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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9년 대사간을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


1579년 대사간을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

 

곡은 1579년 대사간을 사직하면서 붕당해소에 관한 견해를 밝힌 상소문을 올린다. 『율곡전서』제7권에 실려 있는데, 『선조수정실록』1579년 (선조12) 6월 1일자에 이 상소문을 두고 일어난 논란을 기록하고 있다.  그논란을 소개하기 전에 이 상소문을 먼저 읽어 두는 것이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음은 그 상소문의 핵심 내용을 발췌하여 재구성한 내용이다.

먼저 율곡은 사림(士林)에 대해 논하는데,  사림은 나라의 원기(元氣: 타고난 기운 또는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근본이 되는 기운)로 사림이 왕성하고 화합하면 나라가 잘 된다고 밝힌다.  사림은 오늘날로 치면 지식인 사회 또는 여론 형성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림이 잘못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과거 역사에서 예를 들었다.
이어서 심의겸은 현재의 나이든 선비들을 과거 이량(李樑)으로 부터 보호해 준 선행이 있어 그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김효원은 비록 젊었을 때 척신 윤원형의 집에 드나든 잘못이 있지만,  명망이 있어 젊은 선비들이 알아 주는 사람이라고 두 사람의 장점을 말한다.  이 점은 나중에 ‘둘다 옳다’는 양시론(兩是論)이라 비판을 받는 부분이다.

그리고는 붕당이 일어나게 된 두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심의겸은 김효원의 젊을 때의 일로 이조정랑에 오르는 것을 방해했고,  김효원도 심의겸을 잘못을 들어 비난했는데,  둘 다 나쁜 감정 때문이 아니라 심의겸은 변통 할 줄 모르고 김효원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의 의견이 그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 틈을 타 이간질하는 사람들이 있어 분당의 조짐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이 점은 붕당이 더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과격하지 않게 에둘러 그들의 단점을 지적한 말이지만,  사실상 ‘둘 다 그르다’는 양비론(兩非論)의 논리이다.  이 또한 이상소를 쓰기 전에도 그가 선조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또 이어 율곡 자신과 노수신이 의논하여 두 사람을 외직으로 보낸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 일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 일로 인해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동·서 의설을 만들어 동인과 서인을 지목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되씹어 보면 율곡의 이런 좋은 의도로 시작된 제안이 오히려 안타깝게도 붕당 형성에 기름을 끼얹은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실 율곡은 두 사람을 외직으로 보내면 조정이 잠잠해 질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그 예상을 뒤엎고 특히 동인쪽에서 김효원이 억울하다고 그를 두둔하는 여론이 형성되어 붕당이 악화되는 길로 전개되었다.  더구나 김효원이 심효원보다 멀리 외직으로 나간 원인 제공자를 율곡이라고 여겨 그를 비판하게 된다.

소인의 문제로 넘어간다.  군자는 덕을 밝혀 인격을 완성한 참된 인간의 모델이라면,  소인은 사적인 이익과 입신양명만을 추구하는 사악한 인물로 규정되는데,  이 군자와 소인의 문제는 공자가 자주 말했고,  소인이 합할 수 없다는 관점을 유지했다.

그 때문에 율곡은 당시 올라오는 상소 가운데 심의겸을 소인이라고 지목한데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그는 심의겸과 김효원 둘 가운데 한 사람은 군자요 한 사람은 소인이라고 한다면 그 말을 믿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말한다.  이어 두 사람의 잘못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의양시론·양비론에 대해

“모호하게 둘 다 옳다 하여 시비가 명백하지않으니,  천하에 어찌둘다 옳고 둘다 그른 것이 있겠는가.”

라는 비판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천하에 시비를 다룸에 있어 둘 다 옳은 것도 있는 것이니 무왕(武王)이 주(紂)를 토벌할 때 백이(伯夷)가 말을 잡고 간(諫:웃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것)한것은 둘 다 옳은 것이요,
또 둘 다그른 것도 있는 것이니 전국(戰國)시대에 제후(諸侯)들이 서로 싸운 것은 둘다 그른 것입니다.”

말인즉 무왕은 은나라를 토벌하러 간 사람이고 백이는 그것을 말린 사람으로,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의 무왕이나 은나라에 절개를 지킨 백이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죽은 것 둘다 옳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제후들은 받들어야하는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를 무시하고 각자 제후들이 자기나라를 위해 싸웠기 때문에 둘 다 잘못이라는 견해이다.  유학자들이 믿고 있는 사실에 따라 양비·양시론이 논리상 하자가 전혀 없는 말이다.  그리고는

“만일 심의겸이 나라를 그르쳐서 동인이 공격한다면 시비는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정해질 것이니,  애써 말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하면서,  국가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백성의 안락과 고난이 심의겸의 진퇴(進退)에 달린 것이 아닌데도,  눈을 부릅뜨고 대담하게 반드시 소인으로 떨어뜨리려 하는 것은 과연 무슨 소견이냐고 반문한다.  나아가

“만일 하나는 군자이고 하나는 소인이라 한다면 물과 불이 한 그릇에 있을 수  없고,  향기나는 풀과 냄새나는 풀이 한 떨기에서 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군자와 소인이 함께 조절하여 나라를 보전한 일이 있겠습니까?”

라고하여, 소인으로 지목한 부당성을 토로하였다.  그리하여 을해년(1575)의 서인은 참으로 그 전에 잘못하였지만 지금 동인의 잘못은 을해년 보다 거의 지나치니,  남의 잘못을 말하면서 그것을 본받는 것은 또한 너무 심하지 않는지 따졌다.  동인들의 태도를 보면 심의겸을 소인이라고 지목한 것에 는진정성이 없어서 임금을 속이고 있고,  이런식이라면 ‘수사(收司)의 율(律)(옛날 중국에서 10가정을 한 조로 하여,  그 중의 한가 정에 죄가 있을 경우,  다른아 홉 가정이 관청에 고발하던 제도)’ 이 착한 선비들에게도 미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 유명한 공론(公論)과 국시(國是)에 대한 의견을 내세운다. 국시란 현대에 와서도 많은 논란이 있는 말이다.  5·16군사 정변때‘ 반공을 국시로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을 발표한 이래 로지금의 우리나라 국시가 무엇이냐는 논란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여기서 율곡은 인심이 함 께옳다하는 것을 공론이라하고,  공론이 있는 곳은 국시라고 하는데,  국시라는 것은 온 나라 사람이 의논하지 않고도 함께 옳다하는 것이니,  이익으로 유혹하는 것도 아니며,  위엄으로 무섭게 하는것도 아니면서 삼척동자도 그 옳은 것을 아는 것이 국시라고 정의한다.  쉽게 말해 국가 구성원의 토론이 필요 없이 쉽게 공유하는 보편 타당한 이념이나 가치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러한 국시가 붕당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 상소를 조정 대신들에게 알려 상의 토록하여 동인과 서인의 구별을 없애고 착하고 재주있는 인재들을 등용하여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하게 할 수 있도록 하되, 혹시 분쟁을 일으키고 말을 만들려는 사람이 있으면 배척하고 멀리 하라는 말을 올린다.
상소의 말미에 과거 외척들의 횡포가 있었기 때문에 심의겸이 외척이된 것 만으로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다만 심의겸 같은 사람은 지위만 보전하게 하고 중요한 자리에 앉히지 않고서, 외척들에게 권세가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대강의 상소 내용이다.  여기서도 이전까지의 동서붕당을 조정해 보려는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  다만 심의겸을 소인으로 지목한 것에 대한 부당성을 밝히고 있는데,  그를 비판하는 자들이 어떻게 받아 들일지 궁금하다.
같은해 6월 1일자 실록의 기록을 보라.

정철을 동부승지에 승진시키다.


정철을 동부승지에 승진시키다.

