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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는 누구나 두드릴 수 있었을까


신문고는 누구나 두드릴 수 있었을까

 

선왕조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다는 ‘민본(民本)’과 덕으로 다스린다는 ‘덕치(德治)’의 유교 이념을 내건 국가였다. 또한 언론제도가 발달하여 왕권의 전횡을 견제하고 관리들의 부정과 비리를 탄핵하여 공정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신문고를 두드려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던 신문고의 설치도 덕치와 민본이 합해진 백성을 위한 정치적 배려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신문고는 마치 오늘날 민주적인 제도의 상징물과 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백성들은 정말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었을까?

조선시대의 일반 백성들은 중앙 정부나 지방 수령, 그리고 지방의 토호들에 의해 경제적인 수탈과 피해를 자주 당하였다. 그러나 힘 있는 사람들의 불법이나 부정은 대개 은폐되고, 법을 집행하는 관원들의 오판으로 억울하게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부당하게 재산이나 처자를 빼앗기기도 하고, 양인이 천민으로 되기도 하였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힘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운명이거니 체념하고 이를 감수하거나 아예 자신의 억울함을 깨닫기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부 의식이 있거나 용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풀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도 안정된 지배의 유지를 위해서는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민심 획득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소원(訴冤)제도를 마련하였으니 신문고와 상언(上言) ․격쟁(擊錚)의 제도가 그것이었다.

신문고는 조선 3대 왕인 태종 1년(1401) 7월에 중국 송나라 등문고(登聞鼓)를 본받아 설치되었다. 그래서 그 이름도 등문고라 하였다가 곧 신문고라고 고쳤다. 신문고는 의금부 당직청에 있었고, 영사(令史) 1명과 나장(螺匠) 1명이 항상 지키고 있었다. 태종 4년의 다음과 같은 실록 기사는 신문고에 대한 조선 왕조의 의지를 잘 보여 준다.

 

“국가에서 백성의 의사가 왕에게 전달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백성들에게 와서 치도록 허락하여 왕의 귀와 눈이 막히고 가려지는 근심을 없애니, 이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요, 아름다운 뜻이다.”

태종실록』권8, 태종 4년 갑신 9월 19일

 

신문고는 귀천을 가릴 것 없이 호소할 데가 없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왕이 직접 해결해 준다고 표방하고 있다. 당시 글을 몰랐던 하층민이 말로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신문고를 설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혁신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신문고가 정말 얼마만큼이나 백성을 위한 역할을 하였을까?

신문고는 전국의 백성들이 언제 어디서나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서울에만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신문고를 치기 위해서는 일단 서울까지 올라와야 하였다. 그렇다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쉽게 신문고를 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신문고를 치기 위해 지켜야 할 절차가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먼저 담당 관원에게 호소하여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호소하게 하였다. 지방에서는 먼저 자기 고을의 수령에게, 그 다음 관찰사에게,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호소하도록 하였다. 사헌부의 처리에도 만족하지 못하면 마지막으로 신문고를 치도록 하였다. 이 때 각 단계별로 전 단계의 관원에게서 그 사안을 처리했다는 확인서를 받아 제출해야만 다음 단계에 호소할 수 있었다. 신문고를 칠 때에도 억울한 내용을 진술하여 담당 관리가 글을 작성하고, 신청자가 사는 곳을 확인한 뒤에 북을 두드리게 하였다. 따라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신문고를 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신문고를 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지키던 영사가 먼저 의금부의 관리나 당직원에게 보고한 후에 사유를 확인해서 사안에 따라 신문고를 칠 수 있게 하였다. 신문고를 치면 의금부의 관원이 왕에게 보고하고 왕의 지시에 따라 해당 관청에서는 5일 안에 처리해야 하였다. 신문고를 친 사람의 억울함이 사실이면 이를 해결해 주었고, 거짓일 경우에는 엄한 벌을 내렸다. 또한 해당 관원이 잘못한 것으로 판명되면 그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신문고를 치기 어려운 점은 까다로운 절차 때문만은 아니었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경국대전』형전에 따르면, 국가 안위에 관련된 사건과 불법 살인 사건을 빼고는, 중앙 관청의 하급 관리나 노비들이 그의 상관을 고발하는 경우와 지방의 양반, 향리, 민들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는 오히려 벌을 받는다고 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비의 경우는 아예 북을 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힘없는 일반 백성들이 정해진 절차를 거쳐 신문고를 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수령이나 관찰사 또는 서울의 해당 관원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문제가 신문고를 통해 왕에게 알려지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유형 ․ 무형의 압력과 회유를 통해서 신문고를 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천신만고 끝에 신문고 앞에 이르러서도 이를 지키는 의금부 관원들의 방해에 부딪치게 된다. 세종 때에는 양반 집의 노비가 신문고를 치려고 하였다가 담당 관리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엉뚱하게 광화문에 걸려 있던 종을 쳐서 문제된 적도 있었다. 더구나 중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두려움은 신문고에의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이 있으면 왕에게 직접 호소하라고 만들어 놓은 신문고는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다. 설령 신문고를 쳤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왕에게 보고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거의 그대로 지속되었다.

