말에 근거하여 ‘명덕은 곧 심이요 심은 곧 기이다’라고 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결국 명덕을 리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며, 이진상과 같은 심학자들이 명덕을 리로 해석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명덕은 기인 심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명덕 역시 기의 영향 하에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경석 임헌찬의 학문과 사상」(최영성,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4)

남진영(南軫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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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고종 26)∼1972년. 근현대 유학자.

본관은 영양, 자는 정함(靜涵), 호는 무실재(務實齋)로서, 조선 후기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전우의 문인이다. 1889년에 울진 정림에서 태어나 1972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남진영은 어려서부터 영민하였으며, 친척인 정오공(靜塢公)에게서 배움을 시작하였는데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사랑을 받았다. 그 후 전우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자, 스승인 전우가 ‘무실재’라는 호를 친히 써서 내릴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전우가 일제의 침략에 분개하여 서해의 섬으로 이주하자, 남진영은 몇몇 동학들과 험난한 뱃길을 무릅쓰고 따라가 몸소 나무하고 밥을 지어 스승을 모셨다. 샘이 멀어 섬 아낙들도 물을 길러 가기를 싫어했지만, 남진영은 꼭 밤에 일어나 물 긷기를 여러 달 동안 하면서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그때가 21세였다.

후에 동문인 남정재(南正齋)․김학산(金鶴山)․노창동(盧滄東)․주비암(朱毖菴) 등과 신림 덕은산에 집을 짓고 강학을 하자, 전우는 친히 소행재(素行齋)라는 글자를 써서 격려하고 현판을 걸게 하였다. 또한 일찍이 스승으로부터 권순명(權純命)․유영선(柳永善)과 우의를 나누라는 당부를 받고 평생토록 형제 이상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정조 임금이 송나라의 주자(주희)가 여러 학자와 제자들과 나눈 성리학에 관련된 편지를 모아 책으로 펴낸 『주서백선(朱書百選)』을 좋아하여 부친이 필사한 『주서백선』을 상자에 넣어두고 즐겨 읽었으며, 주자의 초상을 책 속에 두고 때때로 공경히 대하며 주자를 닮고자 하였다.

남진영은 항상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서로 대조해서 읽으며 주자의 성리설을 연구하기를 침식을 잃을 정도였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반복해서 살피고, 주자의 문장을 시기별로 고증하는 작업을 계속하여 이들의 책을 모두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는 이진상과 같은 심학파들을 비판하는 한편, 유교와 불교를 구별하여 주자학의 본령을 확립하는데 있었다. 그의 학문 방법은 주자의 초년설과 만년설을 엄밀히 구분함으로써 주자 만년의 정설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그 정밀함은 스승의 인정을 받아 전우 자신이

“나의 말이 동쪽으로 갔다”

라고 했을 정도였다.

남진영의 이론 중에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지각설(知覺說)의 문제이다. 심의 지각을 인․의․예․지와 같은 사덕(四德)의 하나인 지(智)의 문제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남진영은 심의 지각을 지(智)의 작용(리)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고, 심의 지각을 기의 영역에 소속시켜 해석한다. 그 근거로 주자의 초년설과 만년설을 구분하고, 심의 지각을 지(智)로 해석하는 것은 주자의 초년설이요, 심의 지각을 기의 영역으로 해석하는 것이 주자의 만년설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결국 주자의 지각설의 정론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으로써 주자 성리학의 근본 명제가 성즉리(性卽理)인지 아니면 ‘심즉리’인지를 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성은 다만 리이고, 정은 유출하여 운용하는 것이다. 심의 지각은 이 리를 구비하여 이 정을 행하는 것이다. 지(智)로써 말하자면, 옳고 그름을 아는 리가 지(智)요, 옳고 그름을 알아서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정이고, 이 리를 갖추어 옳고 그름을 지각하는 것은 심이다. 이 구별은 미세하므로 정밀하게 살펴야 한다.”

남진영은 심의 지각과 지(智)와의 차이를 심․성․정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주자는 심․성․정의 관계를 심통성정(心統性情)으로 규정하여 심․성․정의 범주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예컨대 옳고 그름을 아는 리가 지(智=성)요, 옳고 그름을 알아서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정(情)이며, 이러한 옳고 그름의 리를 갖추고서 옳고 그름을 지각하는 것은 심(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가린다면, 먼저 옳고 그름의 객관적 근거 혹은 원리가 있어서 그 합리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옳고 그름의 근거 내지는 원리가 있다고 해도 원리는 단지 객관적 원리일 뿐이니, 원리가 능동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원리를 지각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는 주체는 인간의 마음이다. 즉 옳고 그름의 원리를 지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릴 의지를 갖게 하는 것은 심이고, 그 마음이 발출되어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정이라는 것이다. 주자학의 ‘심통성정’에서 심이 성과 정에 대해서 주재적 의미를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은 다만 원리(性卽理)이므로 능동성이 없으며, 정 또한 이미 발출된 감정이므로 오직 심만이 원리인 성을 지각하고 이미 발출된 감정을 반성하여 조절하는 능동적 주재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지(智)는 원리이므로 리가 되고, 심은 지각 작용하는 주체이므로 기가 된다. 따라서 ‘심의 지각’과 ‘지(智)의 지각’은 그 의미가 다르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주자에 의해 ‘리는 무위(無爲)하고 기는 유위(有爲)하다’는 속성을 갖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리는 실제로 능동적 작용이 없는 형이상의 개념이며, 기는 능동적 작용성을 갖는 형이하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지(智)는 인․의․예․지 사덕의 하나로서 리에 해당하므로 작용성이 있을 수 없고, 다만 심만이 지각이라는 작용성을 갖는다. 주자가 ‘지의 지각’이라는 말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의 지각은 ‘심의 지각’과 같은 작용성의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주자가 비록 ‘지(智)의 지각’과 ‘심의 지각’이라는 말을 같이 썼을지라도, 전자는 성(=리)을 가리키고 후자는 실제로 지각 작용을 일으키는 기로써 범주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진영은 ‘지(智)의 지각’은 주자의 초년설이고 ‘심의 지각’이 주자의 만년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지각설이 문제되는가. 남진영은 무엇 때문에 주자의 ‘지의 지각’과 ‘심의 지각’을 초년설과 만년설로 구분하여 고증하는가. 이것은 바로 ‘심즉리’를 주장하는 심학자들의 지각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겉으로 보면 단순한 고증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이면에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정미한 철학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각설은 성리학의 주요 명제인 ‘심통성정(心統性情)’의 해석과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각설이 궁극적 진리의 소재와 인식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즉리’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심학자인 이진상(李震相)은 ‘심의 지각’과 ‘지의 지각’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심의 지각과 성의 지각은 둘이 아니다. 지(智)는 지(知)의 본체요, 지(知)는 지(智)의 작용이다. 이제 지각을 심이라고 하여 오로지 기에만 속한다고 하면 일부만 들고 전체는 버린 것이다.”

이진상에 따르면, 기는 단지 청탁수박한 기질에 불과하므로 기 자체에는 본래 허령지각이 있을 수 없고, 리와 합일함으로써 지각작용이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남진영처럼 ‘심의 지각’과 ‘지의 지각’을 서로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에 지(智)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지’를 통해 심의 지각작용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지(리)의 지각’과 ‘심의 지각’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남진영은 심을 기로 규정하고, 심 자체에는 어떤 리도 갖추어져 있지 않으며, 반드시 심과 독립해서 객관대상으로 존재하는 리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리와 합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자가 격물(格物) 공부를 중시하여 심과 리의 합일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즉 심에는 어떤 리도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거경궁리(居敬窮理)와 같은 공부를 통해야만 이러한 리를 인식할 수 있다.

먼저 ‘경’ 공부를 통해 심을 허령하게 하고, 이러한 허령한 심을 통해 리를 인식한다는 뜻이다. 때문에 주자학에서는 후천적인 수양공부가 강조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심은 어디까지나 지각할 수 있는 능각(能覺)의 의미이고, 리는 심에 의해 지각되는 소각(所覺)이다. ‘능각’이므로 기(유위)가 되고 ‘소각’이므로 리(무위)가 되니 둘은 엄격히 구분된다. 이러한 사고는 ‘성사심제(性師心弟)’를 주장하여 심의 영각(靈覺)보다는 성의 도리를 중시하는 전우의 성리설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무실재 남진영의 성리설에 관한 연구」(최일범,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3)

정형규(鄭衡圭)


정형규(鄭衡圭)                                                           PDF Download

1880년(고종 17)∼1957년. 근현대의 유학자.

정형규는 1880년 경상도 삼가현 마협(지금의 경남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에서 부친 정방수(鄭邦壽)와 모친 남평 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출세를 위해 10여 년을 서울에서 보내다가 여의치 않자

“장부가 이미 출사할 수 없으면 몸을 닦고 집안을 바로잡는 것을 주장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나의 직분이다.”

라고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자식을 가르치는데 더욱 힘썼다.

부친은 일찍이 학문에 종사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자식의 교육에 더욱 힘썼다. 부친은

“농사는 한 가지 작은 일이지만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추수할 수 없다. 학문하는 것이 그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라고 하면서 자식들에게 항상 열심히 학문에 매진할 것을 독려하였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며칠간 음식을 끊었으며, 그 후로는 제사가 아니면 의관을 하지 않고 항상 갈대 삿갓을 썼다고 한다.

또한 모친인 문씨는 가난할 때 시집을 와 10년 만에 가업을 일으켜 세운 분으로, 경술국치를 당해서는 정형규를 불러놓고

“너에게 학문을 가르친 것은 본래 입신양명하여 가문을 빛내게 하려던 것인데 이제는 끝났다. 네가 이미 유학에 종사해 마음을 세우고 일을 처리함에 정대하여 뜻을 크게 가지고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기개를 세워야 한다.”

라고 당부하였다.

정형규는 17세 때 부친의 친구인 권명희(權命熙)에게 수학하였는데, 권명희는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이었다. 이로 인해 23세 때인 1899년 송병선이 남행한다는 말을 듣고 김천 직지사로 달려가 뵙고, 이때부터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그러나 송병선은 1905년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조약의 폐기와 오적(五賊)의 처단을 요구하다 절의를 지키기 위해 70세를 일기로 음독자결하자, 정형규는 송병순(宋秉珣)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송병순 또한 1912년 일본이 은사금을 보내고 경학원의 강사로 나오도록 요구한 것을 거부하다 74세를 일기로 절의를 지키기 위해 음독자결한다.

