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병도와 금장태의 저술 비교3 -저자의 주장

율곡 사상 입문을 위한 6권의 단행본 2

#4. 이병도와 금장태의 저술 비교3 -저자의 주장

 

이병도의 『율곡의 생애와 사상』과 금장태의 『율곡 평전』 3: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1) 이병도의 『율곡의 생애와 사상』

『율곡의 생애와 사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율곡의 생애 관련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율곡의 사상 부분이다.

가) 율곡의 생애

이 책은 율곡의 생애를 시대적 배경과 가정적 배경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시대적 배경으로 ‘정치방면’, ‘사회경제면’, ‘사상계 및 학계’, 가정적 배경으로 ‘출생과 가계’, ‘입산과 그 동기’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율곡이 성장한 이후의 생애를 ‘이퇴계를 방문’, ‘출세경력과 생애’, ‘율곡에 대한 『실록』의 평가’ 그리고 ‘율곡의 저술과 문인’으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아울러 11장에 붙여진 연보도 크게 보면 율곡의 생애 소개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시대적 배경에서 저자는 ‘중쇠기적(中衰期的)’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중쇠기’라는 단어는 율곡이 자신이 살던 시대를 표현한 말로 ‘중쇠(中衰)’란 번창하던 나라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는 일을 뜻한다.

저자 이병도는 조선시대 초기 100년간, 특히 세종, 세조, 성종의 치세를 조선의 문예 중흥기라고 할 수 있는 시대로 동양문화의 정화를 재현한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시기를 거치면서 조선사회는 특히 지배계급 사이에서 타성이 싹트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그 결과 연산군 같은 방탕한 군주가 등장하였으며, 조정에서는 기성세력과 신진세력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고, 궁중과 조정 사이에도 충돌이 일어나 마침내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참담한 사화가 발생하였다

이후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정권을 잡아 폐습을 일신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조광조 등 신진 사대부들이 등장하여 사회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기묘사화가 발생하여 실패하였다. 중종이 사망하고 인종, 명종 등이 대를 이었으나 이제는 외척들 사이에서 권세다툼이 노골화하여 다시 많은 지식인들이 화를 입는 을사사화가 발생했다.

그리고 율곡이 고위 관료가 되어 조정에서 활동을 하였던 선조시대가 되었다. 선조시대에 선비 관료들은 동인 서인 양파로 나뉘어 서로 배척하기 시작하였고, 정치는 고식적이고 미봉적이 조치로 일관하고 재정은 수지가 맞지 않아 경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북쪽 변경에서는 여진족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자주 침범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상황에서도 조정은 어떤 확고한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16-18쪽)

율곡은 이러한 상태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시대를 중쇠기(中衰期)라 진단한 것이다.

저자는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농촌이 황폐되고 세금 징수와 관련하여 온갖 부조리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서술하고 1562년(명종 17년)에 황해도 일대에서 발생한 임꺽정의 난을 들어 농촌사회의 빈궁과 인심의 악화를 설명하였다.(20쪽)

이어서 저자는 율곡 사상의 학문적 배경으로 율곡이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의 학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학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그동안 여러 차례의 사화, 그 중에도 기묘사화 이후 사류(士類 : 지식인들, 선비들, 유림)들의 기분이 저상(沮喪 : 기력이 꺾이어 기운을 잃음)하여 그들은 대개 정계를 등지고 산림(山林 : 전원, 향촌)을 유일한 낙원으로 삼아 오로지 지조를 닦는 – 말하자면 ‘정치는 정치’, ‘학문은 학문’이라 하여 양자를 둘로 나누는(별도시하는-저자)- 경향이 학계를 지배하였다.”(21-22쪽)

이러한 학계의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결과적으로 성균관이나 향교 등 공적인 학술 기관은 쇠퇴하고 각 지방의 서원이 흥성하게 되었다.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각 지역에 은거하는 선비들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지방의 유생들은 사설 서원을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선현에 대한 추모와 봉사를 중요시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등장한 당시의 학술 사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공리적인 세속적인 관학에 대하여 수양과 사색을 주로 하는 진지각득(眞知覺得)의 참다운 성현의 학을 하겠다는 사조의 경향이 농후히 드러났음을 웅변으로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학의 대연원이 열리게 된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리하여 이때 유학의 경향은 체험실천과 사색과 이론에 기울어져 고상한 형이상학적 철리(哲理 : 성리학) 연구를 주안으로 하게 되었다. 당시 이 방면의 대가를 들면 기하의 김안국, 김정국 형제, 서경덕, 그 문인인 이지함, 김인후, 기대승 등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대개는 향토를 근거로 문호를 열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만큼 사림 세력의 확대와 그 영향이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23쪽)

