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신환과 김경호의 저술 비교3 저자의 주장

곽신환의 『1583년의 율곡 이이』와 김경호의 『모던율곡』 3 :

저자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1) 곽신환의 『1583년의 율곡 이이』

 

여기에서는 제1장 ‘1583년의 율곡 이이’에 집중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절 산림에서 다시 조정으로. 1581-1582년의 율곡

 

율곡은 29세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리고 1576년 41세 봄에 자신이 조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판단하고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5년간 재야의 지식인으로 자연에 파묻혀 수양과 연구의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율곡이 45세 되던 1580년 12월에 그를 대사간으로 임명하여 조정으로 불러냈다.(17-18쪽)

 

하지만 1581년 3월, 율곡은 병이 나서 3번이나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율곡이 사망하기 3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대사간으로서 당연한 직무인 부정축재 관리들 몇 명을 지목하여 탄핵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나중에 율곡을 비방하고 탄핵하는 주동자들이 되었다.(19쪽) 율곡은 당시 쓸모없는 법을 고쳐서 변통할 것을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예를 들면 공안을 개정하고, 불합리한 지방 군현을 합병하여 줄일 것, 감사의 임기를 늘릴 것, 현자를 고루 등용할 것, 그리고 사사로운 붕당을 제거하고 조정을 화합시킬 것 등이었다. 이것들은 율곡이 이전에도 자주 임금에게 요청한 것들이었다.(19쪽)

 

1582년 율곡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조판서 자리는 관리를 임명하는 자리로 당쟁이 격화되고 있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자리였다. 율곡은 “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관직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힘썼다. 현명한 선비를 발탁하여 대사헌의 자리에, 학문과 덕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대사성의 자리에 앉히고, 관직이나 명예에 뜻이 없는 사람을 천거하여 절개를 숭상하는 기풍을 가다듬고, 수령직을 감당할 재능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목민관의 자리에 세웠다.”(21쪽)

 

이해에 그는 임금에게 『인심도심도설』, 『학교모범』, 『김시습전』 등을 지어 올렸다. 『인심도심도설』에서 그는 퇴계는 당시 이미 사망하고 없었으나 퇴계 사상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퇴계는 리도 기도 서로 발동할 수 있다고 하는 호발설을 제창했는데 율곡은 리는 혼자서 발동할 수 없으며, 기라고 할지라도 기는 리가 없으면 발동할 이유가 없다고 하여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나중에 동인에 속한, 퇴계의 후학들로부터 모진 비판과 비난을 받게 되었다.(22-23쪽) 그리고 율곡은 이해에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저자는 이 일이 율곡에게 커다란 시련의 발단이었으며, 그가 활동한 마지막 해가 되는 다음 해에 참혹한 재앙이 되었다고 평하였다.(24쪽)

 

2절. 계미년 기록 문헌

 

이 책은 기본적으로 『선조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하지만 저자는 『율곡전서』 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 이 절에서 저자는 1583년(계미년)의 일을 기록한, 여러 편의 문헌 자료를 소개하면서 당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583년은 율곡 이이에게 있어서 결과적으로 그의 생명을 앗아간 일들이 벌어졌다. 이해에 벌어진 당파의 싸움은 조선 사림 정치의 단면을 보여준다. 위에 소개한 것처럼 1583년의 일에 여러 사람이 관심을 갖고 일기체로 정리할 만큼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당쟁과 관련이 있는 일련의 일들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28쪽)

 

1583년에 당쟁은 이미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율곡에 대한 탄핵 상소는 정부 기관인 사간원과 사헌부, 홍문관 등이 나섰으며, 승정원에서도 동참하였다. 이에 대해 선조 임금은 율곡에 대해서 각별한 지지를 표명하였으며, 하락, 성혼 등 지인들은 율곡을 옹호하고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이나 지방 유생들 중 일부도 율곡을 변호하는데 적극 참여하였다.(28-29쪽)

 

당시의 당파적 상황을 저자는 다음과 분석했다.

