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1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1

 

강민우: 이황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나고 기대승이 세상을 떠난 해에, 성혼과 이이가 다시 사단과 칠정을 가지고 이기논쟁을 벌입니다. 이들 논쟁은 기본적으로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논쟁을 심화시켰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성혼: 그것은 제가 이황의 설에서 출발하고 이이는 기대승의 설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리와 기가 서로 섞일 수 없다는 불상잡(不相雜)의 입장에서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한다면, 이이는 비록 리와 기가 형이상의 원리와 형이하의 사물로서 구분된다고 하더라도 사단칠정과 같은 인간의 심성에서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기대승의 불상리(不相離)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결국 두 선현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겠다는 것이 논쟁을 벌인 뜻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 역시 처음에는 기대승의 이론을 지지하고 이황의 이론에 회의를 품었다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혼선생의 견해가 점차 이황의 이기호발설로 기울어지고, 결국 이이와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면서 성혼선생이 먼저 논쟁을 걸었다죠.

성혼: 제가 질문하고 이이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1592년 한 해 동안 총 9차례에 걸쳐 편지가 왕복됩니다. 제가 모두 9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가운데 3․7․8․9번째 편지는 유실되고 이이의 답신만이 전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의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다소 한계가 있겠습니다. 유실된 편지는 아마도 임진왜란 때 집이 불타면서 함께 없어지거나 문집을 만들 때 누락된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결국 성혼선생의 사단과 칠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1․2․4․5․6번째 보낸 편지가 전부이군요.

성혼: 이이와의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은 제가 질문하고 이이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래서 분량 면에서도 이이의 대답내용이 몇 곱절이나 많고, 저의 질문내용은 상대적으로 소략합니다.

강민우: 이이와 논변을 전개한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성혼: 저는 일찍이 이황을 매우 존숭했음에도,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중용(中庸)의 서문에 나오는 주자의 글을 보고, 즉 주자가 성명에 근원하는 도심과 형기에서 생겨나는 인심으로 도심과 인심을 둘로 나눈 것을 보고,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자는 도심과 인심의 차이를 혹원혹생(或原或生)으로 설명합니다. ‘혹원혹생’은 도심은 혹 성명에 근원하기도 하고 인심은 혹 형기에서 생겨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이이에게 질문하면서 이이와의 논변이 시작된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도 처음에는 기대승의 이론에 기울어졌으나, 주자의 인심․도심에 대한 해석을 보고 이황의 뜻에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군요. 그리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적극 비판하는 이이에게 인심․도심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타당하다는 것을 질문합니다. 인심․도심에 대한 주자의 해석을 사단․칠정에 적용하면, 기대승의 견해보다는 이황의 견해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죠.

성혼: 그렇습니다. 도심․인심을 리에 근원하는 것과 기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상대시켜 볼 수 있다면, 사단․칠정도 같은 논리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리에 근원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 근원하므로 기가 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으로 보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타당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강민우: 결국 성혼선생은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을 같은 맥락에서 보고, 사단․칠정의 내용보다는 인심․도심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는 이이를 반격했군요.

성혼: 물론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은 성이 발한 것과 심이 발한 것이라는 명목상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심의 작용을 말한 것입니다. 성리학의 심통성정(心統性情)에 따르면, 심이 성과 정을 총괄하므로 성이 발한 사단․칠정이나 심이 발한 인심․도심은 모두 심의 작용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심․도심이 비록 심에서 발한 것이지만 성(性)․정(情)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심에서 발한 인심․도심이든 성에서 발한 사단․칠정이든, 단지 명목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심․도심을 기에 근원하는 것과 리에 근원하는 것으로 상대시켜 볼 수 있으면, 사단․칠정도 리가 발한 것과 기가 발한 것으로 상대시켜 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주자의 인심․도심의 해석에 근거하여 볼 때, 이이와 달리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타당하다는 말씀이군요.

