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넓은 도량 (5)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 Ⅲ

선비정신

 

선비들의 넓은 도량

정치보복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를 되돌아볼 때 독재정권일수록 정치보복이 심했다. 지금도 인터넷 방송에서 오래전 인기를 누렸던 정치 드라마를 방영하는데, 일하다 쉴 때 필자의 소싯적에 있었던 일도 생각나서 가끔 본다. 독재정치의 특성이 그렇기는 하지만, 독재자가 정권을 잡았을 때 선거에서 진 상대 후보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은 물론, 정당이 다르다면 이전 정권의 관계자를 괴롭히거나, 또 해당 정권을 비판하는 정치인이나 언론인 학자가 있다면, 반드시 정치공작을 통해 죽이거나 사회적으로 망신을 주어 매장하였다.

물론 누구든 범죄를 저질렀거나 잘못이 크다면 정식 절차를 거쳐 벌을 받아야 한다.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재자는 법 위에 군림하면서 상대의 약점을 잡아 처벌하는 일은 비열할 뿐만 아니라, 없는 죄도 만들어 처벌하니 공정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고, 그 도량이 밴댕이 속보다도 작다고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로 수많은 인재가 희생당했고, 그 희생은 거기서만 끝난 게 아니라 후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게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군자와 소인의 도량

이러니 조선 시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도량이 좁은 왕이 다스리고 간신들이 득세할 때는 선비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과 다를 바 없었다. 좋은 정치를 하려다가 간신의 모함을 받아 죽은 선비들, 국난을 당해 공을 세워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오히려 임금의 의심을 받아 목숨을 잃거나 멀리 쫓겨나거나 숨어 사는 선비들이 한둘이 아니다. 가령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처지와 의병장들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보면, 큰 인물이 될 만한 선비나 장수는 임금 노릇을 하는 데 위험 요소가 될까 봐 제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모두 임금과 좌우 신하들의 도량이 넓지 못한 소인배였기 때문이다. 민담으로 전해오는 ‘아기 장수’ 설화 등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 일은 큰 인물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능력과 도량이 좁은 데서 나온다. 이렇게 도량이 넓은 사람과 좁은 사람을 흔히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가령 논어에 보면 “군자는 두루 하면서 파당을 짓지 않지만, 소인은 파당을 지으며 두루 하지 않는다(「위정」).”라고 하여, 군자가 두루 한다는 것은 관용과 도량을 의미한다. 그래서 파당을 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의 이익에 밝다(「이인」).”라는 말의 뜻도 소인은 사적인 이익에 민감하니, 어찌 너그럽고 도량이 클 수 있겠는가? 또 “군자는 태연하고 마음이 너그러우며 넓다(「술이」).”라는 말도 군자의 도량과 관용적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은 이루어주지만 남의 나쁜 점을 이루어주지 않는데,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안연」).”라고 하고, 또 잘못이 있을 때 “군자는 자기 탓을 하지만 소인은 남 탓을 한다(「위령공」).”라고 하여, 군자의 풍모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밖에도 군자와 소인의 도량이 어떤지 보여주는 공자의 말은 무척 많다. 모두 선비들이 따르고자 했던 가르침이다.

도량이 넓었던 선비들

선비라고 해서 모두 도량이 넓지는 않았다. 소인도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도 제자에게 “너는 군자의 선비가 되어야지 소인의 선비가 되지 말라(「옹야」).”라고 했는데, 선비 사회에도 군자와 소인이 섞여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군자가 되는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필자가 선비정신으로 꼽는 10가지 덕목도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서 다루는 넓은 도량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그것은 관용이나 포용 또는 넓은 아량을 포함한다. 대체로 해당 인물이 너그럽고 도량이 크다고 말한다.

흔히 조선 시대 도량이 넓은 선비로 손꼽히는 인물에는 황희(黃喜) 정승이 있는데, 대동야승에 소개하는 그의 일화는 무척 많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알고 있어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먼저 황희 정승 못지않게 넓은 도량의 자주 등장하는 인물에는 조선 전기 재상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이 있다. 이이의 석담일기에 따르면 그는 옛 제도를 그대로 지키려 하였고, 조광조는 삼대(三代)의 옛 정치를 복귀시키려 하여, 두 사람이 각자 자기주장을 고집하여 서로 반대되는 처지에 있었지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정광필이 사력을 다하여 조광조를 구원하니, 사람들이 그의 덕량(德量)을 추앙했다고 전한다. 그의 도량이 얼마나 넓었는지 이기(李墍 : ?~?)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정광필이 기묘 연간에 영의정으로 있었다. 중종이 재변(災變 : 재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변고)으로 인해, 사정전(思政殿)에서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물으니, 좌우에서 차례로 재변을 그치게 할 방법을 말했었다. 한충(韓忠)이 말하기를

