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출처 (3)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 Ⅲ

선비정신

 

엄격한 출처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

무슨 일이든지 때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는 물론이고,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을 때도 그렇다. 매사의 성패가 때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주역을 공부할 때 “때를 아는 일이 역을 배우는 핵심이다(知時, 學易之要).”라고 누누이 강조하였다.

우리 전근대 사회에서 선비가 공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벼슬밖에 없었다. 하지만 벼슬하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다. 훌륭한 임금과 조정 아래에서는 자기 능력에 따라 벼슬하는 일이 순탄하지만, 폭군이나 나쁜 조정을 만나면 목숨까지 위태롭고, 관리로서 역량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자기의 뜻과 포부를 펼치는 일은 고사하고, 서로 눈치 보며 목숨과 지위를 보전하든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권력자에게 아첨하여 출세에 목매기도 한다.

바로 여기서 벼슬길에 나아가야 하느냐 물러나야 하느냐 하는 선택이 저절로 강요된다. 벼슬하려는 사람에게도, 벼슬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선택이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많은 사람이 자기 직장에서 뜻과 포부를 펼칠 수 있는지 없는지 따져 본다. 연봉은 높아도 회사에서 노예처럼 부려 먹는 데 대한 불만, 내 뜻과 생각은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고 오로지 주어진 일만 해야 하는 회의감, 상사의 인격적 모독, 내가 맡은 일에 비해서 턱없이 낮은 연봉 등을 고려해서 진퇴를 고민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문제는 자기 사업을 하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현재진행형이다.

선비들의 출처관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기준과 방식을 통틀어 보통 출처관(出處觀)이라 부른다. 이 출처관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고, 유교 경전에는 이런 출처관이 자주 보인다. 가령 논어의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벼슬해서 녹봉을 받지만,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벼슬해 녹봉을 받는 일을 수치이다(「헌문」).”라거나 또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벼슬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거두어들여 숨을 수 있다(「위령공」).”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하지만 물러나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다. 논어에 이런 말도 있다. 곧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화살과 같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화살과 같다(「위령공」).”라고 하는데, ‘화살과 같다’라는 말은 곧다는 뜻이다. 사실 사람이 곧으면 나라를 바로잡을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해서 나라가 어지러울 때 나아갈 수도 있고 물러날 수도 있다. 그것은 각자의 선택의 문제이다. 하지만 뜻을 펼칠 수 없으면 물러나는 것이 현명하다.

이처럼 선비들이 벼슬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준은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있다. 임금이 포악하거나 어리석거나 유약하여, 그 주위에 권신(權臣)이나 아첨하는 신하가 많으면 뜻을 펼치기 어렵다. 때로는 자신이 섬기던 군주의 자리를 누가 빼앗으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신념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자기에게 공이 없어도 스스로 물러나기도 한다. 비록 임금이 못나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임금을 설득해 정치를 잘할 자신이 있으면 나아가기도 했다. 반면 임금이 현명하고 훌륭한 나라를 만들려는 의지가 있으면 뜻을 펼치려고 선비들이 몰려나온다.

그런데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기준이 오로지 녹봉과 지위와 권세에만 있다면, 탐욕스러운 소인일 뿐이다. 뜻있는 선비가 취할 바가 결코 아니다. 이렇듯 참된 선비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출처관에 엄격했다. 이에 대해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선비의 출처는 구차스러운 일이 아니다. 임금의 일을 성취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군자의 소원이나, 그의 말이 쓰이지 않고 도가 행해지지 않아서 부득이 물러가는 것이지 물러나는 일만이 본래의 뜻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알았던 선비들

조선 전기를 통틀어 볼 때 선비들의 출처가 엄격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정변과 사화(士禍) 때문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연산군의 폭정, 중종 때의 기묘사화, 그리고 명종 때가 그렇다. 특히 명종 때는 더욱 심했는데, 당시 명망 있는 선비 가운데서 서로 대비되는 출처방식에는 벼슬에 나아가는 것과 산림에서 처사로 은거하는 것이 있었는데, 전자의 대표하는 인물은 이황(李滉)이고 후자의 그것은 조식(曺植)·서경덕(徐敬德) 등이다.

