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집의 붕당론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남궁집의 붕당론

현종 1년, 즉 1660년 1월(음력)에 모두 3건의 문묘 종사 요청 사실이 현종개수실록에 실려 있다. 현종실록은 이러한 요청 건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고 기록하지 않았다.

1월 13일(음력)에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충청도 유생들이 잇달아 상소문을 올려 율곡 등의 문묘종사를 요청하였다. 임금은 이미 이 건에 대해서는 각도 유생들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고 답하였다. 1월 28일(음력)에는 전라도 유생 340여인이 상소하여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 임금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다음날 집의(執義) 조귀석이 상소문을 올렸다. 집의는 사헌부에 소속한 종3품 관직이다. 사헌부는 요즘에는 감사원이나 헌법재판소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관리들의 감찰업무를 담당하는 행정기관이다. 집의는 이런 기관의 핵심 관원으로 임금의 정치에 대해서 논하고 비판할 의무가 있으며, 관리들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 잡는 일을 맡는다.

조귀석은 임금에게 이렇게 말문을 꺼냈다.

“덥거나 춥다고 해서 공부하는 일을 그치는 것은 원래 바른 도리가 못 됩니다. 선왕(효종)께서는 늘 여름과 겨울철에도 자주 신하들을 불러 같이 글을 읽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전하께서 본받으셔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봄철로서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으니, 날마다 경연(임금의 공부 자리)에 세 번씩 나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은 신하들과 유교 경전을 읽으면서 정치 일도 함께 하였다. 말하자면 신하들을 면담하면서 공부도 하고 업무도 함께 처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연이다. 조귀석은 이어서 임금께서 송준길에게 보낸 비답(批答: 임금의 답변) 문장 가운데에 2가지 실수를 범한 일, 이시매의 파직과 관련된 잘못, 조정의 환관이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을 임금이 허락한 일, 대신들의 언로(言路 : 발언 혹은 언론)를 막은 일 등에 대해서 직언하고 이렇게 말했다.

“선정신(先正臣 : 앞 시대의 휼륭한 신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청이야말로 사림(士林 : 유학자들)의 공론(公論)입니다. 그런데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자꾸 상소하는 것에 대해 염증을 내는 뜻이 없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勿煩)’는 두 글자의 분부는 많은 선비들을 더욱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덕을 숭상하고 현인을 본받으셔야 할 일을 이처럼 그들이 낙심하게 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그리고 박장원, 이유태 등 관료들과 관련된 일에 대한 임금의 잘못된 조치, 궁궐 안의 왕자와 왕손들의 문제점, 임금이 높은 현인을 떨어뜨리고 낮은 인물을 등용한 일과 이러한 일에 대해서 임금님 스스로는 ‘적당하다고 생각해서 선발하셨을지 몰라도, (궁궐 바깥의) 하천배들까지 함부로 뭐라고들 떠들고 있습니다.’라고 직언하고 사직을 표하였다.

현종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대의 정성을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어찌 마음에 새기지 않겠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살피라.”

2월 19일(음력), 임금은 밀려있는 공문서에 결재를 하려고 여러 관료들을 불러들였다. 이때 판서 송준길이 보이지 않자 임금은 “사관 한 사람이 나가서 송 판서를 불러 들어오게 하라.”하였다. 송준길은 임금이 세자시절 글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결재를 하는 도중에 김장생(金長生)을 제향하는 서원의 편액 청원 건에 관한 건이 있었다. 이 청원서를 예조가 접수하지 않은 건(防啓 : 임금에게 청원서 올리는 것을 막음)이었다. 예조는 조선시대 육조(여섯 곳의 국가 행정기관) 중 하나로, 국가와 임금의 제사를 비롯한 의례, 사신 접대, 예식에 소용되는 음악과 기물, 그리고 학교와 과거시험 등을 관장하였다. 예조가 김장생 관련 청원서를 막은 것은 이미 시행한 적이 있는데 또 청원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이렇게 물었다.

