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협의 ‘리’이해

 

김창협의 이해

 

강민우: 안녕하세요. 김창협선생님. 먼저 선생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창협: 저는 경기도 과천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 유학자 김창협(金昌協, 1651~1708)입니다. 본관은 안동으로, 안동 김씨의 후손입니다. 자는 중화(仲和)이고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 등이 있는데, 사람들은 저를 농암선생이라 부릅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척화를 주장했던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며,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이고 어머니는 해주목사를 지낸 나성두(羅星斗)의 딸입니다.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의 동생이며, 조선 말기 형제 영의정으로 유명한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의 6대 조부이기도 합니다.

강민우: 집안의 배경이 너무 대단해보입니다. 먼저 선생님의 학문세계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오늘날 김창협선생님의 학문은 이황과 이익의 학설을 절충한 것으로 평가됩니다만. 그 내용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김창협: 이러한 평가는 저의 사단칠정론에 대한 것인 듯합니다.

강민우: 율곡학파의 홍직필(洪直弼)은 “김창협의 사단칠정론은 정밀해서 조금도 흠결이 없으며, 사단칠정론이야 말로 그의 문자 중에 제일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퇴계학파의 이진상(李震相) 역시 그를 뛰어난 학자로 칭송하고 사단칠정론에 대해 매우 정밀하다고 진단했습니다. 이것은 김창협선생의 사단칠정론이 당시 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김창협: 저는 이황과 이이의 사단칠정론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컨대 ‘사단은 선한 부분이며 칠정은 선악을 겸한다거나, 사단은 리만을 말하고 칠정은 기를 겸해서 말한다’는 이이의 학설이 명백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의 생각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들 내용 가운데 차이는 다만 ‘칠정은 기를 겸해서 말한다’는 한 구절에 있습니다. 이이에게 있어서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가리키니 ‘리’에 해당합니다. 그렇다고 사단을 곧바로 ‘이발’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발’이라는 표현은 기와 같은 작위적 개념에 해당하기 때문에 결코 작위가 없는 무위한 리에는 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이는 사단도 기가 발한 것이라는 ‘기발’로 설명합니다. 사단이든 칠정이든 발하는 것은 모두 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칠정은 사단을 포함한 정의 전체를 말합니다. 이때는 선한 정뿐만 아니라 불선(악)한 정도 있으므로 칠정은 리와 기를 겸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황이 칠정을 주로 악으로 흐르기 쉬운 불선한 정으로 설명하는 것과 구분됩니다. 왜냐하면 이이가 보기에 칠정에는 사단과 같은 선한 정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칠정이 리와 기를 겸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김창협: 그렇지 않습니다. 칠정에도 리와 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칠정이 리와 기를 겸한다기보다는 기를 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칠정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다’거나 ‘리와 기를 겸하지만’ 칠정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입니다. ‘기를 주로 한다’는 것은 칠정에도 리가 있고 기가 있지만 기가 중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칠정은 성이 발한 이후의 일이므로 리와 기가 함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이나 존재 등은 리와 기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칠정은 성(또는 리)과 달리, 리와 기가 함께 있습니다. 성리학에서는 성이 발하여 드러난 정을 성발위정(性發爲情)이라 말합니다. 성리학의 중심 개념인 성즉리(性卽理)에 따르면, 성이 곧 리이므로 이때 성은 리가 되지만, 칠정은 성이 발한 이후의 일이므로 리와 기를 겸합니다. 이이는 칠정이 기뿐만 아니라 리를 겸한다는 사실을 매우 중시합니다. ‘리와 기를 겸한다’는 것은 칠정에는 리가 있고 기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칠정은 사단을 포함한 정의 전체를 말하므로 칠정을 곧장 기로만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칠정을 곧장 기로만 보면 칠정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단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집니다.

강민우: 그래서 이이는 사단은 리이지만 칠정은 리와 기를 겸한다고 주장한 것이군요. 칠정 속에는 리에 해당하는 사단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대로 기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네요.