정형규는 30세 되는 1909년에 친구 전기진(田璣鎭)과 함께 부안 앞바다의 고군산도에 기거하는 전우를 찾아갔다. 그는 전우를 만나기 위하여 1904년 공주 신안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한 일이 있었던 사실에서 일찍부터 전우의 문하에서 학문할 뜻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모원재(慕遠齋)에서 강학하면서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여 의리를 지키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정형규는 스승에 대한 흠모의 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아! 지금 나라가 망하고 도가 없어져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혔는데, 선대의 성인들이 전수한 것을 우뚝 세우고 백번을 꺾어도 꺾이지 않는 이는 오직 우리 스승 한 사람뿐이다. 우리들이 다행히 간옹(전우)의 뒤를 따라서 학문이 거의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선생께서 돌아가심에 대중들이 우러를 곳이 없고 학자는 물어볼 곳이 없어 온 세상이 긴 밤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나는 한 사람의 있고 없음이 나라의 성쇠(盛衰)에 이처럼 지대하게 관계됨을 알지 못했다.” 이는 「간재선생어록」과 「간재선생행록」을 정리하고 있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스승인 전우는 당시 영남의 곽종석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기호학파의 유학자이다. 그는 (율곡)이이-(사계)김장생-(우암)송시열-(농암)김창협-(미호)김원행-근재(박윤원)-(매산)홍직필-(전재)임헌회-(간재)전우로 이어지는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이처럼 정형규는 성장하여 송병선과 송병순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다가, 이들이 돌아가시자 전우의 문하에 나아가 종신토록 귀의한다. 스승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여 의리를 지키고 강학에 힘쓰던 정형규는 1957년 1월 14일 고향인 쌍백에서 향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망국의 시대 상황 속에서 유교적 의리에 기반한 강인한 척사의식과 실천성을 보여주었으며, 스승인 전우의 길을 따라 유교적 도의(道義) 교육과 계승을 위해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제자들의 기억을 통해 전해지는 생활상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정형규의 제자로서 성균관장을 지낸 최근덕(崔根德) 유교학술원장은 평생 한 치라도 흐트러지는 스승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함께 기거를 하면서 가르침을 받을 때도 의관이 흐트러지거나 자세가 흐르러진 적을 본 적이 없다고 하니, 얼마나 꼿꼿하게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평생 흐트러지지 않는 삶의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은 결코 보통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는 일이다.

정형규의 성리설은 기호학파의 학문적 전통에 기초하고 있으며, 특히 전우의 성리학적 입장을 철저히 계승하고 있다. 그의 이론적 요지는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는데 있다. ‘무위(無爲)’는 작용성이 없다는 말이고 ‘유위(有爲)’는 작용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당시 리의 능동성과 관련된 리의 주재나 리의 동정문제에 대해서도 ‘리는 무위하다’는 관점에서 비판한다.

 

“‘리는 무형하고 무위하여 유형하고 유위한 것의 주인이 되고, 기는 유형하고 유위하여 무형하고 무위한 것의 그릇이 된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리와 기의 능소(能所)의 구분이 되는 요지를 말한 것이다. 그 아래에서 ‘양이 동(動)하고 음이 정(靜)한 것은 그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니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하는 것은 그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임을 말한 것이요 따로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래에서 ‘양의 동은 리가 동에 타는 것이지 리가 동하는 것이 아니며, 음의 정은 리가 정에 타는 것이지 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동정이 기틀이고 탄 것이 리임을 말한 것이다. 그 아래에서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하는 것은 그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며, 그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하는 까닭이 리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유행에 나아가 보면 그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며, 근원에 나아가 보면 반드시 소이연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정형규는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는데 근거하여 리의 동정을 부정한다. 음양이 동정하는 것과 같은 것은 유위한 기가 하는 일이요, 무위한 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리는 다만 동정과 같은 작위적 개념이 아니라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하게 하는 까닭’에 해당하는 소이연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정형규는 무엇 때문에 리의 동정을 부정하고 리의 무위성을 강조하는가.

그것은 리와 기의 개념적 구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리란 존재의 근원이자 가치의 근원이 된다. 리는 사물을 생겨나게 하는 근원(또는 원인)에 해당하며, 실제로 사물이 생겨나는 것은 전적으로 기의 작용에 의한다. 리는 궁극적 원인자이므로 절대적 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세계는 차별적 모습으로 존재하며,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리는 절대선이지만 현실세계는 그렇지 않으며, 그것은 기에 원인이 있다. 만약 리에 동정과 같은 작용성을 부여한다면, 리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 현실세계는 선만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리는 절대선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리가 무위하다’는 것은 리가 기에 의해 드러날 수도 있고 가려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리가 기에 의해 가려지면 리의 절대선이 드러나지 못하므로 악의 세계가 된다. 반대로 리가 기에 의해 가려지지 않으면 리의 절대선이 드러나서 선의 세계가 된다. 따라서 만약 리에 능동적 작용성이 있다면 현실세계에서의 악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기를 검속하는 공부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실세계는 그렇지 않다. 현실에는 엄연히 악이 존재하며, 이러한 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를 검속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이처럼 현실세계의 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가 리를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는 설의 요지이다.

또한 그의 심성론의 바탕이 되는 이론적 요지는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데 있다. 이 이론은 물론 그의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는데 근거한다. 성은 무위하므로 리가 되고, 심은 유위하므로 기가 된다.

“공자가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주자가 그것을 해석하여 ‘사람의 마음에는 지각이 있고 도체(道體)는 무위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요체이다. 만약 이것을 들어 공자와 주자 또한 주기론자라고 말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율곡이 평일에 이 말을 종주로 삼았는데, 지금 사람들은 어찌 그 의리의 당연함을 살피지 않고 주기(主氣)라고 해서 배척하는가.”

즉 공자와 주자의 해석에 근거하면, 심은 리가 아니라 기가 된다. 사람과 같은 기는 유위하므로 넓히는 주체가 되어 작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도와 같은 리는 무위하므로 넓히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의 경우도, 도의 본체(리)가 무위한 것과 달리 심은 지각작용이 있으므로 기가 된다.

또한 정형규는 ‘심이 기이다’는 관점에서 『대학』의 명덕(明德)을 리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한다.

“대개 명덕은 다만 허령불매하여 이치를 갖추고서 온갖 일에 응하는 마음으로, 기의 욕심에 구애되고 가리우면 그 광명을 잃어버리는 까닭에 그것을 밝혀 처음을 회복하게 한 것이다. 명덕이 과연 리라면 리는 스스로 순선한데 왜 밝히는 공부가 필요하겠는가.”

심은 리가 아니라 기에 해당하니, 심에 갖추어진 명덕 역시 심인 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심성론은 스승인 전우의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 등을 논하는데서 총괄적으로 드러난다.

“성은 곧 리이니 그 존귀함은 짝이 없다. 지금 모두 심이 성보다 존귀하다고 말하니 천하가 장차 모두 석씨에게로 들어가려고 하는가. 간옹이 이를 염려하여 그 말을 뒤집어 성은 존귀하고 심는 낮다고 하였으니, 이는 시대를 구제하는 권도이다.……선생이 말한 ‘성존심비’란 천지의 높고 낮은 것처럼 심과 성이 현격하게 다름을 말한 것이 아니다. 다만 성은 심의 준칙이 되지만 실제로는 능연(能然)의 힘이 없고, 심은 다만 능연의 힘만 있고 실제로는 준칙의 근본이 없다. 근세에 ‘심은 높고 성이 낮다’는 설이 성행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옛 성인의 전함을 무너뜨리는 까닭에 선생이 부득이하여 분변한 것이니,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해서 그러한 것이겠는가.”

성은 무위하고 순선하며 존귀한 것이다. 심은 성에 비하여 유위하고 비천한 것이다. 성은 인의예지의 덕목이며, 그것은 실제 생활에서 유교적 윤리 덕목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심이기 때문에 심이 성에 근본해야만 인간행위가 도덕적 당위성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심은 기이므로 심의 행위가 그대로 도덕적 행위로 이어질 수 없다.

이 때문에 정형규는 심을 곧장 리의 관점에서 논하는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는 자들의 해석을 비판한다.

“근세의 ‘심즉리’설이 있는데, 이것은 성인에 나아가서 말한 것이다. 성인의 심은 혼연히 일리(一理)이니 비록 심즉리라 해도 좋다.”

또는

“심이 곧 리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마음에 사욕이 없기 때문이다. 양심이나 도심과 같은 것은 중인에 나아가 성명에서 곧장 나온 것을 따로 떼어내 선한 일변만을 말한 까닭에 확충하고 떨어지지 말라는 경계가 있는 것이다. 만약 심이 리라면 어찌 확충하고 떨어지지 말라는 말을 붙이겠는가.”

즉 심을 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성인의 경우에는 가능하겠지만, 보통 사람의 경우는 실제로 그렇지 않다. 보통 사람의 양심이나 도심과 같은 것도 선한 한쪽만을 뽑아내어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심을 곧장 리와 연결시켜서는 안된다. 심은 리가 아니라 기가 되므로 ‘확충하고 떨어지지 말라는 경계가 있다.’ 반대로 심이 곧장 리라면 굳이 ‘확충하고 떨어지지 말라는 경계가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참고문헌]: 「창수 정형규의 학문과 의리」(이상호,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3)

정관석(鄭瓘錫)


정관석(鄭瓘錫)                                                            PDF Download

1901년∼1982년. 근현대의 유학자.

19세기 후반 한말에 들어서면서 조선 사회는 한층 더 격심한 사회적 혼란과 사상적 동요를 겪는다. 19세기 후반 유학을 이끌었던 핵심적 인물과 학파로는 화서학파, 노사학파, 한주학파를 들 수 있다. 화서학파는 (화서)이항로 문하의 학파를 말하고, 노사학파는 (노사)기정진 문하의 학파를 말하며, 한주학파는 (한주)이진상 문하의 학파를 말한다.

당시 이들 세 주류학파가 시대와 철학 사상계의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또 다르게 이들 주류 학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 학파로는 (간재)전우 문하의 간재학파를 들 수 있다. 당시 (면우)곽종석이 한주학파의 대표로서 영남을 거점으로 하여 많은 제자와 함께 성리학의 학문적 발전과 실천에 힘쓰고 있었다면, 전우는 호남을 기반으로 하여 기호학파 낙론(洛論)계열의 정맥인 (율곡)이이-(사계)김장생-(우암)송시열-(농암)김창협-(미호)김원행-(근재)박윤원-(매산)홍직필-(고산)임헌회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특히 전우는 임헌회 문하의 대표적 인물로, 이이와 송시열의 학설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따라서 당시 이이의 학설과 다르거나 이에 비판을 가한 한주학파, 노사학파, 화서학파 등을 공격하며 이들과 논쟁을 펼치는데 앞장섰다. 이에 그는 ‘성사심제(性師心弟)’ 또는 ‘성존심비(性尊心卑)’이 이론을 정립하여 당시에 주리(主理)를 표방하며 성보다 심의 주재성을 강조하던 한주학파, 노사학파, 화서학파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논변은 「노화동이변(蘆華同異辨)」이나 「노한동이변(蘆寒同異辨)」에 잘 나타나 있다.

