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강민우: 안녕하십니까? 강민우라고 합니다. 이이(율곡)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가던 중 이이선생과 항상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던 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바로 성혼(우계)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워낙 밀접하여 이이를 알려면 성혼을 알아야 하고 성혼을 알려면 이이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뜻밖에 성혼선생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저로서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 드리고, 많은 배움을 얻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성혼: 저도 강민우님을 만나 21세기의 사회․경제․문화․인생 전반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무척 기쁩니다. 무엇이 궁금한지 부담 없이 말씀해주세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혼의 탄생과 가족

 

강민우: 먼저 성혼선생의 개인적 약력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성혼: 저는 1535년(중종 35년) 6월 25일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던 서울의 북부 순화방 자택에서 출생했습니다. 바로 청송당이 있던 그 집입니다. 현재 종로구 청운동 청운중학교 부근에 있습니다. 이곳은 백악산 기슭으로 경치가 좋아 조선 후기 진경산수의 대가인 정선(鄭敾)이 그린 그림도 남아있습니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 윤사원(尹士元)의 딸입니다. 윤사원은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조카이므로 왕실의 외척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성수침은 비교적 고령인 43세에 아들을 얻습니다. 슬하에 딸이 한 명 더 있으나 아들은 저뿐입니다.

강민우: 43세에 외아들을 얻으셨으니 부모님께서 정말 기뻐하셨겠습니다.

성혼: 아마 그러했을 겁니다. 저는 10세가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면서 아버지 성수침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10세 되던 해에 성수침이 처가가 있는 파주로 이사하면서 저도 아버지를 따라 파주로 가서 농촌 소년이 되었습니다.

강민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15세에는 이미 경학과 역사학에 통달했고, 행실이 바른 소년으로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하더라구요. 당시 정승으로 있던 상진(尙震)이 성수침에게 편지를 보내 “자제가 순수하고 바르며 문장을 잘하니 참으로 기남자(奇男子: 재주가 남달리 뛰어난 사내아이)이다. 그대에게 복이 있음을 축하한다”라고 했다지요.

성혼: 과찬이십니다. 저는 17세가 되던 1551년(명종 6년) 7월에 당시 순천 군수로 있던 신여량(申汝樑)의 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부인 신씨는 저보다 네 살 연상입니다. 이이가 22세에 혼인한 것과 비교하면 빠른 편인데, 외아들이므로 후사를 빨리 갖고 싶어했던 부모님의 소망 때문입니다.

강민우: 과거 응시를 단념한 성혼선생은 이해 겨울에 아버지의 권유로 백인걸(白仁傑)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지요.

성혼: 백인걸은 사림을 탄압하던 소윤파 윤형원의 미움을 받아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 고향인 파주의 촌장(村庄: 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으로 돌아옵니다. 조광조 문인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아버지 성수침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이도 이곳에서 만납니다. 이이가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가, 1년 뒤에 환속하여 백인걸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밖에 백인걸 문하의 동문으로는 김행(金行)이 있는데, 저는 그와도 평생 친구로 가까이 지냈습니다. 김행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제문(祭文)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제문이란 죽은 이를 추모하는 글이지요?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글로 표현한 것이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스승 백인걸선생이 파주에 머문 약 20년 동안 그의 문하에서 이이 등 많은 학자들을 배출합니다. 백인걸이 파주 지역을 성리학의 요람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공로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혼인한지 2년이 지난 19세에 첫 아들 문영을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일찍 죽습니다. 25세에 낳은 둘째 아들 문준이 제가 세상을 떠난 뒤에 가통을 이어 갔으며, 진사를 거쳐 벼슬길에 올라 인조 때는 현감을 지냅니다.

강민우: 아버지 성혼의 영향을 받아 학문이 높고 글씨를 잘 썼다고 전해지더라구요.

성혼: 제가 보기에는 역량이 많이 부족합니다. 저는 21세 무렵에 큰 병을 앓고 나서 비위가 허약해져 고질병이 생겼습니다. 늘 음식을 잘 먹지 못하여 몸이 말라 뼈만 남고 현기증이 심하며 피를 토하기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땀이 많이 나는 증상이 있었으며, 벼슬을 사양할 때도 항상 임금에게 고질병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강민우: 현대 의학으로 무슨 병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위장을 비롯한 소화기 계통의 병으로 보입니다.

성혼: 병이 생긴 이유에 대해 집안사람들은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느라 어린 나이에 너무 몸을 혹사한 것이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성수침은 집안이 가난한데도 마치 손님처럼 집안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안일을 전담하여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아서 그 음식으로 부모님을 봉양했습니다. 제가 6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높은 벼슬을 거부한 것은 아버지처럼 자신을 연마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일생을 마치겠다는 신념 때문이기도 했지만, 벼슬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약한 건강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강민우: ‘위기지학’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학문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성혼: 그렇습니다. 이 말은 공자가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오늘날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한데서 유래합니다. ‘위기지학’은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라는 의미로서,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출세지향의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상대되는 말입니다.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자는 “위기지학은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이루어주는데 비해, 위인지학은 남에게 인정받는 학문을 하여 끝내는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라고 하여 위인지학을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이후 조선에서 선비를 평가할 때는 위기지학을 했는지가 그 기준이 되죠. 성혼․정엽(鄭曄)․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한원진(韓元震) 등이 모두 위기지학에 힘쓴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거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