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과 지조 (1)

 

 

 

 

『대동야승(大東野乘)』을 통해 본 조선 시대 선비 이야기 Ⅲ

 

선비정신

선비정신과 지조

한국 문화와 선비정신

최근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독특한 한국의 문화일 것이다. 그 선봉에는 대중문화가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와 같은 표면적인 것만으로는 우리 문화의 저변을 알기 어렵다. 한국학을 연구하는 어떤 외국인 학자는 한국 문화의 핵심은 사상인데, 거기에는 홍익인간과 선비정신을 들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실 선비정신은 이전부터 우리 정신문화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 자주 거론되곤 했다. 그렇다면 정작 선비정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고 조리 있게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동안 대동야승 속에 깃든 선비들의 삶을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선비정신을 사례별로 분류하고 정리해보려고 한다.

10가지 선비정신

선비정신에는 무엇이 있을까? 학자마다 다양한 의견과 요소가 있을 수 있어, 어떤 견해만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10가지 덕목을 선택해 보았다. 바로 지조(志操), 대의(大義), 엄격한 출처(出處), 호학(好學), 넓은 도량, 멋과 여유, 안빈낙도(安貧樂道), 이치에 맞는 삶, 솔선수범, 품격 있는 기상(氣像)이 그것이다.

이 글은 이 열 가지를 모두 완벽하게 충족하는 선비를 다루지 않는다. 많은 항목을 공유하겠지만 모든 항목에 빈틈없이 완벽한 그런 선비는 드물다. 그런 분을 발굴하여 기술하는 일은 이 글의 본래 취지와 다르다. 선비정신을 종합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대부분 몇 가지 이상을 충족시키나 다만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항목을 중심으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해서 조선조 선비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몇 가지 항목들을 잘 지키고 있어서 일일이 다 거론하기는 쉽지 않다. 소개하는 인물이나 사례만이 꼭 거기에 해당한다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더구나 대동야승의 글들이 모두 개인 저작이기 때문에 학맥과 정치적 위치와 친소(친함과 친하지 아니함) 관계에 따라 주관적 관점도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등장하는 인물을 반대편에서 다른 각도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등장하는 개인의 품성보다 선비들이 숭상하는 정신이 무엇인지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이 글의 본래 의도와 들어맞을 것이다.

지조란 무엇인가?

선비정신으로 맨 처음 선택된 덕목이 지조이다. 국어사전에 지조는 ‘옳은 원칙과 신념을 지켜 끝까지 굽히지 않는 꿋꿋한 의지 또는 그러한 기개’라고 풀이하고 있다. 달리 절개(節介) 또는 절조(節操)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흔히 지조 또는 절개를 말할 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쳐 맞지 않는다.”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소학에 등장하며 전국시대 왕촉(王蠋)이 죽으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백이·숙제나 고려 말 정몽주·길재 조선의 사육신 등은 절개가 있는 선비의 대명사로 통한다. 하지만 지조는 외연이 커서 반드시 특정 왕조나 임금에 대한 충절(忠節)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앞서 국어사전의 풀이를 보았듯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지켜 굽히지 않는 꿋꿋한 의지나 기개가 있는 일도 지조다. 율곡 이이도 석담일기에서

“충신은 임금을 덕으로 사랑하고, 임금을 예법으로 공경하는 것이요, 비위나 맞추고 명령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은 도리어 사랑과 공경에 해가 된다. 신하는 마땅히 분수와 의리를 중하게 알아야 한다. 만약 단지 임금의 은혜와 녹봉만 사모하며 충성을 바친다면, 다른 임금도 역시 은혜와 녹봉으로 유인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분수와 의리를 소중하게 아는 사람은 임금의 대우와 관계없이 다 능히 절개와 의리에 죽을 수 있지만, 은혜와 녹봉을 소중하게 아는 사람은 그 마음을 믿을 수가 없다.”

라고 하여, 분수와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을 알고 올곧게 지키는 일이 지조다. 그래서 또 말하기를 “사람을 볼 때 먼저 그 대절(大節 : 커다란 절개)을 취한 뒤에 세세한 행위를 논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지조 또는 절개는 단순히 임금을 향한 외적인 충성만을 말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널리 알려진 충절의 선비는 앞서 많이 다루었기에 새로운 인물을 발탁한다는 취지에서 다른 선비의 사례를 소개하겠다.

