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의 ‘리’ 이해

 

임영의 이해

 

강민우: 안녕하세요 임영선생님. 만나뵙게 되어 매우 반갑습니다. 앞의 두 선생님과 말씀 나누는 동안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자신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임영: 저의 이름은 임영(林泳, 1649~1696)입니다. 본관이 나주로, 나주 임씨의 후손입니다. 자는 덕함(德涵)이며 호는 창계(滄溪)이니 사람들이 창계선생이라 부릅니다.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임일유(林一儒)이며, 어머니는 임천 조씨로 조석형(趙錫馨)의 딸입니다. 이단상과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입니다.

강민우: 후세 사람들이 “뜻이 크고 박식했으며 조그만 일에 만족하지 않았다. 특히 천인성명(天人性命)설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으며,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정통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라고 평가합니다.

임영: 과찬이십니다. 어려서부터 이단상․박세채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후에는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문하에서도 수학했습니다. 학맥으로 보면 율곡학파에 속하지만, 이이뿐만 아니라 이황의 학설을 받아들이는 절충적인 입장입니다. 특히 이이의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기불상리’에는 찬성하지만, ‘기발이승일도’에는 반대합니다. ‘이기불상리’는 리와 기를 분리시키지 않고 합쳐서 본다는 뜻입니다. ‘기발이승일도’는 이황이 ‘사단은 이발이고 칠정은 기발이다’라고 이해하는 것과 달리,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 하나로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강민우: 선생님께서는 율곡학파이면서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에는 반대하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선생님의 학설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임영: 저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이황의 ‘호발설’을 받아들이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이황의 호발설은 사단은 이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발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이는 이황의 ‘호발설’이 리와 기의 ‘불상리’적 관점에 맞지 않으며, 무엇보다 발하는 주체를 기에 국한시켜 호발설이 옳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불상리’는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단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고 칠정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발(또는 발동)하는 주체는 기이지 결코 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리는 작위성이 없는 형이상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이는 ‘리는 무위하고(理無爲) 기는 유위하다(氣有爲)’라는 말합니다. 리와 기는 항상 함께 있고 발동하는 주체가 기라면, 이황의 ‘이발’은 옳지 않습니다. 칠정뿐만 아니라 사단도 리와 기가 함께 있으며 발동하는 주체는 기이니, 기발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 하나로 해석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발이승일도’입니다.

강민우: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에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한 것이군요.

임영: 이이처럼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불상리’에 한정한다면, 리는 한갓 기의 존재 원인으로서의 의미에 불과할 뿐이고 리의 핵심 개념인 ‘주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고 함께 있으면, 작위성이 없는 리는 작위성을 가진 기의 영향에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성리학에서는 이것을 ‘리약기강(理弱氣强)’으로 표현합니다. 말 그대로 리는 약하고 기는 강하다는 뜻입니다. 리는 약하고 기는 강하기 때문에 리는 기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성리학에서는 리가 기를 주재한다는 ‘리의 주재’를 기본 개념으로 설정합니다. 리와 기가 함께 있으면, 리가 기를 주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리가 기를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초래합니다.

강민우: 이이 학설의 기본 전제는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불상리’에 있는데, 이이처럼 ‘불상리’를 강조하면 ‘리의 주재’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군요.

임영: 그렇습니다. 이이는 리와 기의 불상리의 관점에서 ‘기발이승일도’를 주장하는데, 그렇게 되면 리의 주재능력이 상실되어 리가 가지는 본체와 실용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다시 말하면, 이이의 견해는 리의 소이연(그리된 까닭)으로서의 기능은 작동하지만, 리의 주재기능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강민우: 소이연(所以然)은 그렇게 되는 이유 또는 까닭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임영: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렇게 되는 존재 이유 또는 까닭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이연’이라고 말합니다. 소이연은 이 세상 모든 사물의 존재 근거에 해당합니다. 예컨대 하늘은 왜 높고, 땅은 왜 두터우며, 물고기는 왜 물에서만 헤엄치고, 솔개는 왜 하늘에서만 나는지 등 사물의 존재의 이유 또는 까닭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이러한 소이연은 소당연과 짝을 이룹니다. 소당연(所當然)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인간사 속에서 일어나는 당위법칙에 해당합니다. 예컨대 부모는 왜 자식을 사랑해야 하고 자식은 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며, 임금은 왜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왜 충성해야 하는지 등 당위의 법칙(또는 도덕의 법칙)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소당연에 근거하여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소당연에 근거하기 때문에 자연적이고 필연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민우: 이 세상은 어떻게 존재하고, 그 세상 속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존재와 당위에 대한 두 물음을 소이연과 소당연으로 설명한 것이군요.

