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에 맞는 삶 (8)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 Ⅲ

선비정신

 

이치에 맞는 삶

점과 풍수지리

과학이 이처럼 발달한 21세기에도 점치는 일이 성행한다.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합쳐보면 예전보다 더 늘어나고 있다. 왜 그것이 줄어들지 않을까? 현대인들은 정규·비정규 교육을 통해서 과학적·합리적 삶의 중요성을 익히 배워서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에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게다가 종교 또한 그것을 부추기는 경향이 없지 않다. 다시 말하면 대중이 종교를 믿는 방식이 기복신앙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점치는 일이 지금까지도 왕성한 까닭은 인간의 삶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 불안은 과거 농경사회보다 지금이 더 한 것 같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생각할 시간과 여유가 없이 다짜고짜 점이나 종교에 의지하려고 한다. 또 한편 자신의 삶을 합리적으로 꾸려나가는 능력 부족도 작용한다. ‘합리(合理)’란 이성에 부합하는, 달리 말하면 이치에 맞는 것인데, 그렇게 살려면 상당한 지식과 거기에 경험을 보태서 지혜가 있어야만 본인의 삶과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입시와 각종 시험에 찌든 한국인들에게 그것을 기대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미신과 관련해서 풍수지리를 빼놓을 수 없다. 서양 문화가 우리 사회를 주도하면서 풍수지리를 미신으로 여기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그에 대한 합리적 성격을 규명하면서, ‘알면 과학 모르면 미신’이라는 유행어가 번지기도 했다.

이처럼 풍수지리에는 합리적 요소와 비합리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 가령 집터를 비롯한 궁궐터 등은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자연재해를 예방하고, 더 나아가 다른 지역과의 교류와 영향 관계를 고려한다면, 인문지리학과 같은 성격이 드러난다. 하지만 묘지 선택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영향이 자손에게 미친다는 생각은 어떤 심리적 역할 외에는 전혀 근거 없어 보인다. 가령 서양인들은 공동묘지에 묘를 써도 제각기 운명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터에서 잘 되고 못 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은 그것이 근거 없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홍대용(洪大容)은 묘지와 자손의 연관관계가 근거 없음을 논파했다.

그렇다면 대동야승에 나타난 조선 전기 선비들은 어땠을까? 이런 점과 풍수지리와 선비정신은 어떤 관계 속에서 규명하여야 할까? 선비정신의 핵심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유학의 합리성

선비들이 점이나 풍수지리 따위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그 사례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다수 선비의 의식을 지배하는 유학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곧 점이나 풍수지리에서 추구하는 심리적 소망 또는 의지하는 내용을 유학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라인에서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개 공자와 주역 사상에 드러난다.

먼저 공자의 사상을 보면 앞선 글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귀신을 멀리하고 공경하라는 말이나 삶도 아직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말이나,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는 논어의 말에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곧 사후의 문제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이나 미신 따위와 일정한 거리두기를 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점치는 문제와 이것을 연결하면, 점치는 행위 그 자체는 미래 예측과 관계되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다. 다만 점을 칠 때 그 방법에서 무엇을 매개로 하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인과적 연관성에서 전혀 근거가 없거나 초자연적 무엇에 의지한다면, 그것이 공자가 생각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한편 과학적 사고가 팽배한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약간의 이해할 수 없는 공자의 태도도 있다. 가령 “빠른 번개와 맹렬할 바람에는 반드시 낯빛을 고치고 의관을 정제하였다(「향당」).”라는 행동에서, 현대인은 그것은 자연현상일 뿐인데 공자의 태도는 이상한 행동이라 여길 것 같다. 공자의 이런 태도는 후대에 영향을 미쳐 자연적 이변에 대해 신하들은 물론 임금이 먼저 삼가고 행동을 조심했다. 이런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 과연 어떤 합리성이 들어 있을까?

또 하나 선비들의 합리성은 점치는 문제에서도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점치는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미래 예측이기 때문이다. 선비 중에는 점을 친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주역의 영향이다.

