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지학의 처사, 아버지 성수침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위기지학의 처사, 아버지 성수침

 

강민우: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성혼: 아버지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은 대사헌을 지낸 성세순(成世純)의 아들로, 동생 성수종(成守琮)과 함께 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웁니다.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나, 기묘사화의 발발로 스승인 조광조와 그 문하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단념합니다. 관직에 오르는 것을 포기한 성수침은 ‘청송’이라는 편액을 걸고 경서공부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합니다. 1541년 처가가 있는 경기도 파주 우계(牛溪)에서 모친을 봉양하며 재야 처사로 일생을 마칩니다. 그럼에도 명종실록에는 그에 대한 길고도 아름다운 찬사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습니다. 원래 ‘졸기’는 당상관 이상의 고관이 죽었을 때 실어 주는 것이 관례임에도 벼슬이 없는 처사의 졸기를 넣은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강민우: 그만큼 아버지 성수침이 선비사회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는 뜻이아닐까요?

성혼: 졸기에는 아버지의 생애와 언행이 매우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수침은 아름다운 자질을 갖고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마치 어른처럼 의젓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사람들이 효아(孝兒)라고 불렀다. 22세 때 아버지 성세순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 성수종과 함께 지극히 슬퍼하였고, 죽을 마시면서 삼년상을 치렀다. 어떤 나그네가 무덤 옆의 여막(廬幕)을 지나다가 두 아들의 효성에 감동하여 시를 지어 던져주고 갔다고 합니다.”

강민우: 여막은 무덤 옆에 지은 집인 듯한데, 무던무덤 옆에다 왜 집을 지었나요.?

성혼: 여막은 부모상을 당하여 상주가 무덤을 지키기 위하여 그 옆에 지어놓은 임시 거처를 말합니다. 두 형제가 모두 조광조 문하에서 공부하여 명성이 대단했는데, 동생 성수종은 영특했으나 악한 것을 지나치게 미워한데 반해, 성수침은 독실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성수침은 27세 되던 해(1519년)에 기묘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벼슬길을 포기합니다. 경복궁 뒤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집을 짓고 청송당(聽松堂)이라는 현판을 답니다. 솔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살겠다는 의지의 표시입니다.

강민우: 지금은 그 집이 청운중학교 경내로 들어가 없어지고, 청송당이라는 글자를 새긴 바위만이 학교 뒤편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 이곳은 서울 종로구 창성도 158번지에 해당하며,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지역으로 불렸던 곳입니다.

성혼: 아버지는 청송당에 홀로 앉아 날마다 성인의 가르침을 외우고, 태극도(太極圖)에서부터 정자와 주자의 책에 이르기까지 직접 손으로 베껴가면서 성리학을 탐구합니다. 태극은 성리학에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주역「계사전」의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는다”고 한데서 유래하지만, 의미상으로는 선진유학의 천(天) 개념과 연관성을 가집니다. 송나라의 주돈이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어 주역에 나타난 태극의 의미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무극(無極)과 동정(動靜)의 개념을 추가하여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이 동하면 양이 되고, 정하면 음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오행을 추가하여 태극→음양→오행→만물의 우주생성론을 성립시킵니다. 주자(주희)는 다시 이 태극을 리(理)로 규정하여 형체도 없고 작용도 없는 형이상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물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원적 존재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리는 모든 사물의 존재 이유 또는 까닭으로서 개개의 사물 속에 내재하게 됩니다.

강민우: 성수침은 52세 되던 해 9월에 어머니 김씨를 모시고 파평산(坡平山) 아래 우계 부근에 별장을 정하여 귀향했으며, 이때 성혼선생은 열 살이었습니다. 우계는 ‘쇠노’로 불리는 작은 하천으로서, 지금은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에 해당합니다. 이곳을 별장으로 정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까?

성혼: 아마도 조상의 무덤이 있는 파주 향양리에서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인 파평 윤씨의 처가가 있는 지역이기도 했기 때문일 겁니다. 아버지는 키가 훤칠하고 풍채가 좋은 호남입니다. 몸에서 풍기는 품격이 높아서 누가 보아도 덕성을 갖춘 군자로 보입니다. 특별히 즐기는 오락 없이 오직 마음 다스리는 공부에만 몰두하여 산중생활을 표현한 시를 잘 짓고, 특히 중국의 동진시대를 살았던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좋아했습니다. 술을 즐기지는 않았으나, 약간 취하면 맑은 목소리로 시를 읊어 집안에 화기가 가득 했습니다.

