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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檢身) –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

 

학교모범』의 두 번째 주제는 몸가짐을 단속하는 검신(檢身)이다. 이 내용은 선생의 아동교육의 입문인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지신장(持身章)의 내용과 중복되는 것이 많다.

그런데 현대의 청소년들에도 몸가짐이 중요한가? 기껏해야 건강을 위해 바른 자세를 갖도록 하는 일만 강조하지 않는가? 두발이나 복장이나 얼굴의 화장을 비롯하여 행동을 강제하는 것은 일종의 인권침해(?)로 간주하여 학생들의 자율적인 의사에 맡긴 듯하다.

학교 내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학생들을 보노라면 그런 느낌이 든다. 심지어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멘 어린 남녀학생들이 백주대낮에 남이 보건말건 상관없이 포옹하고 심지어 입 맞추는 일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니, 옛날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을 부끄럽게 만든다. 더 나아가 이제 성인사회나 직장에서도 일의 능률을 높이고 업무에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복장이나 몸가짐을 자유롭게 하는 추세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옛 사람들이 말한 바른 몸가짐이란 게 케케묵고 시대에 맞지 않는 유교적 잔재라 여길 법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 그 가운데 자칭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마저도 잘못된 일이 있으면 다짜고짜 유교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가령 남녀차별은 물론이요, 잘못된 관습 심지어 한국축구가 세계수준에 못 미치는 것도 유교 탓이라는 연구도 있다. 어떤 지역 어떤 문명이든 나름의 폐단이 있다. 그 폐단의 원인을 모두 전적으로 그곳의 전통문화의 탓으로만 여길 수 있을까? 과거 서양인들이 아프리카의 노예를 사냥하여 팔아먹은 것이 그리스도교의 탓이 아니듯 어떤 폐단에는 분명히 다른 요인도 있을 것이다.

자, 어쨌든 백문불여일견이라 했으니 율곡 선생이 말한 바른 몸가짐이 어떤 것인지 보자.

 

평상시에는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고, 의관을 정제하며 용모를 장중하게 하고 보고 듣는 일을 단정하게 해야 한다.

거처할 때는 공손하고 걷거나 서 있을 때는 똑바르게 하고 음식은 절제해야 한다. 또 글씨는 조심해서 쓰고 책상주변을 정리정돈하며 집과 실내는 청결하게 해야 한다.

 

우선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는 일은 요즘 청소년들도 잘 하고 있다. 비록 대학입시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 배움에 좋다. 또 책상주변을 정리정돈하고 집과 실내를 청결하게 하는 것도 지당한 말씀이다. 문제라면 입시공부를 위해서 부모가 집안청소를 안 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적어도 자기방 청소는 본인이 해야 좋다. 윤리·도덕적 문제에 앞서 청소를 자주 하다보면 일하는 요령도 생기고 깨닫는 것도 있게 된다.

집안일도 마찬가지다. 또 걷거나 서 있을 때 똑바르게 하는 것도 굳이 패션모델의 워킹을 배우지 않더라도 건강이나 바른 자세 유지를 위해 도움이 된다. 필자 또한 젊었을 때 어릴 때의 습관 탓으로 팔자걸음을 걸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단히 노력하여 이제는 똑바로 걷게 되었다. 더구나 음식 절제는 오늘날 딱 어울리는 말이다. 율곡 선생이 신통력이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탐욕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겠지만, 오늘날은 음식물 과다섭취 때문에 생기는 비만이나 그에 따른 성인병 예방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글씨를 조심해서 쓰라는 것은 당시는 연필이나 볼펜 또는 글자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먹물을 찍어 붓으로 써야 했으니 얼마나 조심성이 필요했겠는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단정하게 앉아서 집중해서 보고 듣는 것이 학습효과에 좋다. 또 거처할 때 곧 일상생활 속에서는 공손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보편적으로 통한다. 남에게 좋은 인상과 태도를 보여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살아가면서 남으로부터 배울 때도 크게 도움이 된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고전과 종교적 경전 내용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를 말하라면 필자는 겸손 또는 공손이라고 본다. 왜 이것을 강조했을까? 대부분의 고전이나 경전의 저자들이 나이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겸손하거나 공손하지 않으면 남으로부터 배울 수 없어 자기발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공손하지 않는 자에게 가르쳐 주고 싶지도 않지만, 정작 본인이 존경 또는 공경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제대로 배우겠는가? 특히 한창 배우는 청소년들에게 공손이 필요한 것임은 두말한 필요가 없겠다.