 

“당시의 동인들은 대부분 신진 사류 소장파 중심이었고 서인들은 경륜을 갖춘 구세력 중심이었다. 소장파는 이념적 시비에 기울고 구세력은 원만한 문제해결에 중점을 두었으나 양 진영의 단점이 더 부각되는 상황이었다.”(30쪽)

 

저자는 율곡의 글(『율곡전서』7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당시의 당쟁을 소개하였다. 조정이 동서로 나뉜 다음에 서로 당파가 같고 다름으로 좋아하고 싫어함을 결정하였으며 말을 만들고 일을 만드는 자가 서로 얽히게 되었는데, 지식인 관료 중에서 논의를 주도하는 자들은 상당수가 동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의견이 한쪽으로 치우쳤으며, 사람의 재능이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묻지도 않고 동과 서를 나누는 데만 힘썼다. 또 동인을 비난하면 억압하고, 서인을 배척하면 끌어주었으며, 조정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관리들은 출세 길이 서인을 배척하는데 있다고 여겼다.(29쪽)

 

 

3절. 율곡에 몰아치는 탄핵

 

이 절에서 저자는 두만강 주변에서 니탕개 등 여진족들이 난을 일으켜 조선의 성곽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사건을 서술하였다. 병조판서 율곡은 이때 임기응변의 대책을 강구했다. 그것은 서자와 노비를 모집하여 변방을 지키게 하고 그 대가로 벼슬을 주고 양민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징병에 응하지 못한 사람은 대신 군량미를 바치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 임금은 율곡의 조치를 허락하였으나 반대파 관리들은 그를 견제하고 비방하였다.(31쪽)

 

여름에는 2만 명이 넘는 오랑캐들이 또 침략해 들어왔다. 이러한 사태로 말미암아 병조판서 율곡은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임금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오다가 어지럼증 때문에 임금을 만나지 못하고 병조의 건물 한쪽에서 잠시 쉬었다. 이일을 빌미로 반대파 관리들이 율곡을 탄핵하였다. 이유는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고, 교만하여 건방져서 왕을 업신여긴다.’는 것이었다. 기타 여러 가지 율곡이 취한 조치에 대한 비난도 함께 추가되었다.(31쪽)

 

율곡을 지지하는 관리들과 유생들은 탄핵 반대의견을 임금에게 올려 조정 안 밖이 몹시 시끄러웠다. 이 때 율곡 탄핵을 주도한 사람들은 박근원, 송응개, 허봉 등이었는데, 임금은 이들을 귀양 보냄으로써 사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이를 ‘계미삼찬’이라고 한다.) 물러나 있던 율곡에게는 판돈령부사의 직을 주고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자지만 율곡의 병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 다음 해 1월 16일 사망하게 된다.(32쪽)

 

저자는 이 장에서 율곡을 공격한 인물들, 그리고 율곡이 비난을 받은 사유와 탄핵 일자 등을 상세히 정리하여 율곡이 사망 1년 전에 얼마나 가혹한 비난에 휩싸였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9월 3일 이조 좌랑 김홍민은 율곡의 성품이 경솔하여 모든 제도를 바꾸고 고치려고만 애썼다고 비난하였으며, 말과 행동이 다르고, 자기가 당을 만들고서도 자기는 마치 시비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하며,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사사로운 사귐과 모임을 옹호한다는 둥 율곡이 인간적으로 견디기 힘들 정도의 비난을 쏟았다. 율곡을 변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일일이 대응하며 그러한 비난이 근거가 없음을 강변하였다.(38-40쪽)

 

저자는 이러한 비난 상황에서도 율곡의 학술 사상이 퇴계와 다른 점에 대해서는 일체 비판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율곡 철학에 대한 반대파들의 비난은 율곡을 문묘에 배향하고자 할 때 비로소 제기된 것이라고 하였다.(40쪽) 이는 율곡 사상과 퇴계 사상의 차이가 율곡 생전에는 그다지 문제되지가 않았다는 점으로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4절. 1583년 조정의 풍우

 

이 장에서 저자는 다시 1583년의 1월로 돌아가 월별로 율곡을 둘러싸고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정리, 소개하였다.

