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흡의 ‘리’ 이해2

 

김창흡의 이해

 

강민우: 안녕하세요 김창흡 선생님. 먼저 선생님의 개인적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창흡: 저의 이름은 김창흡(金昌翕, 1653~1722)입니다. 서울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니 안동 김씨의 후손입니다. 자는 자익(子益)이고, 호는 삼연(三淵)이니 사람들이 삼연선생이라 부릅니다. 좌의정을 지낸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이며, 어머니는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입니다. 형으로는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를 지낸 김창협(金昌協)이 있으며, 이단상의 문인입니다.

강민우: 앞에서 소개한 김창협선생님의 동생이시군요.

김창흡: 그렇습니다. 두 분의 형님을 비롯하여, 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등 모두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저는 보시다시피 좋은 집안의 배경에서 태어났습니다.

강민우: 그렇게 보입니다. 너무 부럽습니다. 선생님의 학문세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김창흡: 저는 리와 기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리와 기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상리’와 서로 섞일 수 없는 ‘불상잡’의 관계를 동시에 인정하면서, 또한 리와 기를 횡설(橫說)과 수설(竪說)의 구조로 설명합니다. 제가 리와 기를 해석하는 핵심 요지는 여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횡설과 수설은 모두 쌍 개념으로 어떤 효과를 주기 위해 배열하는 방식입니다. ‘횡설’은 쌍 개념을 서로 수평관계에 놓고 대비하는 방식인데, 서로 대립하는 쌍 개념을 대비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수설’은 쌍 개념을 서로 수직관계에 놓고 대비하는 방식으로, 쌍 개념 가운데 무엇이 근원적인지 보여주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예컨대 횡설은 리와 기를 좌우로 배치하여 서로 승부를 다투는 가치론적 관계로 파악하는 배치 방식이고, 수설은 리와 기를 상하로 배치하여 리가 기에 타고 있는 존재론적 관계로 파악하는 배치 방식입니다. 좌우로 된 프레임(횡설)은 서로 갈등관계에 놓인 가치론적 속성들을 이분법적으로 표시하기에 효과적이고, 상하로 된 프레임(수설)은 형이상의 원리와 형이하의 재료라는 존재론적 속성들을 표시하기에 적합합니다.

강민우: 김창흡 선생님께서 리와 기를 분석하는 도구로 횡설과 수설의 방법을 동원한 것은 이황과 이이의 철학적 특성을 프레임의 차원에 기인하여 분류하기 위한 것이네요. 일찍이 기대승은 이황과의 논변에서 자신의 학설이 수설에 서 있음을 말하고, 리와 기를 인잉(因仍 : 답습하다. 그대로 쫓다.)의 관계로 파악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를 피력합니다. 반면 이황은 리와 기를 대대(待對)의 관계로 파악하여 사단과 칠정이 대립한다는 ‘사단대칠정’의 논리를 피력합니다. 결국 횡설이 분개(또는 불상잡)의 방법에 해당한다면, 수설은 혼륜(또는 불상리)의 방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창흡: 그렇습니다. 횡설과 수설은 기존의 많은 연구자들이 시도한 분석 기법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이황과 이이의 사단칠정설이 프레임의 차이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지적합니다. “리에는 횡설․수설이 있는데, 사방이 횡이고 상하가 수입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지금까지가 수이고, 동서남북이 횡입니다. ‘수’는 유행해서 다함이 없어서 형이상으로부터 형이하까지를 말하는 것이고, ‘횡’은 일정하여 변함이 없어서 각기 그 위치가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태극에 동정이 있다는 것은 수설 쪽이며, 태극에 음양이 있다는 것은 횡설 쪽입니다.”