율곡의 사상은 이러한 학술적인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저자는 특히 율곡이 조광조와 서경덕 그리고 이황의 사상적 학문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지적하였다. 다만 이기 학설과 관련해서 율곡은 고봉 기대승의 학설에 공감하였다고 하였다.(23쪽)

이어서 저자는 율곡의 생애와 관련하여 출생과 가계(25-27쪽), 입산(출가)과 그 동기(27-29쪽), 이 퇴계 방문(30쪽), 출세 경력과 생애(31-40쪽), 그리고 율곡에 대한 『실록』의 평가(40-42쪽), 율곡의 저술과 문인(42-46쪽)으로 나누어 소개했다. 이 중에서 율곡의 문인 즉 제자들에 대한 소개는 『율곡전서』 부록에 나오는 문인록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는데 수제자로 사계 김장생을 들었다.

 

 

나) 율곡의 사상

저자는 율곡의 사상에 대해서 먼저 사상적 계보를 살펴보고(제4장), 학문적 입장을 고찰하였다.(제5장) 그리고 율곡의 성리철학을 분석한 뒤(제6장), 수양론과 교육론을 살폈다.(제7장) 그 뒤에 율곡이 가지고 있던 불교관을 검토한 뒤에(제8장), 경세철학과 시무책을 분석하였다.(제9장, 10장).

율곡 사상에 대해서 먼저 저자는 ‘정통적 사상계보’(제4장, 48-51쪽)라 칭하여 자료를 제시한 뒤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율곡의 말을 빌어 말하면 「조광조는 도학을 창명(倡名)하고, 이황은 리굴(理窟 : 도학)에 침잠하였다.」하고 또 「이황의 재조(才調)와 기국은 광조(조광조)에게 미치니 못하나 그 의리(진리)를 깊이 연구하는 점에 이르러는 광조가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각각 그 장점과 단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가팅 율곡은 양현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자기 자신에 의해서 절충하고 혹은 보충하였던 것이다. 율곡은 요컨대 공맹·정주의 학을 정통으로, 본국의 정암 및 퇴계의 사상을 자기 일신에 절충하여 다시 집대성한 철인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학설에 있어서는 명의 정암 나흠순과 본국의 선학인 화담 서경덕의 영향도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51쪽)

이어서 저자는 율곡의 유학자에 대한 인식 및 학문적 태도(제5장, 52-57쪽)를 논하고 성리학으로 주제를 옮겼다. 율곡의 성리학(제6장 성리철학)에 대해서는 다시 태극 음양설(59-62쪽), 이기론(63-74쪽), 심성론(74-87쪽)으로 나누어 논했다. 이 중에서 태극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율곡은 결국 정주학에 입각하여 태극을 음양의 근저로 보고 이를 어디까지나 ‘리’로 규정하는 동시에 그것이 항상 음양가운데 내재하여 있는 ‘존재’로 해석하였다. 일음일양(一陰一陽) –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되는 까닭은 – 즉 태극으로서 태극은 그 어느 쪽에고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양은 시(始 : 시작)와 종(終 : 마침)이 없으므로 음양 이전에 태극이 따로 독립해서 있었다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59쪽)

저자는 이러한 율곡의 주장은 사암 박순과 주고받은 논의에서 자세히 엿볼 수 있는데 박순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이며, 서경덕은 또 송나라 장횡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율곡의 태극 사상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율곡이 “태극을 음양 동정 가운데 내재한 ‘리’로 규정하였다는 것은 즉 음과 양, 동(動)과 정(靜)의 공통된 원인의 공통분모가 곧 태극이요, 리라는 것이었다.”(62쪽)고 결론을 지었다.

율곡의 이기론에 대해서는 율곡이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는 새 발견어를 제시하여 이기론을 전개하였음을 밝히고(67쪽), 나아가 율곡의 이기론은 불교 철학과도 관련이 있으며 주기론자인 서경덕의 학설과도 상통되는 점이 많다고 주장하였다.(69쪽) 아울러 그는 율곡의 이기론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율곡 사상의 절충성(종합성)을 지적하였다.

