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자책과 신하들에 대한 책망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임금의 자책과 신하들에 대한 책망

1672년, 현종 13년, 현종실록에는 율곡 선생에 관한 기사가 1건 실려 있다. 현종 개수실록는 모두 4건의 기사가 실렸다. 이중 1건은 현종실록과 같은 내용이고 3건은 다르다.

이해 3월 4일(음력, 양력은 4월 1일). 제용감정(濟用監正)의 직책을 담당했던 관리 조사기가 상소했다. 그는 돌아가신, 현종의 부친 효종의 영혼을 위로하고 사당 철거 및 과거의 폐단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뒤, 율곡 등의 문묘종사에 반대하는 유생들에 대한 탄압이 너무 심하다고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한 것은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영남과 호남의 유생 가운데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을 흉칙하고 사특한 자로 지목하여 평생 폐고(廢錮: 관리의 자격을 박탈하고,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는 처분)시켜 과거를 못 보게 하거나 혹 과거에 급제한 자가 있더라도 평생토록 관리들 명부에 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릇 임금에게 죄를 진 신하도 곧 거두어 써서 영원히 내버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유생들에게만 한때 의견이 달랐다는 것으로 평생 동안 금고 시키는 죄를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임금은 이러한 내용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사기의 항의는 서인들이 집권하여 편찬한 현종 개수실록 기사(3월 4일 기사)에는 실리지도 않고 오히려 도승지 장선징이 조사기를 비판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조사기의 상소 내용이 괴상망측하고 당찮은 점은 우선 접어두더라도, 그 가운데 금령을 범한 것이 있으니 그냥 둘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상소를 마땅히 유사에게 주어 죄를 감정하게 해야 합니다.”

현종 개수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임금은 이러한 장선징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사기의 죄를 물을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서인들은 궁정에서 혹은 상소문에서 율곡 선생에 대한 문묘종사 제안을 반대하는 유학자들에 대해서 암암리에 탄압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도 이러한 서인들의 위세에 대해서 내심 두려움과 경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11일(음력), 집의 이상(李翔)이 자꾸자꾸 발생하는 천재지변이 너무도 걱정스럽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이 남인 관료 허적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담겨 있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허적에게 푹 빠져 지내심이 유난히 심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허적이 어찌 감히 (사리사욕의 욕심을 가지고-필자주) 국사(國事)를 스스로 맡고 나섰겠는가?’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스스로 맡고 나서는 것은, 사욕을 이루기 위해서이고 패거리를 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그가 스스로 나서는 것은 도리어 잠자코 입 다물고 지내면서 녹이나 받아먹는 자가 오히려 해로운 바는 없는 것만도 못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허적은 안으로 척리(戚里)ㆍ환시(宦侍)와 결탁하고 밖으로 조정 사대부와 결탁하고 아래로 시정잡배들과 결탁하고 위로 임금에게 아첨을 하므로, 헛된 칭찬이 좍 깔려 ‘허충신(許忠臣)’이라는 설까지 안팎에 두루 찼습니다.”

임금의 무한한 신뢰를 받고 영의정까지 오른 허적에 대한 대담한 비판이었다. 자칫하면 목숨 까지 잃을 수 있는 이런 비판을 한 이상(李翔)은 허적 보다 10살 아래로, 나중에 숙종 시대에 형조참의,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송시열의 제자로 김집(金集)의 학문을 이어받은 서인 관료였는데, 현종 말년에 일어난 예송 논쟁에서 또다시 허적을 공격하다 관직을 잃었다.

이상은 앞의 상소문에서 임금에게 이렇게 제안하기도 하였다.

“당론(당파 싸움)이 일어난 이후로 간사하고 참소하는 못된 무리들이 등에 업은 세력이 있어 그 악을 스스로 엄폐하면서 옳고 그름을 현란하게 혼동시키니, 아무리 명군(明君)·성주(聖主)라 할지라도 그들의 술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 선조 대왕께서도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셨으니 만큼, 전하께서 마땅히 힘써 흠모하여 따라가기를 도모하셔야 될 일이 이에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율곡 등의 문묘종사를 허락해주고 서인 관료들의 의견을 더욱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다소 당돌한 이러한 상소문에 대해서 현종은 아무런 의견을 내리지 않았다.

정랑 이의건(李義健)이 사망하여 12월 3일(음력)에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관직 추증(사망 후에 벼슬을 내리는 일)이 있었다. 현종개수실록은 이의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의건이) 더불어 사귄 벗들은 모두 당대의 명현(名賢)이었는데 누구보다도 성혼(成渾)·이이(李珥)·정철(鄭澈) 등과 가장 사이가 좋았다.”

