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과 기대승이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이황과 기대승이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강민우: 성혼선생이 38세 되던 1572년(선조 5년)은 한국 성리학의 역사를 뜨겁게 달군 여름입니다. 성혼선생과 이이가 성리학의 가장 큰 철학적 주제인 리와 기, 사단과 칠정, 그리고 인심과 도심의 내용을 둘러싸고 편지를 통해 치열한 논쟁을 벌입니다. 이때 이이는 병으로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종4품)를 그만두고 파주에 내려와 있어서 학문적 토론을 한 만한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혼: 사단과 칠정이 조선 중기 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이유는 당시의 양심적인 성리학자들이 사화를 일으킨 권신(權臣: 권력을 가진 신하)과 척신(戚臣: 왕실과 혼인을 맺는 신하)의 횡포와 비리를 목도하면서, 이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한 가치 기준을 세울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가치 기준을 세우려면 반드시 우주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때 우주는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근원으로서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인간의 본질을 우주의 질서에 근원지어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선악으로 말하면, 우주의 질서는 악이 아니라 선이므로 우주 질서 내의 인간의 본질도 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민우: 주자는 우주와 인간의 관계 전반을 리와 기의 개념을 가지고 개략적인 설명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치밀한 분석이 16세기 중엽의 조선에서 전개됩니다. 이것은 세계 철학사에서도 일찍이 없던 심오한 철학논쟁으로 발전합니다.

성혼: 사단과 칠정은 인간 본성(또는 본질)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일찍이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면서 사단을 선한 것의 표준으로 내세웁니다. 맹자는 사람이 선한 이유가 측은․수오․사양․시비의 사단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이러한 사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은 선한 존재임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 뒤 주자는 사단을 리와 기를 가지고 설명하고, 아울러 인간의 또 다른 감정인 희․로․애․구․애․오․욕, 즉 기쁨․분노․슬픔․두려움․사랑․미움․욕심 등 칠정도 리와 기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주자는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리와 기를 가치적으로 말하면, 리는 순수하고 선한 것이고, 기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를 버리고 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실천적 의지를 내포하게 됩니다.

강민우: 갑자기 내용이 복잡해집니다. 사단과 칠정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성혼: 사단과 칠정은 모두 인간의 감정입니다. 보통 정(情)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정에는 선한 도덕적인 정도 있고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는 일반적인 정도 있습니다. 선한 정을 ‘사단’이라 하고 선하기도 악하기도 하는 정을 ‘칠정’이라 말합니다. 사단(四端)은 인․의․예․지․가 되는 네 가지 단서 또는 실마리라는 뜻으로서 측은․수오․사양․시비를 가리킵니다. 이때 인․의․예․지는 인간의 본성으로, 맹자가 말한 ‘성선(性善: 성은 선하다)’의 개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사단이라는 네 가지 실마리를 통해 마음속에 인․의․예․지의 본성이 갖추어져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사단을 인․의․예․지가 되는 단서 또는 실마리라고 말합니다.

강민우: 측은(惻隱)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며, 수오(羞惡)는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거나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이며, 사양(辭讓)은 남에게 양보하거나 사양하는 마음이며, 시비(是非)는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단의 마음을 통해 인․의․예․지의 성이 우리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음을 알게 되겠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인․의․예․지의 성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으로 부여받는 인간의 성품입니다. 이 성품은 본성 또는 천성이라고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사랑(仁),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인 의리(義),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禮), 어떤 일에서 옳은지 그른지를 판별하는 마음인 지혜(智)를 천성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의․예․지의 성은 형이상의 개념이므로 현실 속에 재현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이 곧 리를 가리킨다고 하여 성즉리(性卽理)라고 말합니다. 다만 인․의․예․지의 성은 리에 해당하므로 측은․수오․사양․시비라는 사단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이것을 성리학에서는 성발위정(性發爲情)이라 말합니다. 성이 발하여 정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강민우: 이렇게 보면, 사단이란 인․의․예․지의 성이 드러난 것이겠습니다. 그래서 이황은 이때의 사단을 ‘리가 발한 것(理發)’이라고 말한 것이군요. 리는 곧 성을 가리키니, 사단은 결국 성이 드러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혼: 이황은 주자의 설에 따라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합니다. 이때 호발(互發)은 서로 발한다는 뜻이니, 사단은 리가 발한 것(理發)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氣發)입니다. 이것을 ‘이기호발설’이라 말합니다. 이기호발설은 이황 사단칠정설의 특징을 대표하는 표현입니다. 이때 ‘이발’은 우리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인․의․예․지의 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리가 드러나는 것이니 그대로 ‘이발’이 됩니다. 또한 리가 발한 사단과 달리, 칠정은 기가 발한 것입니다. 이황이 보기에, 칠정은 악으로 흐르기 쉬운 정입니다. 비록 기쁨․분노․슬픔․즐거움․사랑․미움․욕심 등이 인간의 일반적 감정이라고 하더라도, 자칫하면 절도에서 어긋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특히 분노․욕심과 같은 칠정은 그 감정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황은 칠정을 기가 발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황은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고 주장합니다.