성혼: 주자가 말한 ‘도심은 리에 근원하고 인심은 기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이황이 말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타당합니다. 물론 성혼도 이이처럼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 하나로 보는 것이 간단하고 분명한 장점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이의 ‘기발이승일도’를 저의 학설로 삼고도 싶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을 참고해보면 모두 둘로 나누어 설명하기 때문에 이이의 견해를 따를 수 없었습니다.

강민우: 인심과 도심을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듯이, 사단․칠정도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성혼선생은 이이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황의 견해는 정당하다’고 강변했다지요.

성혼: 사단과 칠정을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으니,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입니다. 그 이유로써 사단은 인․의․예․지의 성에 근원하고 칠정은 형기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단과 칠정이 서로 다른 별개의 정이라는 말입니다. 기대승처럼 정은 칠정 하나이므로 칠정의 중절한 것을 사단으로 보는 것과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강민우: 그렇지만 성혼선생이 이황의 이기호발설 내용을 모두 인정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황의 견해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성혼: 이이의 말처럼, 사단의 근원인 리와 칠정의 근원인 기가 각각 따로 있다가 발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합니다. 이황의 주장처럼 사단의 근원은 리가 되고 칠정의 근원은 기가 된다면, 자칫 리와 기가 각각 따로 떨어져 있다가 서로 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단과 칠정으로 발하기 이전의 성은 하나여야 합니다.

강민우: 결국 성혼선생과 이황의 가장 큰 차이는 정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성을 하나로 전제한다는 사실이군요.

성혼: 이황은 사단과 칠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상대시켜 설명합니다. 본연지성은 순수한 성만을 말하며, 기질지성은 기질과 기질 속에 내재된 성을 아울러 말합니다. 실재하는 것은 기질지성 하나이며, 그 가운데 성만을 가리킨 것이 본연지성입니다. 이황처럼 사단의 근원은 본연지성이 되고 칠정의 근원은 기질지성이 된다면, 두 개의 성이 있게 됩니다. 이황의 이러한 견해에는 반대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성이 발할 때에, 다만 리가 주가 되면 사단이 되고 기가 주가 되면 칠정이 될 뿐입니다.

강민우: 사단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성혼: 리를 주로 하는 사단과 기를 주로 하는 칠정이라는 두 가지 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인․의․예․지의 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리가 주가 되며, 칠정은 형기에서 감응하여 생긴 것이므로 기가 주가 됩니다. ‘리가 주가 된다’는 것은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기가 주가 된다’는 것은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단과 칠정은 성이 이미 발하여 드러난 정이므로 모두 리와 기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이황처럼 사단의 근원은 본연지성이 되고 칠정의 근원은 기질지성이 된다는 구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강민우: 이것은 이이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한 내용이기도 하죠.

성혼: 그렇습니다. 만약 이황처럼 사단의 근원이 본연지성이고 칠정의 근원이 기질지성이라면, 아직 발하지 않은 성의 상태에는 두 개의 성이 있게 됩니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라는 두 개의 근본이 있게 되니 옳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논리를 제기합니다. 저는 이황과 달리, 성이 하나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성은 하나이고, 다만 이 하나의 성이 막 발하는 시점에 주리․주기의 논리를 적용합니다.

강민우: ‘주리’는 리를 주로 한다는 뜻이고 ‘주기’는 기를 주로 한다는 뜻이죠. 이 말에는 이미 리와 기가 함께 있음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리와 기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있어야 ‘리를 주로 한다’거나 ‘기를 주로 한다’는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혼: 어찌되었든 성이 발하여 드러난 정은 이미 리와 기를 겸합니다. 사단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고 칠정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습니다. 이황처럼, 정으로 발하기 이전의 성에는 사단의 근원인 본연지성과 칠정의 근원인 기질지성이라는 두 개의 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막 발할 즈음’에는 리를 주로 하는 사단과 기를 주로 하는 칠정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사단과 칠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이고, 다만 하나의 성이 발하여 사단과 칠정으로 드러날 때에 주가 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군요.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가 발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혼선생이 이해하는 이황 호발설의 뜻인거죠.

