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조남국과 이동인의 저술 비교3-저자의 주장

율곡 사상 입문을 위한 6권의 단행본 2

 

#7. 조남국과 이동인의 저술 비교3-저자의 주장

 

조남국의 『율곡의 사회사상』과 이동인의 『율곡의 사회개혁사상』 3 :

저자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1) 조남국의 『율곡의 사회사상』

 

 

여기서는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첫 번째 논문 「율곡 철학 형성의 연원에 관한 연구」을 중심으로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려고 한다. 두 번째 논문 「율곡 사상에 나타난 사회철학 문제연구」는 첫 번째 논문과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소개를 생략한다.

 

저자는 율곡의 사회의식을 분석하면서 먼저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였다.

 

“인간성의 발견과 실리의 추구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율곡에게 있어서 사회의식의 관심사이었음을 앞에서 고찰하여 보았다. 그는 인간의 정의(正義)에 실리의 추구를 어떻게 수렴할 것이냐에 지대한 관심으로 보였던 것으로 이해된다.”(203쪽)

 

저자는 ‘인간성의 발견’을 다른 말로는 ‘사회 정의의 강조’라고 표현하고 ‘실리의 추구’는 ‘경제문제’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사회정의와 경제문제 사이에서 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율곡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이 논문의 제2장 ‘율곡의 사회의식’에서는 율곡의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즉 7남매 중에서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 위로는 두 형과 두 누님 아래로는 누이와 남동생이 있었던 중간자적인 위치를 분석하고 어머니 신사임당이 집안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부친보다 더 컸던 점을 들어 율곡이 원만한 인격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203쪽)

 

율곡의 역사의식에 대해서는 그 배경으로 조선의 건국부터 성종 말년까지 약 100여년간이 창업과 수성의 시기였다면 연산군 시대부터 임진왜란까지 약 100년간은 정치가 문란해지고, 사화로 인해 지도력이 상실되고 국난의 위기에 해당한 시기였다고 하였다. 율곡은 이러한 시기에 태어나 사회가 끝난 후의 후유증을 체험하면서 성장하였다고 진단하였다.(205쪽)

그리고 저자는 율곡이 학문적으로 성리학 외에도 불교와 도교 그리고 양명학 등으로부터 다방면의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율곡 철학의 특징을 정리하였다.

 

“당시의 학풍이 성리학을 위주로 하였다 하더라도 실제 사회적 상황은 불교, 도교, 양명학의 위치가 전혀 무시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배제하고 오로지 성리학 그 자체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당시 사회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포괄적이 아니라는 것을 율곡은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216쪽)

 

그리고 율곡의 성리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화담이나 퇴계에 있어서 성리학 전개의 특징과는 달리 율곡의 성리학 전개는 대립과 모순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 융합하느냐에 있었다고 볼 때 그의 이러한 학적 특징은 이미 앞에서 전개한 그의 사회의식과 역사의식, 그리고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제사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은 그의 철학형성에 외적 요인으로 작용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다.”(216쪽)

 

율곡 철학이 조화와 융합을 중시했던 점을 지적한 것이다. 화담 서경덕이나 퇴계 이황의 사상이 주기론, 혹은 주리론 등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그래서 저자는 율곡 철학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율곡철학의 본질이 집약된 저작으로는 『성학집요』를 지적하여 말할 수 있다. 『성학집요』는 통설, 수신, 정가, 위정, 성현도통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많은 양의 역저이다. 통설에서 율곡은 중화(中和)의 공(功)을 중시하여 정리하고 있으며 이 중화의 의미는 성학집요 전체에 흐르는 중심체이기도 한 것이다.”(217쪽)

 

율곡은 이러한 입장에서 ‘중화’의 개념으로 가정, 국가, 세계 인류에까지 연결하여 설명하며 결국에 중화의 공적이 천하에 이르면 천하가 안정되고 명덕(明德)도 천하에 밝혀질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217쪽)

율곡이 말하는 ‘중화’라는 개념을 주목하여 율곡 사상의 본질을 ‘융합성’으로 보는 저자 조남국의 이러한 설명은 매우 독창적이고도 명쾌하다. 그는 율곡의 이기론도 이렇게 설명한다.

 

“화담은 기(氣) 밖에 리(理)가 없으며, 리가 기보다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하여 유기론(唯氣論)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퇴계는 이기를 이원적 입장에서 전개하였고 다시 이귀기천(理貴氣賤, 리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의 사상을 연출하였다. 이와 같은 화담과 퇴계의 입론과는 달리 율곡은 기의 경험적 실재성과 리의 관념적 합리성을 통일, 조화의 측면에서 이기론을 전개하고 있다.”(218쪽)

 

나아가 저자는 율곡이 리와 기의 성격이 서로 전혀 다른 2원적 관계에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긍정하고 포괄하면서 동시에 양자 모두를 지양(止揚)시키고 있으며, 이기의 묘(妙)라는 개념으로 리의 초월성과 기의 실재성을 포용하여 이 양자를 융화의 관계로 파악하였다고 주장하였다.(219쪽)

 

저자는 결론에서 율곡 철학에 대해서 다시 이렇게 정리하였다.