따라서 신문고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에 사는 전현직 관리들이거나 양반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당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신문고를 이용한 사람은 거의 대부분 양반을 비롯한 지배 신분층으로 나타난다. 그나마 특권 지배층의 반발로 세조 때부터 폐지와 설치가 반복되었던 신문고는 결국 중종 때 아예 폐지되고 말았다.

신문고가 유명무실해지자 이제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길은 상언과 격쟁만이 남게 되었다. 상언은 대부분 왕의 행차가 있을 때 그 앞에 나아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고, 격쟁은 왕이 있는 곳 근처에서 시끄럽게 징을 울려 왕의 이목을 끈 다음 구두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상언은 신문고에 비해 절차가 간편하여 일반 백성들이 이용하기 쉬운 제도였지만, 기본적으로 글을 알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격쟁도 별다른 제약은 없었지만 격쟁을 한 사람은 먼저 형조의 취조부터 감수해야 하였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반 백성들은 상언과 격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상언과 격쟁은 백성들의 병폐를 적극적으로 수렴하고자 하였던 조선 후기 영․정조 대에 더욱 활성화되었다. 한편 상언과 격쟁의 남발에 따른 폐단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영조 47년(1771) 11월에 창덕궁 진선문(進善門)과 경희궁 건명문(建明門) 앞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였다. 이때의 신문고는 궁궐 안에 설치되었고 그 이용에 대한 제약도 강화되어 겉으로 내세워진 명분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이 이용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처럼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호소하려고 신문고를 치는 일은 어렵기 짝이 없었으나, 국가 변란을 고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제약 없이 직접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양반들이 정치의 득실을 따지고, 민생의 안정을 주장하기 위해 신문고를 칠 경우도 일반 백성들의 경우보다는 수월하였다. 결국 두드리면 들어 준다던 신문고는 하층민의 억울함에 대한 호소나 해결을 위한 제도였다기보다는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왕의 권위와 신성감을 드러내고, 양반 지배층의 언로를 열어 지배체제를 안정화시키려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조선왕조가 통치 이념으로 내건 ‘민본’과 ‘덕치’라는 것도 이처럼 왕권을 중심으로 한 민본과 덕치로서, 국민의 주권을 바탕으로 한 오늘날의 민주주의 이념과는 그 원리가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저항의 지식인 김시습


저항의 지식인 김시습

느 사회에나 바르지 않은 현실을 비판하는 지식인이 있게 마련이다. 오백여 년 역사의 조선왕조에서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우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 1435∼1493)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15세기는 태종이 권력을 잡은 후 왕권이 강화되고, 세종, 문종, 단종으로 적장자에게 왕위가 계승되어 가면서 봉건적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어가는 시기였다. 그런데 세조가 이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았다. 당연히 여기에 대해 반발하는 지식인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김시습이었다.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천재로 이름이 났다. 세 살 때 이미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지었다는 유명한 시가 있다.

비도 없이 천둥 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에 흩어지네.

그가 신동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져서 세종은 어린 김시습을 대궐로 불러들여 그의 재주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으며, 뒷날을 기약할 정도였다. 그러던 그는 세조가 힘으로 왕위를 빼앗자, 격분하여 공부를 그만두고 머리를 깎고는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그 후 그는 현실의 불의와 타협에 줄곧 반발하면서 살았다. 과거를 보고 관리로 출세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선교 등 다양한 사상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어느 것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시와 소설로 울분을 달랬다.