“나로서 솔직히 율곡을 평하라하면 그는 퇴계의 근신(謹愼 :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과 화담(서경덕)의 창견(創見)을 아울러 본받으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율곡이 주리적(主理的)이면서도 퇴계의 ‘이발설(理發說)’을 반대하고, 기의 담일(湛一)을 말하면서도 화담의 일기장존(一氣長存 : 질량과 에네르기 불감不減)설에는 좇지 아니 하였음을 보면 율곡은 주리, 주기 양파의 거두인 퇴계와 화담의 사상을 자기에 의하여 절충·조화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71쪽)

이어서 저자는 율곡의 사상에 대해서 제7장 수양 및 교육론(89-117쪽), 제8장 불교관(118-121쪽), 제9장 경세철학(122-135쪽), 제10장 시무책(136-170쪽) 등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약 3쪽의 맺음말(餘言)을 덧붙였는데, 첫머리에 쓴 저자의 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율곡은 참으로 불행한 시대를 만났었다. 처음에는 너무도 큰 포부를 가지고 현상을 타파하여 도의의 세계, 이성의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였고, 만년에는 패멸과 붕괴의 단계를 밟는 이 나라를 모든 수단을 다하여 구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를 비롯하여 대신 동료들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동인측의 격렬 분자로부터는 맹렬한 비난을 받으면서 도로(徒勞 : 헛된 수고) 10수년에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173쪽)

저자는 이렇게 율곡의 헛된 노력에 대해서 말하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나는 감히 말한다. 저 임진왜란에 당하여 무인으로서 적성(赤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과 신책(神策)을 가지고 눈부신 활약을 하여 마침내 국난을 타개하고 국가사회를 구출한 은인이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하면 임진 이전에 있어 국가가 날로 그릇돼가는 것을 개탄하고 모든 수단을 다해서 상하에 호소, 최후 일각에 이르기까지 국가사회를 구출하려고 혼신 노력한 유일한 철인이 이율곡이었다고 하겠다. 이상하게도 양인(두 분)은 본시 같은 덕수 이씨의 혈통을 받아 한 분은 철인 경세가로서, 또 한 분은 성웅으로서 이 민족의 경종과 횃불이 된 것이다.”(173쪽)

 

 

2) 금장태의 『율곡 평전』

 

 

가) 율곡의 생애

 

저자는 율곡의 생애를 가족적 배경과 성장(1부, 11-42쪽), 청년기의 탐색과 교유(2부, 45-115쪽), 벼슬길에 나와 나라를 근심하며(3부, 119-174쪽)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이 책은 율곡의 생애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저술한 만큼 율곡의 생애사 관련 서술이 매우 상세하다.

예를 들면 저자는 율곡의 부친 이원수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율곡의 부친 이원수에 대해 「율곡연보」에는 ‘성격이 착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너그럽고 겸손하여, 옛 사람의 기풍이 있었다’고 아름답게 서술하였지만, 전해오는 단편적 일화들은 성격이 유약하고 큰 뜻을 품은 것이 없어 선비다운 기상을 지니지 못했던 평범한 인물로 보인다. 율곡 자신이 서술한 말로는 ‘부친은 성품이 호탕하여 세간 살이를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는 한 구절이 보인다. 이 말은 호걸스러운 인물이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가정에는 관심이 없이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는 방탕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13쪽)

 

이어서 저자는 “이원수가 수운판관에 올랐고, 뒤에 사헌부 감찰에 올랐다고 하는데, 과거에 급제한 일이 있는지, 누구의 천거를 받아 벼슬에 나간 것인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13쪽)고 하였다. 철저히 기록을 찾아보고 서술해나간 저자의 정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저자는 율곡의 성품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평가를 하였다.

 

“문인(제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둘째형 이번은 벼슬에 나가지도 못했으며 물정에 어둡고 어리석은 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면 번번이 율곡을 불러서 시켰는데, 율곡은 이미 벼슬이 높았지만 종이를 자르는 일이나 차를 올리는 일 등 형이 시키는 대로 몸소 하여 게을리 함이 없었다 한다. 곁에서 제자들이 보기가 민망하여 스승에게 공손함이 지나치니 자제들이 대신하게 하도록 청했던 일이 있었다. 이때 율곡은 ‘부모나 형이 나에게 분부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다른 자제로 수고로운 일을 대신시키겠는가. 부모나 형의 앞에서는 지나친 공손이 예법이다. 뜻밖에 부여된 벼슬은 천성(天性)이 아니니, 지위가 높고 낮음은 논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세월이 유수와 같은데, 형이 작고한 뒤에는 비록 예를 행하려 해도 행할 수 있겠는가(이유경 「栗谷遺事」)’라고 했다. ”(14-15쪽)

 

