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송준길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송시열과 송준길

1664년, 현종 5년 11월 13일. 이익한이 상소문을 올려 군역의 폐단을 논했던 날. 집의 이단상이 송시열과 자신의 문제로 상소를 하였다. 그는 시골에 물러나 있는 송시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신의 생각에, 성상께서 임금이 되신 이후로 송시열 등 여러 사람을 예우한 것이 지극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근래에 송시열이 임금께서 부르는 명을 받고도 올라오지 않고 묻는 것이 있어도 대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성상께서 반드시 의아스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송시열이 이미 감히 올라오지 못하고 또 감히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반드시 그렇게 하는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는 분명하게 지적할 수 없으나, 윤선도(尹善道)에 관한 일 이후의 일이 모두 송시열이 마음속에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윤선도에 관한 일이란 윤선도가 복제 문제로 송시열을 비판한 일을 말한다. 송시열이 시골로 물러나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복제 문제로 1년상을 주장한 것에 대해 임금이 오해하게 될까 마음이 불안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보다 며칠 전에 이단상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문을 올린 적이 있었다.(현종 개수실록 5년 10월 28일)

“지금 혜성이 깨우침을 보여주고 또 겨울에 우레의 변고가 있었습니다. 전하는 여기에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정전(正殿)을 피하고 도움말을 구하여 하늘의 뜻에 호응하는 도리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나날이 여러 신하를 접하여 재이를 소멸하는 대책을 크게 강구하셔야, 전하의 이 마음이 충분히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아래로는 백성의 바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진정 음과 양의 승부가 결정 나는 때이며 국가 운명이 갈리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전하의 마음에 만일 평소에 함양(涵養)한 공부가 없다면 어찌 잃어버리거나 중단되는 염려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혜성이 지나가고 우레의 변고가 있는 것은 임금에게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라고 이단상은 생각했다. 그래서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임금은 강학을 부지런히 하셔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초야의 현인을 초빙하여야 할 것입니다. 송시열과 송준길 같은 이는 어찌 강학만을 위하여 초빙할 뿐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다음과 같이 송시열과 송준길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송시열은 선왕에 있어서 이미 스승의 옛 은혜가 있고 세상에 드문 예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송준길과 함께 산림에서 일어나 조정으로 나오니 선왕이 총재로 발탁하여 장차 국사를 맡기려 하였으며 그래서 전하를 가르치는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전하께서도 두 신하를 높이 예우함이 선대 조정 때보다 못함이 없었는데 두 신하의 발걸음이 청조(淸朝)에 의해서 막힌 지 이미 몇 년이 되었습니다.”

‘청조에 의해서 막혔다’는 것은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북벌 계획에 참여하였는데 나중에 김자점과 원두표 등이 이를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압력을 받고 관직에서 사퇴한 일을 말한다. 김자점과 원두표는 인조 말에 권력을 장악한 반정공신으로 같은 서인이었으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소현세자와 그의 처 민회빈 강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들 공신들을 공격하여 탄핵시킨 적이 있었다.

이단상은 이렇게 지난날을 회고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그들이 감히 가벼이 나오지 못하는 것도 대체로 연유가 있습니다. 지난해 송시열이 의외의 말썽으로 허둥지둥 물러갔고 그 후 또 복제(服制)의 예를 논하는 일로 윤선도(尹善道)의 상소가 있었습니다. 송시열의 복제론은 정정당당하여 정녕 백세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조경(趙絅)·조수익(趙壽益)의 상소가 연속으로 일어났고, 지난날에는 또 김만균(金萬均)의 일로 서필원(徐必遠)의 상소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거친 언어로 (송시열을) 함부로 기롱하고 모욕함이 극히 놀라웠습니다. 송시열의 불안해하는 마음은 형세가 본래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송시열의 근황을 자세히 전한 이단상은 11월 13일자(음력) 상소문에서 사직을 청하였다. 그 이유는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편에 섰던 김좌명의 비판 때문이었다. 김좌명은 윤선도(尹善道)와 허목 등이 3년복을 주장한 것에 동조하다 서인 관료들의 미움을 받았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 상을 당하여 국가에서 금지한 수도(隨道 : 묘지 아래 놓인 관에 이르는 길.)의 제도 사용하여 대관 민유중(閔維重)에게 탄핵을 받았다. 이단상은 김좌명과 이 일로 여러 차례 논의를 하였는데 탄핵까지 받게 되자 김좌명이 이단상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바 있었다.