“서원에 편액(편액(扁額: 판자 등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걸어 놓는 틀)을 하사하는 일 가운데 일찍이 겹으로 중첩해서 내린 일은 없었던가?”

승지 이은상이 대답했다.

“어찌 그런 일이 없었겠습니까? 송준길에게 물으면 알 것입니다.”

이에 판서 송준길이 이렇게 답했다.

“이일에 대해서 제가 어떻게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김장생은 바로 저의 스승이기에 저로서는 답변을 꺼리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임금이 물었다.

“아니, 단지 앞선 사례가 있는지 또는 사리에 맞는 일인지 맞지 않는 일인지만 말하면 될 뿐인데, 무슨 꺼릴게 있겠는가?”

송준길이 말했다.

“강릉(江陵)과 해주(海州)에 있는 선정신 이이(李珥)의 서원이 이미 양쪽에 다 편액을 내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겹으로 중첩해서 편액을 내린 전례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상은 도승지 조형에게 구두로 지시를 하여, “많은 선비들이 이렇게까지 청원을 하여 지금 특별히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하명하였다. 그리고 이날 송준길의 뜻을 물어 영남 유생 이주영(李周英) 등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정온(鄭蘊)을 위해 올린 서원의 사액(賜額 : 편액을 하사함)도 실시하도록 하였다.

공문서 결재가 끝나자 송준길은 임금에게 고향에 돌아갈 뜻을 전했다. 그러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임금에게 관리들에 대한 인사 문제 몇 가지를 제안하였는데 임금은 모두 그의 의견을 따랐다. 이어서 송준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년이 바로 성상(임금)께서 즉위하신 원년이고 또 해도 새해이므로 성상의 진덕 수업(進德修業 : 덕을 쌓는 공부)을 위하여는 보잘 것 없는 저의 정성이 오죽하겠습니까마는, 문장 솜씨가 없어서 뜻은 있으나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옛 분들의 말씀 중에서 오늘에 맞는 것들을 고르고, 거기에 신의 뜻까지 곁들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서 감히 이렇게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소매 속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올렸다. 이 도승지 조형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께 들어가고 나오는 모든 공문서는 정원(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여러 가지 사항들을 임금에게 보고하는 일을 맡는 관리)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 규정입니다. 삼가 엎드려 바라건대 잠시 정원에 그 책자를 내리시어 신들이 볼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임금은 이에 “이것은 공문서와는 다르지 않냐? 또 이미 이 자리에서 올린 것이니, 내가 보고 나서 정원에 내리더라도 안 될 일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송준길이 올린 책자를 손수 챙겼다. 이러한 이야기는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에 같이 실렸다. 현종개수실록에는 조형의 발언이 생략되어 있다.

조형 역시 서인 측 관료로 송준길과 예조에서 같이 일한 적도 있었고, 나중에 2차 예송논쟁이 일어날 때, 즉 인선왕후가 사망하여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을 때,(현종 15년, 1674년) 예조판서였다. 그는 송시열, 송준길이 주장에 따라 9개월 상복설(대공복大功服)을 취하였다. 이 때문에 나중에 관직에서 쫓겨난 인물이기도 하다.

이날 임금에게 행한 조형의 발언은 송준길을 견재하기 위해서 송준길이 지은 책자를 검열하려는 뜻은 아니었고, 원칙상 임금에게 들어가는 모든 문서는 먼저 담당 관리들의 손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규정을 임금에게 말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해 봄(음력 4월경) 송준길은 자주 조정에서 물러날 뜻을 표하다가 고향을 향해 길을 떠났다. 음력 4월 22일 임금이 급히 사람을 보내 만류하였으나, 송준길은 돌아올 뜻이 없었다. 그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전략) 저는 매번 선대의 고명하신 신하 이이(李珥)가, ‘배를 타고, 차마 종남산(임금이 있는 곳을 상징함)을 멀리할 수 없어, 사공에게 일러 돛을 올리지 말게 하였네.’라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세 번을 반복하여 읽으며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저의 심정과 처지가 이와 같을 줄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출발을 하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할 말을 모르겠습니다.”

