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학 스토리텔링

이단상의 출생과 가족관계

 

강민우: 안녕하십니까? 강민우라고 합니다. 이이선생을 비롯하여 그의 학파를 이루는 여러 인물들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자료를 찾던 중에 마침 율곡학파의 주요 제자중의 한분인 이단상 선생님과 그의 제자격인 김창협, 김창흡, 임영, 박필주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동안 궁금했던 여러 가지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많은 배움을 얻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이단상: 김참협․김창흡․임영․박필주 등은 저의 제자들이니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강민우님을 만나 사회․경제․문화․인생 전반에 대해 얘기 나눌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궁금하신점을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신다면 성실히 답변드리겠습니다.

강민우: 먼저 이단상선생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단상의 출생과 가족관계

 

이단상: 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저의 이름은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이며, 자는 유능(幼能)이고, 호는 정관재(靜觀齋) 또는 서호(西湖)라고도 불립니다. 시호는 문정(文貞)입니다.

강민우: 저는 강민우라는 이름뿐인데 옛날에는 이름외에도 다양한 호칭이 있었나봐요. 어떤 구분이 있었나요?

이단상: 원래 사람을 부를 때는 그 이름을 불러야 하지만, 손위 사람이나 연장자처럼 때로는 결례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 대신 자(字)를 불러줍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자(字)를 짓는데, 이때의 자는 주로 오늘날 성년식의 일종인 관례를 치루면서 자를 지어줍니다.

강민우: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호와 시호의 뜻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단상: 호(號)는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겼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지위․연소․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허물없이 부르기 위해 지었던 이름입니다. 호는 부모․스승․친구 등 남이 지어주는 경우도 있으나 스스로 짓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시호(諡號)는 죽은 사람에게 국가에서 내리는 특별한 이름입니다. 시호는 군주 및 배우자의 친척,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 고급 관료 등이 죽은 뒤에, 생전에 국가에 기여한 공적을 감안하여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뜻에서 지어서 내립니다.

강민우: 이름 대신 자와 호 등 여러 가지로 대신하여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단상: 옛날에는 이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아무에게나 불리는 것을 꺼려했다고 합니다. 특히 사대부들 집안에서는 더욱 심했는데, 이는 자신의 소중하고 귀중한 이름이 다른 사람이나 특히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불린다는 것을 집안 체면이나 가문에 누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위치에 있는 사이라도 주로 이름 대신에 호를 불렀으며, 본래 이름은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을 했습니다.

강민우: 감사합니다. 계속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단성: 저의 본관은 연안으로, 연안 이씨의 후손입니다. 연안 이씨는 황해도 연안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본관이란 시조(始祖: 처음 생겨난 조상)의 고향을 뜻합니다. 본관은 주로 그 사람의 출신지를 나타내는데, 예컨대 안동김씨 ○○이라 하면 안동 출신의 김○○이 됩니다. 저의 연안 이씨 집안은 제가 살았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문가 중의 하나입니다. 6대조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은 조선시대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책봉된 공신으로 사후에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저술한 학자입니다. 이 책은 당시 임금이었던 세조의 명을 받아 중국 송나라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와 한국의 고려사를 엮어 간행한 정치서적입니다. 할아버지는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를 주도했던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이고, 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을 배척했던 척화신이자 대제학을 지낸 이명한(李明漢, 1595~1645)입니다. 이명한의 큰 아들인 이일상(李一相, 1612~1666)까지 대제학에 오름으로써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한 명성 높은 집안입니다.

강민우: 선생님께서는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셨군요.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하셨다고 하는데, 대제학은 주로 어떤 업무를 담당했나요?

이단성: 대제학은 주로 외교문서 작성, 과거시험 출제, 편찬사업 등을 담당합니다. 예컨대 세종 때에 집현전 편찬사업의 운영과 기획은 모두 대제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종 때의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 등 주요 편찬사업도 대제학에서 주관했습니다.

강민우: 그래서 대제학을 학문의 저울이고 문장의 기준이며 학자 가운데 으뜸이라는 뜻에서 문형(文衡)이라 불렀군요.

이단상: 그렇습니다.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으로 ‘문형’이라는 별칭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문형’은 원래 과거시험에서 문장을 저울질한다는 의미, 즉 시험답안을 채점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고려시대에도 대제학이라는 명칭은 있었지만, 유학을 지향했던 조선사회에 들어와서 대제학은 그 의미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대제학은 성인의 학문으로 대변되는 학문과 인격의 사표(師表)로서, 문무 양반을 통틀어 가장 영예로운 관직이었습니다.