강민우: 김창흡 선생님이 태극(또는 리)을 분석하는 방법에 횡설과 수설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한다는 자체가 분석의 치밀함이 돋보이는 대목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곡학파의 이단상 계열이 이해한 ‘리’의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김창흡: ‘사방이 횡이고 상하가 수이다’는 것은 시간적․공간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리와 기를 해명한 것으로써, 좌우대칭 구도가 ‘횡’이고 수직상하 구도가 ‘수’임을 전제하여 리에 이 두 가지가 내재해있음을 설명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가 수이고 동서남북이 횡이다’는 것은 앞에서 보여준 시간적․공간적인 도구와 다른 시간적 도구를 이용하여 쉽게 접근하고자 한 것입니다. ‘수’라는 것은 유행하는 시간과 같은 것에 대비적으로 나타내고, ‘횡’이란 것은 대대 혹은 대칭의 구도에 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수설’은 상하를 이분적으로 나뉘어 놓은 방식인 형이상과 형이하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고, ‘횡설’은 대대와 대칭 구도에서 자신의 역할이 바뀔 수 없음을 대비적으로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상대를 기다려서 있는 형국이므로 ‘가치론적 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그렇다면 ‘수설’을 존재론적 구도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김창흡: ‘태극에 동정이 있는 것은 수설의 한 단면이다’는 것은 태극이 움직인다는 것을 인잉(因仍)의 구도에서 보면, 생성의 원인자인 태극이 움직인다는 것이니, 이것은 존재론적 시각에 있으므로 ‘수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또한 ‘태극에 음양이 있다는 것은 횡설의 한 단면이다’는 것은 태극을 리로, 음양을 기로 대치한다면 리와 기가 서로 대대 혹은 대칭의 구도에 있으므로 ‘횡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인잉’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김창흡: ‘인잉’은 인설(仁說)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따르는 것(因循)’이라는 의미입니다. 앞의 것을 따라서 인과적으로 말하는 방식을 인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인설은 상하를 말하는 것과 같은데 ‘성이 발하여 정이 된다(性發爲情)’라는 구절에서 성과 정이 각각 ‘상’과 ‘하’가 됩니다. 그러므로 정은 성을 그대로 따라서(因仍) 발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사단과 칠정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의 정이라는 점이 논증됩니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성에서 발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황의 사단과 칠정이 발하는 소종래(所從來)가 각각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사단과 칠정을 ‘이발’과 ‘기발’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기대승은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이황처럼 대설(對說)이 아닌 단일 구조로 파악합니다. 예컨대 ‘대설’이란 ‘사단은 리에 해당하고 칠정은 기에 해당한다’거나 ‘사단은 선에 해당하고 칠정은 불선에 해당한다’는 것처럼 상대적 또는 대립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달리 단일구조는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거나 사단이 칠정에 포함되는 것처럼 하나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황의 ‘대설’이 잘못이라고 비판합니다.

강민우: 결국 인잉 또는 인설은 대설에 상대되는 개념이군요. 선생님께서 횡설과 수설과 같은 도구로 기존 학설들의 차이를 포착해내는 것에서 학문적 깊이가 느껴집니다. 선생님은 존재론적 시각에서처럼 이 우주의 만물이 생생하여 그치지 않고 변화가 무궁한 것은 ‘수설’이라 말하고, 또한 남녀가 서로 마주 서고, 사람과 물건이 마주 서며, 강한 선악과 부드러운 선악이 마주 서 있는 것은 ‘횡설’이라 말합니다. 더 나아가 선생님은 사단칠정설을 횡설과 수설로 구별하여 그것을 절충하는 입장을 견지하는군요.

김창흡: 이이가 말한 ‘선은 맑은 기를 타고 발한 것이고 악은 탁한 기를 타고 발한 것이다’는 것은 그 주장하는 것이 기에 있는 것만 알고 성의 선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니, 또한 맹자의 뜻과 다릅니다. 저도 이이의 ‘선은 맑은 기를 타고 발한 것이고 악은 탁한 기를 타고 발한 것이다’는 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이 맑은 기를 타고 발한 것이고 모든 악이 탁한 기를 타고 발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지극히 무도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이 자기의 부모를 해치는 것을 보면 원수를 갚을 것을 생각합니다. 지극히 무도한 사람은 탁한 기로 가득한 사람일 것인데, 그렇다면 원수를 갚으려는 선한 마음은 어떻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선한 정은 리(또는 천리)가 발한 것이지 맑은 기가 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에 근원하는 천리는 외부사물에 감응하면 바로 발하는데, 비록 타는 기가 탁하고 맑지 않더라도 그것에 의해 가려지지 않습니다. 만약 정의 선악을 오로지 기의 맑고 탁한 것으로 돌린다면, 리의 실체인 성이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맹자가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강민우: 이이에 따르면, 성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맑은 기든 탁한 기든 전적으로 기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군요. 왜냐하면 비록 천리인 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맑은 마음이 아니면 제대로 발하여 나오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것이 이이가 마음을 기로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김창흡: 그렇습니다. 이이는 성(또는 천리)의 실현도 결국 마음의 작용이며, 이때 발하는 주체인 기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때문에 이이는 이황과 달리, 기를 중시하는 학자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이는 마음을 기로 해석하여 심시기(心是氣)를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이이가 심을 기로 규정하는 심시기(心是氣)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강민우: 그렇다면 이이는 심을 리와 기의 결합으로 규정하는 성리학의 일반적인 해석을 부정하는 것입니까?