 

선조수정실록』 1578년(선조11) 5월 1일의 기록이다.

제학(直提學:  조선시대홍문관·예문관·규장각의정3품관직) 정철(鄭澈:1536~1593)을 동부승지(同副承旨: 조선시대 승정원의 정3품 당상 관직)로 승진 시킴에 두번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당파의 설이 더욱 무성하여, 심의겸의 무리들을 서인이라 지목하고 김효원의 무리들을 동인이라 지목하였다.  [심의겸의 집은 성(城)의 서쪽에 있고, 김효원의 집은 성의 동쪽에 가까웠다.  당초에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는 주관(主觀)이 뚜렷하고 행동이 독자적인 자이거나 줏대없이 남의 생각 만을 따르는 이름없는 사람이 아니면,  모두 동인 아니면 서인이라 지목하는 것에 들어 있었다.

정철은 서인으로 지목되 고있었는데 이이는 정철에게 권고하여 젊은 선비들과 교분을 두텁게 해서 동인·서인의 설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정철이 처음에 는그 말을 따라서 임금의 명령을 널리 펴고 정책을 받들 때에는 꽤 사기(士氣)를 펼쳤다.

그런데 그때 지평(持平: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5품 관직) 홍가신(洪可臣)이 천거를 받아 대관(臺官: 조선시대 사헌부의 대사헌으로 부터 지평까지의 관리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서,  이조좌랑 조원(趙瑗)이 나랏일을 사사롭게 처리한 잘못이 있다고 탄핵하였다.  홍가신은 젊어서부터 조원과 친한 친구 였는데도 그를 논박하여 스스로 공론에 맞추니,  이이는 그를 사람을 굴복시키는 위력이 있다고 칭찬 하였으나정 철은 편하게 여기질 않았다.  이는 홍가신이 서인과 맞지 않아 옛 친구를 생각하지 않고 먼저 조원을 공격하는 것인가 하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이 처럼 이이와  정철 두 사람이 지향하는 생각이 동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만족하게 화합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훗날 역사에서 동서붕당으로 갈라진 때를1575년(선조8)으로 보며, 이것을 을해붕당(乙亥朋黨)이라 부른다.  이에 앞서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 죽기 직전에 붕당의 조짐을 예고한 지 3년만의 일이다.  율곡은 처음에 이준경의 붕당 예고를 무시하고 비판했으나 그것이 현실화되자,  그는 큰 선비답게 자신의 통찰력이 그 보다 부족함을 솔직히 자인하고, 그 부끄러움을 동인과 서인의 분쟁을 조정하는데 온 힘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있다.
되었다는 점을 말해 주고있 다. 심의겸의 집이 성의 서쪽이라 함은 그의 집이 당시 도성 서쪽 인정릉방(貞陵坊: 서울의 옛 러시아 공사관 자리)를 말하고, 김효원의 집이 동쪽이라 함은 그의 집이 한양 동쪽의 건천방(乾川坊)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의겸의 무리들을 서인이라 불렀고,  서인은 박순(朴淳)을 영수로 해서 모였는데 그 가운데는 율곡과 성혼(成渾)의 제자들이 많았다.  정철·신응시(申應時)·정엽(鄭曄)·송익필(宋翼弼)·조헌(趙憲)·이귀(李貴)·황정욱(黃廷彧)·김계휘(金繼輝)·홍성민(洪聖民)·이해수(理海壽)·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이산보(李山甫)·구사맹(具思孟) 등이 서인의 주축 인물이었다.

반면 김효원의 무리들을 동인이라 불렀고, 동인은 선배 인허엽(許曄)을 영수로 추대하여 모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로서,  나이가 젊고 절개가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물로는 유성룡(柳成龍)·우성전(禹性傳)·김성일(金誠一)·남이공(南以恭)·김우옹(金宇顒)·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이광정(李光庭)·이원익(李元翼)·홍가신(洪可臣)·이덕형(李德馨)·정유길(鄭惟吉)·정지연(鄭芝衍) 등이다.

구한 말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지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따르면 동인들은 명예와 절개를 즐겨 숭상하였고,  서인들은 경력이 많아 몸가짐이 신중히 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양측의 장점만 지적하였는데,  굳이 행간에서 단점을 찾아 본다면 동인은 마치 투사들처럼 왕성한 혈기로 이념과 논리적인 주장만 앞세워 편협하고 극단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고,  서인은 좋게 말해 노련하게 나쁘게 말하면 교묘하게 시국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대처해 나간 것으로 추리 할 수 있다.  그러니까동 인이 공격적이라면 서인은 방어적 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흥미롭다고 할까 아니면 어처구니 없다고 할까,  동인과 서인의 영수인 허엽과 박순은 둘 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였다.  없는 것인가?  어디 그 뿐인가?
사촌 사이였던 이산해와  이산보도 있다. 하기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사례를 많이 본다. 이 점은 오늘날도 다르지않다.
젊은날 같 은목적을 위해 투쟁하던 동지 사이로 지내다가 나이가 들면서 현실 정치판에 발을 들여 놓 는순간 서로가 정적(政敵)이 되는것을 자 주목격한다.  한 술 더떠 스승이나 친구를 배반하는 경우도 있으니,  정치적 지향이 다른 정도야 탓할 수도 없겠다.

문제는 홍가신이 조원과 친한 친구 사이면서도 그를 탄핵 한 점이다. 앞에서 동인을 소개할 때 홍가신이 동인임을 밝혔지만,  그가 조원을 탄핵한 것이 당이 달라서그랬을까?

사실 조원은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훗날 대학자로 알려진 조성기(趙聖期,1638~1689)의 증조부이다.  그는 별시문과에 급제해서 1575년정언(正言: 조선시대 사간원의 정6품 관직)이 되어 이 해 당쟁이 시작되자,  그에 대한 탕평의 계책을 상소하여 당파의 수뇌를 파직 시킬 것을 주장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심의겸의 아우인 심충겸을 이조정랑에 적극 추천하기도 하였고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였다.  이런 행적에서 볼 때 동인의 입장에서는 그를 서인으로 지목하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그 점도 홍가신의 탄핵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율곡과 정철의 태도이다.  율곡은 조원을 탄핵한홍가신이 사람을 굴복시키는 위력이 있다고 칭찬한 반면 정철은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율곡은 동서붕당을 조정하려는 입장 이었으므로 어떤 당의 편을 들기보다는 조정의 공론을 중요시하였으나 , 정철은 동인인 홍가신이 심충겸과 가까운 조원을 탄핵한 것이 자기당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 못마땅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의 기록에 따르면 정철이 동부승지가 된 바로 이때 동인은 이발(李潑)이 후배들의 종주(宗主)가 되어있었는데,  율곡이 정철에게 이발과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권하였다고 한다.  바로 실록의 이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곧 율곡이 ‘젊은 선비들과 교분을 두텁게 하라’는 것에서 젊은 선비란 이발과 동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의 홍가신의 일과 또 윤근수(尹根壽)형제와 김계휘(金繼輝)가 동인의 탄핵을 입어 물러나자, 정철은 더욱 편안히 있을 수 없어서마침내 이발과 논쟁을 벌여 다시는 화합할 가망이 없게 되었다고 전한다.  당시는 탄핵을 받으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이렇듯 대립하 는양 정치세력을 화해시키고 조정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정철 처럼 중도에 그 일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율곡처럼 개의치 않고 계속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도 여당과 야당이 극단적으로 정치상황을 이끌어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렇게 양측의 대립을 조정하는 정치가가 참으로 아쉽다.

심의겸과 김효원 시비의 발단


 

심의겸과 김효원 시비의 발단

 

다음의 글은『선조실록』1577년(선조10) 5월 27일의 기록을 근거로 재구성 해보았다.

