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유생들의 반론

4.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유생들의 반론

 

다음해, 즉 효종 1년 2월 22일, 경상도 진사 유직(柳稷) 등 9백여명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해 11월 성균관 유생들이 율곡의 문묘종사를 건의했을 때는 ‘수백명’ 규모였으나 이번에는 그 숫자가 더욱 늘었다.
유직(1602년; 선조 35년∼1662년; 현종 3년)은 1630년(인조 8년) 진사시에 합격한 인물로, 하급관리로 임명되거나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있었으나 그 길을 선택하지 않고 지방에서 역사서를 읽고 『중용』, 『대학』의 연구에 힘쓰고 있었다.
그는 영남지역에서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의견이 일어나자, 유생들을 모아 서울로 올라와 유생들 대표로 상소를 하였다.

“근래에 홍위(洪葳)와 이원상(李元相) 등이 여러 차례 소장(疏章)을 올려서 고(故) 문성공(文成公) 이이와 문간공(文簡公) 성혼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신들은 삼가 의혹스럽게 생각합니다. 아, 성묘(聖廟, 문묘)가 어떤 곳이며, 두 신하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대체로 두 신하를 문묘 종사의 반열에 청하는 것은 그들의 어짐을 가지고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실상을 논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시험 삼아 두 신하의 출처(出處)와 도덕(道德)이 어떠한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하나 옛날의 현인에 부끄러움이 없습니까? 두 신하가 살던 시대가 이토록 가까워 보고 듣는 바로 그들의 사람됨을 알 수 있으니, 현부(賢否, 현명한지 여부)와 시비(是非, 옳고 그른지)의 구분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유직 등은 이렇게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에 의문을 표하고 두 선현의 출처와 도덕을 조사해볼 것을 임금에게 제안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율곡과 성혼의 문제점을 나열하였다.

“요컨대 두 신하는 역시 한때 이름난 사람들이었으니 어찌 한두 가지 일컬을 만한 일이야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평생을 살펴보면 결점이 매우 많습니다. 사람을 논하는 법은 반드시 대절(大節,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이 우선입니다. 그것이 손상되었으면 나머지는 족히 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이가 천륜(天倫, 부자 형제간에 지켜야 할 도리)을 끊고서 불가(佛家)에 도망하여 숨은 것은 참으로 유학의 가르침에 죄를 얻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그는 사마시에 뽑혔지만 성묘(聖廟, 문묘)에 배알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혼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서도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이 (북쪽으로) 피신하던 날 임금에게 달려오지 않은 것은 참으로 왕법에 용서받지 못할 바입니다. 이 일로 선묘(宣廟, 선조 임금)께서 내린 준엄한 하교(下敎, 가르침)가 어제의 일 같습니다.”

율곡에 대해서는 율곡이 젊어서 불교에 입문한 적이 있었다는 점을 들고, 성혼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의 피난 행차가 자기 집 가까이 왔음에도 찾아보지 않은 점을 들었다. 성혼의 일은 나중에 성혼을 모함하기 위해서 왕 주위의 신하들이 거짓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유직 등은 이를 들어 문묘 종사를 반대한 것이다. 유직 등 영남 유생들은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없으며, 의로우면서 그 임금을 소홀히 하는 자는 없습니다. 다른 일은 논할 것도 없이 이 한 가지만으로도 족히 두 신하에 대한 단안(斷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거)이 됩니다”라고 하여 이 두 가지가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율곡에 대해서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추가로 들었다.

“그 이외에도 (율곡이) 충현(忠賢)을 교묘하게 헐뜯고, 붕당을 그릇되게 비호하였으며, 걸핏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실무(實務)라고 하고 여론의 향방을 마음대로 조정하여 족히 위세를 드날렸지만 한 일과 말들은 한쪽으로 치우치고, 꼼꼼하지 못하고 엉성한 점을 면치 못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마음 중에 크게 의심스러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겉으로 보이는 일면일 뿐입니다.”

이 정도라면 유직 등은 사실상 율곡의 거의 모든 점에서 이의를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율곡이 충신을 헐뜯고, 2) 붕당을 비호했으며, 3) 여론을 왜곡하고, 4) 일과 말이 편파적이고, 5) 일 처리도 엉성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유생들은 율곡의 학문을 이렇게 정면으로 비판했다.

