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리와 기

4. 리와 기

 

가. 리

‘리(理)’는 보통 ‘이치’라고 번역한다.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리를 ‘이치’로 번역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최근에는 ‘리’로 그대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리’란 우리나라의 말 ‘이치’와는 또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리’는 중국 철학에서 탄생한 단어로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회 환경에서 출발한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현실과는 괴리가 존재한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역시 ‘리’라는 발음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철학에서 ‘로고스(logos)’라는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로고스’라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

참고로 ‘로고스’는 그리스어로 ‘λόγος’, 영어로 ‘logos’이며 그 뜻은 ‘말’, ‘이야기’, ‘어구’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통로, 혹은 이성(理性)으로 사용되기 도 한다. 또 ‘기준’, ‘비율’의 뜻도 있으며, 이법(理法)이란 의미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도 이 말이 사용된다. 요한복음 제1장 1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에서 말씀은 영어 ‘Word’의 번역어인데, 그것은 또 그리스어 로고스(‘λόγος’)의 번역어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로고스’라는 것이다. 성리학에서 기초개념으로 통하는 ‘리(理)’는 서양철학에서는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 리의 대응개념은 로고스이며, 로고스의 대응개념은 리이다. 물론 이 두 단어는 그 뜻도 다르고 개념도 전혀 다르다. 동서양 문명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그러나 양 문명의 철학사상에서의 중요도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리(理)’는 매우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주요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다스리다, 다스려지다, 통하다, 손질하다, 수선하다, 처리하다.
2) 결, 도리, 조리, 무늬, 살결, 꾸미다, 장식하다.
3) 옥을 갈다. 바루다, 바르게하다, 재판을 하다, 구별하다.
4) 길, 도(道),
5) 성질, 매개, 행동
6) 의지하다, 관리하다, 깨닫다, 이해하다.

이중에 리의 가장 기초적이고도 핵심적인 뜻은 2번이다. 특히 ‘결’, ‘무늬’라는 뜻이다. 『설문해자주』에서 ‘리(理)’자를 살펴보면 ‘쪼개 나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옥을 가공할 때 그 결을 따라 잘 가공하면 쉽게 그것을 다룰 수 있다고 하였다.
『한비자』(「해로」)에서는 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리는 이미 만들어진 사물의 무늬이며, 도는 만물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다.”

리와 도를 논하면서 모든 만물에 내재해 있는 무늬로서 리를 설명하고 이에 대응하여 만물을 성립하게 하는 것으로서 도(道)를 소개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리는 사물의 개별적인 형체나 성질에 관련된 것을 가리키고, 도는 보편적인 원리나 법칙을 나타냈다.(미조구치, 73)

전한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논어』에는 ‘리(理)’라는 글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유학 경전중에 가장 중요한 『논어』에 리가 나오지 않는 점은 일본의 유학자들이 크게 주목하고 주자의 성리학을 비판하는데 근거로 삼았다.
예를 들면 일본 고학파의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1627년∼1705년)는 이렇게 말했다.

“리(理)와 같은 글자는 원래 죽은 글자다. 이 글자는 옥(玉)의 뜻과 리(里)의 소리가 합쳐진 형성문자로 옥의 무늬를 말한다. 이는 사물의 ‘조리’를 형용하는 것으로 천지가 만물을 화생하는 이치를 묘사할 수 있는 글자가 아니다.”(『어맹자의』)

송대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나 하늘(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리는 상상의 견해일 뿐이다. 천지가 생기기 전과 천지가 시작될 때 누가 그것을 보고, 누가 전했겠는가? 만약에 세상에 어떤 사람이 천지가 개벽되기 전에 태어나 수백억만세를 살아서 눈으로 그것을 직접 보고 후인들에게 전하고 그것을 다시 서로 전하고 외워서 오늘에 이르렀다면 참으로 옳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천지가 개벽되기 전에 태어난 사람도 없고 또 수백억 만세를 산 사람도 없다. 그러니 천지개벽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원칙에 상당히 어긋난다.”(『어맹자의』)

