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상의 도학적 학문세계와 정치2

 

이단상의 도학적 학문세계와 정치

 

강민우: 효종과의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이단상: 효종과의 관계가 늘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제가 언관으로 재직하며 형식적인 열병의식 및 군사훈련 검열제도를 중지할 것을 청하는 등 효종이 민감하게 여기던 사안들에 대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특히 김홍욱(金弘郁)이 강빈옥사를 거론하다 맞아 죽은 지 불과 1년 만에 경연에서 그 사건을 언급하고, 언로의 개방을 청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던 일은 효종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강민우: 당시 홍명하(洪命夏)는 ‘오늘 일은 이단상이 아니었다면 필시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일어났을 것이다’라고 탄식할 정도였다지요. 또한 효종이 총애하던 인평대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예법을 따지며 친제(親祭: 임금이 몸소 제사를 지내는 것)하지 말 것을 청한 일로 ‘감히 들을 수 없는’ 엄한 하교를 받기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단상: 저는 효종 연간 관직에 있는 동안 호서 산림들과 의견을 같이 하며 서인의 도학적 정통성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는 1658년(효종 9) 전라도 함평의 정개청 서원, 즉 자산서원(紫山書院)에 관한 상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616년(광해군 8) 북인에 의해 건립된 자산서원은 산림의 영수 김장생이 인조반정 직후 출사하자마자 문제 삼았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김장생은 퇴계학파의 도통의식과 비교하여 서인 학통의 미비함을 우려하며, 16세기 서인의 정치적․사상적 계보를 정리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서인의 구심점으로서 성혼․이이와 더불어 박순(朴淳)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며, 기축옥사 당시 서인의 정치적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강민우: 퇴계학파의 도통의식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이단상: 이황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 퇴계v문하의 학문적 계보를 형성한 대표적 제자로는 정구․김성일․유성룡 등을 듭니다. 이 세 계열의 특징과 학맥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구(鄭逑)는 성주 출신으로 김굉필의 외증손입니다. 처음에는 오건(吳健)에게 배우고, 뒤에 조식(曺植)과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예학에 대단히 밝았으며, 경학․의학․병학에도 뛰어났습니다. 학문과 덕행이 훌륭하여 사림의 존경을 받았으며, 친구 및 문인으로 장현광(張顯光)․김면(金沔)․정온(鄭蘊) 등 60여 명이 있습니다. 그의 학맥은 허목(許穆)에게 이어져서 기호지방의 퇴계학파를 형성하고, 그 뒤 이익(李瀷) 등의 실학파로 이어집니다. 한말의 학자로서 영남 출신인 허훈(許薰) 등이 이 계열에 속합니다.

강민우: 유성룡의 학맥은 어떠합니까?

이단상: 유성룡(柳成龍)은 안동 하회 출신이며 선조 때에 재상으로 임진왜란을 극복한 정치가입니다. 그의 문집에는 성리학보다 시사 및 경세에 관한 내용이 많아 이론체계를 구명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여 리를 강조하고 수양의 첫 단계로 마음의 주재를 세울 것을 말합니다. 문인으로는 이준(李埈)․김봉조(金奉祖) 등 10여 인이 있으나, 상주 출신으로 예학에 밝은 정경세(鄭經世)가 으뜸입니다. 정경세 문하에 유진(柳袗)과 유직(柳稷) 등이 있고, 뒤에 이구(李榘)로 이어지고 한말의 학자인 유수목(柳疇睦)으로 이어집니다.

강민우: 김성일 학맥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세요.

이단상: 김성일(金誠一)은 안동의 천전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방어에 힘쓰다가 순절합니다. 일본에 통신부사로 다녀와서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후대의 평가가 분분하나, 그의 강직한 지절과 일본 사행에서의 주체적 외교 활동 등은 칭송되고 있습니다. 문집이 있으나 대부분 시문이나 언행록이어서 학문에 관한 구체적 내용이나 사상적 특징을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이 흥성하여 그 학맥이 연면하게 이어짐으로서 퇴계학파 정통학맥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합니다.

강민우: 이황의 퇴계학파는 정구․유성룡․김성일로 이어지는 학맥의 지위가 확고해 보입니다. 그래서 당시 김장생은 퇴계학파의 도통의식과 비교하여 서인 학통의 미비함을 우려했던 것이군요.

