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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구(尹鳳九, 1683-1767)

윤봉구(尹鳳九)                                                       PDF Download

윤봉구는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자는 서응(瑞膺)이며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이다.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윤비경(尹飛卿)이다. 아버지는 윤명운(尹明運)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우참찬 윤봉오(尹鳳五)의 형이다.

28세(1710) 증광 초시 종장 수석을 취소당했다. 사간원에서 논핵하기를, “금번에 감시(監試) 1소(所)의 종장(終場)에서 수석을 차지한 윤봉구는 시문(試文)이 전연 과식(科式)에서 벗어나 보통 격식과 크게 달랐으며, 첫머리에 심지어 ‘재배경실(再拜敬悉)’ 등의 말까지 있었습니다.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문체인데 시험을 관장하는 관리가 도리어 높은 등급에 두었으니, 문체를 바로잡아 뒷날의 폐단을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감시 1소의 종장에서 수석을 차지한 윤봉구를 특별히 빼어버리도록 하고 해당 시관(試官)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이후 숙종이 좌도의 방(榜)은 다만 종장(終場)에서 입격(入格)한 사람을 빼어 버리고 윤봉구의 글 또한 격식에서 어긋난다 하여 빼버리도록 명하였다.

32세(1714) 진사가 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었다.

43세(1725, 영조 1년) 윤봉구(尹鳳九)를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삼았다. 권상하의 문인으로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써 평소부터 사림의 명망이 있었고, 영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사부였다.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여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를 초빙하시되, 직명(職名)의 유무를 막론하고 별유(別諭)로 부르시고, 직사(職事)를 강제로 맡기지 마시고, 경연에서 윤번으로 시강하게 하소서.” 하면서 “이간(李柬)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李頤根)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尹鳳九)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韓元震)의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49세(1731) 향리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강연(講筵)에서 토론한 바는 바로 <성학집요(聖學輯要)>입니다. 신의 스승인 선정신 권상하가 항상 말하기를, ‘이 책은 마땅히 한천(寒泉)의 편찬에 나란히 나열해야 한다.’ 하였고, 선정신 송시열은 또 효종대왕께 고하기를, ‘주자의 시대는 오늘의 시대와 가장 가깝고 조우한 바의 시세도 또 그와 서로 동일하기 때문에 그 말이 낱낱이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시기의 앞뒤는 5백여 년이고 국가의 크고 작음은 중화와 외국의 구별이 있는데도 그 말이 다 적용될 수 있음이 이미 이와 같습니다. 더구나 이이는 바로 우리 동국의 대현이고 또 본조의 규모는 선조 이하로는 하나의 도철(塗轍)입니다. 그 시사를 우려한 의논이 오늘날에 적중되지 않음이 없는데 또 그 의리가 모두 주자에게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군주가 먼저 이치를 밝히지 않고 한갓 억측과 지레 짐작만으로 관찰을 한다면, 공(公)으로써 사(私)를 삼고 아첨으로써 충성을 삼지 않을 경우가 적습니다. 이치를 밝히는 것은 <대학>의 궁리 공부인데, 거경(居敬)은 또 궁리의 근본이 됩니다. 한원진이 한번 망언한 것으로 인해 혹 중벌이라도 가한다면 옛사람의 이른바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쓴다.’는 의미로 볼 때 아마 이와 같이 해서는 부당할 것이며 평일에 선비를 대우하는 예의가 장차 이로부터 파괴될 것입니다.” 하고 이것을 나아가기 어려운 의리로 끌어댔다.

51세(1733) 한원진을 변호하며 사직의 상소를 올렸다. “신은 한원진과 어려서부터 같이 배워 뜻과 행동이 서로 합했으니 굶주리고 배부른 것과 춥고 더운 것을 의리상 달리할 수 없습니다. 어찌 처음에 서로 간여한 것이 없다 하여 혼자만이 영진(榮進)하겠습니까? 아! 숙종대왕께서 세상의 변고를 두루 겪으셨는데 그 시비의 원인을 추구하여 이미 선정신 송시열을 어진 군자로 삼았으니 송시열을 배반하는 자는 바로 소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탕평(蕩平)’ 두 글자를 가지고 다스리는 신부(信符)와 조정(調停)하는 틀로 삼아 반드시 그 근원부터 시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심지어 정미년 하교가 있기까지 하여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세도(世道)가 날로 변하여 난역(亂逆)이 겹쳐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탕평이 그 요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시고 도리어 요즘의 변란(變亂)은 붕당(朋黨)에 연유되었고 붕당의 원인은 사문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다. ……따라서 사림 사이에 바른 논설이 사라지고 조정에서는 충절이 없어져 군자는 물러나고 소인은 나오며 양(陽)이 사라지고 음(陰)이 길어져서 송시열의 도가 날로 더욱 어두워지게 되었습니다. ……신은 선정 권상하에게 배워서 송시열의 도를 사표로 삼아왔는데 송시열의 도가 이미 다시 오늘에 칭송되지 않으니 스스로 초개처럼 버려짐을 달게 생각합니다.”

51세(1733) 사헌부지평이 되고 52세(1734) 장령(掌令)이 되고, 57세(1739)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59세(1741) 부호군이 되었을 때 주자를 보은 춘추사의 송시열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군자감정이 되었다.

62세(1744) 왕의 마음공부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 “전하의 전후에 있었던 지나친 거조에 대하여 지난번 내리신 비망기(備忘記)에서 이미 두루 말씀하였는데 3, 4년마다 반드시 한 번씩 있었으니 임어(臨御)하신 지 수십 년에 이런 거조가 모두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한 가지 일 때문에 격뇌(激惱)하실 경우 본사(本事) 이외에 번번이 별건(別件)의 비상한 거조가 있어 왔는데 이번은 전일보다 또 더한 바가 있습니다. ……마음은 만사의 근본이고 임금의 한 마음은 또 천하의 대본입니다. 임금이 요순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요순 같은 정치가 있게 되는 것으로, 한·당의 성세(盛世)와 쇠세(衰世)도 그 임금의 마음에 연유하여 그림자가 메아리처럼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전하의 마음속에 있는 천리와 인욕오 소장과 승부는 단지 이 세도에서 증험할 수 있는 것이어서 전하의 정녕한 하교를 기다리지 않아도 사람마다 모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고요히 보존되었을 때의 마음을 더욱 엄히 지니시고 의념의 싹을 더욱 엄밀히 살핌으로써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는 공부에 추호도 미진함이 없게 하신다면 손을 마주 잡고 단정히 앉아 독경(篤敬)하는 마음만 지니고 있어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성색(聲色)을 크게 하지 않아도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영조가 가납하고 “즉시 올라와서 나의 원량을 보좌하라.” 했다.

68세(1750) 영조가 행궁(行宮)에서 윤봉구를 인견하고 “진선(進善)이 한가로이 지내면서 강학(講學)한다고 하니, 좋은 말을 듣고자 한다.” 하니, 대답하기를, “소신은 재주와 학식이 얕고 짧아 공부가 모자라는데 무슨 말과 의논으로써 성덕을 돕겠습니까? 옛날에 신의 스승 선정신 권상하가 숙묘(肅廟)를 진대할 때 정일(精一)의 심법(心法)과 성정(誠正)의 공부를 우러러 진달하였습니다. 또 주자의 ‘직(直)’ 자의 가르침을 부연하여 설명하니, 숙묘께서 하나하나를 가납하셨으니, 성문에 서로 전해오는 학문은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선사는 선정의 적통을 전해 받았는데, 진달한 것 역시 이에 그쳤으니, 신이 어찌 감히 다른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신이 오늘 전하 앞에서 이 말을 외어 진달하는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니, 전하께서도 숙묘께서 가납하신 뜻을 본받아 다시 구설을 취해 하나하나 몸소 행하시면, 어찌 계술하는 도리가 빛나지 않겠습니까?” 했다. 황경원이 말하기를, “현묘(顯廟)께서 온궁(溫宮)에 거동하셨을 때 선정신 송시열이 들어와 배알하였고, 숙묘(肅廟)께서 온천에 거둥하였을 때에는 선정신 권상하가 와서 배알하였는데, 전하의 오늘 온천 거둥에는 윤봉구가 권상하의 고제로서 와 배알하니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했다.

윤증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삼가 듣건대, 일전에 치제(致祭)하라는 명이 뒤섞여 고 상신 윤증(尹拯)에게도 미쳤다고 하는데 이번 일이 유현(儒賢)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명의에 용납되지 않으니 유현으로 대우해서는 안 되며 상신이기 때문이라면 선왕께서 죄를 주어 삭출하였으니 상신으로 대우해서도 안 되는데, 성의(聖意)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거동은 선대왕의 고사(故事)를 따르는 것인데 선왕께서 항상 배척한 바이니 비록 드러나게 엄히 정토하지는 못하더라도 도리어 치우치게 사제(賜祭)하는 은혜를 입은 것은 실로 전하를 위해 이 거조가 애석합니다. 신은 송시열을 사숙한 사람인데 선정의 도는 혼효(渾淆)를 깨뜨리는 것임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삼가 윤화정(尹和靖)을 정씨(程氏)의 무리들이 배척한 데 따라서 감히 물리치는 은혜를 청합니다.”

78세(1760) 대사헌에 특별 임명되었다. 사후 1804년(순조 4년) 윤봉구에게 문헌(文獻) 시호를 내렸다.

윤봉구는 호락논쟁의 중요한 일원이다. 호락논의 분파는 이간과 한원진에게서 심화되어 심성론(心性論)의 한 줄기를 형성한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같다는 이간의 학설은 뒤에 이재(李縡)와 박필주(朴弼周)에 이어져 ‘낙론(洛論)’이라 불리고,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와 최징후(崔徵厚)로 연결되어 ‘호론(湖論)’으로 지칭되었다.