그는 24세인 1458년(세조 4)에 관서지방을 유랑하며 지은 글을 모아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를 엮었는데, 그 후지(後識)에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금강산․오대산 및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지은 글을 모아 1460년에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엮었다. 이후는 주로 삼남지방을 유랑하여, 1463년에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이처럼 조선조에 사대부의 일원이었으면서도 체제에 대한 불만과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안주하지 못한 지식인을 방외인(方外人)이라 불렀다. 김시습은 방외인의 문학을 처음으로 연 인물이었다.

그는 서른한 살 되는 봄에 10년 동안의 방랑 생활을 끝내고, 경주 남쪽 금오산에 매월당을 짓고 자리 잡았다. 여기서 국문학사에 빛나는 『금오신화(金鰲新話)』라는 산문 소설을 창작하였던 것이다. 『금오신화』는 귀신, 염라왕, 용왕, 용궁, 염부주 같은 비현실적인 것들을 소재로 삼았으므로 전기문학(傳奇文學)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나 김시습 자신의 모습과 생각을 비유적으로 담아 낸 자서전적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작품에서 어려운 시대에 타협과 굴복을 거부했던 한 지식인이 현실의 비리와 자신의 이상을 이런 종류의 글에나마 담아서 저항하고자 했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김시습은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선교 등 다양한 사상을 섭렵하여 유, 불 관계의 다채로운 논문들을 남긴 사상가이자, 현재 그의 시문집에 전하는 것만 하더라도 2,200여수나 되는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시습과 같이 자유분방하게 다양한 학문을 추구하는 것은 불교 자체를 엄격히 이단시하는 당시의 풍조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그는 퇴계 이황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 : 궁벽한 것을 캐내고 괴상한 일을 행함)’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김시습전」(『율곡전서』권14∼16, 잡저)을 지은 율곡은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기를, “재주가 그릇[器]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으리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이 경청(輕淸)은 지나치고 후중(厚重)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불의에 저항하는 기상에 대하여, “절의(節義)를 세우고 윤기(倫紀)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기풍을 접하면 나약한 사람도 감흥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되기에 남음이 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율곡은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이 한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애석해하였다.

김시습의 시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집약된다. 첫째는 힘들이지 않고서도 천성(天成)으로 시작(詩作)이 가능했다는 것과, 둘째는 그 생각이 높고 멀어 초매(超邁)․오묘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 가운데 역대 시선집에 수록된 시만도 20여수에 이르고 있다.

“바람 잘 드는 마루를 벌써 쓸어놓고 기다리오” – 선비의 편지


“바람 잘 드는 마루를 벌써 쓸어놓고 기다리오”  –  선비의 편지

 

2009년에 정조가 노론의 지도자인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 299점이 공개돼서 세간에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임금이 직접 쓴 편지라고 하는 점이 일단 관심을 끌지만 무엇보다도 일반인도 아닌 임금의 편지에서 ‘호로자식’이니,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 하는 상스러운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주목을 끌었다.

당시 공개된 간찰은 정조가 직접 쓴 어필이고 그 내용이 파격적이라서 화제가 됐지만, 사실 조선시대의 웬만한 선비들이면 적어도 수십 통에서 수백 통, 많게는 천여 통에 이르는 간찰을 남긴 사람이 적지 않다. 이처럼 많은 간찰은 중요도에 따라 분류하였다가 나중에 문집을 만들 때 그 내용을 수록하게 되는데,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사이의 유명한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은 두 사람 사이에 무려 8년간이나 편지를 통해 주고 받으면서 진행된 논쟁이었다.

강릉을 연고지로 한 조선시대의 지식인 가운데 일반인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매월당 김시습과 율곡 이이, 그리고 교산 허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은 각자 처한 시대적 상황은 달랐지만, 치열하게 현실과 부딪치며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다. 이들의 생애와 사상은 관찬사료나 문집 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지만, 친우 사이에 주고받은 간찰을 통해 오히려 이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저는 외곬이라서 아무리 궁해도 구걸을 못합니다. 남이 주는 것도 받지 않고, 받더라도 어깨를 움츠리고 무릎으로 설설 기지 않습니다. 사례하더라도 감격해서 달려가는 법이 없고, 순결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제 자신 이것이 나쁜 습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습관이 본성으로 굳어져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 편지는 1487년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이 김시습에게 환속과 벼슬살이를 권하자, 거절의 뜻을 밝힌 간찰의 일부이다. 김시습은 세간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명리의 세간을 벗어나 지팡이 하나, 짚신 한 쌍으로 무심한 구름과 사심 없는 달빛처럼 방랑하였다. 스스로 사용한 청한자(淸寒子)라는 호와 같이 겨울 달 아래 외롭게 피어난 매화의 이미지는 곧 청한한 그의 정신세계를 상징한다.