강민우: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이단상: 저희 어머니는 유교칠신(遺敎七臣) 중의 한 사람인 박동량(朴東亮)의 딸입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박세채가 박동량의 손자이니, 박세채와 저는 사촌지간입니다. 조선실록에서는 박동량을 가리켜 “재주가 뛰어나고 인품이 너그러워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일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강민우: 선대에 보이는 가문의 배경뿐만 아니라, 혼인을 통해 맺은 인맥 또한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단상: 저는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를 심양까지 모시고 따라갔던 척화신이자 우의정을 지낸 이행원(李行遠)의 딸과 혼인하여 모두 2남 5녀를 두었습니다. 큰아들 이희조는 영의정을 지낸 김수흥의 딸과 혼인하고, 둘째 아들 이하조는 김수증의 아들 김창국의 딸과 혼인하는 등 안동 김씨 가문의 김상헌 후손들과 겹사돈을 맺었습니다. 다섯 명의 딸도 이조참의를 지낸 이정기의 아들 이행,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 민유중의 아들이자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의 손자이자 강화학파의 창시자인 정제두의 아들 정후일 등과 혼인하는 등 당대 문벌들과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로써 서울지역 서인 그룹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강민우: 집안 배경으로 볼 때 매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습니다.

이단상: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1628년(인조 6)에 아버지께서 근무하던 남양부(南陽府) 관아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9세가 되던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을 맞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했는데, 이듬해 1월에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어 개성까지 끌려갔습니다. 다행히 소현세자를 수행하던 고종사촌 홍주원(洪柱元)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이때 둘째 형 이가상은 어머니를 찾아 헤매다 청나라 군대에 피살되었고, 할머니와 어머니 역시 전쟁의 충격으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민우: 전쟁때문에 가슴 아픈 일이 많으셨군요.

이진상: 그뿐아니라 전쟁이 끝나자 인조와 대신들은 전쟁에 패배한 책임을 척화론자들에게 돌렸고, 큰형 이일상은 척화를 주장해 나라를 망치고 남한산성에서 도주하여 임금을 저버렸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아버지 이명한 역시 척화 5신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5개월간 심양에 구금되었습니다.

강민우: 척화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이단상: 척화론이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명분과 의리를 수호하기 위해 청나라의 군대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여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화친을 주장했던 주화론(主和論)과 반대되는 입장입니다.

강민우: 병자호란에 얽힌 이와 같은 가족사는 당연히 선생님의 정치적․사상적 행보에 많은 영향을 미쳤겠군요.

이단상: 그렇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병자호란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남한산성 함락의 원인을 주화론에 돌리는 시를 쓰기도 하는 등 기본적으로 척화론의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강민우: 병자호란 이후 유일한 사표(師表: 학식과 덕행이 높아 세상 사람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로서 김상헌(金尙憲)을 평생토록 존경하고 흠모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인조 후반 청나라와 우호적 분위기가 조정에 팽배하던 시기에, 선생님의 집안은 김상헌의 안동 김씨 가문과 더불어 척화론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군요.

이단상: 그런 와중에 1645년 전염병으로 인해 아버지와 셋째 형 이만상 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병자호란 이후 10년 만에 온 가족이 죽고 큰형과 저만 남겨진 것입니다. 이때부터 저는 큰형 이일상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학업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하고 이듬해 정시 병과에 합격했습니다.

강민우: 문과에 급제하기까지 선생님의 수학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단상: 병자호란 이전 어린 시절에는 나랏일로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 박씨에게서 기초적인 경서와 역사를 배웠습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척화의 대가로 집안의 화란이 거듭되면서 이렇다 할 선생님을 모시지 못하였으며, 주로 아버지와 큰형에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이정구의 손자이자 이명한의 아들답게 문장에 관한 천부적 재능을 지니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본인 역시 문장이야말로 가문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의 원천임을 확신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단상: 그렇습니다. 한 해에 3번 장원급제를 했던 6대조 이석형부터 송나라 소식(蘇軾) 3부자에 비견되던 이정구․이명한․이소한,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8명의 종형제에 이르기까지 건국 이래 저희 집안만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경우는 없었다고 자부했습니다.

강민우: 젊은 시절의 글을 통해 이단상선생님의 풍모를 상상해 보면 천부적인 문장과 학문적 조예를 겸비하고, 술과 시를 좋아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 듯합니다. 선생님의 문장에 대한 사촌동생 박세채는 “화려한 수사와 규정된 법도에 얽매이지 않았고 한번 붓을 잡으면 막힘없이 써 내려가는 스타일이었다.”고 평가했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동년배들이 따를 수 없는 박식하고 정밀한 문장에다 세상 이치에 대한 고민까지 더해진 것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장점이라 평가했다지요.

이단상: 과찬입니다.

강민우: 선생님의 가족사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이어서 학문세계에 대해 여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