윤봉구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하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병계집(屛溪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간(李柬, 1677-1727)

이간(李柬)                                                                  PDF Download

이간은 본관은 예안(禮安)이고 자는 공거(公擧)요 호는 외암(巍巖)이다. 아버지는 부호군 이태형(李泰亨)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낙론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34세(1710, 숙종 36) 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37세(1713) 이유가 호서 사인(湖西士人) 이간 등 한두 사람을 등용할 만하다고 세자의 시강원으로 추천하니 숙종이 옳게 여겼다.

39세(1715) 이간을 자의(諮議)로 삼았다. 교리(校理) 홍석보(洪錫輔)가 상소 말미에 “자의 이간은 나이가 젊고 덕망을 쌓지 못했는데 갑자기 높이 의망하였으니 너무 갑작스럽다는 논의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했다.

40세(1716) 사간원에서 “자의 이간은 본디 범용한 사람으로 일찍이 학문이 있다는 일컬음이 없었는데 한갓 남의 장점을 추켜세우는 데에 힘쓴 덕분에 외람되게 시강의 줄에 흠을 내게 되었으므로 물정이 놀라하고 비웃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그치지 않으니, 청컨대 개정하소서.” 청했지만 숙종이 따르지 않았다.

49세(1725, 영조 1년) 영조가 이간에게 “산림에서 독서하였으니, 반드시 학문하는 요점을 알 것인데, 내가 듣고자 한다.” 했다. 이간이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학문하는 본말은 지와 행이라고 합니다. 지행 가운데 각기 큰 이치가 있고, 한 물건 한 일의 이치는 모두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나 심신에 일용하는 윤상과 기강 상에는 반드시 먼저 곧바로 결단하여 이해해야 하니 이것이 치지(致知)의 큰 이치입니다. 행(行)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선(善)과 하나의 행실을 진실로 마땅히 극진하게 해야 하나 수기(修己)에 나아가 말하면 천인(天人)과 이욕(理欲)의 나눔에서 곧바로 판단하여 구별해 내어야 하며, 치인(治人)에 나아가 말하자면 선을 선하게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겨 진실 되게 힘을 쓰면 이것이 역행(力行)의 큰 이치입니다. 학문을 하면서 그 큰 이치를 먼저 하지 않으면 학문하는 요점이 아닐까 싶으니 맹자가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워야 한다.’고 한 것이 이것을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영조가 “말을 어찌 많이 해야 되겠는가? 의리의 대체는 한 마디면 다 된다. 듣건대 노모가 있다 하니 지금은 우선 내보내나, 강학하는 사람을 얻기가 매우 쉽지 않다. 조만간 올라와 강론하여 내가 미치지 못한 점을 보완하도록 하라.” 했다.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여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를 초빙하시되, 직명(職名)의 유무를 막론하고 별유(別諭)로 부르시고, 직사(職事)를 강제로 맡기지 마시고, 경연에서 윤번으로 시강하게 하소서.” 하면서 “이간(李柬)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李頤根)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尹鳳九)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韓元震)의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50세(1726) 이간이 경연관으로 하명 받고 상소하길, “신은 생각건대, 옛사람은 순수하고 성실함이 남음이 있어서 질박을 이룸이 심후하고, 총명을 발휘하지 아니하여 수고롭고 겸손함이 여유 있으며, 지려(志慮)가 정밀하고 전일하여 힘을 내어 일하는 까닭에 성인의 말을 듣지 않아도 그 마음이 진실로 이미 정성스러웠습니다. 한 가지 말을 듣기에 미쳐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믿음이 참으로 어린애가 자애로운 어미를 만남과 같고, 충족을 구하는 성의가 참으로 기갈(飢渴)에 음식을 기다림과 같으며, 반드시 그렇게 될 기미가 참으로 나그네가 집으로 달려감과 같을 것이니, 대저 그렇게 하고 비록 군자가 되지 않고자 한들 될 수가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방도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주자(周子)가 말하기를, ‘그 마음을 성실히 할 뿐이다.’하였으니, 마음이 성실하면 어진 인재가 돕고 어진 인재가 도우면 천하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마음은 성실함이 요점이 된다.’고 하였으니, 아! 깊은 이치에 통달한 말이 어찌 그다지도 지극히 절실하고 지극히 요약하며, 반드시 이루는 방도가 어찌 그다지도 지극히 간략하고 지극히 쉬운지요?” 했다.

51세(1727) 졸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3년 윤3월 기사에 졸기가 있다. “경연관 이간이 졸하였다.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초상과 장사에 쓸 것을 넉넉하게 제급하도록 하였다. 이간은 선정신 권상하의 문인으로, 경학에 깊어 한원진과 명성이 비등하여 경연관으로 뽑혔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졸하므로, 임금이 듣고서 놀라 애도하여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경연관들이 증직하는 은전을 내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산림에 있는 사람에게 비록 경연관으로 초계하게 하기는 했지만, 작록으로 묶어 놓으려고 하지 않음은 대개 그의 소원이 아닌 것을 억지로 시키면 도리어 예대하는 도리에 어그러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지금 죽은 뒤에 증직한다면 생존과 사망에 따라 예로 대우하는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이 되니 증직할 것 없다.’ 하고 제술관에게 명하여 제문 내용에 오늘 내린 분부로 말을 만들어 제진(製進)하도록 하였다.”

이간 사후 1777년(정조 1년) 이조참판, 성균관좨주에 추증되고 순조 때 이조판서가 증직되었다. 1810년(순조 10년)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순조실록> 순조 10년 12월 기사에 시호를 내리는 내용과 더불어 평이 나온다. “이간의 호는 외암인데, 문순공 권상하를 사사하였고 학문을 많이 하고 행실이 돈독하여 큰 선비가 되었다. 영조조에 유일로써 자의를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남당 한원진과 함께 동문수학하였는데,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해 서신을 왕복하여 논변하다가 마침내 대립하기에 이르러 호학(湖學)과 낙학(洛學)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간을 받드는 자를 낙학이라 하고 한원진을 받드는 자를 호학이라고 하였다.”

이간은 한원진과 더불어 호락논쟁의 맹장이다. 조선조 성리학은 중기를 고비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대립 이후 치열한 논변이 벌어졌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사단칠정 논변이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논변으로 이행됨으로써 성리학의 불꽃이 재연되었다. 그것은 주기적인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畿湖學派) 안에서 다시 주리와 주기로 대립하여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권상하의 문하에서 야기된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이다.

논쟁은 처음에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상(五常)을 금수(禽獸)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오상편전론(五常偏全論)과 사람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발동하지 아니하였을 때[未發]의 상태, 심체(心體)에 기질(氣質)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미발심체순선론과 미발기질지성유선악론으로 대립이 생겼다. 본격적인 논쟁은 권상하 문하의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권상하가 한원진의 설에 찬동하자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전국의 석학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이재(李縡), 박필주(朴弼周), 어유봉(魚有鳳) 등의 낙하(洛下: 서울) 학자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다 같이 오상을 가진다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는 기질의 선악이 없으므로 본래선(本來善)이라 하여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하였다. 이것을 낙론(洛論) 또는 낙학(洛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비록 이간은 호서, 즉 충청도에 살았지만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낙하, 즉 경기도와 서울에 많이 있었으므로 낙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원진의 설을 찬동하는 권상하, 윤봉구(尹鳳九), 최징후(崔徵厚), 채지홍(蔡之洪) 등의 호서학자(湖西學者)들은 인성은 오상을 가지지만 물성은 그 오상을 모두 가지지는 못한다면서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다는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역설하였다. 이것을 호론(湖論) 또는 호학(湖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호락론자들은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에 속하므로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철칙으로 신봉하였다. 이통기국설은 주희(朱熹)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에서 유래한다. ‘이통(理通)’이란 이는 인(人)과 물(物)에 공통적·보편적인 것으로서 동일하게 상통한다는 것이고, ‘기국(氣局)’의 기는 인과 물에 국한적·특수적인 것으로서 상이하다는 것이다.

이간은 주리적 입장에 서서 이통과 이동(理同)을 내세움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구동(俱同)으로 보아 한 가지로 오상을 가진다는 동시오상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일관시켰다. 이에 대해 한원진은 주기적 관점에서 기국과 기이(氣異)를 강조함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상이한 것으로 보며, 그것은 기질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라 주장하여 인기(因氣)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

이간은 성(性)은 곧 이(理)이므로 인성과 물성은 모두 이로서의 태극(太極), 천명(天命)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사덕(四德)을 본성으로 품수함으로 말미암아 오상의 본연(本然)을 구유하므로 그들 본성은 이통으로 동시오상이라고 보았다. 다만 인성과 물성이 상이한 것 같이 보이는 것은 그들 기질의 국한성, 즉 차이에 따라서 상이하게 드러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과 물의 본성, 즉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동시오상으로서 구동이요, 또 사람의 미발심체는 본선이라는 것이다. 이는 홍대용(洪大容) 등 북학파에게 이어져 전통적 화이론(華夷論)의 극복에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한원진은 인성과 물성은 각기 그 기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으로 상이한 것이며 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각기 인과 물의 본연지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인물의 본성 즉 그 기질지성은 인기질(因氣質)로서 상이하다. 따라서 사람의 미발심체도 기질지성으로서 선과 악이 공재한다는 유선악론을 주장하였다.

이 호락논쟁은 이간 이후 오래도록 계속되었지만 끝내 귀결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성리학의 근본 문제들이었고, 또 그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적 방법론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것 등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한원진(韓元震, 1682-1751)

한원진(韓元震)                                                        PDF Download

 

한원진은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덕소(德昭)이고 호는 남당(南塘)이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한유기(韓有箕)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박숭부(朴崇阜)의 딸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8세에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문장파악이 매우 느렸으나 수년이 지나자 한번 본 문장은 곧바로 암기할 정도로 뛰어났다. 12세에 조부의 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상례를 지켰다.