그는 이러한 논리로 송나라 유학자들, 특히 주자를 비판했다. 그리고 송유(宋儒)들이 리를 주로 말하는 것은 노장이나 불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였다.(이기동, 65) 앞의 인용문을 보면 그는 실증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천지가 개벽하기 전에 누가 그것을 보았겠는가 물었다. 초월적인 개념으로서의 리를 어떻게 인간이 경험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이 실존했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이토 진사이의 비판은 일본의 같은 고학파인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년~1728년)로 전해져 고문사학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리는 송나라에서 ‘성즉리(性卽理)’의 사상을 제창한 성리학이 성립되는데 핵심개념으로 수많은 학자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명나라 때 일어난 양명학도 ‘마음이 곧 리이다’라는 ‘심즉리(心卽理)’ 사상을 제창하면서 ‘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600여년간 역시 리는 그 시대 사상계에서 범접할 수 없는 개념으로 유학자들의 깊은 신뢰와 추종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등 고학파의 비판이 있었기는 하지만 정통 주자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적어도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나라마다 시기와 강도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리’라고 하는 철학 개념은 핵심 주류를 차지한 사상 개념으로 동아시아인들의 사유와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주자는 이러한 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그의 제자 진순은 이렇게 정리하였다.

1) 도(道)와 리(理)의 구별
2) 리(理)와 성(性)의 구별
3) 리(理)와 의(義)는 체(體)와 용(用)이다.

위에 소개한 각 주제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도(道)와 리(理)의 구별

(‘도(道)’란 ‘법도’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리 역시 ‘이치’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주자의 의도를 좀 더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법도나 이치로 바꾸지 않고 ‘도’와 ‘리’를 그대로 사용하여 번역해보기로 한다.-필자 주. 이하 ()안의 내용은 모두 필자의 주석임.)

도와 리는 대략 하나의 물건이다.(도와 리가 물체가 아닌데 원문에서 물物자를 써서 지칭한 것은 중국어로서 물物자가 가진 성격 때문이다. 중국어의 ‘물’자는 물체 외에도 ‘내용’이나 ‘실질’ 혹은 ‘일’이나 ‘사정’ 혹은 ‘만사萬事’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누어서 두 글자로 만든 것은 역시 반드시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만약 도와 리가 하나의 뜻으로 완벽하게 일치된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이렇게 두 글자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각기 다른 뜻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른 글자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까지 원문: 道與理大概只是一件物, 然析為二字, 亦須有分別.)

도(道)란 사람이 통행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붙인 글자이다. ‘리’자와 서로 대응시켜 말한다면, 도라는 글자는 비교적 느슨한 편이다. 반면에 ‘리’자는 비교적 절실하다.(혹은 진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에는 분명하여 바꿀 수 없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만고에 통행되는 것은 도이며, 만고에 바꿀 수 없는 것은 리이다.(원문: 道是就人所通行上立字, 與理對說, 則道字較寬. 理字較實, 理有確然不易底意. 故萬古通行者, 道也. 萬古不易者, 理也.)

(주자가 도와 리를 대립시켜 그 뜻을 구분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앞서 『한비자』(「해로」)에서 도와 리를 구분하여 설명했던 것을 기억해보자. 한비자는 ‘리는 이미 만들어진 사물의 무늬이며, 도는 만물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리는 개별 사물과 관련되지만 도는 만물과 관련된다. 리의 의미는 ‘도’보다는 국한적이고, 작은 것이었다. 오직 ‘도道’만이 보편적인 원리나 법칙을 의미했다. 그러나 주자는 리도 도와 같이 만물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나아가 리를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만고에 불변하는 원리理로 까지 평가하여 그 위상을 높였다.)

