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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 신응구가 성혼의 원통함을 호소하다


『광해군일기』 : 신응구가 성혼의 원통함을 호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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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구(申應榘, 1553년∼1623년)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제자로 직산현감, 형조정랑, 이천부사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춘천부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1582년(선조 1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추천을 받아 장원(掌苑)이 되었다. 1588년 직산현감(稷山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임실·함열 등의 현감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7년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조정에 들어가 형조정랑·한성부서윤·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2년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충주목사·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그는 광주 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 광해군 2년인 1610년에는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대비 폐모를 주장하자 벼슬을 버리고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한 적이 있다. 그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에 서인이 집권하자 형조참의, 동부승지 등을 거쳐 장례원판결사, 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만퇴집(晩退集)』이 있다.
『인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사망 기록)를 보면 다음과 같이 사관의 평가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춘천 부사 신응구가 사망하였다. 신응구는 젊어서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부터 큰 명망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그런데 폐조(광해군 왕조) 때 임해군(臨海君, 광해군의 친형)의 옥사(獄事, 중대한 범죄를 다스림)을 당하여 조진(趙振) 등과 함께 정훈(正勳) 공신이 되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집에 있으면서 국가를 걱정한 공신이라고 모두 비웃었다. 뒤에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어서도 행실을 삼가지 못하였다는 비난이 많았으니, 스승들을 욕되게 하였다 하겠다.”(『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11월 2일)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임해군이 옥사를 당하였을 때 익사공신(翼社功臣, 1613년에 임해군의 역모를 제보한 사람과 취조를 담당하였던 48명의 신하들에게 내린 공훈 호칭)을 등록하면서 조정에서 그를 훈적(勳籍)에 넣자는 의견이 있어서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의 문무관)에 올라 영천군(靈川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신응구 본인은 이를 수치로 여겨 여러차례 상소를 올려 훈적에서 삭제해 주기를 청한 적이 있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0권(광해 즉위년 11월 22일)에 그가 스승 성혼을 위해 상소문을 올렸다는 기사(「광주 목사 신응구가 스승 성혼의 원통함을 상소하다」)가 실려 있다. 이 기사에는 성혼과 관련된 당시의 상세한 사정이 언급되어 있다.

성혼(成渾, 1535년∼1598년)은 호가 묵암(默庵) 또는 우계(牛溪)이며,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공조좌랑, 지평, 사헌부장령, 이조참판 등을 지낸 문신이다. 율곡보다는 두 살 위로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성혼과 율곡은 1554년경부터 같은 고을에 살면서 서로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성혼은 1551년(명종 6년)에 생원과 진사의 시험에 합격했으나 관리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1568년(선조 1)에 이황(李滉)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고 사숙하였다.
신응구는 먼저 상소문을 올리게 된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삼가 생각건대, 어리석고 천한 소신(신응구 본인)이 외람되게 옛날에 아는 사이라고 하여 큰 고을에 발탁 제수되었으니, 실로 분수에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경기의 고을로 옮겨 제수해 주심으로써 부모를 봉양하는 데 편리하도록 해주셨으니, 신의 영화와 다행은 한 몸에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신하 성혼(成渾)이 아직도 죄인의 명단에 올라 있어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화복(禍福)을 다르게 받고 있습니다.(자신은 임금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나 자신의 스승 성혼은 화를 받았다는 의미-필자주) 그러므로 당연히 성혼이 무함당한 곡절을 낱낱이 말씀드렸어야 하는데도, 상을 당해 애통 속에 황황히 지내어서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윽고 들으니, 해서(海西) 유생 이선장(李善長) 등이 상소를 올려 성혼의 원통함을 말씀드리자, 성상의 비답에, ‘자기가 좋아하는 데 빠져 대의를 잊고 있다.’라는 말씀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상께서 성혼을 이처럼 의심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습니다.”

이어서 신응구는 성혼이 비난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신이 삼가 성혼을 공격하는 자들의 말들을 살펴보니, 첫째는 ‘간악한 자의 당이다.’는 것이고, 둘째는 ‘임금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혼은 선왕조에서 세상에 없는 대우를 거듭 입어 거의 거르는 해가 없이 부름과 제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가난한 생활을 분수에 달게 받아드리며 평소의 지조를 변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계미년(1583년, 선조 16년)에 이이(李珥)를 신구(伸救,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히고 누명을 벗겨 남을 구원함)하면서부터 크게 여론에 거슬려 헐뜯는 말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계미년은 율곡이 1584년 정월에 병으로 사망하기 직전의 해이다. 율곡은 당시 병조판서로 임명되었는데 조정의 관리들, 특히 삼사의 관원들은 율곡이 시행한 조치나 조정에서의 처신을 빌미삼아 집요하고도 가혹하고 탄핵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탄핵에 대해서 성혼이 변호를 한 것이 비난을 받게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주장하였다.

“성혼이 간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은 다름이 아닙니다. 정철이 최영경을 얽어 죽인 것으로 여기는데, 그것은 성혼과 정철이 서로 친하였기 때문입니다. 성혼이 정철과는 비록 친하고 두텁게 지냈으나, 본디부터 조정에 서서 일을 함께 하려는 뜻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최영경을 끝까지 두둔한 사실이 있는데, 말할 게 있겠습니까?”

최영경(崔永慶, 1529년∼1590년)은 본관은 화순(和順)이며,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으로 서울 출생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조식의 제자들은 이황의 제자들과 함께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나중에 남인, 북인으로 나뉠 때, 북인을 형성하였다. 최영경은 벼슬이 지평 사축에 이르렀으나,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신응구는 성혼과 정철은 서로 친하게 지내기는 하였으나 동인 최영경이 감옥에 끌려가도록 뒤에서 조종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최영경을 두둔한 사실이 있는데 억지 주장을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다음과 같이 성혼의 아들이 찾아낸 성혼의 서신을 들었다.

“성혼의 아들 성문준(成文濬)이 아버지가 무고당한 것을 애통해 하여 집안에 묵은 종이들을 들추어 보다가 집안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며 사람들과 주고받은 서찰들 중 우연히 병화를 피한 것들을 찾아냈는데, 단지 최영경의 일에 대해 통탄해 마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연루된 정언신(鄭彦信)·유몽정(柳夢井)·윤기신(尹起莘)·조대중(曺大中)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도 놀라고 애달파하며 원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성혼은 최영경 외에도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피해를 받은 정언신, 유몽정, 윤기신 등에 대해서도 원통한 마음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집안에 보존되어 있던 성혼의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신(성혼)이 옛날의 역사를 보니, 반역자들과 친하고 파당을 지은 사람을 다스릴 때 사대부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기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역적(정여립)과 깊이 사귄 자들 중에서 참으로 역모에 참여한 자가 아니면 관작을 삭탈시켜 한가로이 살게 하는 것도 허물을 반성시키는 데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배의 형률을 적용시켰으니 너무나 중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평일에 서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어찌 모두 형벌을 줄 수 있겠습니까? 정언신은 벼슬이 정승에 올라 팔다리 역할을 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하루아침에 하옥되어 형구(刑具)를 직접 차고 있어야 하니, 상하와 도읍과 저자(시장) 사이에 군신이 존엄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신은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러한 상소문은 성혼이 준비를 하였으나 정언신 등의 일이 이미 처리되어버렸기 때문에 올리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사람들은 성혼이 ‘겉으로는 구원해 주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빠뜨렸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선조 임금에게 직접 호소한 사실도 이렇게 들었다.

“그 당시에 성혼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와서 당파를 없애고 형벌을 완화하란 말을 거듭 아뢰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끝내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그가 최영경의 옥사에서 위관(委官, 심판관)에게 편지를 급히 띄운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넉넉히 볼 수 있습니다. 어찌 감히 자신이 말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돌아보지 않고 함부로 자신의 분수에서 벗어나는 상소를 올릴 수 있었겠습니까?”

성혼은 또 임진왜란 초기 때 임금을 잘 수행하지 못했다고 하는 비난에 시달렸다. 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변호를 하였다.

“임진년에 주상을 미처 맞이하고 수행하지 못했던 연유는, 당시 논의들이 바야흐로 성혼을 정철의 당(서인)이라고 하였으므로 성혼이 시골에서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스스로 대궐에 나올 수 없었고, 주상께서 의주로 떠나실 때에는 창졸간에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날 파주 수령이 허둥지둥하다가 미처 먼 마을까지 부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혼이 사는 곳은 그 고을의 소재와 30리나 떨어져 있었으므로 어가가 이미 임진강을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 또 소문에 배를 철거시켜 나루가 불통되었고 어가가 건넌 뒤에 거리에 이미 난병(亂兵, 문란한 군대)이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적을 피해 마을들이 모두 비었다고 하자, 성혼이 병든 몸을 이끌고 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어가가 송도에 머무르리라고는 실로 성혼이 예상하지 못했던 바입니다. 성혼의 집이 산중에 외따로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말하는 자들은 어가가 그의 집 가까이 지나가는데도 피하고 나와 보지 않았다며 임금을 버렸다고 지목하였으니, 인정과 도리로 따져보아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말입니다. 이 점을 전하의 밝으심으로 살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성혼은 임진왜란 당시 파주를 지나쳐서 피난 가는 선조 일행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것은 신응구가 말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즉시 임금을 수행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논하고 처벌을 기다렸다. 그리고 상소문을 올려 “이제 마땅히 큰 뜻을 분발하시어 통렬히 자책하며,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일과 궁인(宮人)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단서를 끊고, 정직한 선비를 등용하여 이목(耳目, 듣고 보는 역할)의 임무를 맡기신다면 인심이 크게 기뻐하고 복종하여 원수인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임금이 속히 행해야할 계책에 대해서 건의하였다.
그러나 임금 주변의 신하들은 그러한 상소를 변명으로 평하고 오히려 그를 논박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의정부우참찬, 사헌부대사헌 등에 그를 임명하였다. 그는 이천에 머물렀던 광해군(세자)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와 경기 지역의 의병장들을 도왔다. 또 검찰사(檢察使)로 부임하여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조정으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 좌참찬등에 임명되었으며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그러나 의정부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주장하다가 동인 강경파로부터 매국노로 규탄을 받고 관직을 물러났다. 그 이후에도 줄곧 조정의 화평론을 변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경기도 파주로 낙향하였다.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제자로 조헌(趙憲), 정엽(鄭曄), 윤황(尹煌), 윤전(尹烇), 이귀(李貴), 김자점, 김장생, 강황, 윤훤, 황신(黃愼), 김류, 김덕령 등이 있다.