임금은 이단상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해(1665년) 4월(음력), 임금이 몸이 아파 남쪽으로 행차를 하여 온천의 행궁에 머물렀다.

5월 2일 임금의 수레가 남쪽으로 향하였다는 말을 듣고 송시열이 행궁에 나와 맞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주의 산사(山寺)에 이르러 병 때문에 오지 못하고 글을 보내왔다. 임금이 이렇게 답하였다.(현종실록)

“지금 질병 때문에 이처럼 만부득이한 행차를 하였다. 오직 경과 서로 대면하여 나의 회포를 풀기를 바랐는데 그대가 또 질병으로 상소하니 내가 몹시 섭섭하다. 사관(史官)을 보내 내 뜻을 알리니, 경은 나의 뜻을 이해하고 빨리 멀어진 마음을 돌리기 바란다.”

5월 7일, 우찬성 송시열이 행궁으로 와서 임금을 알현하였다. 임금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현종실록 6년 5월 7일)

“초봄부터 눈병이 더욱 심해져서 부득이 이번 거동을 하였던 것인데, 목욕을 한 뒤로 날마다 조금씩 효험이 있다.”

송시열이 이렇게 말했다.

“효과를 보는 것이 빠르면 효과가 없어지는 것도 빠른 법입니다. 서서히 효과를 거두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몸에 고질이 있어서 일을 할 가망이 없는데 이처럼 오래도록 헛되이 직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모두 해임해 주소서.”

임금은 내심 같이 서울로 올라갈 생각을 하였는데 송시열은 여전히 임금을 도울 마음이 없었다. 임금이 이렇게 답을 했다.

“신축년에 서로 이별한 이후로 벌써 4, 5년이 흘렀다. 지금 내가 여기에 와서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경들이 이 근방에 살고 있어서 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만나보았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제 나의 병이 점차로 차도가 있으므로 경들과 함께 경성(京城 : 서울)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경악(經幄 : 경연經筵. 임금에게 유학 경서를 강론하는 곳)을 출입하며 나를 가르쳐 인도하기를 진실로 바라고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경의 직책은 모두 한가한 직무이니 서둘러 바꿀 일이 별로 없다.”

임금은 송시열 스스로의 해임 건의를 거절하고 이어서, “죄를 지고 있다는 일에 대해서는 내가 누누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혔는데도 경은 항시 스스로 죄가 있다고 말하니,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라고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송시열은 이 말을 듣고 다시 이렇게 말했다.

“(임금께서는) 매번 너그럽게 대해주시지만, 조정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조정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공공의 의론이 준엄하게 일어나면 비록 임금께서 끝까지 저를 보호해주고 싶더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처신함이 무상하고 신하로서 불충하여 갖가지 죄를 몸에 지고 있는데 어찌 다시 조정의 반열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을 듣고 임금은 여러 가지로 위로의 말을 하고 타이르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먹을 양식과 반찬거리를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3일 뒤, 임금이 내려준 식량과 찬거리가 내려왔으나 사양하였다.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송시열은 임금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5월 27일(음력) 온양에서 수원까지 임금을 뒤쫓아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병을 이유로 돌아가면서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신이 지극히 원통한 일이 있어서, 일찍이 임금께 한두 가지를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황공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처럼 갑자기 병이 나서 죽기라도 한다면 원망을 품고 땅에 묻히게 되어 사사로운 한이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 대략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을 꺼낸 송시열은 자신이 근거 없는 비방을 받고 있다고 이렇게 말했다.

“대개 지난번 국가에 원자(아직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 여기서는 후일의 숙종)가 태어난 경사가 있을 때 온 세상의 백성들이 너나없이 기뻐서 날뛰었습니다. 비록 초야에 있는 소원한 자들도 모두 스스로 칭송하고 축하하는 생각을 나타내었으나, 신은 그때 마침 죄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있어서 두렵고 위축되어 끝내 감히 스스로 여러 신하들처럼 작은 정성이나마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사정상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점차로 비방하는 말이 생겨서 확대되어 오다가 지금에 이르러서 신하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들을 줄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전일 허목의 상소도 신 때문에 올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허목은 예송논쟁 때 송시열의 1년상에 반대하고 임금의 특별한 지위에 있기 때문에 돌아가시면 그 분의 부모는 3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남인측 관리들의 대표였다. 송시열은 자신이 근거 없는 비방에 너무 위축되어서 원자가 태어났을 때도 축하의 예를 표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더 문제가 되어 온갖 비방을 받고 있다고 하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전략)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이 어찌 마음을 태우고 속을 썩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또 캄캄한 가운데서 소리 내어 울기도 합니다. (중략)