이단상: 김장생의 제자인 송준길과 송시열 역시 서인 도통론 정립에 각별한 책임감을 가졌습니다. 송준길이 1657년(효종 8) 다시 조정에 나오며 요구한 첫 번째 과제가 자산서원 훼철이었던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자산서원은 조선후기 정개청(鄭介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1589년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희생당한 정개청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세워서 위패를 모신 것입니다. 1657년에 서인의 집권으로 훼철되었다가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상소로 1677년(숙종 3)에 다시 복원되기도 합니다. 그 후 여러 차례 훼철과 복원을 반복하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됩니다.

강민우: 송준길은 정개청이 박순을 배신한 잘못을 거론하며 자산서원 훼철을 효종에게 청합니다. 그러나 남인의 윤선도(尹善道)가 이를 반박하는 상소 가운데 ‘김장생의 견해가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바른 듯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무리와는 당을 만들고 다른 자는 공격한 것에 불과하다’며 조롱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때 김장생 문하의 호서 산림과 별다른 관계가 없던 이단상선생님이 나서서 윤선도의 주장을 ‘망령된 말’이라고 비난한 상소를 올린 것은 뜻밖의 일인 것이죠. 아마도 서인 학통의 제1세대인 박순․성혼․이이의 뒤를 이어, 제2세대의 영수였던 이정구의 손자로서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이단상: 윤선도는 부친 이명한이 이이첨에게 아부하는 시를 지었다고 거론하며 정개청의 무고함을 주장하자, 저는 임금에게 그가 시강관(경연에 참석하여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일을 맡은 관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 줄 것을 청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저는 서인 안에서도 강경파로 자리 잡게 됩니다. 대다수 재경관료들이 산림에 비해 비교적 온건한 당파적 입장을 지녔던 것을 감안하면, 저는 특히 북인에 대해 시비분별을 엄정하게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그 즈음 경연에 입시한 제가 정인홍을 두둔하던 권시(權諰)를 신랄하게 공격하여 인천으로 낙향하게 만든 일도 있는데, 이때 시작된 윤선도 및 권시와의 악연은 현종 초반 기해예송으로 이어집니다.

강민우: 지금까지 이단상선생님의 도학적 또는 정치적 성향을 알아봤습니다. 이어서 선생님계열의 철학사상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강민우: 이단상선생님은 문장뿐만 아니라 당시의 도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도학은 당시 성리학 주도의 학문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단상: 도학(道學)은 중국 송나라 때 새롭게 체계화된 정주학(程朱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의 다른 명칭입니다. 도학이라는 용어는 대학과 중용의 서문에서도 보이지만, 선진유학에서는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된 것은 송대에 이르러 공자와 맹자의 도를 계승한 새로운 유학이 수립되면서부터입니다. 송대의 유학자들은 공자가 집대성한 선진유학이 맹자 이후 약 천 여 년간 이른바 ‘도통(道統)’이 끊어지고, 도가나 불교의 영향 등으로 학풍도 크게 훼손되었다고 인식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북송의 주돈이(周敦頤)․소옹(邵雍)․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 그리고 남송의 주희(朱熹) 등 일련의 유학자들은 공맹의 선진유학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그 근본정신에 투철한 새로운 유학을 완성했습니다.

강민우: 이 새로운 학풍의 유학은 도학․정주학․주자학․성리학․송학(宋學)․성학(聖學)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던 것이죠.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각각의 명칭이 담고 있는 내용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만. 또한 선진 유학과 구분되는 새로운 유학이라는 뜻에서 이들의 학문을 ‘신유학’이라 부르기도 한 것이고요.

이단상: 도학은 송대 유학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기도 하지만, 특히 그 기본 성격은 개인의 높은 도덕적 수양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 :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을 본령으로 하면서 동시에 사회의 여러 현실 문제에도 깊이 관계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강민우: 도학은 학자들로 하여금 올곧은 기개로써 현실 문제에 깊이 참여하게 하는 매우 실천 지향적인 특성을 지녔다는 뜻이군요.

이단상: 그래서 도학은 수기안인(修己安人 : 자신을 잘 가꾸고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 혹은 내성외왕(內聖外王 : 내면적으로는 성인의 덕을 갖추고 외면적으로는 제왕으로서의 능력을 갖춤)이라는 유학의 본령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유학의 본령을 올바르게 지켜온 선현들을 선정하여 유림의 표상 또는 진리를 실천한 사표(師表)로 존숭함으로써 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을 수립합니다.

강민우: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원나라로부터 처음 도학이 수용된 후, 당시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를 교체하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고요. 또한 조선 왕조 개창 이후에는 국가의 정통 이념이 되어 한말(韓末)까지 유학의 정통적인 흐름으로 존숭됨으로써 우리의 정신사와 학술 문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죠.