전우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농암)오진영, (창수)정형규, (경석)임헌찬 등이 있다. 오진영은 경기와 충북의 접경지역인 진천과 음성을 주 근거지로 하여 전우의 학문을 계승한다. 정형규는 영남의 합천을 거점으로 하여 전우의 도학을 계승하여 망국의 시대 속에서 강인한 척사(斥邪)의식과 함께 실천성을 강조한다. 임헌찬은 충청도 연기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농암)김창협과 (노주)오희상의 학문과 이론을 실천하는데 노력한다. 이처럼 전우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어 그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제자 가운데 (겸재)정관석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관석은 당시 영남 창원을 주 근거지로 하여 전우의 학문과 사상의 계승과 실천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는 특히 전우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며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던 정형규와도 교유하며 음양태극설(陰陽太極說)을 비롯한 학문적 논변을 가졌으며, 또한 같은 전우의 문하인으로서 학문적 명성을 추앙받고 있던 (석농)오진영과도 교유하며 예설과 심성론을 비롯한 유학의 체계에 대해 서신왕래를 통해 열정적인 토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정관석은 1901년 6월 5일에 태어나서 1982년 10월 25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는 윤용(允庸)이고 호는 겸재(謙齋)이다. 본관은 진양으로서 고려 건국공신으로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낸 정예(鄭藝)를 시조로 한다. 그 후 고려 말에 등과하여 세종 때에 성균관 대제학과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고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정이오(鄭以吾)가 8형제를 두게 되어 여덟 개의 파로 나누어진다. 이것이 오늘날 전하고 있는 진양(현재의 진주) 8정(鄭)이다. 그 중 장남인 정분(鄭苯)이 바로 충장공파의 시조가 되는데, 정관석은 바로 이 충장공파의 직계 후손이다.

정관석의 행장에 따르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풍모가 단정하였다.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매사를 처리함에 매우 신중한 품성을 가졌다. 학교에 가서도 모든 일을 민첩하게 잘 처리하고 예의범절 또한 잘 갖추어진 모범 학생이었다. 때문에 평소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를 큰 재목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그의 체격은 보통 사람들보다 크지 않았지만, 타고난 청수한 얼굴과 용모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하고 위엄한 자태가 있었으며, 가까이서 보면 온화함이 마치 봄날의 따뜻함과 같이 느껴지는 군자다운 기상을 갖추고 있었다.

어려서 이미 유가의 경서(經書)와 제자(諸子)에 어느 정도 통하였고, 약관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당시 전라도 부안과 군산 근처의 계화도에서 후학의 학문 교육에 전념하던 전우를 배알하고 가르침을 받게 된다. 정관석은 거기에서 전우로부터 이이와 송시열의 학문의 요지를 듣게 되고, 이에 우리 유학의 도통이 이이와 송시열을 거쳐 전우에게 전하고 있음을 깊게 인식하고, 선생을 더욱 돈독하게 믿고 따르게 된다. 거기에서 선생을 가까이 모시면서 학문탐구와 도를 구하는데 진력한다. 그런 가운데 정관석은 항상 선생의 엄숙한 가르침을 감사하게 여기고, 선생의 가르침을 못다 실천함을 자신의 불민한 탓으로 돌리는 등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날마다 선생의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묘갈명에서는

“전우선생의 문하에는 진실로 선진학문을 공부하고 덕이 높은 학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늦게 그의 문하에 나아갔지만 선생을 독실히 믿고 그 학문과 정신을 지키면서 시작부터 끝까지 변치 않고 그 학문의 단서를 추락하지 않은 학자와 제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정관석이 어찌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정관석이 전우의 많은 문하생들 중에서도 가장 스승의 학문을 신뢰하고 따랐을 뿐만 아니라, 전우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현실적 실천에 가장 진력한 학자로 손꼽고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를 「행장」에는 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무릇 스스로 실천하고 일을 처리함이 모두 명백하고 순정하여 세상의 유학자들이 능히 미칠 바가 아니었다. 비록 바른 도리가 능멸당하는 것을 당하고서는 산야로 물러나와 문을 닫고 자신을 다스리면서 매일 문하의 뛰어난 제자들과 함께 늦게까지 학문에 진력하였고, 성학을 밝혀 한 사람이라도 방정한 선비로 하여금 유학의 정맥을 알게 하여 이단과 사설에 미혹되지 않게 하였으니, 그가 우리 유학에 끼친 공적이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관석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근대 유학의 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학자라는 말이다.

정관석의 성리학 이론은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데서 출발한다. 심이 기이기 때문에 심은 경(敬)으로써 단속하여야 심과 리가 하나될 수 있다. 당시 영남의 ‘심즉리’를 주장하는 이진상은

“심은 일신의 주재자인데, 심을 기라고 하면 천리가 형기의 명령을 따르게 된다”

라고 하여, 심은 기가 아니라 리로서 일신의 주재자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써 성리학의 주요 명제인 ‘심통성정(心統性情)’을 거론한다. 예컨대 ‘심통성정’에서 심을 기로 규정하면 기(심)가 리(성)를 주재하는 것이 되므로 옳지 않다. 따라서 심은 기가 아니라 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정관석은 『맹자』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다’는 구방심(求放心)’의 명제를 제시하면서 이때의 심은 곧장 리로 볼 수 없다고 비판한다. 맹자의 ‘방심’은 리에 해당하는 선한 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즉 심에는 순선한 리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의 의미로서의 ‘방심’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심은 곧장 리가 될 수 없고 기로 해석되어야 한다. 『맹자』의 ‘구방심’과 관련하여 정관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개 심은 신명하여 헤아릴 수 없고 허령하여 사방으로 통하여 일신을 주재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성인들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심을 구한 것에 연유하고, 반면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은 이 심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학문적 요점은 이 심을 구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경(敬)으로 심을 요약하고 단속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그러한 공부는 또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 잠깐 넘어지는 사이라도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조금의 미세함이 있을 때 이를 미리 막아 심을 놓아버리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경으로 심을 요약하는 공부(敬以約之)’를 지속하면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할 수 있다.”

 

정관석은 ‘경으로 심을 요약하는 공부’가 오래도록 계속된다면 ‘심과 리가 하나가 되는(心與理爲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심이 곧 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경을 통한 오랜 공부과정을 거쳐야 리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심은 리가 아니라 기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맹자의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방심(放心)을 구하는데 있을 뿐이다’는 공부 방법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문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맹자의 ‘방심’과 같은 잃어버리기 쉬운 또는 악으로 흐르기 쉬운 마음을 구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심은 곧장 리가 될 수 없고 반드시 기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관석이 주장하는 ‘심과 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진상이 ‘심이 곧 리이다(心卽理)’는 이론과는 다르다. 정관석의 이론은 ‘경으로 요약하는’ 후천적 학습과정을 통하여 심이 리의 본체와 하나 되는, 즉 ‘심과 리가 하나이다’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진상의 ‘심즉리’는 선천적 본체 그 자체로서 심이 곧 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관석의 ‘경으로 요약하는’ 공부 방법은 맹자의 잃어버린 마음을 구한다는 ‘구방심’의 공부 방법에 근거하고 있다. 전우 역시

“우리 공부는 다만 ‘경’자를 가지고서 심기(心氣)를 검속하여 그 심기로 하여금 이 리를 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부를 쌓아서 오래도록 계속한다면 자연히 심과 리가 하나되는 것이 이와 같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전우와 정관석은 모두 ‘경’으로 심을 검속함으로써 심과 리가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를 것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주자가 심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는 근거가 모두 경에 있다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 만약 ‘경’에 근거하지도 않으면서 심으로서 일신을 주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맹자의 잃어버린 마음이 되고 악으로 흐르게 되어 ‘심과 리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따라서 정관석은 예로부터 성현들은 모두 경으로 요약하는 공부를 통하여 심과 리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그 학문의 요체로 삼았다고 강조한다.

정관석은 심을 곧장 리와 연결시켜 선한 것으로만 해석하는 이진상과 달리, 심을 기와 연결시켜 선한 측면도 있고 악한 측면도 있다고 해석한다. 심에는 선한 측면뿐만 아니라 악한 측면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경’으로써 단속하고 요약하는 공부를 통해야 리와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처럼 심에는 선한 측면도 있고 악한 측면도 있기 때문에 심이 곧장 리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기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성은 리이고 형이상의 개념이 되고, 심은 기이고 형이하의 개념이 된다. 성은 리이고 형이상의 개념이므로 절대선이고, 심은 기이고 형이하의 개념이므로 선과 악이 함께 있다. 따라서 심은 성과 악이 함께 있으므로 항상 성에 근본하거나 성을 표준으로 삼아야 악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전우의 ‘심본성(心本性)’ 이론이다. 또한 성과 심의 관계를 높고 낮음에 비교하면, 성은 높은 것이 되고 심은 낮은 것이 된다. 이것을 또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비유하면, 성은 스승이 되고 심은 제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전우의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내용이다.

정관석은 전우의 ‘심본성’과 ‘성사심제’를 계승하는 가운데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다. 먼저 정관석은 정자의 “성인은 천에 근본을 두고 있는 반면에 이단인 불교는 심에 근본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심에 근본할 것이 아니라 천(리)에 근본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주자의

“성은 태극이고 심은 음양이다”

는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이론적 기반인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것을 논증한다.

또한 이이의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

는 주장과,

송시열의

“공자와 맹자로부터 정자와 주자에 이르기까지 성을 리에 귀속시키고 심을 기에 귀속시켰다는 것이 그것이다.”

는 말을 거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주자의 ‘심은 성을 주인으로 한다(心主乎性)’는 설을 ‘군자는 천을 받들고 따른다’는 것과 연결시켜 전우의 ‘심이 성에 근본한다’는 이론적 근거로 삼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우는

“성인이 근본하는 것은 성이다. 그 성을 근본으로 삼는 것은 심이다. 그러므로 내가 ‘심은 성을 근본으로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심이 성에 근본한다’는 설은 성인이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 말을 바꾸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스승의 학설에 대해 정관석은 그 공로가 지극히 크다고 평가한다.

“전우선생이 이를 근심하여 이전 성현의 본뜻을 발명하고 ‘천에 근본하고 성을 높이는’ 요지를 밝혀 입이 아프도록 논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저러한 이단의 해설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그 마음은 진실로 고되지만 그 성공은 진실로 크다.”

전우의 학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말이다.

 

[참고문헌]: 「겸재 정관석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일고찰-간재의 학적 계승과 실천의 관점에서-」(장병한, 『간재학논총』9, 간재학회,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진영(吳震泳)


오진영(吳震泳)                                                            PDF Download

1868년(고종 5)∼1944년. 한말의 유학자.

오진영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아버지는 오기선(吳驥善)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진천 갈월리 외가에서 1868년 2월 18일(음력)에 태어났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풍채가 훌륭하여 주변 사람들이 앞으로 큰일을 할 인물로 평가할 정도였다. 그의 「연보」에는 3∼4세 이후에 독서를 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오진영은 19세 때 호서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인 전우의 문인이 되었으며, 스승인 전우의 학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계승한다. 전우의 심즉기설(心卽氣說)에 근거하여 한말 성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이항로(李恒老)와 이진상(李震相) 등이 리와 심을 일치시키고 심을 리라고 규정하는 입장을 반박하고, 심은 작용이 있으므로 리를 갖추고 있지만 기임을 주장한다.

