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난과 우애

형제의 난과 우애

왕자의 난과 이숙번의 예견

오륜은 인간관계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종류로서 어버이와 자식, 임금과 신하, 어른과 아이, 부부, 친구 사이의 윤리를 규정하는데, 여기에 이상하게 형제 사이를 규정하는 윤리가 없다고 오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소학』을 펼쳐보면 금방 풀린다. 바로 장유유서(長幼有序) 속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의 윤리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혹자는 형제의 윤리가 어째서 장유유서 속에 들어 있는지 의아해할 수 있겠다. 이는 옛날의 형편을 알아야 풀리는 문제이다. 곧 다산(多産)을 중요시했고, 오늘날보다 혼인 시기가 상대적으로 빨랐으며 또 피임 기술이 없었던 옛날에는 자녀를 많이 낳았다. 가까이는 60~70년 전만 해도 형제자매가 적게는 4~5명, 많게는 9~10명에 이른다. 이렇게 되다 보니 장남 또는 장녀와 막내의 나이 차이는 20살이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가운데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이 부모처럼 막내를 키우는 집안도 있었다. 더구나 일부다처를 허용했으므로 형제의 나이 차이는 더 벌어진다.
이런 배경에서 형은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형을 공경해야 하는 형우제공(兄友弟恭)이라는 우애(友愛)의 윤리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형제의 나이 차이가 커서 그 윤리가 자연히 장유유서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해서 효도와 함께 효제(孝悌)라는 말도 등장하였다.
이렇게 우애를 강조하는 일이 사대부들의 삶 가운데 하나였지만, 조선 왕가는 개국하면서부터 위신에 손상을 가져왔다. 바로 두 차례나 벌어진 속칭 ‘왕자의 난’이라는 사건 때문이다. 모두 왕위 계승을 두고 형제들 사이에 벌어진 살육전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는 이런 고사가 있다.
“이숙번(李叔蕃)은 수양대군이 어릴 적에 그를 보고 말하기를, ‘어린애의 눈동자가 너무도 그의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모쪼록 형제끼리 우애하고 너의 할아버지를 본받지 말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할아버지는 태종이고 숙번은 그의 수하다. 하지만 이런 비극이 태종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세조도 당사자이지만, 조선왕조 역사에서 왕위 계승을 두고 보이지 않게 형제끼리 때로는 부자 사이에도 벌어지는 일이었다. 곧 권력 앞에 우애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는 현대에도 벌어지는 일이다. 재벌 집안의 유산상속을 두고 현대판 왕자의 난으로 반복되었다. 보통의 집안에서도 부모의 유산 분배를 두고 서로 싸워 형제끼리 남처럼 지내는 분들도 적지 않다.
상황이 이런데 유가(儒家)들은 권력투쟁이나 유산 분배를 앞에 두고 우애를 강조하면 잘 해결될 것이라고 정말로 믿었을까? 오늘날 우애의 필요성과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조상들의 우애 사례를 살펴보고,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자.

설포와 목융의 우애

형제끼리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말을 사람들이 순순히 따랐을까? 막연하고 추상적인 규범보다는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일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렇다. 그래서 『소학』에 그 몇 가지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효자로 이름난 설포(薛包)의 우애가 있다.
“설포가 부모의 상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아 아우의 아들이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하였다. 설포는 말리지 못하여 재산을 반씩 나누게 되었다. 노비 가운데 늙은 자를 두고 조카에게 ‘나와 함께 일한 지 오래되었으니 너는 부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농토와 농막은 거칠고 기울어진 것을 차지하면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관리하던 것이니 마음에 미련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낡고 깨진 물건을 차지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입고 먹던 것이니 몸과 입에 편안하다.’라고 하였다. 아우의 아들이 여러 번 그 재산을 없앴는데, 그때마다 다시 도와주었다.”
설포의 아우가 일찍 죽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우를 생각해서 조카에게 재산을 양보하고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또 하나 이야기는 목융(繆肜)의 우애이다.
“한나라 사람 목융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사형제가 생업을 함께 하였다. 자라서 각각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동생의 아내들이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요구하고, 또 자주 다투는 말이 있게 되었다. 목융은 분하고 한탄하는 마음을 깊이 품고, 방문을 닫고 스스로 자기 몸에 매질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융아, 네가 몸을 닦고 행동을 삼가서 성인의 법도를 배운 것은 장차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것인데, 어찌하여 자기 집안조차 바르게 하지 못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아우들과 그의 아내들이 그 말을 듣고 모두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여, 마침내 집안이 화목하게 되었다.”
이 역시 재산 문제로 생긴 갈등을 맏아들인 목융이 스스로 반성하면서 우애를 회복한 고사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라면 이 고사들을 익히 알았으리라. 어떤 사례가 있는지 알아보자.