예를 들면 이해 3월에 율곡은 임금의 인재 천거를 받아들여 친구 성혼을 추천하였다. 성혼은 이때 병조 참지(參知)로 임명되었다.

 

이해 9월에 율곡은 이조판사에 임명되었는데 여러 번 사양하다 궁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글을 올려, 자신이 중책을 맡을 수 없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4가지 사항을 들었다.(90-91쪽, 일부 문구를 수정함.)

 

1) 저는 타고난 기질이 경박하고 학문이 졸렬한데다 재주는 없는데 뜻은 크기만 하고 지식도 없으면서 큰소리만 칩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승복을 하지 않고 책망을 합니다. 저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어찌 원한 때문만으로 그러하겠습니까?

 

2) 지금은 아무리 호걸스러운 선비와 충성스러운 신하라도 손을 쓰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저처럼 어설프고 잡스러운 자가 감히 홀로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3) 오늘날 저를 둘러싸고 한 차례 소요가 일어난 일도 제가 동료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 소치입니다. 어찌 꼭 그 사람들이 재앙을 일으켜 모함해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친구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고서 윗사람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뻔뻔스럽게 이조판서의 자리를 차지하고 인물을 뽑거나 물러나게 한다면 누가 믿고 승복하겠습니까?

 

4) 신은 젊어서부터 병이 많았는데, 노쇠해지면서 더욱 심해져 혈기가 소모되고 정신이 감소되어 잠시만 노동해도 바로 현기증이 발작합니다. 지금 지혜와 생각을 다 짜내어 위로 임금의 일을 보필하고 싶지만 정신력과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힘을 내어 조정의 반열에 나아가 미력이나마 바치고 싶지만 체력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임금은 율곡의 이러한 글을 읽고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경(그대)의 상소를 보니, 아 하늘이 우리나라를 평치(平治 : 평온하게 다스리게) 하지 않으시려는가 보구나. 어찌하여 경과 같은 인물이 시대에 뜻을 얻지 못한단 말인가. (중략)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은 한번 웃어넘길 가치도 없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를 마음에 꺼림칙하게 생각하여 성급히 사직하겠다고 하는가.”(92쪽)

 

이 절에서 저자의 서술은 1584년 1월 16일 율곡이 49세로 사망한 날에 이르러 끝난다. 저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율곡이 병사하니 일각에서는 누군가 그를 무고(巫蠱 : 무당의 주술로 사람을 죽이는 일)했다고 했고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아 확인하려는 시도가 문인들(제자들)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성혼은 이를 만류했다. 율곡 같은 바른 기운의 사람이 한갓 음사에 의한 무고로 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102쪽)

 

율곡의 사후에 임금은 제문에서 이렇게 슬픔을 표했다.

 

“나라 위해 온 힘을 다한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경이야 무엇이 슬플 것이 있겠는가만 큰물 가운데서 노를 잃었으니 나는 못내 슬퍼하노라.”(102쪽)

 

이하 이 책은 5절 ‘율곶 강마을의 밤 – 도학자와 유지’, 6절 ‘비방 무고에 대한 율곡의 대응’, 7절 ‘심통원 심의겸과 율곡의 관계’, 8절 ‘율곡의 사후에 일어난 비방과 엽등(獵等)’ 등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는 상세한 소개를 생략한다.