“성상(임금)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잘 나라가 다스려지기를 찾으시나, 비루한 사람이 감히 영의정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재변이 일어남은 반드시 원인이 있고, 잘 다스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거기서 물러 나오자, 우의정 신용개(申用漑)는 정색하며 큰 소리로,

“풋내기 선비 따위가 눈앞에서 정승을 배척하니, 이 버릇은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으나, 정광필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손을 저어 말리면서

“그는 우리가 화내지 않을 줄 알고 이 말을 한 것이요,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에 꺼리는 것이 있었다면 비록 시켜도 반드시 하지 않았을 것이오. 나에게는 진실로 해로울 게 없으니, 젊은 사람이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氣風)을 꺾으면 안 되오.”

라고 하였다. 신용개도 그 말에 탄복하였고, 듣는 사람들도 대신의 도량이 있다 하였다.

정광필은 도량도 넓었고 선비다운 배포도 있었다. 정홍명(鄭弘溟 : 1582~1650)의 『기옹만필(畸翁漫筆)』에 보면, 그가 유배지에 있을 때 서울에 있던 하인이 좋은 소식이 있다면서 몇 가지 서신(書信, 편지)을 가져왔는데, “우선 그대로 두어라. 밝은 날에 뜯어보겠다.”라고 하고, 예전처럼 코를 골며 잠이 드니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고 전한다.

정광필처럼 젊은 사람에게 관대한 정승이 또 있다. 재상 황효헌(黃孝獻)의 일화가 권응인(權應仁 : ?~?)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 전한다.

황효헌은 나이 40이 되지 않아 이조 참판을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포의(布衣)를 입은 모습은 마치 서생 같아서 보는 사람이 모두 그가 누군 줄 몰랐다. 저녁에 신륵사(神勒寺)에 투숙하였는데, 유생 서넛이 둘러앉아 그를 멸시하여, 공이 말석에 자리 잡았다. 한 유생이 먼저 말하기를,

“내가 얼마 전 금강산을 유람했는데 정말 명산이었소. 한 스님이 황모씨(黃某氏)의 시를 소매에서 꺼내 보였는데 정말 가작(佳作 : 대회에서 당선 작품에 버금가는 작품. 좋긴 하나 아주 좋은 것이 아님을 비유)이었소.”

라고 하였다. 효헌이 말하기를,

“나도 한번 가보았는데 과연 그대 말과 같았소.”

라고 하니, 유생이 말하기를,

“나이 젊은 서생이 어찌 그리 일찍 금강산을 구경하였을까?”

라고 하였다. 효헌이 말하기를,

“일찍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받았을 때 우연히 한번 가보았소.”

라고 하니, 유생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허둥지둥 달아났다. 효헌이 그들을 불러 말하기를,

“공들이 마음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며 참으로 솔직하니 친구가 될 만하다.”

하고, 작은 술상을 차려 마음껏 즐기고 헤어졌다. 이후로 서로 내왕하며 매우 깊은 우정으로 사귀었다.

이렇게 사람의 도량이 넓게 되는 일은 해당하는 인물의 인품에 따른 것이겠지만, 모두 그것을 숭상하는 문화 속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이 클 것이다. 도량이 큰 관용의 정신은 수양의 결과로 사람만이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그 예화가 이제신(李濟臣 : 1536~1583)의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 보인다.

좌상 안현(安玹)은 충실하고 청렴하며 조심하고 검소한 당대의 명신이었다. 사사로이 주는 것을 받지도 않고 청탁을 통하지도 않았으며, 베옷과 나쁜 음식으로 일생을 지냈다. 하루는 손님이 찾아와 자리에 있었는데, 식사는 오직 누른 콩잎에 거친 장으로 끓인 국뿐이었으나, 그는 맛도 안 보고 거기에 밥을 말았다. 손님이 말하기를,

“국이 좋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맛을 보지도 않으시고 밥을 마십니까?”