임금은 이 글을 받아보고 “그대가 이미 돌아갈 뜻을 굳히니 나의 서운한 마음과 그대가 황급히 돌아가는 형색을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그대가 비록 물러간다 하더라도 속히 마음을 바꾸기를 바란다. 내가 날마다 이를 기다리고 있겠다.”라고 답변을 전했다.(현종개수실록 1년 4월 22일)

조정에서는 효종 임금이 사망하였을 때 제기 되었던 자의대비 복제문제가 아직 말끔히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서인들은 1년복을 주장하여 그 의견을 관철시켰지만 남인 관료들은 끈질기게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서인들 사이에서도 다소의 의견차이가 있었다.

음력 5월 3일 우의정 원두표가 자의 대비의 복제에 대하여 보고문을 올렸다. 그리고 예조는 이에 근거해서 이유태 등에게 복제 문제를 문의했다. 원두표는 무인 가문의 출신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1624년는 이괄의 난도 진압하였다. 현종으로서는 할아버지 인조를 국왕에 옹립하는데 공헌한 공신이자 국가 원로였다. 그는 1차 예송논쟁 때 판중추부사였는데, 서인들의 주장에 반대하고 자의대비의 3년 상복설을 주장한 허목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런 그가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려서 자의 대비가 1년 복이 아니라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이렇게 주장하였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장자(長子)를 중자(衆子, 차남 이하)와 구별하여 반드시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주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가 장차 조부(祖父)를 계승하고 조상의 제사를 자손에게 전해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장차 조부를 계승하고 장차 제사를 전해줄 사람을 위해서도 삼년복을 입어주는데, 하물며 이미 (효종대왕이 비록 차남이지만) 조부를 계승하였고 제사를 전해준 경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대부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제왕가(帝王家)는 어떻겠습니까? 제왕가는 오직 종통을 중히 여기는 것이므로 제후는 지손(支孫)이라도 종통을 계승하고 천자는 서자(庶子)라도 적자(嫡子, 장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곧 고훈(古訓 : 옛날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유태(李惟泰)·심광수(沈光洙)·허후(許厚)·윤선거(尹宣擧)·윤휴(尹鑴) 등 선조때 부터 예우를 받아온 사람들에게 널리 다시 의견을 물어달라고 하였다. 이들 중에는 서인측의 1년복을 반대하고 3년복을 주장한 남인 관료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유태는 김장생·김집 부자에게 배우고, 그 문하의 송시열·송준길·윤선거(尹宣擧) 등과 가깝게 지낸 서인이었으며, 윤휴와 심광수는 남인이었다. 허후는 북인으로 예송논쟁에서 남인들 의견에 동조한 인물이었다.

임금은 원두표의 이런 의견을 따라 예조에 명을 내려 문의를 하게 하였다.(현종개수실록 1년 5월 3일) 예조는 이들에게 연락하여 의견을 구하였으나 당시는 이미 서인측이 주장한 1년설이 대세로 굳어져 있고, 주요 관직 곳곳을 서인관료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남인들도 대놓고 반대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예조에서는 “이유태 등 제신들 논의가 명백하지 못한 것 같다.”며 다시 여러 대신들의 의견조사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조사하여 대부분이 “‘실록’의 기록을 참고하여도 3년을 행했던 예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하면서 조사를 마무리 하였다. 임금도 이에 “다수의 논의에 따라 이미 정했던 기년제(期年制, 1년상)로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현종실록 1년 5월 3일)

음력 5월 9일에 이유태가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임금은 대신들을 불러 그 상소문을 같이 읽었다. 상소문은 2만자가 넘었다. 내용은 향약,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 다섯 집을 한 단위(統)로 묶어 관리하던 법), 사창(社倉 : 지방의 각 촌락에 설치된 일종의 곡물 대여기관), 학교와 인재 배양, 과거 시험, 국방과 경찰 업무에 관한 일, 경제 문제, 세금 부과, 관직과 관리에 관한 일, 풍속에 관한 일 등 국정 전반에 대한 것이었다.(현종실록은 이러한 내용은 생략했는데, 현종개수실록에는 상세하게 소개를 하였다.)