이러한 기록은 현종실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남인들이 보기에 이의건은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인물로 평가한 것이다.

이해 12월 5일(음력), 서인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관료였던 송준길이 사망하였다. 이에 현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기록을 남겼다.

“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랍고 슬퍼서 마음을 가눌 수 없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관곽(棺槨)과 조묘군(造墓軍) 및 모든 상례의 소용에 미진한 것을 모두 제때에 지급하게 하라.”

임금이 내린 당일의 명령만 이렇게 적혀있다. 한때 임금을 가르쳤고, 오랫동안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인물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소박한 내용이었다. 졸기도 없다.

하지만 서인들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는 긴 문장으로 된 송준길의 졸기가 실렸다. 그 가운데 율곡과 관련된 내용이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송준길은 자(字)가 명보(明甫)이고 은진(恩津)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인 군수(郡守) 송이창(宋爾昌)은 젊어서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 어머니 김씨(金氏)는 곧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종매(從妹 : 사촌 누이동생)이다. 이 때문에 일찌감치 이이의 풍도를 듣고 학문에 뜻을 두고서 약관(弱冠 : 젊은 나이, 혹은 남자가 20살이 된 때)에 김장생을 좇아 학문을 닦으니, 김장생이 매우 중히 여기고서 ‘이 아이가 장차 예가(禮家 : 의례를 연구하는 가문 혹은 학파)의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준길의 부친은 율곡의 제자였다. 또 송준길은 김장생에게 배웠는데, 김장생은 율곡의 수제자였다. 그러므로 송준길은 율곡의 학맥을 이어받은 학자로 현종 당시 송시열과 함께 서인 세력의 중심이었다.

다음해 1673년(현종 14년) 여름(양력 6월 15일, 음력 5월 1일). 가뭄이 심하여 한 달 넘게 비가 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현종은 승정원의 승지를 불러 다음과 같이 당시 시국에 대해서 말문을 열었다.

“지난해 농사도 풍년이 들지 않아서 백성들이 아직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여름철이 되었는데, 한 달 넘게 비가 오지 않고 있다. 간혹 조금씩 빗발이 있기는 하지만 햇빛이 쨍쨍하여, 벌써 망종(芒種)이 지났는데도 파종(播種)의 적기를 잃고 있다. 경작을 해야 가을에 거두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아직도 파종을 하지 못했으니 추수를 어떻게 바라겠는가?”

임금은 이렇게 지난 일을 회상하고, 가뭄이 한 달 넘게 지속되고 있어 가을 추수가 걱정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내 오장이 불에 타는 듯하여 차라리 죽고 싶다. 아,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는 것이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인데, 백성에게 먹을 것이 없으면 나라가 무엇을 의지하여 나라꼴이 되겠는가?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해보니 진실로 나의 몸에 있는데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나 대신 (하늘의) 재앙을 받고 있다. 백성의 부모인 내가 마땅히 어떤 생각을 하여야 하겠는가?

오늘부터 정전(正殿 : 임금이 조회를 하며 정사를 처리하는 장소)을 피하고 더욱 수성의 도를 더하여 조금이라도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겠다.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敎書)를 작성해서 널리 직언을 구해 부족한 점을 보충하게 하라.”

그리고 임금은 관리들도 같이 책임감을 가져야한다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불편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생각해 보건대, 오늘날의 재해를 오게 한 것은, 실로 덕이 부족한 나의 잘못이 너무 무거운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여러 신하들도 어찌 책려할 일이 없겠는가? 아, 여러 신하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 받아 치우치거나 편당(편을 나누어 한 당파에 치우침)을 하지 말고 동료 간에 공경하고 협동하여 나라를 위해 뭇 원망을 해소하는 일에 진심을 다하고, ……이미 이러한 내용으로 교지를 내렸는데도 끝내 실효가 없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당시 관료들 사이에서 남인, 서인으로 나뉘어 서로 의견을 합치지 못하고, 협동하지 못하고, 갈등을 유발하고 있는 상황을 이렇게 지적한 것이다. 현종은 국가가 위기 상태이고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가뭄으로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관료들은 파당으로 나뉘어 서로 갈등을 유발하고 분열되어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시열만 하더라도 당파가 다른 사람들의 집요한 비판을 받아, 임금을 위할 생각은 없고 자책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임금은 말미에 1) 자신이 부족한 점이나 과실이 있으면 죄다 말하라, 2) 좋은 정책이 있으면 그 이점을 제시하고, 3) 잘못된 정책이 있다면 그 병폐를 소상히 지적하라, 4) 자신은 그 의견을 들어 허물을 고치고 착한 것으로 바꾸겠다, 5) 자신이 먹는 음식을 줄이고, 6) 음주를 일체 금지하겠다는 등의 결의를 표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의 교지를(승정원의 담당 승지를 통하여 전달되는 왕명서)를 반포하도록 하명하였다.

