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문묘종사 찬성파 유생들의 반박

5. 문묘종사 찬성파 유생들의 반박

 

유직 등의 상소문이 임금에게 전달된 뒤, 두 달 정도 조정은 문묘 종사와 관련하여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겉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5월 1일, 경상도의 진사(進士) 신석형(申碩亨) 등 40여명이 상소문을 올려 유직 등이 율곡과 성혼을 헐뜯는 상소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아, 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두 현신(賢臣)의 탄생지는 신들이 거주하는 곳과는 5백여 리나 떨어져 있고 세대 또한 오늘날과 거의 60여 년이나 차이가 납니다. 그러한 까닭에, 지금 세대에 그들의 전형(典刑)을 실제로 접할 길이 없고 보면, 오직 그들이 남긴 문집을 통해서 그들의 언행과 도덕을 살펴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안목을 갖춘 자가 없고 보면 그 학덕(學德)의 높고 낮음과 완전하고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본래 누구든지 감히 가볍게 논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선 유직(柳㮨)의 상소문 가운데 크게 문제되는 것을 거론하여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면 신석형 등 40여명은 모두 경상도 지역에서 사는 유생들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직도 경상도의 유생이었는데, 유직은 900여명이나 되는 유생들의 대표였고, 신석형은 40여명을 모아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그는 윗 글에 이어 이렇게 말했다.

“신들이 살피건대, 이이(李珥)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찾아가 만난 것은 무오년(1558, 명종 13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이이의 나이가 23세였는데, 이황이 즉시 문인(제자) 조목(趙穆)에게 글을 보내기를 ‘후생가외(後生可畏, 뒤의 난 사람은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했는데, 옛 성현이 나를 속이지 않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 해에 이황이 이이에게 보낸 답서에 ‘나이가 늙고 기력이 약한데다 사방에서 벗을 취하여 스스로 도움이 되게 하지 못한 까닭에 늘 바라보고 기다리던 참에 두 장의 편지가 왔소. 이를 나의 약석(藥石, 잘못을 지적하고 주의를 주어서 그것을 고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말)으로 삼기에도 (내 자신이) 채 미치지 못할 형편인데, 도리어 이 귀머거리에게 얻어 들으려 하다니 어찌된 일이오?’”