임금은 승지 남용익에게 그것을 읽게 하고 의심난 부분은 임금이 직접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상소문을 올린 이유태에게 보충설명을 하도록 하였다.

현종개수실록은 이러한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였으나, 현종실록은 간략히 중요한 부분만 소개하였다. 여기서는 현종실록의 내용을 살펴본다.

임금이 물었다.

“방금 읽은 ‘신하들 중에 책임지고 일에 나서는 이가 적었다.’고 했는데 이는 무슨 말인가?”

이유태가 대답했다.

“선왕(효종 임금)께서는 크게 무엇인가 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신하들이 그 뜻을 받들어 맡아 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효종의 북벌 추진 계획을 말한 것 같다. 임금은 또 남용익이 읽는 것을 듣다가 ‘관직을 자주 바꾸는 폐단이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물었다. 이유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큰 폐단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은 이러한 점에 대해서 자신의 일처럼 변명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사헌부나 사관원의 대신들은 조금만 불안한 일이 있으면 곧 인피(引避 : 책임을 지고 일을 피함. 혹은 업무 처리를 거부하고 임금의 처분을 기다림.)를 하고, 패초(牌招 : 임금의 명령으로 신하를 부름)를 하면 반드시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는다. 아침에는 나오지 않았다가 저녁에는 또 와서 업무 거부(인피引避)를 하고, 게다가 또 이전의 사례를 따지며 관직 교체를 요청하는데, 무슨 병이 순식간에 걸린단 말인가?”

임금이 말을 마치자 남용익은 이어서 이유태의 상소문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서리(書吏 : 중앙 관청과 당상관 이상의 관료에 배속되어 기록과 회계 등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하급 관리)들의 폐단을 말하는 대목이 나오자, 이유태는 읽는 것을 그치게 하고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보충 설명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서리들의 폐단이 너무 많습니다. 관원들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모르고 오로지 서리에게 온통 맡겨버리기 때문에, 서리들이 그것을 기회로 농간을 부려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조식(曺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서리 때문에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이(李珥)도 그 말에 대하여, 좀 지나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토지세 문제에 이르러서는 이유태가 “경기도는 토지가 척박하니 전토의 등수(等數)를 감해주면 좋을 것입니다.”라고 보충하였다.

임금은 이러한 내용을 모두 듣고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상소문에서 한 말들이 모두 시행할 만한 일들이니 다시 묘당(廟堂 : 의정부 혹은 비변사)과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이유태가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이렇게 물었다.

“듣건대 선왕(효종)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전혀 술을 가까이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전하(현종)께서도 술맛을 모르신다고 하는데, 그 말이 참으로 사실입니까?”

임금이 답하였다.

“사실이다. 선왕께서는 조정의 관료 중에 혹시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으면 언제나 술 끊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훈계를 하셨다.”

현종은 그러한 부친의 말을 듣고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살펴야할 임금이 술에 취해서야 될 일인가? 효종은 어린 아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현종은 당시 아직 20살도 되지 않는 어린 청년이었지만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이유태는 임금과 대화를 나눌 당시 만 나이로 53세, 국가의 원로급 대신이었다. 그는 내심 아들 같은 젊은 임금이 기특하여 “이 말이 참으로 사실입니까?”라고 확인했던 것이다.

이 해(현종 1년) 12월 14일(음력) 전 판관 남궁집이 상소문을 올리면서 붕당에 관해서 이렇게 적나라하게 임금에게 보고를 하였다.(현종개수실록에도 소개되어 있으나 이하는 현종실록을 참조하여 인용함.)

“붕당설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군자들 사이에는 군자의 붕(朋)이 있고, 소인들 사이에는 소인의 당(黨)이 있다고 구양수(歐陽修)가 이미 논했습니다. 당나라 우이(牛李)의 당(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의 당)이나, 송나라 낙촉(洛蜀 : 낙양 출신 정이程頤를 영수로 하는 낙당과 촉나라 출신 소식蘇軾을 영수로 하는 촉당) 같은 것은 비록 당대의 명류(名流)들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것을 표방(標榜)한 사람들은 몇몇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서로 반목한 기간도 한 세대를 넘지 못하고 그쳤을 뿐입니다.”

