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후의 조정 분위기와 효종의 사망

10. 이후의 조정 분위기와 효종의 사망

 

조익의 문묘 종사 건의에 대한 효종의 대응은 지나친 면이 있었다. 조정에서 주요 관직을 장악한 서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효종은 이미 일정한 선을 넘고 있었다. 좌의정 조익에 대한 조심스럽지 못한 발언이 그렇고,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문에 대한 대응도 그렇고,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는 상소문에 대한 임금의 이해할 수 없는 비답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남인 유생들이 율곡과 성혼에 대해서 왜곡과 거짓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을 모른 척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두둔하는 것이 서인 관리들과 유생들은 가장 참을 수 없었다.
임금에 즉위한 뒤부터 항상 북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효종의 입장에서도 서인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째 아들인 자신이 인조 임금의 뒤를 잇는 것을 그들이 반대했던 것도 그렇고, 기회만 되면 소현세자의 셋째아들에 대한 언급이나, 소현세자 부인인 강빈의 복권문제를 거론한 것도 그랬다. 그들은 임금의 왕위 계승에 대한 약점을 거론함으로써 자기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자신들의 주장을 더 강하게 내세우는 발판으로 삼는 것 같았다. 영의정까지 지낸 김자점은 임금이 비밀리에 추진하는 불벌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까지 하였다.
서인들은 또 현실에만 안주하고 이미 몰락한 명나라만 찾고 있는 것도 효종으로서는 불만이었다. 이 세상이 넓은 줄을 모른다. 오직 성리학과 수양과 도덕, 그리고 주자만을 내세우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의 관리 누구 하나 머리를 맞대고 천하대세를 논할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불만인 것은 그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율곡 이이의 사상이 임금의 권한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한데 그들은 임금을 상징하는 ‘리(理)’가 독자적으로 어떤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편다. 모든 것은 ‘기(氣)’로 상징되는 신하들과 관리들이 중심이다. 임금은 그들의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하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의 사상은 사실상 ‘신하(氣)들이 행동(發)을 하면 임금(理)은 거기에 편승(乘)할 뿐이다’는 것을 뜻했다. 그들은 그러한 임금을 원하고 있었다.
효종 2년 이후 『효종실록』에 보이는 율곡과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효종 2년(1651) 5월 25일: 예조가 부묘할 때 교서를 반포하자고 청함
2) 효종 2년(1651) 6월 6일: 민정중이 왕도·언로 확대 등에 대해 아룀
3) 효종 2년(1651) 7월 20일: 대동법 시행·금법을 어긴 대신 등에 대해 논함
4) 효종 3년(1652) 3월 23일: 구인후·오준·임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5) 효종 3년(1652) 11월 17일: 홍무적·최욱·윤겸 등이 인피를 청함
6) 효종 3년(1652) 11월 23일: 형조에서 처형할 자들의 사형을 면하게 하다
7) 효종 4년(1653) 2월 9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꿴 일을 대신들과 논하다
8) 효종 4년(1653) 2월 13일: 재변을 해소시킬 방도를 구하게하다
9) 효종 4년(1653) 8월 8일: 사국에 이기발을 논핵한 대관을 조사하라 하다
10) 효종 6년(1655) 3월 10일: 좌의정 조익의 졸기
11) 효종 7년(1656) 1월 26일: 민정중 등이 재변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하다
12) 효종 8년(1657) 10월 19일: 강관을 불러 심도(心圖)에 대해 논하다
13) 효종 8년(1657) 10월 20일: 주강에서 성인의 심법(心法) 등에 대해 논하다
14) 효종 8년(1657) 11월 12일: 송준길이 신하를 의심하지 말 것을 아뢰다
15) 효종 8년(1657) 12월 4일: 송준길이 대관에게 너그럽게 대할 것을 청하다
16) 효종 9년(1658) 9월 9일: 송시열과 송준길 등을 인견하고 시사를 논하다
17) 효종 9년(1658) 12월 17일: 『심경』을 강하고 시사에 대해 의논하다
18) 효종 10년(1659) 2월 10일: 김속 등이 이이의 서원에 액호의 하사를 청하다
19) 효종 10년(1659) 윤3월 28일: 김장생·이이 등의 서원에 액호를 내리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효종 2년 이후 부터는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 건의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리들과 유생들은 이제 효종을 상대로 그러한 건의가 의미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서인 측 관리들과 효종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고 갈등이 쌓이게 되었다.
서인 측 관리들과 유생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효종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임금’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청나라를 일으킨 홍타이지, 즉 청태종의 모습이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군사를 이끌고 대륙 정벌을 나서는 그런 군왕의 모습이 효종이 흠모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그런 덕치의 군주가 아니라 오랑캐, 야만족의 추장과도 같은 패권을 휘두르는 군주의 모습이었다.
1655년(효종 6년)경부터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등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냈다. 기존의 서인 관료들과는 이미 많은 것이 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효종의 스승이었으며, 송준길은 송시열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이들도 율곡과 성혼을 스승으로 삼는 서인파였지만 당시 관직에 있던 서인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산림세력이었다. 이들은 산당이라고 불렸다. 효종은 이들과 기존 관리들 사이를 조종해나가면서 국내 정치의 안정과 함께 북벌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효종 8년경부터 이들 산당계 인사들이 정국 운영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때 정국을 주도한 인물이 산당의 영수 송시열이었다. 이 당시 『효종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송시열과 송준길 관련 기록은 효종이 이들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효종은 율곡의 문묘 종사는 거부했지만 서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율곡에 대한 존중의 의사 표현은 산발적이지만 표했다. 효종 2년 이후에 『효종실록』 등장하는 율곡에 관한 기록은 대개는 그러한 내용이다. 송준길과 송시열이 가끔 율곡에 관해서 논한 내용도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았다. 즉 효종이 싫어하는 문묘 종사 이야기는 피하고 일반적인 제도나 조치를 이야기할 때만 지난날 율곡이 제안했거나 시행했던 사례를 예로 드는 정도였다. 효종이 이에 맞장구를 치는 모습은 문묘종사 문제로 서운하게 생각하는 서인 유학자들의 서운한 마음을 다독여 준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다.
효종은 1659년(효종10년)에 이조판서의 직책에 있는 송시열과 북벌계획 논의를 위해 독대를 하기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송시열은 국왕의 수양과 양민(養民)을 강조하고, 북벌의 원칙론을 주장하였으나 효종은 구체적으로 군대양성과 적극적인 북벌 준비를 주장하였다.
이해에 효종은 율곡을 모시는 서원에 액호를 하사하는 등 마지막 호의를 베풀었다. 어떻게 보면 효종으로서는 율곡은 학문적으로 자기 스승이기도 하였다. 스승인 송시열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율곡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의 제자이며,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에게도 학문을 배운 바 있었다. 효종의 액호 하사는 인간적으로 율곡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이해 5월 효종은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다 갑자기 사망하였다. 향년 4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