동생들에게 양보한 재산

『소학』으로 공부의 기초를 다지고, 성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던 조선의 선비들은 대체로 우애를 잘 지켰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사례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고사이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등장한다.
“정여창이 형제자매와 더불어 노비와 전토를 나눌 때, 먼저 늙고 약한 자와 메마른 것을 차지하였지만, 한 매부가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자 문득 자기 것을 주었다. 선생의 마음 씀씀이는 남을 속이지 않았는데, 일찍이 여러 딸에게, ‘뒷날 시집가면 동서들을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야 하며, 오직 형제의 환심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바로 앞의 ‘설포’ 고사의 재현이다. 이런 사례는 또 있는데, 같은 책 속의 내용이다.
“최숙함(崔叔咸)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논밭과 남녀 종들을 분배하고자 하니 숙함은 메마른 땅과 노쇠한 종들만 차지하고, 좋은 것은 두 형제에게 주었다. 지방 사람들이 칭송해서 말하기를, ‘유금류와 설포 같은 사람은 천년을 우러러 존경할 만하거늘, 하물며 숙함은 혼자서 두 사람의 좋은 점을 겸하고 있어서랴!’라고 했다.”
‘유금류’는 『소학』에서 어버이의 대변을 맛볼 정도로 이름난 효자이고, ‘설포’는 앞서 소개했다. 적어도 사대부들은 그들의 사례를 알았으므로 그처럼 아니 그들보다 더 철저히 우애를 실천하려고 했을 것이다. 심지어 형제가 한두 명도 아니고 10명인 경우도 있었다. 이륙(李陸, 1438~1498)의 『청파극담(靑坡劇談)』에 보인다.
“처사(處士) 성담수(成聃壽)는 형제자매가 10명이나 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자 삼년상을 마치고 형제들을 모이게 한 다음 재산을 분배하였다. 물건 가운데 괜찮은 것은 곧장 ‘아무에게 주어라.’라고 말하고, 노비 가운데 착실한 자가 있으면 곧장 ‘아무에게 주라.’라고 말했다. 부서지고 변변치 못한 물건을 보게 되면, ‘이것은 부모님의 뜻이니 내가 가져야겠다.’라고 하였다. 누이동생에게 집이 없어서 본집을 주고자 했는데, 여러 아우가 말리면서, ‘부모님이 계시던 집은 장자에게 전해져야 합니다.’라고 하니, 담수가 말하기를, ‘다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 나만 홀로 집을 가질 수는 없다.’라고 하고, 곧 가지고 있던 무명을 내어다 팔아 누이동생의 집을 사는 자본으로 주니, 동생 인수도 가재를 팔아 도와주었다. 두 형이 마음을 모아 그 철없고 어린 동생들을 차례로 장가들이고 출가시키니, 온 집안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참으로 대단한 우애가 아닌가? 이런 일이 아마 중국에 있었더라면 크게 회자 되었으리라. 하지만 언제나 미담 사례만 있지 않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동원공(東原公) 함우치(咸禹治)가 일찍이 전라도 감사가 되었는데, 어떤 양반집 형제가 서로 큰 가마솥을 가지려고 관청에 소송하였다. 함공이 노해서 아전에게 명하여 크고 작은 두 가마솥을 급히 가져오게 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깨뜨려서 골고루 나누어 주겠다.’라고 하니, 두 형제가 복종하고 분쟁을 마침내 중지하였다.”
이 판결은 솔로몬의 지혜를 방불케 한다. 솥단지를 두고 다툰 못난 형제도 있었다는 사례이다. 어찌 모든 사람을 성현의 가르침대로 교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어느 시대든 그늘은 늘 있는 법이다.