신응구는 성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정여립과 성혼의 관계를 논하면서, 성혼이 정여립을 키웠는데 왜 그는 죄를 받지 않는가하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호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또 말하기를, ‘역적(정여립)이 한때 중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모두 성혼이 길러 부추긴 것으로 말미암았는데, 그(성혼)만이 역적과 어울린 죄를 면했다.’고 합니다. 당초 역적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물러가 글을 읽기로 명분을 내세우고서는 이이와 성혼이 한 시대 유림의 어른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학문을 물었습니다. 이이와 성혼이 그의 기질이 거친 것을 단점으로 여기었으나, 벼슬을 버린 점을 취해 벗들에게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이이와 성혼이 학문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역적이 학문을 묻는 것으로 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럴싸한 방법으로 속인다는 것입니다. 이이가 죽자 역적이 수찬이 되어 서울에 들어왔었는데, 당시 의논이 크게 변해 이이를 공격하는 것이 이로웠기 때문에, 그가 더없이 미워하고 헐뜯으며 아울러 성혼까지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선왕(선조)께서 그는 형서(邢恕, 송나라 관리이며 정호程顥의 제자로, 상황이 변하자 스승을 배반하고 공격한 인물)와 같다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임금께서 그의 사특함을 배척하신 것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성혼과 이이도 정여립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 임금이 정여립을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꾸짖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당시 서인과 대립하여 성혼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성혼이 산촌에 은거하면서 뒤에서 조정의 일을 꾸미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변호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또 말하기를, ‘성혼이 초야에 자취를 숨기고 문도들을 모아 스승과 제자라 칭하면서, 날마다 경박한 무리들과 당시의 정사를 논하고 인물의 시비를 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 성혼은 본디 산중의 한 선비입니다. 그의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趙光祖)의 문하 출신으로 높은 풍도와 아름다운 덕이 한 시대에 존경을 받았으나 파주에 은거하면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는데, 학자들이 그를 청송 선생(聽松先生)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성혼의 학문은 대체로 집에서 성취된 것인데, 효도·우애·충성·신의와 자신을 반성하여 간절히 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쇠붙이도 녹인다는 비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신은 애닯고 애석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광해군은 이러한 상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모두 잘 알았다. 스승을 높이려는 정성에 대하여 참으로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였다. 다만 이는 선왕조에 있었던 일이므로 3년 안에는 가벼이 의논할 수가 없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3년 동안 부모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할 수 있다는 『논어』(학이편)의 가르침에 근거한 말이다. 선조 임금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신응구의 호소에 수긍한 듯하다. “참으로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였다.”는 말이 그것을 말한다.

『광해군일기』 : 나덕윤의 상소문과 사관의 핀잔


『광해군일기』 : 나덕윤의 상소문과 사관의 핀잔.

 

광해군일기』 중초본의 광해 즉위년 11월 12일에 「의금부 경력 나덕윤의 상소문」이 실려있다. 이 상소문에도 율곡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 상소문은 정초본(10권)에도 올라있다.
나덕윤은 죄인을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의금부 소속 관리였다. “신처럼 보잘것없이 천한 사람도 일찍이 나라의 은혜를 입어 요행히 임금을 모시는 말석에 끼었습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타고난 성품에 근원한 것이므로, 감히 평소에 조금 깨닫고 있던 견해를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하면서 당시 지식인들의 세태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지금의 세도(世道, 세상에서 행해지는 도리)를 보건대 어찌해 볼 수가 없습니다. 수십 년 이래로 여러 차례의 변고를 겪자, 인심은 흩어지고 사론(士論, 선비·유생들의 의견)은 분열되어 어느 한 사람도 사도(斯道, 유교)로서 이 세상을 이끌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단지 재주와 기백만을 취하고 도의는 하찮게 여기며, 늘어놓는 말만을 믿고 덕행은 살피려 하지 않은 채 하나같이 총애와 영화, 명예와 이익에만 마음이 팔려 일생의 좋은 꾀로 생각하면서 오직 ‘어떻게 하면 내 몸에 이로울까.’, ‘어떻게 하면 우리 집안에 이로울까.’, ‘어떻게 해서 내 원한을 갚을까.’, ‘어떻게 해서 내가 싫어하는 뜻을 펴볼까.’ 할 따름입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황, 조식, 노수신, 박순 등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세도가 융성하여 볼만하다고 하였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선비의 기상이 상실되고 인도(人道, 인간의 도리)가 거의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황과 조식이 그 사이에 배출되어 학문과 기절(氣節, 기개와 절도)로 한 시대에 앞장서서 부르짖자, 그 소문을 듣고 일어난 자들이 대체로 훌륭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선왕께서 선비를 존중하고 도를 소중하게 여겨 거두어 부르시고 뽑아 등용시켜, 대간이나 시종의 자리에 발탁해 두셨습니다. 또 그들로 하여금 탁한 무리를 공격하고 청류(淸流)를 드러내도록 함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켰습니다. 대신 중에는 또 노수신(盧守愼)과 박순(朴淳) 같은 사람을 얻어 오랫동안 정승 자리에 앉혀 두고서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사랑하게 하여 여러 어진 사람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는데, 벼슬을 처음으로 얻는 자들이 모두 고을 시험과 마을 선발 속에서 배출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때에는 인심이 크게 변하고 선비의 취향도 분명하였으므로 세도가 융성하여 볼만하였습니다.”

앞서 소개한 이정귀의 스승 윤근수는 퇴계의 제자이면서도 서인의 편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대개 동인은 조식이나 퇴계를 따르고 율곡과 성혼을 비판하였으며, 서인은 율곡과 성혼을 따르고 조식이나 퇴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앞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나덕윤은 이황과 조식(曺植, 1501∼1571), 노수신(盧守愼)과 박순(朴淳)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은 동인 쪽의 인물들이 따르고 있었고, 퇴계보다 1살 위인 조식은 본관이 창녕 조씨이며, 경상남도 합천군 출신이었다. 소위 남명학파를 창시한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이며, 벼슬에 나서지 않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지내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학문을 닦았다.
조식의 제자들은 나중에 조정에 나아가 다수가 북인에 참여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정인홍, 곽재우 등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참전하였다. 동인의 우두머리였던 김효원이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김효원은 퇴계 문하에서도 배웠다.) 이 때문에 동서 분당이 일어났을 때 조식의 제자들이 동인으로 몰려 서인측과 대립하였다. 또 동인이 남북으로 나뉠 때 강경론을 주장했던 북인에 그의 학맥 제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퇴계 이황과 친분이 있었으며 ‘인심도심(人心道心)’과 관련하여 퇴계와 논쟁을 하기도 하였다. 1587년 기축옥사 때에는 정여립을 추천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노수신은 율곡과도 친분이 있었다.
박순(朴淳, 1523년∼1589년)은 조식과 이황의 문하생으로 이조판사, 한성부 판윤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특히 훈구파와 신진 사림의 교체기에 왕의 외삼촌이자 훈구파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덕분에 훈구파는 완전히 몰락하여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 그의 동문들이나 제자들은 모두 동인이 되었는데, 그는 당시 율곡이나 성혼과도 교류가 빈번하여 서인으로 지목을 받아 탄핵을 당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이 나덕윤이 예로든 인물들은 비교적 동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당시 동인, 서인의 구별은 어떤 것이었을까?
『선조수정실록』(21권, 선조 20년 3월 1일) 기사(성균 진사 조광현·이귀 등이 스승 이이가 무함당한 정상을 논한 상소문)에 ‘서인(西人)’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옛날에 이른바 동인이란 사람들은 심의겸(서인의 영수)을 배척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사람이 동인이 되었다. 옛날에 이른바 서인이란 사람들은 심의겸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높이는 사람이 서인이 되었다. (중략)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 출세하는 자본이 되었으므로 동인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으며 외척(서인의 영수 심의겸)을 배척하는 것이 실로 사림 청류(淸流,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사람)의 논의이므로 선비로서 심의겸을 배척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 이것이 동서의 이름이 옛날과 달라서 분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아, 동서의 말이 있은 이래로 서인의 명목은 그 말이 네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심의겸의 친구와 제배(儕輩, 나이나 신분이 서로 비슷한 사람들)를 서인이라 하였다. 삼윤(三尹,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윤현尹晛)과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이다. 다음에는 서인을 돕거나 구해주는 자를 서인이라 하였으니 정철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이다. 또 그 다음에는 동인도 아니고 서인도 아니며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였다. 이이와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림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니 오늘날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에서 공론을 펴는 사람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과연 사실에 의거한 말이겠는가.
이러므로 공론이 가라앉지 않고, 따라서 이른바 서인이란 자가 오늘날에 와서 더욱 많아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면 이이는 공론을 하다가 간사한 사람에게 한쪽 당파에 치우친다는 이름을 얻었고 성혼은 이이를 구원하다가 사적으로 구호한다는 이름을 얻었으며, 중외(中外)의 수많은 선비들은 이이와 성혼을 구원하다가 서인의 이름을 얻었다.”

‘서인’이란 무엇인가를 서인 쪽에서 정의한 내용이다.
나덕윤은 이황, 조식과 비교적 동인쪽에 가까운 인물들인 노수신과 박순을 소개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붕당의 폐해를 논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심의겸(沈義謙, 서인의 영수)과 김효원(金孝元, 동인의 영수)은 단지 명예와 이익이나 따지며 노는 인물들이었는데도 감히 기치를 내세우고 당을 나눔으로써, 조정이 마침내 조용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이(李珥) 같은 사람은 선비로 자처하여 세상의 도리를 담당하고서도 선배와 후배에게 양시(兩是, 둘 다 옳다)와 양비(兩非, 둘 다 그르다)가 있다는 말만을 꺼냈을 뿐, 끝내 진정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계미년에 이르러서는 이미 심해져 선비들이 이리저리 파당을 이루면서 그 해악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고 기축의 변고(1589년 정여립 사건으로 인한 옥사 사건)는 천만 뜻밖에 터져 나왔습니다. 간악한 자(동인 1000여명이 처벌을 받게 한 정철을 지칭함)가 또 그 사이에 화를 빚어내 한 떼의 명류들이 모두 반역의 깊은 구렁에 빠지고 말았으니,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나덕윤은 율곡이 책임 있는 관리로서 붕당을 진정시키지 못하였다고 비판하고 기축옥사 사건을 통해 많은 훌륭한 유학자들(동인 유학자를 지칭함)이 반역의 죄를 뒤집어 쓰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이어서 그는 당파싸움의 폐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깨지고 집안이 망한 재앙도 계미년에 싹이 터서 기축년에 격화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라 안에 싸움이 크게 일어나고 왜구의 화를 이처럼 참혹하게 당하도록 한 것이니, 통탄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이 후부터 조정의 기강이 확립되지 않고 선비들의 논의가 분명치 못해 말만 숭상하고 덕행은 숭상하지 않으며, 이익만을 알고 의리는 모름으로 인해 어진 이와 사악한 자가 뒤섞이어 벼슬길에 진출하고 변론과 아부의 풍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벼슬을 얻을까 걱정하고, 얻은 벼슬을 행여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오직 관작이 좋은 줄만 알아 한 때의 여론에 따르는 것을 옳은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임금의 뜻을 맞추려는 버릇과 권력 있는 자들을 추종하고 빌붙는 태도들이 쌓여 한 시대의 고질병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주장한 나덕윤은 정여립과 정철, 그리고 정개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했다.

