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조익의 항변과 효종의 격노

9. 조익의 항변과 효종의 격노

 

조익의 상소문 이후로 한동안 조정은 문묘종사 문제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서 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임금의 생각에는 서인들의 임금 탐색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9월 15일 함경도에서 율곡과 성혼에 대한 문묘 종사를 요청하는 상소문이 조정에 전달되었다. 그 지역 유생 이후빈 등이 올린 것이었다.
이러한 상소문에 대해서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을 내렸다.

“너희들의 상소 내용을 보건대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아, 여름에 밭매는 것보다 힘든 아첨은 옛사람이 부끄럽게 여긴 바이다. 비록 서울에 있는 유생들 집단(즉 성균관의 유생들)과 친교를 맺어 아첨을 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억지를 써가며 알지 못하는 바를 어찌 감히 이처럼 한단 말인가? 나는 매우 통탄스럽고 해괴하게 여긴다. 남의 사주를 받아 임금의 동향을 살피려 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모자란다. 너희들을 법대로 조치해야 마땅하나 지금은 우선 용서해 주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상소문에 대한 임금의 답변으로서는 상당히 엄한 것이었다. 효종은 함경도 유생들이 서울 지역 유생들의 사주를 받아 이러한 상소문을 올렸다고 보았다. 적어도 서울 유생들에게 지방 유생들이 아첨하기 위해서 그리고 임금의 동태나 의도를 살펴보려고 이러한 일을 추진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문묘 종사 요청은 거부하였다. ‘너희 죄는 죽어도 모자란다’고 하였으니 거부 정도가 아니라 문묘 종사 요청에 대해여 극도의 반감을 표출하였다고 해야할 것이다.
임금의 답변을 받아들고 담당 관리 ‘정원’(政院,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여러 가지 사항들을 임금에게 보고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리)이 나갔다. (대궐 바깥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유생들이 임금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관리가 다시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바깥의 상황을 전달하였다.

“(그들이 있는 곳이)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유(儒)라고 이름하는 이상에는 모두 관대하게 용서하는 것이 곧 선비를 대우하는 임금의 도리입니다. 지금 북방 유생들이 최근 나라의 걱정이 심해진 것을 알지 못하고 감히 이 상소를 올렸으니, 신들도 적절한 때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수십 명의 유생들이 머나먼 천리 길을 묻지 않고 이렇게 와서 대궐에 호소하였는데, 성교(聖敎, 임금의 답변)가 지극히 엄하여 사기(士氣, 선비의 기개)가 꺾인 나머지 먼 지방 사람들이 부끄러워 죽고 싶어들 합니다. (저는 임금과) 아주 가까운 자리에 있으므로 구구한 심정을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보고에 대해서 효종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였다.

“사론(士論, 선비들의 여론)이 어그러지고 조정이 어지러워진 것이 전적으로 이것(문묘 종사 문제) 때문이다. 나라가 이것 때문에 망할 것인데, 그들을 대우하는 도리를 어찌 평화롭게 할 수 있겠는가? 계사(啓辭, 상소문)의 뜻도 어긋나지 않았는가? 나는 도저히 그들의 상소를 인정하지 못하겠다.”

효종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요구하는 그들의 상소문 자체가 잘못되었으며 자신은 이제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단언한 것이다. 임금은 그리고 당시 조정이 어지러워지고 선비들의 여론이 어그러진 것이 전적으로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 때문이며, 이 때문에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라고 하였다. 참고 있던 효종의 인내심이 폭발한 것이다. 효종으로서는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 문제로 인하여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아울러 효종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 건의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서 자신은 반감까지 가지고 있음을 드러냈다.