이황의 출처에 대해서 우선 자신의 말을 들어 봄이 좋겠다. 해동잡록에 수록된 그의 「도산기(陶山記)」에 나오는 말이다. “아! 나는 불행하게도 먼 시골에 태어나서 투박하고 고루하여 들은 것은 없었지만, 산림 중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일찍 알았다. 그러나 중년에 들어 망령되이 세상일에 나아가 바람과 티끌이 뒤엎는 속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스스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거의 죽을 뻔하였다.” 세상일이란 바로 벼슬길을 말한다. 벼슬하는 일이 그리 탐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바로 권신들의 횡포로 뜻을 펼치기 어려웠던 탓이다. 이런 퇴계의 이야기는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도 보인다.

대사헌 이해(李瀣)는 퇴계의 형이다. 일을 추진하는데 과감하여 항시 공명을 세우기를 장담하였다. 이기(李芑)가 인종 초기에 새로 우의정에 임명되자 그가 탄핵하여 그것을 좌절시켰다. 그는 퇴계에게 글을 보내어,

“언제나 한가하게 물러서 있기만 하면, 일평생 배운 것을 언제 펼칠 것이냐?”

라고 책망하자, 퇴계가 답서를 보내어,

“고향으로 돌아와 분수를 지키십시오.”

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훗날 형이 모함을 받아 죽자, 퇴계의 벼슬에서 떠나려는 뜻은 이때부터 더욱 굳어져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또 율곡의 석담일기에는 이렇게 전한다.

이황은 벼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예안(禮安)에 물러나 있으며 나오는 일을 어려워하고 물러나기를 쉽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태산북두와 같이 우러러보았다. 이때 윤원형이 죽고, 사림은 교화의 정치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이황을 부르는 명령이 내리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황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이황은 산중에서 도를 지켜 인망(人望)이 날로 무거워 명종이 여러 차례 불렀다. 그는 말세에 유학자가 일하기 어렵고, 임금의 마음 역시 잘 다스려 보려는 정성이 부족하며 대신 또한 학식이 없고 한 가지도 믿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록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곤 했다.

이것을 종합하면 우리는 이황의 출처관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형이 모함으로 죽고 또 권신들이 정권을 잡아 정치를 좌지우지하므로 자기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알아, 웬만하면 정치에서 발을 빼려고 했으나, 임금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응한 일로 보인다. 벼슬이나 권세가 탐나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는 권신 윤원형이 죽어 뜻을 펼칠 수 있는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또한 녹록하지 않아 끝내 도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황과 대조적으로 아예 불러도 나오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니 그 대표적 인물이 조식이다. 앞의 율곡의 책에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명종 때에 성수침(成守琛)과 함께 조식을 불러 단성(丹城) 현감에 임명했다. 이때 권신이 권세를 잡고 문정왕후를 미혹시켜 사림의 의기를 꺾었으므로 공론을 빙자하여 산림처사를 천거해 쓴다고 하였으나 유명무실할 뿐이었다. 그래서 조식이 벼슬에 뜻이 없어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폐단을 말하였다. 명종 말년에 경서에 밝고 몸을 수양한 선비를 천거하라 하여 조식은 이항(李恒)·성운(成運)·한수(韓脩) 등과 같이 천거 받아, 임금이 불러보며 정치할 방침을 물었으나 조식은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갔다. 조식이 시골로 돌아오니 청명한 명성이 더욱 퍼졌다. 삼가 생각해보건대, 조식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니, 진실로 한 세대의 산림처사이다.

윗글은 조식이 처사로서 끝내 벼슬을 사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조식과 교유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처사는 또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성운(成運)이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 에 따르면, 그는 1545년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속리산에 은거했고, 그 후 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누차 임관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이지함(李之菡)·서경덕(徐敬德)·조식·성수침(成守琛)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전심했다고 전한다. 또 신흠(申欽 : 1566~1628)이 쓴 『상촌잡록象村雜錄』에서도 그는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어 일찍이 세상에서의 틀을 벗어났는데, 그의 형 성우(成遇)가 을사년 난을 당해서 비명에 죽자 이때부터 더욱 세속의 공명에 뜻이 없어 속리산 아래에 숨어 살다가 나이 80여 세에 죽었다고 전한다.