“정여립은 애초부터 불을 지른다거나 사람을 겁탈하는 도적이 아닙니다. 사실은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인 간악한 자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에 지식이 해박하고 견문이 많은 인물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이이와 성혼(成渾)이 맨 처음 그와 교류해 보고 나서 그를 추켜세우고 칭찬하였는데, 그가 청요직에 천거되어 등용된 것은 사실 이이가 이끌어준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계미년에 심하게 당론이 나뉘어지고 이이와 성혼이 세력을 잃은 뒤로부터 비로소 안면을 싹 바꾸어 이른바 동인(東人)들에게 빌붙었습니다. 동인들에게 앞날을 예견하는 지혜가 이미 없었고 한갓 한 시대에 난 헛된 명성만을 믿고 배척하지 못했으니, 이는 사람을 가려서 사귀지 못한 죄입니다. (중략) 그러나 만일 그 실정을 따져 그 죄질의 경중을 매긴다면, 교류하고 인정한 죄는 자연히 제일 큰 형벌을 받아야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당연히 죄를 낮추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정여립(鄭汝立, 1546년∼1589년)은 이이와 성혼의 제자로 1570년(선조 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낸 인물이다. 원래는 서인에 속했다가 동인으로 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또 스승이었던 이이를 비판한 일로 서인의 반발을 샀으며, 동인이 집권하던 시기에 동인 편에 서서 성혼, 박순 등을 비판하였다. 임금 선조도 그가 그렇게 율곡을 배반한 점에 대해서 불쾌히 여겼다. 이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는데, 그 뒤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왜구 토벌에 앞장섰으나, 반역을 획책한다는 고발을 당하였다. 그는 그 길로 피신하여 자살을 하였다. 서인 쪽에서는 그를 반역죄로 몰았는데, 기축옥사 사건으로 확대되어 관련자 천여 명(주로 동인)이 처벌을 받았다.
나덕윤은 정여립을 논하면서 맨 처음 그를 사귀고 인정하여 이끌어준 이이와 성혼이 가장 큰 죄를 받아야하는데, 왜 동인들이 더 큰 벌을 받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조사하여 수많은 동인들을 연루자로 몰아간 정철에 대해서도 이렇게 묘사하였다.

“정철(鄭澈)은 본래 괴팍한 성미로 날조하여 얽어 넣으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음험한 함정을 파서 무고한 자를 빠뜨리고 공법(公法)을 빙자해 사적인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러자 한때 그가 품은 뜻에 휩쓸려서 상소를 올려 옭아매려는 자들이 상소문을 받는 관청 앞에 줄을 섰습니다.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선비까지 발만 움직이고 머리만 흔들어도 거의 다 지목 대상에 들어갔고, 대수롭지 않은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반드시 돕고 지원했다는 죄목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3년의 큰 옥사(獄事)에서 원통한 죄수가 갖가지였고, 심지어는 80된 노모와 일곱 살 난 어린 아이까지도 함께 나란히 사형장으로 끌려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안방에서 나누는 말이나 거리의 여론들이 가엾어 하고 분통해 하였으나, 한랑(寒朗, 26년∼109년, 동한의 청하태수)처럼 초옥(楚獄, 후한 초왕 영의 옥사로 수천명이 애매하게 연좌된 사건)을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랑의 초옥이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의 일을 말한다. 안충(顔忠), 왕평(王平) 등이 모반한 사건에 연루된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한랑이 공정하게 처리하여 죄가 없는 많은 사람을 풀어주었다.(『후한서』 현종효명제기(顯宗孝明帝紀)·한랑전)
정철은 서인 쪽에 속한 인물로 정여립 사건의 조사 책임을 맡았는데 그의 조사를 통해서 1000여명 가까운 동인 쪽 사람들이 처벌을 받았다.
나덕윤은 이어서 정개청(鄭介淸)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정개청은 정여립 반란사건과 연루되었다고 지목을 받아 평안도로 유배된 인물이다.

“정개청(鄭介淸) 같은 사람에 있어서는, 애당초부터 조정에 나오지 않았고 단지 산중에 숨어서 몸을 닦는 한 사람의 선비였습니다. 사람됨이, 품성이 순수하고 도타우며 지조와 행실이 맑고 확실한데다 도학(道學)을 천명해 세상의 큰 선비가 되었으며, 자신을 엄숙히 다스려 후생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제멋대로 방종을 즐기면서 구속과 검소를 싫어하는 자들이 늘 비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중략) 정개청의 학문은 언제나 정(程, 정자)·주(朱, 주자)를 으뜸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간악한 자들이 세상을 그르치는 꼴을 보면서 후학의 폐단이 될까 염려하여 정(程), 장(張, 장재)의 말을 부연(敷衍, 알기 쉽게 자세히 설명)하고 한(漢)과 진(晉)이 숭상했던 바를 대략 서술했는데, 그의 뜻은 단지 선유들이 이미 정한 논의에 근거해 은연중 스스로를 그르치고 남을 그르치는 정철의 죄상을 꺾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노간(老奸, 늙은 간신) 정철이 마침내 중상하려는 꾀를 내어 개청이 지은 논설 제목 위에 교묘하게 배(排) 자를 덧붙여서 ‘절의를 배척했다.(排節義)’고 지목한 다음, 그의 설이 홍수와 맹수의 피해와 같다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 사방에 방을 돌려 보이고 역당(逆黨)의 이름을 덮어씌워 외떨어진 변경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 원통함이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 상소문을 나덕윤이 짓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정개창의 억울한 죽음을 임금에게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개창(1529년∼1590년)은 북부참봉, 전생서주부, 곡성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때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평안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함경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박순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의 제자로 이 상소문의 저자 나덕윤(羅德潤)을 비롯하여 나덕준(羅德峻), 나덕현(羅德顯), 나덕원(羅德元), 안중묵(安重默), 정지함(鄭之諴) 등 근 400여명에 달하였다. 이중에는 당시 호남의 유력가문 출신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제자들은 그가 사망한 뒤에 신원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이 상소문도 그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다.
나덕윤은 이 상소문의 말미에 이렇게 호소하였다.

“생각건대 전하께서 왕위를 물려받은 초기에 한 지아비, 한 지어미라도 만일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고 밝히지를 못한다면, 울적한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의 화기(和氣)를 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개청은 초야에서 고고한 행실을 지닌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은전이 늦어지고 있으니, 사실 국가 형정(刑政) 중 하나의 큰 잘못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특별히 원통한 실상을 굽어 살피시고 빨리 억울함을 풀어 주시되 선왕조에서 최영경(崔永慶)을 표창했던 일과 같이 밝혀 씻어 주신다면, 어찌 요(堯)임금이 남긴 뜻을 순(舜)임금이 아름답게 이루어준 것과 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중략) 감히 마음을 다 털어놓아 전하를 번거롭게 하였으니, 그 실없고 참람하여 스스로를 알지 못한 데 대한 벌을 마다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최영경(崔永慶, 1529년∼1590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이고,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그는 지평 사축을 역임하였는데,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옥에서 사망하였다. 조식의 문인이라는 것은 동인 쪽에 지인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정여립과 친한 관리로 지목되고 모반세력으로 몰려 사망한 것이다. 조사를 받으면서 관작이 삭탈되었으나 사망한 뒤 1591년(선조 24년)에 복권되었으며, 1602년(선조 35년)에는 최영경의 동생인 최여경에게 관직이 내려졌다.
나덕윤의 상소문을 읽고 광해군은 이같이 답하였다.

“상소를 보니, 충성심을 충분히 볼 수 있었으므로 참으로 가상히 여긴다. 정개청의 억울함에 이르러서는 나 또한 일찍이 대강 들었다. 그러나 선왕조 때에 있었던 일이므로 감히 경솔히 논의할 수 없다. 마땅히 대신들과 논의하여 조처하겠다.”

임금은 이와 같이 말하고, “이 상소를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하명을 내렸다. 그러나 『광해군 일기』 집필에 참여한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기축년 옥사에서 여러 역적들의 공초(죄인이 자신의 범죄 사실을 자세히 설명한 것)가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았다.(즉 모두 동일하였다.) 그 옥사에 연루된 자들은 모두 역적의 입으로 정확하게 말한 사람들이었다. 심문하는 관리가 어떻게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을 개입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정여립의 무리만이 이를 갈며 분통해 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또 임진왜란의 변란에 심문 기록들이 없어져 버리자 나덕윤(羅德潤)처럼 음흉하고 사악한 자들이 때를 틈타 일어나 날조하였다.”

이러한 기록 뒤에는 추기로 보이는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살펴보건대 나덕윤은 본디 호남의 호족으로 향리에 살며 불법을 많이 저질렀고 김우성(金佑成)과 한패가 되었다. 처음에 유영경(柳永慶)에게 빌붙었다가 유영경이 쓰러지자 다시 이이첨에게 빌붙었고, 뒤에 김우성과 사이가 벌어졌다. 그의 논의가 대체로 수시로 반복되었다.” 이 역시 나덕윤을 비난하는 문장이다.

나덕윤이 위와 같은 상소문을 올린 시기는 광해군이 막 즉위할 때였다. 이 당시는 북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였다. 그러므로 나덕윤의 글은 조정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덕윤의 글이 전체적으로 서인을 비판하고 동인(북인)을 추겨 세운 것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광해군의 답변에서 보인다. 그러나 이 글, 즉 「광해군일기」 중초본을 정리할 즈음에, 즉 인조시대 초기에는 서인들이 인조반정으로 집권하던 시기였다. 서인들로서는 서인의 행위(율곡이나 성혼, 혹은 정철)를 비판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상소문 마지막에 덧붙여진 말들이 험악하다.

『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임진왜란


『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임진왜란.

 

광해군일기』 선조 행장을 읽으면서 서인과 동인의 갈등에 관심을 가지고 읽다보니 중요한 핵심을 놓쳤다. 선조 행장의 절반이상은 사실 임진왜란과 관련된다. 선조시대의 가장 큰 사건은 일본의 침략, 즉 임진왜란이다. 이정귀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신하여 도망하는 길을 자신의 가족을 이끌고 따라갔다. 이러한 그의 경험이 상세하게 담겨있다. 일본군이 침략해 들어오던 급박한 상황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임진년간에 왜적이 온 나라의 군대를 죄다 동원하여 가지고 와서 마구 쳐들어와 유린하였는데 그 형세가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았다. 이들이 상국(명나라)을 침범하려는 흉계를 세운 것이 진실로 하루 이틀에 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오래 전부터 흉계를 품고 있다가 기회를 노려 발동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태평을 누려 왔으므로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고 지내오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미친 왜구를 만났다. 반격을 가하였으나 지탱하지 못하고 남쪽 지방의 마을들이 서로 잇따라 함몰되었다.”

선조는 동인(남인, 북인)과 서인이라고 불리는 유교 지식인들을 데리고 ‘정권 놀음’을 하면서 나라 바깥에서 준비되고 있는 큰 재앙을 대비하지 못했다. 여기서 정권 놀음이라는 것은 국가의 통치자로서 대국적인 정치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과 권위만을 앞세워 정치를 하였다는 뜻이다.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보낸 사신들조차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정확한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일부 사신들이 정확한 보고를 했는데도 선조는 그들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상황판단을 그르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정귀가 지은 선조의 행장은 당시 시대의 가치관과 상황에 따라 지은 것이다. 선조의 업적을 치하하고 왕으로서 그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시점으로 읽어보면 한심한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면 이정귀는 서울이 일본군 손에서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4월에 관군(官軍)이 서울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이 임금에게 축하의 말씀을 해주실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위로해야 할 일이요, 축하할 일이 아니다. 신민(臣民)들을 거느리고 망궐례(왕이 왕세자 등을 거느리고 중국 황제가 있는 쪽을 향하여 예를 올리는 의식)를 행하여 황은(皇恩, 중국 황제의 은혜)에 사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 기로(耆老, 육십세 이상의 노인)와 백성들로 하여금 동시에 망궐례를 행하게 하여 함께 황은에 감격해 하는 의리를 알게 하였다.”