강민우: 그러나 이황의 설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 26세 연하인 호남의 유학자 기대승(奇大升, 1527~1572)입니다.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논쟁은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간 계속되는데, 노학자와 젊은 학자의 치열한 논쟁은 결국 조선 성리설을 발전시키는 큰 계기가 됩니다.

성혼: 두 사람 사이에 논점이 다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사단과 칠정의 개념적 정의를 다르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으로 이해합니다. 사단은 인․의․예․지에 근원하는 선한 정이고, 칠정은 형기에 근원하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정입니다. 이황이 칠정을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악으로 흐르기 쉬운 정으로 이해합니다. 선한 사단과 악으로 흐르기 쉬운 칠정은 분명히 서로 다른 정입니다. 그러나 기대승은 정은 칠정 하나이며, 그 칠정 가운에 선한 부분만을 가리켜서 사단이라고 말합니다.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황처럼 사단은 사단이고 칠정은 칠정으로 서로 다른 정이 아니라, 같은 하나의 정입니다.

강민우: 기대승은 이황처럼 사단은 리에 근원하므로 선하고 칠정은 기에 근원하므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면, 서로 다른 두 개의 선이 있으므로 옳지 않다고 비판했던 것이군요.

성혼: 이황은 사단이 선한 정인 반면, 칠정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기보다는 악으로 흐르기 쉬운 정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선한 사단은 확충해나가고 악으로 흐르기 쉬운 칠정은 단속하거나 제재해나갈 것을 주장합니다. 결국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모두 수양의 문제에 귀속시킵니다. 수양의 방면에서 볼 때, 칠정은 인간의 일반적 감정으로 그대로 인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가급적 절제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이황은 칠정을 ‘기가 발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때의 기는 실제로 발동하는 것과 같은 작용성의 의미보다는 선악의 가치적 의미를 가집니다. 선악의 가치적 의미란 예컨대 리가 선이라면 기는 악에 해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강민우: 이들 두 사람 사이에 논점의 차이 중의 또 하나는 리와 기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이황이 리와 기의 관계를 분리시켜 보려는 한다면, 기대승은 리와 기의 관계를 합쳐서 보려고 합니다. 리와 기의 관계를 분리시켜 보는 것을 불상잡(不相雜)이라 말하고, 리와 기의 관계를 합쳐서 보는 것을 불상리(不相離)하고 말합니다. 이황처럼 리와 기의 관계를 분리시켜 보아야 리가 기를 주재할 수 있는 주재성․능동성 등이 확보되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리와 기는 어제나 함께 있기 때문에 이이는 리와 기를 분리시켜 보는데 반대하고 합쳐서 볼 것을 주장합니다.

성혼: 리와 기를 분리시켜 보는 이황의 입장에서는 ‘이발’과 ‘기발’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리와 기를 합쳐서 보는 기대승의 입장에서는 ‘이발’과 ‘기발’이 큰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황처럼 ‘사단은 이발이고 칠정은 기발이다’고 하면, 사단에는 리만 있고 기가 없으며 칠정에는 기만 있고 리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전적으로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항상 함께 있다는 ‘불상리’에 따른 이해합니다.

