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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시대 선비 이야기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시대 선비 이야기

 

명가 삼봉 정도전

『대동야승』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삶을 알아보는 사료는 정사로서 『왕조실록』 등이 있으나, 야사로서 개인이 기록한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아니 세밀한 삶의 모습을 살피는 데는 후자가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역사 속 유교 이야기’의 이번 시리즈는 야사를 중심으로 하는데, 그 주제가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로 그 첫 번째 순서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 1342~1398)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동야승』은 한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여러 저자들이 편집하거나 기술한 총서의 이름이다. 책의 내용에 등장하는 사건이 전개되거나 인물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조선 초부터 인조 때까지이다. 해당하는 문헌은 너무 많아 여기에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고 인용하는 곳에서 저자와 서명을 밝히겠다. 또 각 문서의 내용에는 서로 중복된 것도 있는데 나중 기록이 먼저 것을 보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원본은 72권 72책의 필사본으로 편찬자나 편찬 연대는 미상이다.

 

이성계를 만나다

정도전(삼봉으로 약칭함)이 없었으면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반문해보는 것은 전혀 무리한 가정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을 건국하는 데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선의 제도와 이념과 종교·문화 등을 고려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는 왜 역성혁명을 꿈꾸었을까?

삼봉은 경상도 봉화(奉化)의 향리 출신인 정운경(鄭云敬)의 맏아들이었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진출하면서 비로소 사족(士族)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염의선생(廉義先生)’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처럼, 그의 아버지는 청렴하고 정의롭게 처신하여 집안이 매우 가난해서 처자가 추위와 배고픔을 면하지 못했다고 한다.

삼봉은 그런 환경에서 자라 큰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고, 늘 가난에 쪼들렸다. 그래서 평소에 먹는 문제에 대해 신경을 썼는지 이런 기록이 있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먹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으로 하루라도 먹지 않을 수 없는데, 또한 하루라도 구차하게 먹을 수 없으니, 먹지 않으면 생명을 해치고 구차히 먹으면 의리를 해친다.”는 그의 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삼봉은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親元) 정책을 반대하다가 9년간 유배와 유랑 생활을 했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그 때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해동잡록』에서는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우왕 초기에는 어떤 일로 회진현(會津縣)에 귀양 갔으며, 뒤에 삼각산(북한산)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학자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고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일’이란 바로 친원 정책을 반대한 일이며 ‘회진현에 귀양 가고 삼각한 아래 집을 지었다’는 것은 전라도 나주에 속한 부곡(部曲)으로 유배가고, 그 뒤 삼각산과 경기도 부평과 김포를 전전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때를 가리킨 말이다. 이 유배 생활에서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가 있다. 그 내용은 다른 총서인 『동문선(東文選)』에 보인다.

먼저 아내가

 

“당신은 평일에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여 아침에 밥을 짓는지 저녁에 죽을 쑤는지 몰랐소. 집이 곤궁하여 한 섬 곡식도 없어 아이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울부짖을 때, 내가 안살림을 맡아 끼니를 겨우 이어간 것은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여 입신양명해서 처자식이 바라보고 힘을 얻고 가문의 영광을 일으킬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오. 마침내 나라의 형법에 걸려 이름이 욕되고 자취가 깎여서 몸이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 독한 장기(瘴氣 :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를 마시게 되었소. 형제가 나가쓰러지고 가문이 분산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렇게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현인군자도 정말 이렇게 되는 수가 있나요?”

 

라는 편지를 보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도 남편의 출세를 믿고 기다렸는데, 되레 죄를 얻어 유배를 당해 난감하다는 거였다. 삼봉이 보낸 답장의 요지는 이렇다.

 

“부부의 도는 한번 혼인을 하게 되면 종신토록 변하지 않으니,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지 나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이 이치는 허망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서 얻은 것이다.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할 것이니 여기에 어찌 다른 일이 있겠는가? 각각 자기 직분을 다할 따름이다.”