여기에서 신석형은 율곡이 퇴계를 찾아가 만난 일을 소개하고, 퇴계가 율곡을 만나보고 ‘뒤에 난 사람은 두려워할 만하다’고 옛사람들이 말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는 것을 퇴계가 언급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서신 답장을 인용하였다. 퇴계가 율곡의 글을 읽고 그 글을 자신의 ‘약석’으로 삼기에도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데 또 무엇을 묻는 것이요,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약석(藥石)이란 도움되는 말이나 가르침을 말한다. 말하자면 퇴계는 율곡의 사람 됨됨이와 학문을 높게 평가하였다는 것이다. 이어서 상소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퇴계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인과 세대가 멀어 그 말씀이 인멸된 까닭에 이단(異端)이 진리를 어지럽힌 결과, 옛날의 총명하고 재주가 걸출한 인사들도 시종 미혹되었는데 이것이야 본래 논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호(程顥)와 장횡거(張橫渠, 본명은 張載), 그리고 주희등 여러 선생까지도 거기에 약간은 드나들지 않을 수가 없게끔 되었다가 곧바로 그 잘못됨을 깨달았던 것이오. 아, 천하에 큰 용기와 큰 지혜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그 거센 물결을 벗어나 진리의 물줄기로 어떻게 되돌아 올 수 있겠소.
지난날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족하(足下, 편지에서 남을 높여 부르는 말)가 석씨(釋氏, 석가모니 즉 불교)의 글을 읽고 상당히 중독되었다고 하기에, 마음으로 애석하게 여긴 지 오래였소. 그런데 전일 나를 찾아왔을 때 그러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잘못됨을 말하였고, 지금 두 편지의 취지를 보아도 또 이와 같으니, 족하는 더불어 함께 도에 나아갈 만한 사람임을 내가 알겠소. 다만 두려운 것은 새 맛이 붙기 전에 옛맛을 잊기 어렵다는 점과 오곡이 익기 전에 돌피가 먼저 익지 않을까 하는 점이오’.
또 퇴계가 말하기를 ‘나의 경우 처음도 그랬소만 늙어갈수록 더욱 덧없이 생애를 보내지 않을까 늘 두렵기만 한데, 훌륭한 군자를 바라는 마음이 배고프고 목마를 때보다 더하다오’라고 하였습니다.”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편지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당시 유학자로서는 원로에 속했던 퇴계가 이제 겨우 20대인 젊은 율곡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유직이 말한 것과는 달리 퇴계가 율곡을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하고, 또 기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유직의 말처럼 율곡이 불교에 빠져서 허황된 환상을 하고 있었으면 이러한 편지를 퇴계가 쓸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신석형은 “그런데 유직 등은 이 편지의 위아래를 잘라 버리고 ‘새 맛이 붙기 전에’ 이하의 네 구절만을 거론하여, 이황이 깊이 염려하고 통렬하게 경계한 말이라고 핑계를 대었습니다”라고 임금에게 호소를 하였다.
아울러 유직이 퇴계와 율곡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거짓말을 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그 뒤에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논한 이이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인설도(仁說圖)는 심학도(心學圖) 앞에 있어야 한다는 그 견해가 매우 뛰어나오. 내가 지난해 돌아와서야 그렇게 되어야 옳다는 것을 알았는데, 보내온 글을 받고 더욱 확신하게 되어 즉시 그대로 순서를 바꾸었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양현(兩賢)이 평소 학문을 하면서 계오(契悟, 납득)된 것이 이보다 클 수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직 등은 ‘털끝만큼도 계오된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유직 등의 상소문을 보면 퇴계는 율곡에 대해서 전혀 공감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묘사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유직 등 반대파 유생들이 사실을 왜곡한 것이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논박한 것이다. 또 율곡이 퇴계를 변호하여 선조 임금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호소한 사실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이황이 경오년(1570년, 선조 3년)에 죽었는데, 계유년(1573년, 선조 6년)에 여러 신하가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자, 위에서는 그의 행장(行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 없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이이가 아뢰기를 ‘이황은 일생 동안 의리의 학문(즉 성리학)에 침잠(沈潛)하였는데, 그의 논의와 풍모는 옛 명현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행장의 유무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죽은 현인에 대해서 그 행적이 이미 드러나 있는데도 존숭하고 기리는 일을 아끼시는데, 현재 (살아 있는) 선비들에 대해서 어떻게 현인을 좋아하는 성의를 가지실 수 있겠습니까? 이황의 시호가 한두 해 늦더라도 크게 해로울 것은 없지만, 온 나라의 선비들이 전하께서 현인을 좋아하는 성의를 갖고 있지 않다고 의심한다면, 그 해로움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 하였습니다.”

퇴계의 시호를 임금으로부터 받는 일에 율곡이 나선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 당시 선조 임금이 퇴계의 행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호를 내리지 않는 것을 율곡이 상소를 올려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퇴계를 변호한 일을 들어 유직의 상소문이 문제가 있음을 논박하였다.
그리고 신석형은 율곡이 퇴계의 문묘 종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임금에게 ‘교화를 밝히려면 반드시 선현을 높이고 추장(推奬, 추천과 장려)하여 후학이 모범으로 삼도록 해야 합니다. 예컨대 조광조(趙光祖)는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했고 이황은 이학(理學)에 침잠했으니, 먼저 종사(從祀)할 것을 윤허하시어 선비들의 소망을 진작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말하였음을 상기시켰다. 그런데도 유직 등은 ‘이황이 죽은 뒤에 이이가 모든 힘을 다하여 이황의 학문을 공격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들의 상소문은 근거가 없는 것이 구절마다 모두 왜곡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사칠논변을 둘러싼 논의에 대해서도 신석형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 대해서 이이와 성혼이 함께 주자의 말을 가지고 토론한 바가 있었습니다. 성혼은 이황의 견해를 옳다고 하고 이이는 이황의 견해를 정견(正見, 올바른 견해) 중의 한 점의 티끌이라고 여겨 기대승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성혼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기대승의 학문을 어찌 감히 퇴계와 견주겠는가? 기대승이 단지 약간의 재지(才知, 재능과 지식)가 있어 우연히 그것을 알게 된 것일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이는 본래 주자에 대해 이론을 세우지 않고 단지 이황의 견해에 대해서만 시비를 가렸습니다. …… 그런데 유직 등은 이이의 글 가운데 ‘어떻게 주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朱子)’ 등의 말을 인용하여 전현(前賢, 앞의 현인 즉 주자)을 헐뜯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孔子)’라는 맹자의 말도 공자를 헐뜯은 말이라고 하겠습니까?”