그런데 지난해에 어떤 사람이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어 신이 일찍이 ‘효종 대왕은 종묘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신이 임금에 대해서 종묘에 제향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이고, 지금에 또 이러한 비방이 있으니 이것은 신이 임금의 부친에 대해서 그 자손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의 죄악이 어찌 여기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오늘날 신을 위한 계책은 다만 문을 닫고 허물을 생각하여 혀를 깨물고 말라 죽어서 사람들의 말에 보답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임금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직책을 속히 다 해임해주시고, 자신이 편안한 마음으로 물러나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은 이러한 상소문을 받아 읽고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대의 상소를 보니 나는 마치 두 팔을 잃은 것 같다. 옛날 사람은 비록 망칙한 유언비어를 만나도 끝내 벼슬을 그만두는 일이 없었다. 이는 실로 마음이 서로 부합되어서 그러하였던 것이다. 나는 경이 나의 뜻을 알고 있는 줄로 생각한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왜 한낱 근거 없는 말 때문에 나를 이렇게 저버린단 말인가?”

임금이 그렇게 죄의식을 갖지 말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는데 송시열은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임금의 마음과 송시열의 마음이 서로 부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 점을 임금은 지적하고 송시열이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고 한탄을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온천에서 출발할 때에 승지가 돌아와 보고한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대가 내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 필자) 그 섭섭한 생각이 어떠하겠는가? 맹자가 논한 ‘도리에 어긋나거든 스스로 돌이켜 본다.’는 뜻이 지극하니 경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멀리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속히 바꿔서 나의 간절한 소망을 풀어주도록 하라.”

임금의 이러한 간곡한 부탁을 듣고도 송시열은 임금의 곁을 떠났다.

한편 송준길은 당시 임금 곁에서 좌참찬의 직책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는 송시열과는 친척 관계이며 같은 충남 출신이었다. 한 살 위인 송준길은 어려서부터 송시열과 같이 김장생, 김집 등 같은 스승에게 배웠고, 스승 김집이 1649년(인조 25년) 이조판서로 기용되자 송시열과 함께 발탁되어 여러 관직을 거쳤다. 세자 시절의 효종과 현종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현종 6년 6월 10일(음력), 이날 그는 임금과 함께 심경을 읽고 유교 경전의 주석에 대해서 논했다. 임금이 물었다.

“주자가 나오기 이전에는 유교 경서가 단지 대문(大文)만 있었는가?”

대문(大文)이란 시전대문(詩傳大文), 맹자대문(孟子大文), 예기대문(禮記大文) 등 주자 이전에 나온 경전 주석서를 말한다.

송준길이 이렇게 답변을 하였다.

“주자가 등장하기 전에도 이미 여러 전문가의 주석서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정현(鄭玄)과 가공언(賈公彦) 등의 훈석(訓釋 : 훈을 위주로 한 해설서, 혹은 한문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한 책)도 꽤 명백하였는데 주자에 이르러 크게 정비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후세에 대단한 공헌을 한 셈입니다.”

이어서 송준길은 이렇게 말했다.

“명나라 유학자는 대부분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을 존경하여 숭상했기 때문에 논설마다 주자를 압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본래 정자·주자의 정맥(正脈: 올바른 학맥)을 부지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교 학맥을 이렇게 정리하여 설명하였다.

“5현 중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은 명망과 지위가 현저하지 못한 채 일찍이 혹독한 화를 당하였고, 조광조(趙光祖)도 일찍이 죽었으므로 미처 논설을 수립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언적(李彦迪)의 논저는 정자와 주자에 대하여 가장 요령 있게 본받아 서술하였는데 이황(李滉)이 이언적을 계승하여 정주(程朱 : 정자와 주자)의 학문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이어서 그는 율곡과 우계에 대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도 이어 크게 발전시켰으니, 그들의 문집을 보면 학문의 탁월한 면모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과거 공부에 빠져 있으면서도 정자와 주자를 존경할 줄 아는 것은 모두 이이와 성혼의 공입니다.”(이상 현종개수실록)