 

삼봉의 답장은 아내를 신뢰하나 사대부 부부의 내외라는 직분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시사점은 ‘나는 나라를 근심한다’는 말로서, 그 기대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혁명을 꿈꾸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이런 유배와 유랑 생활과 당시 재상들의 핍박에 견대다 못해 1388년 42살 때 드디어 동북방의 군사지휘관으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다.

사실 그가 당시 재상들의 핍박을 받은 데는 정책의 노선 차이도 있지만, 또 하나는 출신 신분 때문이기도 한다. 그것은 그의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였다. 이같이 당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교의 타락, 그리고 민생의 어려움 외에 삼봉 자신이 신분 차별을 당한 것도 혁명을 꿈꾸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처지와 상황에서 혁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추가 이성계를 만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해동잡록』에서 이렇게 전한다. 삼봉이 일찍이 이성계가 있는 동북면에 갔었는데, 군대의 호령이 분명하고 엄숙하며 병졸의 대오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가서 조용히 말하기를,

“장합니다.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이룩하지 못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이성계가

“무슨 말인가?”

라고 하자 삼봉이 둘러대며 말하기를,

“동남방에서 왜적을 친다는 말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를 시작으로 삼봉은 57세에 죽을 때까지 15년간 이성계를 등에 업고 조선 왕조 창업이라는 거대한 혁명 사업을 이끌어 갔는데, 앞서 말한 9년 동안의 유배와 방랑의 세월 속에서 이 혁명의 구상을 마쳤던 것으로 보인다. 위화도회군 직후 그는 전제(田制) 개혁을 주동하였고 군권을 장악하자, 혁명의 낌새를 알아차린 보수파의 반격으로 잠시 유배를 당하였으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정권의 핵심 인사로 등장하였다.

훗날 이성계가 삼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는 『해동잡록』에 보인다. 곧 태조가 일찍이 경신일(庚申日) 밤에 정도전과 여러 훈신(勳臣)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태조가 삼봉에게,

“과인이 여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경(卿)의 힘이요.”

라고 한 말에 보인다.

 

혁명가의 자격과 병법

혁명은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모두 성공하는 일도 아니다. 역사상 수많은 쿠데타나 정변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으나, 대부분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 주체가 혁명 과정의 치밀한 계획과 내세우는 이념과 구체제를 대신할 만한 구체적 방안이나 방책의 마련에 미흡했고, 혁명 이후의 실천 과정이 미숙하여 구세력에 의해 반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준비 없는 혁명은 성공하지 못한다.

삼봉은 그렇지 않았다.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였다. 찬술(撰述)한 문헌만 보아도 그가 혁명을 위하여 얼마나 준비했는지 알 수 있다. 한갓 무부(武夫, 군인 혹은 무인)가 총칼만 들고 설쳐댄다고 혁명이 완수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그가 공부하여 찬술한 문헌의 종류가 너무 많아 다 거론하기 힘들지만 대표적인 것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우선 유교 국가를 만들기 위한 이념 투쟁의 일환으로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한 『심문천답(心問天答)』·『심기리편(心氣理篇)』·『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이 있고, 국가의 통치에 관한 것으로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경제문감별집』 등이 있다. 여기서 고전에서 말하는 ‘경제’는 오늘날 ‘economy’가 아니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줄인 말로서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안이다. 또 역사서를 편찬하고, 문학·의학·군사학·예술과 관련된 저술도 있다. 이렇듯 그는 실천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구비하여 혁명가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것은 그가 병법에도 능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우리나라 형편에 맞는 독자적인 전법을 개발하였다는 점이다. 아래는 『해동잡록』에 수록된 병법에 관한 몇 가지 사례이다.

