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 대기근과 임금의 고민

현종실록의 율곡 선생 이야기

 

경신 대기근과 임금의 고민

현종 10년(1669년), 1월. 송시열이 다음과 같이 임금께 건의하였다.

“이경억(李慶億)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상소한 일입니다. 관가에 소속된 종이나 개인 집에서 부리는 종의 경우, 양민의 처가 낳은 자식은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그 어미의 신분을 따르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선대의 고명하신 관료 이이(李珥)의 논의인데 그 당시 의정부에서 반대하여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양민이 날로 줄어들고 있는 것은 실로 이 법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속히 제도를 정해 시행해주시기 바랍니다.”

송시열은 현종의 스승이기도 하였으며 현종의 아버지 효종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서인의 영수로 현종 초년에 남인과 서인이 예송 논쟁을 벌일 때 서인의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논쟁을 이끌었다.

율곡 선생은 일찍이 천민이나 서얼 등 소외된 백성들의 보호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천민이라도 그 어머니가 양민일 경우는 양민으로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송시열은 이러한 율곡의 주장을 근거로 양민의 감소를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송시열의 주장에 대해서 당시 영의정 정태화나 판부사 정치화는 반대 의견을 냈다. 하지만 좌의정 허적이 ‘임금의 명에 의거해 규식을 정하여 시행하되 그날부터 시작해야 합니다.’고 주장하여 임금은 이에 따랐다. 정태화와 정치화는 형제인데, 이들 형제는 치열한 당파 싸움의 와중에 당색을 드러내지 않고 중도적인 입장을 유지한 관료들이었다. 좌의정 허적은 남인이었지만 송시열의 의견에 찬성을 표하였다. 이러한 찬성 덕분에 임금은 천민의 신분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하였다.

참고로 허적은 효종이 사망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들과 예송논쟁을 벌일 때, 서인의 1년 상복설에 맞서 3년설을 주장해 송시열과 대립했다. 나중(1671년)에 그는 영의정이 임명되었는데, 송시열이 그의 잘못을 논박하여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년, 현종이 사망한 해)에 인선대비(仁宣大妃, 효종의 부인)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일어나자, 다시 9개월 상복설을 주장한 서인들과 맞서 1년설을 주장하여 그것을 관철시켰다. 이 일로 서인들은 권력을 내놓고 남인들이 집권하게 되었는데, 허적은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송시열 등 서인들이 예송논쟁을 벌일 때, 그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결국 그들은 율곡 선생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시열은 임금이라도 일반 사대부나 양반들처럼 작은 아들이라면 작은 아들의 예법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자의대비는 효종의 계모로, 효종이 죽었을 때는 효종이 둘째 아들이므로 3년이 아니라 1년만 입으면 되며, 효종의 부인, 즉 자의대비의 며느리가 죽었을 때는 1년이 아니라 9개월만 입으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남인들은 임금은 일반 사대부들과 다른 예법을 적용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임금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했다. 이들은 서인들 보다는 더 임금의 권위를 존중했다. 그들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지만,(첫째 아들은 소현세자) 왕위에 등극했으니 장남으로 보고 계모인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고 며느리가 죽었을 때는 정식적으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시열과 서인들이 스승을 모신 율곡 선생은 매우 근대적인 인권관(人權觀)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사회사상 전문가로 동서양의 인권 사상을 검토한 이동인은 율곡 선생의 인권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다.

율곡은 ‘백성이 군왕(임금)을 위해서 봉사하는 정치가 아니라 군왕과 관리가 백성을 위해서 봉사하는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소외된 계층(천민, 서얼, 사졸)의 권익을 보호하고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정책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법으로써만 인권을 제한 할 수 있고, 법을 통해 인권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법치주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동인은 율곡의 인권관을 현대적인 시각에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사항으로 정리하기도 하였다.(이동인, 88-89쪽 인용)

