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병도와 금장태의 저술 비교2 – 저작 의도

 

 

율곡 사상 입문을 위한 6권의 단행본 2

 

#3. 이병도와 금장태의 저술 비교2 – 저작 의도

 

이병도의 『율곡의 생애와 사상』과 금장태의 『율곡 평전』 2 :

저자들은 왜 이 책을 썼는가?

 

 

1) 이병도의 『율곡의 생애와 사상』

 

1973년에 쓴 서문에서 저자 이병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찍이 역사학(史學)을 전공하는 한편, 우리나라 유학 발달사에 큰 관심을 가지고 먼저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하여 그 이전과 이후를 연구하여 왔다.”(4쪽)

 

그는 역사학자답게 유학 발달사, 즉 사상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퇴계와 율곡을 주목하였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중에서도 율곡에 관하여는 연래 단편적으로 그의 학설과 정치 철학 내지 시무책에 대하여 누차 발표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를 일괄하여 전체적으로 묶는 공작의 기회를 잃었었다.”(4-5쪽)

 

그리고 1973년 9월 서문당 출판사의 도움을 받아 이미 발표한 단편들을 묶어서 이 책자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가 조선시대 유학사를 주목하게 된 1970년 당시 사람들은 유교 혹은 유학에 대해서 낡은 사상이니 썩은 학문이니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이 보기에 유교 사상의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훌륭한 가치를 인정할 만한 사상이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인격 도야의 정신, 기질 변화의 정신, 혹은 인애의 정신, 그리고 민본주의 등은 만고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하였다.(3쪽)

특히 우리나라는 그동안 수 천 년을 일관하여 유교·유학을 숭상해왔는데, 동양 사상의 가장 중심이 되고 근간이 되는 이 사상을 하루아침에 버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또 유교의 근본 사상은 인애주의이며 도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므로 널리 인류 사회의 평화와 질서와 번영을 꾀하는데 적절한 사상이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며, 그 사상과 학문이 어떻게 변천 발달하여 왔는가, 그 과정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으며, 유학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였다. 그는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한국 유학사를 연구하고 특히 율곡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단행본을 내게 된 이유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그는 율곡 이이에 대해서, 퇴계 이황과 함께 언급되는 동방의 대현(大賢 : 큰 현자)이며, 조선이 낳은 위대한 철인(철학자)이요, 학자요, 정론가이며, 교육가, 문장가, 그리고 능변가(말을 능숙하게 잘하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또 율곡은 ‘탁월한 재분(才分 : 타고난 재능 혹은 천부적인 재질)과 고결한 인격,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포부, 창달한 문장과 도도한 변론, 정연한 체계, 예리한 비판력, 공정한 태도 등등은 우리 한국 유학사상에 드물게 보은 거유였다.’(13쪽)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율곡은 한국과 중국의 유학자들이 제시한 여러 학설을 모두 한 몸에 절충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자기 견해와 논리를 전개하였으며, 초년에는 불교서적을 탐독하고 산에 들어가 참선의 체험 공부를 하다가 다시 유학과 성리학으로 돌아와, 그의 성리철학에는 불교, 특히 화엄철학의 영향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13쪽) 또한 율곡은 형이하학적인 실용과 실사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한 검토와 연구를 거듭하는 등 매우 다채로운 유학자였다고 하였다.

 

저자 이병도는 율곡의 ‘우국의 정열은 대단하였다.’(14쪽)고 지적하고 만약에 율곡이 살았을 당시 그의 제안과 정책을 받아들여 대경장(大更張)을 단행하여 폐해를 시정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 중흥 강국을 이루었다면, 외부의 침략이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였다. 혹시 외침이 있었더라도 충분히 막아내고 말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우리 민족 천추의 한이며, 우리가 율곡 선생을 숭배하고 흠모하는 것은 그의 고결한 인격과 도의 사상과 훌륭한 학식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열렬한 우국 애민의 정신 그것에 있다고 지적하였다.(15쪽)

저자는 이러한 점이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주의를 끄는 중요한 점이며, 이 책에서 율곡의 현실 문제에 관한 발언언론을 많이 소개하고 서술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였다고 하였다.