다음날 9월 16일, 상황을 지켜보던 조익이 또 건의서를 올렸다. 효종 임금에게 그는 유생들을 좀 더 너그럽게 대해줄 것을 요청했다. 조익은 이 당시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해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어제 북방에서 온 유생들에게 임금께서 내린 비답이 다소 과하다는 뜻을 동료들과 의논하여 보고를 드렸습니다. 보고 드린 내용이 신의 뜻에는 미진한 바가 있기에 다시 이렇게 번거롭게 해드리는 바이니, 삼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조익은 효종이 함경도 유생들에게 내린 답변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이미 임금에게 보고 하였다는 것이다. 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함경도 유생들이 상소를 올린 뒤에 조정안에서는 고위 관리들과 임금 사이에는 빈번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익은 그런데 좀 더 보충하기 위해서 이러한 상소문을 올린다고 하면서 다시 율곡과 성혼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예로부터 성명(聖明)한 제왕이 세상을 다스리고 사물에 응하는 방도는 오직 시비와 선악과 사정(邪正, 잘못과 올바름)을 평등하게 살펴서, 버리고 취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견주어 차이를 두려는 사사로움이 그 사이에 개입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치세(治世)의 도(道)는 본래 지극히 쉽고 지극히 간략한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쉽고 간략하게 하여 천하의 이치를 얻는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임금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지 않고 서인들이라고 하는 일부 당파의 이익과 관련된 당론에 불과하다고 본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었다. 조익으로서는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보여주는 효종의 태도가 이해할 수 없었다. 임금이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자들의 의견에는 동조하고 그 반대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찬성파들의 의견은 편협한 당론으로 몰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익은 다음과 같이 자기 주장을 이어 갔다.

“지금 이이와 성혼 두 현신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는 실로 거국적인 공론입니다. 두 신하의 학문과 덕의(德義)의 실상에 대해서는 전후하여 올린 상소에서 이미 소상히 말씀드렸으니 이제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에 그들을 따르며 배운 자들은 이미 모두 마음속으로 진정 열복(悅服, 기쁘게 복종)하였으며, 죽은 뒤에는 듣고 보고서 경모하는 자들이 거의 온 나라에 퍼져 있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만 가니, 이것이 어찌 억지로 하는 것이겠습니까?”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는 서인들만의 요청이 아니라 거국적인 ‘공론’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그들의 학문과 사람됨은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지방유생들이 서울까지 올라와 상소문을 올린 것에 대한 임금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전일 문묘 종사 일로 상소문을 올린 것은 호남(湖南)의 바닷가와 관서(關西) 지방의 의주(義州) 사람들까지 모두 모여 와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찌 모두 남의 사주를 받아 그렇게 하였겠으며, 또한 어찌 이익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오직 천성에서 우러나온, 떳떳함을 따르고 덕을 좋아하는 마음에 비추어 볼 때 스스로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나 지금이나 안이나 밖이나 인성(人性)이 착하다는 것과 온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가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율곡과 성혼의 훌륭한 성품과 그들이 이룩한 공적이 있어서 지방의 선비들이 나선 것이지 어떤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조익은 임금이 특히 지방유생들이 남의 사주를 받아 서울로 올라왔다고 의심하는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게다가 (유생들이) 천리 길을 멀리서 올려고하면 고생이 매우 많기 때문에 예전부터 경시(京試, 서울에서 행해진 과거시험)에 와서 응시한 북유(北儒, 북쪽지방의 유생)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만약 진실된 마음이 없다면 어찌 남의 사주를 받았다고 해서 오겠습니까? 그들이 온 것은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도 전하께서 이와 같이 의심하고 계시니, 이는 아마도 성인(聖人)이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임금이 지금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필자주) 심지어는 (임금께서) 그들 죄가 죽여도 모자란다고까지 하셨는데, 저들이 만약 진심에서 우러나 스스로 왔는데도 전하께서 배척하여 끊기를 이와 같이 하시어 저들로 하여금 원통함을 안고 돌아가게 한다면, 이 또한 임금이 사람을 대우하는 도리에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저 두 신하(율곡과 성혼)의 덕행은 이미 오래전에 드러났는데, 유생들이 존모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모함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조익은 이렇게 임금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미 드러난 율곡과 성혼의 덕행에 대해서 임금은 왜 그렇게 의심을 하고 믿지 못하는가 하고 추궁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조익은 이어서 일전에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경상도 진사 유직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유직(柳㮨)은 선현을 무함(誣陷,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함정에 빠뜨림)했을 뿐만이 아니라 항성(恒性, 변함없이 늘 한결같은 성질)을 잃은 자로서 남을 속이는 그 말이 실로 통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올린 상소는 모두 허탄하기만 한데 그중에 더욱 뚜렷이 드러난 것은 이러합니다. 이이와 성혼이 서로 논한 이기(理氣)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되풀이한 말이 모두 이(理)와 기(氣)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인데, 유직은 말하기를 곧 ‘이기를 한 물건으로 하였으니 육가(陸家, 육상산陸像山)의 학문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혼의 상소에 있는 ‘신심을 거두어 간직하고 정신을 보호하여 아낀다.(收拾身心, 保惜精神)’는 이 여덟 글자는 본래 주자(朱子)의 말인데도 유직은 말하기를 ‘분명히 유자(儒者)의 말이 아니요, 도가류(道家類)이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너무나도 망령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육상산의 학문이란 육구연(陸九淵, 1139년∼1192년, 호는 상산象山)의 학문이란 심학을 말한다. 남송시대의 사상가 육구연은 ‘마음은 즉 리(心卽理)’라는 사상을 제시하고 주자와 대립하였다. 유직이 율곡의 이기론을 이러한 육구연의 것이라고 하고, 또 성혼의 말을 도교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남을 그럴 듯이 속이는 말이며, 망령된 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조익은 나아가 이러한 유직을 감싸는 영남의 유생들을 이렇게 비판하였다.