성혼: 결국 저도 이황처럼 사단과 칠정을 서로 다른 별개의 정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이이가 정은 칠정 하나이며,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사단으로 보는 것과 다릅니다. 그렇지만 이이처럼 성이 하나인 것에는 동의합니다. 이것은 이황이 사단과 칠정의 근원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하는 것과 분명히 다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의 사단칠정설에는 이황의 견해와 같은 부분도 있고 이이의 견해와 같은 부분도 있군요. 반대로 말하면, 이황의 견해와 다른 부분도 있고 이이의 견해와 다른 부분도 있다는 뜻이겠군요.

성혼: 저는 ‘이기일발(理氣一發)’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리와 기가 하나로 발한다는 뜻으로, 결국 근원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황처럼 정이 발한 근원으로서의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든 칠정이든 그 근원은 하나의 성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이의 견해와 일치합니다.

강민우: 그러나 성이 발하여 정이 되는 그 시점, 즉 성혼선생의 표현대로 ‘막 발할 즈음’에는 주가 되는 것에 따라 사단과 칠정이 구분된다는 것이죠. 사단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므로 하나의 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이 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황의 견해와 일치하겠군요.

성혼: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가 발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한 이황의 이기호발설 내용입니다. 결국 저의 해석은 이황과도 다르고 이이와도 다릅니다. 이황과의 차이는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누어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이와의 차이는 리를 주로 하여 말하거나 기를 주로 하여 말함에 따라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으로 구분해본다는 점입니다.

강민우: 결국 이황처럼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을 둘로 구분하지는 않지만,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는 서로 다른 정으로 이해한다는 말이군요. 이것이 바로 성혼 사단칠정설의 특징이겠습니다. 그래서 성혼선생이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종합하여 절충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요.

성혼: 이이처럼 사단과 칠정을 막론하고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로 보면서도, 동시에 이황처럼 리가 주가 되는 사단과 기가 주가 되는 칠정이라는 서로 다른 두개의 정으로 구분합니다.

강민우: 그래서 이황의 최종 수정안인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에서 ‘기수지’와 ‘이승지’의 표현에 대해서는 반대했다죠.

성혼: 저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에서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이발(理發)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발(氣發)임을 인정할 뿐이지, 그 뒤에 나오는 ‘기가 따른다(氣隨之)’와 ‘리가 탄다는(理乘之)’는 표현에는 장황하다는 느낌이 들어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발과 기발 뒤에 ‘기수지’와 ‘이승지’를 덧붙일 경우, 이이의 비판에서처럼 시간상의 선후관계가 설정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이황이 ‘기수지’와 ‘이승지’를 추가한 것은 기대승의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다’는 불상리(不相離)의 조건을 수용한데 따른 것입니다.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리가 발하고 기가 따르는 것’이며,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황은 이발과 기발에다 ‘기수지’와 ‘이승지’를 덧붙인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기수지’와 ‘이승지’의 추가 없이 ‘사단은 리가 발한 것(理發)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氣發)’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본 것이군요. ‘기수지’와 ‘이승지’를 더하면 자칫 ‘리가 발하고 나서 기가 따르거나 기가 발하고 나서 리가 타게 되어’ 리와 기 사이에 선후관계가 생기게 됩니다. 굳이 ‘기수지’와 ‘이승지’를 추가하여 리와 기 사이에 시간적 선후관계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성혼: 물론 ‘사단은 리가 주가 되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된다’는 식의 주리와 주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저의 주장에 대해 이이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리․주기의 견해는 궁극적으로 리와 기를 둘로 분리시켜 보는 이원론의 한계를 갖기 때문입니다. 이이는 리와 기는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일원론적 사고를 끝까지 견지합니다. 리는 항상 기에 타고 있으므로 기가 없으면 리는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강민우: 그래서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막론하고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으므로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하나’라는 의미의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를 주장한 것이죠.

