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평생의 지우를 만나다.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청년시절, 평생의 지우를 만나다.

 

강민우: 성혼과 이이의 친교관계가 얼마나 두터웠던 가를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성혼선생은 죽기 직전까지 이이의 제자들과 함께 그의 문집을 편찬하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물론 성혼은 이이의 문집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지만, 큰 틀을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성혼선생은 이이를 존선선생(尊先先生)이라는 극존칭으로 불렀으며, 평소에도 “살아서는 이이와 생사를 같이하고 죽어서는 함께 열전(列傳: 일생의 업적을 기록한 책)에 오르겠다”라며 이이와의 일심동체를 말했습니다. 성혼선생 사후 100년 뒤에 문묘에 배향될 때, 이이와 함께 배향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성혼과 이이는 쌍벽을 이루며 선비사회에서 높이 추앙받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살아서도 한 몸 같았으며 죽은 뒤에도 함께 문묘에 배향됩니다. 그렇다면 성혼선생도 이이처럼 오늘날 우리 곁에 함께 있어야 마땅한데, 성혼선생은 아직 이이만큼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성혼: 하하하. 제가 21세기 현대에는 이이보다 인기가 없다는 말씀이군요.

강민우: 아닙니다. 성혼선생은 위대한 학자요, 교육자요, 선비였습니다. 평생을 병마와 싸우고, 종이로 옷을 지어 입고,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선조 임금이 내린 벼슬을 수십 차례나 거부하고 파주 우계(쇠내)의 오두막집에서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인근에 살던 이이와 송익필(宋翼弼, 1534~1599) 등 친구와 교유하면서 참선비의 삶을 실천하셨지요.

성혼: 제 일생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한 살 아래인 이이와의 만남입니다. 이이는 외가가 있던 강릉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그 뒤 아버지를 따라서 서울에서 생활합니다. 17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서울에서 여의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19세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됩니다. 제가 이이와 친교를 맺을 때가 20세였으니, 아마도 이이가 금강산에서 나와 백인걸을 만나러 파주에 들렀다가 저를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이는 1년간의 승려 생활을 마치고 환속한 뒤로 자신의 승려 생활을 반성하는 「자경문(自警文)」을 쓰고, 본격적으로 유학 공부에 전념하고 서울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합니다.

강민우: 「자경문」은 ‘스스로를 경계하여 조심하는 글’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세운 인생의 지침서라 할 수 있습니다. 자경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목표를 크게 가진다. ②말을 적게 한다. ③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④혼자 있을 때에도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한다. ⑤옳고 그름을 알기 위해 독서를 한다. ⑥재물과 명예에 관한 욕심을 경계한다. ⑦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다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단호히 끊는다. ⑧정의롭지 않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가진다. ⑨누군가 나를 해치려고 한다면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그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⑩밤에 잘 때나 병이든 때가 아니면 절대로 눕지 않는다. ⑪공부를 게을리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공부는 평생 꾸준히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이는 「자경문」을 써서 그것을 바탕으로 일상을 펼쳐나갑니다. 가끔 파주에 내려와 백인걸 문하에 드나들고, 성혼과 송익필 등과의 교유가 이루어집니다. 성혼선생은 20대에 또 한 사람의 학우로서 나이가 한 살 위인 송익필을 만나게 됩니다.

성혼: 송익필의 호가 구봉(龜峰)인데, ‘구봉’은 지금 파주시 교하면의 출판단지 부근에 있는 심학산의 별칭입니다. 송익필은 산 이름을 따서 호를 삼은 것입니다. 당시 송익필은 파주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와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편지의 내용은 주로 학문에 관한 것들입니다. 송익필은 신분에 문제가 있어 처음부터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열중했습니다.