이단상: 그렇습니다. 저는 문장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를 거쳐 관료로 입신했지만, 젊은 시절부터 도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의 심정은 인조 말년 무렵에 썼던 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평생토록 스스로 공자의 간략함을 지키려 하니, 平生自擬守孔約

아침에 바르게 보고 저녁에 죽고자 하네. 朝欲貞觀而夕死

성인들이 남긴 말씀의 실마리를 더듬으며, 方將群聖緖餘論

그 연원을 탐구하여 날로 나아가려 하네. 探賾淵源期日就

(정관재집권1, 「次濟卿兄嗚呼吟」)

이 시구에서 정관(貞觀)은 본래 주역에 나오는 말로서 ‘천지의 도는 항상 올바르게(貞) 드러나기(觀) 마련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세상을 관통하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법칙(道)의 존재를 확신하며, 그 법칙에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성리학자로서의 전형적 태도입니다.

강민우: 선생님의 도학자적 풍모를 잘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기필(期必 : 꼭 이루어지기를 기대함.)하던 도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모습이었습니까?

이단상: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의 시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나는 지금 한 귀퉁이에 태어나 況我今生一隅阨

아득한 지치(至治)를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邈矣至治其難覿

밝고 밝은 천리(天理)는 칠흑같이 캄캄하고 昭昭天理黑如漆

오랑캐가 변방에서 칼자루를 거꾸로 잡았구나. 夷羯倒執潢池柄

임금을 받들어 더러움을 씻어낼 재주가 없다면 如無捧日滌穢才

그저 자취를 감추고 운명에 순응할 뿐 好須斂跡安吾命

예악과 황제의 패도를 종횡으로 논하며 縱橫禮樂帝伯論

아름다운 경치 속에 한가로이 노니리라. 徜徉風花雪月景

(정관재집권1, 「次濟卿兄嗚呼吟」)

저는 세상의 도가 정작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못함을 한탄하며,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해 가던 당시 정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관직에 나아가 오랑캐를 소탕할 수 없다면 산림처사의 삶을 선택해 학문에 전념할 뿐이라는 다소 체념적인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효종의 조정에 나갔다가 여의치 않자 양주에 있는 동강(東岡)으로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게 되는 저의 미래를 예시한 말이기도 합니다.

강민우: 1649년 5월 왕위에 오른 효종은 즉위 직후 산림(山林 : 초야에 은거하면서 학덕을 겸비해 국가로부터 존중을 받은 인물.)을 등용하여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추진합니다. 조선 전기 국정을 주도한 세력이 주로 서울의 공신과 관료였다면, 효종 초반 호서 산림의 등장은 조선 후기 정치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만.

이단상: 당시는 김집과 송시열 등 산림의 학자들과 김육을 중심으로 한 재경관료들의 현실적 태도가 충돌을 빚으며, 이른바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경관료를 대표하는 가문 출신인 제가 효종 초반 출사 직후부터 산당과 가까운 관계였음이 특이합니다. 물론 선대부터 쌓아 온 서울 지역 명문집안 간의 대대로 이어진 친분 역시 두터웠습니다. 일가의 먼 친척이자 반정공신 이귀(李貴)의 아들인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 형제나, 신흠(申欽)의 손자이자 신익전(申翊全)의 아들 신정(申晸)과는 형제 같은 사이였습니다. 또한 현종 연간 절교하게 된 김좌명(金佐明)과 서필원(徐必遠) 등 한당의 주요 인물들과도 교분이 깊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조정에서 뜻과 행동을 함께 한 사람들은 대체로 산당에 속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병자호란 때 겪은 풍파로 인해 정식으로 스승을 모시고 벗을 사귈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교유 관계가 그리 넓어 보이지 않습니다.

이단상: 저의 주변 인물들은 대략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직접 배우지 않았지만 스승처럼 여기던 사람들로서 김상헌(金尙憲)과 이경여(李敬輿)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인조 말년 친청파(親淸派: 중국 청나라와 친한 무리)가 득세하던 조정에서 척화론의 계승을 주장하고, 효종의 북벌에 적극 공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효종 초반 산림의 영수였던 김집(金集)에 대해서도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할 정도로 각별한 존모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강민우: 둘째와 셋째의 부류에 대해서도 마저 말씀해주세요.