성혼: 사단도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이며, 칠정도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것입니다. 사단이든 칠정이든 모두 발하는 것은 기이고 다만 리는 기 위에 올라탈 뿐입니다. 그러나 기는 선악을 겸하므로 결국 사단에도 선악이 있고 칠정에도 선악이 있게 됩니다. 이이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사단에도 선악이 있게 되므로 사단을 순선한 감정으로 보는 맹자의 본뜻에 어긋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이가 직접 ‘사단에도 선악이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발이승일도’의 논리에 따르면 사단에도 선악이 있게 되므로 순선함을 표방하는 사단의 도덕적 가치가 위태로워집니다.

강민우: 이이의 말처럼 ‘칠정 속에 사단이 있고, 사단은 칠정의 선한 부분만을 가리킨다’면,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 칠정을 결코 포기할 수 없겠습니다. 이황처럼 칠정은 절제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분방한 감정으로 보았던 것이네요. 성혼선생의 언행이 조심하고 신중한 것과 달리, 이이의 언행이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모습을 보인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어 보입니다.

성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는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매우 다릅니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에 따르면,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므로 선하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므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가능한 칠정을 절제하고 사단을 확충해야 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황의 학문이 마치 종교인처럼 엄숙하고 감정을 억제하면서 도덕적 수양에 치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민우: 이이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는 형이하의 개념으로 실제로 발동이 가능하지만, 리는 형이상의 개념이므로 실제로 발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황의 ‘이발’이라는 말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합니다. 리와 기를 이렇게 형이상의 개념과 형이하의 개념으로 구분하는 것에서 보면, 이이의 견해가 이황의 견해보다 한층 논리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성혼: 저는 사단과 칠정의 해석에서 이황의 학설을 더 신봉합니다. 이황의 학설이 주자학의 본질에 더 맞다고 보고, 이황을 비판한 이이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이러한 논쟁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벌어졌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신념에 찬 모습으로 강경하게 맞섰습니다. 그러나 논쟁이 길어질수록 이이의 견해도 조금씩 수용하여 절충적인 입장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과 칠정을 막론하고 정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이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단은 리가 주가 되므로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므로 기가 발한 것이다’는 이황의 견해도 수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기일발설’과 ‘주리주기설’입니다. 결국 저의 견해는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의 중간쯤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이이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지 완전히 승복한 것은 아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만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 이이의 이기설이 매우 독창적이고 탁월하여 자신의 스승이 되었다고 토로한 것으로 보아 만년에는 이이의 이기설에 상당 부분 동조한 듯합니다.

성혼: 여기에서 이이의 이론을 조금 더 보충하겠습니다. 이이에 의하면, 실재하는 정은 칠정 하나이며,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말합니다. 이것은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이이는 칠정 속에 사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컨대 칠정 가운데 기쁨․슬픔․사랑․욕구는 인(仁)의 단서가 되고, 분노․미움은 의(義)의 단서가 되며, 두려움은 예(禮)의 단서가 되고, 옳고 그름의 아는 것은 지(智)의 단서가 됩니다. 반대로 사단 가운데도 칠정이 들어있습니다. 예컨대 사단의 측은한 마음(仁)은 칠정의 슬픔에 속하고, 사단의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하는 마음(義)은 칠정의 미움에 속하며, 사단의 공경하거나 사양하는 마음(禮)은 칠정의 두려움에 속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智)은 지(知)에 속합니다.

강민우: 이황이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므로 선하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므로 악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라는 선과 악의 대립적 개념으로 보는 것과 달리, 이이는 칠정 가운데도 사단이 있고 사단 가운데도 칠정이 있다는 상호 내포적 관계로 이해합니다. 이이의 주장처럼 사단 가운데도 칠정이 있고 칠정 가운데도 사단이 있다면, 사단과 칠정을 무엇 때문에 개념적으로 구분했는지 그 이유가 무색해질 수 있겠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하나의 정으로 이해합니다. 하나의 정이므로 사단이 칠정 속에 포함되기도 하고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결국 칠정에도 사단의 의미가 있고 사단에도 칠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에 대해 찬성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황처럼 사단은 사단이고 칠정은 칠정으로 서로 다른 두개의 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그래서 이이는 성혼선생처럼 사단을 도심에, 칠정을 인심에 대비시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한 것이죠.