이와 같은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는 율곡의 큰 누님 매창의 일, 그리고 작은 누님의 일을 소개하면서 율곡이 형제들과 우애가 각별하게 깊었으며, 그래서 고향을 찾아갈 때마다 어릴 적에 형제들이 함께 지내던 시절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고 하고 율곡의 시문을 소개하기도 하였다.(16-17쪽)

 

아울러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과 외할머니 이야기 그리고 부친 이원수가 신사임당 사망 후에 들였던 처 권씨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권씨는 율곡에게는 서모인데 성질이 아주 고약한 사람이었다.(25쪽) 이러한 가정사를 소개한 뒤에 저자는 이러한 환경이 율곡에게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서모에 대한 이야기는 율곡이 예법을 극진하게 지킨 것이라는 이야기보다는 인간적으로 포용하는 덕이 컸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되며, 율곡이 가정의 화합을 위해 얼마나 참고 견디며 노심초사하였던 지를 넉넉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율곡에게는 평범하기만 한 아버지와 너무나 탁월한 어머니가 대조될 뿐만 아니라, 지극히 현숙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와 극도로 패악한 서모가 극적으로 대조되면서, 마치 뜨거운 불과 차가운 몰로 번갈아 쇠를 단련하듯이 율곡의 인격과 정신을 단련해주는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26쪽)

 

계속해서 저자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고 방황하다 불교에 입문하게 된 과정을 소개하였는데, 율곡이 “18세 때 어느 날 봉은사에 가서 불서를 뒤져 보다가 불교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이론에 깊이 감명을 받았고, 또 불교의 학문이 간결하고도 오묘함을 좋아하여 시험 삼아 한 번 속세를 떠나 불법을 연구해 볼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36쪽)

 

그리고 저자는 율곡의 혼인과 가정생활(37-42쪽), 장인이야기 등을 소개하고 율곡의 지인 허봉(許篈)이 율곡의 집을 방문하여 율곡 가족이 아주 가난하여 끼니로 죽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으며 매우 가련했다고 한다. 이러한 허봉의 기록에 대해서 저자는 조선시대 당시 선비들의 생활을 서술하면서 흔히 쓰는 말투로만 들리고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항복의 기록에 보이는 것처럼 ‘율곡은 해주에 살 때 대장간을 차리고 호미를 만들어 팔아서 생활하였다.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면 대인(大人)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행하였다.(이항복, 『백사집』)’는 언급이 훨씬 더 율곡다운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관습과 통념에 얽매여 허례허식이나 찾아서 신분적 권위를 유지하려는 것은 결코 율곡의 생활태도가 아닐 것이다.”(42쪽)

 

이어서 이 책은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를 닦던 일, 하산하여 다시 유교 경전을 읽기 시작했던 일, 그리고 퇴계를 찾아가 학문의 길을 물었던 일, 과거시험마다 장원을 했던 일, 평생의 벗인 성혼과 송익필, 정철 등을 사귀었던 일을 소개하였다.(제2부)

이 가운데 퇴계사상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퇴계와 율곡의 학문적 관심에 대해서 평가하였다.

 

“퇴계와 율곡이 보여준 학문적 관심의 초점은 퇴계가 ‘수양론’에 두고 있다면 율곡은 ‘경세론’에 두고 있는 것으로 차이를 드러내준다. 뿐만 아니라 성리설에서도 퇴계는 ‘이치(理)’와 ‘기질(氣)’을 분별하여 혼동할 수 없음을 강조하여 ‘이원론’의 경향을 보이는데, 율곡은 ‘이치’와 ‘기질’은 서로 떠날 수 없다는 일치성을 강조하여 ‘일원론’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시대 성리학논쟁의 두 축을 이루었던 것이 사실이다.”(80쪽)

 

저자는 이러한 차이는 퇴계가 선비들이 탄압받던 시대에 살았으며 율곡은 선비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시대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시대 배경이 달랐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상차이가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저자는 퇴계와 율곡의 차이를 보고 어느 쪽이 옳은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두가지 시야로 퇴계와 율곡의 철학을 함께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80쪽)

 

이어서 이 책은 율곡이 벼슬하던 시기의 이야기(3부)를 서술하였는데, 율곡의 개혁정책, 외교활동 이야기, 지방에서 펼친 백성 교화 행정의 이야기, 당쟁을 막기 위한 율곡의 노력 그리고 49세로 사망한 이야기 등을 서술하였다.

