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 시위

7.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 시위

 

7월 3일 태학생(太學生) 박세채(朴世采) 등이 상소하였다. ‘태학(太學)’이란, 성균관을 말하며 태학생은 성균관 유생을 말한다.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둘러싸고 찬성파와 반대파가 경상도에서 서로 충돌하고 동시에 서울 성균관 내부에서도 서로 충돌하여 일부 성균관 유생들이 한때 집단으로 수업 거부를 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박세채는 유직 등의 상소가 부당함을 알리고 동시에 성균관 내부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상황보고도 겸해서 이러한 상소를 올린 것이다.

“두 분의 현신(賢臣, 율곡과 성혼)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자는 청원이 있은 뒤에, 일종의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선정(先正, 율곡과 성혼)에게 추악한 말을 하였습니다. 사림(士林, 선비들)들은 이를 통탄스럽게 여겨 온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저 유직이란 자는 얼마나 괴귀(怪鬼)한 위인이기에 사론(邪論, 사악한 논의)을 떠벌려 죄안(罪案)을 만들고는 말하기를 ‘(율곡 선생이) 어버이를 유기하고 임금을 뒤로 미루어 명교(名敎, 유학의 가르침 즉 유교)에 죄를 얻었다’고 한단 말입니까? 아,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지만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래서 지난번에 (성균관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였을 때 공론(公論)이 더욱 격렬해져서, 앞서 시행한 벌(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벌)이 죄에 비해 오히려 가볍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마침내 부황(付黃, 누런 쪽지를 붙이는 처벌)하는 조치가 있게 되었는데, 동참한 유생들은 이견을 가진 자가 없었습니다.”

박세채는 1649년(인조 27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는 일찍부터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었으며, 그것을 시작으로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유직의 상소문을 읽고 그 잘못과 부당함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러한 상소문을 올린 것이었다. 이어서 그의 상소문은 문묘 종사를 둘러싸고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 특히 권당(捲堂, 교실을 비우는 시위 혹은 집단행동)이라고 하는 수업 거부 사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유직의 처벌에 대해서 성균관 내부에서는 크게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래선(睦來善)·이희년(李喜年) 등이 음관(蔭官, 과거를 거치지 않고 선발된 관리)으로서 재론(齋論,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제회齋會에서 행하는 논의)에 참여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자는 주장을 앞장서서 꺼내 한 떼의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집단행동 하는) 세 가지 이유를 내세웠는데, 첫째는 ‘유직을 부황하는 죄를 주었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고 하였고, 둘째는 ‘재론(齋論, 자치 모임에서 하는 논의)할 때에 가부(可否)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동료들이 모두 나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 모임에서 유직 등의 처벌을 논할 때, 그것을 반대하는 유생들이 집단으로 교실을 비우는 시위(권당捲堂)를 한 상황과 이유를 임금에게 설명한 것이다. 박세채는 유직 등 반대파들의 상황을 더욱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대개 재벌(齋罰, 성균관 유생 자치회의 처벌)로 가벼운 것은 손도(損徒, 일시적인 회원 권한의 제한)이고 무거운 것은 삭적(削籍, 회원명부의 삭제)하거나 부황(付黃, 명부에 노란 딱지를 붙임)하는 것입니다. 이 전례가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찌 꼭 윤기(倫紀, 윤리와 기강)를 범한 다음에야 비로소 부황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반대파들이 유생들의 자치 회의에서) 다른 의견을 세우고자 한다면 쟁론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일찍이 한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다가 물러가서야 뒷말을 하면서 이것을 꼬집어 허물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위에서 말한 ‘재벌(齋罰)’은 즉 성균관 유생들 자치회의에서 문제가 있는 유생에게 제재를 가하는 처벌을 말한다. 이중에 ‘손도(損徒)’는 일시적인 회원 권한의 제한인데, 예를 들면 강의가 있을 때 정식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문밖에서 들어야 하며, 유사(有司) 등의 직책을 맡지 못하는 제한을 받는다. 이러한 손도에 처해졌다가 용서를 받고 벌에서 해제가 되면, 감사를 표하는 잔치를 베풀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손도는 가장 가벼운 처벌이고,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며 선현을 모함한 거짓 상소문을 올린 유직 등은 더 중한 처벌로 삭적(削籍)과 부황(付黃)의 처벌을 받았다. 삭적은 유생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것이고 부황은 그 이름에 노란 딱지를 붙이는 것인데, 노란 딱지가 붙게 되면 평생을 낙인이 찍혀 관직에 진출하거나 유학자로서 활동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박세채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이라는 시위를 하게 된 이유와 그 후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렇긴 하지만 이일은 염우(廉隅, 품행이 바르고 절개가 굳음)에 관계된 것인데, 어찌 스스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여 편안하게 여기고 굳게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따라 나온 것은 대체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들이 전후하여 권당(捲堂, 당을 비움)한 것은 진실로 부득이하여 취한 것입니다. 그 뒤 성상께서 가능한한 조화시키려는 뜻을 두시고 특별히 대종백(大宗伯)을 보내 곡진하게 유시(諭示, 타이르고 가르침)하셨는데, 얼굴을 대하고 명하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명을 받들고 두려운 나머지 즉시 식당(食堂)으로 들어갔는데, (이 말은 권당을 해제하고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하였다는 뜻임-역자주) 먼저 나간 자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끝내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어 바야흐로 주저하고 있을 때 대신이 유직을 부황한 표지를 제거하기를 청하자, 임금께서 성균관에 분부하여 타이르도록 하셨습니다.”