선조가 보기에는 명나라가 도와서 서울을 수복한 것이다. 이순신의 공로나, 왕세자로서 전장을 누빈 광해군의 공로, 혹은 수많은 의병장들 그리고 백성들의 고생은 선조로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나라가 망해도 자신은 중국으로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한 군주로서는 당연한 논리일지도 모른다.

선조는 신하들을 데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 도성으로 들어오면서 생각한 바를 그는 이렇게 칙명으로 내렸다.

“예조에 하명하기를 ‘상란(喪亂)를 당한 뒤로 도성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를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살아남은 백성의 과반이 흰 상복(喪服)을 입었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에 살펴보니, 도성 백성들이 거리를 꽉 메웠는데도 상복을 입은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이는 필시 난리를 겪은 뒤 윤기(綸紀, 도덕과 기강)가 느슨해져서 그런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다. 각부(各部)로 하여금 규검(糾檢,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들추어내어 자세히 살피고 조사함)하게 하라.’ 하였다.”

임진왜란(1592년)은 조선이 건국(1392년)하고 꼭 300년 지난 뒤에 일어났다. 사실은 일본이 침략을 하지 않았어도 조선은 이미 그 수명이 다하고 있었다. 율곡이 개혁의 필요성을 외친 것은 그런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조선은 다시 건국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조선’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완전히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금도 바뀌지 않았고, 임금을 둘러싼 정치 세력도 바뀌지 않았고, 그 전체를 움직여가는 이념, 즉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도 바뀌지 않았다.

선조는 서울로 돌아와서 영리하게 움직였다. 백성들의 윤리 도덕의식을 다시 강조하고 예절을 통제하여 유교적인 통치 체제를 더욱 강력하게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후에 예학이 크게 일어난 것은 그의 이러한 생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신하들이 “성전(聖殿, 문묘나 종묘)이 모두 소각되었고 또한 위판(位版)도 없으니, 제사를 지낼 장소가 없습니다.”고 신하들이 보고하자, 선조는 간이 제단을 축조하고 몸소 나아가 문묘 제사를 지냈다.

또 그는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다. 우리나라는 인재가 적은데다 수용하는 방법도 과거에만 달려 있다. 글을 지어 올리게 하는 과거보는 마당에서 어떻게 사람의 재능을 다 발휘하게 할 수 있겠으며 따라서 호걸스런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 넓은 세상에 우뚝한 재능과 특이한 행실이 있는 선비가 임하(林下)에서 속절없이 늙어가는 일이 어찌 없겠는가?”하면서 “발탁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각기 천거하도록 하라.”고 하명하였다. 전쟁 전에도 항상 하던 말이었다.

그가 새로운 인재를 선발한다고 정치가 새로워질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부지런히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면서 조선을 임진왜란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런 노력 덕분에 조선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다.

『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율곡과 퇴계


『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율곡과 퇴계.

 

해군 즉위년(1608년) 2월 21일, 전 임금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의 행장(行狀)이 실렸다. 이 ‘행장’이란 ‘행동(行)의 모양(狀)’ 즉 행동거지를 뜻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사망한 사람의 행실을 정리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전기(傳記)’ 보다는 더 짧은 글로 고인의 성명, 생존월일, 자호, 관작, 가족 관계 및 언행 등을 서술한 것이다.
선조의 행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국왕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휘(諱)인데 공희왕(恭僖王)의 손자이고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岧)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 정씨는 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임자년 11월 11일 한성 인달방(仁達坊, 지금의 서울 사직동 부근)에서 왕을 낳았다. 왕은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 났으므로 항상 예법을 따르기를 좋아하였다. 어릴 적에 공헌왕(恭憲王, 명종. 재위 1545∼1567)이 일찍이 두 형과 아울러 함께 불러들여서 자신이 쓰고 있던 관(冠)을 벗어 차례로 쓰게 하여 하는 행동을 살펴보았다. 차례가 왕에게 이르자 왕이 꿇어앉아 사양하고, ‘군왕께서 쓰시던 것을 신하가 어떻게 감히 머리에 얹어 쓸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공헌왕이 매우 감탄하고 ‘그렇다. 마땅히 이 관을 너에게 주겠다.’ 하였다. 또 임금과 아버지가 누가 더 중하냐고 묻고 글자로 써서 대답하게 하니, ‘임금과 아버지는 똑같은 것이 아니지만 충(忠)과 효(孝)는 본래 하나인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공헌왕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명종은 아들이 일찍 죽고 없었다. 그래서 후계자로 이복 조카를 선임하였는데 그가 선조였다. 이 과정이 행장의 첫머리에 그려져 있다. 선조는 1567년부터 1608년 까지 약 40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의 중요사건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함
1575년 유학자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짐
1589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이 일어남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남
1597년 일본이 조선을 다시 침공함(정유재란)
1598년 노량해전이 일어남. 이순신 전사
1608년 선조 사망. 광해군 즉위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전국의 유학자들, 즉 사림(士林)이 동인과 서인의 두 파로 나누어져 서로 각축을 벌였으며, 일본이 침략하였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7년의 정유재란이 그의 집권 기간 중에 일어났으며, 그는 일시적으로 중국의 국경 바로 앞까지 피난을 가는 수모를 당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100%로 그의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은 최고 통치자로서 그가 초래한 것이었다.
그는 유교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행장에는 그가 유교를 위해서 이룬 업적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헌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으나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에 대해서는 전해온 것이 드물었다. 그런데 고려의 정몽주가 처음으로 끊어진 학문을 창도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본조(本朝, 조선왕조)에 이르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 등이 서로 계속하여 일어나 도의(道義, 도리와 의리)를 밝히고 경전이 전하는 뜻을 잘 발휘하였다. 왕은 이들이 사도(斯道, 유교)에 큰 공이 있다는 것으로 제일 먼저 명하여 제사를 지내주고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또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그 자손들에게 녹을 주어 등용하게 하는 한편, 유신(儒臣) 유희춘(柳希春)에게 명하여 그들의 행적을 편찬하게 하고 이를 『유선록(儒先錄)』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어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 등을 간행하게 하였으며, 또 『하씨소학(何氏小學)』이 명물(名物, 명목이나 사물)과 도수(度數, 법식이나 수량)를 가장 상세하고 세밀하게 기록하였으므로 초학자에게 편리하다는 점과, 조정에서 편찬한 『삼강행실(三綱行實)』은 윤리와 기강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가 재위하였을 당시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퇴계와 율곡이 생존해있던 시기로 주목할 만하다. 또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사림(士林)이 두 파로 나뉘기 시작하였다는 점도 중요하다.(이러한 현상은 선조시기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그렇게 고착화된 것이다.) 사림이 중앙정계에서 이렇게 힘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선조시대 부터였다.
그 전에는 훈구파(조선 건국 공신들과 세조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세력)가 득세를 하였다. 훈구파의 공격으로 사림은 무오사화, 갑자사회, 기묘사회, 을사사화 등을 겪었으나 선조시대에 들어서는 그런 훈구파의 세력을 완전히 꺾고 사림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최고통치자인 선조의 지지가 있었다. 선조는 사림 출신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였고, 또 그들을 통해 정치를 펼치고자 하였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중앙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유학자들은 당시 관리들의 임용권을 가진 이조전랑의 직위를 두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으로 나뉘어 경쟁하기 시작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 정철, 윤두수 등이었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류성룡, 이산해 등이었다. 서인들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따랐고, 동인들은 조식과 이황의 학문을 지지하는 경향을 띠었다. 서인들은 서울의 서쪽에 주로 살고 있고 동인들은 서울의 동쪽에 주로 살고 있었다. 지역적으로 보면 서인들은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즉 기호지역 출신들이 많다. 정치적 성향을 보면 서인들은 신하들의 권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동인들은 왕권의 강화를 강조하였다.

율곡이 사망한 직후에는 동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1589년에 정여립의 역모사건(기축옥사)을 계기로 서인들이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1591년(선조 24년)에는 건저 문제(建儲問題,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논란)로 서인 쪽 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 뒤 다시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하게 대응하자는 남인(南人)과 강경하게 대응해야한다(사형 주장)는 북인(北人)이 나뉘었다. 남인은 이황의 제자들이 많았고, 북인은 조식의 제자들이 많았다.
선조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남인의 편을 들어주어, 선조 시대 집권 후반기에는 류성룡 등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국난기를 거치면서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북인 중에서는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장들이 대거 등장하여 발언권이 강하게 되었다. 선조 시대에 집권세력의 교체를 보면 대체적으로 서인→ 동인 → 남인 → 서인 → 북인으로 흘러갔다. 사실 이렇게 바뀌게 된 근본 원인은 선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측근세력을 바꿈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꾀하고 자신이 편한 정치를 행하려고 한 것이다.
다시 선조 행장으로 돌아가 율곡 이이에 대해서 논한 부분을 살펴본다.

“일찍이 유신(儒臣, 유학을 공부하는 신하)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문산(文山, 문천상文天祥)의 『지남록(指南錄)』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비분강개하여 참고 끝까지 다 읽을 수가 없었다. 대개 문산은 백이(伯夷)·숙제(叔齊) 이후 한 사람으로 만세 신하의 표상인데, 우리나라 정몽주의 절의와 문장이 문산과 그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수 있으니, 그(정몽주)의 문집도 속히 출간하여 반포하라.’하고, 이어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합하여 지칭하는 말) 노수신(盧守愼)에게 서문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 이이(李珥)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찬술하여 올리니, 왕이 매우 가상히 여겨 포상하고 즉시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문천상(文天祥, 1236년∼1283년)’은 남송 시대 정치가로 몽고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포로가 된 인물이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회유도 뿌리치고 사형을 당하였다. 이러한 문천상의 문집을 본받아 정몽주의 문집도 출간하라는 내용이 보인다. 그 뒤에 율곡이 『성학집요』를 올렸다는 간단한 문장이 보인다.
이러한 율곡에 대한 언급 외에 선조 행장에는 퇴계 이황에 대한 서술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직후에 마음을 가다듬고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면서 밤중이 되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당시의 명유(名儒) 이황(李滉)이 관직에서 해임되어 고향에 돌아가 학생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했는데 전왕(前王) 때부터 누차 불렀으나 오지 않았었다. 왕이 정성과 예물을 극진히 하여 나오도록 힘껏 부탁하였고 발탁하여 이공(貳公,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아래의 직책인 좌우 찬성贊成을 말함. 이황은 우찬성)에 임명하였다.
이황이 자신을 알아준 데 대해 감격하여 소장을 올려 치도(治道, 정치의 도리)에 대한 여섯 가지 조항을 진달하고 나서 또 『성학십도(聖學十圖)』·『서명고증(西銘考證)』을 찬술하고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을 손수 써서 올렸는데, 왕은 겸허한 마음으로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고 모두 베껴 써서 병풍을 만들어 좌우에 두게 한 다음 아침저녁으로 바라보고 성찰하였다.
그리고 수시로 불러 대면하고 조용히 다스리는 도에 대해 강론하는 등 예우가 융숭하였으므로 지치(至治, 지극히 잘 다스리는 정치)를 이룰 것을 기약했었다. 그러다가 이황이 사망하기에 이르러서는 마음 아프게 애도하여 마지않으면서 ‘이황이 남긴 글자 하나 말 한 마디도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집하여 간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퇴계에 대해서 상세한 언급을 하였다. 율곡에 대한 서술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매우 자세하다. 퇴계를 관직에 임명하였는데 오지 않았다는 점과 『성학십도』 등 저서를 올린 일, 그리고 사망한 뒤 선조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생각해보면 그렇게 특기할 만한 사안은 아니다. 율곡도 선조가 관직을 권유했을 때, 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성학집요』를 올렸으며, 일찍 사망하여 선조가 그 슬픔을 표한 일도 있었다.