주역은 원래 점치는 책이다. 하지만 북송의 정이(程頤)가 언어를 통해 주역의 의미를 밝히고 도덕적 당위를 도출한 이래로, 주역을 공부함으로써 점을 치지 않아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혜를 키워왔다. 그래서 ‘주역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라는 말도 생겨났다. 사물의 인과관계를 잘 따져 보면, 미래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이성이나 직관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이라기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혜를 알려주는 책으로 기능하였다. 주역이 현대에도 유용한 까닭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이는 모두 주역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삶과 합리성

유학이 기본적으로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모든 선비의 삶이 철저하게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합리성의 근거가 되는 객관적 지식을 획득할 과학적 방법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앎이 어디서 기원하고 성립하고 근거가 있는지 어떻게 발전하는지 앎의 문제 그 자체만을 철학적으로 반성하고 따지는 문제는 조선 후기에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엄밀히 구분하는 일은 근대 이후에나 가능했던 일이고, 대동야승에 등장하는 선비들의 삶 속에는 그것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합리적인 모습을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우선 선비들 가운데 점쟁이에게 점을 친 사람도 있다. 조선 전기 문신인 홍언필(洪彦弼)의 사례가 그것이다.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보인다.

홍언필이 갑자년(1504) 봄 시험을 볼 때 점쟁이에게 묻기를,

“올해 내가 장원이 되겠는가?”

라고 하니, 점쟁이가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는 장원을 어찌 감히 바라겠소. 병인년에나 급제하겠소.”

라고 하였다. 그는 경서를 암송하는 시험에서 점수 20점을 얻고, 아직 남은 경서가 있었다. 급히 점쟁이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이미 시험에 합격했으니, 네 말이 망령된 것이다.”

라고 하자, 점쟁이가 한참 동안 있다가,

“급제를 못 할 뿐만 아니라 큰 액운이 당장 올 것이니 조심하시오.”

라고 하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정의 관리가 그를 죄인의 제자라고 하여 하옥시켰다가 귀양 보냈는데, 중종이 반정하자 바로 전시(殿試 : 궐내에서 보는 과거)를 보게 하였으니, 점을 잘 쳤다고 하겠다.

이 이야기는 선비가 점을 친 사례이다. 점쟁이가 무엇으로 점쳤는지 이 글에서는 알 수 없어서 점의 성격을 모르겠다. 견한잡록(遣閑雜錄)의 편찬자인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은 자신의 점에 대한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에 유생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 한 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李淳風 : 당나라의 천문학자)과 소강절(邵康節 : 북송의 數理 철학자)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쟁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어떤 해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어느 해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여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않은가?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일이 못 된다.”

이렇게 점을 신뢰하지 않은 선비도 있었고, 또 풍수지리를 반대는 선비도 있었다.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는 “풍수설에 종사하는 사람이 임금에게 건의하기를, ‘궁성 북쪽 길에 담을 쌓고 문을 만들어 사람들의 내왕을 제한하고, 또 성안에다가 흙을 메워 산을 만들며 명당(明堂)의 물에다 오물을 던지지 말게 하소서.’라고 하니,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그 불가함을 힘을 다해 말하니, 세종이 보고 감탄하여 드디어 풍수의 설을 물리쳤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 앞의 견한잡록에서는 “풍수지리설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어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 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어효첨은 부모를 집 정원 옆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魚世謙)도 그 부모를 장사 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 진실로 탄복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풍수지리에 얽매이지 않은 선비의 사례이다.

또 유생들은 무속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동각잡기에 보이는 사례이다.

세종이 일찍이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나인들이 무당의 말에 현혹되어 성균관 앞에서 기도하므로 유생들이 무녀(巫女)들을 몰아내었다. 임금을 모시던 환관이 매우 노하여 그 자초지종을 아뢰자, 세종이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찍이 선비를 양성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지금 선비들의 기개가 이러한 것을 보니 내가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보니, 내 병이 나은 듯하다.”