의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붕당이 생기게 된 일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생긴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에는 이 두 사람의 해묵은 감정과 함께 당시 정치계의 역학 관계도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앞의 1575년(선조8)에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말처럼 두 사람에게 어떤 인격적인 결함이 있어서 서로 원한을 갖는 사이가 아니라, ‘말세의 풍속’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잘 말해 주고 있다.

물론 이 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 ‘말세의 풍속’을 도덕적 관점이 아닌 인간사에서 인간은 대개 자기가 속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향을 가지는 존재로 오늘날 관점에서 해석해서 볼때는 당연한 문제 이기도하다.  다만 두 사람의 개인적 문제가 역사적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고나 할까?

“평소 상대방의 잘못을 서로 말합니다.”

라고한 노수신의 말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있다.  그 잘못은 해묵은 감정 때문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게 된 것이 두 사람의 사소한 감정에서 출발했다는게 참으로 놀랍다.  물론 그 감정은 동시대 사람들의 감정을 아울러 촉발했다는 점에서 계속해 훗날 역사 속으로 사건이 일파 만파 전개될 수 있는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해묵은 감정이라는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애초 1572년(선조5) 오건(吳健)이 김효원을 이조전랑(吏曹銓郎)에 추천했으나, 심의겸이 반대하는 바람에 임명이 거부된 일이있었다. 이조전랑이란 이조에 속한 정5품인 정랑(正郞)과 정6품인 좌랑(佐郞)을 아울러 일컫는 말인데,  비록 관직은 높지 않았지만 언론기관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리임명, 당상관 이하의 관리추천, 재야 인사의 추천,  그리고 무엇보다 후임 전랑의 지명권을 가지고 있어서 인사상 요직에 속한 직책이었다.

그렇다면 심의겸이 김효원을 이조정랑에 임명하는 것을 반대한 이유가 무엇일까?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는데 심의겸이 반대한 이유는 과거 김효원의 행적과 관련이 있다.  바로 김효원이 명종 때의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자주 들락거렸다는 이유였다.  윤원형은 이른바 역사에서 소윤(小尹)으로 불리는 인물로,  중종의 계비 인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서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며,  역시 왕실의 외척이었고 대윤(大尹)으로 불리는 윤임(尹任)과 대립한 인물이다.  인종·명종 때에는 이런 외척들 간의 다툼으로 정치가 파행을 겪었다.

김효원이 이런 윤원형의 집에 들락거렸다는 점은 당시 피해를 입은 많은 선비들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1980년대 신군부에 가담했던 인물은 물론이고, 그 권력의 언저리에서 있었던 사람들도 훗날 국회의 인사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르는 일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심의겸의 반대는 요즘 말로 과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과도 관계가 있다. 심의겸은 당시 김효원이 어쩌면 과거의 끔찍했던 시절의 윤원형을 떠올리는 아이콘으로 만드는데 충분히 기여했을것이다.

애처롭게도 김효원에게 는그럴만한 사정,  곧 소싯적에 윤원형의 집에서 처가살이 하는 친구 이조민(李肇敏)이 있어서 그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지만, ‘오얏나무 밑에서 갓끝을 고쳐매지 않는다.’ 는 속담처럼 이렇게 오해를 사게 되어,  그 일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지 꿈에라도 생각해 보았겠는가?  억울한 감정 이야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쉽게 말해 비리를 저지른 인사의 친인척의 친구가 되어 그 집에 몇번 들락거렸다는 이유만으로 낙마를 한 꼴이라고 나할까?

그런데 따지고보면 김효원이 윤원형의 심복도 아니고 더구나 혜택을 받은 것도 없어서 그렇게 임명을 거부 할 정도로 큰 문제가 아닌데,  심의겸 한 사람이 반대한다고 해서 이조전랑에 임명되지 못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심의겸이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추리할 수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심의겸은 명종의 정비(正妃)인 인순왕후의 동생으로서 왕실의 외척이긴 해도 앞선 척신들과 다르게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외삼촌인 이량(李樑)을 숙청까지 하면서 당시 젊은 관원들을 보호해 준 인물이다.
훗날 송시열(宋時烈)의 기록에 따르면 심의겸은 명종·선조의 시기에 밝혀지지 않은 선비들의 억울함을 깨끗이 씻어 주었고,  또 뛰어난 인재는 끌어 올려서 맑고 밝은 정치를 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모두 심의겸의 공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러니까 적어도 당시까지 심의겸은 조정 안팎에서 일군의 선비들에게 칭송을 받고, 영향력이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심의겸은 기존 관료사회의 인사들이 추앙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나할까?

이런 심의겸이 반대하는 이조정랑 자리에 김효원이 임명되기에는 여론상 불리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임명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 1574년(선조7), 김효원은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보란 듯이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임명된 것은 김효원 나름대로 선비 사회에서 인정받는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이전에 좋지 못한 여론으로 한번 낙마한 사람을 기어코 그 자리에 오게하는 것 또한 이전의 나쁜 여론을 잠재우고 거기에 걸맞은 지원세력과 평판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째든 그런일로 그도 인간인 이상 심의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한편 처음에 김효원이 정랑이 되는데 반대했던 심의겸은 물론이고 그를 따랐던 많은 지지자들도 김효원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반면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당연히 제자리로 돌아온 것으로 여겼을 터이니,  자연스럽게 붕당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을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바로 한 해 뒤1575년(선조8),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정랑으로 추천되자, 김효원은 정랑의 관직은 왕실 외척들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이발(李潑)을 추천했다.  여기서 바로김 효원의 선택은 명분과 감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무리 묵은 감정에 충실해도 명분이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뜻대로 감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를 얻었더라도 상대방의 상한 감정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비록 자신과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승리라고 할 수 있지만,  큰 틀에서 볼 때 모두가 패배자이다.  바로 이 사건 뒤에 두 사람의 알력으로 인해 율곡이 의견을 내고 우의정이던 노수신이 선조의 허락을 받아,  두 사람을 외직으로 보낸 것을 두고 보면 그렇다.  더 나아가그 들로부터 당쟁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김효원이 심충겸이 이조정랑이 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면,  문제는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지만,  그 명분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기준이 되어 상대를 배척하는 근거가 되니,  김효원은 새로 진출한 신진관료들의 아이콘이 되었고 심의겸은 기존 관료들의그 것이 되어 붕당으로 치달을 여건이 성숙되었던것이다.

이렇게 일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처지에 따라 사회의 진보와 보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집단과 개혁을 주도하 는집단이 생기게 마련이어서,  붕당의 형성은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자연스럽게 등장 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또 다른 형태의 정치지형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김효원을 삼척부사에 제수하다


 

김효원을 삼척부사에 제수하다

 

선조수정실록』1575년(선조8) 10월 1일의기록이다.

조가 경연(經筵: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하는 곳에 나아갔다.  이이(李珥)가 성묘를 마치고 돌아와 선조를 뵈었다.
이이는 강론한 내용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조에게 말하였다.

“옛날에는 학문이라는 명칭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행하는 떳떳한 도리 그 자체를 모두 사람이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학문이라는 명목이 따로 없었고, 오직 군자(君子: 높은 학식과 덕행을 닦아 인격을 완성한 사람)만이 그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실천했을 뿐이었습니다.  후세에는 이 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사람으로서 실천해야 할 떳떳한 행실이 없어져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당연히 해야 할 것을 실천하는 사람을 학문하는 사람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런 명칭이 생기자 학자들은 세상 사람에게 지목을 받게 되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서 아무리 작은 허물이라도 찾아 내려하고,  걸핏하면 위선(僞善)이라 지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때문에 정말로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행적을 감추고 여기저기 다니더라도 학문 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이 후세의 큰 병폐입니다.  임금은 모름지기 학문을 주장하여 속된 사람들이 비방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학문이란 어찌 별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날마다 행하는 사이에 옳은 도리를 구하여 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선조가 듣고 나서 말하였다.