이러한 경연이 있고 1달쯤 뒤, 현종 6년 7월 8일(음력), 송준길은 원자 보양직(원자를 보호하고 키우는 직책)을 맡으라는 임금의 지시를 받았다. 임금은 송준길을 면담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에 날씨가 매우 더워 안질이 재발할 염려가 없지 않고 또 다리의 통증으로 움직이기에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강학을 중지하였고, 또 자의대비(慈懿大妃)께서 편찮으셨기 때문에 오랫동안 폐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자의대비의 병환도 점차 회복되고 있고 날씨도 서늘해지고 있으므로 곧 다시 경연을 열려고 한다. 그런데 경이 아니면 누구와 함께 강론할 것이며 또 누구로 하여금 원자를 보양하게 하겠는가?”

이렇게 말하며 원자(훗날의 숙종) 보양직을 맡도록 부탁하였다. 송준길은 이렇게 답했다.

“신은 나날이 늙고 병들어 가고 글 뜻을 잊어버린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제가 서울에 머물러 있는다고 해도 병이 만약 심해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경연에 출입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 있으면서 휴식을 취한다면 어찌 (고향까지 힘들게) 길을 달려가는 것과 같겠는가?”

병이 나면 서울에서 휴식을 취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말을 듣고 송준길을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선조(앞의 조정) 때에 제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선왕(효종)께서 송시열에게 일을 위임하고 신으로 하여금 그와 함께 일하게 하고자 하셨으니, 신이 머물렀던 것은 진실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송시열이 오지 않았는데 신만 머물러 있게 하시니,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솔직한 심정도 실로 매우 낭패스럽습니다.”

송준길은 이렇게 말하고 자신이 서울에 머물러 임금을 도울 경우, 걱정되는 부분을 이렇게 말했다.

“임금께서 자주 경연을 열고 또 보양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원자를 모시게 한다면 나라 안 사람 중에 기뻐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요즘처럼 임금께서 단지 내간(內間: 부녀자가 거처하는 곳. 여기서는 임금의 부인이나 어머니 등 여성들)의 병환을 이유로 일을 폐하고 세월만 보내신다면, 신이 비록 서울에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달리 하는 일 없이 그저 공짜 밥만 먹게 될 것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송준길의 이러한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임금은 이러한 말을 듣고 이렇게 답하였다.

“날씨가 점차 서늘해지고 있는데, 어찌 그런 정도에 까지 이르겠는가?”

날씨가 좋아지고 있으니 대신들과 함께 공부를 열심히 하고 국정을 잘 살필 것이라는 답변이었다. 그러니 내 곁에 머물러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이해(1665년) 가을 10월 7일(음력), 나라 안에 여러 변고가 끊이지 않아 집의 김만기, 지평 신명규 등이 상소문을 올렸다. 그들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현종개수실록)

“근년 이래 임금께서 계속 편찮으시어 비록 날마다 경연을 열어 정신을 가다듬고 잘 다스려 보고 싶어도 억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임금께서 근면하지 못한 잘못이 아니었다고 온 나라 사람들이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늘이 굽어 살피시고 조종(祖宗 :임금의 조상)이 묵묵히 도와주신 덕분에 온천에서 목욕하고 효험을 얻어 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경사를 보았습니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서 춤을 추면서 다들 임금께서 분발 진작하여 성탕(成湯 : 큰 업적을 남긴 이룬 상나라 탕왕)이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하여 큰 공을 이룬 것을 법으로 삼고, 문왕(주나라 문황)이 해가 지도록 다른 일에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을 모범으로 삼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기대를 임금께서 저버려서 지금 백성들이 실망하고 있다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가(임금의 가마)가 돌아온 후에 여러 달 동안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았지만 한 가지 일도 신하들을 위로하여 기쁘게 해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경연에 드물게 나아가는 것도 이전과 같고 처리할 일을 쌓아 놓은 것도 이전과 같았습니다. 또 지체되고 답답한 것이 한결 같이 이전의 구습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하들이 기대하는 소망이 공허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전하께서 안일한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인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백성들에게 설명하시렵니까?”