리란 형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을까? 각 사물에는(여기에서 말하는 사물事物은 일 혹은 사건과 사물을 말한다) 하나의 당연한 준칙이 있다. 이것이 리이다. 칙則이란 준칙, 법칙을 말한다.(준칙準則이란 행위의 규범이나 윤리의 원칙을 말한다.) 여기에는 확정되어 바뀔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원문: 理無形狀, 如何見得. 只是事物上一個當然之則, 便是理. 則是準則、法則,有個確定不易底意.)
모든 일과 사물에는 바로 합당하게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지나침도 없고 미치지 못함도 없다. 그것이 바로 준칙(則)이다. 예를 들면 ‘임금이 된 사람은 인仁에 머문다’고 하는데, 인이란 바로 임금으로서는 당연한 준칙이다.(只是事物上正合當做處便是當然. 即這恰好, 無過些, 亦無不及些, 便是則. 如為君止於仁,止仁便是為君當然之則.)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문다’고 하는데, 경이란 바로 신하로서의 당연한 준칙이다.(여기에서 공경 경敬이란 한자는 ‘공경하다’, ‘훈계하다’, ‘정중하다’, ‘공손하다’, ‘삼가다’, 그리고 사의를 표하는 예禮를 나타내기도 한다.) ‘아버지가 된 자는 자애로움에 머문다’, 그리고 ‘자식은 효도에 머문다’고 하는데, 효도와 자애는 바로 부모와 자식이 행해야 할 당연한 준칙인 것이다.(원문: 為臣止於敬, 止敬便是為臣當然之則. 為父止於慈, 為子止於孝, 孝慈便是父子當然之則.)

또한 ‘발의 거동은 무겁게 한다’고 하는데, 무겁게 한다는 것은 바로 발의 거동으로서는 당연한 준칙이다.(여기에서는 행동거지, 즉 행동하는 일事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또 ‘손의 거동은 공손하게 한다’고 하는데, 공손함이란 손의 거동으로서는 당연한 준칙이다. ‘앉아 있을 때는 시동尸童처럼 한다’는 것은 앉아 있을 때는 당연히 따라야 할 준칙이다. ‘제사 지내듯이 삼가며 선다’는 것은, 서 있을 때의 당연한 준칙이다.(원문: 又如足容重, 重便是足容當然之則;手容恭,恭便是手容當然之則. 如尸便是坐中當然之則,如齊便是立中當然之則.)

옛사람들이 격물(格物, 사물에 다가가) 궁리(窮理, 그 이치를 살핌)한 것은 일과 사물의 당연한 준칙과 법칙을 궁구(窮究,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는 역시 (그 이치를) 잘 살펴서 행동하기에 적합한 것이나 혹은 적절한 것을 찾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古人, 格物窮理,要就事物上窮個當然之則,亦不過只是窮到那合做處、恰好處而已.)

(주자는 도와 리를 구별한다고 이야기를 시작하였으나 이 설명의 중반 이후에는 온통 리에 대한 설명뿐이다. 그만큼 주자로서는 리가 중요한 사상적인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2) 리(理)와 성(性)의 구별

리와 성은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다.(여기에서 성性은 인간의 본성本性을 지칭한다.) 리는 바로 사물에 있는 리를 말한다. 반면에 성(性)이란 나에게 있는 리를 말한다. 사물에 있는 것은 바로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과 사물에 공통으로 공유하는 도리이다. 나에게 있는 것은 바로 리가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획득하여 나에게 있는 것을 말한다.(원문: 理與性字對說,理乃是在物之理,性乃是在我之理. 在物底便是天地人物公共底道理, 在我底乃是此理已具, 得為我所有者.)

(여기에서 주자는 리와 성을 구별한다고 하였으나, 사실상 리와 성은 같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것이 다른 점은 그것이 존재하는 위치뿐이다. 즉 사물과 타인에게 존재하는 것은 리이며, 나에게 존재하는 것은 성性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왜 주자는 타인과 나를 구분하여, 타인에게 존재하는 것은 리, 나에게 존재하는 것은 성性이라고 하였을까? 왜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은 성性이요, 사물에 존재하는 것은 리理라고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을까?
주자는 머리가 매우 명석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부터 내려오는 온갖 사상 서적을 섭렵하여 성리학이라는 철학 체계를 집대성하였다. 하지만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모으려고 노력하였고, 너무 많은 개념을 단순화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욕심 때문에 그는 가끔 논리를 비약시켰고, 가끔은 이렇듯 매끄럽지 못한 설명을 남겼다. 이러한 빈틈은 후세 학자들의 열띤 논쟁거리가 되었다.)

3) 리와 의(義)는 체(體)와 용(用)이다.