 

〇공격하지 않고 성을 지키는 경우 : ①적군이 정예병일 때 ②우리의 원병이 장차 오게 되어 있는 경우 ③성이 튼튼하고 방어할 기구를 갖추었을 때 ④적의 군사를 지치게 하려는 경우 ⑤적의 변동을 관찰하려고 할 때

〇전투를 꼭 피해야 할 경우 : ①적의 토지가 넓고 사람이 많을 때 ②적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여 혜택이 골고루 퍼졌을 때 ③적이 벌을 주고 용서하는 일에 믿음이 있고 출발과 정지가 적당할 때 ④적의 행군하는 대오와 수레의 대열을 현명하고 유능한 지휘관에게 맡겼을 때 ⑤적의 군사가 명령에 익숙하고 무기가 정밀하고 날카로울 때 ⑥적의 사방 이웃 나라의 도움이 있고 큰 나라가 와서 도울 때

〇적을 헤아리는 방법 : ①적이 공격할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군사를 더 낼 수 없다. ②적의 정세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서약(誓約)을 받아들일 수 없다. ③적의 장수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먼저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 ④적의 군사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먼저 진을 칠 수 없다.

〇적을 이기는 데에 3가지 헤아릴 점 : ①적의 식량을 헤아려서 식량을 공략하되 식량이 보존되었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②설비를 헤아려서 설비를 공략하되 설비가 보존되었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③적의 수효를 헤아려서 집중된 것을 공략하되 집중된 것이 정연하면 공격하지 않는다.

〇군대를 부리는 8가지 방법 : ①재물을 모아 군수에 사용함 ②공장(工匠)을 세워 병기를 만듦 ③기구를 제정하여 무기가 튼튼하고 날카로우며 기(旗)와 휘(麾 : 대장의 지휘기)가 선명하게 함 ④군사를 가려낼 때 용감한 자와 겁내는 자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를 골라냄 ⑤명령을 바르게 하여 호령이 엄명하고 상벌하는 데 반드시 미덥게 함 ⑥복종하는 것을 익히는 것으로 금지할 일과 금(金 : 퇴각을 알리는 징소리)과 고(鼓 : 전진을 명하는 북소리)의 절차를 밝히고, 나아가고 물러서고 치고 찌르는 기술을 익힘 ⑦지세의 험하고 평탄한 것과 주장(主將)의 능숙하고 무능한 것과 군사들이 용감하고 겁내는 것, 그리고 군사의 무리가 많고 적은 것을 아는 것 ⑧기회를 재빨리 포착하는 것으로 때에 따라 적당한 방법을 만들고 때에 따라 변법을 쓰는 일

 

혁명의 완수와 후세의 평가

조선의 기틀은 삼봉의 구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젊어서 공부할 때 궁핍하고 또 유배를 당해 어려움에 처했으나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혁명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흔치 조선 왕조의 탄생을 연극에 비유하여 정도전 각본, 이성계 주연, 이방원 연출이라고 하는데, 삼봉은 각본을 쓴 이상의 역할을 하였다. 권근이 기초한 「교판삼사사정도전(敎判三司事鄭道傳)」에서 태조가 이르기를,

 

“경은 학문은 경전과 역사에 정통하고 지식은 고금을 관철하였다. 정당한 논의는 모두 성현의 말에 근본을 두고, 인물의 선악에 밝음은 반드시 충성과 사악함에 따라 분별하였으며, 나를 도와 개국하여 큰 공을 이루었다. 아름다운 꾀는 정교(政敎)의 시행을 보충할 만하고, 웅장한 필치는 제작(制作)의 책임을 부탁할 만하다. 온화한 유학자의 기상이요, 준수한 대신의 풍도이다. 내가 즉위하던 처음에 나는 경의 유용한 학문을 알았다. 이에 재상의 반열에 있게 하고, 또 국사(國史)를 편수하는 관직을 겸하게 하였는데, 과연 직무를 수행하는 여가에 편수하는 공적을 이루었다.”

 

라고 할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의 내조도 크다 하겠다. 권근이 쓴 ‘삼봉부인최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 남편을 섬김에는 순종하면서 의로웠고, 자손을 가르침에는 사랑하면서 엄하였고, 친족에게 대하여는 은혜로우며 앞서서 일을 처리하였고, 노비를 다루는 데는 무섭게 하면서도 용서하였다고 하고, 또 이것은 비록 그의 아름다운 천품에 의한 것이겠으나 역시 인격적으로 서로 대하는 데에서 얻은 바 있다(『동문선』)고 하였다.