“그런데 영남 좌도의 유생들이 유직을 정거(停擧, 과거시험 응시 기회를 정지시킴)와 삭적(削籍, 유적儒籍을 지음)에서 풀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과거 시험을 폐하고 그것을 절의를 지킨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이 어찌 큰 변이 아닙니까? 그 사건은 무리를 지어 국명(國命)을 거역한 것이고 그 계획은 조정을 협박하고 견제하여 유직에게 내린 벌을 풀게끔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임금에게 강요하는 것은 임금을 무시하는 짓이다’라는 것으로서 그 정상이 참으로 통탄스러우니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보건대 전하의 뜻은 영남 유생에 대해 매양 너그럽게 용납하며 그르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진 이를 사모하는 말을 한 자는 번번이 깊이 미워하고 통렬하게 꺾으시면서 어진 이까지도 아울러 경홀하게 여기고 계시니, 이 점을 신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조익은 자기가 보기에 임금이 율곡과 성혼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항상 너그럽게 용납하고 있다고 하였다. 반면에 율곡과 성혼에 대해 사모하는 말을 한 자는 번번이 깊이 미워하고 그들을 통렬하게 꺾고 나아가 율곡과 성혼까지도 가볍고 소홀하게 여기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거기다 임금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자들이 ‘그르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점을 신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호소하였다.
조익은 임금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영남의 인심을 염려해서 그런 것인가 하고 추측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뜻이 혹시라도 유직의 마음을 거스르면 영남의 민심을 잃게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를 한결같이 너그럽게 용납하며 그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시는 반면, 양현(율곡과 성현)을 종사(從祀)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시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무릇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은 오직 그 시비가 있는 곳을 관찰하여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예로부터 (성현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어찌 나라를 망치는 도리가 되었습니까. 지난 선조(先朝) 때에 원황(元鎤)이 영남 감사가 되자 유생들이 통문(通文)을 하여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러자 선왕(先王)께서 명하여 앞장서서 창도한 자를 잡아 국문하여 치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영남의 인심을 잃은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과거를 거부하며 지금처럼 공동(恐動, 위험한 말을 하며 남의 마음을 무섭게 함)시킨 일도 보지 못했습니다.”

효종이 유독, 율곡과 성혼을 거짓으로 모함하고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유직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이해하고 그를 비판하고 율곡과 성혼을 문묘에 종사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라고 까지 하면서 역정을 내는 것은 영남의 민심을 얻으려는 생각 때문이 아닌지 조익은 임금에게 물었다. 그리고 인조 때 영남의 유생들이 배척했던 경상도 관찰사 원황의 예를 들면서 그를 반대한 영남 사람들을 조사하여 벌을 주고 했어도 영남인들의 민심이 조정에 등을 돌린 일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그는 영남 유생들의 과거 시험 거부에 대해서도 이렇게 주장했다.

