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2

파주와 율곡학 : 우계(성혼) 스토리텔링

 

성혼과 이이가 사단칠정을 토론하다 2

 

강민우: 실제로 주리․주기의 관점은 이이의 이론과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성혼: 그렇습니다. 주리․주기는 리와 기가 함께 있는 속에 나아가 분리시켜는 방법입니다. 비록 리와 기가 함께 있음을 전제하지만, 결국 리를 주로 하거나 기를 주로 하는 식으로 분리시키기 때문에 합쳐서 보려는 이이의 관점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이는 항상 리와 기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이는 리와 기의 관계를 그릇에 담긴 물에 비유합니다. 물은 리에 해당하고 그릇은 기에 해당합니다. 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반드시 그릇이 움직여야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릇이 움직이고 나서 물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움직이면 동시에 물이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리와 기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그릇 속의 물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듯이, 리는 결코 스스로 움직이거나 발동할 수 없다는 뜻이군요. 이이는 이러한 리의 특징을 무위(無爲)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리는 실제로 작용성이 없는 형이상의 개념이므로 발동(發)과 같은 말을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이는 이황의 ‘리가 발한다’는 말이 잘못이라고 비판한 것이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해서는 이이의 견해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연지성은 순수한 성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며, 기질지성은 기질과 기질 속에 들어있는 성을 함께 말한 것입니다. 실재하는 성은 기질지성 하나이며, 이 기질지성 속에서 성(리)만을 가리킨 것이 바로 본연지성입니다. 이것은 기질지성이 본연지성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정은 칠정 하나이며 이때의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듯이, 성은 기질지성 하나이며 이때의 기질지성이 본연지성을 포함합니다.

강민우: 그러나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하듯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사단의 근원은 본연지성이고 칠정의 근원은 기질지성이 라 말한 것이군요.

성혼: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에 대한 저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현실사회에 대한 반영입니다. 예컨대 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의 목숨을 앗아간 이기(李芑) 같은 악한 인물이 천수를 다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가 작용하여 리가 무너진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때도 기가 홀로 작용하고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이의 말처럼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으나, 리와 기가 함께 있는 가운데 기가 주가 되기 때문에 이기와 같은 악한 자가 승리합니다.

강민우: 성혼선생이 이이와 수 차례의 편지를 통해서 리와 기, 사단과 칠정, 그리고 인심과 도심의 문제를 토론하지만, 오히려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거나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는 것이고 인심은 형기에서 생겨난 것이다’는 이황과 주자의 주장을 버리지 못하여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 것이군요.

성혼: 결국 이이는 답답함을 느끼고 다섯 번째 편지에서는 답장 대신 시를 한 수 지어 보내왔습니다.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항상 함께 있음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원기(元氣)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元氣何端始

무형이 유형 가운데 있도다 無形在有形

근원을 찾으니 본래 합해 있음을 알겠다 窮源知本合

리와 기는 본래 합쳐진 것이요, 理氣本合也,

처음으로 합쳐진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非有始合之時

리와 기를 둘로 나누려는 자는 欲以理氣二之者

모두 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皆非知道者也. 「理氣詠」

그리고 이이는 시 뒤에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성이란 리와 기가 합한 것입니다. 리가 기 가운데 있는 뒤에 성이 되는 것이니, 만약 형질(기) 가운데 있지 않으면 리라고 해야 하고 성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형질에는 리와 기가 있으며, 그 가운데 리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본연지성입니다. 자사와 맹자는 본연지성을 말하고 정자와 장자(장재)는 기질지성을 말하지만, 그 실상은 하나의 성입니다. 다만 주로 하여 말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주로 하여 말한 뜻을 알지 못하고 성이 둘이라 말하거나 정에 이발과 기발의 구분이 있다고 말한다면, 어찌 리를 알고 성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강민우: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두 개의 성이 아니듯이, 사단과 칠정도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이 아니라는 뜻이군요. 성은 기질지성 하나이고 그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가리킨 것이 본연지성이듯이, 정도 칠정 하나이고 그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가리킨 것이 사단인 것이고요.

성혼: 이이의 다섯 번째 편지를 받은 뒤에 비로소 서로의 의견이 하나로 귀착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를 어느 선현의 말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해하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이이가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이의 비판처럼, 이기호발설이 리와 기가 각각 나온다(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리와 기가 동시에 나오지만, 다만 리가 주도할 경우도 있고 기가 주도할 경우도 있다는 뜻입니다. 리가 주도할 때는 ‘이발’이 되고, 기가 주도할 때는 ‘기발’이 됩니다.

강민우: 그래서 성혼선생은 이이의 설과 이황의 설을 절충하여 이황과도 다르고 이이와도 다른 ‘이기일발설’을 내세운 것이군요. 이이는 성혼에게 보낸 여섯 번째 편지에서 ‘어떤 말은 나(이이)의 견해와 일치하지만, 어떤 말은 이황의 이론을 끌어오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군요.

성혼: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은 1572년(선조 5년) 여름 성혼이 38세, 이이가 37세 때 여섯 차례의 왕복 편지를 통해 이루어진 토론의 요지입니다. 이상의 토론 내용을 정리해 보면, 토론이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좁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혼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에서 출발하지만, 이이의 비판을 받으면서 ‘리와 기가 각각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이 하나임을 전제하고, 하나의 성이 발할 때 다만 리가 주도할 때도 있고 기가 주도할 될 때도 있다는 ‘주리주기설’ 또는 ‘이기일발설’로 수정합니다. 이것은 이황의 ‘사단은 리(또는 본연지성)에 근원하므로 이발이고, 칠정은 기(또는 기질지성)에 근원하므로 기발이다’는 주장과는 다릅니다. 또한 이이 역시 처음에는 ‘기발이승일도’를 내세워서 기의 역할만을 강조하고 리의 가치를 폄하하는 데로 흘렀지만, 성혼의 지적을 받으면서 리가 중하기도 하고 기가 중하기도 하다는 성혼의 주리주기설을 일부 긍정하면서 ‘기발이승일도’를 보완합니다. 물론 그것은 사단․칠정이 아니라 인심․도심의 내용에 반영됩니다. ‘도심은 리가 주가 되고 인심은 기가 주가 된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강민우: 성혼과 이이의 논쟁에서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냐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성혼: 그렇게 판단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두 사람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이는 우주를 존재론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간의 심성의 문제를 해석합니다. 반면 성혼은 인간의 윤리적 당위성에서 출발하여 우주의 원리를 역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이의 설명방법은 오늘날의 과학철학에 가깝고, 성혼의 설명방법은 윤리철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명방법의 차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행동양식에 있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에서 선을 추구하려는 자세와 도덕적 수양을 통해 선을 추구하려는 행동양식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이는 전자에 속하고 성혼은 후자에 속합니다.

강민우: 결국 사단과 칠정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어떻게 선을 실현할 것인가를 따지는 과정에서 이들 논쟁이 발생된 것이군요. 이이가 현실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론을 전개한 것이라면, 성혼선생은 도덕의 당위론적 관점에서 이론을 전개한 것이고요.

성혼: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이의 이론이 더 타당하지만, 도덕적 요청이나 필요성에서 보면 저의 이론이 더 타당합니다.

강민우: 지금까지의 설명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혼: 저도 강민우님과 여러 가지 이론을 논의할 수 있어서 매우 즐거웠습니다.

 

 

<참고문헌>

한영우, 우계 성혼 평전, 민음사, 2016

성기영 글, 이현주 그림, 만화 우계 성혼, 우계문화재단,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