⑴ “율곡은 ‘민생(民生)’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백성의 생존권 보장을 강조했다. 율곡이 왕도정치를 강조한 것은 백성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간절한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⑵ “율곡이 시민적 자유권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장하려 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몇 가지 측면에 걸친 노력은 인정된다. 그는 의견(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⑶ “율곡이 민생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안을 한 것은 백성의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받을 권리, 곧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⑷ “율곡이 법으로써만 인권을 제한할 수 있고, 법을 통해 인권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법치주의 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법 앞의 평등권을 내세우는 ‘법집행에 관한 권리’를 주장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율곡의 사상은 전제왕조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의 것과 비교해볼 때 상당한 정도의 인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인들의 예송 논쟁 관련 주장은 이러한 입장에서 살펴보면 임금의 권력을 어느 정도 제한하고 임금과 사대부, 권력자와 피권력자가 하나의 예법 하에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볼 수도 있다. 현대적인 인권 상식으로 바꿔 말하자면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해야한다는 점을 주장한 것이다.

송시열과 서인들의 주장에는 이렇게 미묘하게 임금의 권위를 흔드는 사상이 담겨 있었다.

이해 6월에 성균관의 유생들이 양시(楊時), 나종언(羅從彦), 이통(李侗) 등 중국 유학자들과 조선의 이이, 그리고 성혼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8월에도 이러한 요청이 있었으나 효종은 거부하였다. 현종개수실록(21권, 10년 9월 26일 기사)에 따르면 황해도의 진사 김창준 등이 또 중국 유학자들과 함께 이이·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다. 이때도 임금은 따르지 않았다.

임금으로서는 서인의 스승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문묘에 종사되지 않은 지금도 서인들이 저렇게 득세를 하는데, 만약에 국가에서 이 두 사람을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의 수준으로 높여서 배향을 하게 되면 의기 충만한 서인들의 권력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다음해, 현종 11년(1670년)과 12년(1671년)에 조선은 전례 없는 대기근을 경험하였다. 이를 경자년과 신축년에 일어난 대기근이라 하여 경신(庚辛)대기근 이라 부른다. 이 때 가뭄과 홍수, 우박, 태풍 등 기상 이변뿐만 아니라 해충, 냉해, 그리고 전염병, 지진까지 일어나 조선 전역의 백성들을 괴롭혔다. 현종은 나중에 이 당시 일을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수재나 한재, 풍재, 상재가 없는 해가 없었다. 경자년(1670년)과 신축년(1671년)에 대기근을 만난 후에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너무도 참혹하게, 오갈 데 없이 죽었던 것에 대해서 참으로, 차마 말을 할 수가 없다.”(현종 14년 6월 15일)

이해(1670년)에는 이이‧성혼 등의 문묘 종사 관련 상소가 없었다. 대기근에다 지진에 자연 재해까지 전국이 어수선하여 유생들이 율곡 선생에 대한 문묘 배향 상소문을 올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몇 차례나 임금에게 그것을 건의하였으나 번번히 퇴짜를 맞았으니 의욕이 상실한 이유도 있었다.

서인들이 나중에 다시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는 2차례에 걸쳐 율곡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에 세자빈을 간택할 때는) 집안의 법도를 보고 그 덕과 행실을 살필 뿐이었지, 여항의 여자들을 찾아 모아서 궁중으로 불러들여 얼굴을 보며 간택을 하기를 우리 조정에서 하는 것처럼 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선정신 이이(李珥) 및 선조 시대의 여러 유신들이 모두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도 변화시키지를 못하였으니, 대개 좋지 않은 습속이었다.”(현종개수실록 11년 2월 14일 기사)

세자(숙종)의 부인을 간택할 때의 기록이다. 당시 간택 대상이 되는 여성들은 모두 혼인을 금지하였다. 부마(공주의 남편, 즉 현종의 사위)도 간택을 했는데, 대상이 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그 사실을 숨겨서 벌을 받기도 하였다. 기사는 선조시대에 율곡 등이 그런 풍속을 비판하였다고 언급한 것이다. 남인들이 편찬한 현종실록에는 이런 기사가 없다. 서인 측 편찬자가 율곡 선생의 이야기를 추가한 것이다.