남궁집은 이렇게 붕당이 중국에서 시작된 역사를 소개하고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렇게 비판했다.

“(중국에는) 지금 우리나라처럼 군자 소인 할 것 없이 온 조정이 당을 만들어, 사분오열되어 대대로 전해가면서 90년 가까이 심하게 그치지 않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당초 동인과 서인의 분열은 대개 전랑(銓郞 : 이조의 관리) 천거로 부터 나왔습니다. 이때 선후배 관리들 간에 서로 좋아하지 않아 약간의 색목(色目 : 당파 활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계미년(1583년 선조 16년)에 송응개(宋應漑) 등이 이이(李珥)를 심하게 공격하여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필자) 당론이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을유년(1585년 선조 18년) 이후부터는 동인이 세력을 얻자 이들이 갈라져서 남인과 북인이 되었으며, 계해년(1623 인조 1년) 이후에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담당하자 이들이 다시 두세 개의 파벌로 나뉘어졌습니다. 대개 정권을 잡으면 거기에 달라붙는 자들이 자연히 많아져서 그 당파 사람들이 번창하게 되어 하나로 화합하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형편상 나누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당파 분열과 다툼이 조정의 정치와 임금의 국정 운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했다.

“당이 같은 자는 나쁜 일을 숨겨 주고 좋은 일은 드날리기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자기와 당이 다른 자는 털을 불고 흉터를 찾아내듯 결점을 찾기에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추천하여 등용하면 ‘이 사람은 무슨 당이며 누가 추천한 사람이니 사심에서 추천한 것이요, 공적인 마음에서 추천한 것이 아니다.’라고 비난합니다. 또 어떤 사람을 논박하면 ‘이 사람은 어떤 당인데 누가 논박하였으니 사심이요 공심(公心 : 공적인 마음)이 아니다.’고 합니다.

이에 비방과 칭찬이 뒤섞이고 시비가 정해지지 않습니다. 간혹 꼿꼿하다는 이름을 얻기 좋아하는 자가 주위에 괘념하지 않고 숨김없이 과감히 말하면 뭇 의논이 시끄러워 집니다. 뿐만 아니라 임금 또한 그가 한쪽 당에 치우쳤다고 의심하고서 물리칩니다. 그러므로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낮은 지위에 침체되고 묵묵히 따르는 자는 끝내 높은 관직에 이릅니다. 바른 선비는 배척되고 비루(鄙陋 : 천하고 너절)한 자는 등용됩니다.”

이러한 남궁집의 상소문에 대해서 사관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남궁집이 글재주는 꽤 있었으나 가혹한 관리로 지목되어 파면되었다. 그 뒤 오랫동안 등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속에 불만이 쌓인 나머지 이런 소를 올린 것이다. 그의 말 가운데는 당시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상소문은 임금에게 올려 졌으나 임금이 안에 보관하고 아래 관리들에게 내려 보내지 않았다.”

당시의 현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임금으로서도 난처했을 것이다. 남궁집의 말이 맞다면, 그동안 임금이 내린 결정도 결국 당파 싸움에 휘둘린 결과가 아닌가? 지금 현직에 있는 대신들도 남궁집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두 천하고 너절한 자들이 아닌가? 그럼 누구의 말이 맞고 누구의 말이 틀린 것인가? 혼란스러운 따름이었다.