그러나 삼봉은 조선 시대 내내 간신으로 평가되다가 고종 때 와서야 신원이 회복되었다. 그것은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삼봉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삼봉이 이렇게 대우를 받은 것은 훗날 성삼문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하여 역대 조정으로부터 받았던 대우와 유사하다. 어찌 보면 삼봉이 조선 왕조를 개창한 공이 성삼문보다 더 크지만 그 대우는 그보다 더 가혹하다 하겠다. 그렇게 된 까닭은 이른바 ‘1차 왕자의 난’과 관련이 있는데, 『해동잡록』에는 방석(芳碩)을 세자로 삼으려 모의하여 이방원이 그를 죽였다고 한다. 곧 삼봉이 방석을 세자로 삼으려고 꾀하였는데, 이방원이 이를 알고서 무사를 거느리고 삼봉 등을 찾으니, 삼봉이 도망하여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민부(閔富)의 집에 숨었다고 한다. 이 때 민부가 큰 소리로

“배불뚝이가 내 집에 들어왔소.”

라고 하여, 군인들이 곧 찾으니, 정도전이 기어서 칼을 짚고 나오자 붙잡아서 이방원 앞에 나아갔다. 삼봉이 우러러보며,

“나를 살려 주신다면 힘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이방원이

“네가 이미 왕씨를 배반하고 또 이씨를 배반하려느냐?”

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베어 죽였다. 그 아들 유(游)·영(泳)도 죽임을 당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의 분위기에는 삼봉을 비하하는 느낌도 발견되는데, 이는 조선 시대 삼봉의 위상을 나타내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권근은 개인적으로 삼봉과 매우 친하여 삼봉의 글에 대한 서문도 지은 사람인데, 가령 『삼봉집』 서문에서 선생은 절의가 가장 높고 학술이 가장 정밀하였으며, 일찍이 바른 말로 재상을 거슬려 남방으로 유배되어 10년을 났으나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하였고, 공리(功利)의 무리와 이단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업신여기고 헐뜯어도 그 지킴이 더욱 견고하니, 선생은 도의 믿음이 독실하여 의혹하지 않는 분이라 이를 만하다고 하였으나, 훗날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신도비에서 ‘간신 정도전’이라 쓸 정도로 공식적으로는 삼봉을 간신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삼봉은 세자 자리가 막내 방석에게 돌아가는 데 동의했을까? 물론 태조의 뜻이라 거역할 수도 없었겠고, 왕은 상징적 존재이고 재상이 정치적 실권을 가져야 한다는 평소의 이상도 작용했고, 또 태조의 전 처 소생의 왕자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혁명을 성공시킬 정도로 명민한 그가 사태가 나쁘게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태조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방원이 왕명을 거역하고 형제를 죽일 수도 있다는 점을 유학자로서 상상도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 일은 실로 안타까운 사건이고, 그것이 선례가 되어 훗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등도 거리낌 없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런 일은 훗날 위세와 억압으로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는 선례로 때로는 자기 검열로도 작용하여, 조선 시대 선비들은 삼봉과 성삼문 등의 일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거론조차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렇게 봤을 때 고려의 충신으로 상징되는 정몽주는 문묘에 배향되어 선비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 반면, 삼봉은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을 건국하고 기초를 다진 불멸의 공이 있지만, 단지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다는 이유만으로 줄곧 간신으로 평가되었다. 여기에는 삼봉의 출신이 사대부들로부터 줄곧 따돌림을 당하는 빌미가 되었고, 혁명을 통한 이전 왕조의 배반이라는 도덕적 판단, 또 학맥에 따라 사공(事功 : 공적)보다 절의를 높이는 유생들이 그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 분위기, 무엇보다 이방원이 역대 왕들의 조상이었기 때문에 그와 대립적 입장에 있던 삼봉이 좋게 평가될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한 시대만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두고두고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