학당을 비우는 시위는 처음에는 유직 등이 시작하였으나, 이윽고 일반 유생들도 어쩔 수 없이 함께하게 된 것이며, 임금이 권당을 풀어라고 사람을 내려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자신들은 권당을 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직 등을 옹호하는 유생들은 아직도 성균관에 복귀하지 않고 있음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유직에 대한 부황의 죄를 해제해줄 것을 대신들이 요구하고 있으며 그것은 임금께서 성균관 관장에게도 분부하신 내용이라는 것을 자신들은 숙지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박세채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유직에게 (부황의) 벌을 추가한 것은 실로 공공(公共, 자치회에서 공적으로 행함)의 논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때 (어지러운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조치 때문에 구차하게 해제하거나 해서는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진이를 모함한 벌에 대해서 더하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는 것은 본래 선비들의 책임이지 결코 대신(大臣)과 조정(朝廷)이 지휘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뒷날 있을 무궁한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감히 명을 받들지 않았던 것인데, 어찌 엄한 비답을 갑자기 내리시면서 준엄하게 말씀하실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박세채는, 유직의 죄를 해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응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는 성균관 내부 유생들, 즉 선비들의 자치조직에서 공적으로 결정한 것이므로 대신이나 조정이 지휘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임금의 명도 그래서 받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임금은 엄하게 교시를 내려 꾸짖으니 이는 유생들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고 한다. 박세채의 말을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임금이 상식에 어긋난 지시를 한 것이다.
박세채의 상소문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대체로 (임금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신하로서는 가장 무거운 죄입니다. (임금께서 일전에 비답으로 교지를 내리신 말씀 중 저희들이) ‘나라 안에 있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는 바로 저희들은 교화(敎化) 밖의 백성입니다. 이와 같은 죄악을 지고는 감히 일각도 성묘(聖廟)의 아래에 숨 쉬고 살 수 없는 바이기 때문에 (저희 유생들은) 시골에 물러가 살면서 공손히 현륙(顯戮, 죄인을 죽여 그 시체를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 여기서 죄인이란 자기 자신들을 의미함.)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번에 성상께서 넓은 도량으로 신들을 포용하시어 여러 번 말씀을 내리셨으므로 신들도 감히 한결같이 물러가 움츠리고만 있을 수 없기에 힘써 도로 (성균관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을 어긴 죄만은 여전히 신의 몸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죄를 범하여 지고 있으면서도 한번 가슴속의 말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끝끝내 임금을 업신여긴 율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생들이 성균관에 다시 들어온 이유와 이러한 상소문에서 그 동안의 과정을 구구절절이 올리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상소문을 마무리 하였다.