지난 여름에 송준길이 걱정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임금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 했다. 김만기 등은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거리에서 서로 전하는 말을 듣건대, 후원(後園 : 궁궐 뒤에 있는 작은 정원)의 별당에 아름다운 곳이 많아서 임금께서 정무를 살피는 여가에 수시로 궁인과 내시들을 데리고 가서 노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내전(內殿 : 궁궐 안에 황후나 왕후가 거처하는 전각. 임금이 거처하는 건물)의 일은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시중에 전하는 말을 그대로 믿기도 어렵거니와 전하같이 현명하신 분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혹시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셨다면 완물(玩物 : 물건을 가지고 놈)로 인한 상심(喪心 : 마음이 산란해지고, 평정심을 잃음)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근본이 되는 심지(心地 ; 마음의 바탕)를 이미 수립하여 쇄신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백관(百官)이 해체되고 모든 일이 무너지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고 하늘이 노여워하는 것도 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백관(百官)이 해체’된다는 것은 수많은 관리들이 해산된다는 것으로 국가의 멸망을 말한다. 임금의 마음이 흐트러지면 이러한 것도 당연한 일이 되고 하늘이 내리는 재해와 이변의 변고가 실로 당연한 일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만기는 송준길이 조정에 나오게 된 일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초야에 묻혀 있는 현인의 경우 진퇴 문제는 의리에 입각하여 결정합니다. 근일 송준길이 조정에 나온 것이 비단 은례(恩禮 : 은혜로운 대우나 예물)가 성대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이(李珥)가 선조 때에 건강이 회복된 뒤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알현했던 일로 그 의도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그동안 임금이 보여준 실망스러운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송준길이 서울의) 저택에 머물러 있는 몇 달 동안 (임금과 신하가 함께 책을 읽는) 경연의 자리에 나간 날은 5, 6일에 불과했습니다. 임금께서는 학업을 연마하는 일을 잠깐 열심히 하셨지만, 대부분은 게으름을 피우며 꾸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상께서 어진 이를 높이고 도를 즐기는 마음에 진실이 있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올라온 사람도 머물게 할 수 없다면 재야의 어진 이들이 서둘러 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경연(대신들과 책을 읽고 정책을 토론함) 활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이미 송준길을 불러 놓고 이렇게 태만하게 행동하시는데 어찌 재야에 있는 송시열이 가까이 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었다. 이어서 임금께서 내전의 어머니나 할머니에 대한 효도를 핑계대고 공부와 정치를 소홀히 하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항의를 하였다.

“아, 재난의 변고에 대응하는 도리로는 반드시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노력해야만 조금이라도 하늘의 노여움을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전 선조(先朝 : 효종시기)때는 병신년에 자성(慈聖 : 자의 대비)께 잔치를 올리려고 날까지 받아 놓고 유사까지 정해 놓았었는데 하늘이 경계(자연 재해의 변고로 경고를 함)를 보임으로 인하여 즉시 그 일을 중지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어찌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왕의 효도는 일반 사람들의 효도와 같지 않습니다. 위로는 하늘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불쾌한 감정을 풀어 주어서 온 나라가 안정되게 하고 국가의 형세를 공고히 하는 것이 곧 큰 효도인 것입니다.”

국가의 일을 위해서는 임금의 개인적인 효도는 뒤로 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해야 할 일은 소홀히 하고 그런 일에만 매달리는 지 물은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렇게 상소문의 끝을 맺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본원의 심지에 유의하여 경외하는 도리를 극진히 함으로써 성실하게 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현사(賢士 : 현명한 선비)들을 초청하고 폐단을 개혁하여 곤궁한 백성에게 혜택이 미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일마다 격려하고 생각마다 서로 도와서 항상 번쩍이는 번갯불과 천둥치는 소리를 귀와 눈으로 직접 접한 것처럼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오늘날의 재변(자연 재난의 변고)은 바로 우리 전하를 훌륭한 분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임금은 이렇게 답하였다.

“일전에 천둥 번개가 치는 변고가 순음월(純陰月 : 4월)에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놀라고 당황하여 마치 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과 같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병을 앓게 되어 아직 대신들을 접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병을 앓는 가운데 마음이 참으로 편치 못했다. 이 상소문의 내용은 은근하고도 간절하여 과궁(寡躬 : 과인, 즉 임금)을 경계시키기도 하고 시정(時政)을 논하기도 하였으니, 내가 마땅히 깊이 생각할 것은 물론 묘당(비변사: 중요 업무 처리 관청)과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이해(현종 6년) 11월 23일(음력).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여 임금에게 재난의 변고에 대해서 글을 올렸다.