라고 하니, 안현이 대답하기를,

“국이 만약 좋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그가 종기를 앓고 있을 때 의원이,

“지렁이 진액을 구하여 치료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더니, 말리면서 말하기를,

“바야흐로 봄이 되어 만물들이 낳고 자라는데, 그것이 비록 미물일망정 어찌 나의 병을 위하여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일 수 있겠느냐?”

라고 하였다.

생명을 해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은 유가에서는 인(仁)의 발현이라고 본다. 진정한 도량이란 유가 철학에서 볼 때 착한 본성인 인(仁)의 발로이다. 성리학자들은 ‘천지가 만물을 낳은 마음을 일컬어 인이다.’라고 하였다.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진정한 도량이나 관용은 거기서 나와야 한다고 보았다.

한편 그 사람이 이렇게 어진 사람인지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에게 아량을 베푼 사람도 있다. 이징옥(李澄玉)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그를 김종서의 일당이라고 몰아 파면한 데 대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차천로(車天輅 : 1556~1615)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서는 그에 대한 일화가 보인다.

이징옥의 아내가 교만하여 징옥을 배반하고 떠났다. 징옥은 그것을 억지로 말리지 않았다. 뒤에 징옥이 영남 절도사가 되었는데, 그 부인은 벌써 남에게 시집간 지 오래되었다. 징옥이 여러 고을을 합하여 크게 사냥하고, 아내의 새 남편 집 앞에서 많이 잡고 적게 잡은 것을 검사하여 보고, 새 남편 된 사람을 불러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을 모두 다 주었다. 이것은 주매신(朱買臣 : 한 무제 때의 정치가)의 고사와 비슷하다.

이 이야기는 보기에 따라 전 남편의 도량 아니면 배반한 아내에 대한 선의의 복수(?)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비열하게 보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름의 풍모가 있다고 하겠다. 반면 사대부로서 군자답지 못하고 비열한 소인 같은 짓을 한 선비도 있었다.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 보인다.

노수신(蘆守愼)이 진도(珍島)에 유배 생활을 할 때 그곳 수령이 당시 재상들의 눈치를 살펴서 여러 이유를 가지고 그를 욕보였다.

“죄인이 어찌 쌀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면서, 기장쌀을 사다가 공급하였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수신이 아이 종을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였더니, 수령이 말하기를,

“죄인이 어찌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는, 그 아이를 옥에 가두었다. 나중에 노수신이 크게 등용되니, 그 수령은 드디어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쳤다.

윤기헌(尹耆獻 : ?~?)의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서는 이에 대해서 이런 기록이 있다. 노수신을 괴롭히던 그 수령은 홍인록(洪仁祿)이라는 사람인데, 훗날 조정에서 홍인록을 공박하여 여러 해 동안 벼슬을 못 하게 하였다. 하지만 노수신이 힘을 다하여 주선하여 마침내 풍천부사(豐川府使)에 임명하였는데, 그(홍인록)가 늘 감탄하였다고 전한다. 노수신 역시 그런 소인에게도 넓은 도량으로 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사화와 당쟁

지금까지 도량이 큰 몇 사람을 소개했다. 구체적 사례가 없어서 그렇지 대동야승에는 도량이 넓다고 소개하는 선비들은 매우 많다.

그런데 적어도 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곧 선비들이 그렇게 도량이 넓으면서 왜 당쟁을 일삼았고, 사화를 일으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그런데 당쟁과 사화는 좀 구별해서 봐야 할 것 같다. 먼저 사화는 대체로 선비라고 부르기도 거북한 소인과 간신들이 일으킨 정변이라면, 당쟁은 생각을 달리해 보아야 할 여지가 있다.

당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식민사관도 한 몫 하지만, 그것이 있기 전에도 그 폐단을 지적한 이도 있다. 당쟁이란 요즘 말로 말하면 여야의 정치 갈등 현상이다. 동서고금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다 있는 일이지 조선에만 있었다고 할 수 없다. 지배집단 내부 또는 지배집단과 신흥 세력 간의 알력과 갈등이 대개 정쟁으로 표면화된다.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쟁이 가속화되면 상대에 대한 도량과 포용력을 상실한다는 점이다. 요즘도 그 양상에는 변함이 없다. 자칫 도량의 발휘가 훗날 화근의 싹이 될까 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각하면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일이 특히 조선 후기의 정치사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 죽이는 일을 쉽사리 결정하는 정치가는 결코 도량이 넓다고 할 수 없고, 아무리 명분이 뚜렷해도 인자(仁者, 어진 사람 혹은 지혜로운 사람)라 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선비라 부르기도 민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