임영: 이러한 소이연과 소당연은 모두 ‘리’라는 한 글자에 집약됩니다. 존재의 리는 모든 존재가 그렇게 되는 존재의 이유에 해당하고, 당위의 리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인간의 당위법칙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리는 우주의 자연법칙인 동시에 인간의 도덕법칙이 됩니다. 이것을 성리학적 용어로 ‘소이연’과 ‘소당연’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성리학은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덕규범을 우주자연의 질서 속에서 그 근거를 찾습니다. 우주만물의 원리이고 법칙인 리가 인간에 내재되어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도덕성의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우주자연의 구조와 인간심성의 구조가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주자연의 질서가 곧 인간사회의 당위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리는 존재와 당위라는 이중적 구조를 갖습니다.

강민우: 이이처럼 ‘불상리’를 강조하면 존재의 이유 또는 까닭인 소이연의 의미만 확보된다는 말씀이군요.

임영: 그렇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리에는 소이연과 소당연의 내용뿐만 아니라, 주재라는 커다란 기능이 있습니다. 주재(主宰)란 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하거나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사전에서 정의합니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주재에는 주재하는 자가 주재되는 대상에 대해 적극적인 행동을 가하는 의미가 내포됩니다. 성리학에서 주재하는 것은 리이고 주재되는 대상은 기이니, 리가 기를 주재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왜냐하면 주자는 리의 작위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리의 작위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리가 기에 대해 적극적인 주재를 할 수 없습니다.

강민우: 작위성이 없는 리가 어떻게 기를 주재할 수 있느냐는 것이군요. 리의 주재에 대한 배경적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임영: 성리학에 있어서 ‘리의 주재’라는 말은 고대의 상제(上帝)라는 표현으로까지 소급됩니다. 본래 주재라는 말은 ‘상제가 이 세상을 주재한다’는 표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상제란 우주만물을 주재하는 최고의 인격신을 의미합니다. 상제는 자연현상에서 비․바람․번개 등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도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는 방법으로 이 세상을 주재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발달하고 이성적 사고가 차츰 뿌리를 내리면서 상제가 이 세상을 주재한다는 사상은 의심을 받게 되고, 상제가 주재하던 인격적 의미도 상실하게 됩니다. 상제의 개념이 퇴색되고, 이어서 천(天)․천명(天命)․천도(天道)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그러다가 송대(宋代)에 이르면서 주자는 상제를 리로 대체하여 이 ‘리’가 세상만사를 주재하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강민우: 그래서 주자는 “지금 하늘 안에 죄악을 심판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다. 그렇다고 전혀 주재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라고 하여, 이 세상에 인격적 주재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에 전혀 주재자가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군요.

임영: 주자는 이 세상을 주재하던 인격적 주재자인 상제 대신에 리가 이 세상을 주재하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세상사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은 상제가 주재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리가 그렇게 되도록 주재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리가 이 세상의 주재자로 등장하면서 주재의 의미도 바뀌게 됩니다. 상제가 세상일의 화복(禍福)을 주관하는 인격적 주재자라면, 주자의 리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형이상의 개념으로서 만물의 법칙이나 원리의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원리․법칙․표준 등을 리의 주재로 이해합니다.

강민우: 리와 기의 관계를 다르게 설정함에 따라 리의 주재에 대한 의미도 달라지겠는데요.

임영: 그렇습니다. 리와 기의 ‘불상리’ 속에서는 리의 주재가 법칙․원리의 의미가 되고, 리와 기의 ‘불상잡’ 속에서는 리의 주재가 실재적․능동적 의미가 됩니다. 실재적․능동적 의미로서의 주재란 장수가 부하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리가 작위성을 갖고서 기를 제재․통제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리의 실재적․능동적 주재를 인정할 경우, 직위성이 없는 무위(無爲)한 리가 기를 주재하는 것이 되므로 성리학의 기본 전제에는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리는 ‘정의도 없고 조작도 없는’ 형이상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리의 주재를 기의 법칙이나 원리의 의미로 인정할 경우에는 현실의 지배권이 기에 귀속되어 리는 쓸모없는 물건이 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이로부터 조선의 유학자들도 리의 주재를 둘러싸고 서로 상반된 논쟁을 벌였던 것이군요. 이황과 이이는 모두 리가 기를 주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은 서로 주재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 듯합니다. 이황이 리의 주재를 리가 기를 부리거나 명령하는 것과 같은 실재적․능동적 작용으로 규정한다면, 이이는 리의 주재를 기 운동의 법칙이나 원리의 의미로 이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