강민우: 송익필의 신분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성혼: 송익필의 할아버지 송린(宋璘)은 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인 감정(甘丁)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송사련(宋祀連)을 낳습니다. 송사련은 훗날 중종 때 권신으로 사림을 탄압한 남곤(南袞)․심정(沈貞)에게 아부하여 벼슬에 오르는데, 송사련의 아들이 바로 송익필입니다. 다시 말하면, 송익필의 할머니는 안돈후의 천첩 소생이므로 신분이 미천했습니다. 천첩(賤妾)은 양인 남성이 천인 신분의 여성을 첩으로 둘 경우 그 여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양인의 딸을 첩으로 삼으면 양첩(良妾), 기생이나 계집종을 첩으로 삼으면 천첩이 됩니다. 양인(良人)은 조선시대에 천민인 노비를 제외한 모든 계층으로, 양반․중인 및 일반 백성을 포괄합니다. 그럼에도 송사련은 안처겸의 역모를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어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습니다.

강민우: 이 사건은 1521년 신사년에 발생한 신사무옥(辛巳誣獄)을 말합니다. 안처겸 집안과 가족처럼 지내던 송사련이 기묘사화 이후의 정치 상황에 대한 안처겸의 불만을 훈구계 권신인 남곤·심정에게 알리면서 발생합니다. 송사련은 처남인 정상(鄭鏛)을 시켜 안처겸이 이정숙(李正叔)·권전(權磌) 등과 함께 남곤·심정 등의 대신을 살해하기로 모의했다고 고발합니다. 남곤·심정 등은 이 사건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안처겸을 역모로 간주하여 안당(아버지)·안처겸·안처근(동생)을 비롯하여 이들과 평상시에 교류하던 많은 사림을 연루시켜 축출합니다. 송사련은 그 공으로 절충장군의 품계로 승진하고 죄인들에게서 몰수한 전답․가옥․노비를 받습니다.

성혼: 송익필은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동생 송한필(宋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치고, 명문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합니다. 초시(初試: 과거의 맨 처음 시험)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합니다. 특히 예학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강민우: 그러나 송사련이 죽자,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집니다. 그 결과 송익필의 형제들이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속됩니다. 아버지 잘못으로 뜻하지 않게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 형제들은 안씨 집안에서 자신들을 죽여 복수할 것을 예감하고 이름을 바꾸고 도피생활에 들어갑니다. 이때 송익필은 이미 53세의 노인이었답니다.

성혼: 억울하게 죽은 안처겸은 고종사촌인 송사련의 신분이 비록 낮아도 가족처럼 따뜻하게 감싸주고 살았는데, 송사련은 항상 자신의 신분에 대해 열등감을 지녔습니다. 그러다가 사주를 보았는데, 자신은 부귀를 얻을 운이었고 안씨 집안은 망할 운이었습니다. 송사련은 자신이 본 사주를 믿고 있다가 정치상황에 대한 안처겸의 불만을 듣자, 드디어 운이 돌아왔다고 믿고 안처겸을 모욕죄로 고발하여 출세의 길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송사련이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성리학자의 길을 걷습니다. 특히 4형제 가운데 송익필과 그의 동생 송한필은 뛰어난 학자요 문장가로 이름을 날립니다.

강민우: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됩니다. 그 뒤에 또 동인들을 비난한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와 관련하여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동생 송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됩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나지만,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습니다.

성혼: 이렇게 말년에 기구한 삶을 살다간 송익필이지만, 1586년 안씨 집안의 송사 전까지는 파주의 구봉산 아래에서 문호를 열어놓고 후진들을 양성합니다. 그 문하에서 김장생·김집·정엽·서성(徐渻)·정홍명(鄭弘溟)·강찬(姜澯)·김반(金槃)·허우(許雨)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됩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최립(崔岦)·이순인(李純仁)·윤탁연(尹卓然)·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 때의 팔대문장가로 불렸습니다.

강민우: 송익필의 도피 생활을 도와준 사람은 평소에 절친하게 지내던 정절과 김장생 같은 제자들입니다. 성혼선생은 그를 도와줄 힘도 없었거니와, 안씨 집안이 가까이 살고 있어서 그럴 처지도 못되었죠. 그래서 점차 도피하고 있던 송익필과의 편지 연락도 끊어지게 됩니다.

성혼: 이이와 사별하고, 송익필과 생이별하여 파주의 삼현(三賢) 가운데 저만 홀로 남게 됩니다. 송익필은 자신의 신분적 약점 때문에 도리어 많은 시기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정치 감각도 뛰어나서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