그렇다면 의관을 정제하라는 주장은 어떠한가?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의관정제란 복장을 단정하게 하는 일이다. 대체로 교복은 물론이요 평상복도 단정하게 입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 가운데서 헤어스타일이 특별하고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교복을 변형시켜 입는 모습을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다. 사복을 입으면 성인과 구별이 안 될 때도 있다. 사실이지 필자가 청소년 시절에도 이와 유사했다. 그 때도 교복을 입었고 남학생들은 모자를 썼다. 게다가 학교규칙도 엄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규칙을 비웃듯이 모자를 짓이겨 쓰거나 단추를 풀어 헤치거나 교복을 변형시켜서 연예인의 흉내를 내는 학생들이 당시에도 있었다. 대개는 한 때의 반항심이나 호기심 또는 치기어린 마음에서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불량배들도 섞여 있었다. 케이블 티비 덕문에 옛날 영화 속의 그런 장면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이렇듯 청소년들의 복장이 성인의 시각에서 삐딱하게 보이는 일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젊은 연예인을 닮고 싶어서 모방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볼 때 전혀 어울리지 않고 우스꽝스럽지만, 아니 청소년 자신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스스로 그렇다고 여길 테지만, 이 시기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을 성인이나 학교의 입장에서 막는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필자 또한 단지 단정하게 입으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단정하게 입어야 할 논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청소년들에게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용모를 장중하게 하라는 주장이다. 장중으로 옮긴 한자 원문은 장(莊)이다. 이 한자가 지닌 뜻은 상당히 넓다. 인간의 행동과 관련된 뜻에는

씩씩하다, [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단정하다, 바르다, 엄격하다, 장중하다, 정중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어서, 옮긴이가 ‘장중하다’

라는 말만 편의상 대표로 삼았는데, 이렇게 뜻이 넓다. 하나하나 살펴보아도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말들이다. 다만 시대적 간극을 고려한다면 이것 외에 상냥하다, 친절하다 등이 포함되면 더 좋겠다. 왜냐 하면 인간의 행동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형편 또는 자신의 내적인 감정에 따라 제각기 적절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율곡 선생이 말한 몸가짐을 현대적 상황에서 분석해 보았다. 그때와 지금의 시대적 차이가 꽤 있으나 오늘날 도덕적으로나 실용적인 면에서 볼 때도 대체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들이다. 다만 그 대상이 자아가 완전히 확립되지 못한 미성숙한 청소년들이기 때문에 성인의 입장에서는 그 적용에 아량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하지 못한 구용(九容: 원래 『예기』에 나오는 9가지 용모) 등은 『격몽요결』에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본 누리집의 “인성교육교재-『격몽요결』-초급편(하)-3.아홉가지 생각”을 참조바람). 그러나 몸가짐의 주체가 성인이라면 전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항상 조심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입지(立志) – 어떤 꿈을 꾸는가?


어떤 꿈을 꾸는가?

 

꿈이 없는 사람은 대체로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 특히 청소년의 경우에는 꿈이 없으면 자신의 욕망을 따라 또래들과 어울려 함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거나 때로는 탈선하기도 한다. 이처럼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항해하는 선박의 지피에스(GPS)와 깜깜한 밤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이런 청소년들 또는 청년들이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지, 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태도가 필요하고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는지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학교모범(學校模範)』을 통해 현대적 의미를 살피려고 한다.

이 책은 1582년(선조15) 율곡 선생이 왕의 명에 의하여 지은 책으로 당시 교육제도의 미비한 점을 보충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청년과 청소년 교육을 새롭게 하기 위한 여러 주장들이 들어 있다. 총16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이글은 그 순서에 따라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다만 내용상 유사한 독서와 그 방법의 항목만 통합하여 총15개의 내용으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당시 교육기관으로 지방의 향교와 서울의 4학, 그리고 성균관이 있었다.

아무튼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 수준의 꿈은 대개 그 사회에서 인정받거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 직업을 꿈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가령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대개 판사·검사·의사·과학자 등이 인기였고, 2000년대부터는 여기에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 등이 추가 되었다. 그러다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2010년대 이후부터는 교사나 공무원도 거기에 끼어들었으나 순수한 과학자가 되겠다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 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거나 인기를 끌며 돈을 많이 벌거나 생존에 유리한 그런 직종이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모두가 이런 꿈을 꾸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자신의 학교성적이 뒷받침되지 못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그런 것이 아니어서, 또 학부모의 경제력이 받쳐주지 못해서 꿈을 접어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이다.

종합하면 청소년기의 꿈은 생존을 위해서나 출세와 야망을 위해서 가지게 되며, 드물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주변의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종교의 영향으로 그 나이 또래들이 생각지 못한 꿈을 갖기도 한다. 가령 예술가와 학자나 성직자 또는 사회에 봉사하는 직업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꿈을 접고 생계만을 위한 직업을 택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집안의 재력으로 바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그 나머지는 생계와 꿈을 병행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는 경우는 세 번째였다.