김창협: 그렇습니다. 저는 칠정이 리와 기를 겸한다고 보는 이이의 주장과 달리, 칠정은 기를 주로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기를 주로 한다’는 것은 비록 칠정에 리와 기가 함께 있지만, 칠정은 어디까지나 기를 위주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강민우: 이것은 이황이 칠정을 ‘기발’로 해석하는 것과 유사해 보입니다. 이황 역시 칠정에는 리와 기가 함께 있지만, 기를 주로 해서 보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김창협선생의 주장은 이이보다 이황의 견해에 동조하는 의미가 되겠군요. 선생님은 퇴계학파가 아니라, 이이의 학맥을 계승한 율곡학파인데 말이죠.

김창협: 이황이 ‘사단은 이발이고 칠정은 기발이다’한 것에 대해서도, 이이는 사단의 이발과 마찬가지로 칠정을 기발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칠정에는 기와 동시에 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이(또는 기대승)의 비판에 직면해서, 이황 역시 리를 주로 하고 기를 주로 하는 주리․주기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사단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고 칠정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지만, 사단은 리와 기 가운데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칠정은 리와 기 가운데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칠정에도 비록 리와 기가 함께 있지만, 기를 주로 하여 말할 수 있으므로 그대로 ‘기발’이라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강민우: 결국 김창협 선생님의 칠정이 기를 주로 한다는 것은 이황의 ‘기발’의 뜻과 유사해지는군요.

김창협: 그렇게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후대에서는 저를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수용하여 절충한 인물로 분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칠정이 ‘기가 주가 된다’는 것은 결국 악으로 흐르기 쉬운 정이라는 의미입니다. 리와 기가 함께 있으나 기가 위주가 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리의 의미가 약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칠정에는 리가 약해지고 기가 왕성해집니다. 그래서 칠정이란 이황처럼 어디까지나 조심하고 절제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이것은 이이가 칠정 속의 선한 부분을 사단으로 이해하고, 칠정 속의 그 선한 부분(리)을 고려하는 것과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이는 인간의 기쁨․분노․슬픔․즐거움․사랑․미움․욕심 등의 일반적 감정을 그대로 악으로 흐르기 쉬운 불선한 것으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을 모두 불선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부정한다는 것은 현실적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부정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이이는 이황이 칠정을 ‘기발’로 보는 것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강민우: 결국 이황과 이이 사이에 존재하는 학설상 차이의 출발은 사단과 칠정의 개념적 정의를 달리하는데 있어 보입니다. 이황이 리에 근원하는 사단과 기에 근원하는 칠정으로 사단과 칠정을 근원적으로 서로 다른 별개의 정으로 이해한다면, 이이는 사단이란 칠정 속의 선한 부분을 가리키므로 사단과 칠정을 하나의 정으로 이해합니다. 사단과 칠정이 하나의 정인지 서로 다른 별개의 정인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검증이 필요해 보입니다. 사단의 감정이 나오는 곳과 칠정의 감정이 나오는 곳이 따로 있으면 이황의 학설에 부합할 것이고, 반대로 사단의 감정과 칠정의 감정이 나오는 곳이 한 곳이면 이이의 이론에 부합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누구의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같습니다.

김창협: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황의 학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단과 칠정의 개념정의에 대해서는 입장이 다릅니다. 이황처럼 사단은 리에 근원하고 칠정은 기에 근원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합니다. 정은 칠정 하나이며, 그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사단으로 보는 이이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결국 이황처럼 사단의 정이 따로 있고 칠정의 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은 칠정 하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강민우: 선생님과 이황의 사단칠정설에 대한 출발이 다른데도, 서로 유사한 학설로 귀결되는군요.