“저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거부한 것은 모두 그들의 본심이 아닙니다. 과거는 곧 선비들이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출세하는 길이 되기 때문에 평소 크게 하고 싶어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비록 유직과 친하게 지내는 자라 하더라도 유직을 위해 과거를 거부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한 도의 유생으로서 유직과 평소 알지 못하는 자들이 모두 유직을 위해 과거를 거부하겠습니까. 그럴 리는 만무합니다. 이는 필시 위협하여 제지하는 자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조익은 이렇게 경상도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거부한 일에 대해서 자신의 판단을 설명하고 이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 배경으로 경상도 관리들의 모의 의혹을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예를 들면 감사 민응협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감사 민응협(閔應協)도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대개 공도회(公都會, 각 도의 도사가 매년 가을 지방 유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과거)를 폐지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처럼 일이 많은 때에 유독 실시하겠다고 청한 것도 이상합니다. 그리고 또 얼마 뒤에 유생들이 유직에게 벌을 내린 것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겠다고 한다하였으니, 처음부터 공도회를 실시하자고 청한 것은 이를 위한 계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녹명(錄名, 과거 응시원서를 접수함)되어 과거 시험장에 들어온 인원수를 계문(啓聞, 신하가 어떤 내용을 임금에게 글로 보고함)하는 규정은 처음부터 없었는데, 이 또한 의도를 가지고 한 듯하니 매우 괴이합니다. 도주(道主)의 의향이 이와 같은데, 또 중간에 선동하는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익은 경상도 유생들의 과거시험 거부 사태가 모의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 주모자는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관찰사와 그 밑의 중간 관리들, 그리고 중앙에서 보낸 감사라고 추정했다. 조익은 ‘중간에 선동하는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임금에게 보고한 것으로 보아 과거시험 거부 사건에 대해 이미 상당한 증거를 수집해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조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먼저 민응협(閔應協)을 파직하고 공정하고 의리를 아는 사람으로 유직을 위해 계획을 하지 않을 자를 가려 보내어 그로 하여금 그곳의 유생들을 잘 타일러서 그들의 의혹을 풀어주게 하는 한편, 유직이 기망하고 일을 그르친 죄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유생들을 위협하고 견제하는 자가 없어져 영남의 유생들이 모두 전과 같이 과거에 응시하여 그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동시에 한 도내가 안정되어 무사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늘 유직이 기망하는 간특함에 대해 분함을 품고 있던 터에 또 영남 지방의 실정을 깊이 살피고서 감히 다시 무릅쓰고 진달하니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조익으로서는 ‘영남 지방의 실정을 깊이 살피고서’ 이러한 보고문을 올린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 유직의 간특함에 대해서도 분함을 품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율곡과 성혼에 대한 모함을 스스럼없이 하는 그에 대해서 분개하고 있었음을 의미한 것이다.
좌의정 조익의 이렇게 길고, 구체적인 보고서를 접한 효종은 다음과 같이 답변을 내렸다.

“보고의 내용에 병적인 곳이 많다. 내가 경을 위하여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보고서의 내용에 ‘병적인 곳’이 많다는 말은 한마디로 ‘미친 소리, 그만하라’는 말이었다. 임금이 또 거기에 ‘그대가 매우 애석하다’. 즉 ‘좌의정 자리에 있는 당신이 안타깝다’는 표현까지 덧붙였다. 임금으로서는 좌의정의 보고서에 극도의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좌의정 조익은 이 일로 새로운 임금 효종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이해(효종 1년) 11월 2일에 효종실록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좌의정 조익이 여러 차례 사직하자 허락하다.”