“학문의 폐단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욱 큰 것이 있습니다. 이이(율곡)는 일찍이 이교(異敎, 즉 불교)를 섬겨서 그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엽등(躐等, 등급을 건너뛰어 올라감)하기를 좋아하여 진실한 길을 가지 못한 채 허황된 환상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유가(儒家)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면목(面目)을 바꾸어 그 설을 스스로 성취시켰습니다만,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도 일찍이 이를 깊이 염려하고 엄히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새 맛이 붙기 전에 옛맛을 잊기 어렵고, 오곡이 익기 전에 돌피가 먼저 익는다.’ 이러한 말씀은 참으로 그 뜻이 깊은 것입니다.”

율곡이 불교를 잊지 못하고, 그 논리를 따라서 단계적인 접근보다는 직관적인 깨달음을 중시하고 허황된 환상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 맛이 붙기 전에 옛맛을 잊기 어렵고, 오곡이 익기 전에 돌피가 먼저 익는다(新嗜靡甘, 熟處難忘, 五穀之實未熟, 稊稗之秋遽及)’(『퇴계집』 권16 답이숙헌答李叔獻)라는 이 말은 율곡의 편지에 퇴계가 답장을 하면서 건넨 말이었는데, 율곡의 어설픔을 비판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사실 퇴계는 율곡의 의욕과 솔직함을 높게 평가하면서 이러한 점을 경계하라고 격려하는 뜻으로 이 말을 한 것이었다.
경상도 유생들은 또 율곡의 사상에 대해서도 이렇게 비난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오로지 기(氣)자만을 주장하여 기를 리(理)로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리와 기를 같은 것으로 여겨 서로 분별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마음이 바로 기이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모두 기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병통의 근본은 원래 도(道)와 기(器)를 구별하지 않은 육구연(陸九淵)의 견해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폐해는 작용(作用)을 본성(性)의 본체(體)라고 한 석씨(釋氏, 불교)의 주장과 같습니다. 대체로 리와 기의 분별은 바로 학문의 생사(生死)가 걸린 갈림길입니다.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정밀한 한계와, 유교와 이단(異端)의 다른 점과 옳고 그름이 모두 여기에서 판가름 되는 것입니다.”

율곡의 이기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유적 등이 ‘오로지 기(氣)자만을 주장하여 기를 리(理)로 알았습니다’라고 한 말은 완전히 정확한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율곡은 ‘이기지묘(理氣之妙)’, 즉 리와 기의 교묘한 결합을 주장하기는 하였으나 기를 중시한 것은 사실이었다.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즉 ‘기가 발동하면 리가 거기에 편승한다’는 주장은 율곡의 대표적인 이기론 사상이었다.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에서 생긴 것, 즉 기에서 발동한다고 본 것도 사실이다. 퇴계는 사단은 리에서 발동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동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 율곡은 사단이건 칠정이건 기에서 발동하며, 리는 기에 편승하는 것뿐이라고 보았다. 유적 등은 율곡의 이기론이 육구연의 사상, 즉 심학 사상이나 불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비판했으나 이기론은 미묘하지만 왕권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하고도 관련된 것이었다. 이 문제는 다음으로 미루고 경상도 유생들의 주장을 더 살펴보기로 한다.

“이황은 도(道)의 본체(體)를 분명하게 보고, 인성에 대해 힘써 공부하여,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정이(程頤)로 전해져온 은미한 뜻의 근원을 추적하여, 주희가 이미 천명해 놓은 요점을 밝혀서 천명도(天命圖)와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를 지었습니다. 이를 통해 본체(體)와 작용(用), 드러남(顯)과 감추어짐(微)을 섬세하고도 극진하게 규명하였고, 사단과 칠정의 구분에 있어서도 더욱 그 묘를 다하여, 천고의 숨겨진 자물쇠를 열어 놓았습니다. 이는 백세 이후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의혹됨이 없을 것입니다.”

이 문장을 살펴보면, 유적 등 유생들이 율곡을 비판하면서 퇴계 이황을 올바른 사상을 가진 유학자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유적 등이 퇴계의 사상을 중시하고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는 남인측 유생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율곡과 퇴계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상세히 진술하였다.

“이이(율곡)는 평소 이러한 점을 털끝만큼도 깨달음이 없이 흐리멍덩하게 묵은 학문에 떨어져 있다가 이황(퇴계)이 죽은 뒤에 이황의 학을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였습니다. 그(율곡)의 학설이 모두 그의 문집에 있으나 종횡으로 잘못된 것들을 모두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황의 말을 지적하여 리(理)를 해친 것이라 하는가 하면 이황의 말은 본성(性)을 모른 것이라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주자가 참으로 리와 기가 호발(互發, 서로 발동함)하여 각기 상대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주자도 잘못한 것이니 어찌 주자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렇게 편견과 착각으로 감히 전현(前賢, 앞선 현인)을 이토록 헐뜯을 수가 있습니까? 삼가 주자의 설을 살펴보면 리(理)가 있은 연후에 기(氣)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리와 기는 결단코 둘이며 ‘사단(四端)은 리에서 발동(發)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동(發)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리와 기가 호발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자의 정론(定論)이 이토록 명백한데도 오히려 믿지 않았습니다. 이황의 학은 바로 주자의 학이었으니 이이에게서 배척을 당한 것은 당연합니다.”