리와 의를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리는 체(體, 본체)요. 의(義)는 용(用, 작용)이다. (여기에서는 ‘상대적’이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는 의리義에 비추어보면 본체의 입장이다. 본체體라는 것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의리義에 비추어보면 리가 본체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의는 ‘작용’하는 것이다. 혹은 활용하는 것,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 몸에는 리라는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 이 리를 잘 활용하면 그 결과로서 의리義가 된다는 뜻이다.)
리란 사물에 있는 당연한 법칙 혹은 준칙이다. 의리는 이러한 리를 처리하는 까닭(즉 근거)이다. 그러므로 정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에 있는 것은 리이다. 그런데, 사물을 처리할 때는 의리義를 행한다.(원문: 理與義對說,則理是體,義是用. 理是在物當然之則,義是所以處此理者. 故程子曰, 在物為理,處物為義.)

‘리’는 성리학에서 ‘성즉리(性卽理, 성은 바로 리이다)’라는 대명제로 정리되었다. 주자의 ‘성즉리’ 이론에 대해서 진순은 다음과 같은 자기 스승의 설명을 전하고 있다.

성(性)은 곧 리이다.(이것은 주자학의 대명제다. 인간의 본성은 리, 즉 이치 그것이라는 것이다.-필자 주) 그런데 (인간의 본성을) 왜 ‘리’라고 말하지 않고 ‘성’이라 말했을까? 리란 범칭으로,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과 만물이 공적으로 함께하는 리를 말한다. 성이란 나에게 있는 리이다. 이 리는 하늘에서 받은 것으로 내가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성이라 한다.(원문: 性即理也. 何以不謂之理而謂之性? 蓋理是泛言, 天地間人物公共之理. 性是在我之理. 只這道理受於天而為我所有, 故謂之性.)

(주자는 왜 ‘내가 가진 것’, ‘나에게 있는 리’등의 표현을 썼을까? 그러한 표현 대신에 ‘인간이 가진 것’, ‘인간에게 있는 리’ 등으로 표현했으면 더 명쾌하지 않았을까? 인간에게 있는 ‘리’가 본성性이기 때문이다.

중국어로 ‘인간’은 인(人)이다. ‘인간(人間)’이라는 말은 근대에 만들어진 말로 주자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人)’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 말은 중국에서 타인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알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아(我, 나 혹은 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표현이 여기에서 미묘하게 혼란을 일으켜 타인의 성性은 리라고 부르고 오직 나의 성性만을 성性이라 부르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그러나 주자가 말한 의미는 인간에게 있는 리는 그가 누구든지 ‘본성性’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리가 아니라, 주자의 주장이며 제안이다. 성리학은 이러한 제안, 즉 ‘성은 리다(性卽理)’는 가설을 받아들여야 성립된다.)

성(性)자는 생(生)자 변에다가 심(心)자를 덧붙여 쓴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고 있는 것은 마음 속에 담긴 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성(性)이라 부르는 것이다.(원문: 性字從生從心, 是人生來具是理於心, 方名之曰性.)
성의 큰 조목으로는 단지 인‧의‧예‧지 네 가지가 있을 뿐이다. 하늘이 명한 원(元)을 얻어 나에게 있는 것을 불러 인(仁)이라고 하고, 하늘이 명한 형(亨)을 얻어 나에게 있는 것을 불러 예禮라 하고, 하늘이 명한 이(利)를 얻어 나에게 있는 것을 일컬어 의(義)라 하고, 하늘이 명한 정(貞)을 얻어 나에게 있는 것을 일컬어 지(智)라고 한다.(원문: 共大目只是仁義禮智四者而已. 得天命之元,在我謂之仁, 得天命之亨, 在我謂之禮, 得天命之利, 在我謂之義. 得天命之貞, 在我謂之智.)

(『주역』에 보이는 ‘원형리정元亨利貞’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그런데 주자는 ‘원형리정’을 ‘인의예지’와 대응시켜 설명하고 있다.)