이단상: 둘째는 큰형 이일상과 비슷한 연배이자 당시 조정의 중진이었던 홍명하와 조복양, 그리고 산림의 핵심인 송준길과 송시열이었습니다. 이들은 30세를 전후한 시기에 병자호란을 경험한 세대로, 호란 후유증의 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직접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선배라 할 수 있는 이들을 통해 조정 내부의 긴요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고, 또한 학문과 현실 정치의 방향성에 관하여 긴밀히 상의했습니다. 또한 평생의 지기(知己: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자 사돈인 이정기 역시 제가 크게 의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셋째는 동년배인 민정중(閔鼎重)․김수항(金壽恒)․박세채(朴世采) 등이었습니다. 10세 무렵 전쟁을 겪었던 이들은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앞 세대와 공유했으나, 복수의 필요성과 방법론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 차이를 보였습니다. 또한 일찍 관계를 끊었던 윤증(尹拯) 및 종묘 문제로 논쟁을 벌였던 남구만(南九萬) 등도 비슷한 또래였는데, 이 세대의 사상적 차이가 훗날 노론과 소론의 분립으로 귀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강민우: 효종 초반 조정에 나아간 선생님은 승문원․예문관․춘추관․홍문관 등 국가의 문한(文翰 : 문필에 관한 일 혹은 문장에 능한 사람)을 관장하는 관직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의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병조의 낭관, 언론의 중책을 맡은 사헌부․사간원, 국왕과 세자를 측근에서 보필하는 승정원과 시강원 등의 청렴한 요직을 두루 역임했습니다. 고위 관료로 성장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던 이 같은 관료경력은 당시 선생님이 서인 내부에서 중망을 받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정구의 손자이자 이명한의 아들이라는 가문의 배경 때문이기도 하였겠지만, 조정에 있는 동안 늘 지제교(知製敎: 조선시대 임금에게 문서 등을 기초하여 바치는 일을 담당한 관직)를 겸직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자신이 갖추었던 뛰어난 문장 덕분이기도 하였던 것이죠. 또한 효종 때에 내내 경연과 서연에 출입했던 사실은 문장 뿐 아니라 학문에 대해서도 세간의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단상: 과찬이십니다. 그렇다고 저의 관직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효종의 시대는 청나라의 강압이라는 외부적 요인과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두 가지 난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소현세자 죽음 이후 효종의 세자 책봉 과정에서 야기된 정통성의 문제였고, 둘째는 군사 훈련과 군비 확충에 대한 신료들의 비판과 불신이었습니다. 따라서 효종은 왕실 및 군사정책과 관련된 간언을 좀처럼 용납하지 못하고 강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추진하던 효종의 입장을 지지하신 것 같아요.

이단상: 1650년(효종 1) 김자점(金自點)이 청나라에 북벌 동향을 밀고하자, 청나라는 국경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6명의 사신을 잇달아 파견하여 조선의 조정을 압박했습니다. 이때 저는 사관(史官: 조선시대 역사서 편찬 및 국가 기록물 관리를 담당한 관리)의 신분으로 효종을 수행하여 남별궁에 나아가 청나라 사신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의 심정을 적은 시가 있는데, 그것이 <분함을 쏟아내며>라는 시 입니다.

온 세상이 풍진으로 캄캄하더니 四海風塵暗

중원에 전쟁이 멈췄구나. 中原戰伐停

하늘은 어찌 지금까지 취해 있는가 天何今日醉

피비린내 10년인데…… 血已十年腥.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나 主辱臣宜死

시대가 위태하니 權道만 헤아리누나. 時危算出權

칼을 울릴 의지가 없지 않으나 非無鳴劍志

외진 나라 뒤웅박 신세를 어이하랴. 瓠繫奈邦偏.(정관재집권1, 「寫憤」)

청나라의 강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조정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등을 백마산성에 구금했고, 북벌을 위해 출사했던 송시열 등 산림들도 모두 조정을 떠났습니다. 관료의 처지에서 이러한 상황을 목도한 저는 분노와 무기력한 심경을 위와 같이 토로했습니다. 강성한 청나라의 위세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힘없는 나라의 신하가 지녔던 울분이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친청파가 득세하던 인조 말년에 비하여 효종 즉위 이후 김상헌․김집 그리고 송준길․송시열․홍명하 등이 조정을 주도하자, 천하의 대의(大義)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단상: 저는 북벌의 대업을 도모하던 효종의 성세를 만났음을 다행이라 여기며, ‘물러나 밥 먹을 때가 아니면 늘 임금 곁에 있었다.’고 한 행장의 서술에서처럼, 효종의 측근에서 그 뜻을 보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