“오늘 추위가 심한데 나는 넓은 궁궐의 고운 모피(毛皮) 위에 있으니 어찌 견디지 못할까마는,  염려되는 것은 국경의 변방에서 나라를 지키는 병사들이 밤을 지새우며 딱따기(야경꾼이나 군졸들이 도둑이나 적을침 입을 막기 위해 경계하면서 두드리는 나무막대기)를 치는 것이다.”

이이가말하기를,

“전하의 뜻이 여기에 미치니 백성들 의복 입니다.  병사들만이 아니라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백성들도 반드시 염려해 주셔야 합니다.”

라고 하니, 선조가 이이에게 성혼(成渾: 당시의 문신이자 학자)의 안부를 물었다.

“그의 병은 끝내 벼슬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가?  그에게 고을의 수령을 시켜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이이가 듣고 나서 말하였다.

“고을 수령자리도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이가 지난번 ‘김효원에게 병이 있으니 변방의 관리로 임명하는 것을 다른 지역으로 바꾸어 달라’는 자신의 의견에 대하여 사죄하자, 선조가 말하였다.

“나는 김효원이 병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여 먼변방의 고을에 제수했던 것이다.  부제학(副提學:홍문관에 둔정3품 관직.  당시 이이의 관직이름)이 내게 한 말은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그 렇게 말한 것이지,  부제학에게 사사로운  뜻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김효원을 마땅히 다른 고을로 바꾸어 제수(除授: 임금이 직접 관리를 임명함)할 것이니 그대는 그리 알라.”

라고 하였다.
이에 이이가 예를 갖추 고물러갔다.  그 뒤 선조는 김효원에게 실제로병이 있었고,  또 이이의 생각에도 당을 지어 편을 가르는 것이 없었음을 듣고,  김효원을 다시 삼척부사(三陟府使)에 제수하였다.

이날 실록의 기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율곡과 선조의 대화를 가만히 보면 약간 엇박자가 나는 듯 동문서답하는 것 같지만, 이 또한 이 글을 읽는 묘미가 된다. 여기서 크게 세가지 문제가 등장하는데,  학문의 의미와  민생(民生)과 김효원을 외직(外職)에 제수하는 일이 그것이다.
우선 율곡이 말한 학문(學問)이라는 말이 요즘 사용하는 말과 상당히거리가 있다.

“학문이란 어찌 별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날마다 행하는 사이에 옳은 도리를 구하여 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율곡이 학문을 이렇게 정의한 것은 다른 곳에도 있다.  그가 쓴 『격몽요결』 에보면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또한 이상하고 별다른 사물이 아니다. 다만 아비가 되어서는 마땅히 사랑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하고(중략) 날마다 생활하고 활동하는 사이에 일에 따라 각기 그 마땅함을 얻 을따름이요, 마음을 현묘(玄妙: 이치가 깊고 오묘함)한데로 달려 신기한 효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율곡이 이렇게 학문을 일상생활 윤리적 실천 문제로 좁혀 말한데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걸 암시하는 말이 학문하는 사람을 걸핏하면 위선이라 지목하여 학문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것은 학문하는 것을위 선자로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아마도 성리학의 이론적인 부분을 탐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당시의 비난을 의식해서 한 발언으로 보인다 . 그러나 겉으로 그렇게 말해도『격몽요결』에 보면 과거 공부 못지 않게 이학(理學) 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끝나자 선조는 생뚱맞게도 추운 날씨에 변방에서 고생하는 군졸들의 일로 말꼬리를 돌린다.  율곡 또한 그런 마음을 놓치지 않고 민생을 돌보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말을 올리자,  선조는 할말이 없어 궁색해졌는지 엉뚱하게 성혼(成渾)의 안부를 묻는 말로 화제를 돌려 버린다.

이런 분위기는 아마 이 경연이 있기 전에 율곡이 선조에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서 선조가 율곡을 탐탁지 않게 여겨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율곡이 김효원을 부령부사(富寧府使)로 보내는 것을 재고해 달라고 선조에게 주청(奏請: 아뢰어 청함)을 드렸기 때문이다.  이 보다 앞서 김효원과 심의겸(沈義謙) 사이에 대립이 있어 율곡의 제안을 받아들인 우의정 노수신의 건의로 김효원을 부령부사로, 심의겸을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보내기로 결정 했기 때문이다.  같은 외직이지만 개성과 부령(富寧)은 서울 근처와 함경도의 변방이니,  이 결정은 누가 보더라도 불공평하다.  그래서 동인(東人)들의 반발이 컸다.  더구나 율곡의 말에 따르면 김효원은 병까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앞서 율곡이 김효원의 임지를 변방이 아닌 곳으로 바꾸어 달라고 주청했던 것이다.

이런 일로 선조는 율곡이 혹 어떤당(黨)을 편들어 사사로운 마음을 품고 김효원을 두둔한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오해가 풀리지 않아 두 사람의 말이 동문서답처럼 보였고,  선조는 자꾸 말꼬리를 돌린 것으 로읽어 낼 수 있다.

율곡 또한 총명한 분이라 선조가 이런식으로 나가니 스스로 뭔가 잘못 되었다는 눈치를 챈 뒤 앞서 김효원의 일로 주청한 것을 사과하니,  비로소 선조가 율곡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행간을 보면 두 사람 사이의 껄끄러움은 여전히 남고,  삼척 또한 변방은 아니지만 먼곳이다.  문제는 율곡의 이런 조정 안이 그의 의도와 별개로 김효원에게 더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에,  동인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또 당쟁이 격화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김효원과 심의겸이 부령부사와 개성유수로 삼다


김효원과 심의겸이 부령부사와 개성유수로 삼다

 

선조실록』1575년(선조8) 10월 24일의기록이다.

효원(金孝元)을 부령부사(富寧府使: 함경도 부령부의 수령)로, 심의겸(沈義謙)을 개성유수(開城留守: 고려의 옛 도읍지인 개성의 수령)로 삼았다.
이 당시 심의겸과 김효원이 서로 다투고 각자의 생각을 굽히지 않아 요란한 논쟁이 그치지 않자, 이이(李珥)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보고 말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덕을 닦는 선비로서 흑백과 선악이 서로 대립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또 정말로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겨 서로 해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말세의 풍속이 시끄러워 약간의 틈이 벌어진 것 뿐인데,  근거없는 뜬 소문이 두 사람을 이간질해 조정이 조용하지 못합니다.  두 사람을 모두 외직(外職: 지방관리)으로 내보내어 근거 없는 논쟁을 진정 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감께서 경연(經筵: 임금과 여러 신하들 앞에서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 자리에서 두 사람을 외직으로 보내는 이유를 주상께 말씀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수신이 의문을 가지고 말하기를,

“만약 경연자리에서 아뢴다면 더욱 시끄러워 질지 어찌 알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사간원(司諫院: 임금의 잘못을 아뢰고 관리의 비리
등을 밝히고 탄핵하는 관청.  또는 거기에 속한 관리)에서 이조(吏曹:  조선시대 행정과 인사를 담당한 기관 또는 그 책임자)를 탄핵하자,  노수신은 심의겸의 세력이 일방적으로 강하다고 여겨서

“근래 심의겸과 김효원이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말합니다.  이때문에 사람들의 말이 시끄러워 사림(士林: 선비사회)이 편치 못할 조짐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모두 외직에 보내는 것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라고 경연자리에서 말하니,  선조가 말하였다.

“두 사람의 어떤 일에 대한 말인가?”

노수신이 말하기를,

“평소 상대방의 잘못을 서로 말합니다.”

라고하니, 선조가말하였다.