대략 1년 전(현종 1년 4월 18일, 음력) 복제에 대해서 호군 윤선도가 올린 상소문으로 조정이 일년 내내 시끄러웠다. 윤선도는 상소문에서 이미 정해진 자의대비의 1년 상복을 3년으로 고쳐야 할 것을 주장하고 1년복이면 된다는 송시열의 주장에 하나하나 반박하였다. 그는 “성인이 처음에 의례를 만들면서 사실은 천리에 근원을 두고 종통(宗統)을 정하자는 뜻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종통이란 종가집 맏아들의 혈통, 혹은 제사를 이어가는 혈맥을 뜻한다. 왕통의 의미도 있는데, 왕조 국가에서 군주의 자리를 계승한 왕실의 계통 혹은 정통 계승권을 가진 자의 계통을 의미한다. 윤선도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현종실록 1년 4월 18일)

“당연히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은) 자최(齊衰) 3년으로 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일이요, 의심할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초에 예관이 의례(儀禮) 주에 의하여 기년(1년)의 복으로 정했을 때, 조야를 막론하고 지식 있는 사람이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무슨 뜻으로 그렇게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국가 종통도 그로 인하여 약간 흐릿한 느낌이 있으며 어쩌면 다소 흔들리고 있는 것도 같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대통(大統 : 임금의 계통. 혹은 정통 계승권)을 밝히고, 백성들 마음을 안정시키고, 종묘사직을 굳건히 할 예가 되겠습니까?”

윤선도는 이런 상소를 올리면서 마지막에 “제가 보잘 것 없는 충정을 이기지 못하여 오직 임금과 종묘사직이 있음만을 알고 제 자신이 있음은 생각지 않았기에 시대의 저촉을 범해가면서 바른말을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임금께서는 사람이 하는 말까지 막지는 마십시오. 신은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느냐 않느냐와, 이 말대로 실현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주세(主勢 : 임금의 권세)가 굳건하고 못하는 여부를 판단하겠습니다. 나아가 우리나라의 국조(國祚 : 국운)가 연장되고 안 되는 여부를 점칠 것입니다.”

이러한 상소문을 받아들고 임금을 비롯한 조정의 많은 대신들이 크게 분노하였다. 이미 1년 상복으로 정해진 것이고, 송시열 등이 1년 상복으로 주장한 것은 효종을 임금으로 인정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님은 분명했다. 단지 나라 안의 전통이 그럴 경우 1년복을 입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통 운운할 문제는 아니었다. 임금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고 이렇게 하명을 하였다.

“전 참의 윤선도는 심술이 바르지 못하여 감히 음험한 상소문으로 상하(임금과 신하들)의 사이를 너무도 낭자하게 헐뜯고 이간질하였으니, 그 죄에서 빠져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중한 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겠으나 차마 죄를 주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 그냥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내쫓으라.”

임금이 차마 죄를 주지 못할 사정이란, 윤선도가 어렸을 때 자신을 가르친 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 윤선도는 현종의 아버지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중 한사람이었다.

윤선도의 상소문은 일 년 내내 조정을 시끄럽게 하였다. 그를 둘러싸고 서인 측 관료들은 온갖 비난과 비판의 화살을 날렸고, 상소문을 불태우고, 죄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였다. 결국 서인들은 윤선도를 탄핵하고 유배시켰다. 반면에 윤선도를 옹호하는 쪽의 학자, 관료들은, 예를 들면 조경(趙絅)·권시(權諰) 등 남인들은 자신의 관직까지 내놓고 변호하였다. 이에 서인들은 예송에 참여하여 자신들을 비판한 남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윤선도의 비판을 한 몸에 받은 송시열과 송준길은 사직을 표하고 조정에서 일할 생각을 거두었다.

현종 2년 5월 26일(음력), 임금은 송시열은 불러 윤선도의 상소내용에 대해서 다시 논의를 하였다. 송시열은 당시 판부사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임금은 송시열을 보자 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송시열도 같이 울었다. 임금을 이렇게 말했다.(이하 현종실록 2년 5월 26일자 기사)

“지난해 윤선도가 흉악한 상소문을 내놓더니 이번에는 조경이 또 헤아릴 수 없는 발언을 하여 경(송시열)과 우참찬(송준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윤선도는 송준길 보다는 송시열을 더 직접적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송시열은 이렇게 답변을 하였다.