김창협: 그렇습니다. 칠정이 리와 기를 겸하지만 기를 주로 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기를 주로 하는 것을 주기(主氣)라고 말합니다. 이이는 칠정을 ‘주기’로 말하는데 반대하지만, 저는 칠정을 ‘주기’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황 역시 주리와 주기라는 표현을 씁니다. ‘주리’는 리를 주로 해서 말한다는 뜻이고, ‘주기’는 기를 주로 해서 말한다는 뜻입니다.

강민우: 주리와 주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김창협: 원래 주리․주기라는 말은 이황이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는 사단/이발, 칠정/기발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개념입니다. 이이는 사단과 칠정이 모두 발동한 이후의 정이므로 사단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고 칠정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황은 이이처럼 사단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고 칠정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지만, (즉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사단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므로 ‘이발’이 되고 칠정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므로 기발이 된다고 반박합니다. 여기에서 리를 주로 한다는 주리(主理)와 기를 주로 한다는 주기(主氣)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강민우: 결국 주리․주기라는 표현은 이황이 자기 이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개념이군요.

김창협: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주리․주기에 대한 간단한 보충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원래 주리·주기란 리와 기의 서로 떨어질 수 없는(不相離) 관계를 전제로 한 용어입니다. 왜냐하면 리와 기가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주로 한다’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리와 기는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리될 수 없는 가운데 리를 주로 해서 말하거나 기를 주로 해서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주리·주기의 논리입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어디까지나 논리적 또는 이론적으로만 가능합니다.

강민우: 현실적으로 리와 기는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도 이들을 분리시켜 설명하므로 논리적 또는 이론적 관점이라고 말하는 것이군요.

김창협: 이처럼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데,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을 떨어뜨려 보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을 불상잡 또는 분개라고 부릅니다. 불상잡 또는 분개(分開)는 불상리 또는 혼륜(渾淪)과 짝을 이룹니다. 서로 섞일 수 없는 불상잡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상리’와 짝을 이루며, 분리시켜 보는 분개는 합쳐서 보는 혼륜(渾淪)과 짝을 이룹니다. 이황이 지향하는 관점이 불상잡 또는 분개라면, 이이가 지향하는 관점은 불상리 또는 혼륜입니다. 결국 리를 주로 해서 말하거나 기를 주로 해서 말하는 주리․주기의 관점은 리와 기를 분리시킨 불상잡 또는 분개의 논리에서만 가능합니다.

강민우: 결국 김창협선생께서 ‘주기’로 칠정을 이해하는 것은 이황처럼 불상잡 또는 분개의 관점을 중시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칠정이 ‘주기’라면, 사단은 ‘주리’가 되는 것이겠군요.

김창협: 그렇습니다. 칠정과 마찬가지로 사단에도 리와 기가 함께 있지만, 사단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황이 사단을 ‘이발’로, 칠정을 ‘기발’이라 주장할 때도 주리․주기의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리가 주가 되므로 그대로 리가 발한 것(理發)이고,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가 주가 되므로 그대로 기가 발한 것(氣發)입니다. 이처럼 주리․주기의 관점으로 사단과 칠정을 해석하는 것은 이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이이에 있어서 사단은 ‘주리’로 볼 수 있으나 칠정은 ‘주기’로 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사단은 칠정 가운에 선한 부분만을 가리키므로 ‘주리’라고 할 수 있지만, 칠정은 사단을 포함한 정의 전체를 가리키므로 ‘주기’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악의 개념으로 말하면, ‘주리’는 리가 주가 되므로 선이 되지만 ‘주기’는 기가 주가 되므로 불선(악으로 흐르기 쉬운)이 됩니다. 칠정 속에는 사단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그대로 주기(또는 불선)하다고 할 수 없으며, 또한 칠정을 주기(불선)라 하면 자칫 인간의 감정 전체가 불선한 것이 됩니다. 이 때문에 이이는 칠정을 주기로 해석하는데 반대합니다.