결말은 선비들의 합리적 태도도 바람직하지만, 세종의 태도 또한 그다운 일이다. 사실 민간의 무속은 큰 폐단이 없다면 나라에서 금하지 않았고, 기우제 또한 나라에나 관리들이 지냈다. 어찌 보면 미신이지만, 순자에서는 그것을 꾸밈[文] 곧 문화로 인식했다. 문화로 보면 길하지만 어떤 신비로운 무엇으로 보면 흉하다고 했는데, 대단히 합리적인 사고이다. 조선의 기우제나 구식례(救食禮 : 일식, 월식 때 재난을 피하려는 의식)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참에 자연 재앙을 대하는 선비들의 입장도 한번 살펴보자. 홍수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은 물론이고 평소와 다른 어떤 이변이 있으면, 특히 젊은 신진 선비들은 하나같이 왕이나 대신들의 허물 때문이라고 공격했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왕권을 제한하거나 군권의 독재를 방지하는 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재변은 그 제도를 떠나서 왕과 대신의 실정을 직접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한 대 동중서(董仲舒)가 기초한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근거가 있지만, 지면상 생략하겠다.

아무튼 왕은 그 점을 미리 알아 스스로 삼가고 근신하며 죄인을 풀어 주기도 하고 신하의 바른말을 널리 구하기도 했다. 그것이 미신이라는 점을 속으로 알았어도, 그 또한 문화이므로 무시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이이의 석담일기에 “대신이 겨울에 우레가 친다고 사직하니, 대비께서 하교하기를, ‘대신이 무슨 죄가 있겠소. 과실은 임금에게 있소. 만약 어진 선비로서 길이 막혀 등용되지 않은 사람이 있거나 무고하게 죄를 입은 사람이 있거든 모두 풀어 주고 등용하도록 하오.’ 하였다.”라고 전한다. 또 “재앙을 만나 널리 바른말을 구하는 일은 장차 곧고 절실한 간언(諫言)을 들어서 급한 병을 고치려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재앙의 인과적 이해보다 인사의 해결에 초점을 맞춘 것을 보면, 그것의 문화적이고도 기능적 측면에 무게를 둔 발언이다.

또 선비들은 종교적 미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 보이는 사례이다.

어떤 한 사람이 노비·토지·집을 절에 시주하고 자손의 복을 빌었다. 그런데 자손이 빈궁하여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었다. 절과 소송을 일으켰으나 여러 번 패소하였다. 성종 때에 임금의 행차에 그가 나타나 꽹과리를 치며 직접 호소하였다. 임금이 친필로 판결문을 써 주기를,

“부처에게 재물을 바친 것은 복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부처가 영험이 없어서 자손이 빈천하니, 재물은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복은 부처에게 돌려주라.”

라고 하였으니, 위대하다. 임금의 말씀이여! 한마디 말로 소송을 결말짓게 하는 것은 송사를 없게 하는 뜻을 겸한 것이다.

성종의 합리적 판결도 대단하지만, 종교가 합리성을 떠나 기복적 미신과 결탁하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없는 일은 아니다. 조선 시대 합리적으로 산 사람들은 일부 선비에 해당하지만, 그 정신이 오늘날까지 계승된다면 사람들의 삶이 훨씬 개선될 것이다.

주체적으로 살아갈 능력 구비

우리는 합리성을 존중하라는 교육을 받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합리성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 문제가 복잡하기도 하고, 무엇이 합리적인지 판단도 미숙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곤란한 문제를 당했을 때 종교나 점 또는 무속의 힘을 빌려 쉽게 해결하려고 한다. 요행히 해결되는 일도 있지만, 해결되지 않고 장기적으로 거기에 더 빠져들어 낭패 본 사람도 적지 않다.

자기 삶을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능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합리적 지식과 그것을 적용해 본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이다. 인생 공부를 제대로 해야 지혜를 갖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