유직 등은 율곡이 퇴계 사후에 퇴계를 공격하였으며, 그의 학설에 잘못이 많다고 지적하고 퇴계가 이기 호발을 주장하였고, 또 사단은 리가 발동한 것이며,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라고 주장한 사실을 임금에게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퇴계는 주자를 정확히 따른 것이고, 율곡은 주자를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율곡의 사상이 주자를 배척하였다는 것은, 서인측 유학자들이 볼 때 분명히 율곡사상을 오해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경상도 유생들의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거짓이고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율곡의 사상이 리보다는 기를 앞세운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리를 배제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이러한 이기론은 미묘하게도 왕권을 어떻게 보느냐 하고도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왕은 무슨 일을 할때나 등 뒤에 <일월오봉도>를 놓는다.

임금의 권위를 나타내는 일월오봉도

<일월오봉도>는 임금의 권위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보통 병풍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병풍은 임금이 그 앞에 자리를 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의 의미가 완성된다. 즉 일월은 음과 양을 나타내고, 오봉, 즉 다섯 봉우리는 오행이다. 그리고 임금의 자리는 이러한 것들을 통합하고 거느리는 태극의 자리다. 임금은 바로 태극이라는 것이다. 임금이 임금으로서 공적인 일을 할 때 반드시 이 병풍을 뒤에 놓는 것은 우주 만물의 중심인 태극으로서, 그리고 삼라만상의 생성과 변화를 주관하고 상징하는 태극으로서의 임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임금의 활동은 우주의 가장 큰 원리 즉 태극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태극은 또 ‘리(理, 원리 혹은 이치)’로 표현된다. 반면에 음양과 오행 등 물질적인 것들은 기이다. 따라서 임금은 리이며, 임금 이외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기라고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임금은 리, 신하들은 ‘기’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기론은 바로 이러한 내면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경상도 유생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에서 이기론을 이렇게 논하는 것은 그 이면에 상징으로서 리와 기의 문제가 있기때문에 사실은 매우 미묘한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주자의 설을 빌려서 ‘리(理)가 있은 연후에 기(氣)가 있다’고 하는 말은 ‘임금이 있은 연후에 신하들이 있다’는 말로 바꿔 이해할 수 있으며, 퇴계의 말을 빌려서 ‘사단(四端)은 리에서 발동(發)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동(發)한 것이다’고 하는 말은 ‘사단과 같이 순수하고 도덕적인 마음은 임금에게서 나오고, 칠정과 같이 순수하지 못한 마음은 신하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기호발(理氣互發)’이라는 말은 임금도 발동할 수 있고, 신하들도 발동할 수 있다, 즉 임금도 정치적인 활동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할 수 있고, 신하들도 그럴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율곡은 ‘이기호발’을 부정하고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신하가 발동하면(활동을 하면), 임금은 거기에 편승한다’고 해석될 수 있으며, 심하게는 임금은 단지 신하들의 활동에 의지해서 움직이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이러한 미묘한 문제를 경상도의 퇴계학파 유생들이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성혼의 학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성혼(成渾)의 학은 대체로 이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른바 ‘리와 기는 같이 발한다’는 등의 말은 필경 큰 근본에 깨달은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학문을 논하는 상소에 애초 궁리(窮理)나 격물(格物)에 관한 일을 강구하여 밝힌 것은 없고, 다만 정신을 보존하고 아껴야 한다는 말로 제일의 법문(法門)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바로 도가(道家)의 유파에 해당되는 것으로 ‘자사자리(自私自利, 자기 이익만 챙기는, 즉 매우 이기적인)’의 설이니, 우리 유가에서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이는 본래 한쪽으로 치우친 학술을 수용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재기와 역량이 이이의 수준에 비해 높지 않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혼의 학문에 대해서는 그가 도가의 영향을 받아 이기적이며, 학문 수준이 율곡에 못미친다는 정도로 그치고 더 상세한 논의는 하지 않았다. 이어서 유직 등은 율곡와 성혼의 문묘 배향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했다.