 

“율곡철학의 특징은 관념적 합리성과 경험적 실재성을 조화의 입장에서 전개하는데 있다. 그는 관념적 합리성으로서의 리와 경험적 실재성으로서의 기를 이원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이 양자를 일원적으로 어떻게 융화시키느냐 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219쪽)

 

그리고 율곡이 이러한 점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율곡의 가정 환경을 들었다. 그는 “당시 사회가 대체로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분위기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것과는 달리 율곡의 경우는 유년기를 학덕이 겸비된 신사임당과 함께 외가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권위적인 가정 분위기가 아닌 민주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원만한 인격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인격은 원만성과 포용성을 겸비하여 닦여질 수 있었고, 동시에 이러한 그의 인격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와 역사를 융자적(融資的)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219-220쪽)라고 하였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부언하기를 자신의 논문이 또 하나의 다른 목적도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이 연구는 율곡) 철학 형성의 특징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이루어진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입론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성장기의 민주적 분위기가 철학사상 형성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것에 초점을 둔 것으로 특히 성장기의 주변 분위기가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데에도 이 연구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220쪽)

 

조남국의 이러한 연구논문이 발표된 해는 1982년이었다. 이 해는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기세등등하던 시기로 민주주의를 함부로 말하기 힘든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 사상이 ‘민주적 분위기’에서 탄생하였음을 밝히고 자라는 아이들의 성장에 있어서도 민주적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결국 군인들의 독재적이고 가부장적 권위주의 통치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이 국가를 통치하는 민주화를 이룩하였다. 이 덕분에 2000년대 들어 각 분야에서, 특히 가요, 영화, 드라마 등 문화 분야에서 민족의 창조성이 극대화되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세계적인 문화 강국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돌이켜보면 민주주의의 힘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유학사상계에는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등 많은 유학자들이 각자의 사상을 갈고 다듬어 깊이 있는 토론이 거듭되었다. 그런데 율곡이 등장하여 이들의 철학을 창조적으로 조화롭게 융합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를 율곡을 둘러싼 ‘민주적 분위기’로 설명한 것은 참으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2) 이동인의 『율곡의 사회개혁사상』

 

여기에서는 저자가 제1부 ‘율곡과 사회개혁’에서 서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하기로 한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율곡은 자신이 살던 시대의 나라 형세를 “집으로 치면 서까래며 들보가 다 썩어 가는 집과 같고, 사람으로 치면 곧 넘어지게 생긴 병자와 같다.”(15쪽)고 인식했다. 그래서 율곡은 자신의 시대가 창업의 시대도 아니고 수성(守成)의 시대도 아닌 경장(更張 : 사회의 폐단을 개혁하여 새롭게 하는 일.)의 시대로 규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율곡의 철학사상인 이기론과 개혁사상을 연결 지어 다음과 같이 율곡이 제시한 개혁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율곡)는 오히려 때와 기회도 인간이 만드는 것이라는 적극적인 역사관을 제시했다. 그는 발(發)하는 것은 기(氣)이며 발하게 하는 것은 리(理)이나, 리는 기에 의착(依著: 의존)하고 그것을 탄다는(乘) 자신의 이기설에 기초하여 리(道)는 무위(無爲)이고 작용이 없고 인간은 감각이 있고 작용이 있으므로, 공자가 말한 대로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그는 때와 기회도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만들어 지는 것으로 보았다.”(20쪽)

 

율곡의 개혁사상은 바로 율곡 철학이 기초하고 있는 것이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간 중심적’ 개혁사상이라는 것이다. 율곡은 이렇게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인간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21쪽)

 

그리고 저자는 율곡의 개혁관을 1)수시 변통의 개혁관,(21-24쪽) 2) 왕도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한 개혁관(24-27쪽)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 ‘수시(隨時) 변통’의 개혁이란 ‘때(時)’, 즉 시대의 상황 맞추어 변통하는 것을 말한다. 율곡은 자신이 개혁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변하면 그 상황에 따를 수밖에 없으며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23쪽)

 

2) 왕도정치의 실현이란 율곡에 의하면, 백성을 가르치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정치를 말한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정치이다. 나라 안에서 관리들(오늘날의 공무원들)의 기상이 바로 서고(25쪽) 선비들(지식인들)의 행동과 풍습이 바르고 재상(오늘날의 고위 공직자, 총리, 혹은 대통령)이 나라를 잘 경영하고 여러 관리들이 성실하게 자신의 직분을 잘 이행하며, 백성들이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왕도정치에 가깝다고, 율곡은 강조하였다.(25쪽) 그리고 이러한 왕도 정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언로(言路 : 오늘날의 언론, 여론의 소통, 의회 정치)의 창달과 활성화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매우 강조했다. (26쪽) 즉 공무원들과 백성들의 의견이 국가 경영을 책임지는 자들에게 잘 전달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율곡은 누가 ‘의견(言)’을 제시하면 그 의견에 대해서 뿌리를 캐지 말고, 그 말에 대해서 벌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재삼 강조했다. 이것은 오늘날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공무원들(특히 경찰, 검찰, 법원 공무원들)이 귀담아들을 일이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제시되어있는 언론의 자유를 400여년 전에, 그것도 왕조시대에 율곡이 주장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율곡의 이러한 주장은 쓰러져가는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물론 조선 사회와는 다르다. 1990대의 민주화 이후에 사회 각 분야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는 더욱 풍요롭고, 더욱 역동적이고, 더욱더 많은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자유로워야 되며, 율곡이 말하였듯이 언로의 창달과 활성화가 무엇보다도 필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 이동인은 이어서 율곡이 제시한 사회 개혁사상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제시하였다.(27-32쪽)