또 당시 송준길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일에 대해서 현종개수실록의 편찬자는 율곡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적어 넣었다.

“살피건대, 효종 이후로 재야의 처사를 우대하는 것이 매우 뛰어나, 특별한 예우를 진실로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송준길이 마음이 편치 못하여 이러한 청을 한 것이다. 예전에 선조 대왕께서 선정신 이이(李珥)에게 물어보시길, ‘성혼(成渾)의 사람됨이 어떠한가?’라고 하자, 이이가 대답하기를 ‘혼자서 경제(經濟)를 담당하는 것이라면 잘할 것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겠으나, 그로 하여금 경연에 출입하며 상을 보도하게 한다면 보탬이 어찌 적겠습니까?’ 하였다. 성혼도 그러하였는데,(즉 성혼도 부족함이 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은 어떻겠는가? 사람들이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왕왕 배해(裵楷, 위진남북조 시대 진나라 사람으로 훌륭한 관리)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니, 이 때문에 송준길 등이 조정에 있는 것을 더욱 불안하게 여겼다.”(현종개수실록 11년 4월 24일)

앞의 두 기사는 효종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서인들이 새로운 실록을 만들 때 추가한 내용이다. 서인들로서는 율곡 선생의 지혜로움을 하나라도 더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추가한 것이지만, 사실 선생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이 당파 싸움에 관여하게 되는 것을 꺼려했다. 율곡 선생을 흠모하는 서인 측 유생들은 그 분의 훌륭한 점을 자주 실록에 거론함으로써 반대파 관료들도 율곡을 존경하도록 이끌 생각이었겠지만 효과는 없었다. 남인들은 자신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퇴계 이황과 율곡이 같은 등급으로 간주되는 것을 싫어했다.

다음해, 현종 12년(1671년) 11월 우의정 송시열이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지난해 경술년에 병 때문에 부르심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돌이켜 생각건대, 무신년과 기유년 두 해의 달포 사이에 국사를 망령되이 논하여 위로 공직에 끼친 피해와 아래로 신의 몸에 이르게 한 비방이 적지 않습니다. 비록 후회하고 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하며, 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다.

송시열은 자신이 공직에 나와 여러 가지 잘못한 일에 대해서 자책하면서 주위 관료들의 비방을 많이 받았는데, 그런 비방은 자신이 모두 함부로 말한 잘못 때문이라고 하였다. 결국 송시열이 사직을 요청한 것은 몸도 아픈데다 주변의 비판이 너무 많아서 심적인 부담이 크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송시열이 매번 해왔던 말이었다. 임금은 이러한 말을 듣기 싫어했으나 송시열은 본인을 자책하는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아마도 임금보다 백성보다 자신이 더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도무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임금을 위해서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임금은 항시 그렇듯 마음으로만 서운함을 달랬다.

송시열은 자신이 서얼(庶孽)의 벼슬길을 열어 주자고 주장하다 비판을 받은 일도 적었는데, 당시 임금과 같이 송시열의 상소문을 보고 있던 관리들은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는 것은 본디 이이(李珥)가 주장한 의논으로서 송시열이 제창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어찌 욕한 자가 있겠습니까?”라고 임금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우의정 송시열이 주변의 의견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임금도 관료들의 의견에 동의하여 “(송시열은) “대개 그 당시 의논한 일에 대해서 다 비방을 받았다고 여기고 스스로를 탓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 임금과 함께 국사를 논의한 사람들은 남인의 허적과 중도파인 정태화 등이었다.

현종은 송시열의 사직 요청 상소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내렸다.

“오늘날 나라 형편이 여기에 이르러 천지 산천의 변고와 인물의 요괴가 거듭 보이고 일어나니, 매우 놀라고 경악할 만한 것이 아닌 게 없다. 기근과 역병의 경우는 이전에 없던 것이어서 사망한 백성이 몇 천 몇 만 명인지 알 수 없다. 걱정과 두려움이 지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난번에 또 겨울 우레의 변고 때문에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사관을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전달하였다.”