36세(1717) 학행으로 천거 받아 영릉참봉으로 관직에 나갔다. 40세(1721)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44세(1725, 영조1년)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하여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앞서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여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를 초빙하시되, 직명(職名)의 유무를 막론하고 별유(別諭)로 부르시고, 직사(職事)를 강제로 맡기지 마시고, 경연에서 윤번으로 시강하게 하소서.” 하면서 “이간(李柬)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李頤根)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尹鳳九)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韓元震)의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45세(1726) 경연에서 영조가 호포(戶布), 결포(結布), 구전(口錢), 유포(遊布)의 이해와 편리 여부를 물었는데, 한원진이 네 가지 법 중에 호포(戶布)가 가장 시행할 만하다고 대답했다. 영조가 칭찬하여 좋게 여겼다. 한원진이 물러나가자, 시독관 김용경(金龍慶)이 말하기를, “산야에 있던 사람은 물러가기는 쉽게 여기고 나오기는 어렵게 여기는 법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심으로 머물러 있게 하여 자주 경연에 입시하게 하소서.” 하니 영조가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했다.

50세(1731) 영조가 경연에서 명 태조가 맹자를 문묘에서 출향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말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삼가 길에서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전하께서 경연에서 ‘명 태조가 맹자를 문묘에서 출향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합니다. 먼 외방에 떠도는 말이어서 비록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혹 털끝만큼이라도 그렇다면 거의 한 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맹자의 어짊은 한나라 이후로 매우 존상하였는데 명 태조가 갑자기 배척을 가하였고, 이로 인하여 여러 유현을 더욱 경멸하여 주자를 오활한 노유라고 지목했으며, 또 친히 논문을 저술하여 경설을 무너뜨렸습니다. 처음에 가르친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명나라의 세대가 마치기까지 도술이 밝혀지지 않았고 이단이 분분하게 일어났으며 의리가 날로 어두워지고 습속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유자라고 이름 한 자들이 걸핏하면 정주에 대해 이론을 세우고 성현을 능가하여 세도가 무너지고 화란(禍亂)이 그 틈을 탔으니 그 혹심한 화가 거의 서진(西晉)의 청담보다 심했습니다. 이는 비록 명 태조가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그 유폐의 원인이 되었으니 백세 뒤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장이 들어가자, 영조는 노하여 “한원진은 황명 태조와 맹자를 서로 거론하여 감히 별도의 의리를 만들었으니 참람하고 망령됨이 심하다. 한원진은 산림에 있는 사람으로 역시 시상(時象) 가운데 들었으니 내가 매우 그르게 여긴다.” 하였다.

60세(1741)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으로 복직하여 그 뒤 장령,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69세(1750) 판의금 원경하(元景夏)가 권상하가 먼 앞날을 기대하여 한원진은 산림의 경제인(經濟人)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자, 영조가 “내가 일찍이 이 사람을 보았는데, 비단 학식이 고명(高明)할 뿐만 아니라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 했다.

70세(1751) 졸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27년 2월 기사에 그의 졸기가 있다. “한원진의 자는 덕소로, 선정신 권상하의 문인이다. 임금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뽑혀서 경연관이 되었는데, 한원진은 임금이 새로 대위(大位)를 계승하여 협조를 구하는 마음이 있으시니 초야의 선비가 한갓 고상한 뜻만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하여 드디어 부름에 나아갔다. 그때 세변(世變)을 겪어 의리가 밝지 못하였는데, 한원진은 생각하기를, ‘성무(聖誣)를 분변하고 징토(懲討)를 엄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급선무이다.’라고 여겨 들어가서는 고하고 나가서는 상소를 올려 간곡히 청해 마지않았다. 임금이 본래 당론을 싫어하고 조제하려는 뜻이 있어 한원진이 진언할 때마다 비록 칭찬하고 권장하여 표시하였지만 실은 채용하지 않았으니, 한원진이 누차에 걸쳐 상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고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명나라 태조가 맹자를 출향한 일을 언급하면서 맹자의 말로써 잘못되었다고 하였는데, 한원진이 상소하여 간함에 있어 말이 매우 절직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심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임금의 뜻을 엿보고는 잇달아 공격하여 마침내 파직을 당하였다. 얼마 안 있어 견서(甄敍)되었으나 권우(眷遇)는 더욱 쇠(衰)하였고 한원진도 또한 세상에 뜻이 없어 호해(湖海)의 물가에 숨어 살았다. 협소한 집은 소연(蕭然)하고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대처(對處)하기를 유연(逌然) 하였고, 날마다 학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밝히면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저술로는 <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 <주서동이고(朱書同異攷)>, <의례보(儀禮補)> 등이 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70세였다.”

한원진 사후 정조 23년(1747)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순조 2년(1802) 문순(文純) 시호를 내렸다.

한원진은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명철하였으며, 『주역』, 『시경』, 『서경』 및 사서(四書), 『태극도설』, 『통서(通書)』, 『계몽(啓蒙)』 및 여러 경세서(經世書) 등을 정독하여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60세(1741) 완성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에 착수했지만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스승인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한 한국성리학의 대표적인 거작이다.

한원진은 후인들이 주자의 논설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공자와 같은 성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도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공자를 알기 위해서는 주자를 알아야 하고 주자를 모르고서는 공자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므로 그 말의 처음과 끝이 한결같지만 주자는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者]이므로 초년설과 만년설이 다를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이 책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주자의 설에 대해 시간상의 선후와 의리(義理)라는 표준을 세우고 말은 비록 다르더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뜻이 서로 통하는 것과 본래는 다름이 없는 것인데 학자들이 다르게 본 것 등으로 나누어 일일이 변정하였다. 특히 조선성리학의 핵심 문제들을 주희의 만년정론(晩年定論)으로 확정해 풀어나가는 것이 특색이다.

첫째는 기는 유위(有爲)로써 발동하는 것이고 리는 무위로서 발동하지 않는다 하여 퇴계학파의 이발(理發)을 부인한다.

둘째는 사단과 칠정에 대해 둘이 모두 본성의 작용[性之用]으로 정(情)이라는 이이의 설을 확인한다.

셋째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서 주자가 인물성상이(人物性相異)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넷째는 이기선후(理氣先後)에서 유행의 측면에서는 이기가 선후가 없고, 본체의 측면에서는 이선기후이며, 발생의 측면에서 보면 기선이후이지만 이기는 원래 선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섯째는 이동기이(理同氣異)에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을 기준으로 이일분수(理一分殊)를 확인한다.

정리하면 이이의 학설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호론(湖論)을 확인하려는 목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물성동이논쟁과 관련해서는 이간(李柬)을 중심으로 하는 낙론(洛論)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주장을 반대하고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대표했다. 한원진은 성삼층설에 입각하여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성은 이(理)가 기질 속에 내재된 뒤에 운위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이이의 생각을 계승하여 인성과 물성은 기질을 관련시키는 인기질의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원진은 이와 같은 사고를 바탕으로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미발심체논쟁에서는 이간이 주장하는 미발(未發)의 심체(心體)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하는 미발심체순선론(未發心體純善論)을 반대하고, 미발의 심체에도 선악의 가능성이 공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미발기질지성유선악론(未發氣質之性有善惡論)을 주장한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두산백과>

권상하(權尙夏, 164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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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는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서울 출신이다. 자는 치도(致道)이고 호는 수암(遂菴) 또는 한수재(寒水齋)이다. 아버지는 집의 권격(權格)이며 동생은 우참찬 권상유(權尙游)이다.

부친 권격(1620-1671)은 호가 육유당(六有堂)이다. 1650년 진사시를 거쳐 이듬해 정시문과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등용된 후 사간을 거쳐 집의에 오르고, 세자시강원에 오래 있었다. 1665년 당쟁을 일삼은 죄로 정주(定州)에 유배되었다. 1668년 집의로 재기용되었으나, 다시 쫓겨나 충청도 및 황해도의 도사, 고산도찰방, 강릉부사 등 주로 외직에 있었다.

권격은 여가에는 서재를 깨끗이 청소하고 경서와 사서를 읽으면서 스스로 즐기었는데 특히 송나라 유자들의 저서를 가장 좋아하였다. 장재(張載)가 “말에는 교양이 있고 동작에 법도가 있으며 낮에는 한 일이 있고 밤에는 얻음이 있으며 잠깐 동안에도 마음에 둠이 있고 숨 쉬는 사이에도 본성의 수양함이 있어야 한다[言有敎動有法晝有爲宵有得瞬有存息有養]’이라는 말을 취하여 서당의 이름을 육유(六有)라 하였다. 후에 황강(黃江)의 위에다 은거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떠난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권상하가 제자들을 기르며 강학한 곳이 바로 황강이다. 송시열과 권격의 집안은 삼대(三代)의 교분이 있었다.

20세(1660)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일찍부터 송시열과 송준길 문하에서 유학했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31세(1671) 어버이 상을 당한 뒤로 시끄러운 세상을 영원히 단절하고 자신을 위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상복을 벗자 송시열을 따라 화양에서 사서, 역학계몽, 계사전, 홍범편 등을 강론했다.

35세(1675) 숙종 원년에 송시열이 북쪽으로 귀양 가자 여러 문인들과 같이 상소를 올려 변론하였으며, 가족을 이끌고 청풍(淸風)의 협곡으로 들어가 조용히 살면서 독서하고 사색하며 종신토록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40세(1680) 송시열이 해도(海島)에서 돌아오자 찾아가 문안을 드리고 그때부터 10년간 거의 절반은 화양의 문하에 있으면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송시열이 사문(斯文)에 인재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여 선생의 거실에다 수암(遂菴)이라고 써서 붙였는데, 이는 설선(薛瑄)의 말을 취한 것이었다. 또 한수재(寒水齋)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주자 감흥시(感興詩)의 말을 사용하여 심법(心法)을 전수한 뜻을 보인 것이었다.