오진영은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이진상의 ‘심이 곧 리이다(心卽理)’는 이론을 비판하고, 스승의 ‘성존심비(性尊心卑)’를 계승한다.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 심으로 성을 높이는 것이 리를 주로 하는 주리(主理)의 학문이다.”

“성인의 학문은 리를 주인으로 삼고 성을 높이며, 이단의 학문은 기를 주인으로 삼고 심에 근본한다.”

즉 성은 리에 해당하므로 높여야 하고 심은 기에 해당하므로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성존심비’의 이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은 치우친 것이 있고 기는 본래 탁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말단은 보았지만 근본은 보지 못한 것이며, 심을 리라 하면서 기질을 가지고 심이라고 하는 자들은 근본은 보았지만 말단은 보지 못했으니, 학자들이 살피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여 ‘심즉리’를 주장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또한 오진영은 심을 ‘기’로 보아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심은 기이고 성은 리이다. 심이 기이기 때문에 허명(虛明)하고 본래 선한 것이지만, 언제나 악으로 빠질 수 있어 리가 순선하고 악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 심이 본래 선하다는 것은 성에 근본하는 것이고, 악으로 흘러가는 것은 심이 스스로 방자한 것이다. 따라서 심은 반드시 잡아서 보존해야 하는데 성으로 근본을 삼아서 공경하고 높여야 한다.”

심은 리가 아니라 기이다. 그러므로 비록 본래모습이 순선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악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런데 이 심을 그대로 리라고 하여(심즉리) 믿고 따른다면 멋대로 방자해져서 금수와 같은 지경에 떨어질 수 있다. 심은 반드시 성을 근본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야 잘못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된다. ‘심이 본래 선하다’는 말 역시 심이 성에 근본할 때에 해당되는 말이다. 심이 성에 근본하거나 표준으로 삼을 때만이 심이 본래 선한 것이 된다. 때문에 ‘심즉리’를 주장하는 학자들처럼 심이 곧장 리가 될 수 없고 반드시 성에 근거할 때만이 리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오진영은 성과 심을 분명히 구분한다. 성은 리이고 형이상의 개념이니 높은 것이 되고, 심은 기이고 형이하의 개념이니 낮은 것이 된다. 이것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설명하면, 성은 높은 것이니 스승에 해당하고, 심은 낮은 것이니 제자에 해당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성사심제(性師心弟)’이며 ‘성존심비’의 이론이다.

한편 이진상처럼 ‘심즉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성리학의 주요 명제인 ‘심통성정(心統性情)’의 개념을 자신들이 주장하는 ‘심즉리’의 이론적 근거로 제시한다. ‘심통성정’은 말 그대로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한다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하기 때문에 심이 곧 리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심이 리의 지위에 이르지 못하면 성과 정을 통섭하거나 주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학파들의 주장에 대해 오진영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마음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적에 대본(大本)을 세우는 것은 왕자가 임금에게 흠향하되 공손히 떠받드는 정성을 엄숙히 상달하는 것과 같고, 이미 발하였을 적에 달도를 행하는 것은 효자가 신주를 내어 공손히 떠받드는 정성을 방달(旁達)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심이 성과 정을 주재한다는 말을 얻게 된다. 이른바 주재하는 것은 공경히 받들고 공경히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대로 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 높고 낮은 차등이 없겠는가. 성과 심은 높고 낮은 차등을 둘 수 없다고 하는 자들은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진영에 따르면,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한다는 말은 심이 자기 마음대로 통섭하고 주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심이 공경히 받들고 공경히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심이 ‘공경히 받들고 공경히 모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에 근거하거나 성을 표준으로 삼을 때라야 가능하다. 왜냐하면 심은 기이고 형이하의 개념이므로 리이고 형이상의 개념인 성에 근거해야 악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다. 때문에 심은 낮은 것이고 성은 높은 것으로, 심과 성에는 낮고 높은 차등이 없을 수 없다. 낮은 심은 높은 성을 항상 근거로 하거나 표준으로 삼을 때라야 악으로 흐르지 않고 바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심즉리’를 주장하는 자들처럼, 심을 리의 지위로까지 높인다면 심이 제멋대로 작용하여 방자한데로 흐르게 된다고 비판한다.

“리는 본체가 자재하고 기는 말단의 작용이 운동한다. 높은 것은 무위(無爲)하고 낮은 것은 유위(有爲)하는 것이 천리의 본연이고 인도의 당연이다. 성현이 비록 리와 기에 대해 높고 낮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이미 그 안에 있다. 스승께서 ‘유위’와 ‘무위’를 자세히 설명하여 이기와 심성에 대해 남김없이 설명을 했는데도, 후인들은 도리어 무위하다는 것을 주재가 없는 것으로 여겨 무시하고서 ‘심’자를 천으로까지 높여서 그 성을 넘어섰다. 이것이 이른바 ‘온 세상에 내가 최고다’는 것이니 장차 윗사람을 범하는 무도한 모리배들이 더욱 활개를 치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실로 작은 일이 아니다.”

오진영에 따르면, 리는 무위한 본체 개념이고 기는 유위한 작용의 개념하니, 리는 높은 것이고 기는 낮은 것이다. 왜냐하면 리와 기 또는 본체와 작용의 개념 중 리 또는 본체를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려는 것이 성리학의 기본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은 무위하므로 리가 되고, 심은 지각작용을 하는 유위한 것이므로 기가 된다. 그러므로 무위한 성은 높은 것이 되고 유위한 심은 낮은 것이 된다.

그러나 ‘심즉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성(리)은 실제로 작위성이 없는 무위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재할 수 없다고 보고, 심의 지위를 천으로까지 높여서 심의 주재를 주장한다. 심의 주재를 강조할 경우, ‘온 세상에 내가 최고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최고로 여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전적으로 진리인양 착각할 소지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진영은 ‘심즉리’를 주장하는 자들을 ‘온 세상에 내가 최고다’거나 ‘무도한 모리배들이 더욱 활개를 치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심을 곧장 리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심은 리가 아니라 기이므로 언제나 악으로 흐르기 쉬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심은 성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성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오진영의 심과 성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에서 또한 오진영의 출처관을 소개한다.

 

“출처(出處)는 선비의 큰 절개이다. 성인이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고 했으니, 숨는 때의 뜻이 매우 크다. 선비가 독서하면서 학문을 익히는 것은 장차 나가서 도를 행하고 세상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지, 단지 일신의 안위만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라는 것은 예의강상(禮義綱常)이다.……일찍이 스승께서 예의강상의 도리를 배워서 그 뜻은 차마 세상을 버리지 못했지만 세상이 한 손이나 한 발도 들이지 못할 지경이라 호남에 은거하여 몸을 지켰다. 몸을 지키는 것이 도를 보존하는 것이다. 도는 사람에게 근본이다. 세상에는 근본이 제일 중요하다.……지금 80의 나이에도 여전히 굳건히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고 있다. 뜻은 어디에 있는가. 도에 있다. 도가 이루어지면 천하가 미루어 실천할 수 있다. 천하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다.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천하를 구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 나아가고 세상에 물러나는 것이 군자의 큰 절개가 되는 것이다.”

 

오진영에 따르면,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펼치는 것과 세상에서 물러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 비록 구체적인 모습에서는 같을 수 없지만, 천하를 구제하고 도를 실천하는 데에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나아가고 세상에 물러나는 것이 군자의 큰 절개이다’라고 말한다. 하물며 이미 예의가 무너지고 강상이 무너진 세상에서는 아무런 권세와 지위가 없는 하층의 선비들이 세상을 구제하려는 의욕만 앞서다가는 제대로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도리어 자신을 망치기 십상이다.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도리어 도에 해로운 형국을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오진영은 스승인 전우가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고 도를 지킨 것이라고 변호한다. 도가 이루어지면 결국 천하를 구제할 수 있다. 여기서의 도란 예의와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하는 강상윤리를 말한다. 천하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으니, 무엇보다도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천하를 구제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욕만 앞서 함부로 경거망동하면 결국 천하를 구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잃게 된다. 오진영은 스승인 전우와 마찬가지로, 은거하여 후학들을 강학하면서 예의와 강상윤리를 지키는 것이 천하를 구제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1905년에는 일본의 불의를 규탄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을 지었고, 일본이 국가 간의 공법(公法)을 어긴 죄를 문책하여 세계 각국의 공사관에 호소하는 글을 지었다.

또한 3․1운동을 전후하여 파리강화회의와 미국워싱턴회의에 독립청원의 서한을 보내는 일을 추진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으나, 스승의 허락을 받지 못해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오진영은 「기분(記憤)」을 지어 3․1운동을 탄압한 일제의 잔인함에 대하여 울분을 터뜨렸다. 또한 조긍섭(曺兢燮)의 「복변(服辨)」에서 망한 나라의 임금인 고종을 위한 상복을 거부하자, 오진영은 조긍섭의 입장을 반박하는 「변복변(辨服辨)」을 지어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오진영은 당시 유교를 비난하는 주장에 맞서 유교전통을 수호하는데 힘썼다. 1920년 권덕규(權德奎)가 ≪동아일보≫에 글을 실어 공자와 함께 유림의 부패된 의식을 비판하자, 「경고세계문(敬告世界文)」을 지어 항의하였고, 1931년 이인(李仁)이 공자를 비난하는 글을 싣자 동료 문인들과 함께 적극적인 성토에 나섰다.

스승의 문집인 『간재사고(艮齋私稿)』의 간행을 추진하다가 문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전우의 행장을 짓는 등 스승을 높이고 학통을 수립하는데 진력하였다. 1944년 음성 망화재에서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문인들이 안성 경앙사에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석농 오진영의 위정척사 의리정신」(선병삼, 『간재학논총』12, 간재학회, 2011), 「석농 오진영의 생애와 저술」(조남국, 『간재학논총』3, 간재학회, 2000), 「석농 오진영의 의리와 학문」(최근덕,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유흥(李裕興)


이유흥(李裕興)                                                            PDF Download

1859(철종 10)∼1923년. 조선 말기의 유학자.

이유흥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사중(思中)이고, 호는 성암(誠菴)이며, 별호는 성재(誠齋)이다. 1859년 3월 26일 천안 수신면 백자리 증자동 구택에서 태어나서 1923년 2월 29일 향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증조부는 이화진(李華鎭)이고, 조부는 이철규(李喆奎)이며, 부친은 이계열(李啓烈)이다. 외조부는 김유(金有)이고, 처부는 곽상기(郭相夔)이다. 묘는 충청남도 천안군 수신면 증자동 선영 아래 있다.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방축리의 덕성서원(德星書院)에 배향되어 있으며, 저서로는 『성암문집』이 있다.