김창흡: 그렇지 않습니다. 이이도 “심속에 있는 리가 바로 성이다”라고 하여, 심을 리와 기의 결합으로 이해합니다. 이이는 심속에 성이 갖추어져 있다거나 심이 리와 기의 결함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또한 심을 기로써 규정합니다. 이것은 그의 ‘기발이승일도’와 관련됩니다. ‘기발이승일도’에 따르면, 사단칠정에서 모두 발하는 것은 기이고 발하게 하는 이유는 리입니다. 사단도 기가 발한 것이고 칠정도 기가 발한 것이니, 사단과 칠정은 모두 기가 발한 것이므로 심은 기가 됩니다. 또한 이이는 “성은 심속의 리이고 심은 성을 담는 그릇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리가 기에 실려있는 것처럼 성도 심에 담겨있으니, 실제로 작용하여 성을 드러내는 주체는 심이 됩니다. 이러한 주체로서의 심의 작용성을 그대로 기로 해석한 것입니다.

강민우: 그래서 김창흡 선생님은 이이가 성의 실현(또는 도덕적 실천)을 ‘기’의 발동 여부에 있다고 간주하여 ‘기’만 알고 인간 본성의 발현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였다고 비판한 것이군요. 맑은 기와 탁한 기에서 성의 실현 여부가 결정되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본성에서 발출되는 선함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겠군요.

김창흡: 예컨대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보통사람이든 성인이든 포악한 사람이든 막론하고 누구나 선한 본성이 발출하여 어린아이를 구제하는데, 이때는 맑거나 탁한 기가 그것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선한 감정이 유지되고 있을 때는, 즉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과 같은 어떠한 사태에 직면해서는 ‘기’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선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도리가 드러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강민우: 선생님도 ‘도리가 드러난 것’이라는 이단상 계열의 ‘리’에 대한 이해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군요. 또한 ‘도리가 드러난 것’은 그대로 이황이 말한 ‘이발’의 의미와 유사하다는 것이죠.

김창흡: 그래서 저는 이이가 이황을 비판한 것과는 달리, 이황의 이발에 대해 받아들일 부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理之發)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氣之發)’는 주자의 말을 살피지 못하면 병통에 빠지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주자는 사단과 칠정의 이기론적 해석에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황은 자신의 ‘사단은 리가 발한 것(理發)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氣發)이다’는 호발설의 이론적 근거를 주자의 이 말에 둔 것처럼, 저 역시 주자의 말에 동의합니다. 저는 주자와 이황의 사단과 칠정의 이기론적 해석을 모두 인정합니다. ‘이기론적 해석’이란 리와 기로써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설명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강민우: ‘사단을 이발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기대승의 비판에 직면했을 때, 이황은 주자 역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라 보았다고 말한 것이죠. 결국 김창흡 선생님은 이이와 달리, 이황의 이발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김창흡: 그렇습니다. 물론 이때 이황을 비판한 기대승의 학설은 이이의 학설과 매우 유사합니다. 제가 지금 이황과 이이를 대조해서 이들의 이론적 차이를 말하지만, 실제로 이황과 이이가 직접 논변을 전개한 것은 아닙니다. 먼저 이황과 기대승이 사단칠정의 문제를 두고 논변을 전개하며, 이후에 이황의 입장에 서있던 성혼(成渾)과 기대승의 입장에 서있던 이이가 이어서 논변을 전개합니다. 그렇지만 논변의 내용에서 보면, 이이가 이황의 이론을 비판하고 성혼이 이황의 이론을 변호함으로써 이황과 이이가 직접 논변을 전개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또한 제가 이황의 ‘이발’을 일정 부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이발’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쓰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단은 ‘도리(또는 리)가 드러난 것’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강민우: 선생님의 리에 대한 말씀은 부족하나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임영 선생님의 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