퇴계와 고봉 기대승의 사칠논변은 퇴계가 먼저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 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퇴계의 ‘이기호발설’이다. 리도 발동할 수 있고, 기도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고봉이 사단이나 칠정이 모두 같은 인간의 감정에 속한 것으로 여기에서 리와 기를 분리하여 논한 것은 잘못이라고 논박하였다. 율곡은 이것을 소개하면서 나중에 자신의 이기론을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즉 기가 발동하면 리는 거기에 편승하는 것이다라고 정리하였다.
신석형은 율곡의 이기론에 대해서는 정확히 소개하지는 않고 단지 유직 등이 ‘어떻게 주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朱子)’한 말에 대해서 논박하였다. 이 말은 율곡이 만약에 ‘주자가 리와 기는 각각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본다면 어떻게 주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식의 말은 맹자도 ‘어떻게 공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孔子)’라고 한 적이 있으며, 이는 단순히 자기 의견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수식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신석형은 율곡의 이기론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유직 등은 알지 못할 이야기를 억지로 지어내어 외람되게도 자격을 심사하는 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들이 말한 ‘이기(理氣)는 일물(一物)이며 심(心)은 곧 기(氣)’라는 등의 말은 본래 이이의 문집에는 보이지도 않는데, 오늘날 그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말로 만들어 내어 후학을 속이고 상을 현혹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묘하게 (율곡의 사상을 왜곡) 하려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 후미진 곳은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를 어떻게 속일 수 있겠으며, 알지 못하는 자야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아는 자를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유직 등이 ‘이기는 일물(一物)이며, 마음은 곧 기(氣)’라는 율곡의 문집에도 없는 말을 만들어내어 율곡의 이기론을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율곡의 이기론은 이기지묘(理氣之妙), 이통기국(理通氣發), 이승기발(理乘氣發) 등 상당히 복잡하고 깊이 있는 논의가 많다. 사실 유직 등은 그러한 이기론을 상세히 소개하지 않고, 단순화하여 그렇게 정리하여 상소문을 올린 것인데, 이에 대해 신석형이 반박한 것이다. 신석형은 율곡의 사상을 이렇게 단순화함으로써 율곡 사상을 왜곡하고 임금과 나라 전체를 속이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신석형은 율곡의 이기론에 대해서는 유학자 장현광(張顯光, 1554년∼1637년)의 사례를 들어 다음과 같이 변호하였다.