 

1) 내실과 실천

 

율곡은 실질적인 개혁, 내실 있는 개혁을 중시했다. 그래서 화려한 말이나 실천할 수 없는 개혁안은 삼갔다. 율곡이 제시한 『만언봉사』에는 그래서 ‘무실(務實 : 실질적인 것에 힘쓰자)’, 실공(實功 : 실제의 공적, 실질적인 공적) 등을 언급한 문장이 많다.

2) 민중을 위한 개혁

 

왕도정치는 본질적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다. 율곡의 개혁론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명백한 모티브는 바로 이것이다. 율곡은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간소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 임금 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정치를 지양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강조하였다. 예를 들면 백성의 조세 부담을 줄이고, 사병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천민의 권익을 신장하고, 또 백성들의 기쁨과 괴로움을 고르게 해 줄 것을 주장했다.(29쪽)

저자는 이러한 사상을 제시한 율곡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오늘날의 안목으로 보면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율곡의 개혁안은 새로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수없이 부르짖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도 정작 국민을 위한 정치가 실현되는가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이 의심을 품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고, 율곡의 시대는 임금의 권위가 온 국민의 위에 있던 전제군주 시대였다는 것을 참작하면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율곡의 의지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29쪽)

3) 점진적 개혁

 

율곡의 개혁론은 점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율곡은 늘 개혁의 부작용을 염두에 두었으며, 부작용이 크다고 생각되면 아무리 좋은 개혁안이라도 시의에 맞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추진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기도 했다. 향약의 실시에 대해서 반대의견을 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입장은 율곡이 앞 시대에 급진적 개혁을 추진했던 조광조의 실패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이어서 율곡이 제시한 사회개혁 사상의 의의를 논하였다. 저자는 율곡이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전 시대에 활약하였던 정암 조광조와 대비된다고 하였다. 조광조는 고위 관료로 재직한 기간이 4년에 불과하였지만 임금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각종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향약이나 현량과를 실시하여 추천으로 인재를 뽑고, 공신들의 과분한 토지와 노비 몰수 등을 추진하였다.(32쪽)

하지만 율곡의 경우는 임금 선조가 율곡의 제안을 듣기만 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추진할 수 없었다. 율곡이 자주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것은 자신의 말을 임금이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개혁과 관련한 율곡의 공적은 업적으로 남아 있지 않고 글로만 남아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33쪽) 이런 점에서 율곡이 제안한 각종 개혁 방안이나 사상은 후세인들의 과제가 되었다.

 

율곡은 당시 조선사회의 신분제도에 대해서도 다양한 개혁 방안 제시하였는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59-60쪽)

 

1) 율곡은 모든 사람의 생명과 권익을 존중했다. 그는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인정하였다. 그래서 채무송과 같은 후대의 학자는 그의 사상을 ‘만민 평등주의’라 평가하였다.

 

2) 율곡은 기존 신분제의 테두리 안에서라도 신분제의 제약을 최대한 극복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신분제의 제약이란 나라 안의 인적자원을 어느 한 계층으로만 한정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시대는 양반들만, 그것도 과거에 합격한 양반들만 국가 경영에 동원한 체제였다. 율곡은 선비들의 등용과 승진을 과거시험이나 경력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오직 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보고 특채를 하거나 승진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율곡의 이러한 제안은, 이미 신분제가 없어진 오늘날의 상황에 대응해보면, 다음과 같은 제안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삶의 희망을 버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비록 신분제의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금전적 ‘속박’에서 자유스럽지 못하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주목해야 한다. 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야 할 인적자원이 대규모로 소실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득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고,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인 일이다.- 필자주)

 

3) 천민과 서얼에 대한 율곡의 관심은 국가의 인적 자원 활용과도 관련이 있지만, 그의 신분개혁안은 사회 전체로 보면 신분의 상향이동을 지향하고 있다.

 

4) 율곡은 항상 상위 신분층보다는 하위 신분층, 있는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을 위한 정치를 추구했다. 즉 율곡의 정책은 기층민의 생활향상과 신분 격차 축소를 지향하고 있었다.

 

5) 율곡의 신분제도 개혁론은 온건하고 점진적인 성격의 것이었지만, 장기적인 발전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저자는 율곡의 정치사상과 정치개혁론(제3장, 61-103쪽), 경제개혁 사상(제4장 105-128쪽), 교육에 대한 개혁 사상,(제5장 129-157쪽) 그리고 국방을 위한 병제 개혁(제6장 159-184쪽)에 대해서도 각 장을 할애하여 상세하게 분석했다. 여기서는 상세한 소개는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