강민우: 비단옷 같은 것은 몸에 걸치지도 않았으며, 보통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생활고도 오히려 즐거움으로 삼았다지요. 고 하더라구요.

성혼: 친척 가운데 곤궁한 사람이 있으면 재산을 기울여 도와주면서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남의 착한 일을 보면 언제나 사모하면서 잊지 않았으며, 남의 잘못을 보면 곧바로 배척하지 않고 은미한 뜻을 보여 스스로 깨닫게 했습니다. 이렇게 언행이 모나지 않았지만, 의리의 시비를 판단할 때에는 명확하고 엄격했습니다.

강민우: 일찍이 학자들이 ‘도’라는 뜻을 어려워하자,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지요. “도라는 것은 큰 길과 같다고 성현이 말씀하셨는데, 어찌 알기가 어렵다고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힘써 배운 지식을 실행하는 것이다. 말로는 학문을 이룰 수 없다. 공자 문하에 총명하고 영특한 사람이 많았지만, 끝내 도를 전한 사람은 어리석고 둔한 증자뿐이다”라고 하면서, 항상 자신을 닦는데 뜻을 두는 소학을 사람들에게 권했다고 합니다. 소학은 어떤 책인가요?

성혼: 소학은 송나라의 유자징(劉子澄)이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 책입니다. 주자가 엮은 것이라고 씌어 있으나, 실은 그의 제자 유자징이 주자의 지시에 따라 편찬한 것입니다. 내용에는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이 모아져 있습니다. 주자는 “소학은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며, 대학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다”라고 비유하여, 소학이 인간교육의 바탕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들어와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은 8세가 되면 초보교육으로 이를 배웁니다.

강민우: 소학은 유교사회의 도덕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것으로서, 오늘날 초등교육 정도가 되겠군요.

성혼: 아버지는 항상 책이 가득 찬 방에 혼자 거처하며 오로지 자신을 닦는 수신에만 몰두하고 세상일에는 무관심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정치적 현안에 격분하고 나라를 걱정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라를 경륜할 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재주를 펼 수 있는 시대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점에서 아버지는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사는 은둔자와는 다릅니다.

강민우: 성수침의 외아들인 성혼선생은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가훈을 배우고 교육을 받다가, 17세 되던 해에는 파주에 내려와서 당시 파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백인걸에게 성리학을 배웁니다. 그래서 청소년기 성혼의 학문은 아버지와 백인걸 두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죠.

성혼: 벼슬이 없는 성수침의 삶은 곤궁하여 종종 식량이 떨어질 정도로 가난했으나, 어머니만은 정성으로 봉양했습니다. 파주에 온 뒤로 아버지는 자신의 호를 파산청은(坡山淸隱)이라 했다가 뒤에는 우계한민(牛溪閑民)이라고 바꿉니다. ‘청은’은 깨끗한 은자를 뜻하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불러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부끄럽게 여겨 ‘한민’, 즉 한가한 백성이라고 고칩니다. 그밖에 서재 이름을 죽우당(竹雨堂)이라 하고, 이를 호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성수침을 주로 ‘청송 선생’이라 불렀습니다.

강민우: 만년에 성수침은 몇 년 동안 중풍을 앓다가 72세 되던 해(1564년, 명종 19년) 1월에 세상을 마칩니다. 30세의 아들 성혼이 넓적다리를 베어 낸 피를 약에 섞어서 올리는 등 지극정성을 다했으나 효험이 없었나 봐요.

성혼: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서 국가에서 관․곡식․인력․장례 도구들을 보내 도와주었습니다. 묘소는 성수침의 아버지 성세순이 안장된 파주 향양리에 모셨습니다. 훗날 국가로부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백(淸白: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함)을 스스로 지키는 것을 ‘정(貞)’이라 합니다. 1568년(선조 원년)에는 백인걸과 이이, 그리고 파주 일대 유생들이 발의하여 파산서원을 건립하고, 성수침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냈습니다.

강민우: 이 서원은 1628년(인조 6년)에 성혼의 위패를 추가하고, 1650년(효종 원년)에는 임금의 액자(額字: 현판에 쓴 큰 글자)를 받아 사액서원이 됩니다. 그 뒤로 1705년(숙종 31년)에는 백인걸의 위패를 추가했고, 1785년(정조 9년)에는 기묘명현으로 추앙받은 성혼의 동생 성수종의 위패를 또 추가 했답니다. 이 서원은 1871년(고종 8년)에 대원군이 전국의 사액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가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