지조가 있는 선비들

고려말 조선 초에는 옛 왕조에 지조를 지키는 선비들이 꽤 있었다. 정몽주나 길재 등이 있고, 원천석(元天錫, 1330~?)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다. 심광세(沈光世, 1577~1624)의 해동악부(海東樂府)에 보면, 그는 고려 말에 벼슬하지 않고 원주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태종이 왕이 되기 전 사가에 있을 때 그를 가르친 인연이 있었으므로, 태종이 불러 벼슬을 내리고자 하여도 사양하였다. 또 이기(李墍 : ?~?)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서는 그는 학문이 깊고 몸가짐이 곧았으며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었으나,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길까 염려하여 재혼하지 않고, 첩도 두지 않고서 21년을 쓸쓸히 홀로 살면서 아이들이 장성하여 혼인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정치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아내에게도 지조를 지킨 선비라 하겠다.

그런데 사람이 위급한 때를 당해서 조금만 뜻을 굽혀도 사는 방도가 있다. 어떻게 보면 구차한 삶이지만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의 삶 속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조선 시대는 그렇지 않은 선비들도 꽤 많다. 권별(權鼈 : ?~?)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등장하는 김진종(金振宗, 1496~1557)의 일화도 그러하다.

김진종은 천성이 방정·근엄하고 그릇이 넓고 커서 사람들이 충효대절(忠孝大節)이라 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귀양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정순붕(鄭順朋 : 윤원형·이기 등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 가운데 한사람)이 그 아내를 시켜서 몰래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노비를 많이 주면 귀양 가는 것을 모면할 수가 있다.”

라고 하였다. 그가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남아가 죽으면 죽었지 어찌 소인에게 사정하여 살길을 찾겠는가?”

라고 하였는데, 순붕은 곧 그의 처삼촌이다. 순창(淳昌)으로 귀양 가서 문을 닫고 11년 동안이나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결국 병으로 그곳에서 죽었다. 명종 말년에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백관을 거느리고 이때 귀양 간 여러 선비의 석방을 청하며 아뢰기를,

“김진종은 충효와 큰 지조가 있었으니, 지금 비록 죽었을지라도 그 관직을 회복시켜 주소서.”

라고 하니 마침내 왕이 허락하였다.

김진종은 뜻을 굽혀 뇌물을 바쳐 살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단지 노비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뜻을 굽히는 일이 지조가 없고 구차하기 때문이다.

또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 모두 절개가 있다고 여기는데, 그들 가운데 하위지(河緯地, 1412~1456)에 대한 이런 고사가 송와잡설에 전한다.

하위지는 선산(善山) 사람으로 세종 때 과거의 장원에 뽑혔다. 문종이 승하하자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갔는데, 단종이 우사간(右司諫)으로 불러 벼슬이 예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다가, 단종이 폐위되자 성삼문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은밀히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처음 음모에 참여한 것을 숨긴다면 죄를 면할 수 있다.”

라고 하였으나, 하위지가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국문을 받을 때 그가 대답하기를,

“신하로서 이미 역적이란 이름을 둘러썼으니, 그 죄가 마땅히 죽을 것인데, 다시 무엇을 물을 것이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세조는 화가 풀려 유독 그에게는 고문을 시행하지 않았다.

하위지는 자신의 이전 행위를 부인하면 죽음도 면할 수 있었는데도, 그는 구차하게 그러지 않았다. 지조를 목숨과 바꾼 것이다. 그의 지조는 모시던 군주와 동지들과 그리고 자기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배반하지 않았고, 목숨과도 바꾸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런 선비들만 지조가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지조는 임금에게도 있어야 하는 보편적 가치이다. 다음은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등장하는 고려말 이숭인(李崇仁, 1347~1392)에 대한 일화이다.

나라가 이미 바뀐 뒤에는 이숭인을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영남으로 유배하였다. 황거정(黃居正)이 사자로 영남에 가서 하루 동안에 그에게 곤장 수백 대를 때리고 묶어서 말에 싣고 수백 리를 달리므로 드디어 공이 문드러져 죽었다. 그 일은 황거정이 윗사람(정도전을 말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일이다.

