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지극한 효심을 보여주다.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지극한 효심을 보여주다.

 

성혼: 제가 30세 되던 1564년(명종 19년) 1월에 아버지 성수침의 상을 당합니다. 지병인 풍병(중풍)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했다죠. 성수침은 도리어 아들이 병날까 걱정하여 밤이 깊으면 물러가 쉬게 했으나, 성혼선생은 ‘예예’ 대답하고 나와서는 방문 밖에서 아버지를 지키면서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셨더라구요.

성혼: 어머니는 이미 3년 전에 돌아가시고 여동생은 출가했으므로 병간호를 책임질 사람은 외아들 저뿐이었습니다. 물론 부인과 두 아들이 있었지만, 이들에게 간호를 미루지 않았으며 아들들은 병간호하기에는 아직 어렸습니다. 어머니 파평 윤씨는 1561년(명종 16년) 12월에 세상을 떠납니다.

강민우: 성수침은 부인을 떠나보내고 3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상주인 성혼선생은 어머니 상복을 벗자마자 또 아버지 상복을 입게 된 저죠.

성혼: 그렇습니다. 저는 조상 무덤이 있는 파주 향양리에 아버지를 안장하고, 무덤 옆에서 3년간 여묘살이(상주가 무덤 근처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를 했습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는 아버지 신주를 모시고 우계로 돌아와 어머니 신주와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모든 의식은 주자가례를 따랐습니다.

강민우: 신주는 죽은 사람의 위패를 말하는 것입니까?

성혼: 그렇습니다. 시신을 매장한 다음 신주를 만드는데, 혼이 여기에 깃든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혼백은 빈소에 모시다가 대상(大祥: 사망한 날로부터 만 2년이 되는 두 번째 제삿날)이 지난 뒤 태워버리며, 신주는 그 4대손이 모두 죽을 때까지 사당에 모시고 지내다가 산소에 묻습니다.

강민우: 당시 장례 절차는 모두 주자가례에 따라서 했던 것이겠군요. 주자가례의 내용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성혼: 주자가례는 중국 남송시대 주자(주희)의 저서로, 사대부 집안의 예법과 의례에 관한 책입니다. 본래 책 제목은 가례(家禮)인데, 주자가 저술했다고 하여 통상 주자가례라고 부릅니다. 주자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인데, 그의 성리학에서 예와 의례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사대부들이 준수할 예와 의례를 정리할 목적으로 편찬한 것이 바로 주자가례입니다.

강민우: 성리학에서 예와 의례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혼: 성리학과 예학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로써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성리학의 중심 내용은 성즉리(性卽理)입니다. ‘성즉리’란 천지의 리가 인간에게 성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천지의 리가 인간에게 성으로 구비됨에 따라, 예는 단순히 행위의 외적 형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행위원리로서의 지위를 갖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인․의․예․지와 같은 성이 인간에게 본성으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갖추어진 본성의 자연적 발현에 따라 ‘임금은 어질고, 신하는 공경하고, 부모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 예의 실천이 가능합니다. 이로써 예는 외적인 행위규범의 의미뿐만 아니라 내적인 행위원리의 의미를 가짐으로써 ‘왜 예를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강민우: 그래서 성리학에서는 예를 매우 중시했던 것이군요. 그리고 일상에서 의례는 성년식에 관한 관례, 혼인에 관한 혼례, 장례에 관한 상례, 제사에 관한 제례로 대표되겠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고려 말에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주자가례도 함께 들어옵니다. 이 책은 조선 건국 이후 일반 사대부 집안뿐만 아니라 왕실의 국가의례를 만들 때에도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됩니다. 책의 내용은 관례․혼례․상례․제례의 네 가지 의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상례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주자가례의 상례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전통적인 상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은 부모의 제사뿐만 아니라 외가의 제사에도 신경을 썼답니다.

성혼: 외할아버지 윤사원이 본처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해 제사가 끊어질 형편에 놓이자, 제가 외할머니에게 청하여 서자(庶子: 첩이 낳은 자식)가 제사를 받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서자도 후사 없이 죽자, 제가 외가의 신주를 아예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집안의 사당 뒤에 따로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습니다.

강민우: 외손자가 외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혼선생의 후손들이 윤사원의 묘소를 관리하면서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성혼: 서자에게 제사 상속권을 준 것은 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이의 처가에 적자(嫡子: 정실부인에서 태어난 아들)가 없자 서자에게 제사 상속권을 주도록 조처하고, 이이가 죽을 때에도 적자가 없자 서자에게 제사 상속권을 줍니다. 물론 이런 조처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있는 것이지만, 양자를 들여서 제사 상속권을 주던 관례와는 다른 것입니다.

강민우: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으로, 오늘날 헌법에 해당합니다. 헌법과 경국대전은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데 근본 규범이 되는 법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된 날이 1948년 7월 17일입니다. 제헌절이죠. 헌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과 국가기관의 조직과 권한에 대한 내용이 담긴 근본 규범입니다. 한 나라의 기본이자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법이지요. 우리나라에서 헌법을 공포한 7월 17일은 태조 이성계가 개경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 왕조를 연 날(음력 7월 17일)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를 이어나가는 의미로 이날에 맞추어 국회에서 헌법을 공포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혼: 조선 왕조에도 오늘날의 헌법처럼 나라를 다스리는데 기본이 되는 훌륭한 법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경국대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