“두 신하의 행적을 상고해 보면 천륜을 어겨 풍교(風敎, 풍속과 가르침)를 손상시키고, 도(道)를 문란하게 하여 성인의 법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성묘(聖廟)에 배향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는 사체(事體, 일이 벌어진 상태)가 중대한 것으로, 일시적으로만 받드는 것이 아니라 백세토록 우러러 받들게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천하에 지극히 합당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어찌 그 사람됨을 논하여 실상을 따지지 않고서 당파를 비호하고 억지로 끌어대어 합당하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못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지적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경상도 지역의 퇴계학파 유생들과 한양에 있는 율곡 및 성혼의 제자들의, 서로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당시 조정을 담당하고 있는 양대 세력인 서인과 남인의 싸움이다. 유직 등은 계속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지난 을해 연간(1635년, 인조 13년)에 송시형(宋時瑩) 등이 처음에 이런 요청(율곡의 문묘 종사 건의)을 했었습니다. 성학(聖學)이 고명하신 인조 대왕께서는 이를 의연히 물리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성인(聖人, 인조)이 하신 일이 일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데서 나왔으므로 참으로 영원히 바꿀 수 없는 법이라 할 것입니다.
당시의 비답(批答, 임금이 답변)이 간곡할 뿐 아니라 통쾌하여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칭송되고 있어 (저희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동되고 격앙됩니다. 아, 인심의 향배와 사습(士習, 선비들의 풍속)의 사정(邪正, 옳고 그름)이 모두 그 시초에 달렸습니다. 숭장(崇奬, 숭상하고 장려)하는 일이 한번 잘못되어, 추종하여 휩쓸리거나 등을 돌려 방황해서 다시 바르게 되지 못하면, 장차 위로는 선성(先聖, 앞선 임금)을 욕되게 하고 아래로는 후학을 그르쳐 우리 도(道)의 연원이 종식되게 될 것입니다.”

인조 임금 때 송시형 등이 건의한 문묘 종사 건의를 임금이 거부한 사례를 들고, 문묘 종사를 결정하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는 자들은 예전에 인조 임금이 내린 훈시는 무시하고 자신들의 의견은 정론으로 삼고, 이에 반대하는 의견은 잘못된 여론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이제 이 논의를 주장하는 자는 일체 자기가 좋아하는 바에 아부하여 성고(聖考, 돌아가신 임금)의 큰 훈시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또 백세의 공의(公議)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는가 하면 유림의 정론(正論)을 사론(邪論)으로 지적하고 온 나라가 분리된 것을 귀일(歸一)되었다고 지목하면서 중대하기 그지없는 법을 힘으로 도모할 수 있다고 하며 서로 견강부회(牽强附會, 근거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게 맞춤)하며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워서 감히 아무 말도 못하고 위세만 점차로 더해가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신들은 오늘날 이 일이 시의(時議)에 용납되지 못할 줄을 알지만, 인심은 속이기 어렵고 천리는 지극히 공정하니, 격발한 중론(衆論)을 전하에게 아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의리의 바름을 깊이 생각하시어 참람하고 망령된 요청을 통렬히 물리쳐 주십시요.”

이러한 유생들의 상소에 효종은 “상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얼마 뒤, 한양의 성균관에서는 이러한 상소문을 올린 유직의 이름을 유적(儒籍, 유학자들의 명부)에서 삭제하였다. 그리고 부황(付黃)의 벌까지 내렸다. 부황의 벌이란, 성균관 유생들이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할 때에 노란색 종이에 그 관리의 이름을 써서 붙이던 일을 말한다. 혹은 성균관 유생들이 내부 규정을 위반한 경우에 그 사람의 이름에 노란색 종이를 붙이는 벌을 뜻한다. 이러한 벌을 받으면, 직책이 비록 정승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감히 조정에 서지 못하였는데, 이는 사론(士論, 선비의 여론)을 중시하고 사기(士氣, 선비의 기개)를 배양하기 위한 것이었다.(『효종실록』 6년 10월 24일) 이러한 부황의 벌은, 비리를 범한 관료나 유생에 대해 표시를 하여 이들의 등용을 막아, 부정과 비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후기 이후에 이 벌은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는 유적의 삭제보다 중벌로 인식되었으며, 일단 이런 벌을 받으면 사류(선비들 무리)에도 낄 수 없었다.
유직은 이일이 있던 이후에, 자기 집에 ‘백졸암(百拙庵)’이라는 편액(扁額)을 걸고, 문을 닫아 세상일에 뜻을 버렸다. 그는 나중에 성균관에서 ‘부황’의 벌을 해제해줄 것을 상소하였으며, 처벌을 해제 받았다. 그러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