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의 ‘리’ 이해2

 

임영의 이해

 

임영: 특히 이황은 리의 능동성을 강조합니다. 장수가 부하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리가 실제로 기를 능동적으로 주재한다는 것입니다. 이황은 리의 실재적․능동적 주재를 확립하여 현실의 혼란을 야기하는 기의 활동을 철저히 차단해나가려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것은 리가 그렇게 시킨 것이며 리가 그렇게 주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운동하는 주체가 기라고 할지라도, 기를 주재하여 기로 하여금 운동하게 하는 것은 리입니다. 기의 운동도 리의 주재에 의한 것이므로 결국 리가 주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리의 주재는 리가 실제로 기를 주재하는 것이 됩니다. 이이 역시 리의 주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황처럼 장수가 부하에게 명령하듯이 능동적․실재적 주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로 하여금 운동하게 하는 원리로서의 리를 그대로 리의 주재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원리․법칙의 의미에 해당합니다.

강민우: 이것은 리의 동정(動靜)문제에서 리에 동정이라는 작위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리의 주재를 사람이 말을 타고 가는 것에 비유하는군요.

임영: 그렇습니다. 예컨대 사람이 말을 타고 갈 경우, 사람은 말을 부리고 말은 사람을 태웁니다. 그런데 사람이 말을 부리지 못하고 말이 가는 데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면, 이것은 죽은 자가 말을 타고 있는 셈입니다. 리가 기를 주재하지 못하고 기에게 끌려간다면, 이것은 리가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마치 죽은 사람이 말을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이황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말을 부려야 하듯이, 리가 적극적으로 기를 주재해나갈 것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리의 적극적 주재 하에서만이 현실의 혼란한 세상이 질서를 유지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민우: 이이는 리의 능동적․실재적 주재에 반대하였군요. 왜냐하면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으며, 리는 기에 대한 소이연의 원리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기 때문인 거죠.

임영: 이황과 달리, 이이는 리의 주재를 리가 무위(無爲)하다는 원칙 위에서 출발합니다. 리는 무위하기 때문에 절대로 상제가 세상일을 주재하는 것과 같은 능동적․실재적 주재를 할 수 없습니다. 리가 기를 주재하는 것도 기의 운동이 리를 잘 따르거나 본받아 제대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이황처럼 그렇게 시키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위하다고 전제된 리의 주재는 시키거나 부리는 것과 같은 능동의 뜻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게 하는 기 운동의 내재적 법칙으로서의 의미로만 존재합니다.

강민우: 이처럼 리의 주재를 중심으로 리의 능동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기 운동의 내재적 법칙으로 이해할 것인지를 두고 다양한 논쟁이 전개되었군요. 리의 능동적 측면을 강조한 이황과 달리, 이이는 기 운동의 내재적 법칙으로서 리를 이해한 것이고요.

임영: 이이처럼 리의 주재가 어떤 원리나 법칙으로서만 존재한다면, 인간의 도덕적 당위나 선악의 가치문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황은 리의 초월성과 절대성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리의 초월성과 절대성은 리와 기의 ‘불상리’ 관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리와 기의 ‘불상리’를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논리적․이론적으로는 리와 기를 분리시켜 보려는 ‘불상잡’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리와 기를 분리시켜 놓아야 리를 기보다 우위에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그래야 기에 대한 리의 실질적인 주재가 가능하다는 것이군요.

임영: 저도 이황처럼 리의 실질적 주재에 찬성합니다. 그리고 이이처럼 기 운동의 내재적 법칙으로만 리의 의미를 제한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이이처럼 해석하면, 리의 주재적 의미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이이처럼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불상리’를 강조하면, 리의 실질적 주재는 기의 작위성에 가려지게 되겠군요. 그래서 리의 주재 기능은 상실된다는 말이죠. 마치 죽은 사람이 말을 타고 있는 것처럼, 리는 쓸모없는 물건이 되겠군요.

임영: 그렇습니다. 결국 리의 주재문제를 두고 이황과 이이의 견해가 갈라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저는 능동적․실질적인 리의 주재를 주장하는 이황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또한 사단처럼 선한 감정에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선은 ‘리’에 연유하여 발한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발’이라고 합니다. 칠정에서의 악 또한 ‘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악이 되는 것은 실제로 기의 과․불급(過不及: 지나치거나 모자라는데)에서 연유한 것이지 ‘리’에 연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발’이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이황의 ‘사단은 이발이고 칠정은 기발이다’는 호발설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강민우: 임영 선생님은 이이가 말하는 리와 기의 ‘불상리’를 인정하지만,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발 하나라는 ‘기발이승일도’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뜻이군요. 결국 ‘이기불상리’는 찬성하고 ‘기발이승일도’는 반대하는 것이니 이이의 학설을 부분적 수용과 부분적 비판이라는 입장을 견지한 듯합니다. 이것은 또한 ‘이기불상리’의 관점에서 이황의 호발설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겠네요.

임영: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이와 마찬가지로 제 학설의 기본 전제는 ‘이기불상리’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속의 선한 정감은 ‘리’로부터 발하기 때문에 그대로 이발이 되는 것이고, 악에도 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의 과․불급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므로 기발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황의 호발설을 긍정합니다.

강민우: 임영 선생님의 리에 대한 이해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이어서 박필주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