이황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도 보인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또 소장을 올려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을 문묘(文廟)에 종제(從祭,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다)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답하기를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여겨서 감히 경솔히 허락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 일이 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절로 논의하여 결정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섯 신하를 높임에 있어서는 그들의 학문을 높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 것이다. 여러 학생들은 모두 영재(英才)를 지니고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들이니 의당 수시로 부지런히 힘써 서로 익히고 닦으면서 다함께 대유(大儒)가 되어 나의 부족한 점을 힘을 다해 보좌해 주는 것이 바로 내가 기대하는 것이다.’ 하였다.”

선조가 사망할 당시 율곡이나 퇴계는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율곡은 퇴계에 비하면 그 학문이나 명성에서 퇴계에 훨씬 미치지 못하여 퇴계에 대한 언급이 율곡보다 많았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선조시대 조정의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선조실록』을 살펴보면 율곡의 이야기가 퇴계보다 더 많이 나온다. ‘이이(李珥)’로 『선조실록』을 검색해보면 모두 203건이 검색된다. ‘이황’으로 검색하면 그 1/2정도인 106건이 검색된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이이’는 245건, ‘이황’은 73건만 검색이 된다. 퇴계에 대한 언급이 율곡의 1/3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왕조실록> 전체를 보더라도 율곡에 대한 언급이 퇴계에 대한 언급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율곡은 실지로 선조와 머리를 맞대고 정치를 논의한 경우가 퇴계보다 월등히 더 많았다. 율곡은 사망하기 직전에도 병조판서(1582년), 돈녕부판서(1583년), 이조판서(1583년) 등에 임명되어 선조의 자문에 대응하고 있었다. 율곡이 사망하던 날 선조수정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선조의 슬픔을 전하고 있다.

“이조 판서 이이(李珥)가 졸하였다. 이이는 병조 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임금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서익(徐益)이 순무어사(巡撫御史)로 관북(關北)에 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이이에게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율곡의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니 접응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설령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라고 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입으로 육조(六條)의 방략(方略)을 불러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사망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하였으며 3일 동안 소선(素膳, 생선이나 육류가 들어 있지 않은 간소한 반찬)을 들었고 위문하는 은전을 더 후하게 내렸다.”

퇴계 이황(李滉, 1502년∼1571년)이 사망하였을 때도 선조는 슬픔을 표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당시 나이가 이미 70이 넘었고 조정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선조와 함께 정치를 논하던 상황은 아니었다. 슬픔의 강도가 율곡 보다는 미치지 못함을 그의 졸기에서 읽어볼 수 있다.(『선조수정실록』4권, 선조 3년 12월 1일 숭정 대부 판중추부사 이황의 졸기)

“주상(임금 선조)이 집무를 시작하면서 조야(朝野)가 모두 부푼 기대에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 신성한 덕치)을 성취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고 임금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하지만 이황은 이미 늙었고 재지(才智)가 큰 일을 담당하기에는 부족하며, 또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도 야박하여 위아래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유학자가 무엇을 하기에는 어렵겠다고 여겨 총록(寵祿, 총애하는 자에게 내리는 봉록)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고야 말았었다. 상은 그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여 증직(贈職)과 제례(祭禮)를 더욱 후하게 내렸다.”

위 졸기를 잘 읽어보면 선조는 퇴계의 부고를 듣고 슬픔을 표하기는 하였으나 퇴계에 대한 선조의 서운함이 묻어 있다. 『선조실록』 3권(선조 2년 12월 미상)에 실린 「우찬성 이황의 졸기」는 더욱 ‘노골적’이다.

“우찬성 이황(李滉)이 졸하였다. 자는 경호(景浩), 수(壽)는 70이었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순(文純)이라 시호하였다. 학자들이 퇴계 선생(退溪先生)이라 일컬었다. 그의 학문과 사업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해진다.”

모두 합해서 겨우 3줄 정도의 졸기가 실려 있다.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정은 어찌되었든 퇴계에 대한 선조의 인상은 율곡 만큼 깊지도 않았으며 율곡 만큼 애증이 점철된 관계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나이 차이도 많았고(퇴계는 선조보다 50살이나 위였다.)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무관심’했던 퇴계 보다는 율곡에 더 선조의 관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율곡은 선조보다 15살 위였다.)

그렇다면 왜 선조의 행장은 율곡보다 퇴계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을까? 선조의 행장을 집필한 사람은 당시 호조판서 이정귀(李廷龜, 1564년∼1635년)였다. 그는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조선시대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본관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지역적으로 보나 스승 윤근수로 보나 그는 서인에 속한다. 그의 아들은 대제학을 지낸 이명한(李明漢)이며 그 아래로 부수찬, 인천부사를 지낸 손자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이 있다. 이단상은 제자로 이희조(李喜朝)와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 등의 학자를 배출하였는데, 서인의 주류 학자들이다.
이정귀의 스승 윤근수(尹根壽, 1537년∼1616년)는 영의정 윤두수의 동생으로 시인이며 화가이다. 그는 1575년 동인 서인이 서로 갈릴 때, 퇴계 이황의 제자이지만 같은 동문인 동인의 영수 김효원을 따르지 않고 서쪽의 심의겸을 지지하여 서인에 가담한 인물이다. 서인이지만 이황의 제자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 있어, 그것이 제자 이정귀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판단해볼 수 있다.
그렇기는 해도 퇴계와 율곡에 대한 균형 맞지 않는 서술은 아무래도 궁금하다. 선조 행장을 집필하던 때는 광해군이 막 집권을 시작하던 시기이며 이때는 서인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보인 동인의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서인인 이정귀로서는 문장을 잘 써서 선조의 행장을 짓게 되었지만 그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율곡은 조금 약하게, 퇴계는 조금 강하게 서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이정귀는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고, 이후 병조판서, 대제학, 예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또 정권이 바뀌어 인조반정으로 서인들과 남인이 집권을 하였을 때도 인조를 가까이서 모시고 벼슬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일기』 : 이귀의 상소문


『광해군일기』 : 이귀의 상소문.

 

해 즉위년(1608년) 2월 13일(음력, 이하 모두 음력임)의 기록(『광해군일기 중초본』)을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 함흥 판관으로 있던 이귀(李貴)가 상소문을 올렸다.

“신은 일개 외관(外官, 지방관)으로서 마침 군무(軍務, 군대업무)에 관한 일 때문에 임명되어 서울에 갔다가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였습니다.(선조임금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는 뜻) 그리하여 궁궐로 달려가 관료들이 모여 통곡하는 뒷자리에 참여하였습니다. 한참 울부짖는 슬픔 가운데 삼가 살펴보니 미진한 상례(喪禮)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예관(禮官)이 두서를 바꿔서 행하고 관리들이 일을 태만하게 한 데 대해 옥당(홍문관)에서 논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여러 일 가운데 작은 것이었습니다.”

이귀(李貴, 1557년∼1633년)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옥여, 호는 묵재,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603년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안산 군수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 군수품 징발 등의 공을 세운 바 있다.
그는 선조가 사망 소식을 듣고 궁궐에 들어갔다가 관리들이 예절을 모르고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그 일을 상소문에 적은 것이다. 또 이렇게 지적하였다.

“임금이 승하하신 때를 당하여 대신(大臣)이 된 사람은 마땅히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모두 궁궐 앞 넓은 터로 나아가, 초상을 알리는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도 한번 곡을 한 뒤에 관리들이 곧바로 흩어져 모두 구석으로 들어 가버렸습니다. 심지어 대신들은 빈청(賓廳, 관료들이 모여 회의하는 곳)에 모여 앉아 모피 방석에 병풍을 치고서 평일처럼 태연하게 승전(承傳, 보고자)을 출입시키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전하(새로 임금이 된 광해군)께서 거적을 깔고 땅바닥에 거처하는 이러한 때에 신하가 된 입장에서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돌아가신 왕에 대한 효도로서 선왕이 부탁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게 해야할 것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은 일을 경계하도록 건의하였다.

“궁궐 출입을 엄격히 하여 연줄을 통하여 요행을 바라는 문을 막고 사사롭게 예물 바치는 일을 끊어 소인들이 아첨하는 풍조를 제거시키고 언로를 널리 열어 귀에 거스리는 충언(忠言, 충성된 말)이 나오게 하고 조정을 엄숙하고 맑게 하여 좋고 싫음을 공정하게 하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없습니다.”

이귀는 이러한 상소문을 올리고 약 6년 뒤인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에 공신(衛聖原從功臣)으로 인정되어 등록되었다. 그러나 2년 뒤 그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
이귀는 위의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훌륭한 사람들을 추천하기도 하고 관리들 중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비판하기도 하였다.

“정창연(鄭昌衍)이 병이라고 핑계하고 출사하지 않고 있는데, 그의 숨겨진 뜻을 알 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훌륭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정창연 부자(父子) 같은 사람들은 진실로 등용을 해야 합니다.
박건(朴楗)처럼 인망이 흡족하게 여겨지지 않는 자가 새 정부 제일의 높은 직위에 임명되었는데, 이 역시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저의 이 말은 임금과 친척관계라는 것 때문에 인재를 죄다 폐기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처럼 눈을 비비면서 새로운 정치와 변화를 기대하고 있는 때에 이런 사람들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창연(1552∼1636)은 1579년(선조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이후 이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한 바 있다. 그는 이귀의 상소문 덕분인지는 모르나, 1614년(광해군 6)에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이어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박건(朴楗)은 관료나 문신으로 이름이 크게 알려진 사람은 아니다. 광해군과 친척이 되는 인물이라고 하였는데, 한미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이귀가 상소문을 올린 바로 그 날 이귀의 상소문을 읽고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한 기록이 있다.(『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2월 13일』)

“지금 함흥 판관 이귀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그 내용에 ‘한 장의 임명장에 임금의 친척에 관계된 이가 3인이다.’고 하면서 신의 성명을 거론하여 말하기를 ‘인망(人望)이 흡족하게 여겨지지 않는데도 또한 새 정부에서 제일 먼저 높은 직위에 임명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로 헛된 말입니다. 다만, 외척(外戚)에 대한 한 조항에 관해서 신은 실로 무슨 이유로 그렇게 운운한 것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귀가 소장을 올려 남을 무함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 신을 인척이라는 것으로 밀어내려 하니,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시켜 주십시요.”