자연재해가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임금이 이렇게 까지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유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유학자들은 한 국가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는 그 국가를 이끌어가는 최고 책임자가 무언가 잘못해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특히 수양의 부족과 부도덕한 행위가 그런 재해를 일으키는 큰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유학자들은 임금이 될 사람들, 임금의 직계 자손 즉 세자에 대해서 그런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주입시켰다.

현종은 그런 교육을 잘 받았을 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사람 됨됨이가 어질었다. 그는 아버지 효종으로부터 “너는 (마음이 어질어서) 임금이 되어서는 시기와 의심 때문에 죽음을 당할 사람은 없겠다. 너의 신하가 되는 사람들은 복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그가 백성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긴 것은 그의 천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 여름(음력 7월 3일) 우의정 김수흥이 감사의 업무에 대해서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일찍이 듣건대, 선대의 지혜로운 신하 이이(李珥)가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는 수령들 대부분이 하등(下等)과 중등(中等)으로 평가되고 점수를 매길 때 간혹 어쩌다가 상등(上等)이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 감사들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 수령들 모두가 상등이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임금이 이를 듣고 “그렇다. 반드시 나라 일을 중국의 공수(龔遂)나 황패(黃霸)처럼 한 뒤에야 상등이 맞을 텐데, 어찌 사람마다 모두 그렇게 상등을 받을 수 있겠는가? 팔도의 감사들을 모두 조사하여 경고하고 책임을 묻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런 내용은 서인들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는 실려 있지만 남인들이 편찬한 현종실록에는 없다. 이들은 율곡 선생에 대한 칭송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인 관료들은 율곡이 옛날에 했던 말을 이용하여 서인 관료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 11월 21일 기사)에, 이러한 기사가 보인다.

“저희 조부(이산해)에 대한 말이 나오면 문득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석담유기(石潭遺記) 중의 ‘(이산해가) 이조 판서의 일을 잘했다.’라는 말을 거론하며 훌륭한 재상이었다고 찬미하였었는데, 오늘날 (저희 할아버지 이산해를 비판하는) 이같은 말이 (송시열의 제자이자 서인 관료) 이선(李選)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어디에서 들었기에 옛 신하를 백세(百歲)의 뒤에서 모욕한단 말입니까?”

이렇게 서인을 비판하는 발언은 남인 관료 들이 편찬한 현종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이렇게 당파가 나뉘어 서로 싸우는 상황은 서인이건 남인이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현종실록(현종 14년 12월 30일)에 이와 관련된 상소문이 이렇게 전한다.

“당파의 설은 그 유래가 대체로 오래되었습니다. 당나라 말기의 우승유(牛僧孺)와 이종민(李宗閔)의 말습(末習)보다 더 심합니다. 이이(李珥)가 이른바 ‘동서(東西) 두 글자가 끝내는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하는 화근이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충신과 지사들이 심히 걱정하고 길이 탄식한 지가 어제 오늘이 아닙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러한 일을 통렬히 금지시키고자 하여 뿌리와 줄기를 결단코 끊어버리고 사심을 품고서 편벽된 의논을 고집하는 자로 하여금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전하의 이런 마음이야말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왕도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어 죽을죄를 지은 신의 생각으로는 당쟁을 금지하시는 방책이 그 요령을 얻지 못했을까 걱정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언로가 심하게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한두 신하가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감히 논한 바가 있게 되면, 전하께서는 말의 시비(是非)와 일의 당부(當否)를 따지지 않고, 문득 ‘자기와 같으면 당(黨)을 하고 자기와 다르면 공격한다.’는 형벌로 덮어씌워 삭직을 시키거나 파직한 다음 귀양 보내는 일이 앞뒤로 끊이지 않았습니다. 조정의 신하 중에 조금 두각을 나타내는 자는 모두 밝은 때에 버림받은 인재가 되었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무슨 조치입니까?”

부교리 윤진(尹搢)의 상소문이었다. 윤진은 윤선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서인의 논객인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예조참의에 발탁된 인물이다. 하지만 나중에 숙종시대에는 송시열과 윤증이 서로 공격할 때, 윤진은 윤증 편을 들어 송시열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서인(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윤진이 참으로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윤진이 당파 싸움에 대한 비판을 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서인들이 주관하여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서인이건 남인이건 당파 싸움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은 서로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현종실록과 현종 개수실록에 실린 윤진의 상소문은 그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