“갑자기 삼대(三代)의 정치를 거론하여 건의해서 받아들여 시행되지 않으면 곧 떠나버리는 것으로 말하면, 그것은 오늘의 시국에 적절한 의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호원(浩原: 성혼成渾의 字)이 오로지 물러나기만 구하는 것은 너무 집착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지금은 억만 백성이 물이 새는 배에 타고 있으므로 그것을 구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마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1581년 율곡이 대사간의 직에 있으면서 송익필(宋翼弼)에게 보낸 것으로, 시대의 암울한 상황을 우려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율곡은 친구 성혼이 혼탁한 현실정치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태도를 취한 것을 옳지 않다고 보았다. 지금은 온 백성이 물 새는 배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위태로우니, 그런 때에 정치를 바로잡아 온 백성을 구원하는 일은 나와 그대 같은 지식인의 몫임을 환기시키고 있다. 대학자이면서도 현실정치를 결코 외면하지 않은 율곡의 모습을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못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버들 빛은 한창 푸르며, 연꽃은 붉은 꽃잎이 반쯤 피었고 녹음은 푸른 일산에 은은히 비치는구려. 이즈음 마침 동동주를 빚어서 젖빛처럼 하얀 술이 동이에 넘실대니, 즉시 오셔서 맛보시기 바라오. 바람 잘 드는 마루를 벌써 쓸어놓고 기다리오.”

이 편지는 허균이 친우 권필(權韠)에게 내방을 권하며 쓴 것으로, 그 미려한 문장이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하다. 허균은 실로 풍운아였다. 우리에게 그는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여류시인 난설헌의 동생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권필은 허균과는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으로 허균 못지않은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시인이었고, 필화사건으로 곤장을 맞고 귀양 가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도 허균의 비참한 죽음과 매우 닮았다.

E-mail에 익숙한 요즘의 세태에 손으로 편지를 쓴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현실은 진정한 사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질의 쾌락을 숭상하고 권력 추구를 인간 본성이라고 합리화하며 체면치례의 만남[面交]과 이익 추구의 만남[市交]을 우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선 후기의 박지원은 <예덕선생전>에서 참된 사귐은 마음과 덕으로 벗을 사귀는데 있다고 하였다. 옛사람이 벗에게 적은 간찰을 읽으면서 그 속에 담긴 절절한 우정과 마음으로 사귀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바람이 부는 원리


 

바람이 부는 원리

 

람은 어떻게 해서 생길까?

이 질문의 답은 초등학생들도 간단한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다음은 예전 교과서에 나온 실험 내용이다. 사방이 막힌 사각 모양의 상자에 윗면과 앞면을 유리로 만들고, 그 속에 물이 든 접시와 모래가 든 접시를 양쪽 끝에 나누어 두고 그 속에 향 연기를 넣은 다음, 위쪽에서 갓을 씌운 약간 뜨거운 백열전등을 오랫동안 비추면서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다. 향의 연기가 모래 접시에서 상승하여 건너편 물이 든 접시 위로 갔다가 내려오고, 물이 든 접시 쪽의 연기는 모래가 담긴 접시 쪽으로 이동하면서 빙빙 도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통 속의 모든 연기가 이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런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바람은 보통 저기압에 속한 공기가 따뜻해져 상승할 때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기압에서 상대적으로 찬바람이 불어오는데, 이 통 속의 물 위의 공기가 모래 위로 이동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통의 아랫면만 지표처럼 생각한다면 물 쪽에서 모래 쪽으로 공기가 이동하니 바람은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부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람이란 공기의 이동인 셈이다.

바람과 관련된 「천도책」의 첫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다.

 

“바람은 어디에서 일어나 어디로 들어가는가?”

 

여기서 질문이 참 묘하다. 바람이 일어나는 곳과 들어가는 곳을 물었다. 그러나 앞에서 바람의 원리를 설명한 것을 참고하면 그리 어려운 질문도 아니다. 저기압의 공기가 열을 받아 가벼워져 상승하니까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기압에서 불어와 저기압인 곳으로 들어간다. 물론 그 장소는 정해진 곳이 없다.