“한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다같이 서로 공경하고 마음을 합쳐야 하는데도, 서로 헐뜯는다 하니 매우 옳지 못하다.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내보내라.”

이에 이이가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사이가 크게 나쁜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나라 인심이 경박하고 조급하여 말세의 풍속이 더욱 시끄럽게 만들고,  두 사람의 친척과 친구들이 각각 들은 말을 전달하여 고자질 하였으므로 마침내 어지럽게 된 것입니다.

대신(노수신을 가리킴)은 그것을 진정시켜야 하므로 두 사람을 외직으로 보내어 소문의 출처를 끊으려는 것이니,  전하께서도 반드시 이 일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에 드러난 간인(奸人: 간사한 사람 곧 간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소인(小人: 덕이 없고 사적인 욕심만 챙기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소인들이 이 두 사람이 붕당(朋黨: 학문과 이념에 따라 모이는 정치 집단)을 한다고 지목하여 둘 다 벌을 줄 계획을 한다면 사림(士林)에 화(禍)가 일어날 것이니,  이것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라고 하니, 선조가 말하였다.

“대신은 마땅히 진정시키도록 마음을 먹으라.”

이 기록에 는우리에게 이른바 당쟁(黨爭)으로 알려진 붕당 정치(朋黨政治)의 서막이 표현되어 있다.  붕당이란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집단을 말한다.  한 때 우리는 이런 붕당정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그것은 조선 사람들은 당파심이 강해서 조선은 당파 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합리화한 식민사관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현장에는 언제나 대립하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니 붕당의 존재 자체를 죄악시 여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얼마나 공정하게 행동 하느냐이다.  그러니 ‘페어 플레이’를 하지 않고 자기 당의 경제적 이익과 권력획득을 위해 권모술수를 써서 모함하거나 여론을 조작하여 상대를 비방하고,  자기 진영의 사람들만 등용시키고 상대를 배제하 는일이라면,  그런 붕당은 시정잡배의 모임과 무엇이 다르랴?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붕당의 출발은 관리들의 인사를 담당하고 추천하는 이조전랑(吏曹銓郞),  그것 도문신의 인사를 관리하 는이조정랑(吏曹正郞)의 자리를 두고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해묵은 원한에서 비롯하였다.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일의 형세를 보면 당연하다.  그 지위가 바로 정치세력을 확보하는 중요한 지렛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붕당이 자연적인 일이라면 어째서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을까?
사실 선조 이전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심하였는데,  대개 사화(士禍)를 통해 훈구파가 승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사실 사림파 와훈구파의 대립은 기득권 세력과 신진세력의 그것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양상이다.
심의겸은 명종의 정비(正妃)인 인순왕후의 동생으로서 왕실의 외척이니 기득권을 가진 기존 관료세력을 대표하고,  김효원은 젊은 관료로서 신진세력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관료사회의 요직을 놓고 두 사람이 대립하는 것은 당시 관료들에게는 대단히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더구나 심의겸은 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을 바로 그 인사를 담당한 요직인 이조정랑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으니,  신진 관료들의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김효원은 신진관료들로부터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칭송 받지 않겠는가?
반면 기존의 관료들 가운데는 과거 심의겸의 덕을 본 자들도 있었다. 명종 때 권세가 인윤원형(尹元衡)을 견제하기 위해 심의겸의 외삼촌인 이량(李樑)을 등용하였는데,  그는 지나친 권력욕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강직한 신하였던 이준경(李浚慶)을 몰아내기 위해 골몰하였다.  챈 젊은 관리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이량은 이들까지 숙청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것을 막고 나선 인물이 심의겸이다.

심의겸은 왕의 밀지(密旨)를 받아 이량을 탄핵하여 유배시키는데 앞장섰다.  외삼촌을 탄핵시켜 유배시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닌데,  그일로 심의겸은 곧은 선비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니 김효원 못지않게 심의겸을 따르는선비들도 많았다.
바로 여기서 율곡은 붕당이 생길 것을 경계하며 이렇게 갈등이 생긴 것은 두 사람의 인격때문이 아니라 ‘말세의 풍속’ 때문이라 말하는데,  말세의 풍속이란 무엇인가?  바로 자신의 출신 배경이나 정치·경제적입장에 따라 상대의 태도나 주장에 동조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뜻한다.  심의겸이나 김효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의 사태가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기록을 읽노라면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사가 다 가진자와 없는자,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갈등이 있기마련이니, 흑백 논리나 윤리적 선악의 잣대로 그 갈등의 존재 자체를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문제 는한 쪽이 권력이나 이익을 독점하면서 유발하는 갈등의 수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는 점이다.

대전의 벼락은 하늘의 경고이다


 

대전의 벼락은 하늘의 경고이다

 

인조실록』인조 11년(1633) 10월 19일의 일이다.

이 삼가 듣건대, 금년 7월 17일 밤에 벼락이 쳤는데 특히 대전 안이 혹심하였기 때문에 전하께서 매우 놀라 직언을 구하는 성지를 내리시면서 ‘법궁의 정전은 바로 임금이 정치를 하는 막중한 곳인데 전에 없는 이변을 갑작스럽게 여기에다 내렸으니, 하늘의 깊은 뜻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중략)

전하께서 반정으로 보위에 오르신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 들으셨던 모유(謀猷:원대한 꿈)와 경연에서의 강론,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올렸던 상소 가운데 격언과 지극한 담론으로써 ‘약과 침’이 될 만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매양 듣고 답할 즈음에 반드시 ‘깊이 생각하겠다.’하셨고, 반드시 ‘가슴에 간직하여 잊지 않겠다.’하셨는데, 전하께서 과연 그 들었던 바를 깊이 생각하여 마음에 얻은 바가 있으며, 말씀드렸던 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여 실천하신 바가 있습니까? 흐르는 물처럼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공이 굴러가듯 이 말을 듣는 것은 바로 제왕의 아름다운 덕인데, 전하께서는 과연 실지로 이러한 덕이 있습니까? 전하께서는 본래 천성으로 타고난 훌륭한 자질이 있는데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사업에 대해 어떠한 뜻을 가지셨습니까. 도덕과 사업을 반드시 성현처럼 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셨을 것입니다. 또 혼조(광해군 시대)의 어지러운 정국을 만나서 무릇 눈으로 보고 탄식하고 마음에 격분하여 강개하신 바가 필시 심상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반정 이후로 담당하고 파악하면서 처음부터 지극한 덕과 큰 공을 이루리라 스스로 격려하지 않으셨습니까. 옛날 사람은 하루를 공부하면 하루만큼 공부의 효과가 있고 1년을 공부하면 1년만큼 공부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10년 중에 성취하신 것과 힘써 얻으신 것을 되돌아볼 때 과연 새로 즉위하실 때 가졌던 마음과 부합되고 그전에 뜻하셨던 사업을 거의 다 달성하였다고 여기십니까. 요순의 마음을 본받지 않으면 다 격이 낮은 심법(心法)이며, 하․은․주 3대의 정치를 본받지 않으면 모두 구차한 정치입니다. (중략)

그러나 변괴를 당하여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을 어찌 임금만 가져야 하겠습니까. 무릇 천둥이 치면 초목과 금수까지도 진동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더구나 사람은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천지 사이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과 일이 있기 때문에 모두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닦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왕좌에 있으면서 하늘을 대신하여 일을 하는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특히 임금은 그 도를 맡아 높은 자리에 있으므로 반드시 몸소 먼저 수양하고 반성해야 아랫사람들이 누구나 분발하여 진작될 것입니다. 오늘날 만일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려고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날마다 큰 천둥소리를 듣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략)

1633년(인조 11)에 임금이 정사를 보는 궁궐 대전에 벼락이 치자, 인조가 이러한 기상이변을 당하여 신하들에게 직언(直言)을 구하는 분부를 내렸다. 조선시대에는 가뭄과 홍수, 지진과 이상기후 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임금은 근신하고 반성하는 뜻에서 정전을 피하고, 음식을 줄이며, 죄수를 방면하고 신하들에게 구언(求言)을 하였다. 이때는 관료들이 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이를 용납해야 했다.

