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상의 ‘리’ 이해

 

이단상의 이해

 

강민우: 갑자기 주자언론동이고라는 책이름이 언급되는데, 간략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단상: 주자언론동이고는 한원진이 주자(주희: 중국 송대 유학자)의 철학적 진술들 사이에 보이는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히고, 그 철학적 의미를 드러낸 해석학입니다. 단순히 용어 사용의 차이나 기록의 착오를 밝히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주자의 세계관과 고전 해석방법 등을 깊이 있게 해명한 책입니다. 이 책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책이 나옴으로 인해서 주자의 초년과 만년의 견해가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해졌다.”라고 하였고, 현상윤 등 근․현대의 학자들도 조선후기 성리학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합니다.

강민우: 주자말의 같고 다름을 살피고 그 정론(定論)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은 사실상 주자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인 듯합니다. 그래서 주자철학의 최종 정론을 나름대로 규정하려고 하였고, 이것이 학계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주자학을 자기 철학의 이론적 근거로 삼으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것이군요.

이단상: 그렇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모두 자기 이론의 논거를 주자학에 근거지어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이황의 사단칠정설이든 이이의 사단칠정설이든 막론하고 각각 주자학에 근거하여 자기 이론을 전개해 나간다는 말입니다. 이황의 호발설도 주자의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는 구절에 근거합니다. 이이의 ‘기발이승일도’ 역시 주자의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거나 ‘리와 기는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이기불상리의 관점에 근거합니다. 18세기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다툰 논변)의 경우도 동론을 주장한 학자든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든 막론하고 모두 주자학에 근거하여 자기 이론을 전개합니다.

강민우: 율곡학파가 분파된 배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단상: 율곡학파의 분류방식은 학자마다 다양한 관점을 보입니다. 하나는 이이→김장생→송시열→권상하→한원진→임성주로 이어지는 직계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이이→김장생→송시열→김창협→김원행→홍직필→전우로 이어지는 별파 계열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이→김장생→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던 학맥은 권상하에서 전개된 ‘인물성동이논쟁(또는 호락논쟁)’을 지나면서 호론과 낙론으로 나누어지고, 한원진을 중심으로 한 호론은 사실상 한원진 이후 사라진 반면, 이간을 중심으로 한 낙론은 김창협 학맥과 임성주 학맥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방식은 율곡학파 안에서 지나치게 직계를 중심으로 한다는 비판과 동시에 이재 계열과 이단상 계열의 학문적 경향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강민우: 조선의 유학사가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로만 구분되는 줄 알았는데, 율곡학파 내부에도 다양한 계열이 존재하는군요. 이것은 퇴계학파 내에서도 정재학파․한주학파․사미헌학파 등으로 분류되는 것과 유사해 보입니다.

이단상: 그렇습니다. 퇴계학파라고 해서 이황의 학설을 그대로 묵수․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이론이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율곡학파라고 해서 이이의 학설을 그대로 묵수․계승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율곡학파 내에서도 저처럼 이황의 이론을 수용․절충하는 계열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퇴계학파 내에서도 이이의 이론을 수용․절충하는 계열이 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시한․이익․이상정 등이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이 시대적․사회적․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론이든 어떤 학설이든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적․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관점의 재해석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학문이 살아있다는 방증입니다.

강민우: 그래서 퇴계학파 내에서도 다양한 계열의 분파가 일어나고 율곡학파 내에서도 다양한 계열의 분파가 일어났던 것이군요. 특히 이이의 직계 계열은 퇴계학파의 이이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는 최전선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학문적 경향이 두드려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이현일․권상일 등이 퇴계학파의 최전선에서 이이의 이론을 방어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재 계열의 학문적 특징은 주로 무엇인가요?

이단상: 이재 계열의 학문은 이이의 학설 속에서도 ‘리가 기의 주재자가 된다(理爲氣主)’는 것을 강조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리가 기의 주재가 된다’는 것은 성리학의 기본 명제입니다. 이황이든 이이든 또는 퇴계학파든 율곡학파든 모두 리가 기를 주재한다는 리의 주재를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이황과 이이가 말하는 리의 주재에는 약간의 세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강민우: 이황이 말하는 리의 주재 의미와 이이가 말하는 리의 주재 의미가 다르다는 말이군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단상: 이황과 이이의 학설 가운데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리와 기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이황이 리와 기를 분리시켜 보려고 한다면, 이이는 리와 기를 합쳐서 보려고 합니다. 리와 기를 분리시켜 보려는 것을 불상잡(不相雜)이라고 부르고, 리와 기를 합쳐서 보려는 것을 불상리(不相離)라고 부릅니다. ‘불상잡’은 서로 섞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분리시켜 보는 것이 되고, ‘불상리’는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합쳐서 보는 것이 됩니다.