그런데 문제는 제4차 산업혁명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잘나가던 직업도 장래성이 불투명해지는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게다가 많은 직업들은 기계가 대신하면서 대량 실직이라는 사태를 예고하고 있다. 이제 청소년들은 장래의 꿈조차 제대로 꿀 수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이런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율곡 선생은 이 책의 첫 번째 입지(立志)를 다루는 주제에서 성인(聖人)이 되기를 꿈꾸라고 한다.

첫째는 입지(立志)이니 … 분발하고 힘써서 꼭 성인이 되어야 하겠다고 한 뒤에 그친다.

 

비록 옛날 말이라 해도 요즘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생뚱맞은 일이라 모두 놀라 자빠질 일이 분명하다. 조선시대 당시에도 이렇게 말하면 놀라울 일인데, 하물며 제4차 산업을 눈앞에 둔 오늘이겠는가? 그러니 율곡 선생의 이런 주장을 옛날 사람의 케케묵은 주장으로 여기고 무시해 버리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할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유학에서 말하는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 그리고 공자(孔子)님과 같은 성인이 된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너무 높은 목표 같기도 하다.

과연 그럴까? 우선 율곡 선생의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생이 공부했던 학문을 이해해야 한다. 그 학문은 중국 남송 때 주자(朱子)라는 분이 완성한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孟子)로 이어지는 유학(儒學)을 송나라 때 새롭게 해석한 학문이다. 그리고 성리학은 인간이 착하게 태어났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이었다. 맹자는 인간이 모두 착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다.”

 

고 하여, 율곡 선생도 맹자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믿어 배우는 사람은 이렇게 성인이 되는 것을 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사람이 착하게 태어났다면 어째서 현실에서는 나쁜 사람도 있는가? 이것을 성리학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의 마음은 착한 이치를 갖추고 태어났지만, 그 착한 이치를 가리고 막는 것은 기질 때문이라고 한다. 좋은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본성대로 바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으나, 나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비록 본성은 착하지만 그 나쁜 기질의 방해를 받아 착한 본성이 발휘될 수 없어 나쁜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란 착한 본성을 덮어 가리는 기질을 변화시켜 본래의 착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성리학은 이렇게 공부를 통해 기질을 변화시키면 부모 된 자는 자식을 당연히 사랑하며, 자식 된 자는 부모를 마땅히 효도하는 등 사람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천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까 이런 성인이란 자신이 자연적으로 타고난 착한 본성이 기질의 방해를 받지 않게 완벽하게 발휘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실제적으로 어떻든 간에 원리적으로 보면 매우 명쾌하고 쉽다. 물론 성인으로서 인류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그렇지 못하다면야 또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선생이 누구나 성인이 되기를 꿈꾸라는 말은 대단한 자기 긍정이다. 고작 교과 성적 따위가 나쁘다고 자기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여기거나 남보다 외모가 뛰어나지 못하다고 하여 열등감을 갖는다면, 이것은 이런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망치는 일이다.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이렇게 말한다.

“학문이란 게 별다른 일이 아니다. 평상시 생활하고 행

동하는 동안에 일에 따라 마땅함을 얻도록 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런 학문을 통해 각자의 직업이 농부든 의사든 공무원이든 환경미화원이든 또 무엇이든 간에 매사에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고 바르게 처신하면 성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청소년들이 비록 각자 다른 꿈을 가지더라도 결코 성인을 꿈꾸는 데 방해되는 일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것이 올바르냐 하는 점이다. 그래서 공부가 더 필요하지만 전통적으로 유학은 각자의 사적인 욕심보다는 모두를 위하는 공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올바르다 보았다. 물론 당연이 나의 몫으로 돌아올 것을 챙기는 것을 사사로운 욕심이라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몫과 분수를 넘어 남의 것이나 공공의 것을 탐내는 것이야 말로 사사로운 욕심이다.

그러니 사사로운 욕심에서 나온 헛된 명예나 권력이나 재물이나 입신양명 따위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어떤 직업을 갖든 천부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착한 본성을 잘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현대판 성인이 아닐까? 사실 사람이 착하게 또는 나쁘게 태어났는지 증명할 길은 없지만, 착하게 태어났다고 믿고 그렇게 사는 것인 훨씬 보람된 삶이 아닐지? 청소년들이 이점을 깨닫기는 아직 이르지만, 부모나 주변의 성인(成人)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자랄 것이다.

아무튼 공부를 시작할 때 꿈을 잘 가져야겠다. 선생처럼 성인이 되겠다는 꿈도 소박하게 생각하면 매사에 각자의 위치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