그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신이 이달 3일에 임금님의 유지(有旨)를 받들었는데 신으로 하여금 빨리 조정으로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달려오기 전에 먼저 사실을 갖추어 재앙을 그치게 할 대책을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이러한 명을 받들자 놀라고 당황하여 조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시 자연 재해가 계속되고 여러 가지 변고가 빈번히 발생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하명을 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대책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하달 한 것이다.

송시열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신이 젊어서 정주(程朱)의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 재이(災異)에 대해 논한 것이 매우 상세하므로 감히 아래에 갖추 열거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시험 삼아 열람하여 보신다면 총명(聰明)함을 넓히고 덕업(德業)을 보익하며 재이의 변고를 바꾸어 상서로운 일로 만드는 방도에 있어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장마가 들어 재난이 발생하였을 때 정자(程子)가 자기 부친을 대신해 올린 소장, 혜성(彗星)이 나타났을 때 정자가 올린 소장, 그리고 겨울에 천둥이 치고 비가 오래 내린 일에 대해 주자(朱子)가 올렸던 상소문 등을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이에 임금은 이렇게 답하였다.

“인용한 선현(先賢)의 말은 내용이 요약되어 있어 참으로 시무(時務)에 합당하다. 그러니, 감히 유념하여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마땅히 굳이 사퇴하지 말고 속히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고쳐 지극한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송시열이 상소문을 올리면서 또 사퇴의 뜻을 표한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임금은 아직도 송시열을 불러 옆에 같이 있고 싶어했다.

다음해 현종 7년 3월 22일, 좌의정 홍명하가 복제 문제를 가지고 송시열을 변호하고 그의 의견에 임금도 동의하였다. 홍명하는 임금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초에 복제(服制)를 유신(儒臣)들이 단독으로 정한 게 아닙니다. 대신(大臣)과 서로 의논한 끝에 결국 국제(國制: 우리나라의 제도)로써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반대하는 허목(許穆)의 상소가 한번 나오자 뒤이어 윤선도(尹善道)의 상소가 있었습니다. 급기야 오늘날에 와서는 또 이번의 상소가 있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종묘에 고하자고 하였으니, 그 속셈이 실은 송시열을 극도의 죄에 빠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어찌 흉악하고 참혹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임금이라도 장자가 아니면 1년 복을 입고, 임금이 아닌 경우 장자도 1년 복만 입는 전통이 있다고 강변하였다. 이에 임금은 “소현세자가 돌아가셨을 때도 인조께서는 삼년복을 입지 않으셨다.”(현종개수실록)고 홍명하의 의견에 수긍하였다.

그러나 이날 경상도 유생 유세철 등 천 여명은 상소를 하여 “우리 선왕(先王)의 복제가 잘못된 것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에 대한 논의가 한번 어긋나자 종적(宗嫡)이 허물어지고 인륜이 바뀌어 군신ㆍ부자간에 순서를 잃지 않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게 되었으니, 이게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송시열 등이 이전에 효종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 복제를 잘못 선택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신하 송시열 등은 우리 선왕(효종임금)을 서자(庶子)로 지목하고는 마침내 대왕 대비(자의대비)께서 기년복(1년복)으로 낮추어 입도록 하자고 청했으니, 아, 이게 어찌된 것입니까?”

그리고 그들은 주자의 설 등을 동원하여 기년복이 잘못되었음을 상세하게 지적하였다. 임금도 이러한 말을 들으면 마음이 조금은 흔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상소하는 글과 뜻이 조리가 없고 뒤죽박죽이다. 남하고 다르게만 하지 의견을 같이하지는 않아서, 동쪽을 얘기하는데 뜻은 서쪽에 있고 서쪽을 얘기하는데 뜻은 동쪽에 있다. 선비 풍습의 불미스러움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상소문 가운데 이른바 주자가 운운했다는 얘기를 살펴보면, 많은 말들이 도리어 주자의 뜻에 배치되니, 그야말로 불편하기 짝이 없다. 너희들은 아무쪼록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나 학업을 닦도록 하라.”(현종개수실록)

1달쯤 뒤, 충청도 생원 윤택(尹擇) 등이 상소하여 유세철 등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현종개수실록 7년 4월 19일 기사)