 

 

 

2) 금장태의 『율곡 평전』

 

저자는 율곡에 대해서 “우리 역사가 파탄의 위기에 놓였을 때 횃불을 들어 위험을 경고해주고 나가야 할 길을 비쳐주었던 선각자의 한사람”이라고 평하고,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율곡은 퇴계와 더불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학(주자학)의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던 학자이다. 그는 성리설의 철학적 논변에서 명석한 이론을 정립하였지만, 결코 관념적 이론에 매몰되었던 인물이 아니다.”(「머리말」)

 

율곡이 퇴계와 함께 조선시대 유학의 양대 산맥 중 한 봉우리를 이루었다는 것은 율곡이 살아있을 때를 기준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율곡이 사망한 뒤의 평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율곡(1536-1584)이 활동하였던 16세기 후반의 유학계는 퇴계 이황(1502-1571)의 권위가 압도적으로 우위였고 율곡은 상대적으로 매우 낮았다. 하지만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의 시대를 거치면서 율곡은 퇴계와 어깨를 겨루는 사상가로 떠올랐고 많은 유명 유학자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율곡의 사상적 특징은 성리학의 관념적 이론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것은 퇴계와 비교해 볼 때 더욱 뚜렷이 부각 된다. 퇴계는 일찍부터 벼슬에 대한 꿈을 버리고 경상도 예안(안동)의 산촌에 머물면서 수양을 하거나 후학을 양성하는데 열성이었다. 한양에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속세의 잡다한 일에 파묻혀 살았던 율곡은 당연히 ‘성리학의 관념적 이론’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저자는 율곡의 철학사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율곡은) 인간 심성에 대한 성리설의 철학적 분석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인물이다. 그의 철학을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근원의 이치와 현실의 당면과제를 연결시켜 해석하는 ‘체용일원(體用一源)’ 내지 ‘본말일체(本末一體)’의 ‘일원론’이요, 그의 용어를 빌리면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철학이다.”(머리말)

 

‘체용일원’이란 ‘체(體)’와 ‘용(用)’이 ‘일원(一源)’ 즉 하나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체’는 사물의 본체(本體)나 본질, 실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용’은 사물의 작용이나 기능, 현상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물의 두 측면, 즉 본체와 작용의 두 부분이 사실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본(本)과 말(末)이 일체(一體), 즉 하나라는 것이 율곡의 철학이라는 말이다. 아울러 리와 기는 하나로 동일한 근원을 가지고 있으나 리는 전체적인 부분에 관여되며 기는 어느 한 국면에 관여되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이는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사상이며 율곡의 독특한 이기론이다.

이러한 율곡 철학은 금장태의 해석에 따르면 “보편적인 이치의 빛으로 시대와 사회의 구체적 현실이 가야할 길을 밝혀야 한다.”(「머리말」)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나라의 병통을 샅샅이 살피고, 치료의 방법을 정성스럽게 제시하며, 나라가 가야할 방향의 이상을 제시하는데’ 헌신적인 열정을 기울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성리학자이면서 경세사상가였다.

 

저자는 율곡을 높이 받들어 올리려는 눈길로 보려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전제하면서 이 책에서 “율곡의 일상생활과 공적 활동 속에서 번민하고 행복해하는 인간적 모습을 더듬어 보고, 꿈꾸는 이상과 현실 속의 좌절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 묻고 싶다.”(「머리말」)고 하였다. 나아가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율곡을 4백여년전 옛 사람으로 만났던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함께 살면서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를 먼저 고민하고 깊이 통찰하는 철인(哲人)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율곡의 사상적 특징으로 이상과 현실의 양쪽 측면을 다 살피면서 시대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통찰하는데 있다고 보고 그러한 점을 이 책에서 서술하였음을 지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