49세(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거나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고, 이어서 사약을 받게 되었다.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 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했다.

조정에서 송시열에게 사약이 내려오자, 들어가 결별의 인사를 드렸다. 송시열이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道)를 깨닫고 저녁에 죽기를 기대하였는데, 지금 끝내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앞으로는 오직 치도(致道)만 믿는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위주로 삼고 사업은 마땅히 효종의 대의를 위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전일에 결별을 고하는 편지에 쓴 ‘곧을 직(直)’ 자의 의의를 거듭 밝혀주었다.

훗날 숙종(肅宗)이 왕위에 오른 지 43년(1717년)에 병환이 나 온양(溫陽)의 온천(溫泉)에 가서 목욕할 때 권상하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하는 교지(敎旨)를 받고 감히 사사로이 거처하는 곳에 물러가 있지 못하여 괴산(槐山)의 시골집으로 나아가 머물면서 상소를 올려놓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숙종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사관을 명하여 같이 오라고 명하였다. 숙종이 기어코 권상하를 부르고자 하여 관직의 사양을 허락하고 백의의 신분으로 들어와 보도록 하는 등 특별히 예우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임금이 행궁(行宮)에 갈 때 호위하고 수행하는 의의’에 따라 융복(戎服, 철릭과 주립으로 된 군복)을 입고 들어가 알현하였다.

숙종이 매우 기뻐하고 앞으로 가까이 오도록 하여 머물러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 뒤에 백성을 잘 다스리어 편안케 하는 방도에 관해 묻자, 대답하기를, “천하의 일은 임금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은 또한 ‘곧을 직(直)’ 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신의 스승 송시열이 임종할 때 또한 이것으로 문인들에게 훈계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송시열이 견지하였던 <춘추> 대의(大義)를 개진하면서 숙종에게 효종(孝宗)의 뜻을 계승할 것을 권면하였다.

75세(1715)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尹拯)이 윤휴(尹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다.”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유규(柳奎)를 비롯한 유생 8백여 명과 대사간 이관명(李觀命), 수찬 어유구(魚有龜) 등의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았다. 처음에 윤증과 같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윤증이 그의 아버지 묘비문 사건으로 송시열과 갈라서면서 절교(絶交)하였다.

원류라는 것은 유시남(兪市南)이 편찬한 예서(禮書)로서 윤증으로 하여금 수정하도록 하였는데, 그 뒤 유시남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그 책을 간행하려고 하자 윤증이 핑계를 대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 책을 편찬할 때 윤증의 아버지도 일조를 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조정에서 간행하라고 하여 유상기가 정서된 원고를 달라고 요청하자 윤증이 내놓지 않고 “이는 우리 집의 책이다.”고 하였다. 후에 유상기가 초본(初本)으로 판각하고 권상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권상하가 서문을 지으면서 윤증의 죄를 매우 엄히 성토하고 “아버지처럼 섬길 분에게 옛 소진(蘇秦)과 의(張儀)의 솜씨를 부렸다.” 하고, “형칠(邢七)이 낭패를 당한 것은 본래의 기량(技倆)이다.” 했다.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 윤증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파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숙종 재위 중에 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이 치열했지만,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당쟁기에 살면서도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의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규명하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경종수정실록> 경종 1년 9월 2일 기사에 권상하의 졸기가 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졸하였다. 권상하의 자는 치도(致道)로 견실하고 중후하였으며 학문 익히기를 매우 부지런하고 독실하게 했다. 권상하는 송시열을 사사하였는데, 송시열이 매우 존중하여 그가 거처하는 집을 한수재(寒水齋)라 했다. 송시열이 초산(楚山)에서 화를 입었을 때 세도를 권상하에게 부탁하고 옷과 책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옷은 바로 주자가 지은 야복(野服)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었으며, 책은 이이가 손수 쓴 <경연일기(經筵日記)> 초본으로, 김장생이 송시열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 송시열이 일찍이 장식(張栻)의 우제사(虞帝祠) 의리에 따라 명나라 신종의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다. 권상하가 비로소 청주의 화양동에 건립하고 만동묘라 이름하고 사변(四籩)과 사두(四豆)로 신종과 의종 두 황제를 제사하였다. 갑신년에 숙묘(肅廟)가 태세(太歲)가 군탄(涒灘)이라 하여 황조(皇朝)의 옛 은혜에 감격해 단선(壇墠)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려 하여 비밀히 권상하를 찾아 물으니, 권상하가 극력 찬동해서 드디어 대보단(大報壇)을 쌓았던 것이다. 정유년에 숙묘가 온천에 거둥하매 권상하가 비로소 소명을 받아 행궁에 입견하였다가 회란(回鑾) 함에 미쳐서 권상하도 또한 환산(還山) 하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81세였다. 뒤에 시호를 문순(文純)으로 내렸다. 문인으로는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이 가장 이름이 알려졌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국역 국조인물고>
<한수재집(寒水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송시열(宋時烈)                                                       PDF Download

송시열은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 뒤로 회덕의 송촌 비래동 소제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윤증 사이에 일어난 갈등과 논쟁을 회니논쟁(懷尼논쟁)이라고 하는데, 회는 회덕을 지칭한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송준길 집안에서 세운 회덕 송촌에 자리 잡고 있던 옥류각에서 송시열은 송준길과 함께 어울려 강학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 <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게 되었다.

19세(1625)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이 낙향 기간 교유를 맺은 중요한 인물 중에 후에 사문난적으로 내몰려 사사 당한 윤휴(尹鑴)가 있다.

43세(1649)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으로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중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중화를 명나라로, 이적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의 존주대의는 곧 존주론(尊周論)이요 복수설치는 곧 북벌론(北伐論)이다. 안정된 국제 질서를 무력으로 파괴한 청나라에게 심복할 수 없다는 국민 정서에 기초한 북벌론과, 주나라에서 일어난 중화문화(中華文化)를 계승 발전시킬 나라는 이제 조선뿐이라는 자의식에 기초한 존주론은 국민단합과 조선 문화 수호의 논리로 전개가 되고 마침내 조선중화주의로 발전을 한다.

효종대의 정책은 대외적으로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을 천명하고 대내적으로는 예치(禮治)를 표방하면서 전개되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새롭게 나라가 설립되는 은혜)을 입은 명나라에 끝까지 의리를 지키겠다는 대명의리론은 유교 이념을 공통분모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사회에서 조선의 명분을 강화했다. 또한 강제성을 가진 법과 자율성에 기초한 도덕의 중간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두 가지를 아우르는 예(禮)를 통치의 이념으로 내세운 예치는 무너진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대명의리를 지키고 복수설치를 위해 북벌을 하고 조선 중화(朝鮮中華)를 이룩하기 위해 예치를 한다는 것인데 효종대 정치 이념의 상징적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49세(1655)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52세(1658)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53세(1659)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기해예송(己亥禮訟)과 갑인예송(甲寅禮訟)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났다. 이 두 차례 예송은 모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와 관계가 되는 사건이다. 인조의 계비로 왕비가 되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자의대비 조씨는 생전에 전처 소생인 효종과 전처 소생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을 모두 맞게 된다. 1659년에 일어난 기해예송은 자의대비가 어머니로서 효종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갑인예송은 자의대비가 시어머니로서 효종비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각각 남인과 서인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툰 사건이다.

기해예송은 효종이 승하하자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입어야 했는데,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은 기년(朞年, 1년)을 주장했고 허목으로 대표되는 남인은 3년을 주장했다.

애초 인질에서 풀려 귀국한 소현세자가 돌아온 지 석 달 만에 죽는다. 왕위 계승법으로 보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이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다. 이때 소현세자의 아내인 세자빈 강씨는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아 죽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간다. 인조가 승하한 뒤 효종이 즉위했고, 제주도로 귀양간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장남과 차남은 현지에서 죽고 막내아들만 남게 된다.

허목을 중심으로 한 남인은 효종이 원래 차남이었다 하나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의 대우를 해야 하고, 따라서 조대비는 장남이 죽었으니 상복을 3년 동안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주장은 달랐다. ‘왕위를 계승했어도 장남이 아닌 경우에는 기년복(朞年服)이라’ 했으므로 조대비는 상복을 1년 동안만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3년과 기년, 이것은 어머니가 아들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의 단순한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아직도 제주도에 유배된 채 살아 있었던 것이다. 효종을 차남으로 인정하면 제주도에 살아 있는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왕실의 적통이라는 말이 되고 효종의 정통성에 타격을 준다. 효종의 총신인 송시열로서는 자신을 믿고 의지하다 죽은 효종에게 불리한 주장을 한 것이지만 예법에는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효종을 장남으로 봐야 한다는 남인의 입장은 왕권을 강화하자는 것이었고 아무리 왕이지만 효종은 차남이라고 보는 서인의 입장은 신권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사회 통합을 위하여 왕도 일반인과 똑같은 예의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송은 예치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론의 차이로 벌어진 성리학 이념 논쟁이었고 이상적 정치 형태인 붕당 정치에서 파생한 정치 사건이었다.

83세(1689)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다.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후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 정읍, 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송시열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며,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켰다.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 일생을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 저술을 남겼다.

송시열은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두었다.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기반으로 깔려있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정직[直]의 실천 문제였다. 형이상학적 학설 논쟁에만 몰두하지는 않아 송시열의 이기심성론은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지만 당대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바가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당의통략>
<송자대전>
<동유학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광해군일기』 : 광해군의 역린을 건드린 허성


『광해군일기』 : 광해군의 역린을 건드린

허성.