이들은 유세철 등의 주장을 상세하게 비판한 뒤, “신들이 유세철 등과 따지고 싶지도 않고 전하께서 (그들의 주장을) 통렬하게 배척하지 못한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위로 국가를 위하여 사특한 의논이 세상을 미혹시키는 것을 깊이 우려하고 아래로 사문(斯文 : 선비들, 혹은 유학자들의 문화)을 위하여 사설(사이비 주장)이 성행할까 염려한 나머지 소원하고 미천한 신들의 분수를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감히 무분별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비로운 성상께서는 참람한 데 대한 꾸지람을 늦추시고 정성 어린 충성을 살펴 주소서. 그러면 사문의 다행이고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

완곡하게 임금을 비판한 상소문이었다. 임금이 유세철 등의 주장에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고 있으니 갈수록 그런 망녕된 발언들이 나오는 것이 아닌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글을 읽고 임금은 다음과 같이 비답을 내렸다.

“인심과 세도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말 매우 한심스럽다. 그대들의 상소 내용을 보니, 충성스러운 뜻을 볼 수 있었으므로 내 참으로 가상히 여긴다.”

드물게 보이는 칭찬의 말이었다. 윤택 등의 주장이 임금의 마음을 어느 정도 움직인 결과였다. 또 한편으로는 임금이 스스로 잘못 처신하고 있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일주일 쯤 뒤, 임금은 송시열을 온천에 있는 행궁으로 불러 위로하고 원자(훗날의 숙종)의 지도를 맡겼다.(현종 개수실록 7년 4월 26일자)

송시열을 대면한 자리에서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만나보지 못해 매우 섭섭하였는데, 경이 지금 와서 보니 나의 기쁨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송시열이 이렇게 말했다.

“신은 죄를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황공하고 감격하여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영남 선비들이 상소문을 올린 일은 이미 좌참찬에게 말하였다. 내가 경을 성의가 없이 대하였기 때문에 저 무리들이 잇따라 일어나 분란을 피우며 이처럼 거리낌 없이 행동하게 되었다. 내가 매우 부끄럽다.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윤택 등의 상소문을 읽으면서 임금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던 말이었다. 임금에게 송시열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예를 의논할 때에 신이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여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은 본디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영남 선비들이 거론하지 않았고, 신은 평생의 언행이 사람들에게 신용을 받지 못한데다가 일 처리하는 것도 보잘 것이 없어 죄가 더욱 중하기 때문에 그들이 이렇게까지 말한 것입니다.

스스로 반성하는 일 말고 제가 다시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국조 이래로 유생 천여 명이 연명하여 죄를 주자고 청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유생들의 상소로 여기저기 방을 붙여 보게 하였다는 일도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이게 모두 저의 죄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은 이렇게 격려하였다.

“경이 선대(효종대) 조정에서 가장 깊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원망을 더욱 많이 산 것이다. 어찌 이것으로 자책한단 말인가? 지난해 여기(온천의 행궁)에 와서 모였을 때에 같이 가려고 하였으나 경이 목욕하였으면 한다고 청하기에 부득불 애써 따라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욕한 뒤에 올 것으로 여겼는데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섭섭한 회포를 거의 스스로 달랠 수 없었다. 지금은 꼭 경과 함께 같이 가고자 하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자책한단 말인가?”

최근 들어 임금을 만나면 송시열은 이렇게 자신의 죄를 크게 부담스러워했다. 임금과 백성을 위해서 어떤 정책이나 방법을 제안하고 협의를 해야 하는데, 송시열은 아마도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항시 자책을 하면서 임금 곁을 떠나려 했다.

송시열이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에 명을 따르지 못했으니, 신의 죄가 정말 큽니다. 그때 목욕한 뒤에 옛날의 병이 더 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뒤이어 들으니 유언비어가 망극하여 심지어 신하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말이 있었습니다. 신이 이때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고 심장과 뼈가 모두 쑤시어 감히 대궐로 들어가지 못하고 소를 올려 고충을 말씀드렸습니다. 망극한 회포를 어떻게 글로서 다 말씀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옛사람들은 불행하여 신의 오늘날과 같은 일을 만났을 경우에는 혹은 자결하여 스스로 결백함을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신의 하찮은 목숨이야 물론 아까울 것도 없습니다만 지혜로우신 임금의 세상에서 감히 이러한 일을 할 수 없었으므로 참고 지내왔습니다.”

이렇게 송시열의 자책이 커갈수록 임금은 그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다. 마음을 돌리고 임금을 위해서 궁정으로 돌아와 함께 글을 읽고 정치를 논하면 안 되는 것인가? 답답한 마음에 임금이 이렇게 물었다.

