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을 기억하다 : 효종시대의 율곡 이야기

율곡을 기억하다 : 효종시대의 율곡 이야기

 

1. 효종의 시대

효종(孝宗, 1619년∼1659년)은 재위 기간이 1649년부터 1659년까지다. 약 10년을 왕위에 있었다. 이때는 청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여 명나라를 정복하고 중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명나라는 1644년에 멸망하였다.
참고로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顯宗, 1641년∼1674년)은 1659년부터 1674년까지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두 임금이 재임한 시기는 약 25년에 이른다. 26년에 이른 인조의 통치기간과 비슷하다. 효종 이전에 왕위에 있었던 인조는 1623년부터 1649년까지 통치했었다.

효종은 병자호란(1636∼1637)이 일어난 뒤, 인조의 장남이자 자신의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심양에서 약 8년 동안 볼모로 붙잡혀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봉림대군으로 불렸던 그는 병자호란 직후 50만명이 넘는 백성들이 청나라 여진족에게 끌려갈 때, 친형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잡혀갔다.
왕세자였던 소현세자는 1645년 귀국을 했지만 2달 뒤 사망하고 뒤이어 봉림대군이 귀국하였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둘째 아들이었던 그는 조선의 제1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이 임금이 효종이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발달된 과학문물과 서양 서적을 들여왔으나 이 때문에 인조의 눈밖에 벗어나 비판을 받았다.
효종의 아버지 인조는 1623년에 서인 세력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올랐다. 이 사건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1623년 4월 11일, 즉 음력으로 3월 12일에 일어난 일이다.
인조는 반정 직후 서인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재야에 있던 서인의 산림세력 예를 들면 김집(金集, 1574년∼1656년)이나 송준길(宋浚吉, 1606년∼1672년) 송시열(宋時烈, 1607년∼1689년) 등을 조정에 불러, 정권에 참여시켰다. 서인과 대립하였던 일부 남인 세력도 고위 관리에 임명시켜 당파의 균형을 맞추어 통치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쪽 할 것 없이 모두 유학자들, 즉 중국의 송나라나 명나라의 문물을 추종하는 지식인들이었고 오랑캐의 나라인 여진족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청나라의 과학기술이나 청나라가 받아들인 서양인의 종교인 기독교는 조선의 질서를 뿌리채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설사 인조가 소현세자의 개방적인 태도를 수용하였다 하더라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유학자들과 관료들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끌려 내려오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인조로서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것은 유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었고, 유학자들의 반발을 부를 일은 아예 처음부터 싹을 잘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소현세자의 아이들과 세자빈 강씨도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은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효종은 1649년 왕위에 즉위한 뒤 사림 정치의 이상을 표방하고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추진하였다. 천하를 정복한 청나라의 국력을 인정하고 그들의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던 소현세자와는 분명히 다른 입장이었다. 효종은 나중에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권시(權諰) 등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충청도 지역의 재야에서 활동하던 서인 학자들로 이후 ‘산당(山黨)’이라 불렸다. 이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자 기존에 조정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서인 훈구세력, 즉 김자점(金自點, 1588년∼1651년), 원두표(元斗杓, 1593년∼1664년), 이행진(李行進)과 이시해(李時楷) 등 반정공신들을 제압하고 청나라에 호의적인 친청파 관료들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산당 세력은 적극적인 북벌을 추진하기보다는 군주의 수기(修己, 수양)를 중시하고,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만 계속하여 조정에서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또 계속되는 청나라의 견제로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효종 5년까지 기존의 서인 관료들을 중심으로 ‘부국강병론(富國强兵論)’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 펼쳐져 대동법과 노비 종모법(奴婢從母法) 등이 실시되었다.

효종 4년, 1653년에는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 1630년∼1692년)과 20여명에 이르는 그 동료들이 해상에서 표류하다 제주도에 착륙하였다.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기 겸 선원이었다. 하멜 일행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를 하다가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좌초한 것이다. 이보다 25년 전, 즉 인조 6년인 1628년에도 네덜란드인 박연(Jan Jansz Weltevree) 일행이 제주도 표류한 적이 있었다.
하멜 일행은 1666년까지 약 13년간 조선에서 생활하다 그 일부가 탈출에 성공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가 이들의 조선 체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멜도 이때 탈출하여 조선에서의 경험을 글로 남길 수 있었다. 일본으로 도망간 하멜 일행은 거기에서 약 1년간 체류하면서 서양문물에 대한 많은 정보와 지식을 일본에 전해주었다.
하멜이 조선에 표류하여 들어왔을 때 박연은 이미 조선의 생활에 적응하고 귀화하여 훈련도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박연은 하멜과 조선 관리들의 대화를 통역해주고 하멜 일행이 조선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임진왜란)과 명나라의 멸망, 청나라의 중국 점령과 서양인들의 동양 진출, 그리고 서양 기독교의 전래와 박연이나 하멜과 같은 서양인들을 실은 배가 지속적으로 한반도 주변에 나타나는 것은 이 세상이 지금 어떤 알 수 없는 변화에 휩쓸리고 있다는 분명한 징표였다.

1654년(효종 5년)과 1658년(효종 9년)에 효종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만주지역에 러시아 정벌군을 보내기도 하였다. 1651년경에 러시아인들은 흑룡강(黑龍江) 주변에 성을 쌓고 모피를 수집하거나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그곳 거주민들과 분쟁을 일으키고 청나라 군사와도 충돌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 그들은 송화강 방면으로 진출하였는데, 청나라 군대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에 자주 패배하였다. 이에 청나라에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조총군 100명과 기수 등 50여명을 청나라에 보내 청나라 측과 합류하여 공동 작전을 전개하였다.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은 흑룡강 부근에서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여 7일만에 모두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제1차 러시아 정벌(羅禪征伐, 나선정벌)이다.
그 뒤에도 러시아군은 흑룡강 방면에서 계속 활동을 하고 청나라 군대와 자주 충돌하였는데 청나라는 그들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1658년 3월에 또 청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총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조총군 200명과 기수, 고수 등 60여명을 파견하여 러시아군 정벌에 나섰다. 조선의 군사들은 5월에 영고탑으로 가서 청나라 군대와 합류한 뒤, 흑룡강으로 갔다. 6월에 송화강과 흑룡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러시아 군대를 만나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측은 큰 배 10여척에 군사를 싣고 공격해오고 동시에 육상에서도 공격을 해왔다. 청나라 군사는 이에 잘 대응하지 못하였으나, 조선의 병사들은 용감하게 나가서 불을 붙인 화살로 적선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 전투로 러시아 군대의 주력을 거의 섬멸시키고, 송화강 방면에 잠시 머무르다가 그해 가을 영고탑을 거쳐 개선하였다. 이것이 제2차 러시아 정벌이다. 효종은 내심 북벌에 뜻을 두고 있었는데, 이러한 두 차례의 원정과 승리로 효종은 내심으로 청나라 정벌에 더욱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