송시열이 올린 상소문은 임금이 겨울에 있던 우레의 변고 때문에 널리 의견을 구한 것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였다. 당시 자연 재해, 예를 들면 이상 기온이나 천둥 번개 등은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거나 부도덕한 일을 할 때 하늘이 내리는 경고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임금은 갑작스런 천둥 번개에 놀라 관료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정치를 비판해달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임금은 이어서 송시열에게 이렇게 답을 내렸다.

“지금 (송시열이 올린) 상소문을 보건대 나라를 위하는 은근한 뜻과 (임금을) 경계시키는 애틋한 정성이 글 밖에 넘친다. 나를 사랑함이 성실하고 충성스러우니 내 심히 감탄하여 마지않는다. 또 (송시열이 보낸) 책자를 보건대 더욱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임금으로서는 서운한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스승에 대한 예의를 갖춘 것이다. 그리고 송시열의 심적 고통을 이해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송시열은 이때 상소문을 올리면서 조그만 책자도 함께 올렸는데, 거기에 그는 자신의 행동이나 제안이 비판 받은 일에 대해서 소상히 적었다. 예를 들면 그는 “김징(金澄, 서인 송준길의 제자로 억울하게 고발을 당해 유배생활을 한 관리)의 사건 때에 신이 장편의 소를 지어 구하려고 하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신은 본디 흠이 많아서 여전히 비방을 받고 있었고 영남 선비들의 비방을 받은 뒤로부터 황연(黃壖), 이석복(李碩馥), 이태양(李泰陽)의 소가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옛사람 말에 이른바 천 사람이 손가락질하면 병을 앓지 않아도 죽는다고 한 말과 거의 같은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자신이 억울하게 누명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아 죽을 형편에 놓여있다는 호소였다.

임금과 송시열의 상소문 건을 논하던 관료들, 특히 남인 관료인 허적은 가슴이 뜨끔할 이야기였다. 이에 허적과 정태화 등은 송시열의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었으며 모두가 비방을 한 것이 아니고 의견을 제시한 정도였을 뿐이라고 답하였다. 임금의 답변은 계속되었다.

“경(송시열)이 지난해 서울에 왔을 때, 생각한 것을 모두 진달(進達 : 글이나 말을 윗사람에게 전함)하였던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는데 근일에 (소책자에서 송준길이)운운한 것이 이와 같다면 매우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소책자 가운데에 의논하여 처리할 만한 일은 즉시 의논해 처리할 것이고 과인에게 재촉하고 격려한 일은 깊이 기억해 둘 것이다.”

송시열이 무엇 때문에 자책하고 있는지 이미 지난해 다 들은 것 같은데, 오늘 또 송시열이 고통받고 있는 많은 일을 알게 되는데, 그 이야기들이 놀랍다는 것이었다.

임금은 이렇게 답변을 마무리했다.

“아아, 지금과 같은 시기에 내가 (그대를) 재상으로 임명함은 실로 괜한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자네) 질병이 한창 심하여 내 굳이 청하지 못하였지만 지금은 옛 병이 나았을 법하다. 나랏일의 위태로움이 하루하루 더해가니, 경이 계속 사양하여 나랏일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놓아두고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내 마음이 남몰래 한탄스럽다. 소위 (그대가 책자에서) 운운한 말은 모두가 근거 없는 말이니 경은 어찌 개의하는가?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되도록 속히 마음을 바꾸어 올라와서 위태로운 나라의 상황을 건지고 어렵고 고생스러운 백성들을 구제하여 과인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너무 자책만 하지 말고 임금을 돕고 백성들 구제를 위해서 힘써 달라는 간청이었다. 송시열은 1668년 우의정으로 취임했다. 그 뒤 좌의정 허적(許積)과 의견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한 적도 있었다. 이 상소문을 올린 1671년 11월경에는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한 상태였다. 하지만 임금의 마음은 송시열로 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이현진 : 66)

남인 측 관료인 허적은 다음해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사직하였다. 이 당시 허적과 송시열 사이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다. 허적이 물러간 뒤 임금은 송시열을 좌의정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현종의 마음은 남인 관료인 허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