이 구언교지에 응해서 당시 부호군(副護軍) 장현광(張顯光:1554~1637)이 상소를 올린 것이 위의 글이다. 장현광은 조선 중기 산림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이조참판 등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하는 등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학문적 연원은 퇴계 이황에 가까웠으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율곡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유성룡, 정경세 등과 더불어 영남의 수많은 남인 학자들을 길러 냈다.

장현광은 이 상소문에서

“궁궐의 대전에 벼락이 친 것은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여 경고를 보인 것

이라고 단정하고, 인조에게 반성하고 수양하는 한편 분발하고 떨쳐 일어나 올바른 정치를 펴도록 건의하였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보면 벼락 치는 일이 그다지 두려운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시대만 해도 이러한 기상이변을 하늘과 인간이 소통하는 매개체로 보았다. 따라서 벼락이 치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인조는 장현광이 올린 상소를 읽고 답변하기를,

“상소를 읽고 전후 정성스러운 경의 뜻을 가상하게 여기었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스스로 채찍질해 가며 무언가 잘 해보려고 하였지만 재주와 학식이 미치지 못하여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밤이 깊도록 잠 못 이룬 채 탄식했을 뿐이다. 경이 말한 교훈적인 말은 하나도 격언과 지론이 아닌 것이 없으니 감히 자리의 오른편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사실 가뭄과 홍수는 거의 해마다 있는 일이고, 일식과 월식은 주기적인 현상이며, 그밖에 이상기후, 혜성, 태풍, 화재 등의 재변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 허다한 천재지변에 대해서 임금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불합리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임금이 천명을 받은 존재라는 천명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재이(災異)는 임금이 행하는 정치와 행실에 있어서 잘잘못을 반성하고 옳은 길로 나가도록 하는 하늘의 힐책 또는 경고라고 간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허구성을 잘 알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 선비의 기상을 보이다.


 

조선 선비의 기상을 보이다.

 

선조수정실록』선조 24년(1591) 3월 1일의 기록이다.

은 생각건대 선비는 자신의 말이 쓰여지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강상(綱常:조선시대의 윤리인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질 지경이면 혹 분연히 일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중략)

신이 삼가 오늘날의 사세를 헤아려 보건대, 국가의 안위와 성패가 매우 긴박한 상태에 있으니 참으로 불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히 왜국 사신의 목을 베고 중국에 알린 다음 그의 사지(四肢)를 유구(오키나와) 등 여러 나라에 나누어 보내, 온 천하로 하여금 다함께 분노하게 하여 왜적을 대비하도록 하는 일만이 전의 잘못을 보완하고 때늦은 데서 오는 흉함을 면할 수 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속히 잘 생각하시어 사람이 못났더라도 말만은 버리지 말고 종묘와 사직의 대계를 위하여 지체하지 않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중략)

소원(疏遠)하고 천박한 신이 감히 분수에 넘친 일을 청하였습니다만 시사(時事)가 매우 급박한데 미리 대비하지 않아 패망당할까 두려웠습니다. 이에 중국 조정에 변란을 알리는 소장의 초안을 잡았고 유구국의 국왕과 일본과 대마도에 있는 유민(遺民) 중 호걸들에게 적의 사신을 체포하게 할 격문의 초안을 잡았으며, 영남과 호남의 왜구에 대한 대비책에 대해서도 모두 일에 따라 차기(箚記: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의 하나)하여 삼가 별지(別紙) 7폭에 갖추어 기록해서 소매 속에 품고 있습니다. 사대․교린에 대한 법규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사리가 정직하지 못하면 도를 드러낼 수 없다고 한 맹자의 훈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건대 이렇게 한다면 사리가 절로 밝아지고 말도 정직하고 의(義)도 장엄하게 되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소원한 몸으로 참람스러워 감히 바로 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혹 전하께서 보잘 것 없는 말을 곡진히 받아 주시어 즉시 세숙과 자산(정나라 때 어진 신하) 같은 사람을 시켜 토론하고 윤색하게 하여 승문원으로 하여금 아침에 옮겨 적어 점심 때 봉하게 한 다음 특별히 중신을 파견하여 달려가서 아뢰게 하되 행장을 꾸리는 일순(一旬)안에 먼저 1본을 등사해서 통역관 1인을 붙여 주어 신으로 하여금 먼저 요계(요동지역)에 알리고 나아가 북경에 알리게 한다면, 중국 조정의 임금과 신하들이 우리가 밤낮으로 달려와 제때에 고하는 정성에 감동되어 두루 여러 진(鎭)과 여러 나라에 효유하여 미리 방비하여 은밀히 조처하도록 하고 천하가 다 같이 분노하여 기어코 이 왜적을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 없게 하소서. 그러면 신은 길에서 죽더라도 늙은 어미는 강회(江淮:양자강과 회수)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치욕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완악한 기운이 풀어지지 않아 하늘의 해가 항상 음산하므로 신은 국가를 위한 걱정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통분을 견딜 수가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받들어 올립니다.

 

이 상소문을 올린 사람은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이다. 조헌은 1544년(중종 39)에 태어나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으며, 1571년 홍주목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 이지함과 교유하고 그의 권유에 따라 성혼과 이이를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았다. 1574년에는 질정관(質正官:글이나 제도 등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오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9년 동인의 전횡과 시폐를 지적하다가 탄핵을 받아 길주에 유배를 당하였으나, 그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귀양에서 풀려났다. 1591년 조선에 온 겐소[玄蘇] 등의 일본사신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청하여 조선침략의 속셈을 드러내자, 고향인 옥천에서 상경하여 대궐 앞에서 일본 사신의 처단을 상소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방력의 강화를 주장하는 위의 상소를 올렸다.

당시 일본의 상황은 약 120년에 걸친 전국시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통일을 이루어 정국이 안정되고 국력이 크게 신장된 시기였다. 그는 일본 국내가 통일되자 그동안 어떤 통치자도 시도하지 못했던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자 시도하였다. 또한 토지를 몰수당한 다이묘나 지방 호족세력의 불만이 높아 해외로 관심을 돌리게 할 목적이 있었고, 상업의 발달로 성공한 이들은 해외무역의 필요성 때문에 전쟁에 찬동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에서도 일본의 기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통신사로 황윤길과 김성일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통신사 일행이 귀국하여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보고하였다. 나중에 김성일은 이러한 발언에 대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어쨌든 당시 조선의 정부는 동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동인인 김성일의 보고를 신뢰하였다. 일본의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는 이미 민간에까지 유포되고 있었으나, 정부 차원의 대책이 나오지 않자 조헌이 이와 같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조헌이 올린 이 상소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록에는 조헌의 상소 뒤에 사관의 평을 싣고 있는데,

“조헌이 대궐 아래 엎드려 상소에 대한 비답이 있기를 기다렸으나 내려오지 않자 머리를 돌에 찧어 피가 얼굴에 가득하여 보는 사람들도 안색이 위축되었다. 그래도 비답이 내려오지 않자 이 상소를 밀봉하여 올렸으나 승정원에서 받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조헌의 상소를 진달했는데도 승정원에서 받지 않고 있는데 상소의 내용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언로가 막히는 단서가 있게 되니 담당승지를 파직시키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추고(推考:상소문의 내용을 따지고 살핌)만 하도록 윤허하였으므로 조헌은 통곡하고 물러갔다.”

