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도 도를 즐김 (7)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 Ⅲ

선비정신

 

가난해도 도를 즐김

가난과 도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겪어 본 사람만이 뼈저리게 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은 달리 말하면 가난 탈출 운동이었다. 그 결과가 농민의 도시 집중에 따른 산업노동자의 양산과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고령화, 빈부의 양극화, 각종 개발로 황폐화가 된 국토이다. 물론 그 운동의 성과가 없지는 않아 비록 그 열매가 일부 계층에 쏠렸어도, 다수의 국민은 배고프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국가 복지정책으로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다수 국민이 여전히 가난하다고 느끼는 점은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 때문이다. 사회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반증이다. 이제 뼈저린 가난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후원을 호소하는 국제구호단체가 보여주는 후진국의 동영상을 통한,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일이 되었다.

도란 무엇일까? 예전에 길거리에 가다 보면 ‘도를 아십니까?’라고 말하면서, 어느 종교 단체 소속 전도자가 접근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들이 말한 도란 그 종교의 가르침이겠지만, 원래는 길이었다. 그 의미가 추상화가 되어 진리, 원리, 가르침 따위로 변했다. 가르침을 강조하면 자연히 종교로 연결된다.

도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원래의 의미대로 보면 자연의 길과 인간의 길이 그것이다. 자연의 길을 합리적으로 탐구하면 자연과학이 되고, 인간의 길을 제대로 탐구하면 인문학이 된다. 사실 옛날부터 그것을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로 나누어 불렀다. 하지만 고대에는 자연과학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고 그마저도 미신과 억측이 끼어들 소지가 많았다. 인문학 또한 그랬다. 하지만 논어에서 공자의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고”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랴?”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라는 태도로 말미암아, 그를 따르는 선비들은 자연히 합리적인 사고와 태도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선비들이 추구한 도란 대체로 인도로서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윤리적 성격이 강하였다. 그 도를 표현하는 형식이 예법이고 구체적 덕목으로는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오륜(五倫) 등이 있다.

이때의 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도가 전근대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그 질서 속에서 지배자의 권리와 피지배자의 의무를 규정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오늘날에도 그 사회의 질서와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념이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떤 학문 방법이든 모든 사례를 포괄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선비들이 추구하는 도가 몽땅 그런 역할만 했는지는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이기는 하다.

안빈낙도

흔히 올곧은 선비라고 하면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가난이 미덕인 것처럼 말한다. 세상에 가난 그 자체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부유하게 되는 일을 굳이 싫어하지 않지만, 구차스럽게 억지로 가난을 모면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보인다.

“부자이고 귀한 신분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누리지 않고, 가난과 천한 신분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내게 부당하게 돌아온 것이라도 그것을 떠나지 않는다(「이인」).”

부당하게 돌아온 가난일지라도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구차하거나 부당한 방법을 쓰지 않겠다는 말이다. 사실 부귀 그 자체는 싫어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것을 획득하는 일이 정당 하냐 못하냐에 달려있고, 그것은 곧 나라의 정의와 관련된 문제였다. 그래서 또 말하기를, “나라에 정의가 살아있을 때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라에 정의가 없을 때는 부자이며 귀하게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태백」).”라고 하여, 이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그(공자)는 결론적으로

“거친 밥과 물 마시며 팔베개를 베고 자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정의롭지 못한 부자나 귀한 신분은 내게는 뜬구름과 같다(「술이」).”

라고 함으로써, 덕을 지닌 군자가 부유하고 신분이 귀하게 되는 일이 무척 어렵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즐긴다.’라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그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가난을 즐긴다는 ‘낙빈(樂貧)’이 아니라 그것을 편안히 여긴다는 점에 주의하자. 즐기는 대상은 가난이 아니라 도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덕 있는 사람이 잘살게 내버려 둘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부귀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인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과 종교와 사상이 이러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나름의 원인을 밝혀 왔는데, 대체로 그 공통적인 원인을 육신과 연결된 탐욕으로 본다. 부귀란 그것의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되고 만다.

가난해도 도를 즐긴 선비들

부귀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이어서 얻기도 어렵지만, 비록 얻었다 해도 그 또한 독이 든 사과일 수도 있다. 조선의 정치사에서 볼 때 무리한 방법으로 부귀하게 되었다가 정치적 실각과 함께 말로가 비참한 사람은 너무 많다. 때로는 그것을 누릴만한 그릇이 작아서 정변과 무관하게 낭패를 볼 때도 있다.