성(性)과 명(命)이란 본래 두 가지가 아니다.(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하늘에 있는 것으로 말하면 이를 명이라 하고,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말하면 이것을 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정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부여한 바를 명이라 하고, 사람이 받은 바를 성이라 한다.’ 라고. 주자는 ’원형리정은 하늘에 있는 도의 강상(綱常, 지켜야할 도리)이며, 인의예지는 인간에게 있는 성(性)의 강상이다(즉 인간에게 있는 본성이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소학』「제사」)라고 하였다.(원문: 性與命本非二物,在天謂之命,在人謂之性. 故程子曰, 天所付為命,人所受為性. 文公曰, 元亨利貞,天道之常. 仁義禮智,人性之綱.)(이러한 주자의 ’성즉리‘ 사상은 성리학 사상의 핵심이 되었으며, 주자학과 양명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사상이 탄생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 기

‘기(氣)’는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생명체가 활동하는 데 필요한 육체적, 정신적 힘
2) 사람에게서 나오는 어떠한 기운
3) 사람이 숨을 쉴 때 나오는 기운

1번의 뜻은 기운(氣運)을 말한다. 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힘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위기 따위로 알 수 있는 어떤 느낌이다. 혹은 만물이 나고 자라는 힘의 근원을 말한다. ‘기가 세다’, ‘기가 죽다’ 등의 말에서 사용하는 기는 2번의 기를 말한다.

이와 같은 ‘기(氣)’의 뜻에는 이기론에서 말하는 물질적인 존재인 ‘기’가 보이지 않는다. 중국 송대에 일어난 주자학, 즉 성리학에서 논의되는 이기론의 ‘기’는 사실상 특이한 ‘기’이다. 중국의 철학사상사에서도 그러한 ‘기’의 의미는 매우 한정적이고 편협하다. ‘기’는 송대 사상가들이 언급하기 이전에 이미 독자적인 뜻을 가지고 오랜 고대시대부터 긴 역사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의미와 뜻을 가지게 되었다. 송대 사상가들은 그러한 ‘기’를 수용하여, ‘리(理)’와 대립시키고 조화시키면서 송대의 신유학인, 성리학 사상을 만들어냈다.
여기서는 기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그것이 고대 때부터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이하 미조구치, 52-66참조)

1) 기(氣)는 선물로 주는 곡식이라는 뜻이었다.

허신의 『설문해자』에 설명된 기의 의미다. ‘기(氣)’는 선물로 주는 곡식 혹은 그 곡식을 손님에게 증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2) 기는 바람(風)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전국시대 말기부터 진한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기는 바람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 바람은 이 세상 사방(四方)의 끝에 바람 신(風神)이 사는 데 그 신이 일으킨 바람을 뜻했다. 사람들은 이 바람이 농작물의 생육과 숙성에 깊이 관련 된다고 믿었다.

3) 하늘의 여섯 기(氣)

『좌전』소공 원년조에 나오는 것으로 육기(六氣)라는 표현이 있다. 여섯 개의 기는 음기(陰氣), 양기(陽氣), 풍기(風氣), 우기(雨氣), 회기(晦氣), 명기(明氣)를 지칭했다. 이 중에 회기(晦氣)는 어두운 기운을 말한다. ‘회(晦)’는 그믐, 어두움, 캄캄함의 뜻이 있다.

4) 생명력을 뜻하는 혈기(血氣)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좌전』, 『논어』 등에 ‘혈기’라는 말이 있다. 『좌전』(소공 10년조)에서는 “혈기가 있는 것은 모두 투쟁심이 있다”는 문장이 있다. 『논어』에는 색욕과도 관련된 표현으로 ‘혈기’가 사용된다.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사용된 표현이다. 『논어』에 등장하는 기식(氣息), 사기(辭氣, 혹은 어기語氣), 식기(食氣) 등도 ‘기(氣)’가 생명력을 의미했음을 보여 준다.

5) 기(氣)는 마음(心)과 대응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국시대 중기에 사용된 기(氣)의 뜻이다. 『맹자』에 나오는 말로 통솔자를 심지(心志), 피통솔자를 기(氣)로 표현한 문장이 있다. 여기에서 기는 신체에 충만한 기이다. 심지와 기가 통솔자와 피통솔자의 의미로 서로 대응한다. 『손자병법』(군쟁편)에서는 전투의 요점으로 장수의 마음(心)과 병졸의 기(氣)가 서로 대응된다. 아울러 마음(心志)은 이지적(理智的) 존재, 기는 비이지적 존재로 표현된다.