“신은 한 말씀을 내려 결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양신(兩臣, 율곡과 성혼)을 어질다고 여긴다면 높여 숭상하는 자가 옳고, 공격하여 배척하는 자가 잘못이며, 만약 양신을 어질지 않다고 여긴다면 공격하여 배척하는 자가 옳고 높여 숭상하는 자가 그른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한번 밝혀지면 간사함과 정직함이 즉시 판명될 것입니다. 이밖에는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통쾌하게 결단을 내려주시어 높여 숭상하고 공격하여 배척하는 사이에서 좋아하고 싫어하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시비가 혼동되지 않고 사정(邪正, 사악함과 바름)이 저절로 판명될 것입니다.”

이러한 박세채의 건의는 효종을 오직 하나의 길로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임금에게 율곡과 성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명한 답변을 해달라는 것이다. 임금의 명쾌한 답변을 기대하면서 올린 상소문이지만 효종으로서는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이미 (그대가) 말하기를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 행한 결정은) 결코 대신과 조정이 지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글을 올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상소를 도로 내어 주라.”

임금으로서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이 문제를 회피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이 상소문을 없었던 것으로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임금의 답변에 상소문을 전달한 관리가 이렇게 말했다.

“유생들의 상소에 답을 내리지 않는 것은 자못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결함이 있는 일입니다. 마땅히 분명하게 비답을 내리시어 상하가 막히지 않게 하고 유생들이 스스로 안정되게 하십시요.”

효종은 나이 30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인조 임금은 효종을 선택하면서 ‘나라에는 나이 먹은 임금’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미 죽어버린 맏아들 소현세자의 아들, 즉 원손이 있었으니 그에게 임금 자리를 주어도 될 일이었다. 혹자는 인조가 소현세자를 암살했다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에게 임금 자리를 주기 싫어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인조로서는 임금의 자리가,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효종은 꿈이 큰 임금이었다. 지금 임금의 자리에 오른지 1년도 안되었지만 그는 북방의 청나라 오랑캐를 정벌할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건장하고, 건강하며, 체격도 좋은, 다분히 다혈질의 임금이었다. 자신이 북벌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다.
효종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서인 쪽 관리들은 율곡과 성혼의 사상에 물들어 임금이라는 존재를 아주 우습게 여긴다. 서인들이 말하는 이기론에는 그러한 사상이 감추어져 있었다. 임금이 정치를 주동하여 이끌 수 없다는 것이다. 임금은 신하들이 정치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그는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청태종(崇德帝, 1592∼1643) 홍타이지가 청나라를 일으키고 천하를 정복하는 과정을 자기 눈으로 직접 지켜본 경험이 있었다. 조선의 어떠한 관리들도 임금 자신만큼 세상을 넓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조정은 이미 서인들의 것이었다.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로 일은 점점 더 커져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행동으로까지 번졌다. 경상도 유생들은 지방에서 서로 편을 나누어 싸우고 있다.
효종은 자신이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이렇게 답을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나와 대신(유생들에게 유직의 죄를 해제해달라고 지시한 대신-역자주)이 다 사체(事體, 일의 큰 맥락. 즉 어떤 일의 경위가 어떻게 어떻게 되어간다는 중요한 내용)에 어둡고 조치를 취함에 마땅함을 잃어 유생들로 하여금 더욱더 불평하는 마음만 갖게 만들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러워 답할 말이 없다.”

이러한 상소문을 올린 박세채(朴世采, 1631∼1695)는 자신의 상소문에 대한 임금의 답변 가운데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음을 알고’ 이에 분개하여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가 분개한 것은 아마도 효종이 자신의 비답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고쳐 말하기 전의 비답, 즉 ‘이러한 글을 올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상소를 도로 내어 주라’라는 말에 분개한 것으로 보인다.
박세채는 이 뒤에 성균관을 자퇴하고 나와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특히 그는 예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송시열, 송준길과도 학문적인 교류를 하였다. 이후 그는 조정으로 불려 나와 효종대에 사헌부집의(執義), 동부승지, 이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의정부 좌의정까지 올랐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상소문의 비답을 듣고 다시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은 “성상의 분부가 간절하여 태학(성균관)에 도로 들어오긴 했으나 이미 명령을 어긴 죄를 졌고 또 (임금께서) 상소를 물리치는 조치가 있었으니, 이대로 현관(賢關, 현자들이 거치는 관문, 즉 성균관)에 거처하고 있을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대궐에서 물러나 성균관으로 돌아가서 성묘(聖廟, 문묘)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 길로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임금은 유생들이 또 권당(捲堂, 성균관을 비우고 나감)하고 나갔다는 말을 듣고, 대신과 비국(備局, 군국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여러 신하를 불러 접견한 뒤에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처하지 못하여 유생들이 지금 또 성균관을 비웠다. 처음에는 나도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근시(近侍, 측근 신하)를 보내어 타일렀는데, 지금은 상소문 속의 말뜻을 보건대 명령을 어겼다고 한 것을 꼬투리로 삼고 안으로 탐색하여 (임금의 마음을) 시험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 유생은 매양 염치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인군(人君, 임금)만 유독 염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답하지 않고 그저 부끄럽다고만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공관(空館, 성균관의 유생들이 감행한 집단시위)까지 할 일인가? 사방에서 보고 들으면 반드시 해괴하게 여길 것이다.”