 

광해군은 임금 자리에 오른 직후에 이미 사망한 생모 공빈 김씨를 후궁에서 왕비로 승격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능을 조성하고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다. 광해군은 말하자면 선조의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다. 광해군 위에는 친형으로 임해군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려서 일찍 여의고 외할아버지 김희철에 의지하여 살았다.

선조는 뒤늦게 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영창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결국 서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궁중에서는 다양한 의견과 다툼이 있었으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의 지원을 받아 광해군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이들 대북파를 중용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대북파 외에도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비롯하여 서인 측 인사들도 폭넓게 등용하기는 하였으나 대북파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다.

허성(1548년∼1612년)은 문신으로 이조참의,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전라도안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산전(山前)으로 아버지는 허엽(許曄)이며,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이 그의 배다른 동생들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오빠이기도 하다.

그는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으로, 당시 이름난 문장가였다. 1568년(선조 1)에 생원이 되었다가 그로부터 15년 뒤인 1583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0년에는 조선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후 이조참의,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607년에는 선조의 유언을 받는 자리에 참석하여 소위 고명칠신(顧命七臣, 임금이 나라의 뒷일을 부탁한 일곱 대신)이라 불렸다.

『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14일)에 「지돈녕부사 허성이 (임금의) 생모 추숭에 대해 반대를 건의하였으나 불허하다」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기사는 <정초본>에도 실려있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광해군은 국왕의 자리에 오르자 마자, 후궁의 신분으로 자신을 낳고 24살의 나이로 사망한 어머니 공빈김씨(1553년∼1577년)를 선조의 왕비로 승격시키고 거기에 어울리는 묘지를 조성하였다. 젊어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광해군의 조치에 대해서 허성은 ‘고명칠신(顧命七臣)’의 한사람으로서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그는 지돈녕부사의 자리에 있었다. 이러한 직책이 있는 돈녕부는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특히 당시 돈녕부는 왕의 외척이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먼 친척들을 대우하여 직함을 주기 위한 관부에 불과하였으며, 지돈녕부사 역시 직무가 거의 없는 한직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허성으로서는 광해군의 생모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상소문을 시작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공자가 이르기를 ‘살아 있는 사람은 예로써 섬기고 죽은 사람은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지내면 효도라고 할 수 있다.’하였습니다. 이렇듯 예란 인도(人道)의 큰 법이고 효도란 백가지 행동의 근원입니다. 예로 행하면 효도이고 예로 행하지 않으면 효도가 아닌 것이니 예를 잘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따라 효도와 불효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성은 예가 중요하지만 예를 잘 알고 법도에 맞게 예를 행해야한다는 뜻으로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이 후궁이었던 생모를 왕비로 추증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이 추숭하는 은전(恩典,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특혜)으로 보아 성상(임금)의 뜻이 간절하심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엄한 (임금의) 전교가 한번 내려지자 대소 신하가 모두 감히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아 여기에 대하여 의논을 제기하지 못하고, 참으로 천리(天理)에 당연하고 예법에 마땅히 허락해야 되는 것처럼 여겨져 버렸습니다. 상(임금)께서도 다시 신중을 기하지 않고 한마디로 판결하고 의심치 않아 예(禮)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이 여기고 계십니다.”

잘못된 예로 생모를 추숭한 것에 대해 그 잘못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또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듯이 여기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비판하게 된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예에는 두 어른이 없고 가정에는 두 적처(嫡妻, 정식 아내 즉 적실嫡室)가 없습니다. 의인 왕후(懿仁王后, 선조임금의 정비正妃)는 이미 모후(母后)의 높은 이로 선왕(先王, 선조)의 배위(配位, 부부가 모두 죽은 경우, 그 아내를 지칭함)가 되어 왕후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우리 성상(광해군)은 선왕이 아들로 삼는다는 명을 받들어 임금의 적통(嫡統)에 올랐으니, 성모(聖母, 광해군의 생모)가 비록 낳아서 기른 은혜가 있으나 분수와 의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감히 왕후(의인 왕후)와 함께 적통을 견주지 못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또 적통(嫡統)을 계승하였으면 그 사친(私親, 서자의 생모)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예(禮)의 큰 법입니다. 사대부 집안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더구나 막중한 임금이겠습니까? 임금의 일신(一身)은 선조와 일체가 됩니다. 비록 자신을 가볍게 하고자 하더라도 종묘사직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어서 허성은 중국의 사례, 예를 들면 한나라 장제(章帝)의 사례를 들어 광해군의 생모 추숭이 잘못된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지금 성상(광해군)께서는 인덕과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고명(高明)하니, 마땅히 훌륭한 시대에 예를 지키고 의리를 두려워하던 임금을 법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찌 스스로 쇠퇴하고 무도한 말세에 비교하여 스스로 꺼려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서로 대할 때의 정(情)은 예로써 서로 공경하면 기뻐하여 편안하고, 예가 아닌 것으로 서로 대하면 수치스럽게 여겨 성을 냅니다. 인정이 이미 이와 같으니 신도(神道, 죽은 자의 도)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신은 이번에 거행하는 일이 예인지 예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은 다만 예를 어기는 것이 성상의 효도에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성모(聖母, 광해군의 생모)의 마음도 또한 어두운 지하에서 부끄럽게 여길까 염려됩니다.”

이어서 그는 사람들이 송나라 인종의 사례를 들어서 광해군 생모의 추숭에 대해서 지지를 표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신이 조정의 의논을 듣건대 이신비(李宸妃, 송나라 인종의 생모) 의 일을 인용하여 말한 자가 있다고 하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송 인종(宋仁宗)은 단지 살아 있을 때 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길 줄만 알아 그런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첩모(妾母, 측실인 생모)를 높여 황후라 칭하였으니 (부족한 어머니를) 엄한 아버지와 짝을 만드는 것이 의리에 해가 되는 것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춘추전』에 이르기를 ‘단지 생모(生母)를 높이려 한 것이고 그 아버지가 천(賤)하게 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또 ‘그 아버지를 낮추면 근본이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대로 하면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나지막한 돌은 밟는 자도 낮아진다.’고 하였습니다. 나지막한 돌을 밟아 스스로 낮춘다는 말입니다. 시인(詩人)도 예를 잃은 것을 희롱하였는데, 자기 아버지를 낮추는 것으로 말하면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송나라 인종(仁宗)의 실덕(失德, 덕을 잃음)입니다. 경계할 일이지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은 못 됩니다.”

이렇게 신랄하게 송나라 인종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광해군의 행동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자신의 상소문을 마쳤다.

“신이 병이 난 이후로는 기력이 약해져 말채찍도 들지 못하는데 다른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오직 국가를 위하는 충성심은 아직 모두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때로는 광기어린 말을 하여도 너그럽게 용서하시니, 신은 참으로 무슨 마음이기에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임금을 해친다는 꾸지람을 앉아서 부르겠습니까? 신은 매우 절박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감히 아룁니다.’”

광해군은 이러한 상소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상소를 살펴서 잘 알았다. 생각한 바가 있으면 다 이야기하는 경의 뜻은 참으로 아름답다. 다만 내가 생모(生母)를 추숭하는 일은 역대의 제왕들이 융성한 예를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오직 명나라 효종(孝宗)이 인정과 도리, 그리고 예와 관련된 문장을 참작하여 이미 중도(中道)에 맞는 예를 행하였으니, 나도 이것을 법으로 삼으려고 한다. (중략) 나의 소견이 이와 같으니 경은 잘 알도록 하라.”

광해군은 매우 격식을 차리고 답을 하였으나 사실은 자신의 생모에 대해서 가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허성의 상소문에 대해서 매우 불쾌해 하였다. 이러한 광해군의 심정은 허성의 상소문 아래에 적은 사관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사관은 먼저 다음과 같이 허성을 평가하였다.

“사신(史臣, 사관)은 논한다. 허성(許筬)은 허엽(許曄)의 아들이다. 허엽은 유학자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비록 식견이 다소 비현실적이고 막혔으나 만년까지 지킨 절의는 법으로 삼을 만하다. 또 그의【도덕과 행위】【평생토록 다져온 학문은】 사림에 칭송하는 바가 되었다. 허성은 이름난 자의 자식으로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받아 가풍(家風)이 있었는데 청렴하고 삼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힘쓰지 않고 청렴하지 못하다고 꾸짖음을 받았다.】【탐심이 많아 옳지 않은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하였다.】” (【】안의 글은 추가된 글임)

또 사관은 허성이 일본에 간 일, 그리고 허성의 형인 허봉이 율곡 이이를 질투하고 미워한 점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김성일(金誠一)에게 추하게 여김을 당하였고 일생동안 파당(派黨) 심기를 좋아하였다. 어질고 능한 이를 질투하고 【논의가 몹시 편벽되어】 그 무리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아우가 있는데 하나는 허봉(許篈)이고 또 하나는 허균(許筠)이다. 모두 문장에 능하였으나 경박하고 품행이 없었다. 허봉은 사적인 원망으로 제일 먼저 이이(李珥)를 공박하여 질투하고 미워하는 효시가 되었고, 허균은 간사하고 음탕하여 행동이 금수와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엽은 아들 셋이 있으나 실은 자식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사관의 허봉과 허균에 대한 평은 몹시 신랄하다. 그것은 광해군 초기에 정권을 잡은 그들이 서인과 대립한 북인 강경파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아버지 허엽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뉠 때 동인의 창당 멤버였다. 허성의 경우는 동인이었지만 서인의 편을 들기도 하였다.