공부한 선비들은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볼 때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비록 가난하고 신분이 낮더라도 자기의 분수를 지키며 자기 현실에 만족하는 안분자족(安分自足)의 삶이야말로 현실적 대안이었을 것이다. 이는 굳이 유가(儒家)만이 아니라 도가(道家)나 불교를 따르는 학인들도 그래 왔다. 이는 아마도 부조리한 인간 사회에서 인간답게 사는 방식의 보편성에서 나온 일일 것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사는 일이 결단코 쉽지 않기에 선택한 삶이다. 오늘날이라고 본질상 달라진 것은 없다.

이렇게 분수에 맞게 소박하게 사는 모습을 그린 일은 성리학이 조선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보인다. 고려 때의 이규보(李奎報)의 시 가운데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인간사 요란한 비방을 피하려고(爲避人間謗議騰)

문 닫고 숨어 사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杜門高臥髮鬅鬙)

처음엔 방탕한 사내가 여인을 그리워하는 것 같더니(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하안거(夏安居) 참여하는 스님을 닮아가네(漸作寥寥結夏僧)

옷을 당기는 아기의 재롱은 그나마 즐길 만 하고(兒戲牽衣聊足樂)

찾아온 손님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客來敲戶不須譍)

빈궁과 영달과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이 주는 것이니(窮通榮辱皆天賦)

어찌 메추라기가 봉황을 부러워하리(斥鷃何曾羨大鵬)

이 시에는 비유가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장자에 등장하는 용어가 돋보인다. 부귀영달을 버리고 자족한 삶을 드러내었다. 흔히 정치에서 밀려난 후 그리는 정경이기는 한데, 분수에 편안함은 보이나 그가 도를 즐겼는지 어땠는지 그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글의 편찬자는 당시 그에게 대단한 비방이 있었다고 상상했다.

안빈낙도의 실천은 아무래도 유학의 가르침에 철저했던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작자 미상의 기축록(己丑錄)을 보면 조선 중기 학자 최영경(崔永慶)의 사례가 나온다. 그는 여러 벼슬을 내리었는데도 부임하지 않았고, 집안에 양식이 자주 떨어져 누가 생계를 도모할 방책을 일러주었으나, 물리치면서 하늘 말이 “가난과 부자는 미리 정해 있는 것이니, 가난한 것은 나의 분수이다.”라는 것이었으니, 가난이 그 뜻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당시 학자 민순(閔純)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배고픔과 추위가 뼈에 스며들어도 오히려 태연하고, 가슴속 마음이 시원하고 상쾌하여 항상 즐거워하니, 이는 안빈낙도하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언제나 존경하는 벗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운암잡록(雲巖雜錄)에는 “높은 관리가 문밖에 와서 만나기를 원하더라도 그가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면 즉각 거절하고 만나지 않았다. 이것으로 남에게 원망을 많이 샀다.”라고 한다. 그런 태도 때문인지 그는 기축옥사 때 무고로 옥사하였다.

또 벼슬하지 않고 도를 즐기며 자족한 선비에는 처사 성운(成運)이 있다. 이이의 석담일기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성운은 초야에 고요히 살며 시끄러운 세상을 사절한 지 40여 년이었다. 집에서 두어 마장(한 마장은 5~10리) 떨어진 곳에 경치가 좋은 곳이 있어서 거기에 작은 집을 짓고, 한가한 날이면 소를 타고 가서 쓸쓸히 홀로 앉아 가끔 거문고로 두어 곡 연주하며 유유자적할 뿐이었다. 누가 거문고 연주를 듣고자 하면 오히려 타지 않았다. 선(善)을 즐기며 학문을 좋아하였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살림살이에는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았으며 간혹 끼니를 굶는 일이 있어도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성운은 가난 속에서도 학문을 즐기며 음악과 함께 자적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조선 전기에 가난했어도 학문을 즐기며 산 사람은 화담 서경덕(徐敬德)이었다. 그에 대한 일화는 무척 많고 여러 문헌에 보인다. 먼저 이이의 석담일기에서는 “서경덕은 개성 사람이며 천품과 자질이 총명하고 빼어나게 특출하였다. 젊어서 과거의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곧 그 뜻을 버리고 화담(花潭)에 집을 짓고 살았다. 오로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면서 때로는 여러 날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언제나 마음 가득히 희열을 느끼며 세상의 득실·시비·영욕이 모두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전혀 생업을 일삼지 않아 양식이 자주 떨어졌으나 굶주림을 참았다. 남들은 이것을 견딜 수 없었으나 그는 태연히 지나곤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허봉(許篈 : 1551~1588)이 지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따르면 서경덕은 “집이 가난하여 혹 며칠 동안 밥을 짓지 못하여서, 안자(顔子)의 가난에 머문 정도는 아니나 항상 태연하였다. 평생 남과 다른 특이한 행동은 없고 시골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여도 일찍이 그 다른 점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하고, 또 “얼굴이 환하게 밝고 눈이 샛별 같았으며 경지가 좋은 곳을 만나면 일어나 춤을 추었다.”라고 하였다. 등장하는 안자는 공자의 제자로 가난해도 도를 즐긴 삶을 살았으므로 공자가 매우 칭찬한 안회(顏回)이다.