고 기록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은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규합하고, 영규대사 등의 승병(僧兵)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어서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으려다 금산전투에서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율곡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이이의 학문을 계승하였던 조헌의 이 상소문은 조선 선비들의 기상을 유감없이 드러냄으로써 후대 선비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율곡, 1만자의 상소를 올리다


 

율곡, 1만자의 상소를 올리다

 

율곡전서』제5권 소(疏)에 기록된 「만언봉사」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요약해본다.

“신은 삼가 아룁니다. 정사는 때의 알맞음을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성실한 노력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니, 정사를 하면서 때의 알맞음을 모르고 일을 당하여 성실한 노력에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스러운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총명 영의하시고 선비를 좋아하고 백성을 사랑하시매, 안으로는 음악과 주색을 즐기는 일이 없고 밖으로는 말달리고 사냥을 좋아하는 일이 없으시니, 옛날 군주들이 자신의 마음과 덕을 해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노성(老成)한 신하를 믿어 의지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 쓰며, 곧은 말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공론이 잘 시행되므로 조야(朝野)가 부푼 가슴을 안고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고대하고 있으니, 기강이 엄숙해지고 민생이 생업을 즐겨야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기강으로 말하면, 사사로운 정을 따르고 공도를 등지는 것이 예전 그대로이고 명령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 그대로이고 백관이 직무를 태만히 하는 것이 그대로이고, 그 민생으로 말하면 집에 항상 생산이 없는 것이 예전과 마찬가지이고, 안주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것이 마찬가지이고, 궤도를 벗어나 사악한 짓을 하는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일찍이 이를 개탄하고 삼가 그 까닭을 깊이 찾아내어 한번 전하께 말씀드리려고 하면서도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는데, 엊그제 삼가 전하께서 천재(天災)로 인하여 대신에게 내리신 전교를 보니, 전하께서도 크게 의아해 하시고 깊이 탄식하시어 이 재변을 구제할 계책을 들어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뜻있는 선비가 할 말을 다할 기회인데, 애석하게도 대신들은 지나치게 황공하고 불안해 한 나머지 할 말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이 심원하여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우나 역시 임금을 사랑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역사를 두루 살펴보건대, 옛날 명철하고 의로운 임금이 큰 사업을 이룰 수 있는데도 정사가 혹시 닦여지지 않으면 하늘은 반드시 견책을 내보여 놀라게 하였으며, 하늘과 관계를 끊은 자포자기한 임금에 있어서는 도리어 재변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재변이 없는 재변이야말로 천하에 가장 큰 재변인 것입니다.(중략)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자세히 보시고 익히 검토하시며 신중히 궁구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한 뒤에 이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채택하신다면 그 진행을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정성껏 그것을 시행하게 하고 확신을 갖고 지켜 나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보수적인 세속의 견해로 인하여 바뀌게 하지 말고, 올바른 것을 그르다 하며 남을 모함하는 말로 인하여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3년이 지나도록 나랏일이 여전히 부진하고 백성이 편안해지지 않으며 군대가 정예로워지지 않는다면, 신을 기망(欺罔)의 죄로 다스리어 요망한 말을 하는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1574년(선조 8) 1월 당시 천재지변이 자주 발생하자 선조는 대신들에게 이러한 천재지변에 대응하는 계책을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이에 응하여 1만자가 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린 것이 바로 「만언봉사」이다. 이때 율곡은 나이 39세로 승정원 우부승지였다.

율곡은 조선왕조 건국 이후 200여 년이 지난 당시를 그동안 나라 전체에 많은 폐단이 쌓인 위기의 시대로 규정하고 국가 운영체제의 혁신을 통하여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지 않으면 나라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따라서 정치․경제․민생․군사 문제 등 국정 운영의 모든 분야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역사적 사례와 문제의 진단, 그리고 철저한 원인 분석에 의거하여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율곡의 시무책이 드러나 있는 글 가운데 「만언봉사」가 특별히 중요한 까닭은 그가 추구한 개혁의 두 가지 핵심어가 가장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가 시의(時宜), 즉 ‘시기에 알맞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공(實功), 곧 ‘실질적인 공적을 얻는 것’이다. 율곡은 「만언봉사」를 통해 ‘적당한 시기’와 ‘실질적인 효과’ 이 두 가지야말로 개혁을 성공시키는 핵심임을 밝혔다.

율곡은 상소의 말미에서 자신의 건의를 채택하여 국정을 개혁한다면 반드시 3년 이내에 새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상소를 읽은 선조는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요순시대를 만들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어찌 걱정을 하겠는가.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다만 일이 혁신에 관계되는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 이 상소문을 여러 대신에게 보여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고 상소문을 등서하여 올리라.”

고 하면서 끝내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만약 당시 선조와 조정에서 율곡의 상소를 채택하여 개혁 정치를 실행하였다면, 아마도 조선왕조가 제2의 도약을 이뤄 임진왜란과 같은 초유의 국난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선조를 움직여 경장을 이끌어 내어 토붕와해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율곡의 진심 어린 노력은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율곡의 이 「만언봉사」는 조선왕조 오백년사에 있었던 상소문 중의 상소문으로 후대의 정치인과 학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아직도 율곡의 이 상소문은 유효하다고 할 것이다.

자연재해에서 임금의 길을 묻다


 

자연재해에서 임금의 길을 묻다

 

중종실록』중종 13년 무인(1518) 5월 15일의 일이다.

시(酉時)에 세 차례 크게 지진(地震)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뢰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城堞: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고로(故老)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八道)가 다 마찬가지였다.

중종 : “오늘의 변괴는 더욱 놀랍고 두렵다. 내가 사람을 쓰는 데 항상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친정(親政)이 끝나자 곧 변이 일어났고 또 오늘의 친정은 보통 때의 친정과는 다른데도 재변이 이와 같으니 이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 처음과 같이 지진이 크게 일어나 전우(殿宇)가 흔들렸다. 상이 앉아 있는 용상은 마치 사람의 손으로 밀고 당기는 것처럼 흔들렸다. 첫 번부터 이때까지 무릇 세 차례 지진이 있었는데 그 여세가 그대로 남아 있다가 한참 만에야 가라앉았다. 이때 부름을 받은 대신들의 집이 먼 사람도 있고 가까운 사람도 있어서, 도착하는 시각이 각각 선후(先後)가 있었으나 오는 대로 곧 입시하였다.

영의정 정광필 : “지진은 전에도 있었지마는 오늘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 등이 재직하여 해야 할 일을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

홍문관 저작 이충건(李忠楗) : “근래에 재변이 계속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진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어찌 오늘날같이 심한 것이야 있었겠습니까? 조정 정사(朝廷政事)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해(利害)·질병(疾病) 등을 진실로 강구해야 합니다.

신과 같이 어리석고 천한 자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기강이 설 수 있을 것 같으면서 끝내 서지 못하는 것은, 하민(下民)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대신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재행(才行)이 쓸 만한 자를 취인(取人)하는 일에 대해 조정 의논이 이미 정해졌고, 상께서도 성명(成命)이 계셨습니다.

대신이 진실로 시행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 시행할 수 없는 까닭을 변명해야 할 것이요, 부득이 시행해야 할 것이라면 마땅히 속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끌면서 좀처럼 봉행할 뜻이 없으니, 상께서 명이 계신데도 대신이 이럴진대 하물며 그 아랫사람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기강이 서지 않은 것은 대신이 스스로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지진에 대한 기록은 매우 많다. 문헌 기록 가운데 지진에 관해 체계적인 내용을 담은 최초의 책은 『삼국사기』이다. 서기 2년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있었던 지진을 시작으로 모두 107건의 지진을 기록하고 있는데, 1년 평균 0.1회 정도 발생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는 지진 기록은 매우 간단하고, 발생 건수 또한 비교적 적다. 그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신라의 경주, 백제의 위례성과 부여, 고구려의 국내성과 평양 등 삼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지진만 기록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고려시대의 지진에 관한 기록은 조선전기에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타나 있다. 475년간 194건의 지진이 기록되어 있어서 1년 평균 0.4회 정도 일어난 것으로 보고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와 달리 수도에만 국한하지 않고 보다 체계적으로 지진을 관측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1863년(철종 15)까지 472년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지진 건수는 무려 1,967건에 이른다. 대략 1년에 네 번꼴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보다 빈도가 훨씬 높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지진 발생이 증가했다기보다는 지진에 대한 관측이 정밀해지고, 보고 체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 천문 현상과 지진을 관측하는 관상감이라는 관청을 두었고, 관상감에서는 천재지변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관상감일기』를 남겼다.