1590년에 왜나라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결성되었는데, 서인 황윤길이 정사, 동인 김성일이 부사였다. 이 당시 허성은 서장관으로 차출되어 일본에 갔다가 1591년 1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일본의 동태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의 의견에 동조하여 ‘일본이 침략해올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워 동생 허균과 함께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등록되기도 하였다.

사관은 이어서 허성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허성은 능히 진언(進言)하는 의리를 잊지 않아 (광해군이 생모를) 추숭하는 것이 예가 아니라고 논하고 임금을 비판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를 보면) 일에 따라 간하는 풍도가 다소 있으니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상소가 들어가자 왕은 비록 너그럽게 용서하였으나 이때부터 미움을 당하였다. 호사가 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10장의 초피(貂皮, 담비 가죽)가 그를 그르쳤다.’ 이전에 김치원(金致遠)이 귀양을 가게 되자 허성이 상소하여 변론하니, 왕이 크게 칭찬하여 초피 10 장을 주었는데, 허성이 한강 가에 정자를 세우고 현판을 십초(十貂)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관의 말 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추가되어 있다.

“【허성은 한평생 조정에 있으면서 바른말로 임금을 촉발시킨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풍기가 있어 병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비로소 비분강개하여 국가의 일을 말하였다. 김치원이 귀양을 가게 되자 상소하여 구원해 주면서 논하여 임금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이 때 10장의 초피(貂皮)를 하사받았는데, 허성은 강가에 정자를 짓고 십초(十貂)라 이름 하여 자랑하였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왕은 ‘나지막한 돌은 밟는 자도 낮아진다.’는 말을 몹시 싫어하였다. 그가 여러 번 이 말을 드러내니 당시 사람들은 자못 강직하다고 하였다.】”

사관들은 처음에는 허성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행동에 대해서 엄하게 논박하는 허성에 대해서 은근히 칭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성은 위와 같은 상소문을 남기고 2년 뒤에 만 64세로 사망하였다. 그 2년 뒤인 1614년(광해군 6년)에 그는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을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으로 기록되었다. 광해군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623년에 서인과 남인의 손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왔다.

『광해군일기』: 이준경과 이황의 종묘 배향이 부러운 사관


『광해군일기』: 이준경과 이황의 종묘 배향이 부러운

사관

 

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7일자에 「이준경과 이황을 선조묘의 배향 공신으로 삼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정초본>에도 실려있다.

이날 대신들과 여섯 관청의 관리들이 빈청(賓廳, 궁중의 회의실)에 모여 선조묘(宣祖廟, 선조 임금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배향할 명신(名臣, 휼륭하여 이름이 난 신하)을 의논, 결정하였다. 그 대상은 첫 번째 후보로 이준경(李浚慶)과 이황(李滉)이며, 두 번째 후보로 노수신(盧守愼)과 유성룡(柳成龍)이었다. 이를 보고하니 임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수신과 유성룡은 지난 조정에서 처음과 끝을 잘 보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묘정(廟庭, 종묘)에 배향하는 것은 부족할 듯하다. 다른 상신(相臣, 정승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들도 적지 않은데 하필 그들로 하는가? 부득이하다면 이준경과 이황만을 배향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러한 임금의 생각에 대신들은 모두 찬성하고 그 결론을 따랐다. 사관은 이러한 기사 뒤에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적었다.

“노수신의 만절(晩節, 늙은 시절)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사람이 많으며, 유성룡의 문장과 학문이 훌륭한 면은 있으나 도량이 작고 식견이 얕았다. 그는 10년 간 정승으로 지내면서 오직 남의 비위 맞추기를 일삼고 사사로움에 이끌려 파당을 심고 오로지 자기와 뜻이 같으면 좋아하고 다르면 싫어하였으니 정승으로서 칭찬할 만한 업적이 아무 것도 없었으며 ‘또 능히 처음과 끝을 잘 보전하지 못했다.’”

노수신(1515년∼1590년)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전라도 광주이다. 이언적(李彦迪)의 제자이며 1543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시강원사서(1544년)에 임명되었으며 인종 즉위시에 정언이 되었다가 1545년(명종 즉위년)에 윤원형(尹元衡)의 을사사화로 이조좌랑 직위에서 파직되어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진도로 유배되어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 기간 중에 노수신은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등과 서신을 교환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사림사이에 이름이 높았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복권되어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이후 우의정(1573, 선조 6년), 좌의정(1578), 영의정(1585년)영의정에 이르렀다. 1589년 10월에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을 추천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임금(광해군)이 그에 대해서 처음과 끝이 일관되지 않았다는 뜻은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뜻이다. 특히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된 점을 들어 종묘에 배향하기가 어렵다고 본 것이다.

유성룡(1542년∼1607년)은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지금의 안동)이다. 이황의 제자이며 김성일과 동문이다.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대교(1568년), 공조좌랑(1569년), 병조좌랑, 응교 등을 거쳐 사간(1578년)이 되었다. 그리고 부제학(1580년), 대사간, 우부승지, 도승지, 대사헌(1582년)에 올랐다. 1589년에 병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해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스스로 탄핵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선조의 신임을 받아, 우의정(1590년), 이조판서, 좌의정(1591)등에 임명되었다.

왕세자 책봉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는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한 적이 있었다. 이즈음부터 동인이 유성룡을 중심으로한 남인과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북인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란에 대비해 미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추천하여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임명되도록 한 공이 있었으나 영의정 신분으로 임금을 수행하여 평양으로 피난가면서 그곳에서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이후 다시 복권되어 영의정에 올라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1598년에는 명나라 장수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거짓 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북인들은 이 사건의 진상을 명나라에 가서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것을 빌미로 유성룡을 탄핵하였는데, 선조는 이 의견에 따라 유성룡의 관작을 박탈했다. 선조는 1600년에 그를 조정으로 다시 불렀으나 그는 다시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이러한 그의 경력을 염두에 두고 광해군은 그가 처음과 끝이 일정하지 않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준경과 이황에 대해서 사관은 이렇게 평가하였다.

“이준경의 경우는 고명(顧命, 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함)의 원로로서 정승이 되어 대신의 체통을 지켰고, 이황은 우리나라 종유(宗儒, 우두머리가 되는 유학자)로서 선왕(先王, 선조)의 초기에 보필하는 도움을 많이 주었으니, 이 두 사람을 묘정(종묘)에 배향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하겠다.【이이(李珥)도 사실 배향하기에 합당한데 대신들이 여론을 두려워하여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니 안타깝다.】【영의정 박순(朴淳)과 좌찬성 이이도 또한 의논하는 속에 들어 있었으나 당시 재상 중에 저지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추천하여 올리지 않으니 공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안의 내용은 일기에 추기된 사항임)

이준경(1499년∼1572년)은 경기도 광주(廣州)가 본관이며 서울 출신으로 대사헌,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어릴 때 상서원판관을 지낸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에게서 글을 배우고 황효헌(黃孝獻)과 이연경(李延慶)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1537년), 홍문관직제학, 승정원 승지(1541년), 한성부우윤, 성균관대사성, 형조참판 등에 임명되었다.

또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1548년) 등에 임명되었고, 1550년에는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 대사헌,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58년에는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는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 어린 왕이 즉위하여 섭정을 행할 때, 원로급 재상으로 승정원에 주재하여 국정 전반에 대하여 정책 결정에 자문으로 참여하도록 한 임시 관직)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었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며, 억울하게 수십 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등용하였다.

다만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 사대부들과는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571년(선조 4)에는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시에는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언의 상소문을 올려 이이, 유성룡(柳成龍) 등 젊은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황(1501년∼1570년)은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유학자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상복을 입었고, 1539년에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다. 1543년(중종 38년) 성균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성묘를 핑계로 귀향하였다. 당시 그는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 10년),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년) 등 계속되는 사화를 통해서 죄 없는 유학자 관료들이 하루아침에 관직을 잃고 유배를 당하거나 사형을 당하는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을사사화(1545년, 명종 즉위년)가 일어나자 그는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호를 퇴계(退溪)라 정하고 독서에 전념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앙 조정에서는 그의 명성을 듣고 자꾸 관직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이에 그는 위험스러운 중앙의 관직을 사양하고 외직을 지망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등에 임명되었다. 풍기군수에 재임할 때는 백운동서원(소수서원紹修書院)이 조정의 지원을 받도록 건의하여 우리나라 사액서원(賜額書院, 조정에서 편액扁額, 서적書籍, 학전學田을 하사한 서원)의 시초가 되도록 하였다.

1552년에는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556년에는 홍문관부제학, 1558년에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하였다. 1560년 이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7년간 기거하면서 수양과 저술에 전념하면서 제자들을 육성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제학, 지경연에 임명되었다. 이후 어린 국왕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四箴)」, 『논어집주』, 『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을 강의하였으며,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올렸다.

위에 소개한 『광해군일기』의 기사 뒤에 추가 기입된 사항이 있다. 【】안의 내용인데 거기에는 율곡도 배향의 자격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추가된 내용 중에는 율곡에 대해서 당시 배향 논의가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배향 논의가 정말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러한 내용은 인조반정 직후 서인 학자들이 추가한 기록으로 보인다.

『광해군일기』: 가끔은 율곡을 지지한 홍가신


『광해군일기』: 가끔은 율곡을 지지한 홍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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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초본> 26권(광해 2년, 1610년) 3월 5일자로 「영원군 홍가신이 치사(致仕)하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 ‘치사(致仕)’란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다는 뜻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가신(洪可臣)은 (문음門蔭이다.) 당초 학문과 행실로 선비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나중에 대관(臺官, 사헌부의 중견관리)이 되어서는 세상의 여론에 붙어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다른 당(동인-필자)이 되었다. 책훈(策勳, 공훈이 있어 문서에 기록됨)으로 벼슬이 정경(正卿, 정이품의 벼슬인 의정부 참찬, 육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홍문관 대제학 등을 지칭함)에 이르렀는데 병이 들어 아산 지방으로 내려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여 치사하였다.”