이유흥은 어려서

“외면은 허약한 것 같았지만 내면은 강하고 분명하였다. 효성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뛰어났으며, 천성이 순수하였다. 욕심을 적게 가지고 말하는 것을 매우 아끼었다.”

이유흥은 10살 무렵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평소 그의 학습 태도는 다음과 같다.

“수업 후에 만약 이해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고요히 생각하여 의심을 풀고, 풀어도 그 뜻을 얻지 못하면 다시 질문하여 반드시 깨닫고자 하였다. 어른이 수업하고 있으면 곁에 앉아 듣다가, 부친께서 그 글 뜻을 물으면 그의 대답은 지체함이 없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그의 학문하는 자세는 진지하고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그의 효행은 예사롭지 않았으니, 8세 무렵의 품행에 대하여 「연보(年譜)」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효성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니, 새벽에는 부모의 침소에 나아가 안부를 살폈으며, 저녁에는 이부자리를 정해드렸으며, 별미의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진상하였다.”

8세의 어린나이에 ‘저녁에는 부모님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드리는’ 도리를 행하였다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천성이 본래 그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13세 되던 해에 부친의 상을 당하고, 2년 후인 15세 되던 해에 집안의 경제와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백부마저 세상을 떠났다. 기울어가는 가세에 그는 직접 산과 들에 나가서 나무와 농사를 하면서 홀어머니를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고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렸다. 그러한 후에 여가가 있으면 책을 읽었다. 일을 할 때에도 암송하고 생각하며, 저녁에는 서당에 나아가 의심스러운 곳을 질정하기를 5∼6년을 하였는데, 이러한 일과를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유흥은 21세 되던 해에 김준영을 처음을 만났다. 김준영은 부모에 대한 효행과 각고의 노력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이유흥을 보고 매우 기뻐하고 자주 찾아와 만나곤 했다. 이유흥은 어려서부터 가정형편의 어려움 속에서도 독서를 놓지 않았으며, 당시 이미 학식과 품행은 주위에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흥의 실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김준영은 그가 장차 큰 성취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학문을 할 것을 권하였다. 이유흥은 이로부터 수시로 김준영을 찾아뵈면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3년 후에 정식으로 김준영과 사제의 의를 맺었다.

그 이듬해에 이유흥은 또한 김준영을 따라 전우선생을 배알하였다. 당시 전우는 이유흥에게 ‘심통경고(心桶敬箍)’라는 네 글자를 써 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음은 통과 같고 경은 테와 같으니 모름지기 단단히 죄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단단히 죄지 아니하면 통이 풀어져 흩어지게 된다. 이 말은 고인의 아름다운 말씀이시다. 글자는 비록 아름답지 않지만 뜻은 새겨볼 만하다.”

이어서 또

“경으로 마음을 검속하기를 마치 대껍질로 통을 조이는 것과 같이 해야 된다. 만약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하면 바로 풀어져 흩어지게 된다. 이렇듯 공부를 할 때는 절실히 공부하여 조금이라도 끊어짐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공부가 익숙한 경지에 도달하면 비록 죽고 사는 것이 앞에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이후 이유흥은 29세 되던 해에 김준영의 명에 따라 전우를 만나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처럼 이유흥의 학문은 김준영으로부터 입문하고, 다시 전우를 통하여 그의 학문의 대강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나라에 큰 일과 큰 변고가 있을 때는 반드시 김준영과 전우에게 질정을 한 후에 실천에 옮기었다.

당시 사람들 중에 일부는 스승인 전우가 어려움에 처한 조국의 현실을 등지고 산천에 도피하여 학생들을 모아 부질없는 강학만 한다는 비난하였다. 이유흥은 이에 대하여 전우의 입장을 적극 대변하고 자신도 전우와 똑같은 길을 걷고자 하였다. 불가항력적인 일제와의 육체적인 싸움보다는 학문을 강마하고 도의 전수를 통해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훗날 외세를 제거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흥은 스승의 처세방법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세간의 더러운 입으로 선생을 비난하기를 ‘스스로 세상을 피한다고 한다면, 어찌 높이 날아가고 멀리 달아나서 인간 세상에 있지 않아야 하는데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는 것을 달갑게 여기는가’라고 한다. 이것은 자신의 좁은 사심으로 군자의 광대한 마음을 엿본 것이다. 옛날 기자가 스스로 ‘은나라가 망하니 나는 그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훗날 무왕을 위하여 「홍범(洪範)」을 진설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이 도를 우임금에게 주고 나에게 전하여 나로 하여금 스스로 끊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성인이 천하 만세를 위한 지극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전우선생이 전하고자 하는 도는 유래가 있으니, 어찌 세상에 숨는다는 이유로 도를 전하지 않겠는가. 대개 함께 행하여도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어찌 세속의 무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여기에서 이유흥은 스승인 전우의 처세를 기자(箕子)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기자는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의 숙부였다. 그러나 주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라가 망해갔고, 결국 주나라 무왕이 군대를 일으켜 주왕을 물리쳤다. 물론 기자도 처음에는 주왕이 음탕한 생활에서 벗어날 것을 충고하였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기자에게 차라리 나라를 떠나라고 하자, 기자는

“신하된 자가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고 하여 나라를 떠나버리는 것은 결국 군주의 잘못을 부추기는 꼴이니 차마 그럴 수 없다”

라고 하면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훗날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다음에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그에게 통치의 이치를 묻자 「홍범」을 지어 통치의 요체를 제시하였다.

이처럼 기자가 망해가는 은나라를 위해 투쟁하지 않고 훗날을 대비한 것처럼, 전우가 현실을 피하여 산속에서 학생들을 강학한 것도 훗날을 도모하는 기자의 처신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전우가 적극적으로 외세에 대응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큰 뜻이 있기 때문인데, ‘세속의 무리들이 선생의 큰 뜻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비판하였다. 이처럼 이유흥은 전우의 처세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상황에서는 오직 학생들을 모아 강학을 하여 도를 전수하는 것이 더 시급한 것이라 보았다.

한편 이유흥은 전우의 ‘성사심제(性師心弟)’를 평생의 화두로 삼고, 성(誠) 공부를 그의 학문을 실천하는 근저로 삼는다. 물론 전우 이전의 율곡을 비롯한 여러 성현들의 가르침에 대한 영향 또한 배제할 수 없지만, 보다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전우와 김준영의 학문과 덕행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전우는 이유흥에게

“성사(性師)의 뜻이 있음을 돌아가 구하고, 심제(心弟)를 행할 것을 마음을 비우고 받아라. 이 이치는 신묘하여 다함이 없으니 바로 받아 끝까지 연구하라.”

라고 하였다. 이 글은 전우가 자신의 평생에 걸친 학문의 총결이라 할 수 있는 ‘성사심제’를 제자인 이유흥에게 전수하면서 평생의 화두로 삼을 것을 계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사심제는 심이 성을 높여서 심이 감히 스스로 멋대로 쓰지 못하는 것을 말한 것이니, 예컨대 마음이 인(仁)을 어기지 않거나 마음을 잘 보존하고 성을 잘 기른다는 것들이 이것이다. ‘마음이 주재가 된다’는 것은 리는 함이 없고 기는 함이 있음으로 말한 것이니, 성이 그 마음을 검속할 수 없고, 마음이 능히 성을 다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이것이다.”

 

이 구절은 성리학의 주요 개념인 ‘심통성정(心統性情)’에 근거하여 심의 주재성을 강조하는 전우 반대 학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전우 반대 학자들은 ‘심이 성정을 통섭한다(心統性情)’는 구절에 근거하여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한다고 주장한다.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하기 때문에 심의 지위는 리에 해당한다. 때문에 이들은 ‘심이 곧 리가 된다(心卽理)’고 주장한다. 또한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하기 때문에 ‘성은 높은 것이고 심은 낮은 것이다(性尊心卑)’, 또는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이다(性師心弟)’라는 것을 주장하는 전우를 비판한다.

이러한 전우 반대 학자들의 비판에 대해, 이유흥은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라는 이론으로 전우의 주장을 변호한다. 성은 무위(無爲)하기 때문에 리가 되고, 심은 작용이 있기 때문에 기가 된다. 또한 성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형이상의 개념이고 심은 형체가 있기 때문에 형이하의 개념이다. 심이 기이고 형이하의 개념이기 때문에 리이고 형이상의 개념인 성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존귀한 성보다는 비천한 것이 된다. 이것을 또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비유하면, 성은 스승의 지위가 되고 심은 제자의 지위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유흥은 전우의 입장에서 전우 반대 학자들의 ‘심이 곧 리이다’는 해석을 비판하고, ‘심이 곧 기이다’를 주장한다. 심이 리가 아니고 기이기 때문에 리인 성에 비해 낮은 것이 되고, 스승인 성에 비해 제자의 지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그의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이다’는 ‘성사심제’의 이론이다.

또한 이유흥의 호가 성암(誠菴) 또는 성재(誠齋)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평생 공부는 ‘성’에서 출발하고 ‘성’으로 마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승인 김준영은 성과 관련시켜 이유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유흥은 ‘성’자의 공부에 있어서 생각이 이미 반을 지났다고 할 수 있다. 성에는 학자의 성과 성인의 성이 있다. 예를 들어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학자의 성이며, ‘지극히 성실하여 그침이 없다’는 것은 성인의 성이다. 대저 배운다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것이다. 성인은 사람이며 나 또한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배우는 것이 어찌 이르지 못할 도리가 있겠는가. 단지 노력하는 것에 달려있을 뿐이다. 지금 이유흥은 그 뜻을 성실히 하는 자이다.”

 

여기에서 김준영은 성을 ‘학자의 성’과 ‘성인의 성’으로 구분하고, 이유흥이 이미 ‘학자의 성’의 단계를 지나 ‘성인의 성’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한다. 배운다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것이며, 성인 또한 사람이니 성실히 노력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노력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일념 하에, 평생토록 학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의 ‘성’자상의 공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공자와 맹자의 주요 내용 중에서 서로 모순되는 듯한 주장에 대한 이유흥의 해석을 소개한다. 즉 공자는

“성인과 같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과 아주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변화시킬 수 없다”

라고 하였고, 맹자는

“사람들은 모두 요임금과 순임금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공자는 아주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리 교육을 하더라도 성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고, 맹자는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와 맹자의 이 두 말은 분명이 서로 모순된다. 한쪽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성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고, 한쪽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서로 어긋나는 주장에 대해 이유흥은 다음과 같이 둘의 차이를 설명한다.

 

“어떤 이가 물었다. 공자는 ‘상지와 하우는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하였고, 맹자는 ‘사람은 모두 요임금과 순임금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성현의 말씀이 다른 것이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 그런 것인가. 이유흥이 대답하였다. 무릇 경전의 뜻을 강론함에는 마땅히 그 말의 근본에 나아가 각각 그 이치를 연구해야 하고, 같거나 다른 것을 비교하여 도리어 그 본뜻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맹자는 일반사람과 요순이 본래 성품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공자는 사람 성품의 선과 악을 크게 나누었다. 따라서 상지와 하우는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말씀마다 각각 마땅한 바가 있다.”