강민우: 그래서 후대 학자들은 김창협 선생님이 이황의 이론을 절충하였다고 평가하는 것이겠군요. 반대로 이이의 직계 계열에서는 선생님의 해석에 많은 비판을 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창협: 이황은 이러한 주리․주기의 관점에서 사단을 이발로, 칠정을 기발이라 규정하고, 더 나아가 사단에도 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칠정에도 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사단은 이발에다 기수지(氣隨之)를 더하여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로, 칠정은 기발에다 이승지(理乘之)를 더하여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황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근거하여, 저는 이황선생을 “그 생각의 정밀함은 후대 사람들이 살피지 않을 수 없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강민우: 이러한 이유로 선생님의 사단칠정설이 생전에 출판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 배경에는 이이 직계 계열인 권상하 등의 질책과 방해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하다가 1854년 속집을 편집할 때 전문이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군요. 이것은 그만큼 김창협선생님의 글이 당시에 율곡학파 내부에 던진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더라도 선생님의 사단칠정설에 대해서는 적어도 이황의 입장에 매우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김창협: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이 학설의 요지는 발(또는 발용)하는 주체가 기이고 발하게 하는 원리가 리라고 보는데 있습니다. 리는 원리이므로 ‘발’과 같은 작위적 개념에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이는 이황이 말한 이발과 기발에서의 ‘발’을 모두 동일선상에 놓고 보아서는 안 된다고 비판합니다. 작위적 개념인 기가 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작위성이 없는 무위한 리가 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리는 원리이므로 작위성이 없는데, 이것을 리무위(理無爲)라고 부릅니다. 리는 무위하다, 즉 작위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이는 리는 무위하므로 ‘발’과 같은 작위적 개념에 쓸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황의 ‘이발’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와 달리 기는 작위성이 있으므로 ‘발’과 같은 작위적 개념에 쓸 수 있습니다. ‘기발’이라는 표현은 타당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 하나로 해석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입니다. 또한 이러한 기의 작위성을 기유위(氣有爲)라고 부릅니다.

강민우: 이러한 이유에서 이이 학설의 핵심 요지 중의 하나가 바로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理無爲 氣有爲)’는 것이군요.

김창협: 그렇습니다. 리는 무위하므로 작위성이 없고, 기는 유위하므로 작위성이 있습니다. 작위성이 없으므로 이발이라고 말할 수 없고, 작위성이 있으므로 기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황이 사단을 이발이라 말한 것은 잘못된 것이며, ‘발’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기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이는 칠정뿐만 아니라 사단까지도 모두 기발 하나로 해석하여 ‘기발이승일도’를 주장한 것입니다. 사단이든 칠정이든 모두 발하는 것은 ‘기’이고, 리는 다만 기 위에 타고 있을 뿐입니다.

강민우: 이이가 보기에 ‘이발’은 옳지 않으므로 이황의 ‘사단은 이발(理發而氣隨之)이고 칠정은 기발(氣發而理乘之)’이라는 호발설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이군요.

