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시대 막을 내리다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현종 시대 막을 내리다

현종 15년, 즉 1674년 봄 3월 25일, 성균관의 유생 김만길 등 2백 50여명이 상소문을 올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배향을 건의하였다. 그들은 동시에 중국 송나라의 양시(楊時), 나종언(羅從彦), 이통(李侗) 등의 문묘 배향도 함께 요청했다. 임금은 “조정에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가 학업을 닦도록 하라.”라고 하명하였다.

임금으로서는 그렇지 않아도 서인들이 고위 관직을 장악하고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하고 있는데, 그들이 학문적인 스승으로 삼는 율곡과 우계를 문묘에 배향까지 한다면 그들의 권력이 더욱 드세질 것이다. 이를 우려한 응답이었다.

앞의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문 관련 기록은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에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실려 있다. 다만 서인들이 나중에 정권을 장악하고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는 1674년 기록에, 현종실록에는 보이지 않는 율곡 관련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5년 7월 1일 기사)

“윤휴가 밀소(密疏 : 몰래 올리는 상소문)를 올렸는데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윤휴는 얼신(孽臣 : 서얼 출신 신하)의 자식으로서 유학자의 이름을 빌어 집에 있으면서도 불의를 자행하였고, 또 선유(先儒 : 앞선 유학자)의 학설을 공격하고 배척하였다. 송시열 등도 처음에는 그에게 속아 그를 추천하였고, 민유중은 심지어 율곡(栗谷)이 다시 태어났다고까지 그를 칭찬하였다. 하지만 그 후 송시열이 그의 마음 씀씀이에 의심을 하고 그 길로 절교를 하였다.”

서인 쪽 유학자들은 율곡은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서인 관료 민유증이 윤휴를 율곡이 다시 태어난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은 윤휴를 그만큼 휼륭한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윤휴는 송시열의 눈밖에 벗어나 서인 학자들의 배척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윤휴(尹鑴, 1617-1680)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남인 세력의 대표였다. 효종이 사망하여 서인과 예송 논쟁을 벌였을 때, 남인의 대표적인 논객이 그였다. 효종 시대 초기에 송시열, 송준길 등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갔다. 그런데 효종이 사망한 뒤 예송 논쟁 때 남인인 허목, 윤선도 등과 함께 서인들과 대립하면서 효종은 비록 인조의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송시열의 예론을 반박하여 송시열과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이런 사정이 있어 서인 학자들이 주동이 되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 그를 비방하는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

1674년 3월 29일, 성균관의 유생 김만길 등이 율곡과 우계를 문묘에 배향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4일이 지난 뒤, 인선왕후 장씨가 사망하였다.

인선왕후는 효종의 정비(정식 부인)이며 현종의 어머니이다. 인선왕후의 사망으로 조정에서는 인선왕후의 시어머니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趙대비, 장렬왕후라고도 불림)가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관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이를 갑인년, 즉 1674년에 일어난 의례와 관련된 다툼이라고 하여 2차 예송, 혹은 갑인예송甲寅禮訟이라 부른다.)

시어머니 자의대비는 현종의 할아버지이자 효종의 아버지인 인조가 늦은 시기에 들여온 부인으로, 아들 효종으로서는 의붓어머니 곧 계모에 해당한다. 나이가 젊어서 아들 효종이나 며느리인 인선왕후의 장례식을 보고 상복을 입어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효종이 사망하였을 때(1659년)는 효종이 작은 아들이라고 하여 장렬왕후, 즉 자의대비는 1년 상복을 입었다. 이때 일어난 남인과 서인사이의 예의 논쟁이 기해예송이었다.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죽자 또 예송 논쟁이 남인 관료와 서인 관료 사이에 일어났다. 이때도 서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전에 효종이 사망하였을 때와 같이 효종의 부인은 작은 아들의 부인이기 때문에 자의 대비는 9개월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남인들은 효종은 비록 작은 아들이지만 왕의 신분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이나 사대부들과 달리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년이란 효종을 법통을 이어받은 장남으로서 간주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부인 역시 장남의 부인처럼 1년간 상복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서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왕의 특수한 신분을 무시하고 일반 사대부처럼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인들이 임금의 법통에 대해서 반역을 저지르는 짓이라고 공격하였다.

현종은 자기 아버지인 효종이 사실은 인조의 작은 아들로 장남인 소현 세자를 대신에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에 모종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서인들이 복제 문제로 제기한 여러 주장에 의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자기 아버지 효종은 둘째 아들이며 엄격하게 말하면 정식 법통을 이어받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송시열등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조선의 전통 혹은 국제(國制: 조선의 제도) 운운하면서 임금의 법통문제를 제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인들은 또 지난 날 광해군을 몰아내고 구데타를 일으키고 인조(현종의 할아버지)를 내세워 왕권을 쟁취한 패거리들이다. 그들은 임금의 권위보다는 예를 더 중시하고, 성리학을 더 중시한다. 그들의 이기론은 리를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남인들과 다르다. 율곡 이이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리보다는 기를 중시한다. 그들은 감히 임금 앞에서 임금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행동이나 주장을 보면 임금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다. 임금(리)은 신하들(기)에 편승해서 움직일 뿐이다. 송시열에게 그렇게 매달렸지만 그가 중시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었던가?

현종은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리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 이황을 스승으로 삼아, 임금 곁에서 묵묵히 시킨 일을 하고 임금을 하늘 같이 모시고, 임금을 받들었던 허적이 훨씬 더 훌륭하지 않은가? 세상 사람들의 온갖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자기 자리를 꿋꿋하게 지킨 그가 더 임금과 백성들에게 필요한 인물이지 않는가?

서인 관료들을 향한 온갖 의심과 불안으로 쇠약해진 현종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제 현종은 송시열을 버렸다. 그가 중심이 된 서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윤휴 등의 남인들을 받아들였다. 결국 효종을 차남으로 간주하고 임금의 법통을 무시한 서인 관료들은 대거 처벌을 받았다. 관직을 박탈당하거나 유배형에 처해지고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조정의 실권도 남인에게 넘어갔다.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간 집권하던 서인 정권이 이렇게 무너졌다.

현종은 이해 가을, 서인 출신의 영의정 김수홍을 파직시키고, 남인 출신의 영의정 허적을 임명하였다. 하지만 새로 임명된 영의정을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가 즉위한 뒤 15년, 1674년 9월 17일 밤 10시경.

평생 종기와 각종 병을 몸에 달고 살았던 현종은 부풀어 오르는 종기와 치솟는 고열을 이기지 못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향년 33세. 사망 장소는 창덕궁의 재려(齋廬 : 부정을 타지 않게 임시로 만든 거처)였다.

평소에 지병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임금의 죽음은 서인에서 남인으로의 정권 교체 작업과 맞물려 많은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백성들 사이에는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참고 자료>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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