박건의 이러한 건의에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이귀의 말이 지나치게 직설적이나, 진실로 가상히 여겨 받아들임으로써 언로를 열어야 한다. 다만 그대는 선조(先朝, 앞선 조정)에서 대간과 시종을 역임하였으니,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

이귀는 자신의 상소문에서 또 조정에서 언로가 막힌 점에 대해 크게 우려하며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언로가 막힌 것이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으니, 오늘날 먼저 해야 할 일은 언로를 여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비록 시건방지고 망녕스러운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그럽게 용납해야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죄를 가하여 발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조심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언로를 터달라는 것은 요즘 말로는 ‘언론의 자유’를 뜻한다.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귀는 다음과 같이 정인홍의 예를 들어 국가의 언로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지금 정인홍이 죄를 받은 것은 실지로 봉장(封章, 임금에게 올린 글)을 올린 일에 연유된 것으로 내용은 다소 지나친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요점을 따져보면 역시 말한 것 때문에 죄를 얻은 것입니다. 더구나 정인홍은 선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나이가 또 70세인데 지금 만리나 먼 유배지로 가다가 도로에서 죽는다면 이는 성세(聖世,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태평한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합천, 성주, 대구 등지에서 왜병들과 싸운 인물이다. 자(字)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본관 서산(瑞山)이다. 남명 조식(曺植)의 수제자이며, 남명학파의 지도자로 북인이었다. 서인인 이귀와는 완전히 대립된 위치에 서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에 북인에 속하여 정권을 잡았으며 그 후 북인이 분열한 뒤에는 이산해와 함께 대북파의 영수가 되었다. 대사헌, 공조참판, 우의정, 좌의정 등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언적, 이황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다가 유생들에게 탄핵받아 유적(儒籍, 유학자 명단)에서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능양군)를 옹립하고 정권을 잡으면서 참형을 당했다.
이귀는 상소문에서 정인홍에 대해서 계속 이렇게 말했다.

“정인홍은 타고난 성품이 편협하여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거의 경박한 무리들이 많고 이들이 왕래하면서 주고받는 말들을 경솔히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신의 스승인 성혼(成渾)을 배척하였으며 일본의 ‘히데요시(秀吉)’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망령스럽다는 것은 진실로 따져볼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신이 정인홍에 대해서 평소 서로 용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일인데도 지금 이렇게 운운하는 것은 정인홍을 비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은 국가의 언로를 위하여 하는 걱정인 것입니다.”

이귀의 이러한 말은 정인홍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기도 하였다. 『광해군일기 중초본』(광해 2년 4월 20일)에 이귀의 성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나중에 정리된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귀는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모셨다】강개(慷慨, 불의에 대하여 의기가 복받쳐 원통하고 슬픔)하여 의논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자주 상소하여 시사를 말하였다. 일찍이 정인홍을 꾸짖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그의 죄를 논박하였는데,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숙천 부사가 되어 전임 부사 윤삼빙(尹三聘)이 뇌물을 받고 공물을 훔친 죄를 논핵(論劾, 허물을 캐묻고 따짐)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세력이 있던 윤삼빙이 마침내 대관(臺官,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의 벼슬)을 사주하여 논박하게 한 것이다.”

이귀는 광해군 초년에 이 사람, 저 사람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아무래도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북인이나 북파와는 대립된 서인 출신이었으며, 성격적으로도 너무 강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군 때 『광해군일기 중초본』을 집필한 사람들과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위와 같은 4월 20일자 기록이 사초에 끼어든 것이다. 이 기록은 나중에 정리된 『정초본』에서는 없어졌다.
이귀는 계속에서 상소문에서 자신이 상소문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분연히 큰일을 하려는 뜻을 지니시고 신이 위에서 거론한 네 가지 사항, 즉 궁궐의 출입을 엄격히 하는 일, 개인적인 헌납을 끊는 일, 조정을 맑게 하는 일, 그리고 언로를 여는 일, 이 네 가지 일에 대해 깊이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주역』에 ‘국가를 창건하여 계승해감에 있어 소인은 기용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송나라 신하 왕소(王素)가 ‘누구를 정승으로 삼아야 되겠는가?’ 하는 인종(仁宗)의 질문에 답하기를 ‘환관(宦官)과 궁첩(宮妾, 궁중에서 일을 보는 여자들)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선임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신중히 해야 될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기용하는 한 가지 일에 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정치를 하는 즈음에 제가 구구한 정성으로 거듭 기대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귀는 스스로 율곡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섬겼다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면서 자신의 상소문을 마무리 하였다.

“신은 젊어서부터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이 때문에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대해 대강 들었던 탓으로 나라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제 몸이 있다는 것은 모릅니다.(제 몸 생각보다는 항상 국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라는 뜻임-필자주) 그리하여 종전에는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대행 대왕(선조임금)께 진달하였는데 대행 대왕께서도 저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통촉하셨기 때문에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너그러이 용납하셔서 의원에 명하여 약을 하사하고 개나 말처럼 천한 제 몸의 질병을 치료하여 주셨으니, 그 은혜가 너무도 흡족하였습니다. 전하(광해군)께서 저위(儲位, 왕세자)에 계실 적에도 제가 누차 망령스런 말을 진달하였는데도 과분하게 가상히 여기셨습니다. 혹은 칭찬하시고 장려하시는 은총을 받았는가 하면 하사품을 받는 은혜도 있었습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분수에 넘친 은혜를 받는단 말입니까. 항상 감격스러운 마음을 지니고서 단지 결초보은(結草報恩, 죽은 뒤에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하기만 기약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하께서 사위(嗣位,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음)하신 때를 맞이하여 어리석고 망령된 말로 새로운 정치에 만에 하나라도 우러러 도움이 되게 할 것을 생각하며 감히 이렇게 상중(喪中)에 계신 전하께 번잡스레 아룁니다. 그지없이 죄송스럽습니다.”

이귀는 1619년(광해군 11년)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1620년 신경진과 김류가 광해군을 끌어내리는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도 이서, 김자점, 최명길, 최내길, 구굉, 이괄 등과 함께 반란의 깃발을 올렸다.
1623년 3월 13일 밤 반란 세력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후의 인조)을 추대하는데 성공하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모두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되었는데, 이귀는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후 연평군(延平君)에 봉작되고 후에 부원군(府院君, 왕비의 아버지나 정일품 공신에게 주는 작위)이 되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에는 위에 소개한 이귀의 상소문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인조 10년경에 완성된 『광해군일기』<정초본>에는 그 상소문이 삭제되었다. 『광해군일기』는 결국 반정세력(서인)이 검토, 수정을 하였을 터인데, 반정을 일으킨 이귀가 자신의 상소문을 다시 읽었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아마 자신의 글을 읽고 낮이 뜨거웠을 것이다. 광해군을 향하여 “죽은 뒤에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겠다”고 해놓고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광해군 일기』 중초본과 정초본


『광해군 일기』 중초본과 정초본.

 

해군은 임금의 직위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에 재위기간 중 국정 전반의 역사기록으로 ‘광해실록’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고 ‘광해군 일기’가 된 것이다. 또 조선시대 국왕들의 실록 가운데는 유일하게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이 『광해군일기』는 ‘중초본(中草本, 太白山本)’ 64책과 ‘정초본(正草本, 鼎足山本)’ 39책의 두 종류가 있다.

조선시대에 왕조실록을 만들 때는 몇 차례의 정리와 수정 과정을 거친다. 맨 처음 써진 기록을 ‘사본’(寫本, 손으로 쓴 책, 베껴 쓴 책)이라고 하는데 다른 이름으로 초본(鈔本)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맨 처음에 기초를 잡았다고 하여 초고본(初稿本) 또는 초초본(初草本)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에 고친 것을 재고본(再稿本) 또는 중초본(重草本)이라 한다. 왕조실록은 대개 초고를 한번 고친 뒤 중초본(重草本)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정초(正草, 바르게 씀)하여 완성한다. 중초본은 중간에 쓴 원고, 즉 두 번째로 쓴 원고라 하여 중초본(中草本)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므로 『광해군 일기』중 <중초본>은 먼저(두번째로) 기초를 잡은 원고를 말하고 <정초본(正草本)>은 마지막으로 완성한 원고를 말한다.

『광해군 일기』<중초본>은 붉거나 검은 먹으로 수정하거나 삭제하고 혹은 첨가한 부분이 많다.(이러한 부분을 여기서는 【】표시 안에 넣어서 표기하기로 한다.) 그리고 크고 작은 부전지가 매우 많이 붙어 있으며, 각 면의 위아래 빈 곳에 가필하거나 첨가한 부분이 많고 대부분 초서로 쓰여 있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주도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 대거 반영되어 있다.

정초본은 1634년에 등록관(謄錄官) 50명이 임명되어 정서를 하기 시작하여 그해 5월에 2부를 완성하여 보관하였다. 중초본에는 삭제하지 않은 내용들이 많아 모두 187권 64책으로 편철되어 있다. 정초본은 중초본의 내용들을 대거 산삭 정리하여 187권 40책이 되었다. 전체의 분량이 중초본에 비해 1/3 정도 축소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리된 정초본이 말하자면 광해군 시대의 공식적인 실록이다.

『광해군일기』(중초본)은 1624년(인조 2년)부터 1633년까지 11년 가까운 시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먼저 광해군 시대의 ‘시정기(時政記, 춘추관에서 각 관서들의 업무 기록을 종합하여 편찬한 기록물)’를 수정하려고 하였다. 이는 실록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기록이 주로 반대파(대북파) 인물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1624년 1월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 춘추관을 포함하여 많은 관청이 불에 탔다. 이때 시정기를 비롯한 많은 사료들이 분실되었다. 1624년 6월에 춘추관에서 남아있는 시정기를 수정하지 않고, 『광해군일기』를 곧바로 편찬하기로 결정하고 ‘일기찬수청’을 남별궁에 설치하고 담당관을 임명하여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기초 사료들이 대부분 유실된 상태에서 각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던 일기나 소장(疏章), 조보(朝報), 문집(文集) 등을 수집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편찬 작업이 매우 느렸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에는 후금이 침입하여 문서 일부는 강화도로 옮기고 일부 자료는 남별궁에 임시로 묻어 두었으나, 묻어둔 자료가 대부분 손상되었다. 이 때까지 『광해군일기』중 130개월분이 중초본으로 완성되고 그 나머지 57개월분은 초고 상태로 남았다. 이후 1632년(인조 10년)에 다시 찬수청을 다시 설치하고 편수 관원을 임명하여 편찬을 계속하였다. 1633년(인조 11년) 12월에 최종적으로 187개월분의 <중초본>이 완성되었다.

 

<참고문헌>

차문섭, 「광해군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왕대별 해제 제15대 광해군일기」(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17세기 초엽 광해군 시대


17세기 초엽 광해군 시대.