홍가신(1541년∼1615년)은 한성부우윤,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위와 같이 퇴임 요청을 할 때 나이는 만 나이로 69살이었다. 그는 ‘문음(門蔭)’이라고 하였는데 문음이란 특별한 연줄로 벼슬에 임명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어려서 허엽, 민순 그리고 나중에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1567년(명종 2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에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다. 그러나 1571년(선조 4)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임명되어 재임할 때,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특진된 뒤, 이어서 형조좌랑, 지평 등을 거쳐 1584년에 안산군수가 되었다.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 때 정여립과 평소에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1593년에 복권되어 파주목사가 되었다. 다음해 홍주목사가 되었는데 이때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그가 영원군(寧原君)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이러한 공훈을 세웠기 때문이다. 1604년에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되고, 다음해 영원군에 봉해졌다.

인용문 가운데 홍가신이 ‘세상의 여론에 붙어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였다고 하였는데, 홍가신이 전적으로 공격만 한 것은 아니었다. 홍가신은 가끔은 율곡의 편에 서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583년(선조 16년) 송응개(宋應漑)와 허봉(許篈) 등 여러 사람이 이이(李珥)를 탄핵하면서 이이가 불교승려라고 성토하였는데, 그것은 군자가 할 말이 아니라며 오히려 송응개 등을 비판하였다.

또 1587년(선조 20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조헌은 다음과 같이 홍가신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박순·백인걸·김계휘·이이가 개혁을 주장하던 때 송기수가 이조 판서로 있었으나 감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날로 분한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우는 더욱 악하여 특히 청의(淸議, 올바른 논의)를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밖으로는 허봉·김첨과 혼인을 맺어 감히 이이를 모함하는 소장을 올리는 한편, 박순·정철·백인걸·김계휘의 무리도 아울러 언급하여 번번이 모함하였습니다. 송응개·송응형·허봉·김첨이 과연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차마 두 왕조의 강직한 신하를 한결같이 배척하여 내쫓기를 도모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당시 조정 반열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홍가신은 김첨에게 ‘그대는 그대의 처남 송응개가 한 일을 옳다고 보는가? 이이를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자라고 하는 것은 옳거니와 소인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謂李珥爲君子而未仁者則可, 謂之小人則不可)’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21권, 선조 20년 9월 1일 정해 8번째기사 「공주 교수 조헌이 소장을 올렸는데 감사가 받지 않자 사임하고 귀향하다」)

홍가신은 율곡이 어질지 못하다는 점은 인정하나, 소인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완전히 율곡의 편에 서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이렇게 율곡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또 그는 1582년(선조 15년)에 율곡이 올린 상소문에 대해서 임금 앞에서 공개적으로 지지를 하다가 동인의 리더중 한 사람이었던 유성룡에게 다음과 같이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이이가 경연에 참여하여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를 진달하자, 상이 흔쾌히 수락하여 종일토록 토론하고서 파하였다. 이때부터 이이는 경연에 참가하여 임금을 모실 때마다 앞의 이야기를 반복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의 계책을 채용하여 인재를 얻어 정사를 맡겨 기강을 바로잡고 오랜 폐단을 개혁시키는 데 있어 세속이나 근거 없는 논의에 저지되거나 동요되지 마십시요. 3년간 이와 같이 하였는데도 세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신에게 기망한 죄를 내리십시요.’하였다.

임금이 그의 상소문을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우찬성이 전부터 이런 논의를 해왔는데 나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모르겠다만 새롭게 고치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하니, 좌우 신하들이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는데, 장령 홍가신(洪可臣)이 대답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급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비유하건대 이 궁전은 본시 조종이 창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질 형편이라면 조종이 창건한 집이라 하여 수리하여 고치지 않고 그저 앉아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필시 재목을 모으고 기술자를 불러들여 썩은 것은 갈아내고 허물어진 데는 보수한 뒤에야 산뜻하게 새로워지는 것인데 경장(更張, 고쳐서 새롭게 하다)시키는 계책이 무엇이 이것과 다르다 하겠습니까.’하자,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부제학 유성룡이 이 말을 듣고 이튿날 글을 올려 이이의 논의가 시의에 적합하지 않다고 극론하자, 그 의논이 끝내 중지되었다. 홍가신이 유성룡에게 가니 유성룡이 그가 이이의 논의에 부회(附會,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맞춤)하였다고 힐책하였다. 홍가신이 말하기를,

‘공은 과연 경장하는 것을 그르다고 여기는가?’ 하니, 유성룡이 이렇게 말했다.

‘경장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재주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다’.” (『선조수정실록』16권, 선조 15년 9월 1일「이이가 네 가지 시폐의 개정을 논한 상소문」)

이렇듯 홍가신은 율곡에 대해서 비판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홍가신의 은퇴 요청을 받아들여 임금 광해군은 다음과 같이 명을 내렸다.

“영원군 홍가신이 예를 근거하여 은퇴하기를 청하니 내가 매우 섭섭하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연초에 주는 봉급은 국가의 재정이 비록 부족하다 하더라도 어찌 마련하지 못하겠는가. 사양하지 말게 하라.”

『광해군일기』: 사관에게 밉보인 정혹, 잘보인 이귀


『광해군일기』: 사관에게 밉보인 정혹, 잘보인 이귀.

 

광해군일기』 광해 2년(1608년) 2월 8일자 기사에 「정각, 이귀 등에게 관직을 제수(임명)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광해군일기』에 ‘정각(鄭殼)’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정각’의 정확한 이름은 정혹(鄭㷤, 1559∼1617)이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의 「정혹」참조)
우선 그에 대한 임명 내용을 기사는 “정혹을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하였다.”라고 적었다. 평산은 황해도에 속한 곳이다. 이러한 기사 뒤에 사관은 정혹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혹은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에 대간이 되어(殼壬寅年間爲臺諫) 힘을 다해서 성혼(成渾)을 공격하고(攻成渾甚力) 당파를 모아 들인다고 지적하였는데(指以嘯聚黨類) 자기편 사람 중에서도 그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자가 있자(自中亦有非之者) 글이 짧아 실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피혐(避嫌, 탄핵을 받은 관리가 그 혐의가 풀릴 때까지 사직을 청하고 맡은 업무를 보지 않는 것)하였다.(乃以文短失語避嫌)”

정혹이 성혼을 공격한 사실과 그로 인하여 피혐을 한 사실에 대해서 적었다. 위 문장만 보면 성혼을 공격한 일이 잘못되어 자기편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스스로 사직을 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위와 같은 글을 지은 사관이 그렇게 유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읽는 우리가 잘못이 아니라 사관이 잘못한 것이다. 즉 사관이 교묘하게 왜곡한 것이다.
정혹은 자가 회보(晦甫)‧회이(晦爾)이고, 호는 송포(松浦)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이다. 그는 1589년(선조 22) 증광시에서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였다. 1594년(선조 27)에는 정시에서 병과 6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이후 정언, 부수찬, 우부승지, 이조정랑, 지평 등에 임명되었다. 1603년(선조 36)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1605년(선조 38)에는 절충장군(折衡將軍) 행용양위호군(行龍讓衛護軍)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강원감사(江原監司)‧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정혹은 1602년 홍문관 수찬으로 있었을 때, 부제학 이정형(李廷馨), 부교리 박진원(朴震元) 등과 함께 성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었다.(『선조실록』146권 선조 35년 2월 8일자 기사) 위의 『광해군일기』기사에서 정혹이 성혼에 대해 힘을 다해 공격했다는 말의 근거가 되는 자료다.

“최영경(기축옥사때 정여립과 연루되어 옥중 사망한 인물-필자)은 맑은 명성과 곧은 절조로 평소에 뭇 소인에게 미움을 받아 소인들이 뜬 말로 체포하고, 국문하여 공초하였는데, 위에서 억울함을 통촉하시고 석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철이 기어이 사지(死地)에 밀어 넣고자 하여 친근한 사람을 사주하여 감히 재차 국문하기를 청해 마침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으니, 말하자니 마음이 아픕니다. 만일 전하께서 통렬히 밝혀내 포상과 주벌의 법전을 크게 행하지 않았더라면 먼 후세에 처사를 죽였다는 이름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습니다.(즉 이 말은 임금이 잘 판단하여 정철에게 벌을 줌으로써 임금이 책임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임-필자주)
성혼은 정철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로 최영경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가만히 보기만하고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초에 또한 ‘성혼이 만일 힘써 구제하였더라면 최영경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구제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죄가 있으나, 얽어 죽인 것에 비한다면 또한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신묘년에 공론이 격발하여 정철이 이미 형벌을 받았고, 그때 재차 국문하기를 다시 청한 신하들도 탄핵을 받았으나 성혼에게 미치지 아니한 것은 대개 죄가 경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초야에서 소를 올려, 최영경의 죽음이 정철 때문만이 아니고 성혼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하니, 이 또한 그렇습니다.”
이러한 건의는 정혹 혼자 했던 것이 아니고 홍문관 차원에서 여러 관리들이 함께 올린 것이다. 그리고 ‘성혼을 공격하는데 매우 힘껏(攻成渾甚力)’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표현이 매우 완곡하다. 직접적으로 성혼을 강력하게 공격한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당파 운운한 것도 근거가 없다. 결국 사관이 서인 쪽 입장에 너무 치우쳐서 성혼을 두둔하는 입장에서 정혹에 대해 비판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혹은 1602년 3월 28일에 스스로 파직을 신청했다. 위에 소개한 『광해군일기』를 보면 정혹은 성혼을 공격한 일이 잘못되어 자기편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스스로 사직을 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정혹의 사임 요청은 성혼의 일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그날 정혹이 올린 사직 요청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이 지금 대사헌 정인홍의 상소문을 보니,(이때 정인홍은 관직을 사임하고 재야에 있었는데, 선조가 그를 매우 신임하고 있었다.-필자) 오늘날 사대부의 폐습을 형용한 것이 이 시대의 병폐를 정확히 맞추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가 ‘신(정인홍 자신)이 일찍이 정철·성혼(서인)과 서로 잘 지내지 못했고 또 유성룡(남인)과 흔쾌하게 지내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도당들은 못 다 푼 분이 해소되지 않아 풍색(風色)이 좋지 못한 까닭에 논핵하는 일이 있기만 하면 곧바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지난날의 소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고 한 것은, 혹 정인홍 자신이 이귀(이이와 성혼의 제자)에게 배척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안 글씨는 필자의 주석임)