 

즉 맹자는 본연지성에 근거해서 사람들이 누구나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이고, 공자는 기질지성에 근거해서 기질에 따라 사람의 성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맹자가 내면의 순선한 본질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라면, 공자는 드러나는 현실속의 선과 악이 혼재하는 인간의 모습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이유흥은 공자와 맹자의 서로 모순되는 듯한 구절을 ‘각각 마땅한 바에 나아가서 말한 것’으로 해석한다. ‘각각 마땅한 바에 나아가서 말한 것’이라는 것은 공자는 인간의 드러나는 현상에 나아가서 말한 것이고, 맹자는 인간의 본질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주자 성리학에서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설명하였다. 따라서 학문의 궁극적 목표는 본연지성을 회복하여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되는데 있으며, 또한 그 공부과정은 바로 가질지성에 해당하는 기질을 변화시키는데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참고문헌]: 「성암 이유흥의 처세와 학문」(민경삼,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원(崔愿)


최원(崔愿)                                                                       PDF Download

1896년∼1943년. 근현대의 유학자.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의숙(毅叔), 호는 경암(敬庵) 또는 수양자(首陽子)이다. 전우(田愚)와 오석농(吳石農)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최원은 나라가 망하고 도가 쇠퇴한 시대에 살면서 스승의 설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스승인 전우의 심성론을 최원과 연결시켜 소개한다.

전우는 ‘심본성(心本性)’을 자신의 학문적 종지임을 표방한다. ‘심본성’이란 말 그대로 ‘심은 성에 근본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심이지만, 이러한 심이 곧장 선한 행위의 근거가 될 수 없고, 반드시 성에 근본하거나 표준으로 삼아야 인간의 행위가 도덕적 당위성을 얻을 수 있다. 심은 어디까지나 순선한 리의 범주가 아니라 선악이 함께 섞여있는 기의 범주이기 때문에 심의 작용이 곧장 선한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이러한 심이 반드시 성을 표준으로 삼을 때 비로소 인간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올바름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일부 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유학자들이 바로 이진상(李震相)과 그의 제자인 곽종석(郭鍾錫)을 비롯한 한주학파의 유학자들이다.

이진상은 ‘심이 곧 리이다’는 ‘심즉리(心卽理)’ 이론을 제기하여 심을 성에 근본지어 설명하는 전우의 ‘심본성’ 이론을 비판한다. 여기에서 이진상과 전우의 이론이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데, 전우는 심을 기로 해석하지만 이진상은 심을 리로 해석한다. 전우는 심을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기로 보았기 때문에 심의 작용을 전적으로 선한 행위로 보지 않았으며, 이진상은 심이 심다울 수 있는 것은 심의 본체에 해당하는 리로 보았기 때문에 심의 작용을 전적으로 선한 행위로 보았다. 이에 전우는 ‘심의 작용이 전적으로 선하다’는 이러한 해석이 자칫 마음의 객관성을 상실하여 주관성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전우는 ‘성은 리의 범주이고 심은 기의 범주이다’는 인식에서 성과 심을 분명히 둘로 구분한다. 이것은 이진상이 ‘심이 곧 성이고 리이다’는 해석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성리학의 주요 명제인 성즉리(性卽理)에 근거하면 성은 리이지만, 심은 지각작용을 하기 때문에 기의 범주가 된다는 것이다.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며, 또한 성은 형이상의 개념이고 기는 형이하의 기념이다. 형이상과 형이하의 두 범주를 비교하면, 형이상은 높은 것이 되고 형이하는 낮은 것이 된다. 때문에 전우는 형이상의 개념인 성은 높은 것이고 형이하의 개념인 심은 낮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을 또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비유하면, 형이상의 개념인 성은 스승이 되고 형이하의 개념인 심은 제자가 된다.

여기에서 전우의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이 등장한다. ‘성사심제’란 말 그대로 심과 성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비유한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비유할 때, 성은 스승의 지위에 해당하고 심은 제자의 지위에 해당한다.

“성사심제란 대개 심의 운용에서 성이 선함이 발현된 것을 모범으로 삼아 하나하나 본받는 것을 말한다.”

심은 어디까지나 성에 근본하거나 성을 표준으로 삼아야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우의 ‘성사심제’ 네 글자는 스스로 창안한 것이라고 자부하였으며, 육경의 수만의 말이 모두 이 이치를 밝힌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심은 성을 표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성은 심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갖는다는 말이다. 때문에 ‘성사심제’설은 후에 ‘성존심비(性尊心卑)’설로 대체되어 설명된다. 성은 심보다 더 높고 존귀한 개념이며, 심은 성보다 더 낮고 비천한 개념이라는 말이다.

물론 전우의 이러한 심과 성에 대한 해석은 당시 이진상을 비롯한 한주학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들은 심을 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을 곧장 리로 보아 ‘심이 한 몸의 주재가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들은 리에 아무런 작용이 없다는 무위(無爲)의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활동하고 주재하는 능동적 개념으로 해석한다. 리가 실제로 활동하고 주재하는 능동적 개념이라야 실제로 인간에 있어서 심의 작용을 주재함으로써 선한 행위를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심은 리의 주재 하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심과 리를 일치시켜 심이 곧 리라는 ‘심즉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전우는 심이 곧장 일신의 주재가 될 수 없고, 심이 성을 표준으로 삼는 것처럼 성을 전제로 할 때만이 한 몸을 주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심은 곧장 성(또는 리)의 개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작용성을 가진 기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심이란 영각(靈覺)한 물건에 불과하니 그것을 믿어 대본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명에 근원하여 도심이 되어야 비로소 일신의 주재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전우는 심을 영각한 물건으로 해석한다. ‘영각한 물건’은 어디까지나 맑은 기의 개념이지 순수하고 절대적인 성(또는 리)의 개념과는 구분된다. 아무리 맑은 기라도 순수하고 절대선인 성과는 구분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심 자체가 곧장 일신의 주재가 될 수 없고, 심이 성을 따르거나 성을 표준으로 삼을 때라야 일신의 주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우는

“성에 근본해서 기를 주재하는 것이 심이다”

라고 하였다. 즉 심이 직접 기를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에 근본할 때 심을 주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최원은 간재의 성리설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스승의 ‘심본성’이나 ‘성사심제’의 학설을 적극 계승한다. 최원과 전우의 관계를 확인할 있는 글을 소개한다.

“선대부터 소자에 이르기까지 30년간 스승을 섬겼는데, 이 한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금이라도 스승을 앞서는 일이 없었으며, 아는 것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스승을 존경하고 복종하며 섬겼는지를 알 수 있는 글이 있다.

그러나 최원은 전우의 ‘성사심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성본심주(性本心主)를 강조한다. ‘성본심주’는 성은 근본이고 심도 역시 주인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스승의 주장처럼 ‘성은 높은 것이고 심은 낮은 것’이라고 하면, 자칫 심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힘써 심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우의 ‘성은 스승이고 높은 것이라는 성존(性尊)’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심은 제자이고 낮은 것(心卑)’이 아니라 심도 동시에 주인에 해당하는 높은 지위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원은

“성이 참으로 존귀하고 심도 역시 귀중하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전우가 ‘성은 스승이고 높은 것이며 심은 제자이고 낮은 것’으로 보았던 것과 구분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원은 심과 성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설명한다.

“스승의 가르침인 ‘성본(性本)’이론은 이미 완비되어 충분한데, 제자가 여기에 더하여 심주(心主)를 말하였다. 대개 스승께서는 성을 낮게 보는 폐단을 구제하려고 ‘심이 낮다는(心卑)’는 뜻을 밝히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여 심이 주인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요컨대 심을 낮게 보면, 마침내 힘써 심 공부를 하지 않고서 오로지 성론만을 숭상하게 된다. 그러면 심은 두루 체용을 잃고 성은 머무를 곳이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성과 심의 관계는 스승이 ‘성사심제(또는 성존심비)’로 이미 자세히 밝혀놓았다. 물론 스승의 ‘성사심제(또는 성존심비)’의 요지가 성을 낮게 보는 폐단을 구제하려는 있지만, 그렇다고 심을 낮은 것으로만 보면 자칫 심 공부 자체를 소홀히 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최원은 심은 낮고 비천한 것이 아니라 심 역시 성과 마찬가지로 높고 존귀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래야 허령신명(虛靈神明)한 심이 주재작용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고, 성 또한 심에 머무를 곳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가의 ‘본심설(本心說)’은 다만 심만을 말하고 성을 말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동시에 동문들 가운데 성을 말하면서 심을 낮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을 비판하여

“성론에 대해서는 말을 잘 들으면서 심의 공부는 보기가 어렵다”

라고 지적한다. 심을 주재로 여기고, 심을 존귀한 것으로 여겨야 비로소 성을 다할 수 있다. 심을 다하면 성을 다하고 성을 다하면 심을 다하니, 이 양자는 두 가지 일이 아니며 서로 체용의 관계가 된다. 이처럼 최원은 스승의 학설을 계승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스승의 이론이 갖는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나갔던 것이다.

 

 

[참고문헌]: 「경암 최원의 학문과 사상」(유흥숙․채방록, 『간재학논총』10, 간재학회,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병심(崔秉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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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고종 11)∼1957년. 근현대의 유학자.

최병심의 본관은 전주. 자는 경존(敬存), 호는 흠재(欽齋)이다. 아버지는 최우홍(崔宇洪)이며, 어머니는 이천 서씨로 서학문(徐鶴聞)의 딸이다. 이병우(李炳宇)와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최병심은 1874년 10월 5일 전주 교동(현재 한옥마을)에서 아버지 최우홍과 어머니 이천 서씨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어머니 서씨는 흰 용이 옥류천(玉流泉) 위를 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최병심은 이 곳에서 1957년 향년 84세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지냈으며, 유학자로서의 높은 명성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최학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최근에는 이병은(李炳殷)․송기면(宋基冕)과 함께 전주의 ‘한옥마을 삼재(三齋)’라고 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려서 아버지 벽계공에게 글을 배우다가 16세 때 이병우에게 『논어』․『맹자』․『대학』․『중용』의 사서와 『주역』․『춘추』․『서경』 등을 배웠다. 23세 때 송병선(宋秉璿)을 알현하였는데, 당시 송병선은 『근사속록(近思續錄)』 한 권을 주면서 학업에 정진할 것을 장려했다고 한다. 『근사속록』은 송병선이 중국 송대의 주희가 편찬한 『근사록』을 모방하여 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송시열 등의 말을 모아 엮은 책이다. 송병선은 서문에서 조광조와 이황은 주돈이(周敦頤)와, 이이는 정호(程顥)와, 김장생은 장재(張載)와, 송시열은 주희(朱熹)와 같다고 하였다. 주희는 주돈이․정호․정이․장재의 글을 읽고, 이들 가운데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들을 뽑아서 『근사록』을 편찬하였으며, 그 편찬 목적에 대해 초학자들에게 광대한 성리학 이론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24세 때 태안으로 가서 전우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당시 안면도 연천서당에 기거하고 있던 전우는 최병심을 보고

“우리 유학을 맡길 만하다”

라고 하고, 『서경』에 나오는 ‘흠명문사(欽明文思)’에서 ‘흠’자를 따서 호를 지어 주었다. ‘흠명문사’는 요임금의 덕을 칭송한 말로 ‘흠’은 몸을 삼감, ‘명’은 이치에 밝음, ‘문’은 문장이 빛남, ‘사’는 생각이 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병심은 스승이 지어준 ‘흠’자를 스스로 ‘흠’자의 옛날 음인 ‘금’으로 고쳐 불렀는데,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흠재’가 아닌 ‘금재’라고 불렀다. 이후 전우가 천안으로 거처를 옮기자, 최병심은 전주로 돌아와서 옥류동에 서당을 열고 이름을 옥류정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평생을 후학양성에 매진하였다.