성수침 또한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숙배만 하고 취임은 하지 않았고, 유일(遺逸 : 산림에 숨어 사는 학문이 높은 선비)로서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어도 매양 병으로 사양하고 숨어 있어 지조를 닦아서 옛 도를 힘써 행하여 궁하게 살다가 몸을 마쳤으니, 실로 일국의 착한 선비요, 당대의 일민(逸民 :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다.

화담 서경덕에 대해서는 더 소개하지 않겠다. 뒤에서 다른 주제로 따로 다루겠다. 이렇듯 당시의 시대적 환경이 이 선비들이 뜻을 펼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벼슬을 받아들여 이리저리 처세술을 발휘하며 자기 목숨과 지위를 보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뜻있는 선비가 구차하게 취할 태도가 못 된다. 그래서 모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산림에 머문 사람들이었다. 벼슬이 싫어서가 아니라 나아갈 때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특히 명종 연간에는 권신과 간신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많은 선비가 억울하게 화를 당했기 때문이다. 나가 봐야 뜻을 펼칠 수 없다면 나가지 않는 것이 옳다!

율곡의 출처관

다음은 율곡 이이의 출처관이 보이는 글이다. 그의 석담일기에 보이는 율곡과 송익필(宋翼弼), 또 그와 유몽학(柳夢鶴)의 대화이다.

익필 : 숙헌(叔獻 : 율곡의 자)이 조정에 머문 지 두어 달인데 무슨 업적이 있었는가?

율곡 : 비록 나라의 정권을 맡은 사람이라도 두어 달 만에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하물며 말은 올리지만 시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익필 : 사람들이 숙헌이 이번에 오래 머무니 이전에 물러나려고 한 것과는 다르다고 의심하고 있더라.

율곡 : 물러가려 하나 혹시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까 염려되고, 머물러 있고자 하나 내 말이 쓰이지 않으니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익필 : 식자들은 임금의 마음을 결코 돌릴 수 없다고들 하던데.

율곡 : 내가 듣기에는 ‘성현은 그와 같이 단정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했네.

몽학 : (이이를 보고) 엎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한 것을 도우려는 뜻이 있으면 아무리 구차스럽다고 해도 물러갈 일이 아니지.

율곡 : 구차하다는 것은 자기를 굽히는 것이다. 자기를 굽히고서 엎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한 것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몽학 : 비록 크게 일하지는 못하더라도 때와 일을 따라 도와서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도 역시 하나의 도리일 것이다.

율곡 : 그것은 나라의 정권을 맡은 대신의 일이다. 대신은 이미 중임을 맡았으니 마땅히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요, 물러나지는 못할 것이나, 대신이 아니면 기미를 보아 일어설 것이요, 지조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율곡 : (어떤 사람에게) 내가 두어 달을 머무는 동안 어떤 사람은 오래 머문다고 의심하고 어떤 사람은 속히 물러날까 염려하니, 식견이 중용을 얻기란 어찌 어렵지 않은가?

선비가 벼슬길에 올랐어도 임금이 자기의 주장을 받아들여 뜻을 펼칠 수 없으면 사직하고 물러나는 일은 다반사이다. 이이 또한 그런 뜻에서 사직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이 글에는 그의 출처에 대한 세평이 간접적으로 들어있고, 이이 본인의 고민과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정권의 성격이 확실하다면 출처를 결정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말대로 중용을 취한다는 게 참 어렵다.

선비들의 출처관을 본받자

선비들의 출처관(세상에 나서고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을 기준으로 현대의 다수 정치인을 보면 참으로 천박하다. 물론 민주국가라 누구에게나 참정권은 있지만, 대개는 자신의 욕심에 따라 대중의 인기를 끌어 모으고 그것을 이용하여, 때로는 비상식적으로 이름을 알려 정계에 진출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경영하는 사업체의 이득을 위해서, 어떤 이는 조직의 이익을 위해 진출한다. 그게 직능의 이해관계에 따른다고 양보해도, 우리나라는 특수 직종 출신에 편중되어 있다. 때로는 개인의 노력으로 명망을 가진 자가 섣불리 정치계에 발탁되었다가 명망도 훼손되고 추하게 몰락하는 모습도 자주 본다. 더 추한 경우는 정권의 얼굴마담으로 불려 나왔다가 아무런 역할도 못 하면서, 그저 족보에 관직 이름 하나 기록하는 인사도 있다. 본인의 하자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있어도 뜻을 펼치지 못해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