강민우: 기대승은 ‘사단은 이발이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으나, ‘칠정은 기발이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칠정에는 기와 함께 리가 있으므로 ‘기발’이라고만 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면 리에 대한 설명이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혼: 이러한 기대승의 지적에 따라 이황은 한 걸음 물러나서 “사단은 리가 발하고 기가 따르는 것이며(理發而氣隨之) 칠정은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이다(氣發而理乘之)”라고 내용을 수정합니다. 여기에서 ‘기가 따른다(氣隨)’와 ‘리가 탄다(理乘)’는 표현은 기대승의 리와 기가 항상 함께 있다는 ‘불상리’의 지적을 받아들여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는 뜻을 보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단은 리가 주가 되어 발하지만 기가 없는 것이 아니며, 칠정은 기가 주가 되어 발하지만 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황 사단칠정설의 최종안입니다.

강민우: 기대승 역시 이황의 수정안을 받아들여 자신의 견해를 약간 수정합니다. “정이 발할 때에 혹은 리가 움직이고 기가 갖추어지기도 하고 혹은 기가 감응하고 리가 타기도 한다(情之發也, 或理動而氣俱, 或氣感而理乘)”는 것입니다. 이황은 기대승의 새로운 주장에 대해 두 사람의 견해가 좁혀진 것을 기뻐하면서 더 이상 논쟁을 계속하지 않습니다. 이황의 ‘이발(理發)’과 기대승의 ‘이동(理動)’은 그 의미가 비슷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성혼: 그러나 후에 기대승은 이황에게 편지를 다시 보내어 “사단은 순수한 선이고 칠정은 선악을 겸한다고 하면, 서로 다른 두 개의 선이 되니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라고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황은 두 사람의 차이가 다만 “근본은 서로 같고 말단이 서로 다를 뿐이다”라면서 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의견이 상당 부분 좁혀졌지만, 리의 발동과 같은 능동성을 인정하려는 이황의 시각과 ‘리와 기는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기대승의 시각 차이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누구의 견해가 더 타당한지는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논리적으로 볼 때, 리는 움직이는 실체가 아님에도 이황이 ‘발한다’ 또는 ‘발동한다’고 주장한 것은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기대승이 리가 발하지 않고 움직인다고 말한 것에서도 발(發)과 동(動)의 차이점이 애매합니다. 게다가 작위성이 없는 무위(無爲)한 리가 움직인다고 본 것도 리의 본질과는 다릅니다.

강민우: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 문제가 있는 거군요.

성혼: 이렇게 논리적으로 두 사람의 견해에 모두 문제점이 있다고 해서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논쟁의 바탕에 있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황에 따르면, 리는 선하고 기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리가 발하여 생기는 사단의 선한 가치를 높이고 기가 발하여 생기는 칠정의 불선한 가치를 절제해야 도덕적 기준이 확립됩니다. 반면에 기대승은 사단의 가치나 칠정의 가치를 반대 개념으로 보지 않고 어느 정도 동등하게 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가리키니, 결국 칠정이 선한 사단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황이 선한 감정을 지키고 불선한 감정을 물리침으로써 마치 종교인에 가까운 도덕적 엄격주의를 선호했다면, 기대승은 인간의 자유분방한 감정을 좀 더 존중하려는 예술가적 감각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실제로 시인이나 예술가들의 시각에서 볼 때, 칠정을 지나치게 부정적인 정서로 보는 것은 문학이나 예술을 어렵게 만들고 폄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습니다. 문학과 예술의 주제는 대부분 기쁨․분노․슬픔․두려움․사랑․증오․욕망(희망) 등 사람의 솔직한 본능적 정서를 다루고, 그런 본능적 감정을 반드시 나쁘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혼: 결국 사단과 칠정의 논변은 모든 사람을 성인과 같은 도덕군자로 만들려는 시각과, 도덕군자는 아닐지라도 평범한 서민의 희․로․애․락의 정서 속에서 아름다움과 선을 찾으려는 시각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황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기대승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리학 논쟁을 민생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부질없는 공론이라고 보는 것을 잘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