“이른바 유언비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상소 내용에는 내막을 자세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나는 모르겠다.”

송시열은 이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악의적인 소문에 대해서 소개했다. 송시열이 원자(훗날의 숙종)에게 조금도 성의가 없으며, 효종 임금이 사망하였을 때도 그런 행동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송시열의 그런 태도는 마음속으로 그가 임금의 정통성을 의심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이었다.

임금은 송시열에게 원자를 지도하는 책임을 맡기고 자신의 생각은 송시열을 비난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므로 자기가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자신이 실망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현종 9년, 송시열은 우의정의 직책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 사직을 간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임금은 다시 이렇게 부탁했다.

“오늘날은 나라 형세가 위태위태하고 형세가 매우 어려우므로, 붙들어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을 얻어 정승의 자리에 앉히는 데 있다. 그렇다면 경처럼 훌륭한 덕과 인망을 지닌 사람이 종신토록 한직에 있어서야 되겠는가? (중략) 아, 경이 나라를 떠난 지 지금 십년이다. 내가 경을 생각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나랏일에 있어서 불행이 심하다. 지난번 온천에서 돌아올 때 다행히도 서로 만나 함께 올라왔으니, 당시 나의 기쁨이 다시 어떠하였겠는가? (중략) 다시 깊게 생각하여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나의 볼 만한 사업도 없었다는 설에 있어서는, 경과 하등 관계가 없는 것으로 진실로 내가 불민한 소치이니 마음이 부끄럽다. 그러나 조용히 의논하여 처리한다면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받아들여 나의 마음을 저버리지 말라.”(현종개수실록, 9년 12월 1일)

같은 해 12월 19일(현종개수실록), 임금이 몸이 아파 의관의 진찰을 받았다. 이 때 진찰을 받으면서 임금은 판부사로 있던 송시열을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떠나가 내 매우 서운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조리하고 들어왔으니 기쁨이 배나 된다.”

송시열이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서둘러서 미리 나가는 것은 죄가 됨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하가 감당할 수 없는 직책을 맡아 녹을 유지하고 자리 지킬 줄만 안다면 이것은 막대한 죄이며 또 나라의 체모에 손상이 있겠기에, 공의(공의公議: 공적인 의리)에 죄를 얻느니보다는 차라리 신의 일신으로 죄를 돌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망령되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께서 누차 만류하고자 하는 뜻을 보이셨으므로 감히 바로 떠나지 못하고 또 돌아왔습니다.

신이 비록 다시 머문다 하더라도 달리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말씀드리는 바도 진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위로는 제왕으로부터 아래로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닦아야 할 바는 단지 대학(大學)뿐입니다. 대학에는 삼강령 팔조목(三綱領八條目)이 있는데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도 실상 이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대학의 가르침을 힘써 행하신다면, 이는 신의 말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신을 굳이 머물게 하시더라도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머물게 하는 것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직 헤아려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의관의 진찰을 받고 있던 임금이 송시열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의 말을 내가 모두 이해하였다. 어찌 그대가 사정에 어둡다고 여기겠는가? 그대는 오직 머물러 있으면서 나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도와야 한다. 이전에 상소한 문건의 비답 내용도 역시 이 말이었다.”

송시열이 이렇게 아뢰었다.

“이번에 궁궐에 들어와 임금님을 뵈었으니 어찌 말씀드릴 바가 없겠습니까? 하지만 임금님의 옥색(玉色: 군주의 안색)을 우러러 보건대 아직 아프신 기색이 있는 듯하니, 지금은 우선 물러갔다가 다시 뵐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이어서 그는 눈물을 삼키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옛날 사람들이 군신(임금과 신하)은 부자(아버지와 자식)와 같다고 했습니다. 군부(임금)께서 병환을 앓고 계시니, 누가 근심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아직 한창 나이인데, 어찌 그리 질병이 많으십니까? 혹시 조종(祖宗 : 임금의 역대 조상들)께서 부탁한 막중한 책임을 생각지 아니하고 만금과 같은 몸을 가벼이 하시어 그런 것은 아닙니까?”

‘몸을 가벼이 하기 때문에’ 아픈 것은 아닙니까, 하는 말은 임금 앞에서 감히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임금은 만으로 27살이고 송시열은 61세였다. 아들과도 같고 또 어릴 때 제자였던 임금에게 스승이자 원로대신인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질책이자 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