 

 

2) 김경호의 『모던율곡』

 

 

‘제1부 율곡을 보다’에서 저자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이야기부터 서술을 시작한다. 그는 율곡이 자기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소개하고 그 어머니 신사임당의 이미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녀(신사임당)은 학술권력과 정치권력이 구분되지 않았던(즉 대부분의 관료들이 학자이면서 관리였던 – 필자주) 17세기 후반부터, 율곡을 낳은 ‘성스러운 어머니’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일제 식민의 과정과 계몽적 근대화 과정에서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다시 등장하지요. 그녀가 ‘신사임당’으로 다시 발명되는 이 과정은 매우 드라마틱합니다.”(30쪽)

 

저자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신사임당의 원래 이미지는 산수화를 잘 그리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노론계 인물들의 필요에 의해서, 그들이 활동한 18∼19세기에 이르러 그런 이미지는 사라지고, 초충도(풀과 벌레 그림)나 매화의 대가로 바뀐다. 그것은 율곡과 같은 성현을 낳은 어머니가 호방하게 산수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감추고, 조신하고 단아하며 풀벌레와 매화처럼 작은 세계를 그리며 유교적 가정 윤리에 충실한 부인의 모습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39-40쪽)

 

그리고 어머니와 사별한 율곡이 불교 세계에 빠져들게 되는 과정을 소개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율곡은 어려서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머니 사망을 계기로 19세가 된 1554년에 금강산으로 들어간 일을 상세히 기술하였다.(44-49쪽) 그러나 율곡은 1년 후에 다시 속세로 내려와 유학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저자는 율곡이 하산 후에도 자신이 머물렀던 암자의 승려들과 교류를 이어갔지만, 불교를 통해서 얻은 것은 ‘불교는 참다운 진리가 아니다.’라는 결론이었다고 한다. 이를 저자는 ‘무소득’과 ‘파국’이었다고 설명한다.(54쪽) ‘무소득’의 소득인 셈이다.

 

이후 율곡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었는데 율곡이 직면한 현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젊은 시절 율곡의 생각을 전한다.

 

“율곡의 현실 인식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관적 색채가 강하지요. 율곡이 당대를 파악하는 비판적 인식에는 그 시대의 삶에 대한 우울함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를 불만스러워합니다. 그래서 『경연일기』에 기록된 율곡의 다른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절합니다. 이렇듯 율곡의 철학적 사유는 현실의 질곡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고식적인 세계의 막강한 위력을 실감하고 현실의 부조리함을 제거할 수 있는 철학적 방법을 고민합니다.”(60쪽)

 

율곡 철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 것이다. 자기 시대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바로 율곡의 성리 철학으로 나타난 셈이다.

 

이어서 저자는 05 ‘염치: 간신배와 비루한 자’에서 율곡이 말년에 겪은 ‘병조판서 탄핵사건과 그 전말’에 대해서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그리고 저자는 율곡에 대한 탄핵이 임금이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13일만에 일단락되었으나 그 이후에 율곡에 대한 인신공격과 율곡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핵으로 이어진 사실을 들어 조선시대의 간관(諫官: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관리)에 의한 ‘공론’제도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서로 다른 정파가 국정 현안에 대한 현격한 인식 차이로 대립하면 아주 작은 촉매제만 있더라도 누적된 갈등이 폭발할 여지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공론으로 포장되어 확장되는 경우 ‘여정(輿情)’ 즉 다중이 공감하는 집단 감성은 수렴의 주체에 따라 왜곡되기 쉽습니다.”(82쪽)

 

이러한 이유로 저자는 오직 간관 개인의 양심에만 의존하는 공론 시스템은 정치 세력 간의 첨예한 대치 국면에서 쉽게 흔들릴 우려가 있으며, 율곡의 사후, 조선 유교사회가 급속하게 동인과 서인의 대립 구도로 양분되고 신·구의 갈등을 통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 이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82쪽)

 