위의 중종실록 기록은 1518년 5월 15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큰 지진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 차례 큰 지진이 일어나 담장과 성첩이 무너졌으며, 임금이 정사를 보는 전각의 지붕이 요동치고 용상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지진의 발생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해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그 원인을 정치에서 찾으려 하였다. 동양의 재이관(災異觀)에서는 세상의 현상을 천도(天道)의 실현이라 보았다. 임금의 책무는 하늘의 이치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자연재해의 발생은 하늘의 이치를 구현하는 임금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며, 이 경우 왕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실천방법으로 음식 가지 수 줄이기, 정전(正殿) 피하기, 죄수 풀어 주기 등이다.

또한 궁궐 내의 궁녀의 원한이 하늘에 미친 것이라 생각하여 궁 밖으로 내보내기도 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하들에게 국정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결국 자연재해는 왕을 하늘의 대리자로 인정하는 조건이며, 반대로 신하들이 왕에게 정치적 조언을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지 8년째 되는 1574년 정월 초하룻날의 『선조실록』의 기사에는

“재변(災變)으로 인해 임금께서 정전(正殿)을 피하고, 고기반찬을 물리치고 음악을 듣지 않았다.”

고 기록하였다. 날이 가물고,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리는가 하면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지진이 일어나는 등 자연재해와 변고가 잇닿자 선조는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선조가 신하들에게 어려운 시국을 타개할 계책을 구한다는 교지를 내리자, 율곡은 11,600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글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이 글이 ‘1만자로 이루어진 상소문’이라는 뜻을 담은 「만언봉사」이다.

율곡이 혹독한 신입관료의 신고식을 없애다


 

율곡이 혹독한 신입관료의 신고식을 없애다

 

경연일기(經筵日記)』1569년(선조 2) 9월의 기록이다.

사관(四館:성균관,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의 신진(新進:새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을 침학(侵虐)하는 풍습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이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교화를 없애는 폐습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처음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을 사관(성균관,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에서 신래(新來)라 지목하여 곤욕을 주고 괴롭히는데 하지 않는 짓이 없을 정도입니다. 대개 호걸의 선비는 과거 자체를 그리 대단히 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갓을 부수고 옷을 찢기우며 흙탕물에 굴러 체통을 잃고 염치를 버린 뒤에야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부)에 오르게 된다면 호걸의 선비치고 누가 세상에 쓰이기를 원하겠습니까. 중국에서는 새로 과거한 사람을 접대하는 데 매우 예모(禮貌)를 지킨다 하는데 만일 이 소문을 듣게 되면 반드시 오랑캐 풍속이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침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인가.”

이이가 대답하기를,

“글에 전하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고려 말년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여 거기에 뽑힌 사람이 모두 귀한 집 자제로 입에 젖내나는 것들이 많았으므로 그 때 사람들이 분홍방(粉紅榜)이라 지목하고 분개해 하여 침욕(侵辱)하기 시작하였다 합니다.”

임금이

“이는 개혁하여야 할 일이다.” 하고 드디어 통절히 개혁하도록 명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매스컴을 통해 대학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과도한 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고를 접하곤 한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 대학 신입생 환영회처럼 혹독한 신고식 문화가 있었다. 신참례(新參禮)라는 것이 그것으로, 관직에 들어온 신입에게 가하는 집단 괴롭힘이었다. 신참례는 조선 건국 초부터 꾸준히 전해 내려왔고, 너무 과한 탓에 종종 사회문제가 되곤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신래(新來)라 불렀고, 신래가 선배 관원들 앞에서 피해갈 수 없는 신고식을 면신례라고 하였다. 조선의 신참들은 오늘날의 새내기보다 더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오늘날은 신참의 신고식 비용을 주로 고참들이 대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신참들은 허리가 휠 정도의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면신례를 해야 했고, 육체적․정신적 가학도 감수해야 했다. 심한 경우는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15세기의 학자 성현(成俔)이 편찬한 『용재총화』에도 이러한 신참례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관료의 비리를 감찰하여 탄핵하는 기관인 사헌부는 오늘날 검찰과 같은 기능을 가진 기관으로 이른바 군기가 센 곳이었다. 사헌부에서는 새로 들어 온 사람을 신귀(新鬼)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을 보였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 한 긴 나무를 신참한테 들게끔 하는데, 이를 경홀(擎笏)이라 했다. 이 나무를 들지 못하면 신참은 선배에게 무릎을 내놓아야 했으며 선배가 먼저 주먹으로 무릎을 때리고 이어 윗사람부터 차례로 내려가며 때리도록 했다. 또 신참에게 물고기잡기 놀이를 하게 하는데, 신참이 연못에 들어가 사모(紗帽: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로 물을 퍼내서 의복이 모두 더럽혀지게 했다. 또한 거미 잡는 놀이라 하여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질러 두 손이 옻칠을 한 것처럼 까맣게 되면 물에 손을 씻게 한 뒤 그 물을 마시라고 하니 그 물을 먹고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밖에도 별명을 붙여주고 이를 흉내내게 하는 ‘삼천삼백’, 관련 있는 벼슬 이름을 외우게 하되 바로 읽어내리는 ‘순함(順銜)’, 거꾸로 읽어 올라가야 하는 ‘역함(逆銜)’, 즐거운 표정을 짓게 하는 ‘희색(喜色)’, 괴로운 표정을 짓게 하는 ‘패색(悖色)’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그때마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얼굴에는 오물을 칠하게 하는 등 신참을 광대로 만들어 희롱하였다. 겨울에는 물에 집어넣고 여름에는 볕을 쬐게 하는 육체적 가학은 물론이요, 뜻에 맞지 않으면 매질까지 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신래들을 침학하고 괴롭히는 습속이 워낙 다양해서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러한 신참례의 폐단을 막고자 조선시대의 헌법인 『경국대전』은 ‘신래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자는 장(杖) 60대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암암리에 관습화돼 이어진 신참례의 습속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율곡 이이는 이러한 풍속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율곡은 ‘구도장원공’이라고 일컬어지듯이 과거에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행실도 모범적인 반듯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신참례라는 명목으로 신참을 괴롭히는 선배들의 생리가 누구보다도 싫었을 것이다. 실제로 율곡은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소속된 후 선배들에게 공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율곡은 신참례가 없어져야 할 악습이라고 생각하였고, 위의 『석담일기』에서 보는바와 같이 신참례 혁파를 건의하여 마침내 성사시키게 되었다. 율곡은 신참례의 폐단을 지적한 뒤 선조가 신참례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묻자, 고려후기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관직을 차지하자 이들의 버릇을 고쳐주고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원래의 신참례는 부정한 권력으로 관직에 오른 함량 미달의 인물들에게 국가의 관직은 함부로 차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은연중 알려주고자 시도되었지만, 율곡이 살던 시대에는 그 애초의 취지는 잊힌 채 그저 하급자를 괴롭히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사회 문제화 되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율곡의 입장에서 이러한 풍습은 반드시 없어져야 할 악습이었기 때문에 이의 혁파를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