6) 하루의 네 가지 기를 나타내는 표현에 사용되었다.

『손자』와 『맹자』에 나오는 표현이다. 하루의 기(氣)는 네 가지가 있는데 조기(朝氣), 주기(晝氣), 모기(暮氣), 야기(夜氣) 등이 있다. 그리고 하루 중에 시간에 갈수록, 즉 조기→주기→모기→야기로 진행될수록 인간의 기는 에너지가 저하된다.

7) 기(氣)는 인체 내부의 구조를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맹자』, 『장자』 등에 표현된 것으로 인체의 중층적 구조를 기(氣) → 심(心 혹은 지志) → 언(言 혹은 이耳)으로 표현하였다. 당시 도가는 기를 더 근원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중시하였다. 『맹자』는 마음(心)을 도덕심의 근거로 생각하였는데 기가 그것을 동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기를 가지고 의(義)와 도(道)를 양육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호연지기(浩然之氣)’라 칭하였다.

8) 기(氣)를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맹자』가 집필된 전국시대 중기에 양기(養氣, 기를 기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호연지기’도 그 일종이다. 맹자는 덕으로 기를 기를 수 있고 좋은 기는 또 덕을 기를 수 있다고 보았다. 『좌전』(소공 9년)에는 음식물의 맛(味)이 기를 돌게 한다고 하였다. 이 시기에 호흡을 동반한 행기법(行氣法)이 언급되었으며, 『장자』에 호흡법과 함께 덕으로 기를 기르는 도인(導引)의 운동법이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기를 조작하는 기공법의 수련이 실천되었다.

9) 추연의 오행설은 덕과 기를 대응시켰다.

추연(鄒衍, 기원전 305~240)의 오행설에 기에 대한 개념이 보인다. 추연은 전국시대의 음양가(陰陽家)로 기존의 오행사상(五行思想)과 음양이원론(陰陽二元論)을 결합하여 ‘음양오행사상’을 구축하였다. 그는 인간의 내부에 잠재하는 오덕(五德)에 대응하여 오행(五行)의 기가 나타나는데, 오행의 기에 의거하여 실천하면 오덕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덕과 기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10) 만물에는 기가 공통의 구성요소로 존재한다.

『순자』(왕제편)에 표현된 말이다. 순자는 “물과 불에는 기가 있다. 식물에는 기와 생명이 있다. 동물에는 기와 생명과 지려(知慮, 지혜와 근심)가 있는데, 인간에게는 생명과 지려 이외에 예의도 있다”고 하였다. 그는 기(氣)가 만물 모두에 존재하는 구성요소로 보았다. 즉 만물은 기가 지탱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1)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기(氣)뿐이다.

『장자』(지북유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이 나올 즈음에 기의 내용이 분화하였다. 종래의 기에 서열을 붙이고 새로운 기를 창출하는 등 변화가 있었다. 『관자』‧『여씨춘추』 등에 보통의 기와는 다른 우수한 작용을 하는 정기(精氣)가 등장한다. 또 세계의 다양성은 기의 종류나 성질 그리고 차원 등의 차이에 의해서 설명되었다.

12) 기(氣)일원론의 등장

전국시대 말엽 이후에 존재론과 생성론이 출현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 『역경』(「계사전」상편)의 태극론이 있다. 태극(太極)→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의 구도이다. 여기에서 양의(兩儀)는 음양(陰陽)이며, 음양의 근원은 일기(一氣)라고 하였다. 또 이것을 우주의 근원이 되는 원기(元氣)라는 주장이 나왔다. 태극은 바로 원기를 뜻한다고 하여 ‘원기→음양→사시(四時의 氣)→만물’이라는 기일원론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기 일원론은 도가에게 전승되었다. 도가는 근원적인 실재와 이법(理法)으로서의 도(道)에 관심을 갖고 그 도와 현실 세계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기(氣)를 주목하였다. 그들은 기를 매개로 이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주의 시작과 만물의 생성을 기로 설명하는 우주생성론적인 기론이 탄생하였고, 인간의 생사를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 의한 것이라 보고 기를 길러서 생명을 온전히 할 수 있다고 하는 양생론적인 기론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나중에 송나라 시대 유학자들의 이기론(理氣論)으로 계승되었다(미조구치, 57)