 

나) 율곡의 사상

 

율곡의 사상은 이 책의 4부, 5부, 6부, 7부에 서술되어 있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6부 ‘도학의 학문세계’에 담겨 있다. 이 중에서도 제1장의 ‘사칠론과 인심도심론의 성리설’에 서술되어 있는데 이 부분(251-270쪽)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기로 한다.

 

저자는 먼저 심성론의 인간학적 성격을 소개하였는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유학의 심성론을 정의하였다.

 

“심성론이 제기되는 성리학적 문제의식의 전제는 도덕적 주체로서 인간자신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존재는 도덕적 실천을 함으로써 의미 있는 존재라는 이해가 성립한다. 여기서 인간존재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적 근거를 인식하고 도덕적 실천의 가능성과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심성론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251-252쪽)

 

유교에서 심성론이 왜 중요하게 논의되는 지를 저자는 위의 인용문과 같이 설명한다. 결국 저자는 심성론의 문제가 “원초적으로 ‘인격의 도덕적 실현을 위한 실천적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정의한다.

 

저자가 이러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다음 절 즉 제2절 마음의 전개양상과 ‘인심’·‘도심’의 구조에서 율곡의 심성론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저자는 “율곡은 마음을 하나의 통합된 인격적 주체로 이해한다.”(252쪽)고 하였다. 즉 인간의 성품(性)이나 감정(情), 혹은 의식(意)이 무슨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이들 모두는 마음의 양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율곡이 몸과 마음을 엄격하게 이원적으로 분리기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율곡)는 인간의 몸이 기질로 이루어진 것처럼 마음도 기질로 이루어져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하나의 통합된 인간존재를 이루는데, 이 인간존재의 주체를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몸은 신체라는 부분적 의미와 함께 자신으로서 몸과 마음을 합친 전체적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일체성의 중시는 그의 성리설을 관통하는 관점이다.”(253쪽)

 

여기서 저자가 ‘기질’이라고 표현한 것은 성리학에서 ‘기(氣)’를 말한다. 말하자면 율곡은 몸과 마음이 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이 두 개로 엄격히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마음이 몸을 주재하여 마치 임금과 같은 존재이며, 몸은 신하처럼 마음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율곡의 이기론과도 관련이 되어 있는데, 율곡은 리와 기의 관계를 인식함에 있어서도 두 가지가 원래 합치되어 있는 것이라고 본다.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심(心, 마음)과 신(身, 몸)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性), 정(情), 의(意)도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고 본다. 즉 이기 일원론의 입장에 서있다고 한다.(253쪽)

 

율곡은 이러한 입장에서 인심(人心, 인간적인 마음)과 도심(道心, 도덕적인 마음)을 설명할 때도 이 두 마음이 서로 독립된 두 존재 양식이 아니라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지향하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즉 인간의 마음이 도덕적 가치를 위해서 발동할 때는 도심이요, 신체적 욕구를 위하여 발동할 때는 인심이 되는 것이지 이 두 가지가 별도로 존재하는 어떤 서로 다른 마음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들은 마음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그는 이를 인심과 도심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된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율곡의 인심도심설이다.(254쪽)

 

저자는 율곡의 성리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266-267쪽)

 

첫째, 그것은 결코 이기론으로 분해되는 추상적인 관념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인간의 주체성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인간이해의 성리학이었다.

둘째, 그것은 우리의 심성을 하나의 통합된 주체로서 현실의 전체적 존재로 파악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곧 인간존재는 도덕적 가치에 앞서서 존재하는 독립적이고 통합적인 인격의 주체이다.

셋째, 그의 성리학에서는 기질의 차이에 따라 존재의 영역을 구별하는 데 주의하면서 특히 인간의 기질과 성품이 지닌 독특한 위치를 중요시한다. 즉 천지 만물과 인간이 다름을 주목한다.

넷째, 율곡의 심성론은 수양론의 근거와 방법의 탐색으로 연결되고 있다.

 

저자는 율곡의 일원론을, 이와 기를 분리하여 인식한 퇴계의 이기 이원론과 대비하면서 ‘천하를 착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퇴계의 이원론은 ‘자신을 착하게 하는’ 사상으로 보았다. 이러한 퇴계의 이원론은 ‘사회현실의 격류를 벗어나 강언덕에 자리 잡은 것’인 반면에, 율곡의 이기 일원론은 ‘사회와 역사의 역동성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신념의 철학’이라 보았다.(270쪽) 말하자면 율곡은 ‘격류 속으로 뛰어들어 물길을 바로잡음으로써 ‘이치(理)’가 모든 현상과 사물에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