임금으로서는 정말 참을 만큼 참고 참아서 대답을 안한 것인데, 또 성균관을 비웠다는 이야기에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것이다. 그래서 고위 관리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이들이 나를 시험하려고 한다”고 외친 것이다. 공관(空館)은 성균관 유생들이 할 수 있는 시위 중에 가장 강도가 센 것으로 성균관을 비우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집단파업이고 동맹휴학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그 자리에 있던 우의정 조익(趙翼)이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유생들은 본디 지휘해서는 안 됩니다. 또 위협해서도 안 됩니다. 특별히 포용하는 아량을 보여 온화한 비답을 내리시면, 저 유생들이 어찌 끝끝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대사성 이후원(李厚源)은 임금에게 이렇게 성균관의 상황을 전했다.

“제가 사장(師長, 성균관의 정3품 당상관직으로 성균관 관장)의 자리에 있지만 유생들의 논의에는 전혀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상소의 말이 어떠했는지 몰랐는데, 공관(空館)한 뒤에 그 뜻을 재임(齋任, 자치회 대표)에게 물어보니, 그가 말하기를 ‘상께서 명령을 어긴다는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감히 현관(賢關, 성균관)에 거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돈독하신 유시가 세 번이나 이르렀으므로 할 수 없이 들어왔으나, 이미 명령을 어긴 죄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략 소장을 진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비답은 내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유생들은 감히 태연하게 재(齋, 숙소)에 거처하지 못하고 서로 더불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말을 듣고 임금은 마음이 조금 누그러져 이렇게 말했다.

“향당(鄕黨, 지방)에서 사심 없이 좋아하는 자들도 양신(兩臣, 율곡과 성혼)을 어질다고 말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사(從祀)하는 일은 중대한 예전(禮典)이니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 유생들의 이 행동이 어진이를 높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실은 노리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도리상 어찌 피차(彼此)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두어 치우친 일을 하겠는가? 나도 전에 태학(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지금 태학에 직숙(直宿, 직접 거처)하면서 인(仁)에 처하고 의(義)를 실천할 계획을 하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결코 돈독히 타이를 수 없다.”

임금의 이러한 말을 듣고 이기조(李基祚)·박서(朴遾) 등이 이렇게 건의했다.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입니다. 사기(士氣, 선비들의 기개)를 북돋아 세우는 것이 임금이 할 도리입니다. 선비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사람마다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임금이 자칫 성균관의 유생들을 자기 뜻대로 몰아서 혹시 처벌을 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이런 건의를 한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도 상황에 따라서는 임금을 고통스럽게 몰아칠 수 있기때문에, 젊고 혈기가 왕성한 임금이 이일에 직접 나서는 것은 또 다른 불씨를 만들 위험이 있었다.
효종은 관리들이 나서서 경계를 하는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같은 자리에 있는 이후원(李厚源, 1598∼1660)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후원은 당시 효종의 최측근으로 임금의 북벌모의에 참모가 되어 전함 200척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유생들이 자기들의 뜻을 펼 목적으로 번번이 이런 식으로 임금을 협박할 계획을 하니, 이런 폐단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나보다는) 경의 뜻으로 타이르는 것이 온당하겠다.”

성균관 유생들의 공관 소동은 이로서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