제2부 ‘율곡에게 듣다’에서 저자는 율곡의 『격몽요결』, 『성학집요』, 『학교모범』 등 저술을 이용하여 율곡의 당시 사회에 대한 인식과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을 소개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율곡은 자신의 시대를 어두운 시대, 몽매한 시대로 봅니다. 선비가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근본적인 자기 혁신이 전제되지 않은 이념적 지향은 현실에 의해서 거듭 전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율곡이 출사와 사퇴를 거듭하던 1570∽1580년대는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원기와 같은 존재였던 선비들이 불의에 침묵하고 사사로운 이익에 따라 이합 집산하는 불의의 시대였습니다.”(103-104쪽)

 

“율곡은 치심(治心 : 마음을 다스림)의 문제가 통치자의 핵심적인 공부라고 합니다. 임금의 마음이 다스림을 펴 나가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는 것은 통치자 한 사람에게 달려있고, 한 사람이 훌륭하고 그렇지 못함은 한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115쪽)

 

제3부 ‘율곡처럼 품다’에서 저자는 자신의 뜻을 견지하는 마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마음, 대화를 통해서 세상과 공명하기, 포용력과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도량을 키우는 일, 백성들과 함께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일 등을 율곡이 경험하였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저자의 이러한 서술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수필과도 같다. 이 부분은 매우 교훈적인데 이 저서가 오늘을 사는 청년들을 향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해할 수 있는 서술방식이다.

 

제4부 ‘율곡을 넘다’에서 저자는 율곡의 경험을 따라가면서 ‘무실: 힘써야 할 일을 안다는 것’, ‘변통: 시중과 시의’, ‘원칙: 기강과 공정사회’, 그리고 ‘여정: 민심과 감성적 공론장’ 등에 대해 설명을 이어간다.

예를 들면 저자는 ‘마땅함’ 즉 시의 적절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곡은 마땅함의 기준을 백성으로 삼습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합니다. (중략) 민생의 안정을 위해서는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법제를 무조건 다 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오늘의 상황이 다르다고 해서 어제의 법을 끊임없이 고치면 그 또한 많은 부작용을 낳을 것입니다. 문제는 법의 공정성과 안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바뀐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율곡이 시의(時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때에 맞음이란 결국 백성들의 현실적 삶에 맞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율곡이 제안하는 국가적 소통의 방식, 곧 경장(更張)입니다. 이 시대의 리더를 꿈꾼다면 명심해야할 덕목일 것입니다.”(219쪽)

 

마지막으로 저자는 ‘마치며: 우리의 율곡’에서 율곡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고(1. 율곡의 시대적 삶, 245-252쪽) 율곡의 철학 사상을 간략히 소개하였다.(2. 지금-여기, 모던 율곡, 253-265쪽)

율곡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저자의 평가와 주장을 빨리 살펴보려면 이 책을 펼치고 이 부분부터 먼저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감히 평 하건데 약 20쪽에 달하는 이 부분의 중요성은 저자가 앞서 서술한 240여 쪽의 내용과 맞먹을 것 같다.

 

저자는 여기에서 율곡의 유학사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매우 중요한 평가이기에 여기에 소개한다.(대화체로 서술된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필자주)

 

“율곡은 제도의 개혁뿐만 아니라 법제와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천적 기여를 했어. 학술적으로도 여러 점이 거론될 수 있는데, 나는 그가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대다수 후대 유학자들은 주희나 퇴계의 논의를 그대로 따랐지만, 율곡은 자신의 관점을 바탕으로 새로운 논리를 구성해냈어. 율곡이 심시기(心是氣 : 마음은 기다)를 말하고, 리기지묘(理氣之妙 : 리와 기의 묘함), 리통기국(理通氣局 : 리는 널리 통하고 기는 국한됨)과 같은 새로운 철학적 용어를 만들어 자기 철학을 전개한 것은 주목할 만하지. 율곡이 조선의 유학자를 넘어서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특별한 것은 ‘자신의 어휘’가 있었기 때문이야.”(2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