스승처럼 친구처럼 지낸 우애

우애의 사례는 굳이 유산 분배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형을 스승처럼 섬긴 우애도 있다. 세인들이 ‘토정비결’의 저자로 믿고 있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고사이다. 이이(李珥,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보인다.
“이지함은 천성적으로 효도하고 우애가 있어 형제간에 재물을 함께 나누어 쓰고, 사사로이 감추는 것이 없었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겨 남의 급한 사정을 잘 도왔다. 그의 형 이지번(李之蕃)이 세상을 떠나자 이지함이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애통히 여기고 기년복(期年服: 일 년 동안 입는 상복)을 입은 뒤에도 또 심상(心喪; 상복을 입지는 않으나 마음으로 슬퍼함)을 지냈다. 이를 보고 누가 예법이 지나치다고 의심하자, 이지함이 말하기를, ‘형은 나의 스승이니, 내가 스승을 위하여 심상 3년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만이 아니다 친구처럼 지낸 우애도 있다. 이기(李墍, 1522~1600)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근세 유명한 재상 가운데 우애로 칭찬받는 이는 오직 재상 안현(安玹)과 이준경(李浚慶) 두 집뿐이다. 이준경은 사랑을 중시하여 형 판서 이윤경(李潤慶)과 친구처럼 지내며 우애하였다. 앉으면 무릎을 맞대고, 누우면 베개를 가지런하게 하였다. 말하며 웃을 적에는 ‘너’ ‘나’ 하며 장난치기도 하였다. 윤경이 죽자 준경은 제복(制服)을 입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슬퍼하였다.”
또 우애를 해치지 않도록 지혜롭게 산 형제도 있다. 윤기헌(尹耆獻, 1548~?)의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 등장하는 김안국(金安國)과 김정국(金正國)의 사례이다.
“김안국(金安國)과 김정국(金正國) 형제는 소인배에게 배척을 받아 시골에 살고 있었다. 서로 늘 왕래하며 형제의 집에 유숙하였다. 어떤 때로는 한 달 동안 묵었다. 작별할 때 안국이 정국에게 말하기를, ‘내 이미 연로하고 그대 또한 병이 많은데, 어찌 오래 살기를 바라겠는가? 서로 만나면 기쁘고 헤어지면 슬픈데, 함께 살며 여생을 마칠 수 없겠는가?’라고 하니, 정국이 말하기를, ‘저의 뜻은 좀 다릅니다. 형제가 같이 사는 일은 참으로 기쁜 일이나, 양가의 하인들 사이에 다른 말이 없을 수 없고, 부인들은 성질이 편벽하여 오해하기는 쉽고 풀리기는 어려우니, 만약에 반목이 생긴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서로 각각 따로 사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 생각나고, 서로 만나면 즐거우니 우애의 정은 날로 더욱 두터워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정국의 말에 이치가 있다고 하였다.”
김안국과 김정국 형제는 지방관으로 있을 때 『소학』의 보급과 교화에 힘쓴 분이다. 김정국의 말은 현실적으로 매우 합당하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 우애가 있더라도 하인들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고, 또 부인들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실상의 남이니 형제만큼 우애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 점을 간파한 정국의 판단은 매우 지혜롭다고 하겠다.

우리에게 우애란 무엇일까?

『해동잡록』에 앞의 김정국의 말이 실려 있다. “골육지친(骨肉之親)에 형제만 한 것이 없는데, 무지한 사람들은 조그마한 이해(利害)를 다투다가 마침내는 원수가 되니, 금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서로 싸우고 화목하지 못한 자는 이웃이 다 함께 배척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같은 책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에 대해서, “선생은 동생과 우애가 심히 돈독하여, ‘한 몸의 지체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고, 같이 한 담 안에 살면서 출입하는 데 두 문이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옛 선인들은 우애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당시의 문화 속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그것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가치 가운데 하나였기에 국가와 사대부들이 강조하였을 것이다. 특히 유학의 큰 범주로 본다면 우애는 『대학』 팔조목의 제가(齊家)에 해당하는 문제로서 사대부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애는 어떠한가? 기성세대의 양상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우애 있고 화목하게 잘 지내는가 하면, 그럭저럭 티격태격하면서 지내는 집안도 있고, 유산 싸움으로 서로 남남이 되어 원수처럼 지내는 집안도 있다. 사람들 가운데는 유산이 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 형제 사이에 훨씬 우애가 있다고 수군댄다. 우애가 깨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재산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소학』에서 그토록 강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과거처럼 형제가 많지도 않아서 한 가구당 두어 명 정도, 그나마 외톨이이거나 없는 집도 있으니, 우애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을 날도 멀지 않았다. 우애만이 아니라 친척을 일컫는 용어, 가령 고모, 이모, 삼촌 따위도 부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그 우애의 정신이 다른 식으로 변형되어 나타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바로 앞서 잠깐 언급한 장유유서이다. 이걸 말하면 젊은이들이 펄쩍 뛰겠지만, 이 덕목을 굳이 나이에 따른 차별이나 구별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좀 더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하면 ‘어른다운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재해석해 보면 어떨지 제안해 본다. 나이를 먹어도 이른바 ‘나이값’ 못하는 사람은 하찮은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나이가 어려도 판단과 행동이 어른 못지않게 훌륭하다면 그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어쩔 수 없이 사회질서 유지 차원에서 나이에 따라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질서 유지를 넘어서 고급문화의 정착을 위해 필요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선진국에 걸맞는 선진문화로 뒷받침해야 하지 않을까?