그리고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의 저자인 차천로(車天輅 : 1556~1615)는 서경덕의 제자 차식(車軾)의 아들인데, 기록 자체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곧 “화담이 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학문에 유학이 가장 어렵고, 불교가 다음이고, 선도(仙道 : 도교)가 가장 아래다.’라고 하였다. 또 황해도 감사로서 화담 선생과 서로 아는 자가 있어 선생을 초청하여 음악 연주를 듣고 즐겼는데 선생이 취한 뒤에 일어나 춤을 추니, 사람이 모두 신선인가 여겼다. 하루를 머무르고 곧 돌아왔는데, 감사가 많은 노자와 종이·붓을 드렸으나, 선생은 모두 받지 않고 단지 쌀 다섯 되만 받을 뿐이었다.”라고 전한다.

그러니까 서경덕은 가난했어도 거기에 개의치 않고 배우기 좋아하고 유학의 도를 좋아하여 즐겼다는 뜻이다. 가난이 그의 학문하는 즐거움을 빼앗지 못했던 사례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런 질문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빈낙도의 삶을 위해서는 벼슬하지 않고 살아야 하느냐고 말이다. 꼭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한 답은 이이의 석담일기에 보인다. 곧 “천하의 일에서 바른 것이 이기는 경우는 항상 적고 바르지 못한 것이 이기는 때는 항상 많다. 이러므로 군자가 비록 많아도 한 소인이 군자들을 헐뜯는 말이 임금의 귀에 몰래 들어가면 잘 다스려지는 나라를 혼란스럽게 바꾸어놓을 수가 있다. 하물며 소인은 많고 군자가 적으면 어떻겠는가?”라고 하여 군주제의 한계를 잘 말하고 있다.

비록 그래도 벼슬길에 나아가 재상까지 지낸 인물도 있다. 성현(成俔 :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인다.

정갑손(鄭甲孫)은 용모가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으나, 청빈하여 집에는 모아둔 재물이 없어 베 이불을 덮고 베 요를 깔고 거처하면서도 오히려 편안하고 즐겁기만 하였다. 늘 비분강개로 곧은 말을 하여 권력 있고 세력 있는 자를 피하지 않으니, 그에게 감화되어 탐욕스러운 사람도 결백하여지고, 나약한 사람은 뜻을 세우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도 믿고 중히 여겼다.

정갑손이 도를 얼마나 즐겼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적어도 가난을 즐겼고 바른 도리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벼슬을 하든 안 하든, 가난하든 안 하든 각자의 의지와 행위에 달린 문제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올바른 사람이 부자가 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임은 틀림없다.

당신은 무엇을 즐기는가?

가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즐기는 무엇이 당신에게 있는가? 학문이나 예술에 종사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참 많다. 그들은 그것이 부자로 사는 방도가 못 됨을 알면서도 굳이 좋아서 선택했다. 훗날 가난이 괴로워 선택을 후회하며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늘날은 선비들처럼 유학의 도를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적어도 자기 평생에 걸쳐서 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들은 꽤 있다.

하지만 그 즐기는 일이 합리적인 근거와 예술적인 아름다움에 바탕을 둔다면 좋겠다. 허황하고 근거 없는 일에 빠져 즐겼다간, 나중에 인생도 망치고 후회할 일만 남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