‘기’의 개념 측면에서 보면 송대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 성립에는 5단계의 사상적 모색이 있었다.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미조구치, 63-67 참조)

1단계: 당대 불교의 사상적 모색

중국의 전통적인 본체론이나 생성론의 궁극적인 실체인 허무(虛無)나 원기(元氣)를 배척하고 불교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그것은 ‘불멸(不滅)의 진심(眞心)’과 생멸(生滅)의 망상(妄想)이 화합해서 형성된 아뢰야식(阿賴耶識) 인식론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원기(元氣)’는 인식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고 불교적인 존재론으로 대체하였다.

2단계: 도교의 사상적 모색

상청파 오균(吳筠)의 『현강론(玄綱論)』, 『신선가학론(神仙可學論)』 등에 보인다. ‘허(虛)-신(神)-기(氣)-형(形, 사람)’이라는 생성론을 제기하면서 그것을 ‘형(形)-기(氣)-신(神)-도(道, 신선)’로 거슬러 올라가는 실천론을 모색하였다.

3단계: 주돈이의 모색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새로운 모색을 제안했다. 그는 『역경』을 기본으로 삼고, 『노자』의 무극(無極)을 더하여 기의 생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무극(無極) → 태극(太極) → 음양(陰陽) → 오행(五行) → 만물(萬物)

이 과정 안에 그는 개개인이 실천해야 할 유교 도덕인 ‘인의중정(仁義中正)’을 배치하였다. 또한 실천 원리로서 ‘주정(主靜)’을 제시하였다. 각기 독립된 개념들이 『태극도설』안에서 하나의 체계적인 사상으로 정리된 것이다.

4단계: 장재의 모색

‘태극즉기론(太極卽氣論)’을 제시하여 도교의 허‧무의 생성론과 불교의 식(識)의 존재론을 비판했다. 그는 이 세계는 기가 모이고 흩어짐에 의해서 구성된다고 보았다. 세계 내의 존재를 태허(太虛)와 만물로 나누고 태허는 기 본래의 존재방식이 그대로 나타나는 상태이며, 만물은 엉키고 정체되어 기가 열화(劣化)된 상태라고 하였다. 본래의 성은 ‘천지의 성’, 열화된 만물의 성은 ‘기질의 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수양을 통해서 기질을 변화시켜 본래의 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5단계: 주희의 모색

남송시대에 산 주희, 즉 주자는 주돈이의 사상을 수용하고, 정이의 리 사상, 그리고 장재의 기 사상을 계승하여 성리학의 독특한 존재론을 구축하였다. 그는 이 세상이 ‘일기(一氣)-음양-오행’이라는 중층적이며, 동시 병행적으로 전개되는 기의 취산(聚散, 모이고 흩어짐, 혹은 집합과 해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운동 변화에는 일정한 항상성(恒常性)과 법칙성이 관찰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항상성이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성질’ 혹은 ‘여러 가지 조건이 바뀌어도 항상 같게 현상’을 말한다.
이 항상성은 리라는 개념으로 실체화, 구체화하였다. 특히 그는 리를 원래 무질서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는 기의 운동을 올바르게 규제하는 하나의 실재로 파악하였다. 아울러 다양한 사물에 내재하는 개별적인 리를 인정하고, 기의 존재란 하나의 리, 즉 태극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진 상태(分相)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사상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리가 먼저 존재하고 기가 그 뒤에 생겨난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의 본질로서 마음에 설정된 성(性)에 대해서는 ‘성즉리(性卽理, 성은 바로 리이다)’의 입장을 위하여 모든 사람은 리를 본성을 갖추고 있다(본연의 성)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심신(心身)을 구성하는 기와 질(형태를 지닌 기)에 맑고 탁함, 깊고 얕음의 차이기 있기 때문에 선악이 생긴다(기질의 성)고 하였다. 하지만 인간은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통해서 이 기질을 변화시켜 리를 완전하게 발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