31세 때 명릉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37세 때 경술국치를 당하자 발산(鉢山)에 올라가 하루 종일 통곡하고 두문불출하였는데, 이때부터 기거하던 옥류동을 벗어나지 않았다. 39세 때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에서 활동하였는데, ‘임자동일맹’은 이석용(李錫庸)이 조직한 항일의병대였다. 44세 때는 당시 도지사 이진호가 대지를 팔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자, 토지수용령을 발동하여 가옥을 불태우고 집을 강제로 철거하였다. 45세 때는 망동묘에 가서 제향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다가 괴산경찰서에 7일 동안 구금되었다. 51세 때는 스승 전우의 문집 간행 문제로 오진영(吳震泳)과 논박하였으며, 64세 때는 『염재야록(念齋野錄)』 서문을 써준 일이 말썽이 되어 임실경찰서에 5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단식으로 풀려났다. 조희제(趙熙濟)가 한말 독립투사들의 비밀 일을 엮은 『염재야록』 서문을 쓴 일로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 옥고를 치른 것이다. 68세 때 일제에게 빼앗겼던 잠종장 땅을 23년 만에 돌려받았고, 광복 3년 후인 75세 때 성균관 부관장에 추대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의리를 지키고 강학에 힘쓰던 최병심은 1957년 윤8월 10일 향년 84세의 일기로 옥류동 염수당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최병심은 스승 전우를 모시기를 마치 부모를 섬기듯이 하였고, 스승과 친구들에 대한 의리가 지극하였다고 한다. 왜적에 대해서는 감옥에서나 집에서는 죽음으로 항거하여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옥류동을 백이와 숙제의 수양산에 비유했다고 하니 그 인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병심은 당시 열강제국의 침략에 따른 국난 속에서 자신의 거취를 은둔 강학의 행로로 정하고 그 길을 걸었다. 전우의

“선비는 난세에 처하여 의리를 지키지 않으면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

라는 말처럼, 국가와 종묘사직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고 여겼으며, 결국 의리를 지키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에 산림의 선비로 자처하고 도학을 지키는 것을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다. 국가가 무너진다면 도를 지켜 훗날을 기약해야 하고, 도가 지켜진다면 국가도 회복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강학하고 교육하면서 의를 지키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여겼다. “도란 넓고 넓어서 밖이 없는 법이니 나라가 도 가운데 있지 않겠는가.” 결국 국가가 무너진다면 도를 지켜 훗날을 기약해야 하고, 도가 지켜진다면 국가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학자가 행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강학임을 자임하였으니, 이에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것도 그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이적이 중국을 어지럽히고 난적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은 모두 우리 유학자들의 도학이 밝혀지지 않고 옮음을 행함이 닦여지지 않아서 극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비록 국가가 이미 기울어지고 인류가 멸망하게 되었지만, 우리들이 의리를 강론하여 사사로움을 없애버리는 공과 후학들에게 도를 가르치는 마음은 마땅히 더욱더 정성스럽게 해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도가 지켜진다면 국권의 회복도 가능하다는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 최병심은 이러한 세계관을 철저히 지켰으니, 이로써 전주에 옥류정사를 개설하고 많은 문하생들을 배출하였다. 그의 『문집』의 부록에 실려 있는 문인록인 「옥산연원록」에 기록된 인원만 해도 277명이 된다.

최병심은 1912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이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에 걸쳐 일본군과 항전을 계속하여 독립밀맹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지역을 맡아 이석용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이석용이 쓴 『호남창의일기』, 「불망록」에는 최병심이 이석용을 지원한 기록이 나와 있는데, 여기에는 최병심이 기유년 10월 전5냥, 경술년 3월 전5냥, 신해년 2월 전20냥, 신해년 12월 전3냥, 임자년 4월 전2냥, 경술년 봄에 모시두루마기 1벌을 지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최병심의 항일의식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은 이른바 한전(韓田)사건이다. 여기서 한전이란 우리나라 땅이란 뜻이다. 1918년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간파하고, 일제가 옥류정상 일대 1,800평을 잠업시험장으로 조성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강탈하려 하자, 최병심은 결사 항거하였다. 이에 일제가 집 일대에 불을 질렀으나 최병심은

“불에 타 죽겠다”

고 버티었다. 도리어 당황한 일본경찰들에 의해 그가 구출되었으나, 결국 그 후 토지는 일제에 압류되고 말았다. 최병심은 이 싸움을 22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그것은 한낱 자기 소유의 땅 한 필지를 찾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그 땅에 담겨진 조상의 얼과 그 조상들이 더불어 살았던 조선의 강토를 찾는 싸움이었다. 1941년에 이르러서야 한전사건이 해결되어 이 땅이 반환되었다.

한전사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한전사실추록(韓田事實追錄)」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사년에 전라북도 도지사인 적신 이진호가 잠업을 위한 뽕나무 밭을 넓힌다는 핑계로 병심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땅을 팔 것을 청하였다. 병심이 의리를 들어 허락하지 않자 이진호는 군인 수백 명을 동원하여 집을 둘러싸고 가족들을 때리고 묶은 뒤 집을 불사르고 밭을 빼앗고 쫓아냈다.”

이처럼 최병심은 격변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후학들에게 투철한 항일정신과 유학의 본질인 도학과 의리정신을 불러넣었음은 물론, 자신도 일생을 항일투쟁으로 일관하였다. 그 결과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항일사상은 마침내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국가유공자로 포상되었다. 정부는 1990년 8월 15일에 최병심의 공로를 기려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금재 최병심의 학문과 사상」(이상호, 『간재학논총』10, 2010), 「최학자 금재 최병심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김명엽, 『열린전북』104, 200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영선(柳永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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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고종 30)∼1960년. 근현대의 유학자.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희경(禧卿), 호는 현곡(玄谷)이다. 유영선은 갑오개혁과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893년에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일제강점기에 청장년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광복을 맞아(53세) 인생의 후반기를 보냈으니 일생의 대부분을 혼란기에서 보낸 셈이다.

아버지는 유기춘(柳其春)이고 어머니는 광주 이씨이다. 5세 때 할아버지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2세 때는 할아버지를 따라 당시 고부 영주산에서 강학 활동을 하고 있던 전우(田愚)를 찾아가 스승의 예를 행하고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전우는 영남의 곽종석과 함께 조선 말기의 끝자락을 장식한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처음 전우에게 나아갔을 때에, 전우는 유영선의 나아가 어리기 때문에 몇 년을 기다렸다가 공부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유영선이 눈물을 흘리며 떠나지 않자 전우가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18세 때에 전우와 함께 군산도에 들어갔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유영선은 스승을 모시고 산속으로 들어가 통곡하며 침식을 잊으니 목이 메이고 말이 막혀서 몸을 보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20세 때(1912)에는 전우를 따라 계화도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성기운(成璣運)․권순명(權純命)․오진영(吳震泳) 등과 전우의 문집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28세 때인 1920년 11월에 전우의 문집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전우를 모시면서 배운 공부는 유영선의 학문적 성취와 성리설에 대한 견해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30세(1922) 때 전우가 죽자 심상(心喪, 마음으로 하는 상례) 1년을 입었다. ‘심상’은 상복은 입지 않으면서 상중에 있는 것과 같이 처신하는 것을 말한다. 심상은 대체로 제자가 스승을 위해 하는 것으로, 스승과는 혈연관계가 없지만 슬퍼하는 마음이 친자식 못지않기 때문에 심상을 한다.

당시 전우를 모신 제자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서도 화도(華島) 삼주석(三柱石)이라 불렸다. ‘화도 삼주석’이란 전우의 문하를 지탱하는 세 돌기둥이란 뜻이니, 당시 전우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전우의 문인에 관한 내용은 1962년에 나온 『화도연원록(華嶋淵源錄)』이 가장 자세하다. 이 연원록은 「관선록(觀善錄)」․「급문(及門)」․「존모록(尊慕錄)」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여기에 등록된 인원이 모두 2,338명으로 전우의 직전제자 범위에 든다고 볼 수 있다. 유영선의 학문이나 사상 형성에 있어서, 특히 조부인 유지성(柳志聖)의 영향이 컸다. 그는 손자인 유영선을 일찍부터 맡아 가르쳤고,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수천 권의 서책을 집안에 마련할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유영선이 전우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함으로써 이이-송시열-이재-김원행-홍직필-임헌회-전우로 이어지는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한다. 조부인 유지성은 간재와 친밀할 뿐만 아니라 학문적 교유도 잦았다. 아버지 유기춘은 임헌회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이러한 집안의 학문 배경으로 인해 유영선은 임헌회와 전우의 학문을 어려서부터 접할 수 있었다. 더구나 조부가 직접 전우에게 교육을 부탁함으로써 유영선은 전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9년을 한결같이 수학하여 그의 학통을 이었다. 말년에는 자비를 들여 현곡정사를 지어 후학들을 양성하였는데, 전국에서 찾아온 제자들의 수가 수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신사범(申思範)․임종수(林鍾秀)․정헌조(鄭憲朝)․유제경(柳濟敬) 등이 있다.

유영선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태극도설」․「기질명덕설」 등과 관련하여 주고받은 서신을 분류하여 『성리유선(性理類選)』(44세, 1936)을 편찬하였으며, 『담화연원록(潭華淵源錄)』(48세, 1940)을 지어 공자와 주자를 계승하여 이이-송시열……전우로 이어지는 도학의 학통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 집안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한 저서로 『훈자편(訓子編)』․『규범요감(閨範要鑑)』 등이 있다. 특히 예학에 밝았는데, 『사례제요(四禮提要)』(60세, 1952)는 관혼상제의 예학에 관해 총 정리한 저술이다.