 

해군(1575년∼1641년)은 조선후기의 제15대 임금으로 등극하였으나 궁정에서 발생한 구데타에 의해 끌어내려져 국왕의 칭호를 빼앗기고 왕자 때 받은 ‘광해군’이라 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어 북쪽으로 피난을 가버린 선조를 대신하여 전장에 나가 국난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광해군이 집권한 뒤인 1616년에 후금(뒤의 청나라)이 건국되었다. 이에 그는 명나라와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이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였다. 또 대동법을 실시하고(1608년) 농지조사를 통해 경작지를 넓혀 재정을 충실히 하였으며(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고(1609년), 경희궁(1619년)과 인경궁(1621년)을 중건하는 등 정치적 업적을 쌓기도 하였으나 서인과 남인이 주도한 반란에 의해서 국왕의 지위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1392년∼1897년) 600년은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14세기부터 16세기말까지 약 300년, 후기는 17세기부터 19세기말까지 약 300년이다.
율곡은 1537년부터 1584년까지 살았으니 전기의 말엽에 산 사람이다. 그는 당시 선조 임금을 향하여 줄곧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1582년(선조 15년),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에 올린 상소문 중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지금 전하께서는 폐단이 오랫동안 쌓인 뒤에 나라를 이어받았으니 경장(更張, 낡은 제도 등을 새롭게 고침)할 대책을 강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매번 제도를 개혁하는 일을 어렵게 여기시고 변통(變通, 형편에 따라서 일을 융통성 있게 잘 처리함)해야 한다는 말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계십니다. 비유하자면 오래 묵은 집의 재목이 썩어서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데도, 서까래 하나 갈지 않고 기둥 하나도 고치지 않고서 앉아서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진시폐소(陳時弊疏)」, 『율곡전서』권7)

율곡은 당시 조선의 상황이 “폐단이 오랫동안 쌓인 뒤”이며,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데”, “앉아서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선조가 개혁의 정치를 추진하려고 하지 않으니 다소 과장하여 이러한 건의를 하였겠지만, 사실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너무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바로 10년 뒤에 일본의 침략상황을 염두에 두면 그렇다.
일본의 침략이 오직 일본만의 책임일까? 침략을 하도록 수많은 허점을 조선은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외국의 침략을 경계하지 않고 내부의 당파싸움에만 몰두하고, 군대의 정비나 개선은 멀리하고 국민들의 삶은 피폐한 채로 놔두고 외면하고 있지 않았는가? 조선은 건국된 이후 300여년 가까이 지나면서 금방이라도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이 율곡의 상소문에 절절히 드러나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비록 막대한 손실과 피해를 보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율곡의 건의처럼 철저하게 개혁하고 묵은 집을 다시 고칠 수 있는 기회였다. 만약 잘 개혁을 한다면 강력하고 부유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즉 1600년대 초엽(1608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를 이어 인조(1623년∼1649년), 효종(1649년∼1659년), 현종(1659년∼1674년), 숙종(1674년∼1720년)이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들이 왕위에 있었을 때가 대략 17세기이며, 이 시기는 조선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역사의 긴 흐름을 염두에 두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18세기, 19세기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계기로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1618년∼1924년)로 정권이 바뀌었다. 쇠퇴한 명나라가 몰락하고 강력한 군대를 지닌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것이다. 일본은 중세시대(1192년∼1603년)에서 근세시대(1603년∼1868년)로 바뀌었다. 즉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기(1467년∼1603년)를 거쳐서 에도의 막부정권(1603년∼1868년)으로 전환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보면 17세기 초엽은 새로운 국가나 정권이 등장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발전을 꾀한 시기였다. 직접적으로 전쟁의 참화를 가장 심각하게 겪었던 조선 역시 그런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조선은 정권도 변하지 않았고 조선이라는 국가도 그대로였다. 그래도 시대적으로는 철저한 개혁을 통해서 국가 전체의 조직이나 제도를 재정비해 나가야하는 시기였다. 머지않아 서구에서 근대문명이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문명이 밀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시대(1608년∼1623년)는 그런 점에서 조선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시기였다. 광해군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였으나 반대파 지식인들을 설득하지 못하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사망한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약 15년간 재위하였다. 그가 재위한 시기에 유학자들 사이에 붕당(학문이나 정치적 입장을 함께하는 유학자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 매우 극심하였다. 선조 시기인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을 계기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의 두 파로 나뉘었다. 광해군이 집권할 때는 이산해, 이발, 정인홍 등 반대파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는 강경파인 북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 초에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선조시기 말엽에 반란의 주모자로 몰린 정여립은 예조좌랑,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한 인물로 원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제자였다. 서인 측에 속했던 그는 나중에 동인이 권력을 잡자 율곡을 비판하고 동인 쪽에 섰다. 이러한 그를 임금이던 선조가 비판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나중에 그는 반란의 의심을 받다가 자살하였는데, 서인들의 고발과 정철의 과도한 수사로 그와 관계를 맺고 있던 동인들이 많이 희생이 되었다. 광해군 재위 초기에 동인 중 북인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반대쪽인 서인과 남인은 비주류였다.
광해군은 1612년에는 김직재(金直哉)에 대한 잘못된 고발을 빌미로 100여명의 소북파(북인의 일파)를 처단하였으며, 1613년에는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여 죽였다. 광해군은 서자, 즉 첩의 아들이었고, 영창대군은 선조의 본처인 인목왕후의 아들, 즉 적자였다. 1618년에는 자신의 작은 어머니이자, 영창대군의 친어머니 인목왕후(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 이러한 사건들은 대부분 대북파(북인의 일파)의 책동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1623년 서인세력이 남인의 지원을 받아 능양군(인조)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인조반정) 이후 그들은 광해군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유배형에 처했는데, 광해군은 강화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1641년에 사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율곡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율곡.

 

율곡’이라는 키워드로 <조선왕조실록>(국역본)을 검색해보았다. (사이트 주소 : http://sillok.history.go.kr/, 검색일 : 2019년 11월 3일) 검색 결과는 총 63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전체시기에 해당한 기록이다.
율곡은 1537년에 태어나 1584년에 사망하였다. 즉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1488∼1544) 연간에 태어나 선조(1552∼1608) 연간에 사망하였다. 여기서는 선조 이후의 결과만, 즉 1600년대 이후를 살펴보기로 한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1600년대:
『광해군일기 중초본』 2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1건
『인조실록』 3건
『효종실록』 1건
『현종개수』 2건
『숙종실록』 14건
『숙종실록 보궐정오』 1건
이상 총 24건.

1700년대:
『경종실록』 2건
『영조실록』 6건
『정조실록』 8건
이상 총 16건.

1800년대:
『순조실록』 5건
『철종실록』 2건
『고종실록』 2건
이상 총 9건. 전체적으로 총 49건이다.

‘율곡’은 율곡 이이의 호(號)다. 이 호는 전통시대에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따로 지어 부른 이름이었다. ‘율곡’으로 검색하면 말하자면 율곡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담긴 문장만 검색된다. 그래서 율곡의 본명인 ‘李珥(이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검색해보았다. 그랬더니 앞서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보다 훨씬 더 많이 검색 되었다.

1600년대:
『광해군일기 중초본』 22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18건
(여기서 『광해군일기 중초본』이란 두 번째로 수정한 원고본라는 뜻이고 『정초본』이란 마지막으로 완성된 원고, 즉 최종본이란 뜻이다. )

『인조실록』 63건
『효종실록』 32건
『현종실록』 57건
『현종개수실록』 96건
(여기서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이란 『현종실록』을 다시 수정한 실록이라는 뜻이다.)

『숙종실록』 192건
『숙종실록 보궐정오』 17건
(『숙종실록 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란 『숙종실록』의 일부를 수정하여 바로 잡은 실록이라는 뜻이다.)
이상 총 497건이다.

앞서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는 1600년대에 24건이었는데 ‘이이’로 검색한 결과는 497건이니 무려 20배 이상 더 많다. <왕조실록>에서는 호 보다는 본명으로 불리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600년대에 ‘이이’를 가장 많이 언급한 시기는 숙종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가 전체의 39%정도를 점하고 있다. 숙종시대에 율곡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1700년대:
『경종실록』 7건
『경종수정실록』 4건
『영조실록』 76건
『정조실록』 55건
이상 총 142건.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보다 8배 이상 더 많다.

이 1700년대에는 영조, 정조시대에 ‘이이’가 압도적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특히 영조시대가 전체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영조는 조선 사회를 개혁한 임금, 계몽군주, 혹은 조선의 후기 르네상스를 연 임금 등으로 불린다. 이런 영조의 이미지와 율곡의 개혁정신이 잘 어울린다. 아마도 이 시대에 율곡에 대한 언급은 사회 개혁과 관련될 것이다.

1800년대:
『순조실록』 23건
『헌종실록』 2건
『철종실록』 8건
『고종실록』 30건
『순종실록』 1건
이상 총 64건. 1600년부터 1800년대 까지 전체 총 703건이다.

이런 결과는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보다 7배 이상 더 많다.
1800년대 즉 19세기에 율곡은 고종 시대에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 고종 시대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시대였다. 그만큼 위기의식이 특히 강한 시대였다. 율곡이 살아생전에 모시던 임금인 선조에게 호소하였던 위기의식이 고종시대에 다시 재음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에서 율곡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데 1600년대는 497번, 1700년대는 142번, 1800년대는 64번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율곡에 대한 언급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곡 사상의 핵심은 개혁 정신이고 변혁의 정신이다. 조정에서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율곡의 이야기가 이렇게 줄었다는 것은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정신이 줄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조선 사회가 몰락해가면서, 1800년대에 이르면 ‘개혁’만 가지고는 나라를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사회를 완전히 변혁시킬 ‘혁명’이 필요했으며, ‘동학 혁명’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에서 더 가슴에 다가온다. ‘동학혁명’은 1800년대 말, 즉 19세기 말엽의 조선 사회의 절박함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동학혁명’이라는 단어는 당시 사람들의 표현이 아니고 그때는 ‘개벽’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서 ‘李滉(이황)’을 검색해보았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1600년대:
『광해군일기 중초본』 38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35건
『인조실록』 24건
『효종실록』 22건
『현종실록』 19건
『현종개수』 34건
『숙종실록』 67건
『숙종실록 보궐정오』 6건
이상 총 245건.
율곡 이이에 대한 검색 결과가 총 497건이었으니 그것의 1/2정도에 불과하다.

1700년대:
『경종실록』 8건
『경종수정실록』 4건
『영조실록』 47건
『정조실록』 47건
이상 총 106건이다. 율곡의 경우는 총 142건이었다.

1800년대:
『순조실록』 12건
『철종실록』 3건
『고종실록』 15건
『순종실록』 1건
이상 총 31건이다. 율곡은 총 64건 이었다. 약 1/2정도이다.
전체적으로 1600년부터 1900년까지 율곡은 총 703건, 퇴계는 385이 언급되었다. 율곡이 2배정도 더 많이 논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의 사상은 율곡 사상과 비교해보면 정통 주자학에 더 가깝다. 개혁적이라기보다는 보수에 가까우며 변화보다는 전통 유지에 가깝다. 퇴계는 성리학 사상과 수양에 더욱 침잠하였기 때문에 이상주의자에 가깝고, 율곡은 거기에 비하면 현실주의자였다. 그래서 퇴계는 리(理, 이치 또는 원리)를 더 강조한 편이었고, 율곡은 기(氣, 기질 또는 현상)를 더 주목한 편이었다.
그리고 퇴계는 1502년부터 1571년까지 70년을 살고 사망하였다. 이에 비하면 율곡은 1537년부터 1584년까지 겨우 48년을 살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요절에 가까운 율곡의 짧은 생애를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였는데 그런 마음이 율곡을 더욱 그리워하고 회상하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율곡은 또 조정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관리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상이나 언행에 정치적인 것과 관련이 많았다. 그 점이 후대의 조정에서도 관리들의 입에 오르내릴 소재가 많았을 것이다. 퇴계의 경우는 일찍부터 관직을 단념하고(퇴계는 당시 빈번하게 발생한 사화士禍의 위험을 절감하고 있었다.) 고향에 내려가 산림에서 살면서, 학자로서의 삶을 더 중시하였기 때문에 조정 사람들의 대화 주제에 거론되는 일이 율곡 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검색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광해군일기』부터 살펴보면서 <조선왕조실록>에 율곡이 어떻게 기억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말하자면 율곡에 대한 이미지의 변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해본다.