김창협: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이와 달리, 이황의 ‘이발’을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황처럼 소종래(所從來)에 따른 근원적인 차이까지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이황은 사단의 근원을 미루어 가면 리가 되고 칠정의 근원을 미루어 가면 기가 된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이 사단과 칠정을 근원적으로 구분해보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강민우: 결국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면, 선생님은 이황과 이이의 두 학설을 모두 비판하고 있지만, 똑같은 무게로 비판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이이의 학설에 대해서는 좀 더 강하게 비판하는 입장이라면, 이황의 학설에 대해서는 좀 더 약하게 비판함으로써 수용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김창협: 하하하. 그렇게 보이시나요. 개인적으로 누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저의 학문적 경향입니다. 결국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칠정이 리와 기를 겸하지만, 그 요지는 ‘주기’를 주장하는데 있습니다. 또한 이황의 호발설이 사단과 칠정을 근원적으로 이원화시켰다는 혐의를 가지고 있지만, 주리․주기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황의 호발설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 이원화시켰다’는 말은 사단의 근원을 따라가면 리가 되고 칠정의 근원을 따라가면 기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사단과 같은 선한 감정을 확충해나가야 하고 칠정과 같은 악으로 흐르기 쉬운 감정은 절제하고 단속해나가야 한다는 그의 수양방법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강민우: 이어서 선생님의 ‘이발’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창협: 사단은 그 ‘도리가 드러난 것’을 곧바로 가리킨 것이므로 기와는 관계하지 않습니다. ‘기와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단이 기 없이 스스로 발동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단이 드러날 때는 기가 간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측은․수오․사양․시비와 같은 것은 기의 간여 없이 곧바로 도리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사단은 칠정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도리가 드러난 것이니, 그대로 이황이 말한 ‘이발’의 의미입니다. 이황 역시 사단을 인․의․예․지와 같은 리(또는 성)의 발현으로 설명합니다.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성즉리(性卽理)에서 알 수 있듯이, 리와 성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물론 리와 성의 개념적 정의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리는 천지 사이에 유행하는 이치이며, 성은 리가 형체 속에 내재된 상태를 말합니다. 형체 속에 내재되기 이전은 리가 되고, 형체 속에 내재된 이후는 성이 됩니다. 또한 측은․수오․사양․시비의 사단은 중용이나 예기「악기」에서 말한 칠정과는 그 의미가 저절로 다릅니다. 특히 예기「악기」에 나오는 칠정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것이지만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설명합니다.

강민우: 칠정이라는 말은 중용에도 나오고 예기「악기」에도 나옵니다. 이들의 내용상 차이가 있습니까?

김창협: 중용에는 희․로․애․락이라는 말이 나오고, 예기「악기」에는 희․로․애․구․애․오․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중용에서 말한 희․로․애․락이 아직 선악이 결정되지 않은 가치중립적인 의미라면, 예기에서 말한 희․로․애․구․애․오․욕은 위태로운 시선이 추가되어 칠정이 마음껏 활개하지 못하도록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이이가 주로 중용의 관점에서 칠정을 해석한다면, 이황은 예기「악기」의 관점에서 칠정을 해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이가 칠정에도 기와 함께 리가 있으므로 칠정의 선한 부분, 즉 중절한 칠정을 강조한다면, 이황은 칠정을 기발(氣發)로 보아 절제하고 단속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이 때문에 이이는 김창협이 칠정을 ‘주기’로 해석하거나 이황이 칠정을 ‘기발’로 해석하는데 반대한 것입니다.

강민우: 중용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희․로․애․락의 네 가지로 말하고 예기「악기」에는 희․로․애․구․애․오․욕 일곱 가지로 말하는데 그 차이가 있습니까.?

김창협: 인간의 감정을 중용에서처럼 희․로․애․락의 네 가지로 말하든 예기「악기」에서처럼 희․로․애․구․애․오․욕 일곱 가지로 말하든 숫자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정을 네 가지 혹은 일곱 가지로 예를 든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이황이 ‘사단은 이발이고 칠정은 기발이다’는 호발설을 주장한다면, 이이는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발’ 하나라는 기발일도(氣發一途)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학파의 분열을 계속하다가, 이이의 직계 계열을 필두로 ‘이발’은 성립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퇴계학파를 비판합니다. 그러자 퇴계학파의 학자들이 이이의 학설을 ‘주기설’이라고 몰아가자, 급기야 서로를 이단(異端)이라 비판하면서 학파의 차원으로 대응하기에 이른 것이군요.

김창협: 그렇습니다. 저는 이이와 달리, 칠정은 기의 기틀이 발동한 것이고 사단은 도리가 드러난 것으로 파악합니다. 여기에서 이단상 계열이 이해하고 있는 리의 의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단상이 리를 ‘리가 드러난 것’으로 정립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따라서 저를 비롯하여 이단상 계열이 지향하는 것은 ‘도리가 드러난 것’을 기조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김창흡으로도 전승됩니다.

강민우: 김창협선생의 학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김창협선생을 비롯한 이이와 이황의 학설상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김창흡 선생님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