조익은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임금에게 사직을 요청했으나 효종은 계속 허락하지 않다가 이날 사직을 허락한 것이다. 이때 조익의 나이는 71세였다.
11월 13일, 원로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조정의 대신들이 임금 앞에 모였다. 대신들뿐만 아니라,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고위 관리들까지 자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호조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김상헌(金尙憲)·김육(金堉) 같이 조정의 노성한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즈음 듣자 하니, 조익(趙翼)도 장차 서울을 떠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렵고 근심스러운 때를 당해서는 더욱더 숙덕(宿德, 오래도록 쌓은 덕망)의 노신(老臣)을 머물도록 격려하여 일에 따라 자문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효종은 이러한 건의에 이렇게 답했다.

“경의 말이 맞다. 위로는 천재(天災, 하늘이 내리는 재난)가 거듭 나타나고 아래로는 인사(人事, 사람의 일)가 이와 같으니, 그 연유를 궁구해 보면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다. 조정에 있는 대신들이 서로 연이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고하니,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함께 하겠는가?”

이어서 관리들의 보고를 듣고 있던 효종이 이렇게 명을 내렸다.

“조 정승(조익)과 김 판부사(김육金堉)의 처소에 모두 사관을 보내 돌아오라는 뜻으로 효유(曉諭, 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이름)하라.”

김육은 ‘대동전폐법(大同錢幣法)’을 실시하자고 건의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김상헌과 김집(金集)등이 반대하고 결국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조익에 대해서는 사관이 같은 날짜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겼다.

“대체로 조익이 일찍이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 즉 보고서)를 올려 영남 유생들의 잘못을 통렬히 배척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이상일(李尙逸) 등의 상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에서 (조익의 보고가) 공평치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전교(임금의 지시나 명령 혹은 답변)가 있었기 때문에 조익이 드디어 떠나간 것이다.”

효종은 11월 11일 이상일(李尙逸)이 유직을 변호하면서 조익의 상소문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한 적이 있었다.

“한 도(경상도)의 선비들이 모두 유직의 상소에 참여한 것은 매우 구차한 일이며, 나라의 시험에 나오지 않은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이른바 (경상도의 유생들이) 임금에게 요구하고 위(임금)를 무시했다는 등의 말이, 성난 데(조익의 상소문)서 나와 (조익의 의견이) 바르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내 이미 통촉하고 있다. 너희들이 남과 다투지 않고 물러나 스스로를 닦는다면 비방하는 말이 무엇이 두렵겠는가? 내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각자 힘쓰도록 하라.”

이상일은 그 날짜 상소문에서 임금에게 좌의정 조익의 상소와 조치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하소연을 한 바 있었다.

“심지어 (좌의정 조익이 영남의 유생들을 지목하여) 나라의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신들을 무함(誣陷,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함정에 빠뜨림)하는 죄안(罪案, 범죄 죄목)을 삼아, 혹 인륜을 무시하는 해괴한 귀신의 무리로 (저희 영남 유생들을) 지목하기도 하고 혹 (저희가) 임금을 위협하고 업신여겼다는 말을 날조하여, 그들(조익 등 서인들)의 입으로 거론할 뿐만이 아니고, 또한 임금에게까지 아뢰고 있습니다. 아, 이것이 과연 대신이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며, 이것이 과연 사유(師儒, 도를 가르치는 유학자)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입니까?”

11월 11에 일어난 이러한 이상일의 상소문과 효종의 답변을 보고 조익은 아예 서울을 떠날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11월 16일 임금이 보낸 사관이 13일에 이어서 다시 좌의정 조익을 찾았다. 임금이 재차 조익에게 조정에 머물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조익은 상소하여 다시 물러갈 뜻을 임금에게 전했다. 이러한 뜻을 전해 받은 효종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경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니, 내가 다시 무슨 유시(諭示, 타일러 가르침)를 하겠는가? 단지 매우 부끄러울 따름이다. 경은 의당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몸을 요양하라.”

이러한 비답은 떠나가는 노신을 위해서 임금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좌의정 조익에게 “단지 매우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한 것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둘러싸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자신의 조치에 대한 개인적인 미안함을 최대한 정성을 다하여 표현한 말이었다.