강민우: 리와 기를 분리해서 보든 합쳐서 보든 무슨 특별한 문제가 되나요?

이단상: 그렇습니다. 이 문제는 성리학의 개념정의를 설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됩니다. 예컨대 리의 개념정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성리학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황은 리가 발동한다고 말하지만, 이이는 리가 발동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로써 리는 형이상의 원리이므로 ‘발동(發)’과 같은 작위적 개념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이가 이황의 ‘이발’을 비판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황의 말처럼 리가 발하거나 발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리와 기를 분리시켜야 합니다. 그렇다고 리가 기처럼 실제로 발동한 것은 아니지만, 리의 능동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이처럼 리와 기가 합쳐져 있으면 리는 기의 영향권 속에 있으므로 결코 발동할 수 없습니다. 발동하는 것은 기이고, 리는 다만 기에 타고 있으면서 기가 발동할 수 있게 하는 원리로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은 ‘리의 동정’ 문제와도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강민우: 리의 동정(動靜)은 무엇입니까? 동정이 움직이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기처럼 작용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이단상: 그렇습니다. 동정이란 리가 동정할 수 있는지 동정할 수 없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동정은 기가 음양으로 분화되는 과정에서의 움직임과 고요함이라는 기의 운동 상태를 말합니다. 예컨대 하나의 기가 움직여서 양이 되고 고요하여 음이 된다고 할 때의 움직임과 고요함입니다. 이렇게 볼 때, 동정이란 분명히 기의 동정이지 리의 동정이 아닙니다. 동정이란 기이지 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황은 리가 실제로 동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 이이는 리가 실제로 동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강민우: 동정의 개념정의에서 보면, 이이의 주장이 옳은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이이가 말하길 동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이며, 기가 동정하는데 리가 타고 있으므로 리가 동정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일 뿐이다 라고 말한거군요.

이단상: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황은 리의 동정을 그대로 ‘리가 기를 주재한다’는 리의 주재와 연결시킵니다. 리가 기를 주재하기 위해서는 리가 기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리가 기보다 더 큰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리와 기를 분리시켜 보아야 합니다. 이이의 주장처럼 리와 기가 서로 합쳐져 함께 있으면, 리는 실제로 작용하는 기의 영향을 받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황은 리와 기가 서로 섞일 수 없으므로 분리시켜 보아야 한다는 ‘불상잡’을 강조합니다. 리와 기를 서로 섞지 않고 분리시켜 보아야 리의 동정이나 리의 주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민우: 여러 가지 문제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리가 기를 주재한다는 리의 주재를 주장하기 위해 이황은 리와 기를 분리시켜 보았다는 뜻이군요. 리와 기를 분리시켜 보아야 리의 주재가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단상: 결국 이재 계열의 ‘리가 기의 주재가 된다(理爲氣主)’는 것은 이이 학설의 내용이기도 하지만, 이 문제는 결국 이황이 말한 ‘리의 동정’ 문제와도 맞닿게 됩니다. 이것은 리의 개념정의가 이이와 달라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리의 주재를 강조할수록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이 약화되며, 이것은 그대로 이이 직계 계열에서 기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과 상반됩니다. 이재 계열에서 리의 주재를 강조한 것은 이황이 말하는 실제로 리의 동정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이 직계 계열과 이재 계열의 가장 큰 이론적 차이입니다.

강민우: 율곡학파 내에서 이재 계열은 이황의 학설을 수용하는 입장을 보였다는 의미기도 하겠군요. 결국 이재 계열은 ‘리가 기를 주재한다’는 리의 주재를 두고 이황의 이론을 절충하는 입장을 보이는군요. 그리고 이이처럼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고 하나로 합쳐져 있다는 ‘불상리’ 속에서는 리의 주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인 거죠?

이단상: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이 직계 계열과 이재 계열, 이단상 계열 등 다양한 학단의 분파가 이루어집니다. 이단상 계열의 학자로는 김창협․김창흡․임영․박필주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서도 ‘이발’의 해석에 대한 차이는 약간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이이의 입장에서 이황의 ‘이발’을 이해와 수용이라는 차원에서 ‘도리가 발현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에서 이단상 계열이 지향하는 학문의 자세는 매우 개방적․수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단상이 율곡학파라는 울타리 속에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곡의 직계 계열과는 ‘리’에 대한 해석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그의 문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강민우: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이단상 계열 문인들의 특징은 어떤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김창협 선생님을 만나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