여기서 성혼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정인홍이 스스로 한 말이다. 정혹이 성혼을 언급한 말은 아니다. 그리고 정혹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그중에 ‘(정인홍의 말에) 논핵(허물을 따지는 일)이 있기만 하면 곧바로 의심하고 시기하여 지난날의 소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는 등의 말은, 아마도 지난 날 윤승훈(尹承勳)을 논핵하였던 일을 지적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신이 사간으로서 윤승훈을 논핵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대신을 가볍게 논핵할 수 없다고 여겨서였는데, 이는 조정을 중하게 여긴 뜻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언어의 실수를 가지고 대신을 논핵하는 것은 중도를 얻는 것이 아닌데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가 모두 논핵을 하기까지 한다면 더욱 미안한 일이었으니, 신의 말은 진실로 공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편벽된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윤승훈은 1573년(선조 6)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인물로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1581년), 대사헌 이이(李珥), 장령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심의겸(沈義謙, 서인의 영수)을 탄핵하였다. 그 때 정철(鄭澈)의 탄핵문제까지 함께 거론되자 이에 대하여서는 이이가 반대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이를 논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신창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러한 윤승훈에 대해서 정혹은 비판하지 않았는데 그 일을 선조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보면 『광해군일기』의 광해 2년 2월 8일자 「정혹, 이귀 등에게 관직을 제수(임명)하였다」는 기사의 정혹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본다. 사관은 이귀(李貴)를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임명하였다는 말 뒤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썼다.

“이귀는 뜻이 크고 말이 곧았으며 성질이 우직했다.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높이고 이 두 사람이 무함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글을 올려 논변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귀가 소를 올려 정인홍의 잘못과 악행을 곧바로 지적하여 조금도 돌아보는 바 없이 하니 사람들이 그를 소마(疏魔, 상소 마귀)로 지목하였다. 또 나라 일을 담당하면서 견해가 있으면 바로 말을 하였으며, 공무를 수행할 때는 법을 받들어 흔들리지 않았고 이해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강포한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돌하고 과감하며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감정대로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세상의 비방을 사서 가는 곳마다 낭패를 보았다.”

이귀는 위의 인용문에서도 말하였듯이 이이와 성혼의 제자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안산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8년(1618년)에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풀려났다.
그로부터 5년 뒤, 1623년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이러한 이귀에 대해서 사관은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북인인 정인홍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 기록이 인조반정 뒤에 추가되었거나 그 전 기록이라면 사관이 서인의 입장에 서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군일기』: 노응탁이 조헌 사당의 사액을 신청하다


『광해군일기』: 노응탁이 조헌 사당의 사액을 신청하다.

 

충청도 유생 노응탁이 상소하여 조헌의 사당에 사액하기를 청하다」라는 기사가 『광해군일기』 1609년(광해 1년) 3월 23일자(음력)에 실려 있다. 이 문장은 <중초본>과 <정초본>에 모두 실려 있다. 여기서 ‘사액(賜額)’이란 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그것을 새긴 액자(편액 혹은 현판)를 내리는 일을 지칭한다.
사액을 신청한 노응탁(盧應晫, 1555∼1592)은 충청남도 공주 출신 의병으로 호조참판 겸(戶曹參判 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노세득(盧世得, 1526∼1589)의 둘째아들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제자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에는 스승 조헌이 일으킨 의병을 따라 청주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어 금산 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33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고 알려졌으며, 후세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만경노씨 삼의사(三義士)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임선빈의 연구(「만경노씨 삼의사의 ‘역사적 실재’와 ‘기억된 역사’」, 『역사민속학』47, 2015.03)에 따르면 그를 포함한 삼의사는 임진왜란 때 사망하지 않았으며 그 후로도 수십년간 공주를 대표하는 유생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노응탁은 선조 시대에 오현(五賢)의 문묘종사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광해군 즉위 후에는 충청도를 대표하는 유생으로 조헌의 사당(표충사)이 사액을 받는 일에 참여하였다.
광해군 1년차에 쓴 이 상소문은 임진왜란 때 노응탁이 사망했다면 있을 수 없는 기록이다. 이렇게 상소문까지 올렸다는 것은 그가 전쟁 때 사망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지은 상소문은 『광해군일기』에 수록되지 않았다. 그가 상소문을 올린 일과 그 일에 대한 사관(史官)의 의견이 기록되어 있다.
기사는 다음과 같다.

“충청도 유생 노응탁이 상소하여 조헌의 사당에도 고경명(高敬命)의 포충사(褒忠祠), 김천일(金千鎰)의 정열사(旌烈祠)의 사례에 따라 사액(賜額)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상소문을 살펴보니 충신을 드러내려는 선비들의 정성이 가상하다. 마땅히 의논해 처리하겠다.’하고, 이어 ‘해조(該曹, 해당 관청)에 명령을 내려 회계(回啓, 임금의 질문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는 일)하게 하라.’고 하였다.”

조헌(1544∼1592)은 본관이 배천(白川)이며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로 호조 좌랑, 예조 좌랑, 보은 현감, 전라도 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의병 700명과 함께 사망하였다.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등에게 배웠으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 한 사람이다.
고경명(髙敬命, 1533∼1592)은 본관이 전라도 장흥으로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1552년(명종 7)에 사마시에 수석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에서도 수석을 하였다. 이해에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고경명은 임재왜란 때 이미 60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는 1581년에 영암군수를 역임하고 김계휘(金繼輝, 1526∼1582)를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김계휘는 1575년 사림들이 동서로 분당할 때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서인으로 지목된 인물이다.(그는 당파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으며, 당쟁의 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서산 군수로 임명되었다가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였던 율곡의 추천으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583년에는 한성부서윤, 한산군수, 예조정랑 등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직전 1591년에는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인 담양의 창평으로 돌아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전라도 지역에서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와 고인후(高因厚)를 데리고 각지에서 도망 온 관군을 모아 수원에서 왜적과 대항하고 있던 광주목사(廣州牧使) 정윤우(丁允佑)에게 올려보냈다. 그 뒤 전 나주부사 김천일(金千鎰), 전 정언 박광옥(朴光玉)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6,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담양에 집결시켰다. 그는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임명되어 태인, 전주, 여산 등지로 북상하여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고경명은 정여립 모반사건(1589년)의 수사 책임자로 활동하다 많은 동인측 유생들을 희생하게 한 정철의 고향친구이기도 하다. 정철과 함께 임억령으로 부터 글을 배워 동문 사이이기도 하다.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은 나주 출신으로 이항(李恒, 1499년∼1576년)의 제자이다. 그는 1573년(선조 6)에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 용안현감(龍安縣監), 강원도·경상도의 도사, 임실현감, 담양부사, 수원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 양산숙(梁山璹) 등과 함께 의병 300여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하였다.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활동을 전개하여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는 적군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으며, 강화도로 올라갔다. 이 즈음에 조정에서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고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통천(通川)·양천(陽川) 지역의 의병들까지 모아 강화도 연안의 적군을 공격하고, 양천·김포 등지의 왜군을 패주시켰으며,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593년에는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하고, 개성으로 진격할 때 그들의 작전을 지원하였으며, 서울이 수복되자 배로 쌀 1,000석을 공급하여 구휼하기도 하였다. 이해 4월에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하여 상주를 거쳐 함안, 진주에 이르렀다. 6월에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여 관군과 의병을 모았다. 최고 책임자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 태세를 갖추고, 10만에 가까운 왜군이 대공세를 감행해오자 분전했으나 진주성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사신(史臣, 사관)은 논한다. 조헌은 마음가짐이 고고하여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았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들의 덕을 흠모하였다. 정여립【역적이다. – 사관의 기록임】 이 명성을 지고 있을 때 그를 흉악한 역적이라 지적하여 배척하였고, 섬 오랑캐가 길을 빌려달라고 할 때에는 그 왜놈 사신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집에 있어서는 효도가 지극하였고 난리에 임해서는 큰 절개를 지켰으니, 【그 이야기를 듣는 자는 누구인들 격앙되지 않겠는가.】또 단지 고경명·김천일과 같은 무리는 아니다.”

마지막에 사관은 조헌이 ‘고경명이나 김천일과 같은 부류는 아니다(非但高、金之倫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조헌을 더 높이기 위한 평일 것이다. 고경명도 김천일도 조헌처럼 몸을 던져 왜병에 항거를 하고 순직한 인물들이다. 다만 조헌과 다른 것은 두 사람 다 율곡이나 성혼과 직접적인 사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역적으로도 이들은 서울, 경기도에서 멀다. 고경명은 율곡보다 4살 더 많으며 김천일은 율곡과 나이가 같다.
이 기록에 의견을 덧붙인 사관은 서인 측 사관일 것이다. 정여립을 역적이라 칭하고 조헌, 이이, 성혼을 높여서 기록한 내용을 보면 그렇다. 이 기록을 통해서 또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이 나중에는 성혼보다 더 높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그렇게 높게 인식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