11월 22일 충청도 공주목에 속한 비인(庇仁) 지방에서 선비 남회(南誨)가 상소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근래 영남 유생들의 상소로 영의정 이경여가 임금께 보고하고 관직을 물러났으며, 좌의정 조익이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습니다. 옛날 송나라 인종(仁宗) 때 왕공신(王拱辰)이 사류(士流, 지식인들)를 일망타진하였고, 그 뒤에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구양수(歐陽修) 등도 서로 이어 파직되어 내쫓김으로써 송나라 왕실이 위약해지자 밖의 오랑캐들이 침탈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이때의 일을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임금에게 항의하였다.

“신이 비록 영남 유생들이 상소한 말을 알지 못하지만 풍문으로 들으니 선현(율곡과 성혼)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대신을 기롱했다 하니, 영남 유생들은 괴이한 것을 좋아함이 심합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역신(逆臣) 정여립(鄭汝立)·정인홍(鄭仁弘)등이 크게 어진이를 배격했다고 하니, 어찌 정인홍을 따르는 사람들의 의논이 아니겠습니까? 영남은 평소 문헌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왔는데, 도리어 공자를 업신여기고 여러 현인들을 꾸짖는 무리가 있으니, 사문의 불행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정인홍(鄭仁弘, 1535년∼1623년)은 광해군 때 북인과 남명 조식의 제자들을 이끌고 정국을 주도했다. 조식의 수제자이며 북인 강경파로 꼽인 그는 남인들이 인조를 옹립하고 반정을 일으킬 때,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광해군 때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적이 있었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으로서는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상소문이었다.
이러한 상소문에 효종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대가 초야의 선비로서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와 같이 진언을 하니, 내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다음날 11월 23일 효종은 좌의정 조익의 직책을 ‘영중추부사’로 바꾸어 주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는 고위직에서 물러난 문관들을 예우하고 그들에게 계속 녹봉을 주기 위한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일정한 소관사무가 없고 녹봉만 받을 뿐이었다.
다음달(윤달) 11월 20일 조익이 임금에게 소장을 올려 벼슬을 사양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는 것이 비록 옛날의 예이지만 그것은 태평할 때에나 마땅하지 위란(危亂, 위태롭고 어지러움)할 때에는 마땅치 않다. 이때가 어떤 때인데 기로(耆老, 나이 먹음, 원로)의 대신들이 서로 줄이어 초야로 도망가 나로 하여금 고립되게 하는가? 경은 이 점을 생각하라.”

조익은 그 뒤에 소현세자 부인으로 억울하게 처형된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의 호칭 문제로 고초를 겪기는 했지만, 줄곧 효종의 곁에서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혼란스러운 조정이 중심을 잡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효종 6년(1655년) 3월 10일, 77세로 사망하였다. 『효종실록』에는 그의 사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졸기(卒記)가 실렸다.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조익(趙翼)이 사망하였다. …… 광해군 초기에 이이첨(李爾瞻)이 권력을 잡았을 때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전랑(銓郞)에 천거하려 하였으나, 조익이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제현(諸賢)을 공박하여 배척할 때에 조익이 옥당(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왕에게 학문적 자문을 하던 관청)에 있었는데 동료와 함께 글을 올려 그 죄를 논하였다. 이 때문에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폄출(貶黜)되었는데, 모후(母后)가 유폐되어 윤기(倫紀)가 아주 무너진 것을 보고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한번도 성시(城市)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해년에 반정(反正, 인조반정)하고서는 맨 먼저 옥당에 들어갔는데 걸핏하면 성인의 학문과 선왕의 정치를 인용하니, 인조(仁祖)가 번번이 허심탄회하게 들었다. 지금의 성상께서 즉위하고서 드디어 정승이 되었는데 조익이 상이 큰일을 할 뜻이 있는 것을 보고 알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 이이·성혼을 종사하는 논의를 힘껏 주장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향리에 물러가 경적(經籍)에 침잠하였다. 이때에 사망하니, 나이는 일흔 일곱이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그가 지은 『서경천설(書經淺說)』·『용학곤득(庸學困得)』 등의 책 가운데에서는 주자장구(朱子章句)를 제법 많이 고쳤는데, 사람들이 이 때문에 흠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