“본도(本道, 경상도)의 고 판서 신(臣) 장현광은 근세의 대유(大儒)로서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어 사류(士類)의 추앙을 받은 지 오래입니다. 그가 지은 ‘경위지설(經緯之說)’은 이기(理氣)를 철저히 논하면서 종횡으로 무려 수천만 언을 논했는데, 모두 이황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이이와 부합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찍이 후학들 중에서 그가 이황의 학문을 공격했다고 의심한 자는 아직 없었고 보면, 저 유직 등의 말이 과연 어느 곳의 사람에게서 받아 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이에 이르러 선현이 극도로 무고를 당했고 본도(경상도)의 이름이 헐값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성혼의 경우는 이기를 변론한 것이 실로 이황을 위주로 한 것이니, 이 또한 이황의 견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직 등이 이이의 학문과 동일하다고 말하면서 배척하니, 이는 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장현광(張顯光)은 경상도 구미 지역의 유학자로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 인물이다. 그는 율곡의 ‘기발이승(氣發理乘, 기가 발하면 리는 거기에 탄다)’을 수용하여 이기(理氣) 일본설(一本說)을 주장하고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장현광에 대해서도 후학들은 이의를 제기한 바 없는데 유직 등은 무엇을 근거로 율곡이 퇴계의 학문을 공격하였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아울러 퇴계의 주장을 따른 성혼의 경우도 비판한 것을 보면 유직 등은 전혀 근거없이 두 선현(율곡과 성혼)을 무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석형은 율곡과 성혼에 대한 이러한 무고가 이전 임금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보고 그 유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처음에 이이가 승려였다고 헐뜯으면서 ‘사마시(司馬試) 때에 알성(謁聖)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계미년에 올린 송응개(宋應漑)의 질투 어린 상소문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혼을 처음으로 무함하여 ‘(성혼이 임진왜란 때 북쪽으로 피신하는) 임금을 버리고 선비를 해쳤다’고 한 것은 이홍로(李弘老)와 정인홍(鄭仁弘)이 거짓으로 지어내서 모함한 이야기였습니다.
송응개는 선조 대왕께서 이 때문에 친히 교서(敎書)를 지어 유배시켰습니다. 그리고 이홍로와 정인홍은 평소에 근거없이 무함한 사람이 성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끝내는 국가의 처벌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 선비의 신분으로서 …… 자꾸 헛소문이라도 퍼뜨리면 사실로 인정되더라는 과거의 일만 다행으로 여기고서, 또 오늘날 다수의 세력을 동원하여 (두 현인을) 매장시키려고 하니, 그 버릇이야말로 가증스러운 것으로서 이러한 풍조는 결코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글에서 신석형은 율곡을 비난한 송응개의 사례, 그리고 성혼을 모함한 이홍로와 정인홍의 사례를 들어 유직 등의 상소가 근거 없음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는 퇴계와 율곡, 그리고 성혼의 위상을 자기 나름의 판단으로 이렇게 표현하였다.

“대개 우리나라에서 퇴계 이황은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에 비유되고 율곡 이이와 성혼은 주희와 장식(張栻, 1133∼1180)에 비유됩니다. 후학이 주돈이와 정자는 받들면서 주희와 장식을 배척하는 것은 실로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기하고 편벽된 풍조의 결과로 번번이 이황을 편들고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려고 합니다. 그 단서와 결말을 따져 물어보지도 않고 비슷하지도 않은 말을 억지로 만들면서 흉악하게 참소한 무리들의 후예에 같이 뒤섞이게 된다는 것을 돌아보지도 않으니, 아, 또한 괴이한 일입니다.”

이 구절은 상당히 유명한 말로, 신석형의 입장에서 퇴계와 율곡‧성혼을 평가한 것이다. 퇴계는 주자학의 기초를 놓은 주돈이와 정호‧정이 형제들과 같고, 율곡과 성혼은 남송의 유학자 주희와 장식에 유사하다고 하였다. 주돈이와 정씨 형제는 북송시대 사람으로 성리학의 기초가 되는 이론의 틀을 완성한 인물들이다. 주희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유학자고, 장식은 도학(道學)의 대가로 스승인 호굉(胡宏, 1105∼1161)의 학문을 이어받아 송대 호상학파(湖湘學派)를 이끌었다. 주희와 자주 논쟁을 벌여 사상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신석형의 상소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집에서 나누는 대화나 한가로운 이야기라도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믿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선현과 관계된 일로 한 지역을 대표하여 임금에게 고하면서 이렇듯 믿지 못할 근거 없는 말을 하다니, 정말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비록 한두 사람의 주장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도(道, 경상도) 전체 선비들을 규합시켜 아무도 다른 의견을 내놓지 못하게 하고 온통 그 와중에 휩쓸리게 한 것을 보면 영남 사림의 크나큰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도리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신들이 오늘날 말씀드리는 것이야말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너그럽게 살펴주십시요.”

이러한 긴 상소문에 대해서 효종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답변을 하였다.

“상소문을 보고 잘 알았다. 그대들이(신석형과 유직 등을 말함-필자) 서로 배척하여 끝없이 분란을 조성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까마귀의 자웅을 가리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임금은 신석형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상소문에 대해서, 그리고 신석형이 보기에는 유직 등이 올린 거짓과 왜곡 투성이의 상소문에 대해서, ‘모두 똑같다’라는 매정한 평가를 하였다. 이러한 임금의 판단은 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공평치 못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