그에 대한 율곡의 답은 이렇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것은 기(氣)입니다. 음기(陰氣)가 엉기고 모여서 밖에 있는 양기(陽氣)가 들어가지 못하면 돌고 돌아서 바람이 됩니다. 만물의 기운은 비록 ‘북동쪽에서 나와서 남서쪽으로 들어간다.’고 말하나, 그 음기가 모이는 것에 정해진 곳이 없으므로 양기의 흩어지는 것도 방향이 없습니다. 큰 땅덩이가 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어찌 한 방위에서만 얽매이겠습니까? 동쪽에서 일어나는 것이 만물을 기르는 바람이지만, 그렇다고 동쪽에서 처음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서쪽에서 일어나는 것이 쌀쌀하게 식물을 말라 죽이는 바람이지만, 그렇다고 서쪽에서 처음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구부러진 탱자나무에 와서 깃들고 빈 구멍에 바람이 불지만, 그렇다고 빈 구멍에서 처음 시작한다고 하겠습니까? 정자(程子)의 말에, ‘올해의 우레는 일어나는 곳에서 일어난다.’ 하였으니, 저 또한 바람이 흔들흔들 살랑살랑 부는 것은 기가 부딪치면 일어나고 기가 쉬면 그치는 것으로, 애초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공기의 이동인데, 율곡의 답에서 ‘기(여기서는 공기를 말함)가 부딪치면 일어나고 기가 쉬면 그친다.’라고 표현한 것은 바람이 기의 이동이라는 관점을 정확히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바람이 부는 데도 일정한 방향이 없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다만 바람이 부는 원리에 대해서는 ‘음기가 엉기고 모여 밖에 있는 양기가 들어가지 못하면 빙글빙글 돌아서 바람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음기는 찬 공기 양기는 따뜻한 공기라 말할 수 있는데, 따뜻한 공기가 상승하니 찬 음기가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부는 것이 바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문제는 기상학이 발달한 후대에 알려진 사실이므로 당시에 바람의 원리를 제대로 아는 것은 무리였다.

바람에 관한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어떤 때에는 바람이 불어도 나무가 소리 나게 울리지 아니하는데, 어떤 때에는 나무를 꺾고 집을 허물어뜨리며, 순풍도 되고 폭풍도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질문은 바람의 세기가 다른 이유를 묻는 질문이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듯이 저기압과 고기압의 기압차가 클수록 바람도 세다. 태풍의 경우를 보라. 중심부와 주변부의 기압차가 보통의 그것보다 훨씬 크지 않는가? 그렇다면 율곡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는 음양의 기가 펴져서 맺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기가 흩어지더라도 반드시 부드러워 불어도 나뭇가지조차도 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도리가 이미 쇠약하면 음양의 기운이 막혀서 펼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흩어지는 것이 반드시 격렬하여 나무를 꺾고 집을 허물어뜨립니다. 순풍은 부드럽게 흩어지는 것이요, 폭풍은 격렬하게 흩어지는 것입니다. 성왕(成王)이 한 생각을 잘못하자 큰 바람이 벼를 쓰러뜨렸고, 주공(周公)이 수년 동안 좋은 정치를 펼치자 바다에는 풍파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기(氣)가 그렇게 된 것은 역시 인간의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바람의 세기는 인간의 일에 달려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사회가 잘 다스려지면 순풍이 불고 인간사회가 혼란스러우면 폭풍이 분다고 한다. 여기서 성왕은 고대 주나라 무왕의 아들로서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이고, 주공은 그의 숙부로서 어린 성왕을 도와 섭정(攝政)으로 천하를 잘 다스린 사람이다. 두 사람의 다스리는 방법을 비교하여 그 결과를 바람으로 표현하였다.

이런 생각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한(前漢)의 동중서(董仲舒)의 이론에 따른 것이지만, 요즘 초등학생들도 믿지 않는 이런 이론을 조선시대 율곡 같은 명민한 선비들이 정말로 믿었을까? 왜냐하면 중국의 고대 사상가 가령 순자(荀子) 같은 사람은 자연의 일과 인간의 일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해 왔기 때문이다.

율곡이 이 답안을 쓸 때가 23살이었는데, 경험이 없어서 순자의 이런 사상을 몰랐을까? 아니면 당시 시험관을 비롯한 다수의 선비들이 이런 동중서의 사상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관점을 따라서 답안을 작성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각자 판단해 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 문제의 답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