강릉의 향현(鄕賢), 최수성


강릉의 향현(鄕賢), 최수성.

 

릉은 예로부터 효자·효부·열녀가 많이 나온 곳이라 하여 ‘예향(禮鄕)’이라 불렸고, 또한 문장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났다고 하여 ‘문향(文鄕)’이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문향·예향의 고장 강릉에서 배출된 인물 가운데 지방민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12분을 일컬어 ‘12향현’이라 한다. 그리고 이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행하는 곳이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향현사(鄕賢祠)이다.
강릉 지방에 향현사를 건립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전후에 쇠약해진 문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사당을 세우자는 논의는 있었으나 쉽게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645년(인조 23) 8월에 강백년이 강릉부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전 목사 이상험과 전 직장 김충각 등 여러 사람들의 건의로 마침내 사당을 완공하여 최치운·최응현·박수량·박공달·최수성·최운우 등 6현을 배향하였다. 그 후1682년(숙종 8)에는 최수를, 1759년(영조 35)에는 이성무·김담·박억추를, 1808년(순조 8)에는 김윤신·김열을 배향함으로써 모두 12분의 향현을 모시게 되었다.
여기서는 12향현 가운데 문장뿐만 아니라 글씨, 그림, 음률 등이 당대에 뛰어나 ‘사절(四絶 )’이라 불렸던 최수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최수성(崔壽峸)의 자는 가진(可鎭)이고,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호산인(鏡湖散人)이다. 그는 4~5세에 이미 문장을 지을 줄 알았고 10세에 이르러 문장이 대성하였다. 시를 지으면 운율이 이백·두보에 못지않았고, 글을 지으면 문체가 유종원·한유에 못지않았으며, 필법에서는 왕희지의 글씨에 견줄 만했고, 화법에서는 고개지의 묘수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특히 시와 그림에 능했는데, 그의 시는 속세를 벗어난 것과 같이 맑고 깨끗하였다. 기묘명현이었던 김정(金淨)은 일찍이 그의 시를 사랑하여 “이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이름을 시문학에 남길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최수성이 하루는 동호당(東湖堂:독서당)에 이르러 김정을 찾아가니, 김정이 그를 맞이하여 술동이를 열어놓고 매우 즐겁게 술을 마셨다. 김정이 송죽도(松竹圖)를 그려달라고 요청하자 공이 술에 취하여 누워서 그림을 그렸는데, 김정이 이 그림을 곧바로 족자로 만들었다. 이 그림이 호당에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천하에 뛰어난 필치라고 하였다.
공이 그린 그림이 또 내장고(內藏庫)에 있었는데, 왜인(倭人)의 사신이 그때 마침 와서 온 나라의 명화(名畵)를 요구하여 보았으나 모두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공의 그림을 보고 매우 사랑한 나머지 값이 300금(金)에 달하는 보검 한 쌍과 바꾸자고 청하였으나 중종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명나라 사신이 와서 공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정말로 천하에 뛰어난 보배”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이 저술한 시문(詩文)은 많았으나 흩어져서 다만 몇 수의 시만 남아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뿐이고, 서화도 남아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
공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 수학하였는데, 경학에 밝고 행실이 착했으며 수학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공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면서 김정·조광조 등과 서로 좋은 벗이 되어 경전을 탐구하고 도의를 강론하니, 학문이 날로 발전하여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다. 김굉필은 기묘년의 많은 인재를 논할 때 반드시 최수성이 제일이라 하였고, 성수침은 항상 기묘년의 인재를 논할 때 반드시 공을 첫 번째로 꼽으며 말하기를, “만약 이 사람이 뜻을 얻는다면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힐 것인데, 결국 간사한 사람의 손에 죽고 말았으니 매우 애통하다.”고 하였다.
공의 동문인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이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성리학적인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일련의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조광조는 현량과를 통해 그 세력이 확대되자 반정공신에 대한 대대적인 위훈삭제를 단행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이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사림에 대한 중종의 견제심리까지 작용하게 하여 위훈삭제 조치가 결정되고 3일 만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결국 조광조는 사사되고, 김구·김정·김식은 절도안치(絶島安置), 윤자임·기준·박세희 등은 극변안치(極邊安置), 정광필·이장곤·김안국 등은 파직되었다.
그런데 최수성은 기묘사림에게 화가 미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천(老泉:김식의 자)이 효직(孝直:조광조의 자)·원충(元冲:김정의 자)·대유(大柔:김구의 자)와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최수성이 별안간 밖에서 들어오더니 인사도 않고 한참 섰다가 급히 노천을 불러 “나에게 술 한 그릇을 달라.”고 하였다. 술을 주니 단숨에 마시고 나서 하는 말이 “내가 파선되는 배에 탔다가 거의 빠져 죽을 뻔하여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이제 술을 마시니 풀린다.”하고, 간다는 말도 없이 바로 가버렸다. 앉은 사람들이 괴상하게 여기니 효직이 말하기를, “파선되는 배라고 한 것은 우리들을 가리킨 것인데 자네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이네.”라고 하였다.
《대동야승》권3, 병진정사록

얼마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남곤이 죄인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이 되어 최수성도 아울러 추고(推考)할 것을 중종에게 청하기를, “조광조 등이 최수성을 선사(善士)로 여기고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아 조정의 진퇴를 반드시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결정합니다. 최수성은 비록 초야의 선비로 이름이 났으나, 조광조가 나라를 그르친 근원은 모두 최수성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정의 무리들과 별도로 음모를 꾸미느라 항상 김정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라고 권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내막이 있을 터이니 국문하소서.”하며 최수성도 잡아들여 심문할 것을 청하자 중종이 허락하였다. 최수성이 공초하기를, “신은 백면서생인데, 조광조와 무리를 지어 조정의 일을 의논할 리는 만무합니다. 김정의 무리에게 조정에서 물러나 돌아가라고 권한 것은 신이 한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조광조·최수성 등이 붙잡혀 와서 고문을 당할 때, 최수성은 영의정 정광필과 우의정 안당이 힘써 구원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최수성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김정·김식 등 그와 친한 동료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술과 여행, 시와 서화 등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소나무로 거문고를 만들어 타다가 싫어지면 이것을 버리고 떠나갔는데,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진위(振威:현 경기도 평택)의 남탄현(南炭峴)에 별장을 마련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원숭이 한 마리를 길렀는데, 능히 서찰을 전할 수 있고 우물의 물을 길어 벼루에 따를 때에 턱과 손가락이 사람과 같았다. 그리하여 정자의 이름을 ‘원정(猿亭)’이라고 하였는데, ‘원정’이라는 별호는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 후 최수성은 1521년(중종 16)에 일어난 이른바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안당·안처겸·안처근 3부자를 비롯하여 권전·이정숙·이충건·조광좌·이약수 등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최수성이 신사무옥에 연루된 것은 남곤과의 원한에서 비롯되었다. 강릉의 읍지인 《임영지》에 의하면, 어느 날 공이 김식의 집에 있는데, 때마침 남곤이 찾아왔다. 공이 번듯이 누워 있으니, 남곤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식이 “이 사람은 숨어사는 선비 최원정(崔猿亭)이오.”라고 말했다. 공이 거짓으로 취한 척하고 일어나지 않다가, 남곤이 문으로 나가자 성난 소리로 “그대는 어찌하여 간교한 사람과 교유합니까? 일시에 사류(士流)를 해칠 자는 바로 이 사람이오.”라고 하였다.
《해동잡록》에 의하면 일찍이 남곤이 산수화 한 폭을 김정에게 보내 제시(題詩)를 써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때마침 그 옆에 있던 최수성이 그 산수화를 보고 제시를 쓰기를

지는 해는 서산으로 내려가고[落日下西山] 외로운 연기는 먼 숲에서 나오네[孤煙生遠樹] 은사의 차림 복건 쓴 서너 사람[幞巾三四人] 망천장의 주인은 누구인가[誰是輞川主]

라고 하였다. 남곤은 평소 그와 친한 최세절로부터 조카 최수성이 자기들을 비난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지는 해’는 훈구파를 뜻하고, ‘복건을 쓴 서너 사람’은 사림파를 뜻한다고 해석하였다. 남곤이 이것을 보고 최수성에 대해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
《최원정화 풍남태설(崔猿亭畵諷南台說)》에서도 최수성의 신사무옥 연루에 대하여 자세히 나타난다. 최수성의 숙부 최세절이 재주는 있었지만 지조 없이 남곤을 찾아다니면서 벼슬을 구하였다. 원정은 매양 숙부에게 직간하여 “군자와 군자와의 사귐은 두루 미치되 아첨하지 않으며, 소인과 소인의 사귐은 아첨만 하되 두리 미치지 못한다 했습니다. 지금 숙부께서는 군자의 두루 미침은 알지 못하고 오로지 소인들의 아첨만 숭상하니, 무섭고 두려워서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과 업신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숙부는 마음속으로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숙부는 이 말을 듣고 다시는 원정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 후 최수성이 그의 숙부 최세절에게 보낸 시에 “해 저물어 푸른 산 아득도 한데, 하늘은 차고 강물은 절로 일렁이네, 외로운 배여 서둘러 정박해야 하리. 밤이면 풍랑이 거세질 테니[日暮蒼山遠 天寒水自波 孤舟宜早迫 風浪夜應多]” 라고 하였다. 최수성의 숙부가 이 시를 남곤에게 보이니, 남곤은 한참을 보더니 말했다. “해 저물어 푸른 산 아득도 한데”라는 구절은 세상의 도리가 점점 나쁜 쪽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고, “하늘은 차고 강물은 절로 일렁이네”라는 구절은 군주가 약하고 신하는 강하다는 뜻이며, “외로운 배여 서둘러 정박해야 하리”라는 구절은 세상을 피해 은거해야 한다는 뜻이고, “밤이면 풍랑이 거세실 테니”라는 구절은 조정이 장차 어지러워진다는 뜻이라 하였다.
남곤은 이 시가 세상을 우습게보고 조롱하는 뜻이 참으로 통렬하다면서, 그대의 가까운 친척이 아니었다면 의당 죽였겠지만, 자네 얼굴을 보아 이번만은 용서한다고 하였다. 이후 남곤은 최수성을 해치려는 마음이 전보다 갑절로 커졌다. 결국 남곤은 신사무옥 사건의 추관(推官)이 되어 최수성을 추국하도록 청하여 끝내 죽이고 말았다.
율곡 이이는 “최수성은 처사(處士)로서 산림에 은거하면서 도학에 몰두하여 깊이 의리를 알아 명성과 이득을 구하지 않고 여러 번 명한 관직에도 불응하다가 마침내 기묘사화를 당하여 조광조와 더불어 일시에 간사한 사람들의 모함에 빠져 죽고 말았다.”고 하였다. 율곡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은 기묘사화 때 목숨을 잃었다고 인식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안처겸의 옥사(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죽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