성혼: 저는 사단․칠정의 관계를 인심․도심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을 같은 구조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심이 성과 정과 총괄한다(心統性情)면, 성이 발한 사단․칠정이나 심이 발한 인심․도심은 모두 우리 마음의 작용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사단칠정은 성이 발한 것이고, 인심도심은 심이 발한 것이라는 명목상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강민우: 성에서 발한 사단칠정이든 심에서 발한 인심도심이든 모두 마음의 작용 가운데 이름만 다를 뿐이라는 말씀이군요.

성혼: 도심과 인심의 차이에 대해서도 도심은 사단처럼 선한 것이고 인심은 칠정처럼 그렇지 못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주자가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는 것(或原)이고 인심은 형기에서 생겨난 것(或生)으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더 나아가 이황은 성명을 리로 보고 형기를 기로 봄으로써, 도심은 리에서 나온 것이고 인심을 기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합니다. 주자와 이황은 모두 도심과 인심을 리와 기, 선과 악 등의 대립적 구조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이는 도심과 인심을 모두 같은 성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합니다. 도심도 성에서 나온 것이고 인심도 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인심과 도심의 근원으로서의 성은 하나이며, 다만 발한 이후에 인심과 도심으로 갈라질 뿐입니다.

강민우: 이이는 사단․칠정과 마찬가지로, 인심과 도심의 관계를 ‘근원은 하나이나 발한 이후에 둘로 나누어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일원이이류(一源而二流)로 말하는데, 하나의 근원이 흘러가서 둘이 된다는 뜻입니다.

성혼: 또한 이이는 ‘사단은 도심에 해당하나, 칠정은 정의 전체를 말하므로 도심과 인심을 합친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을 같은 구조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같은 구조’란 사단과 도심은 모두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과 인심은 모두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강민우: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타당하다는 말씀이군요. 결국 성혼선생께서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인심․도심의 내용을 가지고 논증한 셈이군요.

성혼: 이이는 인심․도심의 관계를 사람이 말에 타는 것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말을 타고 문을 나설 때, 혹 말이 사람의 뜻을 따라 나가는 경우도 있고, 혹 사람이 말이 가는대로 맡겨두고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이 사람의 뜻에 따라 나가는 것은 사람이 주가 되므로 도심이고, 사람이 말이 가는 대로 맡겨두고 나가는 것은 말이 주가 되므로 인심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말을 타고 문을 나서기 전에는 사람이 주가 될지 말이 주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도심과 인심은 처음부터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강민우: 이것은 성혼선생이 주장하는 ‘이기일발설’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사단이든 칠정이든 성은 하나이며, 이 하나의 성이 막 발할 때에 사단은 리가 주가 되고 칠정은 기가 주가 되는 것처럼, 도심은 사람(리)이 주가 되고 인심은 말(기)이 주가 됩니다. 결국 이이의 인심․도심에 대한 견해는 성혼선생의 사단․칠정에 대한 견해와 비슷해 보입니다. 이것은 이이가 성혼선생과 토론을 거치면서 성혼의 이론을 수용한 것이 아닐까요.

성혼: 꼭 그렇지 않습니다. ‘리를 주로 한다’거나 ‘기를 주로 한다’는 주리․주기의 관점은 결국 리와 기를 분리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이이는 리와 기를 분리시키는 것에는 결코 반대합니다. 이이에 의하면,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으므로 도심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고 인심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습니다. 도심에도 기가 있고 인심에도 리가 있으니, 성인이라도 도심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일반 사람이라도 인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인도 배고프면 음식을 먹고 싶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싶고, 추울 때는 옷을 입고 싶어 합니다. 결국 인심이 지나치지 않으면, 인심이라도 도심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이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