“당초 의논드릴 때, 송준길은 말을 간략하게 했기 때문에 윤선도에게 빌미를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설을 많이 늘어놓았기 때문에 이런 무함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임금이 말했다.

“경의 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대신(송준길)의 말도 그러했다. 그래서 내가 단안을 내려 행했던 것이다. 정성으로 볼 때 경과 대신이 어찌 윤선도나 조경보다 못하겠는가? 대체로 그가 한 말은 한갓 경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실은 나를 지적해서 한 것이다.”

이에 송시열이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윤선도나 조경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위(임금)를 범하는 말이야 하겠습니까? (즉 임금을 배척하는 말을 하겠습니까? – 필자) 신에게 지나친 말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 뿐입니다. 신이 인용한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의 단궁이 문(免)했다는 설과 자유(子游)가 최복(衰服)을 입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단지 그 대의(大義)만 취했을 따름입니다. 만약 성명(聖明 : 밝은 지혜를 가지신 임금)께서 통촉해주지 않으셨던들 (제가 했던) 이러한 말이야말로 참으로 위험할 뻔했습니다.”

송시열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신이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성명(聖明)께서 곡진히 보살펴주신 덕택인데, 종적을 돌아볼 때 불편하기만 하여 감히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제가 감히 고상한 체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사태도 이미 해결되고 소원도 충족되었으니, 시골집에 돌아가 죽도록 허락해 주시면 성은이 망극하겠습니다.”

임금이 이렇게 답했다.

“이 일이 판명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이미 판명된 마당에 어찌 반드시 또 떠나야 하겠는가?”

그리고 임금은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원래 경을 죄줄 의사가 없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이틀 뒤(현종 2년 5월 28일. 현종개수실록은 5월 27일 기사)에도 임금은 송시열을 불러 떠나지 말고 조정에 있으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송시열의 마음은 이미 굳어 있었다. 임금은 결국 이렇게 고별인사를 했다.

“경이 끝내 머물려고 아니한다면 또한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내려간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내 마음을 이해하여 지난날처럼 바쁘게 서둘지 말고 다시 들어오도록 하라.”

임금과 송시열의 대화 가운데는 시중에 떠도는 송시열 관련 유언비어도 있었다. 송시열이 이렇게 말했다.

“신이 고향에 있을 적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이 선왕(先王 : 효종)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앞장서서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며,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가 적통인데, 소현세자에게는 아들이 있어 그 아들이 현재 국왕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소문이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사이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제주도 유배지에서 요절하였고, 셋째 아들(경안군慶安君 이석견, 이회李檜 1644-1665)이 현종 시대까지 살아있었다. 경안군은 제주도에서 강화도로, 그리고 교동도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가 풀려났다. 이후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두었는데, 22세 되던 1665년에 사망했다.(방상근 : 125-126 참조)

송시열을 이렇게 덧붙였다.

“(이러한 소문은)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과 서로 안팎이 되었습니다.(즉 소문이 예송논쟁과 맞물려 저를 괴롭혔습니다.- 필자) 이는 쓸데없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야기일 뿐만이 아닙니다. (조정의 고위 관료인) 영의정 정태화가 그것을 듣고서 깜짝 놀라 신의 아들의 친구를 불러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신은 마음은 물론 뼈 속까지 섬뜩하여 죽을 데를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정태화(鄭太和)는 1차 예송 당시 영의정이었다. 정태화는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어머니의 경우, 장자와 중자(장자 외 아들들)이 사망했을 때 모두 기년복(1년복)을 입는다’는 규정(‘국제國制 기년복’)을 들어 송시열 등 서인들이 주장한 1년복을 따랐다.

이러한 정태화에게 송시열이 임금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는 소문이 전해진 것이다. 송시열은 이러한 유언비어를 임금에게 직접 소개를 하면서 그것은 소문일 뿐이며 자신의 충성심에는 한 점의 의혹도 없음을 강변하였다. 임금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내 자신은 송시열을 의심하지 않으며 기다릴테니, 언제든지 마음을 바꿔 다시 돌아오라고 격려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