“관혼상제는 인간이 인간되는 도리로써 한번 예를 잃으면 오랑캐로 돌아가고, 두 번 예를 잃으면 짐승에 가깝게 된다”

라고 하여 관혼상제를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사후에 아들에 의해 『현곡집』(1978) 32권 16책이 출간되었다. 유영선은 고창에 용암사를 건립하고 전우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 이 용암사에 배향되었다.

유영선은 집안의 학문 배경과 전우를 사사하면서 성리학을 자신의 주요 학문으로 삼았다. 유영선의 성리학적 특징은 기호학파의 전통적 입장인 ‘리는 무위(無爲)하고 기는 유위(有爲)하다. 성은 무위하니 리이고 심은 유위하니 기이다’는데 근거하여 자신의 성리학 이론을 전개한다. 성리학은 이 세상의 존재를 리와 기의 범주로 설명한다. 리는 원리 또는 법칙을 가리키고, 기는 구체 사물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호흡되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기의 영역에 포함된다. 반면 리는 이러한 기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이유 또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리는 원리이고 법칙의 개념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냄새도 없는 개념이다. 때문에 이러한 리의 성질을 ‘무위(無爲)’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말 그대로 함이 없다는 것으로, 작용의 성질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대로 기는 구체 사물이기 때문에 작용의 성질을 가지므로 유위(有爲)라고 말한다. 즉 어떤 행함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리의 개념을 두고 조선의 유학자들은 정의를 달리한다. 유영선처럼 리를 철저히 ‘무위’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리를 지나치게 ‘무위’의 개념으로 해석할 경우 리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또는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을 우려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래서 리의 무위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리가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기적 존재를 주재하는 주재성 또는 능동성을 강조하게 된다. 실제로 기의 세계를 주재하기 때문에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리에 능동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리가 실제로 인간의 심의 작용을 주재하여 인간의 마음이 올바르게 작용하도록 돕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의 경우, 사람의 몸을 주재하는 것은 마음인데, 이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리의 실제적 주재성을 확립하여 현실세계의 혼란을 야기하는 기의 활동을 철저히 차단해나갈 것을 강조한다. 율곡의 학문과 이론을 계승한 율곡학파에서 주로 전자를 주장한 반면, 퇴계의 학문과 이론을 계승한 퇴계학파에서는 주로 후자를 주장한다.

유영선을 율곡계열의 학자로 그의 이론은 철저히 ‘리가 무위하고 기가 유위하다’는데 근거하여 전개된다. 리는 무위하므로 작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의 몫이 된다. 따라서 성리학에서의 주요 이론인 리의 동정(動靜, 움직이고 고요한 것)문제 또한 반대한다. 동정하는 것은 결코 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영선은 ‘성은 무위하므로 리이고, 심은 유위하므로 기이다’는데 근거하여 자신의 심성이론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심과 성을 서로 다른 별개의 물건으로 구분하고, 성은 높고 심은 낮다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이론을 전개한다. 성은 형이상의 개념이기 때문에 높은 것이 되고, 심은 형이하의 개념이기 때문에 낮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은 순수한 리이기 때문에 순선한 것이지만, 심은 리와 기가 합쳐져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이 함께 한다. 또한 심은 유위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로 규정하고, 심은 기이므로 항상 성을 근본으로 삼을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스승인 전우 ‘심본성(心本性)’의 이론적 요지이며 또한 유영선의 성리학적 특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심본성’은 심은 어디까지나 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심은 기이니 선과 악이 함께 있으므로 항상 순선한 성을 표준으로 삼아야 악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영선은 왜 심이 성을 근본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는가.

이것은 당시에 심을 리로 규정하여 판단과 행위의 기준으로 삼는 당시 ‘심즉리’를 주장하는 심학파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심학파의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심즉리’를 주장한 이진상(李震相)과 그의 제자 곽종석(郭鍾錫)이다. 이들은 인간의 선한 행위의 근거를 직접 심에서 구함으로써 그 실천을 더욱 강조하고 보편화시킨다. 이들처럼 심을 리로써 규정할 경우, 자칫 심이 내리는 판단이 자의적으로 해석됨에 따라 현실의 모든 일들을 주관적으로 판단되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예컨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결국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객관적 기준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고, 나의 생각과 판단을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그러나 내 마음의 생각과 판단이 옳다는 이러한 주장은 자칫 지나치게 주관적인 경향에 빠져서 객관적인 기준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나의 입장에서 옳다고 판단되는 일이 상대방 입장에서 그른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표준이나 기준이 애매모호해진다는 말이다.

때문에 유영선은 어떤 일에서나 도덕규범에서나 객관적 표준을 수립할 것을 강조한다. 그 객관적 표준은 바로 심이 성을 근거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곧장 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성에 근본할 때만이 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의 리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객관적 도덕표준을 가리킨다. 이에

“성을 높여서 스승으로 삼는 것은 바른 학문이 되고, 심을 믿고 자만하는 것은 이단의 학문이 된다”거나 “심은 기에 속하니 심이 감히 멋대로 써서는 안되고 반드시 성으로 근본을 삼으니, 이것이 학문의 바뀔 수 없는 정론이다”

라고 강조한다. 심은 어디까지나 기이기 때문에 심을 믿고 자만하면 이단의 학문에 이르게 되니, 반드시 성을 스승으로 삼아 따르고 높여서 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본성’을 주장하고, 이러한 ‘심본성’에 근거하여 성은 심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성존심비’를 주장한 것이다.

 

[참고문헌]: 『현곡집』(유영선, 여강출판사, 198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상사에서 간재학의 위치」(금장태, 『간재학논총』1, 간재학회, 1994)

이보림(李普林)-2


이보림(李普林)-2                                                       PDF Download

1903년(고종 7)∼1972년. 근현대의 유학자.

경상남도 김해 출신. 본관은 전주. 자는 제경(濟卿), 호는 월헌(月軒)이다. 이 글에서는 이보림의 학문관을 소개한다.

이보림의 학문 가운데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지심설(持心說)>이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단지 문자에만 관심을 둘 뿐이고, 몸과 마음이 지니는 법도에 대해서는 조금도 유념하지 않는 것을 우려한다.

“문자를 아는 것은 말단인데 배우려 하고, 몸과 마음을 지니는 법은 근본인데 유념하지 않으니, 이게 무슨 도리인가. 또 문자를 알려고 해도 먼저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하여야 말소리를 듣는 대로 마음에 통하여 문자를 쉽게 알고 쉽게 기억한다. 비유하면 땅이 굳어야 물이 새지 않고, 통이 견고해야 물이 새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은 글자를 배우기 전에 먼저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하고나서 책을 대하면 문자를 쉽게 알고 기억도 좋아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학문은 근본을 세워야 하고, 학문의 근본은 ‘지심(持心)’에 있다고 강조한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며, 사람과의 접촉을 바르게 하고, 일처리를 바르게 하며, 처세를 바르게 하는 것, 이 다섯 가지 바른 자세 중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근본이다. 근본이 바르면, 그 나머지는 바르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즉 온갖 행실의 근본은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데 있으며, 반대로 마음가짐이 바르면 그 나머지 것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보림은

“의복을 아름답게 하고, 음식을 아름답게 하고, 집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모두 제 몸을 아름답게 하는 것만 못하다. 제 몸을 아름답게 하려면, 먼저 제 마음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도리는 다른 게 없다. 먼저 제 욕심을 버리고서 고요할 적에 텅 비고 밝으며 움직일 때에 바르고 곧음이 바로 그 방법이다.”

라고 하였다. 즉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몸을 아름답게 하는 것만 못하고, 또한 몸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만 못하다. 이것은 일체의 어떤 것보다도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방법으로, 고요할 때에 마음을 텅 비고 밝게 하는 것과 움직일 때에 바르고 곧게 하는 것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고요할 때’란 마음이 외부 대상에 의해 생각이나 의식과 같은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때를 말하고, ‘움직일 때’는 마음이 외부 대상에 의해 생각이나 의식과 같은 작용이 일어난 때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아무런 생각이나 의식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고요하다’고 하는 것이고, 마음이 생각이나 의식작용이 일어난 상태이므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이러한 고요할 때와 움직일 때의 마음 상태를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미발’이란 아직 생각이나 의식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이발’은 생각이나 의식작용이 이미 일어난 상태를 말한다. 또한 이러한 미발의 상태를 성(性)이고 하고 이발의 상태를 정(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마음은 작용이 일어나기 이전의 ‘성’의 상태와 작용이 일어난 이후의 ‘정’의 상태를 모두 포괄하고 있으므로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부른다. ‘심통성정’은 성리학의 주요한 명제이다. 심이 성과 정을 모두 통괄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이보림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고요할 때의 텅 비고 밝게 하는 것과 움직일 때의 바르고 곧게 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미발’과 ‘이발’을 관통하는 마음공부를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이보림은 이러한 마음을 바르게 하는 마음공부를 바람 앞의 등불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마음이란 바람 앞에 등불을 지키느라 종이로 막고 있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등불이 곧장 꺼지고 만다. 사람의 마음가짐도 이러하다. 조금이라도 관찰하지 아니하면 마음이 곧장 어둡고 흩어진다.”거나 “마음가짐은 촛불을 들고 있는 것과 같다. 조심조심하여 조금도 방심하지 아니하여 사물이 다가올 적에 항상 우뚝하게 주장하여 일에 따라 바뀌지 않고 물건에 따라 옮겨가지 않으면서, 오직 지극한 선을 착실하게 밟아가야 한다. 이곳의 공부는 매우 정밀하여 쉽사리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오래도록 계속하여 실행해나간다면, 안자(顔子)의 ‘3개월간 인을 어기지 않는다’는 공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쉽게 꺼질 수 있는 위태로운 물건이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좋은 것을 보면 곧장 마음이 좋은 것에 빼앗기고, 예쁜 것을 보면 바로 마음이 예쁜 것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마음은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며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된다. 항상 마음이 사물에 끌려가지 않도록 우뚝이 지킬 수 있어야 지극한 선을 실천해나갈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을 지키는 공부는 매우 어려우며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어려운 공부를 오래도록 쉬지 않고 지속해나갈 수 있으면 중국의 성현인 안자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 구절은 『논어』「옹야」편에 나오는 글로, 공자는 인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안자의 어짊을 칭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 동안 인(仁)에서 떠나지 않지만 그 나머지는 하루 또는 기껏해야 한 달 동안 인에 생각이 미칠 따름이다.”

비록 인을 실천하고 체득하는 일이 어렵지만, 이러한 마음공부를 오래도록 실천해나갈 수 있으면 안자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이보림은 어려운 난세에 처하여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이를 솔선하여 지켜나가는 것이 학자의 책무라고 여기고, 이를 실천하는데 앞장섰다. 그러한 학자의 책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마음을 바로잡는 ‘지수’의 공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를 평생 실천해나갔다. 이런 점에서 이보림의 생애와 학문은 변화와 변혁을 다반사로 여기는 오늘날에 있어서 한번쯤 회고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월헌 이보림의 생애와 학문」(정경주,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월헌선생문집』(보경문화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