태종 때에 황거정이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훈되어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태종에게 말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이숭인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랑하고 사모하여 그가 일찍 죽은 일을 한탄하였는데, 그를 죽인 일이 과연 이놈의 소행이었구나.”

라고 말하고, 드디어 훈호(勳號)와 벼슬을 삭탈하고 멀리 귀양 보내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태종은 태조가 왕이 되기 전 글을 읽어 과거에 급제한 유일한 아들이고, 선비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라고 해서 지조가 훌륭한 가치라는 점을 모를 리 없었다. 이숭인을 죽인 일은 정도전이 살아 있을 때의 일이므로 그가 왕이 되기 전의 일이고, 죽은 사정을 자세히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훗날 왕이 된 후 그를 죽인 일을 문책했는데, 자신이 정몽주를 죽인 일과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일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에서 나온 일이라고 여긴다면, 훗날 이숭인을 죽인 사람을 문책하는 일은 덕과 지조라는 가치를 훼손할 의향은 없는 듯하다. 물론 황거정이 한때 태종의 정적이었던 정도전 사람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그에 대한 앙금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이 또한 덕과 지조 있는 선비를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 작용했을 것이다. 지조 그 자체는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비들이 모두 지조가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보면 지조 없는 선비들이 등장한다.

연산군이 한창 음탕한 짓을 할 때 문무 관리들을 가마를 매는 하인으로 충당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간(臺諫)도 거기에 충당시킬 것인가를 물었더니, 연산군이 말하기를,

“대간도 충당시키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이렇듯 연산군이 놀러 다니는 곳에는 가마를 메고 다니게 하고, 때로는 글짓기를 시험하여 상을 주니, 의관을 차려입는 선비의 욕됨이 지극하였다.

조광조(趙光祖)가 일찍이 중종에게 아뢰기를,

“연산군이 유생들에게 가마를 매게 하여도 선비라는 자가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붓과 벼루를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상을 받기를 바라기까지 하여 선비의 풍습이 크게 훼손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다.

벼슬을 얻고 권세를 유지하며 상을 받기 위해서는 지조를 팽개친 선비들도 있었다. 옛 선비라고 해서 다 같은 선비가 아니었다. 이 또한 선비 가운데 군자와 소인이 섞여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조는 지금도 필요한가?

현대 시인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은 일찍이 「지조론」을 펼친 바 있다. 당시는 상대적으로 전통 시대와 거리가 가까워 그 말이 먹혔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에 지조가 과연 통할까?

옛날의 지조란 대개 자신을 잘 돌봐준 주군에게 바치는 충성과 관련이 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의 성격이 강했다. 지금은 옛날 사람처럼 모셔야 할 주군도 목숨 바쳐 섬겨야 할 대상도 없다. 각자가 삶의 주체가 되어 뜻을 이루기만 하면 된다. 회사나 조직에서 윗사람을 모시는 일도 지조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계약에 따른 약속일뿐이다. 그것을 어기면 자연히 그것에 상응하는 문책이 따른다.

하지만 지조의 현대적 의미는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신념과 가치를 고수하는 일과 관계된다. 지조가 없다고 말할 때는 옳다고 믿는 신념이나 가치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거나 이미 형성된 그것들을 위반하는 경우를 말한다. 전자는 아직 배우는 학생들에게 해당하므로 비난하기도 어렵고 용서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정치가이거나 유명인사라면 더욱 그러 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고루하여 편협 되고 잘못된 신념을 고수하는 일을 지조로 착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일을 그르치고 여론을 호도한다. 불행하게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굴리는 역할을 서슴지 않는다.

예로부터 지조 있는 분들은 구차하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도 묵묵히 가치를 실현해 왔고 꿋꿋이 살아왔다. 그것은 그 만족과 즐거움이 자신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해서 올바른 역사·가치관을 바탕으로 삼아 지조가 있다면 남의 신뢰를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세속의 잡인들로부터 비웃음과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시류에 아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헛된 명성과 이익과 구차한 삶을 위해 지조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이 다반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